2015/12/16

 

 

그 당시 우리는 아무도 타임머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시간 여행자는 너무 영리해서 신용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우리는 그의 모든 면을 보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투명할 만큼 솔직했지만, 그 솔직함 뒤에는 어떤 신비로운 비밀이나 창의력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우리는 항상 의심했다. 필비가 타임머신의 모형을 보여 주고 시간 여행자와 같은 말로 그것을 설명했다면, 그렇게까지 의심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필비의 동기를 쉽게 간파했을 테니까. 푸주한이라도 필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 여행자는 꽤나 변덕스러운 기질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보다 덜 영리한 사람이 하면 명성을 가져다주었을 일도 시간 여행자가 하면 꼭 속임수처럼 보였다. 일을 너무 쉽게 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진지한 사람들은 그의 태도를 확신할 수 없었다.(29p)

 

 

나는 역시 서양인입니다.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몇 년 동안 연구할 수는 있지만, 24시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보내는 것은 지옥의 고통이니까요.

  나는 잠시 후 일어나서, 덤불을 뚫고 다시 언덕 쪽으로 정처 없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인내심을 가져.> 나는 나 자신을 타일렀습니다. <타임머신을 되찾고 싶으면 저 스핑크스를 그냥 내버려 둬. 놈들이 타임머신을 빼앗을 작정이라면, 네가 청동 판을 부수어 버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리고 놈들이 타임머신을 빼앗을 작정이 아니라면 곧 되찾게 되겠지. 네가 돌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게 되면 당장 되찾을 수 있을 거야. 그 모든 미지의 것들에 둘러싸여 그런 수수께끼 앞에 앉아 있어도 가망이 없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바로 편집광이야. 이 세계를 직시해. 이 세계의 방식을 배우고, 이 세계를 관찰해. 그 의미를 너무 서둘러 추측하지 않도록 조심해. 그러면 결국에는 그 모든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될 거야.>

  그러자 갑자기 이 상황이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미래에 들어오기 위해 몇 년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미래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겁니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인간이 고안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가장 절망적인 덫을 만들어 거기에 스스로 걸려든 것입니다. 나 자신이 덫에 희생되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나는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70p)

 

 

 

허버트 조지 웰스, <타임머신>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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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읽음.

 

 

김현, <행복한 책 읽기> ,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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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3/15

 

뭘 받고 싶냐고 물으면 난 그 즉시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은 기분이 되어버립니다.(20p)

 

 

존경받는다는 관념 또한 나를 상당히 두렵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인간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자에게 간파되어, 산산조각나고, 죽기보다 더한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 ‘존경받는다’는 상태에 대해 내가 내린 정의입니다. 인간을 속이면서 ‘존경’받아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도 마침내 그의 입을 통해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그 순간 타오르는 인간들의 분노, 복수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요.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모두 곤두서는 느낌입니다.(23p)

 

 

또 어느 가을 밤에는,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데 아네사가 새처럼 소리도 없이 어느 틈엔가 내 방으로 들어와, 갑자기 이불 위에 엎어져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우가 날 도와줘야 해. 그럴 거지. 같이 이 집을 나가자. 그러는 게 좋아. 도와줘, 날 좀 도와줘” 하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쏟아내더니 다시 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앞에서 여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네사의 격한 말에 놀라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진부하고 아무 내용도 없는 푸념에 김이 새버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감을 까서 한 쪽을 잘라 아네사에게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아네사는 훌쩍거리면서도, 그 감을 먹고 “뭐 재밌는 책 좀 없니? 좀 빌려줄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난 소세키가 쓴「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책꽂이에서 꺼내주었습니다.

“잘 먹었어.”

아네사는 쑥스러운 듯 살짝 웃어 보이며 방에서 나갔는데, 내게 아네사뿐만 아니라 여자라는 존재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생각하는 것은, 마치 지렁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골치 아파서, 섬뜩한 느낌마저 듭니다. 다만 여자가 그렇게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에 뭔가 달콤한 것을 주면, 그걸 먹고 기분을 좀 가라앉히더라 하는 것만큼은 어릴 때부터 쌓아온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37p)

 

 

아아, 인간은 서로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인 양 평생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상대가 죽으면 눈물 흘리며 조문 따위를 읊어대는 것 아닐까요.(93p)

 

 

아니, 난 결코 돌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아, 광인은 대개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지요.(133p)

 

 

남들에게 존경 받으려고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하지만 그런 착한 사람들은 나와 놀아주지 않지.


내가 조숙한 척 행동하면, 사람들은 날 조숙하다고 쑤군덕댄다. 내가 게으른 척 행동하면, 사람들은 날 게으르다고 쑤군덕댄다.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척하면, 사람들은 날, 글 한 줄 못 쓰는 놈이라 쑤군덕댄다. 내가 거짓말쟁이인 척하면, 사람들은 날 거짓말쟁이라 쑤군덕댄다. 내가 돈푼깨나 있는 척 행동하면, 사람들은 날 부자라고 쑤군덕댄다. 내가 냉담을 가장해 보이면, 사람들은 날 냉담한 놈이라 쑤군덕댄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괴로워서 나도 몰래 신음했을 때, 사람들은 날 괴로운 척한다고 쑤군덕댔다.

모든 게, 어긋나 있어.


결국, 자살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나.

이리 괴로워도, 기껏 내 손으로 목숨을 끊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생각하니, 통곡으로 밤이 샌다.(206p)

 

 

 

ㅡ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사양> 中, 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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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5

 

누군가의 추천이나 인용으로부터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이 책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추천한 5권의 소설 중 한 권이다. 이제껏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음에도 나만의 취향이든가, 기호라든가, 선호라는 것을 형성하지 못하고 남에게 기댄다. 이것에 대해 수차례 생각을 해봤는데 확실히 어떤 점 때문이라고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억지로 이유를 끼워 맞춰보면 첫째, 시간을 아끼려는 것이다. 일반대중이 아닌 특정 개인들의 영향을 받는지라 적절한 예가 아닐 수도 있지만, 가령 M. 나이트 샤말란의 라스트 에어벤더, 이재용의 다세포 소녀, 맨데이트,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을 그렇게나 희대의 망작이라고 얘기를 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 틀림없이 구릴 게 뻔한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고 특별한 팬이 아니라면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라는 말이다. 반대로 신뢰할만한 사람들이 입을 모아 상찬하는 작품을 모른 척 하기는 쉽지 않다. 둘째,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너무 많다. 정보가 풍부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정보 대홍수 시대의 독서법이라고 자위할 수 있을까. , 음악, 영화 모두 장르라는 것이 있고 각 장르마다 새로운 작품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이중에 옥석을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평론가, 영화평론가, 음악평론가 등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들은 직업적으로 각 분야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접하고 그 중에서 자신만의 기준으로 선별하여 평하고 대중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이들을 활용하여 선택의 폭을 좁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 영화, 소설, 음악 등을 즐기면서 의외성이나 우연성이라는 요소가 개입되기는 어렵다. 최근 들어 우연히 어떤 영화를 보고 좋았다고 한 적은 거의 없다. 아니 아예 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우연히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경우가 글자 그대로 아예 없기 때문이다. 의외성과 우연성을 느끼려면 시간을 들이고 품을 들이는 게 요구되는데,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그런 것 까지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므로 이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는 미학적으로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한 영화, 소설에서는 장황한 묘사보다는 단정하고도 정제된 단문을 선호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장황하고 쓸데없는 묘사로 가득한 책이 그리웠다. 단순히 반작용 때문일까. 단문으로 유명한 레이먼드 카버, 헤밍웨이, 제임스 설터의 책을 읽을 때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왜 단문의 글이 더 읽어내기 힘든가. 단문으로 이루어진 글은 일반적인 글에 비해 꾹꾹 눌러 썼을 경향이 높고 더 많은 해석의 여지를 개입시키며 더 많은 생각을 요구한다. 시를 읽어내는 일이 괜히 어려운 게 아니다. 다시 말해 친절하지 않은 책이다. 단순히 활자를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을 독서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나를 포함한 게으른 독자들은 단문을 읽는데 금방 지치는 것이다. 처음엔 여백도 많아 보이고 몇 글자 없어 보여 호기롭게 시작하나 문장이 짧다고 그 문장을 받아들이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짧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는다. 책을 읽는 중간마다 덮어두고 평소에는 결코 하지 않을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들을 곱씹어보며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런 이유로 금방 피곤해지며 술술 읽히는 소설을 읽고자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의 좋은 점이라면 글의 의미와 행간을 읽어내려는 성실한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만족감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좋지 않은 점도 있다. 팔리기가 쉽지 않다. 시가 팔리지 않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팔리기 위해서는 쉬워야 한다. 사람들은 그냥 한눈에 봐도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려주길 원한다. 밥상을 차려 주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밥상을 차려주고 떠먹여주길 원한다. 아니 밥이 제대로 소화가 되는지 확인해주는 것까지를 원한다. 단적인 예로 한국영화가 구려지는 이유는 난해함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설명적인 덧붙임, 열심히 쌓아놓은 것들을 모조리 무의미하게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해피엔딩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사람들에게 먹힌다. 티비의 세례나 명사의 추천, 문학상 등을 받지 않았다면 이 책의 운명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무얼 말하는가. 겉으로는 사랑 이야기를 한다지만 사랑을 나누는 두 인물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래된 전자상가에서 살고 있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다. 다양한 측면으로 읽어낼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언어에 대한 작가의 예민성이다. 흔히 사람들이 이라는 단어를 물질적인 의미로만 사용하는데 우리 모두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지고 있는 이라는 윤리적인 의미를 끌어낸다. 또 있다. ‘가마’, ‘슬럼이라는 단어를 통해 개별적 사례들을(가마라는 말로 통칭하지만 사람들의 가마 모양은 동일하지 않다. 슬럼은 빈민이 밀집하고 주거 및 생활 환경이 극히 불량한 지구를 말하나 모든 슬럼가가 동일한 형태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단일한 의미로 종속시켜 버리는 것의 불합리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나 대상의 특수성만을 인정하고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 소통할 수 있는 단어를 만들어낼 수 없다. 범주화라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대화라는 것을 할 수가 없다. 내가 말하는 의미와 네가 말하는 의미가 동일하지 않을 테니. 누구보다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직업작가가 나조차도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작가는 하나의 단어를 사전적 의미로 간단하게 해석하고 치우는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해보자는 입장으로 보인다.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견딜 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그림자라는 건 일어서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그렇잖아? 물론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46p)

 

기술에 비해 수리비는 저렴하게 받는 편이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답답하게 여겨질 만큼 느긋한 면이 있어서 까다롭거나 무례한 손님을 만나면 종종 다툼이 벌어졌다. 여 씨 아저씨는 그런 손님들의 물건 안쪽에 페인트로 조그만 표식을 해 두고 후에 그 손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든가 모르는 척을 하고 기계를 맡겨 오면 뚜껑을 따 놓고 페인트 자국을 확인하며 이 자식 이거 그때 그 자식, 이라며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다음엔 이쪽에서도 모르는 척, 기계를 수리해서 돌려보내곤 했다.(49~50p)

 

. 맞춤법 같은 테크닉을 보지 말고 내 글의 내용에 집중하라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적는 사람이 맞춤법을 틀리는 단 하나의 이유는 게으른데다가 무식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읽지 않고 쓰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맞춤법 틀리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데 갑자기 왜 내용의 좋음을 거론하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다른 언어인가?

 

 

황정은, <백의 그림자>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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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4

 

대단한 하루키 열풍에도 불구하고 하루키통이 아니라 몇 권의 소설과 몇 권의 에세이를 읽은 게 다다. 인상적인 구절들이 있지만 대단한 사유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거나 이런 건 아니다. 이건 하루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루키는 그런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하루키에게 감탄하는 점은 성실성이다. 다른 예술 분야에서 이런 성실성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바로 떠오르는 사람은 우디 앨런이 있다. 이들은 짧지만 빛나는 전성기에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금방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전성기에는 못 미칠지라도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다. 이게 그들이 일하는 방식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루키는 담배를 끊고, 일찍 자고, 달리기를 한다. 그럼 우디 앨런은? 에스콰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우디 앨런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A corned-beef sandwich would be sensational, or one of those big, fat frankfurters, you know, with the mustard. But I don't eat any of that stuff. I haven't had a frankfurter in, I would say, forty-five years. I don't eat enjoyable foods. I eat for my health.” 이것만 봐도 이 양반이 어떻게 살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성실함이 작품의 완성도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일을 위해 이렇게나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한편 달리기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잠깐이나마 생겼는데 겨울이라서 쏙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주위의 누군가에게 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달리는 것은 근사한 것이니까 모두 함께 달립시다.” 같은 말은 되도록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만약 긴 거리를 달리는 것에 흥미가 있다면, 그냥 놔둬도 그 사람은 언젠가 스스로 달리기 시작할 것이고, 흥미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권한다고 해도 허사일 것이다.(73~74p)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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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1

 

능란한 단문으로 이루어진 짧은 소설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유명한 소설인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지 않고 어제를 먼저 읽은 이유는 짧아서다.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 먹고 칼을 들어도 누구도 죽일 수가 없다. 꿈꿨던 것은 이루지 못하고 글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한 노파가 무덤들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나는 왜 내 무덤을 아무도 돌보지 않느냐고 노파에게 물었다.

이건 아주 오래된 무덤이구먼, 그래. 날짜를 봐요. 이제는 아무도 그가 여기에 묻혀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가보우.

나는 날짜를 보았다. 올해였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114p)

 

 

나는 이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140p)

 

 

아고타 크리스토프, <어제>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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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0

 

 

실험적인 언어와 이미지를 제공하는 독창적인 작품이라는 평이 많은 데 동의하지 못하겠다. 작품에 등장하는 그 많은 사진과 타이포그래피가 그렇게 효과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없어도 별 상관없어 보인다. 장점이라면 그림과 이것저것 다 빼면 300페이지가 조금 넘을 소설인데 다 합쳐지니 489p나 되기 때문에 내가 뭔가 대단한 작품을 읽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이미지와 글자 배열 등은 독서를 산만하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게 의도였다면 제대로 적중했다. 소설 속에서 오스카의 재기 넘치는 모습을 보고 웃음 짓긴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재기라는 측면에서 적절한 비교는 아니지만, 소설 전체가 재기를 뿜어내는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사랑한다.’라는 말을 인상적으로 쓴 소설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이 소설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이라는 건 언제나 그때 당시에는 알지 못한다. 지나고 나서 그게 마지막이었구나.’라고 실감할 뿐이다. 사랑의 감정이 생기고 머릿속에 떠오른다면 망설이지 말고 표현하자. 내일로 미루지 말자. 한 행동에 대한 과거는 어떻게든 후회로 잊히지만, 하지 못했던 행동은 회한이 되어 평생 따라다닐 테니.

 

 

더 이상 네 앞에서 강한 척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지자, 난 한없이 약해졌어. 바닥에 쓰러졌단다. 그곳이 내게 맞는 곳이었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어. 손이 부서지길 바랐지만, 너무 아파서 멈추었지. 하나뿐인 자식을 위해 손 하나 부서뜨리지도 못하다니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지.

화장실에 가야 했어. 일어나고 싶지 않았단다. 내 배설물 속에 널브러져 있고 싶었어. 나는 그래야 마땅해. 내 오물 속에서 뒹굴고 싶었어. 하지만 일어나서 화장실로 갔단다. 그게 바로 나야.(321p)

 

 

나는 그럴 때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모조리 생각해 보았다. 태어난 이상 천 분의 일 초 후든, 며칠 후든, 몇 달 후든, 76.5년 후든 누구나 죽어야 한다. 태어난 것은 모두 죽어야 한다. 그 말은 우리 삶이 고층 빌딩과 같다는 의미이다. 연기가 번져오는 속도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불길에 휩싸여 있기는 다 마찬가지이고, 우리는 모두 그 안에 갇혀 있다.(340p)

 

 

사랑한다.(439p)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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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7

 

고상하고 엄숙하며 진지한 문학만이 진정한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읽어낼 수 없을 소설이다. 아예 멀리하는 게 좋겠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왜 이제야 읽었나 싶을 정도로 최고의 독서경험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 책이 나왔을 때 바로 읽어보려 했는데 도입부부터 몰려오는 각주, 미주, 스페인어대중 문화 일반에 대한 인용 등에 대해 너무 겁을 내어 던져두고 이번 기회에 읽게 됐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관심도 있고, 정치적 상황 및 관련 정보들을 많이 알고 있으면 훨씬 풍요로운 독서체험이 될 수 있겠지만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충분히 따라가면서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읽다보니 라틴 아메리카의 국제 정세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것 같고, 관심도 생겨서 조금씩 찾아보며 읽었는데 이건 뭐 마술적 리얼리즘운운하는 책들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굉장히 젊은 책이고 사실 번역이 쉽지 않았을텐데 번역도 매끄럽게 느껴졌다. 저자의 첫 단편소설집 드라운도 같은 역자가 번역한 걸로 알고 있는데 기대된다.

 

 

 

다리 들어올리기, 윗몸일으키기, 아침 일찍 동네 한 바퀴 걷기 같은 운동을 두어 번 시도해봤지만, 자기만 빼고 다들 여자친구가 있는 게 눈에 띄었고, 그럴 때면 절망하여 다시 먹어댔으며, <펜트하우스> 같은 도색잡지와 던전 설계, 자기 연민에 빠져들었다.

나는 부지런한 거에 알레르기가 있나봐. 오스카의 말에 롤라는 코웃음을 쳤다. , 넌 부지런함이 아니라 시도하는 데 알레르기가 있는 거야.(39p)

 

사람들이 뚱뚱한 사람을 싫어한다고? 그렇다면 살 빼려는 뚱보는 얼마나 더 싫어할지 상상해보라. 그 광경은 사람들 속에 내재된 저 빌어먹을 악마를, 발로그를 끄집어했다. 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아가씨들이 길에서 뛰는 그를 보고 차마 못할 말을 던지곤 했고 나이 든 할머니들은 저 뚱보 좀 봐, 구역질나게시리, 라고 했다, 구역질이 난다고. 평소 오스카에게 반감을 표시한 적이 한 번도 없던 해럴드조차 그를 자바 더 벗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나 적대적이었다.(212p)

 

인생이란 그런 거다. 아무리 열심히 행복을 모아봤자 아무것도 아닌 듯 쓸려가버린다. 누군가 나한테 묻는다면, 난 세상에 저주 따윈 없다고 대답하겠다. 삶이 있을 뿐. 그걸로 충분하다고.(246p)

 

이제 나도 엄마가 되고 보니 우리 엄마는 달라질 수 없었다는 사실을 불현 듯 깨닫는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왜 이런 말이 있잖은가. 플라타노 마두로 노 세 부엘베 베르데(익은 플라타노는 다시 녹색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엄마는 마지막까지도 내게 사랑 비슷한 걸 전혀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나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울지 않았다. 오직 오스카를 위해서만 눈물을 흘렸다. 미포브레 이호(가엾은 내 아들). 당신은 부모가 적어도 언젠간 바뀔 거라고, 나아지는 것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부모는 그렇지 않았다.(249p)

 

 

주노 디아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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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6

 

대단히 좋았다. 조금 찾아보니 작가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거의 여과 없이 드러내는 작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들은 창작을 할 때 의식적으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지 않도록 작품을 쓰는 경우가 있고(알게 모르게 자신의 모습이 비춰질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모습을 내놓고 드러내는 자전적인 형태의 글을 쓰는 경우도 있다. 그 중에서 자전적인 글을 쓰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책이라는 것은 한명의 친구가 아닌 다수의 독자를 상정하고 쓰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걸 읽을 불특정다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데 그들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고 지레짐작을 한다면 어떨까?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서 발가벗겨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특히 자신의 실제 모습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쓰는 과정 자체가 무척 고통스러울 것 같다. 이 작품을 읽고 나니 보통의 자전적이니 반자전적인 이야기이니 하는 소설들은 감히 장난으로 보인다. 이건 뭐 갖다 댈 계제가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가족사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글을 쓸 때의 그 고통이라는 것은 감히 짐작조차도 할 수 없다.

클라이맥스라고도 할 수 있을 4막에서 티론의 장광설과 제이미의 취중진담(?)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전에도 말했지만, 네 어머니 옛날 얘기는 좀 과장이 섞였어. 집도 대단했던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평범했지. 그리고 네 외할아버지도 네 어머니 말처럼 그렇게 훌륭하고 관대하고 고귀한 아일랜드 신사는 아니었어. 물론 좋은 분이었고 사교성도 좋고 말솜씨도 좋았지. 나도 그분을 좋아했고 그분도 나를 좋아했어. 그리고 식품 도매상을 해서 부유한 편이었고 능력도 있었지. 하지만 그분에게도 결점은 있었어. 네 어머니 말야, 나 술 마시는 거 갖고 나무라지만 네 외할아버지 술 좋아하시던 건 잊어버리고 그러는 거야. 네 외할아버지가 마흔이 되실 때까지 술 한 방울 입에 안 댔던 건 사실이지만 그 뒤로 그동안 못 마셨던 걸 다 마셔버렸지. 그분은 샴페인만 드셨는데 상태가 심각했어. 샴페인만 마시는 걸 대단히 고상한 취미인 것처럼 생각했지.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 거기다 폐병이······.(168~169p)

 

 

지독한 노랭이 영감이라. 그래, 어쩌면 네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구제불능인지도 몰라. 돈이 좀 생긴 뒤로는 술집에서 다른 사람들 술값까지 내주면서 펑펑 돈을 쓰고 못 갚을 게 뻔한 인간들한테 돈을 빌려주고 그러면서 살았지만······. 물론 그건 술집에서 잔뜩 취해 있을 때 얘기지. 집에서 맨정신으로 있을 때는 도저히 그게 안 돼. 돈 귀한 걸 배운 것도 집에서고 늙어서 양로원 들어가는 걸 겁내게 만든 것도 집에서였으니까. 그런 걸 알게 된 후로는 운이란 걸 믿을 수가 없었지. 갑자기 운이 바뀌어 가진 걸 다 잃게 될까 봐 항상 두려웠어. 그래도 땅은 많이 가질수록 안심이 되거든.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긴지는 몰라도 난 그렇다. 은행이 망하면 돈은 날아가는 거지만 땅은 어디 가는 게 아니니까. 너 아까, 고생이 뭔지, 아비가 어렸을 때 얼마나 힘들었겠는지 알겠더라고 했지. 알긴 개뿔을 알아! 네가 어떻게 알아? 부족한 거 없이 컸는데. 유모에, 학교에, 대학까지 보내줬잖아. 중간에 그만둬서 그렇지. 먹을 걸 못 먹었나, 입을 걸 못 입었나. 하기야 노동을 좀 해보긴 했지. 외국 땅에서 돈 한 푼 없이 고생도 좀 했고. 그건 내가 높이 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낭만이고 모험이었어. 재미 삼아서 해본 거였다고.(180~181p)

 

 

널 건달로 만들려고 일부러 그랬어. 내 마음의 한 부분이 그렇게 한 거야. 커다란 한 부분이. 그 한 부분은 아주 오래전에 죽었어. 그래서 삶을 증오하지. 내 실패를 보고 배우도록 너한테 세상을 알게 해줬다는 거, 가끔은 나 자신도 그렇게 믿지만 그건 거짓이야. 내 실패들을 그럴 듯하게 위장하고, 취하는 걸 낭만처럼 보이게 했지. 가난하고 어리석고 더러운 존재에 지나지 않는 창녀들을 매혹적인 흡혈귀처럼 만들고, 노동을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조롱했지. 난 네가 성공하는 게 싫었어. 그러면 비교돼서 내가 더 한심하게 보일 테니까. 네가 실패하기를 바랐지. 항상 너를 질투했어. 어머니의 아기, 아버지의 귀염둥이! 그리고 네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마약을 시작한 거야. 네 탓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빌어먹을, 너에 대한 증오를 억누를 수가·····!(207p)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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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9/23

 

 

기계의 생산력으로 인류에게 혜택을 준 발전된 경제 조직이 여가를 파격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으로 이어져야 마땅하지만 여가가 많아지면 상당한 지적 활동과 관심사들을 보유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루해하기 십상이다. 여가를 가진 인구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교육받은 인구이며, 또한 그 교육은 직접적 유용성을 가진 과학기술적 지식뿐 아니라 정신적 기쁨도 목표로 했음이 틀림없다.(45p)

 

이런 단락을 보면 단순히 여가시간이 주어진다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은퇴 후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괜히 노년기에 우울증이 찾아오는 게 아니다. 러셀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꼭 교육을 통해서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며 보낼지 충분한 고민과 숙고가 필요한 걸로 보인다.

 


숙고하는 습관의 이점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가장 심오한 것에 이르기까지에 폭넓게 걸쳐 있다. 우선 벼룩 때문에 괴롭다든지, 기차를 놓쳤다든지, 함께 사업을 하는데 걸핏하면 싸움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작은 번민들부터 생각해 보자. 이런 고민거리들은 영웅적 행위의 뛰어남이나 모든 인간적 불행의 덧없음에 비하면 별로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들로 보이기 쉽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일들에서 생겨나는 짜증들이 많은 사람의 좋은 성격과 즐거운 인생을 망쳐 놓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 순간의 문젯거리와 약간의 연관이 있을 뿐인 동떨어진 지식(실제로 연관이 있든 그렇게 생각한 것이든 간에)에서 의외로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설사 그 문제와 아무 연관이 없는 지식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현재의 골칫거리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격분해서 안색이 하얗게 된 사람이 마구 공격해 올 때는, 데카르트의 열정에 관한 논문에 나오는, ‘분노로 안색이 하얘지는 사람이 안색이 빨개지는 사람보다 두려움을 더 많이 타는 이유란 제목의 장을 돌이켜보면 즐거워질 것이다.(48~49p)

 

숙고하는 습관의 이점에 대한 러셀의 위트 있는 문장

 


죽음이 떠오르면 다소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다시 말해 죽음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것을 초월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냉정하게 사고해야 한다.

이런 원칙은 다른 공포감도 마찬가지다. ,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을 단호하게 주시하는 것이 유일한 처치법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래, 좋아.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지?”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죽음에 직면했을 때 이런 방법으로 대처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자신들이 생명을 바치려 하는 명분이나 자신이 아끼는 사람의 중요성이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느끼는 방법은 어느 경우에든 바람직하다.(87p)

 

이런 식의 생각은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러셀이 언급하는 것처럼 단지 죽음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힘든 스트레스 상황이나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해 그래, 좆도 이게 뭐라고'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 만사가 이런 식이면 곤란하겠지만.

 


과거에는 훈육의 개념이 대단히 무시무시해서 교육이 잔인한 충동의 통로가 되었다. 아이에게 고통을 주면서 쾌감을 느끼는 일이 없이 최소한의 징벌을 내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옛 관습에 젖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부인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회초리로 후려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던 일화는 누구나 알 것이다.

얘야, 맞는 너보다 때리는 내 마음이 더 아프단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아버지. 제가 대신 아버지를 매질하게 해주시겠어요?”(237p)

 

 

인생에서 만나는 고통스런 일에 대한 지식을 아이들에게 숨기려 해서도 안 되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 상황이 불가피할 때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고통스런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땐, 있는 그대로 감정을 넣지 말고 얘기해야 한다. 단 가정에서 누군가 죽었을 경우엔 예외다. 이때 슬픔을 감추려드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어른들은 슬픔 속에서도 쾌활한 용기를 보여 주어야 하며 그것을 보고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배워나갈 것이다.

청년기에는 사사롭지 않은 많은 관심사들이 젊은이들 앞에 제시되어야 하며 자기 외부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이 있다는 것을(드러내놓고 훈계하는 방법이 아닌 암시의 방법으로)깨쳐 주어야 한다. 불행이 닥쳤을 땐 아직도 살아야 할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견뎌내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일어나지도 않은 불행에 깊이 파고들게 두어선 안 된다. 설사 그것이 불행에 맞설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젊은이들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혹시 자신이 교육에 필요한 훈육적 요소들로부터 가학적 쾌감을 느끼고 있지나 않은지 스스로를 엄밀하게 감시해야 한다. 훈육의 동기는 항상 품성이나 지성의 발달에 두어야 한다. 지성에도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훈련 없이는 결코 정확함을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성의 훈련은 좀 성격이 다른 문제여서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훈육은 내적 충동에서 솟아나올 때가 가장 좋다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선 아이나 청년에게 어려운 무엇인가를 달성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어야 하고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야심은 흔히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제의받는 수가 많다. 결국 자기 단련조차도 교육적 자극에 의해 좌우된다는 얘기다.(239~240p)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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