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27

 

 

 

자라난 환경 속에서 자연스레 예술을 감상하는 눈을 기른 사람은 '여유'가 있다. '감상이라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며, 아주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적 습득'을 통해 예술 감상 능력을 익힌 사람과 '늦게 시작되며 계통적이고 가속된 습득 형태'를 통해 같은 능력을 익힌 사람은 작품을 앞뒀을 때의 '여유'에서 차이가 생긴다.

(...)

'학력에 의한 문화귀족'이 결코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은 "모른다"는 말이다. "모른다"라는 고백이 그 사람이 '원래 속한 계층'을 폭로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한편 가정에서 문화자본을 신체화한 '혈통에 의한 문화귀족'은 태연하게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눈은 한 번도 노력해서 '얻어야 할 것'으로 인식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술작품은 '좋은지' '싫은지', '갖고 싶은지' '갖기 싫은지'라는 피부 감각 수준에서 즐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처음 보는 작품에 대해 누군가 인상을 물어봐도, 연대나 유파나 기법이나 시장 가치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참조하지 않고서 감각을 근거로 그 '좋고 나쁨'에 대해 "아, 이건 좋은데"라든지 "이런 건 필요 없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부르디외의 탁월한 비유를 빌려 말하자면 "혈통에 의한 문화귀족"은 자신이 본 영화에 나온 배우의 극 중 이름을 기억하는 반면, "학교에 의한 문화귀족"은 자신이 본 적 없는 영화의 감독 이름을 기억한다. 전자는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후자는 '지식'을 '경험'보다 우선한다. "작품 자체를 소홀히 보더라도 작품에 대해 말하기를 우선하며, 감각을 희생하더라도 훈련을 중시하는"것, 그것이 '학교에 의한 문화귀족'의 '본색'이다.(22-24p)

 

 

문화자본을 획득하여 사회적 상승을 이루기를 열망하는 사람이 제아무리 금욕적인 노력으로 교양이나 예의범절을 익혀 봤자, '노력해서 익혔다'는 점에서 그 문화자본에는 처음부터 '2류'라는 꼬리표가 붙고 만다.

이는 부조리하리만치 굴욕적인 경험이다.

그런 굴욕을 계속 맛봐온 사람은 어떤 식으로 그 불만을 해소할까. 이를 상상하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들은 문화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사람, 혹은 노력했지만 자기네만큼은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깔봄'으로써 그 굴욕을 해소하려 할 것이다.

'타고난 귀족'은 '서민'을 깔보지 않는다(애초에 안중에 없으니까).

그러나 '벼락 귀족'은 '자기보다 아래쪽에 있는 사람'을 찾는 데 열중한다. '벼락같이 귀족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것을 달성하지 못한 사람들'이야말로 그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시선을 돌리고 싶은 바로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벼락 문화귀족'은 반드시 부지런한 차별주의자가 된다. 온갖 영역에서 온갖 주제에 대해 아무래도 좋은 사소한 차이를 발견하고 아무래도 좋은 뉘앙스의 차이를 열거하며 '문화자본을 그럭저럭 가진 자'와 '문화자본을 별로 가지지 못한 자'사이에 '뛰어넘기 힘든 경계선'을 긋고 싶어 하게 된다.(39-40p)

 

 

문화가 '자본'이 된다는 말을 들으면 눈치 빠른 작자는 "이크, 이제부터는 교양으로 승부해야지"라며 주판알을 튀긴다. "앞으로는 독서량이 출세의 열쇠가 된대"라고 들으면 <세계문학전집> 독파 계획을 세워서 쭉쭉 읽어나간다. 쭉쭉 읽어나가던 도중 그만 사드나 니체나 바타유 등을 읽기 시작하여 정신 차리고 보니 출세 같은 건 아무래도 좋게 되었다·····라는 역설은 문화자본주의만의 운치다.

문화자본으로의 접근은 '문화를 자본으로 이용하려 하는 발상 자체'를 회의하게 만든다.

반드시 그리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애초에 '문화'라고 부를 가치가 없는 물건이다.(48p)

 

 

틀림없이 샐러리맨 대부분은 인사고과의 '불공평함'을 몹시 비난한다.

하지만 '인사고과가 엄정하지 않다'는 바로 그 사실 덕분에 자신의 시원찮은 업무 성과가 정당화된다는 점은 편하게 잊고 있다. 그는 인사고과가 불공평하며 신용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불이익과 동시에 이익도 얻지만, 그 부분은 홀랑 까먹고 있는 것이다.

상상해보시라. 그대가 바라듯 인사고과가 실로 엄정하다면 어떻게 될지를. 나이도 가족구성도 근무연수도 학력도 무엇도 관계없이 순수하게 '능력만'으로 월급과 직급이 결정되는 회사에서 근무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때 회사 내부의 모든 위계 차이와 월급 차이는 그대로 '공공연히 드러난 인간적 능력 차이'가 된다.

(...)

인사고과가 적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데서 그들은 전체적으로는 인사고과가 적정한 경우보다 더 큰 이익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인사고과가 엉터리이기 때문에 그들은 '내 능력은 지금 평가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해'라는 달콤한 환상 속에 잠길 수 있다. 그리고 바로 '내 능력은 적정하게 평가되지 않았으며 내 월급은 원래 받아야 할 액수보다 훨씬 적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그 '적은 월급'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그런 생물이다.(97-99p)

 

 

"올바른 결단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단은 되도록 안 하는 편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결단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선택지가 한정된 상황으로 내몰렸다는 뜻이니까요. 선택지가 한정된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는 것, 이것이 '올바른 결단을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112p)

 

 

의외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결단'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완전히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과거에 한 행동이 청산되는 일이다.

이제껏 올바른 결단을 쌓아온 사람 앞에는 결단을 망설일 만한 양자택일의 상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이제껏 몇 번이고 결정적인 국면에서 판단을 잘못해온 사람 앞에는 결단을 재촉하는 갈림길이 자꾸만 나타난다.(124-125p)

 

 

연애로 '공통점 있는 유쾌한 파트너'를 얻었다면 그 뒤로는 즐겁게 놀며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결혼은 그리 되지 않는다. 결혼이란 자신과는 어떤 공통점도 없는(결혼만 하지 않았다면 아마 일평생 모르는 사이로 끝났을) '불쾌한 이웃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들의 취향이나 이해를 배려하며 살아가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연애와 결혼을 플레이어에게 요구되는 인간적 자질이 완전히 다르다.

연애에 필요한 것은 '쾌락을 즐기고 쾌락을 증진시키는 능력'인 반면 결혼에 필요한 것은 '불쾌함을 견디고 불쾌함을 감소시키는 능력'이다.(141p)

 

 

결혼은 쾌락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이 약속하는 것은 끝없는 '불쾌함'이다. 하지만 결혼은 불쾌함을 극복해낸 인간에게 '쾌락'이 아니라 어떤 '성취'를 약속한다. 그 성취는 재생산이 아니라 '불쾌한 이웃', 다시 말해 '타자'와 공생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야말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일 것이다.(144p)

 

 

결혼이란 '이 사람이 뭘 생각하는지 나는 모르고, 이 사람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에게 말을 하고, 이 사람의 말을 듣고, 이 사람과 서로 신체를 만질 수 있다'라는 역설적 상황을 살아내는 일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과 즐겁게 사는 것을 추구한다면 결혼을 할 필요는 없다. 결혼은 그런 것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이해도 공감도 안 되지만 여전히 인간은 타자와 공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한 제도다.

(...)

당신은 그래도 여전히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에게만 둘러 싸여 지내고 싶다"고 말할 작정인가. 그것은 사실 "나는 인간을 관두고 싶어" "나는 원숭이가 되고 싶어"라는 말과 같다는 사실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하지만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나는 원숭이가 되고 싶어"라는 당신의 메시지를 들어줄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내게는 이해되지 않는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가진 생물만이 당신의 말을 알아들어줄 테니까.(153-154p)

 

 

'리셋할 수 있다'는 것은 '최종 결단'이 필요 없어진다는 뜻이다. '써 본 다음 그것이 정말로 자신이 원했던 물건이었는지 아닌지를 깨닫는 일'이 허용된다는 것은, '써 보기 전까지는 그것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물건인지 아닌지를 심각하게 곱씹어보지 않아도 좋다'는 태만함이 허용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태만함이 허용될 때 우리는 반드시 정신의 집중력을 아끼게 된다.(157p)

 

 

 

 

 

나는 여기까지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미래에 대해 명확한 상상을 하는 사람은 그런 미래를 반드시 불러온다. 이것이 첫 번째 명제.

남녀 관계에서 상대가 하는 '이해 불가능'한 행동에 대해,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해석'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두 번째 명제.

이 두 가지를 종합하면, 우리 중 누구도 연애의 종말을 구조적으로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당연한 이야기다. 우리는 상대의 어떤 행동을 보든 '아, 이제 끝이다'라고 믿는 데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믿음을 확실히 실현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데서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왠지 암담한 결론이 나와서 참으로 면목 없지만, 그렇게 낙담할 필요도 없다. 여러분은 이 리얼하거 쿨한 현실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면 되니까.

(...)

사랑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잘 이해되지 않은 언동'에 손쉬운 해석을 적용하지 않는 일이다.(168-169p)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검색할 키워드를 사전에 알고 있는 정보'를 찾을 때는 유리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검색할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거의 쓸모없다.

그러나 고등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양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에게 '그런 게 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학술적 식견이나 스킬'과 느닷없이 마주치는 장소를 보장해주는 것이다.

(...)

캠퍼스라는 무의미하게 넓은 공간이 필요한 이유는, 그곳에 가면 '자신이 알고 싶었던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에 가면 '자신이 그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과 우연히 마주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캠퍼스를 어슬렁거리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캠퍼스를 어슬렁어슬렁 부유하다 보면 '뭔지 통 모르겠지만 굉장한 듯한 것'과 '하는 말에는 모순이 없지만 왠지 수상한 것'을 직감적으로 분별해내는 전지성적 능력이 차츰 몸에 배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대학 교육의 가장 큰 목표다.(188-189p)

 

 

상상력이란 '현실에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을 머릿속에서 그리는 힘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보는 것은 '누군가가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상상 가능하도록 제도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그 프레임의 '바깥'을 향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질해 나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분방한 공상을 즐기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분방한 공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빈약함과 한계를 염려하는 일'이다.(203p)

 

 

'대중을 혐오하는' 감각이 대중적으로 공유되는 시대. 그것이 니체 이후의 대중사회다.

따라서 현대의 대중사회에서 "대중은 말이야·····"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말에는 약간의 경계심이 필요하다. 주류를 비판하는 말 자체를 주류가 즐기는 시대에서 주류에 대해 이야기 하는 말(이를테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런 말 그 자체)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읽을지는 '미디어 리터러시'의 중요한 과제다.(207p)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이는 나를 구석구석까지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내 언동에 공감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의 편이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다.(213p)

 

 

니체는 일찍이 "인간은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원인과 결과를 뒤바꾼다"라고 설파했다. 현찰하신 대로, 어떤 종류의 질문에 대답이 나오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종종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는 탓이다. 그래서 천재들은 해답이 불가능한 어려운 문제를 마주할 때 일단 '이야기를 뒤집어본다'는 기법을 구사했다. 이를테면 데즈카 오사무가 그랬듯이.

(...)

이때도 데즈카는 같은 기법을 썼다. 「우주소년 아톰」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인간이 아닌 것'을 주인공으로 삼았듯,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위해 정글의 생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듯(「밀림의 왕자 레오」), '섹스란 무엇인가?'에 답하기 위해 성을 잃은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았듯(「인간들 모여라!」), '사는 것의 의미는?'이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데즈카는 '죽는 것이 금지된 인간들'을 연작의 주인공으로 삼는 케이스 스터디를 시도했다. 「불새」라는 작품이다.(216-218p)

 

 

현상의 단면만을 보고 너무도 쉽게 타인을 재단하는 말들이 각 뉴스의 댓글을 장식한다. 유명인사의 과거 발언 한 마디에 그 사람을 매장할 기세로 덤벼들고, 식당이나 미용실 등의 조그만 실수를 빌미 삼아 가게를 폐점시킬 기세로 소란을 피운다. '맘충'이니 '한남충'이니 하는 혐오 단어는 너무도 널리 퍼져서 거의 절망적일 지경이다.

이들은 어쩌면 자신이 다수파라는 생각으로부터 정당성을 얻어 타인을 매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평균적인 도덕심을 지닌 자신의 비위를 거스르는 몇몇 대상이 특별하게 이상한 거니까. 세상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아 보이니까. 이들은 결코 자신이 '소수파'에 속하는 경우를 상정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본문에서 인용된 무라카미 류의 글에도 나와 있듯, "우리는 상황이 변하면 언제라도 비주류로 분류될 수 있는 가능성 속에서 살고 있다". 실제로는 상황이 변해야 할 것까지도 없다. 현대의 한 개인은 소수파 그룹과 다수파 그룹에 동시에 들어갈 수 있고, 혐오 발언을 당하는 동시에 혐오 발언을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혐오의 시대가 도래한 듯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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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인 혐오는 대체로 몰이해와 무지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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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상을 다각도로 알고 있을 때 그 대상은 '**충' 같은 차가운 기호로 표현될 수 없다. 어떤 대상의 일부분만을 취하여 매도하고 멸시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이런 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교양이며 사고다. 십수 년 전에 출간된 우치다 타츠루의 글이 현재의 한국에서 여전히 시의성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242-243p)

 

 

 

ㅡ 우치다 타츠루, <거리의 현대사상> 中, 서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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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1

 

진짜 '연민' ㅡ그런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으나ㅡ이 아니라  단순히 초조한 마음에 불과한 가짜 '연민'을 지닌 한 사내의 이야기. 재밌게 잘 읽었는데 그를 둘러싼 환경이나 인물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긴 했다. 

 

 

 

물론, 이 열성적인 지인이 이상하다거나 불쾌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어린아이가 열심히 우표를 수집하듯 열성적으로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그렇게 해서 구축한 인맥을 그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 사교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 약간 별나긴 하지만 온순하기 그지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

그에게 인생의 유일한 낙은 이따금씩 신문에 오르내리는 이름을 보면서 "이 사람, 내가 잘 아는 사람이야."

(...)

하지만 그는 지인들의 공연은 빠짐없이 찾아가 박수갈채를 보내주고, 생일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축하 전화를 걸어주고, 절대로 남의 생일을 잊는 법이 없었으며, 신문에 난 혹평은 전하지 않는 대신 호평만큼은 진심을 담아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성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했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작은 부탁을 하거나 자신의 인맥에 한 사람만 더 늘어나도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처럼 오지랖 넓은 그 지인에 대해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이런 부류의 사람을 알고 있고, 거칠게 밀어내지 않고서는 결코 이들의 정성 어린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8p)

 

 

도입부의 한 인물에 대한 이 묘사부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자유로운 사람과 감금되어 있는 사람의 관계가 아무런 문제없이 지속되기란 힘든 법이다. 불행한 사람은 쉽게 상처받고,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은 모든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쪽은 주기만 하고 한쪽은 받기만 하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불편할 수밖에 없듯이, 늘 보호를 받기만 하는 환자는 조금이라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에 대해서도 언제나 속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상처받기 쉬운 그녀에게는 때로는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그녀를 달래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 그렇기 떄문에 우리는 그 애매모호한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해야만 했다.

(...)

인간에 대해 한 가지를 이해하고 나면 다른 것들도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한 가지 고통을 진심으로 연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마법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고통도, 심지어는 낯설고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고통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씩 나타나는 에디트의 심술에 현혹되지 않았다.

(...)

병이 장기간 지속되면 환자뿐만 아니라 측은해하는 주위 사람들도 또한 지치게 마련이다. 절실한 감정은 끝없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에디트의 아버지와 일로나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이 가엾은 소녀와 함께 가슴 깊이 고통을 나누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지치고 체념한 상태였다.(74-75p)

 

 

처음으로 나는 진정한 관심은 전기 스위치처럼 마음대로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남의 운명에 관여한 사람은 자신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88p)

 

 

나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요. 낯선 사람이 나를 처음 보고 실제로 어떻게 느끼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어서 정말로 기분이 좋았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언제나 그 거짓 배려로 나를 보호해야 한다고 여기고 심지어 그 빌어먹을 배려가 나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내가 장님이라고 생각하나요? 당신들의 잡담과 변명 뒤에도 그 용감하고 솔직한 아주머니가 보여준 혐오스럽고 불편해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내가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목발을 만지는 순간 당신들의 숨이 멎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서둘러 대화를 시도하려 한다는 것을 내가 모를 것 같나요? 언제나 달콤한 말로 나를 진정시키려 한다는 것을 내가 모를 것 같아요? 당신들이 나를 짐슴의 시체처럼 침대에 눕혀놓고 방을 나서면서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눈을 위로 치켜뜨고 '저 불쌍한 것!'이라고 하면서 한숨을 짓겠죠. 그러면서 당신들이 한 시간, 두 시간을 '불쌍하고 아픈 아이'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겠죠. 하지만 나는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고요! 나는 당신들이 날마다 나를 동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싫단 말이에요. 연민은 필요 없어요. 그러니 앞으로 연민은 거부하겠어요! 오고 싶으면 오고,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마세요! 하지만 군마 심사 같은 엉터리 이야기를 꾸며대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란 말이에요! 나는······ 나는 당신들의 거짓말, 당신들이 그 끔찍한 배려심은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102p)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법입니다.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고 믿으면 양심의 가책이 덜어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카니츠는 이번 피해자에게서는 조금의 잘못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피해자는 손이 묶인 채로 그에게 항복했고,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모른 채 푸른 눈동자로 끊임없이 그에게 감사하다는 눈빛을 보내오는 것이었습니다.

(...)

그런데 그의 곁에 있는 피해자도 불안해하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

"죄송하지만, 제가 내일 아침 일찍 떠나기 때문에 그 전에 모든 일을 정리하고 싶어서요······ 애써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수고비로 얼마를 드려야 하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어요. 저 때문에 시간을 너무 많이 뺏기셨잖아요. 저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나니까······ 계산을 끝냈으면 해서요."

카니츠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녀의 말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겁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던 거죠. 마치 개에게 화풀이를 하며 마구 때렸는데, 그 개가 엉금엉금 기어와서는 애걸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의 잔인한 손을 핥아줄 때처럼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

그는 언제나 모든 일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상대의 반응까지 예상하는 철저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에게 뜻밖의 일이 벌어진 겁니다. 중개인 시절 그는 사람들이 그의 코앞에서 문을 쾅 닫아버리거나 인산조차 받아주지 않는 경험도 해봤고, 심지어 그가 담당하던 구역에는 피해 다녀야 할 골목들도 몇 곳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사인사를 받아보는 것은 그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그를 철저하게 믿어주는 최초의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172-173p)

 

 

나는 마음이 가벼워진 것이 즐거웠고 다른 사람들이 기뻐할 것을 생각하며 행복해했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마련인 것이다.(207-208p)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는지 너무 적게 했는지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내가 필요 이상으로 말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연민에서 비롯된 그 거짓말 때문에 에디트가 행복해하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결코 죄나 불의가 될 수 없었다!(216p)

 

 

연민이라는 것은 양날을 가졌답니다. 연민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손을 떼고, 특히 마음을 떼야 합니다. 연민은 모르핀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 치료도 되지만 그 양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거나 제때 중단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독이 됩니다. 처음 몇 번 맞을 때에는 마음이 진정되고 통증도 없애주죠. 그렇지만 우리의 신체나 정신은 모두 놀라울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나답니다. 신경이 더 많은 양의 모르핀을 찾게 되는 것처럼 감정은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옆에서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원하게 되죠. 언젠가는 '안 돼'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오게 마련입니다. 그 거절 때문에 환자가 처음부터 도와주지 않은 사람보다도 자신을 더 증오하게 될지라도 그렇게 말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그래요, 소위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연민은 무관심보다도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떻게 절망에 빠진 사람을 그냥 모른 척합니까? 저는 그저······ “

갑자기 콘도어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게 아니에요! 책임감을 느껴야죠! 엄청난 책임감이요! 연민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면, 그건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일이라고요! 성인이라면 어떤 일에 관여하기 전에 자신이 어디까지 함께 갈 건지부터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남의 감정을 가지고 장난치면 안 돼죠! 물론 당신이 좋은 의도로 그 사람들을 기쁘게 해준 건 압니다.

(...)

하지만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235-236p)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자신이 상대의 열정을 통제할 수 없을뿐더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지가 있다 할지라도 자신을 탐하는 상대의 욕망 앞에서는 그 의지조차 무기력해지는 법이다.(282p)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생각 이상으로 상황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것은 생각의 상당한 부분이 이미 오래전에 새겨진 인상과 오래전에 받은 영향을 그저 자동적으로 작동시켜나가는 역할만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규율을 통해 군인으로 성장한 사람은 명령에 거역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 군령은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힘, 자신의 의지를 없애버리는 힘을 의미한다. 군복만 입고 있으면 그는 명령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몽유병자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명령을 따르게 된다.(440p)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서 다시 살아가기 시작했다. 나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 자신도 내 죄를 잊었다. 사람의 마음에는 절실하게 잊고자 하는 일은 쉽게 잊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내 죄를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딱 한 번 옛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 있었다.

(...)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양심이 기억하는 한 그 어떤 죄도 잊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461-463p)

 

 

 

ㅡ 슈테판 츠바이크, <초조한 마음>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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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5

 

 

어쩌다보니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 병렬 독서가 되었다. 후성유전학은 여전히 알쏭달쏭한ㅡ 생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더 그렇게 느끼는 듯ㅡ 학문이지만 조금은 이해했다. 이 책의 원서가 나온 지 10년이  지났으니 확발히 연구되는 이 분야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찾아 봐야겠다.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 중에는 우리의 눈동자 색깔을 결정하는 유전자, 특정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 지능이 뛰어나도록 또는 음악적 재능이 있거나 유머 감각이 있게 하는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유전자는 이 모든 것의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로어노크 식민지의 운명을 주민들 탓으로만, 혹은 그들이 겪은 가뭄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동자가 갈색인 사람이 있고 파란색인 사람도 있는 이유 역시 유전적 요인만 살펴서는 이해할 수 없다(학교 생물 시간에는 그렇다고 배웠을지 모르지만). 사실 얼굴 모양 같은 신체적 형질과 성격 같은 심리적 특징 등 사람의 특징은 생물학적 분자들과 그 사람이 처한 맥락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결과다. 전에도 이 주제에 관한 글을 읽어본 사람에게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겠지만, 이 분야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본성 대 양육 논쟁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인간의 특징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항상 유전적 요인과 상황적 요인이 모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전작에서도 설명했듯이, 두 요인 중 더 중요한 요인은 없다고 보는 것이 유용한 관점이다.(15-16p)

 

 

특히 행동 후성유전학이라는 분야의 최근 연구는 우리의 분자 수준의 생물학적 상태가 어떻게 심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우리의 심리 상태는 어떻게 분자 수준의 생물학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지 밝혀내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영향의 양방향 고속도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19-20p)

 

 

BRCA1 유전자라는 DNA가 유방암을 유발하지 않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데, 그건 바로 어떤 DNA도 단독으로는 그 어떤 질병도 유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DNA는 우리의 그 어떤 특징도 단독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이 말이 놀랍게 들릴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대부분 DNA 속 유전자들이 우리의 일부 표현형(우리의 특징이나 성격을 일컬어 생물학자들이 사용하는 단어다)을 만들어낸다고 분명히 배웠으니 말이다. 표현형은 신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눈동자 색과 머리 크기부터 음악적 재능, 주의력 지속 시간, 술에 잘 취하는 성향 그리고 그 사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유전자가 표현형을 결정하지 않는데도, 세상에 나와 있는 다수의 생물학 교과서는 여전히 유전자가 표현형을 결정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고, 그렇게 일종의 유전자 결정론을 유포하고 있다. 눈동자 색은 특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다수의 생물학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눈동자 색이라는 표현형이 유전적으로 단순한 방식으로 결정된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런 종류의 말과 글이 존재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어쨌든 DNA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형질(뼈든 뇌든 눈이든 그 무엇의 특징이든)은 우리가 한 개체로서 발다랗고 생을 살아가는 동안 유전적 요인과 비유전적 요인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유전자들, 즉 DNA의 분절된 단위들은 항상 맥락의 영향을 받으며, 어떤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최종적으로 그것이 나타내는 표현형 사이에 절대적인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다. 형질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비유전적 요인들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마주한 맥락의 결과이다. 의사가 우리 유전자의 구성 방식을 살펴보고 특정 질병이 발생할지 아닐지 확률 이상을 알려줄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지가 삶에서 어떤 결과가 생길지에 언제나 일부 역할을 담당하므로, 유전자만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단언할 수 없다.(28-29p)

 

 

이 책 대부분에서 나는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이 쓰는 정의를 따을 것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후성유전이란 다양한 맥락 또는 상황에 따라 유전 물질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되는, 즉 발현되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DNA는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전등 스위치처럼 작동한다고 말이다. 아니, 조명을 약간만 밝히거나 적당한 밝기로 맞추거나 눈이 보실 정도로 밝게도 조절할 수 있는 조광기처럼 작동한다고 보는 게 더 낫겠다. 어떤 DNA 분절이 얼마나 활성화되는가는 그 분절의 후성유전적 상태에 달려 있고, 그 상태는 그 분절이 처한 맥락 등의 요인에 달려 있다.

(...)

전통적 관점에서는 우리가 어떤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당신의 눈이 파란 것은 파란 눈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방암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유방암이 발병할 위험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후성유전의 정의에 따라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을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전자의 활동 정도가 다양한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DNA가 무엇을 하는지다. 유전자의 스위치가 '꺼질'수 있다면 그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볼 때 특정 유전자를 가진 것은 열쇠 하나를 가진 것과 비슷한 일이며, 딱 맞는 열쇠 구멍이 없다면 그 열쇠는 있어도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33-34p)

 

 

일반적으로 어떤 개인의 유전체, 즉 그 사람의 세포 속에 들어 있는 유전 물질의 총합은 평생 변함없이 유지된다고 여겨진다.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를 제외하면 우리가 수정될 때 받은 DNA 염기서열 정보는 죽을 때 몸속에 있는 정보와 똑같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종의 유전체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진화 과정 때문이며, 진화에 의한 변화는 한 개체군의 유전체 안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일어나므로 이런 종류의 변화는 한 개인이 살아가는 동안 일어나는 유전체의 변화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생물학자들은 발달이란 유전체가 아닌 유기체의 특성이라고 여겼다. 사람은 유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지만 그들의 유전체는 성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일단 DNA의 일부가 시기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우리의 유전체가 아주 중요한 방식으로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유전체가 기능하는 방식의 차이가 DNA의 화학적 구조 변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다. 즉 사람의 유전체가 살아가는 동안 확실히 변화한다는 점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다.(35p)

 

 

지난 60년 동안 생물학에서 진행된 거의 모든 연구의 밑바탕을 이루는 신다윈주의 종합설은 우리가 살면서 획득하는 형질, 즉 경험의 결과로 얻게 되는 형질은 절대 유전될 수 없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후성유전의 대물림 현상이 발견되면서 그 주장이 사실과 어긋난다는 것이 밝혀졌고, 따라서 생물학의 기본 견해 일부를 재고할 수밖에 없다.(39p)

 

 

하지만 만약 모든 세포가 똑같은 '설명서들'을 가지고 있다면 어째서 그에 따라 만들어진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발과 똑같아 보이지 않는 것일까?

(...)

오늘날 우리는 드리슈가 발견한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후성유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선구적인 연구 이후, 우리는 아주 어린 배아의 세포들이 '다능성'세포임을 알고 있다. 즉, 이 배아세포들 각각은 간세포, 피부세포, 뇌세포 등 몸을 구성하는 서로 무척이나 다양한 세포 중 어떤 세포로도 발달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머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자원과 꼬리(그리고 신체의 다른 모든 부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자원 모두가 어린 배아를 이루는 모든 세포 각각에 분명히 존재하며, 이 세포들을 일컬어 이른바 배아줄기세포라고 한다. 이 세포들이 다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세포 속에서 서로 다른 DNA 분절들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됨으로써 그 각각의 세포가 결국 서로 다른 종류의 세포로 발달하게 하는 후성유전 과정이, 생물 발생의 핵심임을 의미한다.

(...)

드리슈의 연구에서 나온 중요한 통찰 하나를 꼽자면, 세포의 발달은 그것이 처한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똑같은 세포라도 다른 상황에 두면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발달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느 줄기세포 하나를 그냥 두면 그것이 독립적인 한 사람으로 발달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세포를 다른 세포에 붙여 두면 예컨대 우리 뇌속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세포인 뉴런으로 발달할 수도 있다. 태아가 자궁 속에서 발생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의 뇌와 심장(각자 고유한 뇌세포와 심장세포들을 지녔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원래는 정확히 똑같았던 줄기세포로부터 분화된다.(42-43p)

 

 

2005년, 마드리드 소재 스페인 국립암센터는(전 세계의 공동연구자들과 함께) 일란성 쌍둥이 40쌍의 후성유전적 상태에 관한 중요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이 쌍둥이들의 유전체 전체에서 일어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를 모두 검토하여 젊은 일란성 쌍둥이들이 서로 극히 유사한 후성유전적 표지 패턴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쌍둥들이 나이 들면서 각자 삶에서 서로 다른 경험이 쌓일수록 그들의 후성유전적 상태도 달라졌으며, "나이가 더 많고,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영위하며,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 쌍둥이에게서는 유전체 전체에 나타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에서 현저한 차이의 증거가 보였다. 이 연구에 담긴 의미는 살면서 겪은 경험들이 DNA에 '표시'를 남기며 이 표시들이 우리의 유전체가 발현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113-114p)

 

 

이런 상황, 그러니까 A 먹이를 먹으면 일벌이 되고 B 먹이를 먹으면 여왕벌이 되는 상황에 직면하면, 먹이 하나만으로 일벌에게 꽃가루 바구니와 벌침이 발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결국 모든 벌은 유전적으로 동일하고 벌들의 환경에서 유일한 차이는먹이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A 먹이가 단독으로 꽃가루 바구니를 발달시킨다는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없다. 만약 내가 갑자기 암꿀벌 애벌레를 일벌로 키운 먹이를 먹기 시작한다고 해도 내 다리에 꽃가루 바구니가 발달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꽃가루 바구니가 생기는 것은 먹이와 꿀벌의 유전체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왕벌과 일벌의 차이는 먹이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먹이 자체가 단독으로 벌들의 행동이나 표현형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여기서 이 점을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차이를 만드는 것이 이 예시의 먹이처럼 환경 요인일 때 어떤 특징을 초래한다는 것과 특징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일임을 머릿속에 새겨두기가 더 쉬울 듯해서다. 상황이 반대여서 차이를 만드는 것이 유전자라면, 우리는 이 상황의 차이를 놓치고서 유전자만이 원인을 제공할 능력을 지녔다고 가정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유전학자가 X라는 질병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존재하지만 그 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유전자 하나를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이 경우, 많은 사람이 단독으로 그 병을 초래하는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결론지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발견된 이 유전자가 그 병의 표현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이 유전자가 환경 요인과 무관하게 그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섭식이 단독으로 한 표현형의 발달을 초래할 수 없듯이 유전자 역시 그럴 수 없다. 정말 복잡하지만, 유전 요인도 환경 요인도 독립적으로 표현형을 초래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118-119p)

 

 

또 후성유전적 변형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자손 세대로 대물림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까지 아직 엄청난 양의 연구가 더 필요하다.

(...)

행동 후성유전학을 접할 때 이전에는 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당연히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유전자 결정론을 거부하는 문제에서는 주의할 필요가 없다. 유전자 결정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수십 년 동안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기 때문이다.(128-129p)

 

 

발달기에 겪는 끔찍한 경험이 특정한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생각은 우리 대부분에게 상식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방임과 학대가 반드시 그리고 항상 심리적 상처를 영구적으로 남긴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는 정말 나쁜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건강한 성인으로 자란 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에 관한 경험적 증거는 많다. 심리학자들은 예상 밖의 회복탄력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이런 연구는 어떤 조건에서는, 발달 초기에 위험 요인들이 존재했음에도 건강한 결과를 성취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하지만 '위험 요인'이 허투루 만들어진 단어는 아니다. 위험 요인에 노출된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성인기에 잘 살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일례로 생애 초기에 학대나 방임을 당한 아이는 나중에 불안증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장애를 겪을 가능성이 더 크다.(150p)

 

 

생애 초기의 경험이 특정한 발달상의 결과와 관련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도 가치 있지만, 그 경험이 어떻게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를 밝혀내는 일은 더 중요하다.

(...)

생애 초기에 경험한 상황이나 사건은 어떻게 수년 후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일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게 해줄,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어떤 메커니즘이 있을까? 다시 말해, 어려서 한 경험이 실제로 몸속에 새겨지도록 우리 내부에 물리적 변화를 초래하는 어떤 방식이 존재할까?

내가 이런 질문들이 정말로 결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예컨대 아동기의 방임이 성인기의 불안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들에게 자녀를 방임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만약 방임이 어떻게 불안으로 이어지는지 않다면 그 외에도 의지할 수단들이 많을 것이다. 발달상 결과의 기계적 원인을 추적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추상적으로 생각해보면 더 명확하다. N(방임)이라는 조건이 A(불안)라는 달갑지 않은 결과와 연관된다는 것을 안다면, 할 수 있는 일은 N에 영향을 주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N이 D를 초래하고, D는 W를 초래하며, W는 P를 초래하고, 이것이 A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면, 앞선 네 단계 중 어느 단계에 개입하더라도 그 좋지 않은 결과를 피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런 식의 연쇄적 인과, 그러니까 한 사건이 다음 사건을 초래하며 아주 긴 연쇄를 이루는 일은 생물계에서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생물학자들에게는 이를 가리키는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바로 '캐스케이드'다. 우리의 생물학적 형질과 심리적 형질은 사건들의 캐스케이드에 의해 초래되기 때문에, 미국의 발달 과학자 린다 스미스는 발달이 "미리 정해진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 각 전 단계의 변화에 따라 뒤이은 각 변화가 좌우되는, 다단계의 연쇄적 원인들이 이어진 역사의 산물로 결정될"수 있다고 썼다. 경험이 어떻게 발달상 결과에 요인으로 작용하는지 알아내는 것이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인 이유는, 대개 그런 종류의 발견은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여러 방법을 밝혀주기 때문이다.(151-153p)

 

 

구체적으로 말하면, 태어난 후 낮은 수준의 LG(핥기와 털 다듬기)를 경험한 쥐들은 뇌의 특정 영역에 있는 세포들의 유전체 영역에 메틸화가 더 많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이 쥐들의 뇌 속에서는 특정 종류의 단백질이 더 적게 생산된다. 이 단백질은 스트레스 상황에 반응하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글루코코르티코이드 수용체 단백질, 줄여서 GR 단백질이라고 부르며, 낮은 LG 경험에서 영향을 받는 세포는 바로 해마 영역에 있는 세포들이다.

(...)

그러므로 LG 행동을 적게 하는 어미들이 키운 새끼 쥐들은 성체가 되었을 때 GR 단백질을 더 적게 생산하게 되며, 이는 해마 세포들 속 GR 유전자가 후성유전적으로 침묵화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효과가 양어미 쥐들에게서 생물학적 어미와 다른 방식으로 양육 받은 새끼 쥐들에게서도 명백히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메틸화 효과를 초래한 것은 어미 쥐가 핥아주고 털을 다듬어주는 행동 자체였으며, 그 효과는 성장한 후의 행동까지 변화시켰다.(158-159p)

 

 

LG 수준이 높은 어미 쥐의 새끼가 성장하면 이들의 해마 세포에 GR이 더 많이 만들어져 글루코코르티코이드 되먹임 민감성을 더욱 높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식으로 초기 경험은 쥐들이 자기 몸속에 존재하는 코르티솔에 더 민감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위협이 제거되면 곧바로 스트레스 반응을 더 효과적으로 가라앉힐 수 있게 한다. 우리는 핥기와 털 고르기가 이런 효과를 만드는 방법이 해마 속 GR 생산에 변화를 주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LG를 많이 받은 쥐들과 적게 받은 쥐들이 성장한 뒤, 실험을 통해 그들의 GR 수준 차이를 없앴을 때 스트레스 반응에 나타나던 차이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

새끼 시절에 핥기와 털 고르기를 많이 받지 못한 쥐들은 해마에 GR이 더 적은 어른 쥐로 자라는데, 이는 후성유전적 변형(DNA 메틸화) 때문에 GR 생산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촉진유전자 부위가 접근 불가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해마에 GR이 적은 쥐는 스트레스를 겪을 때 혈류 속 코르티솔에 반응하는 능력이 떨어져 있고, 따라서 시상하부가 계속해서 CRH를 쏟아내는 바람에 스트레스 상황에서 회복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

모두 종합해볼 때 연구팀이 발견한 후성유전적 효과는, 새끼 쥐 시기의 핥기와 털 고르기 경험이 DNA 메틸화에 영향을 주고, 이것이 다시 장기적으로 염색질 구조를 변화시켜 쥐의 DNA의 GR 생산 능력에 영향을 주며, 그럼으로써 성장한 쥐의 스트레스 반응성을 형성한다는 결론을 뒷받침한다.(169-172p)

 

 

여기서 짚고 넘어갈 중요한 점은, 미니의 쥐 연구와 임신한 생쥐 연구에서는 메틸화 증가가 스트레스 증가와 연관되지만, 슈펭글러팀의 연구에서는 메틸화 감소가 스트레스 증가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앞 연구들에서 메틸화된 DNA는 GR 유전자와 연관된 반면, 뒤 연구의 메틸화된 DNA는 AVP 유전자와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시스템에 AVP가 더해지면 부신에서 코르티솔의 생산과 분비를 증가시키지만, GR이 더 많아지면 부신에서 코르티솔의 생산과 분비를 감소시킨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러니까 이 이야기에는 일관성이 있지만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 하나는 메틸화를 단순명료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메틸화(와 그에 수반하는 유전자 발현 변화) 자체는 본질적으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은 메틸화의 영향을 받는 DNA 분절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물론 이 교훈은 매우 광범위하게 작용할 수 있다. 코르티솔 역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위협에 직면했을 때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도 몸속에 높은 농도로 남아 있으면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174p)

 

 

이 장에서 논한 설치류 연구는, 경험의 영향이 꼭 실시간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새로운 증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오히려 삶의 어느 시점에 한 경험이 이후 다른 시점에서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이는 어떤 후성유전적 변화들이 사실상 이전 경험을 간직한 기록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경험은 우리 몸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 뿐 아니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 안에 새겨질 수도 있다.(176p)

 

 

외로움이나 가난, 억압 같은 스트레스 요인들이 유전자의 활동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존재할까?

이 질문에 확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관련 데이터는 쌓이기 시작했다. 한 연구에서는 만성적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백혈구 세포가 사회적으로 잘 융합되어 살아간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백혈구 세포와 유전자 발현 패턴이 서로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 연구자들은 DNA 메틸화나 히스톤 변형에 나타난 차이를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변화된 유전자 발현 패턴이 면역계 세포의 GR 활동 감소에 기인한 것임을 추적해 알아냈다. 따라서 외로움이 후성유전적 활동을 촉발함으로써 생물학적 효과를 일으킬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196-197p)

 

 

이제는 고전이 된 한 논문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와 엘리자베스 브르바는 굴절적응을 현재는 적응에 유리한 특징이지만 "자연선택이 현재의 역할을 위해 만든 것은 아닌" 특징이라고 정의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제시한 예는 깃털이다. 오늘날의 새들에게 날개는 날 수 있게 해주므로 적응에 유리하다. 하지만 깃털은 날지 않는 일부 공룡들에게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론가들은 깃털이 원래는 비행이 아닌 다른 용도를 위해, 아마도 공룡의 체온 조절을 돕기 위해 진화했으리라고 주장했다. 깃털은 다른 이유로 나타났지만 이후에는 비행을 위한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으니 굴절적응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고, 자연선택이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화한 특징을 전혀 다른 문제에 직면했을 때도 재사용하는 방식의 실례를 보여주었다.(211p)

 

 

내가 보기에 특정 생물학적 영향이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우리가 한 시스템의 작동 방식에 관해 더 많이 알아가다 보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다른 영향력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꽤 흔하기 때문이다. 성숙한 세포는 '영구히' 분화된 것이기 때문에 포유동물의 복제는 불가능하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던 생물학자가 느꼈을 창피함을 상상해보라.

(...)

그뿐 아니라 유전적 요인들을 복잡한 표현형의 유일한 원인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태아기의 영양부족 같은 한 가지 경험을 복잡한 표현형의 유일한 원인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

그들은 태아기 영양 같은 환경 요인이 심장병이나 당뇨병 같은 질병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이후의 비만 유발성 환경에서 질병 위험성에 영향을 줄 뿐"이라고 썼다. 여기서 '비만 유발성' 환경이란 말은 현재 서구 사람들 다수가 처해 있는 쿠키와 프렌치프라이가 가득한 환경을 말한다. 성인이 자기가 섭취한 정도에 걸맞은 칼로리를 소비한다면, 태아기에 어떤 경험을 했든 상관없이 비만해지거나 비만으로 인한 증후군을 겪지 않는다.(247-248p)

 

 

바이스만의 주장은 결국 현대 생물학에서, 생식세포(정자나 난자)와 체세포(우리 몸을 구성하는 나머지 모든 세포)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된 경계선을 뜻하는 '바이스만 장벽'이라는 개념으로 고이 모셔졌다. 이 장벽은 체세포에 생긴 변화가 장벽 너머 생식세포에 영향을 주는 일을 방지함으로써, 획득된 형질이 유전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요한센의 통찰을 떠올려보면 자손은 생식세포에 들어 있는 것만을 물려받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획득 형질의 유전'의 예가 되려면 연습을 통해 커진 역도선수의 근육세포가 그 선수의 아들이 어떤 경험을 하든 상관없이 큰 근육을 갖게 만드는 방식으로 선수의 정자세포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바이스만이 보기에, 연습을 통해 누군가의 체세포(예컨대 근육세포)에 일어난 영향이 그 사람의 생식세포에 영향을 줄 수 없다면 획득 형질의 유전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대 생물학에서는 수정 후 2주가 지난 인간 배아에서 그때까지 분화되지 않은 세포 중 일부가 '원시 생식세포'가 되도록 유도되며, 이들이 결국 이후 정자나 난자로 발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생물학자들은 이 과정을 '생식계열의 분리'라고 일컫는데, 이 표현은 일단 생식세포가 체세포와 분리된 후에는 경험의 영향을 받지 않게 '보호'받는다는 그들의 믿음을 잘 담아낸다. 그리고 실제로도 바이스만이 주장한 그대로 생식계열의 분리는 경험이 체세포에 유발한 결과가 생식세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방지한다. 이리하여 만약 증조부와 조부, 아버지가(나머지는 모두 정상이지만) 양손에 여섯 손가락을 갖고 태어났다면, 세 조상이 모두 어렸을 때 손가락 하나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더라도 나 역시 양손에 여섯 손가락을 갖고 태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유전 물질은 경험 요인에서 영향받을 수 없다는 이 개념은 '경성' 유전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표현형은 반드시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널리 퍼진 원인이기도 하다. 또한 이 개념은 20세기 초기 생물학자들이 다윈의 진화 개념에, 새롭게 등장한 유전학 개념들을 더해 끼워 맞춘 일련의 개념들의 총합인 이른바 현대 종합설의 중심 믿음이다. 신다윈주의 종합설이라고도 알려진 현대 종합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생물학자가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

표현형의 세대 간 전달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경성' 유전뿐이라는 신다윈주의 가정에는 문제가 딱 하나 있다. 바로 가망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는 것이다. 유전자 결정론이 불완전한 관념인 이유는 유전자가 진공 속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표현형은 유전자들이 더 넓은 환경에서 영향을 받는 주변의 비유전적 요인들과 상호작용함에 따라 전개된다. 발달생물학자인 스콧 길버트의 말대로 "표현형 산출에 관한 환경의 조절은 발달의 정상적 요소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만약 부모가 특정 형질을 발달시킴으로써 살아남았고 그 자식 역시 같은 형질을 발달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자식이 물려받아야 하는 것은 부모의 유전자만이 아니다. 부모가 애초에 그 적응에 유리한 형질을 발달시키도록 도와준 비유전적 요인들도 '물려받아야'한다.(289-292p)

 

 

"종의 형질은 그 종의 발달을 위한 자원들의 구조화된 집합체에 의해 구축된다. (...) 이 발달 자원에는 유전적인 것도 있고, 접합자의 세포질 기구부터 심리적 발달에 필요한 사회적 사건들까지 비유전적인 것도 있다. 그러니 요한센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다. 형질들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는 조상이 물려준 원재료(발달의 자원)로 그 형질들을 구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재료가 오로지 염색체뿐이라고 여겼던 대부분의 요한센 추종자들과 달리 그리피스와 그레이는 발달의 맥락 의존적 성격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발달에 필요한 자원에 DNA 이외의 것들도 포함됨을 알아낼 수 있었다. 형질을 구축하는 데 사용하는 발달 자원에는 당연히 유전자도 포함되지만, 다양한 비유전적 요인들도 포함된다.(293p)

 

 

세균은 인간 내장의 발달에서 결정적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생식계열을 통해 자녀에게 대물림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균들은 모든 갓난아기 안에 존재한다. 스콧 길버트가 설명했듯이 "우리에게 이 미생물 요소들이 부족한 일은 결코 없다. 우리는 양막이 터지자마자 어머니의 생식관에서 미생물들을 얻는다." 다시 말해 어머니의 '양수가 터진' 직후, 곧 태어날 딸의 환경에는 갑자기 이 미생물들이 넘쳐나고, 이어서 딸의 몸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살아가면서 소화관이 정상적으로 발달하도록 돕는다. 이 딸이 자라 본인도 임신하게 되면, 똑같은 방식으로 이 유익한 미생물들을 자기 자녀에게 물려준다. 이런 메커니즘에는 생식계열이 전혀 관여하지 않지만, 일종의 '대물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 점은 부모의 특징과 유사한 특징을 '물려받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는 이 장의 메시지를 부각시킨다.

(...)

야블론카와 램이 설명한 세대 간 정보 전달 시스템은 모두 네 가지인데, 유전과 후성유전, 행동, 상징이 그것이다.(302-303p)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대물림의 특별히 흥미로운 한 예는 경험의 후성유전적 효과가 생식세포의 DNA에는 후성유전적 영향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유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10장에서 보았듯이 새끼를 많이 핥아주고 털을 골라주는 암컷 쥐(즉 높은 LG 어미)가 키운 딸 쥐는 자신도 LG가 높은 어미로 자라는데 이때 그 딸을 키운 어미가 생모인지 양모인지는 상관 없다. 그 효과는 높은 LG 양육자에게 받은 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양육 스타일의 세대 간 전달에 필요한 것은 행동 메커니즘이다.(308p)

 

 

당시의 생물학자들은 그런 결과가 생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확신했다. 보통 후성유전적 표지들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지워지기' 때문이다. DNA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옮겨갈 때 후성유전적 표지들은 전형적으로 두 번 '지워진다'. 실례를 들어보기 위해, 당신의 어머니를 생각해보자. 외할머니 배 속에서 어머니가 수정된 직후, 막 새로 구축된 어머니의 유전체에 있던 후성유전적 표지들은 후성유전적 '리프로그래밍'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제거된다. 생각해보면 이건 상당히 이치에 맞는 일이다. 분화하고 성숙한 세포들에는 각자 어떤 종류의 세포인지 구별해주는 후성유전적 표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이는 성숙한 정자세포와 난자세포에도 해당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새로 만들어진 배아는 분화하기 전 상태인 줄기세포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 배아를 만든 정자와 난자를 특징지었던 후성유전적 표지들을 갖고 있으면 안 된다!

(...)

그래야 어머니의 세포들이 다능성을 띨 수 있기 때문인데, 다능성이란 몸을 구성하는 아주 다양한 세포 중 어느 세포로도 발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 다음 2주 안에, 배아 상태인 세포 중 일부는 나중에 결국 어머니의 난자(그중 하나는 당신으로 발달할 것이다)가 될 원시생식세포로 분화되는 과정을 시작한다. 원시생식세포를 만들 때 처음에는 몇 가지 후성유전적 표지가 더해지지만, 이후 최종적으로 이 세포들 속 DNA에서도 후성유전적 표지가 모두 제거된다. 그러니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동할 때 DNA는 2단계의 재설정 절차를 거치는 셈이다. 첫 단계로, DNA의 후성유전적 표지들은 새로운 개체의 수정에 관여한 다음 잠시 후 대부분 사라지며, 이후 이 개체가 자신의 새로운 정자세포 또는 난자세포를 만들기 시작할 때, 후성유전적 표지는 완전히 '깨끗하게' 지워진다.

30년 전, 생물학자들의 '상식'은 이랬다. 첫째, 후성유전적 표지는 세대와 세대 사이에서 완전히 '지워지므로' 세대 간 후성유전적 대물림은 불가능하다. 둘째, DNA 서열정보만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대물림될 수 있다. 셋째, 따라서 '경성'유전만이 유일한 유전이다. 이런 상식에는 라마르크주의를 향한 바이스만의 불신이 잘 담겨 있다. 바로 부모는 자기가 살면서 한 경험의 결과를 자녀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1997년에 생쥐의 생식계열을 통한 후성유전적 대물림이 발견된 뒤 이 이야기에는 대대적인 수정이 필요해졌다.

(...)

DNA 메틸화가 생식계열을 통해 대물림될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에 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여전히, DNA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이동할 때 대부분의 후성유전적 표지가 지워지는 것으로 여겨진다.(313-316p)

 

 

생식계열을 통한 후성유전적 표지의 직접적 대물림과 동물의 행동과 경험에 따른 변화와 같은 후성유전적 대물림의 간접적 메커니즘을 모두 생각해보면, 야블론카와 동료들이 위와 같이 말한 지 4년 후에 "후성유전적 대물림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라고 결론지은 이유를 알 수 있다.

DNA 메틸화는 경험에서 영향을 받는 것과 생식계열을 통한 대물림이 둘 다 가능하므로, 이제 획득 형질이 유전될 수 있다는 라마르크의 생각을 다시 검토해봐야 할 때다.

(...)

만약 '획득'이라는 말을 꼭 꼬집어 바이스만이 생쥐에게 가했던 꼬리 절단 같은 것을 가리키는 뜻으로 정의한다면, 도킨스의 말이 옳다. 한 세대가 경험한 절단이 다음 세대에도 나타나리라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다음 세대도 앞 세대가 한 것과 똑같이 절단을 경험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쯤이면 '획득'과 '유전(대물림)'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는 방식이 단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과 다른 정의는 다른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명백히 이해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유전의 넓은 정의, 즉 어떤 표현형이 이어지는 세대들에서 한결같이 복제되는 한 그 표현형은 '유전된'것이라고 보는 정의를 채택한다면, 다양한 경험이 유전되는 표현형에 기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317-318p)

 

 

20세기가 끝나가던 무렵에는 유전자가 결정론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분명해졌고 경험이 유전자를 침묵화하거나 활성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제는 모두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아마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후성유전학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다른 형태의 결정론들을 부추기는 마뜩잖은 방식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행동 후성유전학과 관련해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 발견 가운데 몇 가지가 생애 초기 경험의 장기적 영향에 관한 연구에서 나왔다는 점 때문에, 아기가 초기에 한 경험이 반드시 그들의 특징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암시하는 저술가도 있다. 그러나 아기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미래의 고통을 예방하는 '접종'이라는 주장은 대체로 경계해야 한다. 영양이 풍부한 섭식과 질 좋은 환경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사람의 발달은 결정론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이 아니다. 따라서 성숙한 상태에서 우리가 지니는 특징들을 유전이 결정하는 게 아니듯 후성유전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후성유전적 표지, 영양 요인, DNA 염기 서열 정보, 특정한 경험을 포함해 우리의 표현형에 원인을 제공하는 모든 발달 자원은 그중 어느 하나만으로 발달 결과가 결정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이렇듯 후성유전적 결정론, 다시 말해 한 유기체의 후성유전적 상태가 반드시 어느 특정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또 하나의 결론적이며, 유전자 결정론보다 아주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위험한 생각이기는 마찬가지다. 두 관점 다 중요한 발달 과정들이 전개되기도 전인 삶의 초기에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운명이 완전히 결정된다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으며, 똑같이 근거가 없다.

특히 언론은 환경적 요인이 유전자의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특정 질병 상태나 작은 키 같은 표현형을 독자적으로 초래할 수 있다고 암시함으로써 후성유전적 결정론으로 슬그머니 빠져드는 경향을 보인다.

(...)

하지만 키 같은 특정 표현형이나 질병은 유전자나 유전자 스위치 같은 단 하나의 요인으로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시스템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 간 상호작용을 통해 단계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므로 후성유전적 이상이 질병을, 또는 더 일반적으로는 표현형을 단독으로 초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표형형의 발달은 후성유전적 표지가(물론 다른 발달 관련 요인들과 함께) 속해 있는 맥락에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362-363p)

 

 

어떤 종류든 생물학적 결정론은 옳지 않다. 이는 일단 아이를 궤도에 올려놓기만 하면 이후로는 아이의 발달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안전하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우리를 속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로 인한 또 다른 위험은, 예컨대 어떤 아이는 '절대 어떤 수준까지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거나 '어떤 불리한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에서 오는 파괴적 결과다. 아이가 앞으로 어떤 일은 절대 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것은, 그 아이가 결국 어떤 일을 할지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어른에게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출산하는 순간부터 갓난아기와 '유대'를 형성하는 게 절대적 원칙이라고, 그래야만 아기가 '애착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고 믿는 여성은 만약 출산 후 입원하게 되어 아기와 시간을 함께할 수 없게 되면 걱정으로 몹시 심란해할 가능성이 크다. 다행스러운 점은, 갓난 생쥐에게 어미 분리가 스트레스 심한 일일 수 있다는 증거는 있지만, 갓 태어난 아기가 제일 처음 한 경험이 엄마와의 관계에 영원한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아기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렸다고 믿는 여성은 그러한 자신의 오해에서 해를 입을 수 있다.

태아기의 특정 경험이 매우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결정론은 사람의 발달에 관한 사고의 틀로 부적절하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임신 중의 음주가 태아에게 나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과학자들이 이 연관 관계를 입증하기 전 수백 년 동안에도 무수히 많은 태아가 어느 정도 알코올에 노출되고도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렇다고 임신한 여성이 자유롭게 술을 마셔도 된다는 말은 물론 아니지만, 발달의 결과란 때로 생각만큼 쉽게 예측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는 하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결정론적 세계관을 적용하는 것은 언제나 부적절하다. DNA 분절뿐 아니라 후성유전적 표지도 운명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후성유전적 표지처럼, 초기 경험도 운명이라고 보면 안 된다. 예컨대 어떤 아이가 한 가지 트라우마를 겪은 후 어떻게 발달할지는 그 트라우마 경험 자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에 달려 있다.(365-366p)

 

 

 

ㅡ 데이비드 무어,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中, 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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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11

 

올해 상반기 베스트.

이 책에 비해 더 늦게 쓰인 책이지만 먼저 읽었던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이 저자의 TED 강연을 바탕으로 훨씬 간명하고 핵심만 일러주는 책이라면 이 책은 풍부한 사례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감정에 대한 고전적 견해를 논박하며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그리고 이해를 못할 것 같은 독자를 위해 비유를 많이 드는데 이건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나는 모든 비유가 그렇듯 적절한 비유는 내용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지만 비약이 심한 비유는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원론적인 생각 정도를 했다.

 

 

감정에 대한 고전적 견해는 이처럼 확고한 지적 전통에서 탄생했고 우리 문화와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이 견해가 결코 진실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과학적 증거는 수도 없이 많다. 100년 이상의 과학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특정 감정을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는 신체 지문은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피험자의 얼굴에 전극을 부착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 동안 안면 근육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측정했던 과학자들은 어마어마한 다양성에 직면했을 뿐이며 거기에서 일관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신체와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도 다양성을, 즉 지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당신이 분노를 경험할 때, 혈압의 급상승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당신이 공포를 경험할 때, 역사적으로 공포의 중추라는 이름표가 붙은 뇌 부위인 편도체가 관여할 수도 있고 관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

(...)

한마디로 말해 우리의 감정은 내장된 것이 아니라 더 기초적인 부분들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다. 감정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에 따라 다르다. 감정은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감정을 만들어낸다. 감정은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감정을 만들어낸다. 감정은 당신의 신체 특성, 환경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발달하는 유연한 뇌, 이 환경에 해당하는 당신의 문화와 양육 조건의 조합을 통해 출현한다. 감정은 실재하지만, 분자나 뉴런이 실재하는 것과 같은 객관적 의미에서 실재하지는 않다. 오히려 감정은 화폐가 실재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실재한다. 다시 말해 감정은 착각은 아니지만, 사람들 사이의 합의의 산물이다.

내가 구성된 감정 이론이라고 부르는 견해에 따르면 멀로이 주지사의 연설 중 일어난 사태를 매우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멀로이 주지사의 목이 메었을 때, 이것이 내 안의 슬픔 회로를 촉발해 일련의 전형적인 신체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순간 내가 슬픔을 느낀 까닭은 특정 문화 속에서 성장한 나의 입장에서 볼 때 특정한 신체 감각이 끔찍한 인명 피해와 동시에 일어날 경우 '슬픔'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이미 오래전에 배웠기 때문이다. 총기 사고에 대한 나의 지식, 그 피해자들과 관련된 나의 예전 슬픔 같은 과거 경험의 조각들을 사용해 나의 뇌는 내 몸이 이런 비극에 대처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신속히 예측했다. 그리고 이 예측 때문에 내 심장이 두근거렸고, 내 얼굴이 붉어졌으며, 내 위가 딴딴하게 뭉치는 느낌이 들었다. 이 예측이 내게 울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래서 내 신경계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슬픔의 사례로서 의미를 지니는 최종 느낌이 남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나의 뇌가 나의 감정 경험을 구성했다. 나의 특정한 동작과 감각은 슬픔의 지문이 아니었다. 만약 뇌의 예측이 달랐다면, 나의 피부는 붉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며 위에 딴딴하게 뭉치는 느낌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뇌는 이렇게 해서 생긴 신체 감각을 여전히 슬픔으로 변모시킬 수도 있다. 게다가 내가 원래 경험한 심장의 두근거림, 얼굴의 붉어짐, 위의 뭉치는 느낌, 눈물 등은 슬픔이 아니라 분노나 공포 같은 다른 감정으로서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또는 매우 다른 상황이라면, 예컨대 결혼식장이라면 똑같은 신체 감각이 기쁨 또는 감사의 감정이 될 수도 있다.(21-23p)

 

 

 

캄라스와 오스터가 보여준 것처럼 사람들이 주위 맥락에서 어마어마한 정보를 얻는다는 사실은 다른 연구를 통해서도 증명되었다. 한 연구에서는 함께 부합되지 않는 얼굴과 신체 사진을 결합해 제시했다(예컨대 기저귀를 들고 있는 신체에 화가 나서 노려보는 얼굴을 결합해 제시했다). 그러자 피험자는 거의 언제나 얼굴이 아니라 신체에 적합한 감정을, 즉 이 경우에는 분노가 아니라 혐오를 지각했다. 그리고 당신의 뇌는 다른 많은 요인을(몸의 자세, 목소리, 전체 상황, 당신의 평생 경험 등을) 함께 고려하여 어떤 것이 의미 있는 움직임이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낸다.(43-44p)

 

 

'공포'같은 하나의 감정 범주 안에 이렇게 다양한 안면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다면, 어째서 우리는 눈을 크게 뜬 얼굴이 공포의 보편적 표현이라는 자연스러운 신념을 가지고 있을까? 그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문화 안에서 잘 알려진 '공포'라는 주제에 어울리는 고정 관념 또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미 유아원이나 유치원에서부터 "노려보는 사람은 화난 사람이고, 입을 삐죽 내민 사람은 슬픈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고정 관념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이런 고정 관념은 문화적 약식 기호 또는 관습이다. 우리는 각종 만화, 광고, 인형의 얼굴, 이모티콘 등 무수히 많은 이미지와 도형에서 이것을 보게 된다. 대학 교과서에서는 이런 고정 관념을 심리학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치료사는 이런 고정 관념을 환자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대중매체는 이것을 세계 곳곳에 전파한다.(46-47p)

 

 

수백 가지 실험을 요약한 네 가지 메타 분석을 통해 감정마다 일관되고 특수한 지문이 자율신경계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감정이 착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고 신체 반응이 아무 규칙도 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경우에 따라, 맥락에 따라, 연구에 따라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또는 한 사람 안에서도 동일한 감정 범주가 상이한 신체 반응을 포함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일관성이 아니라 다양성이 표준이다.(53p)

 

 

내게 찾아온 기회는 감정이 어떤 물체가 아니라 여러 사례를 포괄하는 범주이며, 어떤 감정 범주든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다양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밖의 깨달음이었다. 예컨대 분노는 감정에 대한 고전적 견해로 예측 또는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 누군가에 대해 분노를 느낄 때, 당신은 고함을 치며 욕을 하는가 아니면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는가? 당신도 상대방을 비난하고 괴롭히는가? 아니면 눈을 크게 뜨고 눈썹을 치켜 올리는가? 이런 동작이 이루어지는 사이에 당신의 혈압은 올라갈 수도 있고 내려갈 수도 있으며 그대로일 수도 있다.

(...)

당신의 뇌는 이렇게 다양한 분노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기록할까?

(...)

처음에는 나도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다양한 사례를 포괄하는 감정 범주를 다루면서 생물학에서 다윈의 제안 이래로 표준이 된 개체군 사고라는 것을 적용하고 있었다. 예컨대 동물의 종과 같은 범주는 지문 같은 공통 핵심이 없는 유일무이한 개체들로 이루어진 개체군이다. 집단 수준에서 범주는 오직 추상적이고 통계적인 용어로만 기술될 수 있다. 3.13명으로 이루어진 미국인 가족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설령 평균 분노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정확히 일치하는 분노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분노 사례가 존재도 불확실한 분노의 지문이라는 것을 닮아야 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문이라고 불러 온 것은 그저 고정 관념일 뿐이다.

내가 개체군 사고의 관점을 받아들인 순간 나의 이론적 전망은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변이를 오류가 아니라 정상으로, 나아가 바람직한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54-55p)

 

 

뇌 손상 연구의 발전과 함께 편도체가 손상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수행됨에 따라 공포와 편도체 사이에 분명하고 구체적인 연관이 있다는 믿음은 깨지고 말았다. 아마도 우르바흐-비테 병 때문에 편도체가 상실된 일란성 쌍생아의 사례가 가장 중요한 반대 증거를 제공했다고 본다. 이 두 여성은 12세에 우르바흐-비테 병 진단을 받았으나, 지능은 정상이었고 고등학교 교육까지 받았다. 이 쌍둥이는 동일한 DNA와 동급의 뇌 손상을 가지고 있었고 공통의 환경 속에서 아동기와 성인기를 보냈지만 공포에 대해 매우 상이한 반응 특성을 보였다. 쌍둥이 중 한 명인 'BG'는 SM과 매우 비슷했다. 즉 그는 SM과 비슷하게 공포 관련 결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산화탄소가 추가된 공기를 호흡하면 공포를 경험했다. 반면에 쌍둥이 중 다른 한 명인 'AM'은 공포에 대해 기본적으로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즉 AM의 경우에는 결핍된 편도체가 뇌의 다른 신경망을 통해 보충되었다. 이렇게 동일한 DNA를 가진 일란성 쌍생아가 동일한 뇌 손상을 겪었고 매우 비슷한 환경 속에서 살았지만, 한 명은 어느 정도 공포 관련 결함을 보인 반명에 다른 한 명은 그런 결함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발견은 편도체에 공포에 대한 회로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약화시킨다. 오히려 뇌에 공포를 만들어내는 복수의 방식이 존재할 것이며, 따라서 '공포'라는 감정 범주를 특정 부위에 한정할 수 없다는 가정에 무게를 더한다. 과학자들은 뇌 손상 환자들을 대상으로 공포 외에 다른 감정 범주에 대해서도 연구했는데, 결과는 비슷하게 가변적인 것이었다. 편도체 같은 뇌 부위는 보통 감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런 부위는 감정의 필요조건도 아니고 충분조건도 아니다.(58-59p)

 

 

2008년에 우리 연구실에서는 신경학자 크리스 라이트와 함께 기본 감정 기법에서 사용된 공포 얼굴에 대한 반응으로 편도체 활동이 증가하는 이유를 증명할 수 있었다. 편도체는 공포에 휩싸인 얼굴이든 중립적인 얼굴이든 상관없이 피험자가 그것을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경우에 모든 낯선 얼굴에 대한 반응으로 활동이 증가한다. 기본 감정 기법에서 사용된 사진처럼 눈을 크게 뜨고 공포에 휩싸인 듯한 안면 배치는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 않기 때문에 뇌 영상 실험에 참가한 피험자들에게 낯선 것이다. 이런 연구 결과 및 이와 비슷한 다른 결과들은 원래 실험에 대해 편도체를 공포의 뇌 부위로 간주하지 않는 대안적 설명을 제공한다.

(...)

전체적으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어느 뇌 영역에도 감정에 대한 지문은 없다는 것이었다. 지문은 상호 연결된 분위를 하나로 간주하든(신경망) 아니면 개별 뉴런을 전기로 자극하든 상관없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른바 감정 회로가 있다고 주장되는 원숭이나 쥐 같은 다른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들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감정은 뉴런들이 점화를 통해 발생한다. 그러나 오로지 감정에만 관여하는 뉴런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게 이런 연구 결과는 뇌의 개별 부분에서 감정의 자리를 확인하려는 시도에 종말을 고하는 최종 결정타였다.(62-65p)

 

 

시뮬레이션은 당신의 뇌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추측하는 과정이다. 당신은 깨어 있는 매순간 눈, 귀, 코, 그 밖의 다른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잡다하고 애매모호한 정보에 둘러싸여 있다. 이때 당신의 뇌는 당신의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가설을 세우고(시뮬레이션) 이것을 당신의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불협화음과 비교한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의 뇌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잡음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무시한다.

(...)

시뮬레이션은 모든 정신 활동의 기본 모드다. 또한 이것은 뇌가 어떻게 감정을 만들어내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74p)

 

 

물론 이런 경계에 물리적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결코 산을 호수로 지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상대적이지는 안다.

당신이 가진 개념들은 당신의 뇌가 감각 입력의 의미를 추측할 때 사용하는 기본 도구다. 예컨대 개념을 통해 소리 압력의 변화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당신은 그것을 무질서한 잡음이 아니라 단어 또는 음악으로 듣게 된다.

(...)

그런가 하면 개념은 맛과 냄새를 만들어내는 화학 물질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필크빛 아이스크림을 건네다면, 당신은 딸기 맛을 기대(시뮬레이션)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선 맛이 난다면, 당신은 어리둥절하고, 심지어 구역질나게 느낄 것이다. 반면에 내가 이것이 당신이 좋아하는 얼린 연어 크림이라고 미리 말해서 당신의 뇌가 적절한 사전 경고를 받았다면, 이번에는 똑같은 맛이 감미롭게 느껴질 것이다. 당신은 음식이 물리적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음식'이라는 개념은 매우 문화적인 것이다. 물론 몇몇 생물학적 제약이 있기는 하다. 당신은 면도날을 먹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몇몇 물질은 우리가 충분히 먹을 수 있는데도 음식으로 지각하질 않는다. 예컨대 일본의 별미 음식 중에 벌의 유충으로 만든 하치노코라는 것이 있는데, 대다수 미국인은 이것을 아마 쳐다보지도 않으려 할 것이다. 이런 문화적 차이가 바로 개념에 기초한 것이다.(76-77p)

 

 

감정은 세계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당신은 감각 입력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당신 감정의 능동적 구성자이다. 당신의 뇌는 감각 입력과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를 구성하고 행동을 지시한다. 만약 당신에게 과거 경험을 표상하는 개념이 없다면, 당신의 모든 감각 입력은 잡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이런 감각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무엇으로 인해 야기됐으며, 이것에 대처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 당신의 뇌는 감각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의미가 때로는 감정인 것이다.

구성된 감정 이론과 감정에 대한 고전적 견해는 어떻게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지에 대해 매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고전적 견해에 따르면 세계 안의 사태가 우리 안의 감정 반응을 촉발한다. 매우 직관적인 이 이론에는 서로 다른 뇌 영역에 살고 있는 사고와 감정 같은 낯익은 용어들이 등장한다. 반면에 구성된 감정 이론은 당신의 일상적인 삶에 어울리지 않는 이론을 내놓는다. 이 견해에 따르면 당신의 되는 감정을 포함해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은근슬쩍 구성한다. 이 이론에는 시뮬레이션, 개념, 변성 같은 낯선 용어들이 등장하며, 이것은 뇌 전체에 걸쳐 동시에 일어난다.(81-82p)

 

 

구성된 감정 이론에는 여러 종류의 구성이 포함되어 있다. 사회적 구성이라고 불리는 접근법에서는 우리가 세계 안에서 지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사회적 가치와 관심에 의해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연구한다. 예컨대 명왕성이 행성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천체물리학이 아니라 문화에 기초해 결정된다.

(...)

그런가 하면 심리적 구성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종류의 구성에서는 우리의 내면에 관심의 초점을 둔다. 여기서는 당신의 지각, 사고, 느낌 등이 더 기초적인 부분들을 바탕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19세기의 몇몇 철학자들은 마음을 커다란 화학 시험관처럼 보았다. 그들은 원자가 결합해 분자가 되듯이 단순한 감각들이 결합해 사고와 감정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마음을 레고 블록과 같은 다용도 부품 세트로 보았으며, 이런 부품들이 인지와 감정 같은 다양한 정신 상태에 관여한다고 생각했다.

(...)

구성의 이런 원리는 놀랍게도 뇌의 물리적 구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하다. 이런 견해를 가리켜 신경 구성이라고 부른다. 시냅스로 연결된 두 개의 뉴런을 생각해보자. 분명히 이런 뇌 세포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두 뉴런이 '회로' 또는 '체계'라고 불리는 어떤 통일체의 일부인지 아니면 이 두 뉴런이 각각 별개의 회로에 속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조절'하는지를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 구성은 세포 수준까지 철저하게 적용된다. 뇌의 큰 구조는 많은 부분 미리 결정되어 있지만 미세한 배선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과거 경험이 당신의 미래 경험과 지각을 결정하는 데 기여한다. 신경 구성은 어떻게 인간 유아가 얼굴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없이 태어나 생후 며칠 만에 이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또한 어린 시절의 문화적 경험에 따라, 예컨대 당신의 보호자가 당신과 신체 접촉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 그리고 당신이 아기 침대에서 혼자 잤는지 아니면 가족과 함께 잤는지 등에 따라 뇌의 배선이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구성된 감정 이론은 이 세 종류의 구성을 모두 포함한다. 사회적 구성의 관점에서 이 이론은 문화와 개념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심리적 구성의 관점에서 이 이론은 감정이 뇌와 신체의 핵심 체계에 의해 구성된다고 본다. 그리고 신경 구성의 관점에서 이 이론은 경험에 따라 뇌의 배선이 달라진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84-87p)

 

 

머핀과 컵케이크의 구별은 사회적 실재다. 즉 물리적 세계의 물체가(예: 구운 제품) 사회적 협의를 통해 추가 기능을 떠안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정도 사회적 실재다 심박수, 혈압, 호흡의 변화 같은 물리적 사태가 감정 경험이 되는 까닭은 문화 속에서 학습한 감정 개념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감각에 추가 기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

사회적 실재는 그저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피부 속으로 파고든다. 실험에서 피험자들은 동일한 구운 제품을 난잡한 '컵케이크'로 지각하기도 했고 건강에 좋은 '머핀'으로 지각하기도 했는데, 이에 따라 신체의 대사 작용도 달라졌다. 이처럼 당신이 문화 속에서 습득한 단어와 개념은 당신의 뇌 배선과 당신이 감정을 경험하는 동안 일어나는 신체 변화에도 영향을 미친다.(94p)

 

 

당신은 당신이 보는 것을 결정하는 데 능동적으로 참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당신은 당신이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단순한 시각적 입력을 바탕으로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은 인간 감정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우리 연구실에서 수백 번의 실험을 수행했고 다른 연구자들이 수행한 수천 건의 실험을 검토한 후에 나는 완전히 비직관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과학자들이 공감하는 결론이기도 하다. 얼굴로부터 또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신체 내부의 핵심으로부터 감정이 발산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뇌의 특정 부위에서 분출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적 혁신을 통해 감정의 생물학적 지문이 기적같이 발견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감정은 우리 안에 이미 내장된 채 그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은 우리가 만들어낸다. 우리는 감정을 인식 또는 확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러 체계의 복잡한 상호 작용을 통해 필요할 때마다 즉석에서 우리 자신의 감정 경험을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구성한다. 인간은 고도로 진화한 뇌의 동물적인 부분에 깊숙이 파묻혀 있는 가공의 감정 회로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의 설계자다.(97p)

 

 

이런 감정은 특정 조건에서, 즉 고의든 아니든 사람들에게 서양식 감정 개념에 관해 아주 작은 양의 정보만 제공했을 때 보편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

기본 감정 기법을 사용한 많은 비교문화 연구에는 흥미진진한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심지어 의도하지 않고도) 감정 개념을 가르치기가 어렵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119p)

 

 

당신의 뇌에 있는 860억 개의 뉴런은 거대한 신경망에 연결된 채 외부 시동이 걸리기만을 기다리면서 잠자고 있지 않다. 당신의 뉴런들은 언제나 서로를 자극하고 있으며 때로는 수백만 개를 한꺼번에 자극하기도 한다. 산소와 영양분이 충분할 경우 내인성 뇌 활동이라고 불리는 이 막대한 양의 다단계 자극 활동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 활동은 외부 세계에 의해 촉발된 반응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오히려 외부 촉매가 필요 없는 과정인 호흡에 더 가깝다.(127p)

 

 

당신의 뇌는 예측을 사용해 신체 움직임을 개시하기도 한다(예: 팔을 뻗어 사과 집기, 뱀을 피해 쏜살같이 달아나기). 이런 예측은 당신이 몸을 움직이려는 의식적 자각 또는 의도를 갖기 전에 일어난다. 신경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자유 의지의 착각'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착각'이라는 단어는 부정확한 면이 있다. 당신의 뇌가 당신을 속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곧 당신의 뇌다. 그리고 당신의 뇌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사태는 뇌의 예측력에 의해 야기된다. 이것이 착각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움직임이 2단계 과정처럼(결정부터 하고 그 다음에 움직이기)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신이 움직이려는 의도를 자각하기 꽤 오래전에, 심지어 당신이 사과를(또는 뱀을) 실제로 접하기도 전에, 당신의 뇌가 운동 예측을 산출해 신체를 움직인다!

만약 당신의 뇌가 그저 반응만 한다면, 이것은 당신의 생명을 유지하기에 너무 비효율적일 것이다. 당신은 늘 대량의 감각 입력에 노출되어 있다. 깨어 있는 매순간 1개의 인간 망막은 부하가 잔뜩 걸린 1개 전산망 연결과 맞먹는 양의 시각 데이터를 전송한다. 이제 거기에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감각 경로의 수를 곱해보라.(131p)

 

 

정동은 당신이 하루 동일 경험하는 일반적인 느낌이다. 이것은 감정이 아니며 두 가지 특징을 지닌 훨씬 단순한 느낌이다. 첫 번째는 당신이 느끼는 쾌감 또는 불쾌감에 관한 것인데, 과학자들은 이것을 유인성valence이라고 부른다. 피부에 와닿는 햇빛의 쾌감,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 선사하는 맛있는 느낌, 복통이나 심한 통증이 안기는 불쾌감 등은 모두 정동적 유인성의 예다. 정동의 두 번째 특징은 당신이 느끼는 평온 또는 동요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흥분도arousal라고 불린다. 좋은 소식을 기다릴 때의 기운 넘치는 느낌,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후의 예민한 느낌, 오래 달리기 후의 피로, 잠을 못 자서 느끼는 피곤함 등은 흥분도가 높거나 낮은 예다.

(...)

정동은 이미 말했듯이 내수용에 의존한다. 이것은 정동이 당신의 삶 전체에 걸쳐, 심지어 당신이 완전히 가만히 있거나 잠들어 있을 때도 끊이지 않는 연속적 흐름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당신이 감정적으로 경험하는 어떤 사태에 대한 반응으로 켜지거나 꺼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동은 밝음이나 시끄러움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근본적인 측면이다. 당신의 뇌가 물체에서 반사된 빛의 파장을 표상하면, 당신은 밝음과 어두움을 경험한다. 당신의 뇌가 공기의 압력 변화를 표상하면, 당신은 시끄러움과 조용함을 경험한다. 그리고 당신의 뇌가 내수용성 변화를 표상하면, 당신은 쾌감과 불쾌감, 동요와 평온을 경험한다. 정동, 밝음, 시끄러움은 모두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 있다.(150-151p)

 

 

정동의 원인을 모른 채 정동을 경험할 경우 당신은 정동을 세계에 대한 당신의 경험이 아닌 세계에 관한 정보로 취급할 확률이 높다. 심리학자 제럴드 클로어는 수십 년 동안 재치 있는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매일 직감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는지 연구했다. 이런 현상은 정동 실재론이라고 불린다. 우리가 세계에 관한 사실로 경험하는 것이 일부는 우리의 느낌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155p)

 

 

당신의 신체 예산에 대규모 예금 또는 인출이 발생할 때마다(예: 음식 먹기, 운동하기, 부상당하기) 당신의 뇌가 이것을 따라잡기까지 조금 기다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 마라톤 선수들은 이것을 잘 안다. 그들은 레이스 초기에 신체 예산이 아직 바닥나지도 않았어도 일찌감치 피로를 느낀다. 그래도 계속 달리다보면, 불편한 느낌이 사라진다. 이렇게 그들은 에너지가 바닥났다고 주장하는 정동 실재론을 무시한 셈이다.

이것이 당신의 일상생활에 의미하는 바를 잠시 따져보자. 당신은 신체로부터 받는 느낌이 신체의 실제 상태를 언제나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방금 배웠다.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느낌, 허파에 공기가 차는 느낌 같은 낯익은 감각과 전반적인 쾌감, 불쾌감, 동요, 평온 같은 정동은 실제로 당신의 신체 안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당신의 내수용 신경망에서 이루어지는 시뮬레이션의 결과다.

한마디로 말해 당신은 당신의 뇌가 믿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정동은 기본적으로 예측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이미 당신의 뇌가 믿는 것을 당신이 보게 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것이 바로 정동 실재론이다. 그런데 당신이 살면서 경험하는 대다수 느낌도 마찬가지다. 손목에서 맥박이 뛰는 느낌도 뇌의 감각 부위에서 구성되고 감각 입력(실제 맥박)을 통해 수정되는 시뮬레이션이다. 당신이 느끼는 모든 것은 당신의 지식과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수행된 예측에 기초한다. 당신은 진실로 당신 경험의 설계자다. 믿는 것이 곧 느끼는 것이다.(160-161p)

 

 

그러나 이런 '특정 조건' 중의 하나는 바로 인간이 합리적 의사 결정자라는 것이다. 나는 지난 50년 동안 수많은 실험 연구를 발표하면서 사람들이 합리적 행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왔다. 당신은 합리적 사고를 통해 감정을 극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신체 예산 상태가 모든 사고와 지각의 기초이며 내수용과 정동이 당신의 매 순간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합리적 존재로 경험할지 모르지만,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당신의 신체 예산과 이에 연결된 정동이 꿈틀거리고 있다.

만약 인간의 마음이 합리적이라는 견해가 경제에 그렇게 해로운 것이라면, 그리고 이것이 신경과학의 뒷받침을 받지도 못한다면, 어째서 이런 견해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버티는가? 그 이유는 동물의 왕국에서 우리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합리성이라는 오랜 믿음 때문일 것이다.(165-166p)

 

 

당신의 지각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직접적이기 때문에 당신은 세계 자체를 경험한다고 믿지만, 실제로 당신이 경험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 구성한 세계다. 당신이 외부 세계로서 경험하는 것의 많은 부분은 당신의 머리 안에서 시작된다. 당신이 얼룩들 안에서 꿀벌을 지각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개념을 사용해 범주화할 때 당신은 당신에게 제공되는 정보를 넘어선다.

이 장에서 나는 당신이 감정을 경험할 때마다 또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지각할 때마다 당신이 또다시 개념을 사용해 범주화하면서 내수용과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감각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설명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성된 감정 이론의 핵심 주제다.

"당신은 범주화를 통해 감정 사례들을 구성한다. 이 얼마나 특별한 현상인가?"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지각, 사고, 기억, 기타 정신 사태가 범주화를 통해 구성되며, 따라서 감정 사례도 당연히 똑같은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보이는 것이 핵심이다.(174p)

 

 

실제로 관련 연구에 따르면 아기는 단어 없이 물리적 유사성으로 정의된 개념보다 단어를 제시했을 때 목표에 기초한 개념을 더 잘 학습한다.

나는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경이롭다는 느낌을 받는다. 비슷하게 생긴 물체들을 보면서 이것들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는 동물은 무수하게 많다. 그러나 인간의 아기는 생김새도 다르고 소리도 다르며 촉감도 다른 물체들을 제시해도 여기에 단어 하나만 추가하면 이런 물리적 차이를 넘어서는 개념을 형성한다! 아기는 물체들이 오감을 통해 직접 지각할 수 없는 심리적 유사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이 유사성이 바로 우리가 개념의 목표라고 부른 것이다.(195p)

 

 

"내 뇌에서 나의 과거 경험을 사용해 주위 환경에 알맞은 '공포' 개념의 사례를 구성한 뒤 뱀이 길 앞에 나타나기도 전에 시각 뉴런의 점화를 변화시킴으로써 내가 뱀을 지각하고 다른 방향으로 도주하도록 준비를 갖추었으며, 내 예측이 확증되자 내 감각도 범주화되었고, 그래서 나는 내 감각을 목표에 맞게 설명해주는 공포 경험을 구성했고, 정신적 추론을 통해 뱀을 내 감각의 원인으로 그리고 도주를 이것의 결과로 지각하게 되었다."

(...)

지금 이 순간 이 단어들을 읽는 당신의 뇌에는 이미 감정에 대한 강력한 개념 체계가 배선되어 있다. 처음에 당신의 뇌는 순수하게 정보를 얻는 체계로 시작하여 통계적 학습을 통해 당신의 세계에 관한 지식을 획득했다. 그리고 단어 덕분에 당신의 뇌는 당신이 학습한 물리적 규칙성을 넘어 다른 뇌들과 협력하는 가운데 당신 세계의 일부를 발명했다. 당신이 창조한 강력하고 순전히 정신적인 규칙성은 당신의 신체 예산을 통제하여 생존하는 데 기여한다. 이런 정신적 규칙성의 일부가 바로 감정 개념이며, 이것의 기능은 당신의 심장이 마구 뛰고, 당신의 얼굴이 붉어지고, 특정 상황에서 특정 방식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이유에 대한 심리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추상물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함으로써 그리고 범주화에 사용되는 개념들을 서로 동기화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지각하고 이에 관해 소통할 수 있게 된다.(215-216p)

 

 

소피아의 뇌에 생겨난 174가지 예측들의 개체군은 '레게머리를 한 사람'이라는 개념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런 사례들이 하나의 개념으로 '분류'된다고 말하곤 했지만, 실제로 소피아의 뇌 어느 곳에도 이렇게 분류된 '집단'이 따로 저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개념은 정보의 흐름 속에서 단 하나의 특정 뉴런 집단에 의해 표상되는 것이 아니다. 개념은 다수 사례의 개체군일 뿐이며, 이런 사례들은 매번 다양한 뉴런 패턴으로 표상된다(이것이 변성이다). 개념은 매순간 즉석에서 구성된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사례 가운데 패턴 일치의 측면에서 소피아의 현재 상황에 가장 비슷한 것이 바로 우리가 '최종 사례'라고 부른 것이 된다.(227-228p)

 

 

감정은 사회적 실재의 전제 조건인 두 인간의 능력을 통해 우리에게 실재가 된다. 우선 '꽃', '돈', '행복'같은 개념이 존재한다고 동의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지식은 흔히 집단지향성이라고 불린다. 모든 사회의 토대는 사람들이 굳이 관심을 갖지 않는 집단지향성으로 이루어진다. 당신의 이름조차 집단지향성을 통해 실재가 되었다.

내가 보기에 감정 범주는 집단지향성을 통해 실재가 된다. 당신이 화가 났다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려면 두 사람 사이에 '분노'에 대한 공유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만약 안면 움직임과 실현관 변화의 특정 조합이 특정 맥락에서 분노를 의미하려면 사람들 사이에서 동의가 있어야 한다. 당신이 이런 동의에 대해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심지어 당신은 특정 사례가 분노인지 아닌지에 대해 동의할 필요도 없다. 당신은 특정 기능을 지닌 분노가 존재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만으로도 이 개념에 관한 정보가 사람들 사이에 효율적으로 전파되어 분노가 마치 타고난 것처럼 보이게 될 수 있다. 만약 특정 맥락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분노를 나타낸다는 동의가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한다면, 그리고 내가 눈살을 찌푸린다면, 나는 당신과 효율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내 움직임 자체를 통해 분노가 당신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공기 진동 자체를 통해 소리가 전달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개념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힘입어 내 움직임은 당신의 뇌에서 예측을 개시하게 만드는 단서가 된다. 이것은 인간이 부리는 독특한 종류의 마술이다. 이것은 협동 행위로서 이루어지는 범주화다.(256-257p)

 

 

이제 우리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가장 도전적인 견해 중의 하나에 도달했다. 당신은 감정 개념이 있어야만 관련된 감정을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다. 이것은 필요 조건이다. '공포'에 대한 경험이 없으면 공포를 경험할 수도 없다.

(...)

몇몇 과학자는 감정 개념 없이도 감정 자체는 존재하며 당사자가 깨닫지 못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감정 상태가 의식 밖에 존재할 수 있음을 가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이런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는 않는다. 만약 당신에게 '꽃'의 개념이 없는데, 누가 당신에게 장미를 보여준다면, 당신은 식물을 경험할 뿐이며 꽃을 경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꽃을 보고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는 없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2장에서 본 얼룩 이미지 자체에 꿀벌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꿀벌을 지각한 것은 오직 꿀벌에 대한 개념적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는 똑같은 추론을 감정에도 적용할 수 있다. 범주화에 사용할 '리제트', '슬픔', '칩 부재감'같은 개념이 없으면 감정도 없으며 오직 감각 신호 패턴이 있을 뿐이다.(268-271p)

 

 

유전자가 당신에게 선사한 뇌는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에 어울리게 배선될 수 있으며, 이런 환경은 당신의 문화 속에 있는 다른 구성원과 당신이 함께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 이상의 뇌가 있어야 마음이 창조된다.

구성된 감정 이론은 개인의 책임에 대해서도 완전히 새로운 사고 방식을 제시한다. 당신이 상사에게 화가 나서 상사 상사의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고 그를 멍청이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맹비난을 퍼부었다고 가정해보자. 고전적 견해에서는 가설상의 분노 회로가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당신의 책임이 일부 면제될지 모르지만, 구성의 관점에서는 책임의 범위가 가해의 순간 너머까지 확장된다. 이때 당신의 뇌는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한다. 뇌의 핵심 체계에서는 바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끊임없이 추측하며, 이런 예측을 바탕으로 당신은 생존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의 행동과 이런 행동의 출발점이 된 예측은 바로 이 순간까지 이어진 당신의 모든 과거 경험에(개념으로서 작용하는 과거 경험에) 기초한다.

(...)

"당신이 가진 개념들에 대한 당신의 책임은 무엇인가?" 물론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당신에게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아기였을 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머릿속에 넣어주는 개념을 선택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성인으로서 당신에게는 당신이 무엇을 접할지, 그래서 무엇을 학습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회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개념들이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행동을(그것이 의도한 행동으로 느껴지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인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291-292p)

 

 

만약 당신이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사회에서 성장했다면, 당신이 관련 개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당신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제 성인이 된 당신은 자신을 교육하고 또 다른 개념을 추가로 학습하는 기회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과제는 아니다. 내가 "당신이 당신 자신의 경험의 설계자"라고 반복해서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신은 당신의 행동에 대해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 이것은 당신의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적 반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해치는 행동을 삼가도록 예측을 통해 당신을 인도하는 개념을 학습할 것인지는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다. 또한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 당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개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이런 행동들을 통해 어떤 환경이 조성되는가에 따라 다음 세대의 뇌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의 뇌 배선을 좌우하는 유전자가 활성화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실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서로의 행동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모든 것을 사회 탓으로 돌리는 막연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뇌 배선의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294p)

 

 

전체적으로 볼 때 구성된 감정 이론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생물학적인 지식에 기초한 심리학적 설명을 제공한다. 이 이론은 진화와 문화의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한다. 당신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몇몇 뇌 배선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몇몇 유전자는 환경에 따라 활성화되기도 하고 비활성화되기도 하며, 이를 통해 당신의 뇌는 당신의 경험에 맞게 배선될 수 있다. 당신의 뇌는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여러 실재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여기에는 사람들 사이의 합의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세계도 포함된다. 비록 당신이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마음은 거대한 공동 작업의 산물이다. 구성을 통해 당신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얼룩진 꿀벌 사진을 보면서 그랬던 것처럼 당신 자신의 필요와 목표와 이전 경험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지각한다. 그리고 인간은 진화의 정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몇몇 독특한 능력을 지닌 매우 흥미로운 종류의 동물일 뿐이다.(297p)

 

 

또한 본질주의는 반증하기가 매우 어렵다. 본질은 관찰 불가능한 속성일 수 있으므로 본질이 발견되지 않아도 그것의 존재를 믿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어째서 실험을 통해 본질이 확인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이유를 붙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우리는 아직 모든 곳을 살펴보지 않았다." "이 복잡한 생물학적 구조의 내부는 우리가 아직 들여다볼 수 없다." "오늘날 사용한느 도구는 본질을 찾아낼 만큼 강력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물론 이러한 희망적인 사고가 진심이 담긴 말일 수는 있어도 논리적으로 반증 불가능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렇게 본질주의는 반대 증거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다.

(...)

그런가 하면 본질주의는 인간이 타고난 심리적 소질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은 순전히 정신적인 유사성을 생각해냄으로써 범주를 창조하고 이것에 이름을 붙인다. 그래서 '애완동물'이나 '슬픔'같은 한 단어가 수많은 사례에 적용된다. 단어는 인간의 놀라운 업적임에 틀림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뇌에게 있어서 파우스트의 거래와도 같은 것이다. 한편으로 '슬픔'같은 단어가 다양한 지각에 적용될 때 우리는 눈에 띄는 차이 너머로 근저에 깔린 동일성을 찾으려는(또는 발명하려는) 유혹에 직면한다. 다시 말해 '슬픔'이라는 단어를 통해 그럴싸한 물체와도 같은 한 가지 감정 개념이 창조된다. 또한 단어는 동일성의 근거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부추긴다. 깊숙이 놓여 있어 관찰 불가능한,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어떤 성질에 대한 믿음, 등가성의 근거가 되고 다양한 사례들의 진정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어떤 성질에 대한 믿음을 부추긴다. 한마디로 말해 단어는 본질에 대한 믿음을 부추기며, 이런 과정이야말로 본질주의의 심리적 기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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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개념을 학습할 때 도움이 되는 바로 그 단어의 속임수에 빠져 우리는 단어가 가리키는 범주가 자연에 원래 있는 경계를 반영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기 쉽다.(306-307p)

 

 

그러나 현대 신경과학은 변연계가 허구라는 사실을 증명했으며, 뇌 진화의 전문가들은 더 이상 변연계에 관한 주장을 진지하게 취급하지도 않을뿐더러 이것이 과연 통일된 체계인가 하는 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변연계가 뇌에 자리 잡은 감정의 소재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감정에만 전문화된 뇌 부위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317p)

 

 

오늘날 있지도 않은 감정의 실체를 찾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이 허비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런 망각 때문에 그만큼 더 가난해진 셈이다. 오늘날 마이클 마이크로소프트는 감정을 인식하겠다는 목표 아래 얼굴 사진을 분석한다. 애플은 최근에 인공 지능 기법을 사용해 표정에서 감정을 탐지하는 기술을 개발 중인 이모션트라는 신생 기업을 인수했다. 몇몇 회사에서는 표정에서 감정을 탐지하는 프로그램을 구글 글래스에 적용해 자폐아를 돕는 장치를 개발 중이다. 스페인과 멕시코의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표정에서 투표 선호도를 읽어낸다는 이른바 신경정치학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업가와 과학자가 여전히 본질주의에 몰두하는 동안 감정에 관해 가장 긴급한 몇몇 물음은 미해결된 채로 남아 있고, 중요한 물음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324-325p)

 

 

골먼의 책들은 실제적이고 그럴 듯한 조언을 많이 제공하지만, 그의 조언이 왜 효과가 있는지를 적절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골먼의 주장은 시대에 뒤진 '삼위일체 뇌' 모형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른바 감정적인 내면의 짐승을 효과적으로 조절하면 감성지능을 높일 수 있다는 식이다.

감성지능은 개념의 관점에서 더 잘 규정될 수 있다. 당신이 아는 감정 개념이라곤 '기분이 아주 좋다'와 '기분이 더럽다'라는 두 개밖에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당신은 감정을 경험할 때마다 또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지각할 때마다 오로지 이 거친 붓으로 범주화를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감성 지능이 높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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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더럽다'의 50가지 뉘앙스를 안다면, 당신의 뇌는 예측과 범주화와 감정 지각의 훨씬 더 많은 옵션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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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감정 입자도, 즉 감정 경험을 얼마나 섬세하게 구성하는가의 문제다. 감정 경험을 고도로 섬세하게 구성하는 사람은 감정의 전문가다. 이런 사람은 구체적인 상황에 적절하게 맞춘 듯 미세하게 조정된 예측을 내놓고 감정 사례를 구성한다.(335-336p)

 

 

자, 이제 당신은 균형 잡힌 신체 예산을 위해 최선을 다해 생활 방식을 뜯어 고쳤고 감정 전문가가 되기 위해 개념 체계를 보강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여전히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사랑이 요구하는 양보와 타협, 사회적 삶의 애매하고 다의적인 측면, 불안정한 직장, 변덕스러운 우정,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말을 듣지 않는 몸 등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런 순간에 당신의 감정을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간단한 방법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너무 간단한 방법이어서 믿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동물은 움직임을 사용해 신체 예산을 조절한다. 동물의 뇌에서 신체 수요보다 더 많은 포도당을 내놓으면, 잽싸게 나무를 타고 올라가 에너지 수준을 다시 균형 상태로 돌릴 것이다. 반면 인간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순전히 정신적인 개념을 사용해 신체 예산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동물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당신도 동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마음에서 내키지 않더라도 일어나 이리저리 움직여라.(347p)

 

 

당신은 정동적 느낌이 세계를 바라보는 렌즈가 되도록 놔두는 대신에 이런 느낌을 단순한 신체 감각으로 해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당신은 불안을 빨리 뛰는 심장으로 해체할 수 있다. 그리고 일단 신체 감각으로 해체했으면, 당신이 가진 풍부한 개념을 사용해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재범주화할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의 가슴이 뛰는 것은 불안이 아니라 기대나 설렘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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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개념을 알고 더 많은 사례를 구성할 수 있다면 그만큼 더 효과적인 재범주화를 통해 당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행동을 조절할 수 있다. 예컨대 당신이 시험을 앞두고 흥분을 느낀다면, 당신은 이것을 해로운 불안으로 범주화할 수도 있고("아, 시험을 망칠 것 같아!") 아니면 유익한 예상으로 범주화할 수도 있다("힘이 솟는다. 나는 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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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재범주화는 당신의 삶에 실질적인 혜택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대학원 입학 자격시험 같은 시험 성적을 살펴본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불안을 신체가 제대로 대처하고 있다는 신호로 재범주화하는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높은 점수를 얻었다.(350-351p)

 

 

나는 신체 예산 적자가 모든 정신질환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산 조절이 최상의 치료법이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견해 덕분에 신체 예산이 전통적으로 별개의 것으로 간주된 질병의 공통 요인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

젊은 사람이 신체 예산의 만성 초과 인출 상태에 빠지는 수많은 방식을 이제 잠깐 상상해보자. 명백한 남용과 부주의가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작은 사태들도 무수히 존재한다. 그들이 텔레비전, 영화, 동영상, 컴퓨터 게임에서 목격하는 폭력의 지속적인 흐름이 있다. 그들이 대중음악에서 듣는 모멸적인 언어와 "야이, 새끼야"라고 또래에게 인사할 때 무심코 흉내 내는 것들이 있다.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조크 형태의 약자 괴롭힘이 증가하고, 사람들이 서로에게 끔찍한 말을 내뱉으면 녹음된 관객 웃음 소리가 뒤를 잇는다. 이 밖에도 부족한 수면 및 운동, 문자 메시지와 몇몇 형태의 사회적 미디어가 제공하는 거의 무궁무진한 사회적 거부의 기회, 영양가가 의심스러운 불량 식품의 범람 등은 만성 신체 예산 불균형에 시달리는 한 세대의 성인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문화적 요리법과도 같다.(397-398p)

 

 

배심원과 재판관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과제가 주어진다. 그들은 독심술사가 되거나 거짓말 탐지기가 되어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이 상해를 야기하려고 했는지 결정해야 한다. 법률 제도에 따르면 의도는 피고 얼굴의 코만큼이나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예측하는 뇌에 있어서, 누군가의 의도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당신이 탐지한 사실이 아니라 피고의 행동을 근거로 당신이 구성한 추측이다. 감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도에 대해서도 지각하는 사람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기준이 없다. 70년간의 심리 연구는 이런 판단이 심리 추론, 즉 추측임을 뒷받침한다. DNA 증거가 피고를 범죄 현장으로 연결해줄지라도 이것은 피고가 범죄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결정하지 못한다.

재판관과 배심원은 보통 자신의 신념, 고정 관념, 현재 신체 상태에 따라 의도를 추론한다.(426p)

 

 

재판관은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재판관은 감정을 자각해야 하고 분명히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감정을 현명하게 이용하기 위해, 나는 재판관들이 높은 입자도의 감정 경험을 배울 것을 제안한다. 불쾌감을 느끼는 재판관이 분노를 짜증이나 배고픔과 다른 것으로 경험할 수 있을 만큼 섬세한 범주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직무 수행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445-446p)

 

 

8장에서 논한 것처럼, 예측성 뇌는 자기 통제의 지평을 행동 순간 너머로 확대하고, 따라서 당신의 책임을 복잡한 방식으로 확대한다. 당신의 문화는 특정 피부색의 사람이 범죄자가 되기 쉽다고 당신에게 가르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이런 신념이 야기할 수 있는 상해를 경감시키고 다른 방향에서 당신의 예측을 연마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피부 색이 다른 사람을 친구로 삼을 수도 있고 이들이 법을 준수하는 시민이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다. 반면에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 고정 관념을 강화하는 텔레비전 쇼를 안 볼 수도 있다. 또는 당신 문화의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를 수도 있고, 당신에게 부여된 정형화된 개념을 수용할 수도 있으며, 특정 사람을 나쁘게 대하는 기회를 증가시킬 수도 있다.

성경 연구 모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회원을 쏘아 죽인 딜런 루프는 백인 우월주의 상징으로 자신을 둘러싸기로 했다. 분명히 루프는 인종주의에 젖은 사회에서 자랐다. 그러나 대다수 미국의 성인도 그렇게 자랐지만 대다수는 돌아다니며 사람을 쏘아 죽이지 않는다. 따라서 뉴런 수준에서, 당신과 당신의 사회는 당신 뇌에서 더 가능성이 있는 특정 예측을 공동으로 야기한다. 그러나, 당신은 해로운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책임을 여전히 지고 있다. 더욱 난감한 진실은 최종적으로 우리 각자가 자신의 예측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법에는 이렇게 예측에 기초해 책임을 이해하는 판례가 있다. 예컨대 만약 음주 운전을 하다가 차로 누군가를 치었다면 당신은 음주 상태에서 팔다리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더라도 당신이 야기한 상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모든 성인은 음주 상태가 잘못된 의사 결정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그 후에 딜어난 사고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

법에서는 이것을 예견 가능성 논거라 한다. 당신이 상해를 가할 의사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책임이 있다.

(...)

어쨌든 뇌는 자신이 발견하는 사회적 실재에 그 자신을 배선한다. 이 능력은 우리가 종으로서 가지는 가장 중요한 진화 이익의 하나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 세대의 뇌에 배선될 개념에 약간의 책임을 진다.(451-453p)

 

 

이제 우리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동물은 수용성으로 신체 예산을 조절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동물은 동물의 왕국 전체가 아니라 쥐, 원숭이, 유인원, 개 같은 포유동물이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꽤 안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은 정동을 경험하는가? 이번에도 나는 몇몇 생물학적 단서와 행동적 단서를 근거로 꽤 자신있게 그렇다고 답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은 개념을 학습할 수 있고 이런 개념을 이용하여 예측하면서 범주화할 수 있는가? 분명히 그렇다. 동물은 행동에 기초한 개념을 학습할 수 있는가? 분명히 그렇다. 동물은 단어의 의미를 학습할 수 있는가? 어떤 환경 하에서, 뇌가 상징들을 포착하여 나중에 사용하려고 저장할 수 있는 통계적 패턴의 부분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몇몇 동물은 단어 또는 다른 상징 체계들을 학습할 수 있다.

그러면 동물은 단어를 사용하여 통계적 규칙성 너머의 세계로 갈 수 있는가? 다르게 보이거나 다르게 들리거나 다르게 느껴지는 물체 또는 행동을 결합하는 목표에 기초한 유사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동물은 단어를 안내장으로 사용하여 정신적인 개념을 형성할 수 있는가? 동물은 세계에 대해 필요로 하는 정보가 그들 주위의 다른 동물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가? 동물은 행동을 범주화하여 이를 정신 사태로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 인간이 하는 방식으로는 하지 못한다. 유인원은 상상 이상으로 우리 자신의 범주화와 비슷한 범주화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지구상의 인간 아닌 동물이 인간이 가진 것과 같은 종류의 감정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우리만이 감정 개념을 포함한 사회적 실재를 만들어내고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성분을 가지고 있다.(483-484p)

 

 

동물 감정을 연구한 몇몇 연구자들의 유튜브 동영상과 테드 강연에서 심리 추론 오류를 여전히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몇 가지 행동을 대표하는 동물 영화 또는 사진을 당신에게 보여준다. 쥐를 간질일 때 쥐가 얼마나 행복한지 보라. 개가 낑낑거릴 때 얼마나 슬픈지 보라. 쥐가 꼼짝 않을 때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보라. 그러나 감정은 관찰되지 않고 구성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2장에서 임의의 얼룩이 꿀벌로 바뀌는 과정을 자각하지 못하듯이 동영상을 볼 때 당신은 개념적 지식을 이용하여 추론한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당신에게 동물은 감정적인 것처럼 보인다.(495p)

 

 

 

 

ㅡ 리사 펠드먼 배럿,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中, 생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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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7
 
'이 반석 위에서'가 압도적으로 잘 썼고, '정말 리얼한 것의 차원으로'에서의 리얼리티에 대한 통찰있는 분석도 좋았다. 내가 살면서 절대 경험하지 않았거나 못할 것에 대해 취재를 기반으로 독자를 대리 경험의 장으로 초대하는 에세이라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이하 DFW)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둘 다 읽은 입장에서 비교하자면 DFW가 쓰는 글이 상대적으로 더 집요하고 집착적이며 읽는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지만 그만큼 읽고 난 후의 충만감이 크다면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의 글은 덜 집요해서 쉽게 읽히고 유머러스하다. 다만 에세이마다 편차가 큰 것 같다. 관심도 때문일까?
 
 
 
크리스천록의 순조로운 성공은 이런 맥락에서 이뤄진다. 만약 그들의 음악이 완전히 엉망이라고 생각하다면, 그건 당신이 우선시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언가 멋지고 새로운 걸 듣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하는 한편 그들의 청중이 좋아한다는 사실이 이미 확인된 곡들을 연주한다··· 그것이 크리스천록이다. 반면에 크리스천 밴드는 그냥 보통 밴드인데 구 구성원 가운데 한 명 이상의 크리스천이 있는 경우다. U2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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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 시건방진 소리를 하자면,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의 음악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간단치 않은 문제가 개입한다. 이 질문을 제기해야 하는 건, (데이미언 주라도 같은 이처럼) 끝내주는 노래를 쓸 능력이 있는 어떤 열성 크리스천이 이제 막 열아홉살이 됐는데 크리스천록과 관련된 뭐라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재능은 표면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일정한 수준의 섬세함과 예민함과 더불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크리스천록 시장을 주도하는 이들은 U2나 스위치풋 같은 밴드들이 노골적으로 '예수-사랑'의 메시지를 내세우는 이들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조용히 노력하는 것에 일종의 유보적인 승인을 해주는 태도를 취해왔다. 현실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위해서는 이런 노골적인 메시지를 피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리스천록은 하나의 음악적 장르ㅡ정말로 그렇게 보인다ㅡ라고 말할 수 있는데, 뛰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 장르는 내가 알기로는 이것 하나 뿐이다.(36-37p)
 
 
가장 말을 아껴서 표현한다고 해도, 그들은 매력적이었다. 나는 질문을, 그것도 수도 없이 많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걸 즐겼다. 대답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복음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다. 평균적인 불가지론자들은, 이를테면, 성서를 구성하는 텍스트들 사이에서 보이는 불일치의 문제들에 대해 명쾌하고 심사숙고된 변론을 내놓을 수 있도록 잘 훈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거듭난 크리스천들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 의문을 품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에 대비해 훈련을 받는다. 당신이 이제 막 열네 살이 됐고 지적인 야심은 있지만 적절한 영양 공급은 안 되고 있는 상태인데, 카리스마 넘치는 어른이 당신을 앉혀놓고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자, 달력의 한 해 중 이 기간을 유태인 달력으로 전환시켜놓고 그걸 7배수한 뒤 그걸 아무개 왕 치세의 어느 날짜에 연결시키면, 성서의 이 구절이 예수의 탄생을 거의 시간까지 예측하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단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런 정보에 대해 알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혹했다.(50p)
 
 
기독교에 관한 모든 것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맥락 안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그 조건들을 수용한다면 말이다. 일단 그러고 나면, 당신은 신앙의 이름으로 데이터를 수정하기 시작하고(그것들이 스스로를 논리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수정된 데이터들은 다시 신앙을 강화한다. 이 과정에서 명백하게 비논리적인 순간을 따로 분리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어쩌면 그런 순간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건 확대경을 들고 팔을 쭉 폈다 눈 가까이로 가지고 올 때 일어나는 현상과 다르지 않다. 멀리 들고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뒤집혀 있고, 가까이 가져오는 동안에도 계속 뒤집혀 있다 어느 순간 바로 서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의 중간에 무엇이 개입하고 있을까? 무언가가 있었다면, 관찰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리 지나가버렸다. 이것이 신앙에 속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건, 격언에도 있지만, 그들이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ㅡ많은 경우들이 존재한다ㅡ신앙이란 것은 당신의 뒤에서 잠기는 논리적인 문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생각의 끈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을 휘어지면서 원을 그리고 있고, 그 원은 당신을 안에 가둔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배교자는 진정한 크리스천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나는 이 두 가지 진술 모두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내 옛 친구들에 대해 쓰면서 어쩔 수 없이 미안해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걸 보면 사실은 내가 그들의 일원이었던 적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게 아닐까?(54-55p)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는 것과, 만약 그것이 진실이었을 때 그걸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이 견고하다는 건 다른 이야기다.(72p)
 
 
라이틀은 남북전쟁에 이토록 가까이, 어린 아이였을 때 잠에 빠져들면서 그 핀을 만지작거릴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서 한 세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18세기였다. 그렇게 한 시대가 다른 시대로 이어져 있었다. 한 사람이 아흔이 넘도록 살다보면 이런 식으로 시간이 겹치는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라이틀이 태어났을 때, 라이트 형제는 아직 제대로 된 비행기 디자인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가 죽었을 때는 보이저 2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살아 있을 동안 이런 구체적인 일들이 공존하는 걸 목격할 때 우리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은 그에게 무거운 문제였다.(117p)
 
 
나는 여러분이 이 쇼와 그걸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어디까지 인정할 준비가 돼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일단 이게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한느 시늉이라도 해보겠다. <리얼 월드>의 한 시즌이 끝나면, 그 시즌 동안 인기를 끌었던 멤버들(이 인기는 신체적인 매력, 모든 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특성, 그리고/또는 흔히 볼 수 없는 이상한 짓들을 통해 얻어진다)은 그 시리즈의 빛나는 표면 바로 밑에 존재하는 그림자의 세계 속으로 초대된다. 이 세계에만 있는 수많은 구역들과 그에 걸맞은 할 일이 있다. 클럽에 나타나고, 봄방학(이건 바와 클럽이 여러 개 있는 바닷가 리조트에서 며칠 동안 질펀하게 노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클럽을 확대해놓은 것이다)을 즐기고 "강연"(대학이나 청년 단체, 금연 단체 등 어디가 됐든ㅡ특히 쇼를 통해 어떤 특성, 이를테면 동성애자라거나 알코올의존증, 식욕이상항진증, 유방 확대 수술 뒤의 불만족, 분노 조절 장애, 빈곤, 큰 배만 보면 기절하는 증세,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인종차별주의 등을 드러냈을 경우, 그에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 그룹에 초대받는 데 유리하다)을 다닌다. 그리고 '제품 소개'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리얼 월드/로드 룰스 챌린지> 쇼에서 가장 눈에 잘 띄고 질투를 받을 정도로 보호받는 위치를 차지하는 일이 그것이다.(147-148p)
 
 
사람들이 리얼리티 TV가 사실 리얼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길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다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거야."
(...)
그러고 나서는 일종의 재해석이 시도되었는데, 어쩌면 거기에 리얼한 무언가가 있다는 식의 태도였다. "그게 왜 그런 거냐면, 우리도 그렇게 자아도취적인 데가 있잖아요." "우리가 어떤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을 제공해주죠···" 이런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낸 이 모든 가상 인물들의 주장에는 리얼리티 TV의 가장 흥미로운 한 가지 특성이 빠져 있다. 그것은 리얼리티쇼가 적정화된 리얼리티를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92년에 <리얼 월드>가 처음 시작되고, 이 쇼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일종의 패턴은 그 후로 등장한 모든 리얼리티쇼들이 따르는 본보기가 되었는데, 그때만 해도 이 쇼가 보여주는 게임들은 조악하고 뻔한 것이었따. 인물들은 "카메라를 의식"하기도 했고, 혹은 순간적으로 "카메라의 존재를 망각"하기도 했다. 이 두 요소는 물빛이 달라지듯 뒤섞이곤 했다. 이때만 해도 리얼리티쇼라는 형식이 인스타그램의 순위 평가와 초저예산의 제작비만 들여도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텔레비전이라는 지평에서 난마같이 뒤얽히기 전이었고, 누가 됐든 가족이나 사돈, 옛날 여자친구 중 최소한 한 명은 그런 쇼에 나온 사람이 있는 시대가 오기 전이었다. 또한 리얼리티쇼에 출연하는 것이 첫 아파트를 사거나 첫 종아리 확대 시술을 받는 것 같은 통과의례가 되기 전이었다.
(...)
이제 이런 쇼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어릴 때부터 이런 쇼를 보면서 즐기던 이들, 이런 쇼들을 통해 의식이라는 것이 형성된 이들(특히 젊은 세대 가운데) 중에서 나오는 지점에 도달했다. 저 아래 어디에선가 스위치가 켜졌다. 이제 리얼리티쇼를 볼 때 우리가 보는 건 대충 짜놓은 시나리오 속으로 거칠게 내던져진 뒤 카메라 앞에 대책 없이 노출된 사람들이 아니라, 리얼리티쇼에 출연하는 연기를 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 사람들이다. 이것이 요즘 방영되는 모든 리얼리티쇼의 플롯이다. 그들이 지어낸 주제가 뭐가 됐든 말이다.
이 모든 거짓을 공모하는 게 자신들이 연루되어 있다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더 큰 자아를 향해 스스로를 전환시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리얼리티쇼는 더욱 리얼해졌다. 왜냐하면, 당연하게도, 리얼리티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정확히 바로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여기에 이런 요소를 더해보자. 만약에 내 일이라는 게 리얼리티쇼에 출연하는 것이라면, 그 안에서 카메라에 담기고, 그래서 당신이 날 지켜보게 하고, 이 과정에서 스스로가 투사되는 모습을 자의적으로 조절하고, 불확정성이 반복된다면? 그게 만약 나의 리얼리티라면? 당신의 얼굴은 아직 녹지 않고 있는가?
여기가 바로 우리가, 그런 인간들로, 서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다. 또 다른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ㅡ불과 지난 몇 년 사이에ㅡ그건 리얼리티 TV라는 게 나온 이후로 계속해서 보완되어온 시스템이 스스로를 급격하게 강화시킨 것과 관련 있다. 왜냐하면 제작진이 이런 쇼들에 새로 충원할 만한 그룹에 속한 이들은 이미 리얼리티쇼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데다, 이런 쇼에 등장하는 순간 온갖 수모를 당하고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이미지가 망가질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고, 따라서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원래 이미지를 잃지 않기 위해 잔뜩 경직된 채 "성스러운" 인간처럼 연기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지원자들을 조심스럽게 사전에 걸러내야 하는 프로듀서와 캐스팅 디렉터들로서는 "즉발적인" 개인들, 미즈가 만족스러운 듯 말한 바에 따르자면 "어쩔 수 없이 늘 자기 자신이어야만 하는" 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끝도 없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
그래서 이제는ㅡ요즘 텔레비전을 본 적이 있는가? 가능한 인력 풀을 모두 긁어모아 몽땅 스튜디오에 옮겨놓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리얼해졌다. 누구도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는다. 내 말은, 당연히, 다들 연기를 하지만, 연기를 하지 않는 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54-158p)
 
 
나는 이 지역 출신ㅡ그녀처럼ㅡ이면서 이 지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다 외부인들을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존재로 여길 정도로 소극적으로 변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외부인이란, 더비데이나 되어야 켄터키주가 존재하는 걸 알거나 이런 놀라울 정도로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지역 사람들 모두를 (바로 인근의 맨체스터에서 그랬듯이) "정부 직원을 죽인 미치광이 촌놈들"로 여기는 존재인 것이다. 서장은 이 나라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일을 잘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이 두 가지의 결합이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었다.(271p)
 
 
그 글들에 등장하는 학계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전 지구적인 동물행동의 진화처럼 보이는 이 일련의 흐름들이 사실은 미디어가 이런 일들에 대해 좀 더 주목한 결과라고 주장하거나, 일련의 우연한 사례들이 인터넷에서 돌면서 한데 엮인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가장 너그러운 입장을 취한 이들의 경우에는, 인간의 생활영역이 더 넓어지고 동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영역 밖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 개인이 야생의 동물들에게 노출되는 경우가 잦아진 것이라고 말했다.(480p)
 
 
지금은 이 집에 페이턴이 살고 있었고, 제작진은 그녀가 사용하는 것들을 들여와야 했다. 그레그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우선, 촬영할 때마다 매번 우리 가구를 가져와서 원래 가구들과 교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ㅡ선생님 가족의 가구를 내어가고 우리 걸 가지고 들어오고, 촬영 후 그걸 내어가고 선생님 가족의 물건들을 다시 가지고 들어오는 식으로요. 매번 촬영 전에 내가는 것부터 끝나고 들여오는 것까지 우리가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가지고 온 것들을 그냥 그 자리에 두고, 선생님 가족이 선생님 가족 소유의 가구인 것처럼 사용하는 방법도 있고요. 시리즈가 완전히 끝났을 때까지 두었다가 가지고 나갈 겁니다. 선생님이 새로 이사 온 집을 저희가 장식해드리는 거죠. 어떤 것들은 선생님께 그대로 그대로 드릴 수도 있을 겁니다.
이론적으로는 별문제가 없었다. 다만 실제로는(이 말을 쓸 때마다 웃음이 나오는데), 우리 가족이 TV 세트에서 산다는 걸 뜻했다.(530p)
 
 
 
ㅡ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 <펄프헤드> 中,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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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5/29

 

좋다. 좋아. 굉장히 솔직히 자신을 드러내는 책인데, 술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로 고민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저자의 중독에 대한 분석에 크게 공감하며 읽을 책이다. 술을 먹는 이유에 대한 탁월한 분석인 아래의 내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AA모임에 나가면 가장 먼저 듣는, 그리고 가장 먼저 우리 가슴에 사무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알코올 중독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의 인격이 성장을 멈춘다는 것이다. 술은 우리가 성숙한 방식으로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려면 겪어야 하는 힘겨운 인생 경험을 박탈한다. 간편한 변신을 위해 술을 마신다면, 술을 마시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면, 그리고 이런 일을 날마다 반복한다면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진흙탕처럼 혼탁해지고 만다. 우리는 방향 감각도 잃고 발 딛고 선 땅에 대한 안정감도 잃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기본적 사항들(두려워하는 것, 좋아하는 느낌과 싫어하는 느낌,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필요한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술에 젖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그것을 찾아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113-114p)

 

 

 

 

'그런데 뭐가 문제였지?‘

내 이력은 모범 시민이나 초망받는 젊은이의 것이지, 술주정뱅이의 것이 아니었다. 교육과 학문의 도시 케임브리지가 고향으로, 집은 하버드 대학 근처다. 학력은 아이비리그의 명문 브라운 대학 81년 졸업으로, 마그나 쿰 라우데(우등 졸업)이다. 부모는 저명한 정신분석가 아버지와 예술가 어머니, 두 분 모두 헌신적이며 통찰력과 지성을 고루 갖췄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안정적인 상류층 가정의 모범 자녀였다. 나는 거울을 보며 생각한다.

(...)

물론 간단한 답은 없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은 공기를 묘사하는 것과 비슷할지 모른다. 단정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크고 오묘하고 곳곳에 편재해 있다. 인생의 모든 굽이에 알코올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존재를 느끼면서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사실은 하나, 알코올이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평범한 술꾼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구체적인 선을 넘어 버리는 것은 어떤 단순한 이유, 어떤 한순간, 어떤 단일한 심리적 사건을 통해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느리고 점진적이며 집요하고도 불가해한 형성의 과정이다.(22p)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들은 주변에 아주 흔하다. 이들은 직장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식품점 계산대에 얌전히 줄 서 있다. 의사, 변호사, 교사, 정치인, 화가, 심리치료사, 증권거래인, 건축가 등 전문 직업인도 많다. 이들을 지탱하는 힘, 다시 말해서, 이들이 밤마다 술에 빠지고, 다음 날 아침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살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들이 '진짜'주정뱅이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내 친구 헬레나는 술을 끼고서 생물학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지니는 쟁쟁한 로펌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사라는 유력 환경단체를 창립하고 운영했다.

(...)

이런 것들은 아주 전형적인 예에 불과하다. 강하고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은(알코올이 자기 인생에 미치는 수많은 무형의 영향을 외면한 채 술을 부어 넣는) 명확하게 강하고 똑똑하고 유능하다. 내가 아는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놀라움에 사로잡힌다. 알코올 중독을 끌어안고서도 그만한 성과를 이루었다는데, 또 자신들의 위장 노력이 그토록 기막힌 효과를 발휘했다는 데에.(28-29p)

 

 

진성 알코올 중독자들은 항상 자신보다 더 심한 사례를 찾는다.

"진짜 알코올 중독자란 바로 저런 경우야"라고 말할 만한 사람을.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 지하철에서 술을 병째로 들이켜는 부랑자, 싸구려 호텔에서 술에 젖어 비틀거리는 붉은 얼굴의 세일즈맨.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보다 열 단계, 스무 단계 아래에 떨어져 있으니 우리가 음주 때문에 아무리 고민한다 해도, 그들과 비교하면 모든 것이 아무 문제 없고 안전해보였다. 우리의 통제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술에 빠진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까지는 안전하고, 바로 그다음 자리에 선 사람들부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50-51p)

 

 

"그럴게. 나도 너무 취하고 싶진 않아."

물론 말할 때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내가 마시는 술의 양을 조심스럽게 헤아렸다. 30분 동안 와인 한 잔, 그리고 다음 30분 동안 또 한 잔, 이런 식으로. 그런데 중간에 어떤 신호가 탁 끼어들면 그때부터 통제 불능의 과정이 시작된다. 2~3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여섯 잔째인지 열 잔째인지 알 수 없는 술을 마시고 곤죽이 되기 일쑤였다. 그 과정을 설명도 해명도 할 수 없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변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술은 내 눈을 멀게 하고, 내 의지를 잠재우며, 나를 멋대로 조종하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일정량의 술에 만족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마셔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코올 중독의 질병 이론(알코올 중독자의 몸은 생리학적으로 술에 비중독자와 다르게 반응한다는)을 지지해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나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온몸에 강렬한 결핍감이 들어차서 그만 마셔야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들지 않는다. 내 친구 빌은 알코올 중독이 질병이라는 생각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그래서 굳은 의지만 있으면 술 따위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어머니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 다음에 설사가 찾아오면 그걸 한번 조절해보세요."

거칠지만 의미 있는 비유다.(86-87p)

 

 

이런 느낌은 늘 내 마음속에 존재했다. 이런 식의 '갈망 대상', 이것만 있으면 너는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을 거라는 영혼의 유혹물은 언제나 바깥에서 내 눈을 현혹시켰고, 나는 그런 유혹을 쉽게 잊지 않았다. 어린 시절 오랫동안 파티 구두와 승마 부츠에 목을 매던 나는, 커서는 그렇게 오랜 시간 알코올에 매달리게 되었다. 의도도 동기도 같았다. 다른 것은 대상뿐이었다.(92p)

 

 

알렉스라는 남자는 자신을 '군집성 내향자'라고 불렀다. 그는 혼자 있는 걸 견디지 못한다. 혼자 가만히 앉아 자기 생각에 휘말리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낯가림이 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교 시절 술과 처음 만났을 때, 술은 그에게 하늘의 영약이 되었다. 맥주 몇 잔을 마시면 누구와도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미간을 쪼그라들게 하던 것, 손을 멈칫거리게 하던 것, 아무리 긁어도 사라지지 않는 가려움증 같던 것이 스르르 씻겨 내려갔다. 그의 전 존재가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

"술을 마시면 내가 원하는 내가 되었어요."

(...)

오랫동안 술은 그런 효력을 발휘하고, 그 효력이 발취되는 동안 술은 우리에게 자기 발견의 길처럼 느껴진다. 우리를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시켜주는 수단, 아니면 내부에 깃든 진정한 모습을 찾아주는 그런 수단처럼. 어떻게 보면 술의 행로는 매우 단순하다. 어느 순간까지 알코올은 모든 것을 개선한다. 하지만 그 순간을 넘어서면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그리고 아직 개선 도정에 있는 동안 술이 우리를 다른 자아로 고양하는 능력은 그야말로 놀랍다.(100-101p)

 

 

AA모임에 나가면 가장 먼저 듣는, 그리고 가장 먼저 우리 가슴에 사무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알코올 중독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의 인격이 성장을 멈춘다는 것이다. 술은 우리가 성숙한 방식으로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려면 겪어야 하는 힘겨운 인생 경험을 박탈한다. 간편한 변신을 위해 술을 마신다면, 술을 마시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면, 그리고 이런 일을 날마다 반복한다면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진흙탕처럼 혼탁해지고 만다. 우리는 방향 감각도 잃고 발 딛고 선 땅에 대한 안정감도 잃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기본적 사항들(두려워하는 것, 좋아하는 느낌과 싫어하는 느낌,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필요한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술에 젖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그것을 찾아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113-114p)

 

 

알코올 중독자들은 거의 자동으로 인간관계가 엉망이다. 우리는 자기 존재감을 느끼고 당당하게 관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못하고, 술에 취해 질척질척 흘러 들어간다. 우리는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우리 자신의 핵심 버전, 그러니까 우리가 본래 가지고 나왔고,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버전의 자기 모습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극도로 불편해하는데 여기서 알코올은 그런 불편함을 막아주는 한편, 그것을 진실로 극복하는 길 또한 막아버리는 이중적 작용을 한다. 우리는 감정을 솔직히 대면하는 것보다 거기서 한 발짝 물러서는 데 훨씬 더 익숙하다. 갈등을 느끼는가? 마셔라. 불안한가? 마셔라. 울화가 치미는가? 마셔라.(131p)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술이라는 정신의 마취제 없이도 하루하루를 밀고 나가는 사람들은 외부의 힘에 막연한 기대를 하지 않으며, 개인의 진정한 힘과 희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즉 자기 앞에 닥친 과제들을(아무리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라 해도) 하나하나 해내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뚫고 지나가는 것과 그것을 외면하는 것의 다른 점을 알지 못한다.(156p)

 

 

그 무렵 나는 끊임없이 마셔대는 맥주와 와인이 내게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것은 나에 대한 뼈저린 의식을 막아주었다. 그것은 내가 나를 감당하며 사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다.(163-164p)

 

 

게다가 술을 끊기까지 나는 알코올 중독은 병리적 문제라기보다는 도덕적인 문제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알코올 중독에 관한 우리 사회의 기본적이고도 심각한 오해 중 하나다. 우리는 술 때문에 문제를 빚는 것은 의지박약의 증거고, 자제력 부족의 결과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쁜 것이다. 의지만 있으면 극복할 수 있다. 정신분석가의 딸로 자란 나는 그 해결 방법도 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재활센터에 들어가기까지 그것을 직접 실행해보기도 했다).

'왜 술을 마시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라. 숨겨진 분노와 두려움, 네 심리적 뿌리를 밝혀내라. 그러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열심히 생각하면 정신이 건강해질 것이다. 정신분석학에 너를 맡겨라.'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자기기만이다. 결국 재활센터에 들어간 나는 음주 문제에는 생리학적 근원이 있다는 강연 내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의 강연자들은 내가 수많은 밤 그토록 비이성적으로 술을 마셔댄 것은 강력한 물질적 메커니즘이 작용한 탓이라고 역설했다.

(...)

"두뇌 기능이 손상되어 좋은 기분을 전해주는 물질을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술을 끊는다면 그러한 균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

과학적 연구는 왜 알코올 중독의 재발 비율이 그렇게 높은지도 설명한다. 신경의 보상 회로는 기억 능력이 뛰어나다. 하나의 메시지(알코올은 쾌락이다)가 두뇌에 저장되면, 그 메시지는 무기한 남는다. 와인 잔을 본다거나, 진의 냄새를 맡는다거나, 좋아하는 술집 앞을 지나가는 등 환경적 요인도 술을 마시고 싶은 욕망을 촉발한다.

(...)

재발 비율에 가장 자주 인용되는 통계는 랜드 코퍼레이션이 1980년 1월에 발표한 보고서 <알코올 중독의 경로 : 재활치료 후 4년>인데, 이는 지금까지 나온 동일 분야 연구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이 연구는 알코올 중독 남자 900명을 4년에 걸쳐 조사·연구한 것인데, 그들 가운데 오직 28퍼센트만이 재활치료를 받고 18개월 후와 4년 후에 알코올 문제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15퍼센트만이 4년 동안 지속적인 완화 경향을 보였다. 알코올 중독의 길에 들어서고 나면, 확률은 우리의 편이 아니다. 다시 안전하게 술을 마실 길, 정상적이고 사교적이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음주로 돌아갈 길은 보이지 않는다.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이런 일을 설명할 때 오리와 피클이라는 비유를 든다. 알코올 중독자는 피클이 된 사람들이다. 오이가 피클이 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있지만, 피클이 된 것을 오이로 되돌릴 수는 없다.

(...)

AA 모임에서 만난 한 남자는 3년 동안 술을 끊고 나서 다시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된 사연을 말했다. 그는 '이제 절제된 음주를 실험해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스카치 한 병을 샀다. 한 잔을 마셔보니 별일 없었다. 그 자리에 거꾸러지지도 않았고, 광기도 폭발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 잔 더 마셨다. 그리고 또 한잔······ 그렇게 저녁나절이 흐르고 나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탄했다.

"실험은 실패야."

스카치 병은 남김없이 비워졌다.(182-185p)

 

 

그러나 윌슨은 그곳에서 어떤 가능성 있는 해결책에 맞닥뜨렸다. 그것은 다른 알코올 중독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런 방법이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는 다양하기도 하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어쨌거나 그 핵심 요인 하나는 AA 모임이 갖는 집단적 희망과 자발적 지원과 관련이 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기억이 매우 선별적이다. 아무리 지옥 같은 숙취를 겪었어도, 아무리 수치스러운 실수를 저질렀어도, 음주운전을 하다가 아무리 위험한 고비를 넘겼어도, 술을 대하면 그런 상황들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한다. 술을 마시고픈 욕망이 극도로 강렬해지면, 그러한 기억은 순식간에 증발해버린다. 의지력은 자취를 감추고, 결단력은 해체되고, 방어력은 무너진다.

AA에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AA의 공감 활동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서로 도와 선별적 기억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고, 술을 마신다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하게 해주고, 또 우리 같은 사람들의 생활이 술을 끊고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려준다.(186-187p)

 

 

우리가 진실로 거식증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거식증 아니라 유사한 어떤 중독도) 그밖에 달리 대안이 없을 때뿐이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느낌이 커지고, 우리가 겪는 고통(처절함, 지겨움, 불행함)이 너무 커졌을 때뿐이다.(203p)

 

 

나는 안심했다.

술 깬 아침의 막막한 걱정. 내가 아는 알코올 중독자들은 모두 그런 경험이 있고,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다. 파티 다음 날 잠에서 깨어 전날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오전 내내 걱정에 잠겨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참다 못하면 파티 주최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 반응을 살핌으로써 우리 행동의 단서를 찾아내려 하기도 한다.

(...)

최악의 순간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비밀을 누설했는지, 친구를 두고 무슨 험담을 했는지, 무슨 자랑을 늘어놓았는지를 기억하려고 머리를 쥐어짤 때다. 때론 술에 취하면 평소에 지닌 사회적 행동 규범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

'미건이 짐이랑 같이 잔 거 알았어? 그래, 헬렌이랑 사귀고 있을 때 말이야. 그래, 그리고 헬렌이 그러는데 짐은·····'

그런 다음 날 아침 후회로 몸을 움츠린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 정보와 힘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접근할 수 있으니 나는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리고 싶었다.

(...)

다음 날 후회할 짓이라는 걸 안다. 자신의 가치를 갉아먹는 짓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어쨌건 그 일을 저지르고, 다음 날 아침 그 사실을 기억한다.(226-227p)

 

 

많은 알코올 중독자가 평범한 과음 수준을 벗어나 고삐 풀린 폭음의 단계로 넘어갔을 때 자신이 무슨 일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런 일은 외부의 사건처럼 우리에게 그냥 닥쳐온다. '내가 술을 마실 때마다 나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는 언제나 술이 관련되어 있었어요.'

AA 모임에 가면 흔히 듣는 말이다. 진성 알코올 중독자들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를 더 열심히 기억한다. 친구들과 즐겁게 술 마신 때를, 집에 안전하게 돌아온 때를, 자기 침대에서 깔끔하게 깨어난 때를. 그리고 불미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났거나 지난밤의 일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뭔가 변명을 둘러댄다. 비난의 화살을 돌릴 대상을 찾는다. 스트레스, 힘든 인생, 호르몬.(231p)

 

 

나는 정말 나쁜 사람인데, 내가 이렇게 나쁘다는 걸 아는 사람은 줄리안뿐이니, 이 세상에서 나를, 진정한 나를 이해하는 사람도 오직 줄리안뿐인 것 같았다. 자기혐오가 들끓으면서, 그를 잃을 거라는 두려움도 함께 끓어올랐다.

(...)

그 싸움이 있고 나서 나는 집을 보러 다녔다. 내 처지는 참담했다. 그래서 술을 더 마셨다. 누구라도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나에게는 술이 필요했다. 숙취가 악화하면 그만큼 내 인생도 악화하였다. 의존성이 높아질수록 일과 후에 술을 마셔야 한다는 집착도 더 강해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여겼다. 어려움이 걷히면 술을 줄여야지. 술 마실 이유가 줄어들면 반드시 줄이고 말 거라고 다짐했다.

"너라도 나 같은 처지라면 술을 마셨을 거야. 나는 술 마셔서 불행한 게 아니라 불행하니까 마시는 거라고."

이것이 바로 지상의 모든 알코올 중독자가 되뇌는 논리다.

이런 패턴이 고착될수록 음주는 지속하고 증대한다. 시간은 흐르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냥 기다릴 뿐이다. 기다리면서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는 동안 우리의 두 발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든다.(259-260p)

 

 

리넷도 그랬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꾸려놓고도 남자친구 제이슨을 탓했다. 그녀는 로버트를 비난했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모님을 원망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 눈길에 닿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탓했다.

나도 그랬다. 나는 줄리안이 줄리안다운 것에 화를 냈다. 그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것에 화를 냈다. 그리고 마이클이 내게 매우 친절한 것에, 내게 화를 내지 않는 것에, 나더러 자기에게만 마음을 쏟으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에 화를 냈다. 그렇게 줄리안이 변하기를 바라면서, 마이클이 변하기를 바라면서, 줄리안이 다른 도시로 이사 가기를 바라면서, 이런저런 수많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그러면 모든 일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하면서 몇 년이 흘러갔다.

존과 앤드리아처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부부는 그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한다는 것, 그들 또한 이따금 자신들의 관계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는 것, 상대의 한계를 받아들이려고 고투한다는 것, 사랑하는 이가 자신의 욕구를 모두 만족하게 해줄 수는 없다는 실망감을 이겨내며 산다는 것, 이런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289p)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아."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러지 않을 것을 알았다. 아직은 말이다.

 

'아직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아직은'의 행렬이 이어졌다. 나는 아직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아직은 직장도 잃지 않았어, 아직은 교도소에 가지도 않았어, 차로 전봇대를 들이받지도 않았고, 총을 빼앗아 술집에서 사람을 쏘지도 않았어, 또 술에 취해 모르는 사람에게 강간당하지도 않았어, 아직은.

이렇게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계속 술을 마시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AA에서는 'yet'이라고 불렀다. 이런 일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손짓 한 번, 발검을 한 번 잘못하면 내 무릎 대신 어린 소녀의 머리가 깨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은.

YET은 AA에서는 'You're Eligible Too당신도 예외가 아니다'의 약자로 해석한다.(318-319p)

 

 

우리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피하고자 술을 마시지만, 다음날 아침 깨어나면 그 선택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개의 목에 걸린 줄처럼 우리를 끌어 내리고 우리의 전진을 방해한다. 모멸감, 이 모든 일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아찔함.(330p)

 

 

술을 끊고 2~3주가 지났을 때였다. 퇴근 후 마이클의 집에 가서 소파에 앉아 있는데, 술이 마시고 싶었다. 백포도주 한 잔이면 될 것 같았다. 그 욕망이 너무도 강해서 울었다. 그리고 이를 악문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부엌에서 와인 잔에 술을 따르고, 그 잔을 들고 거실로 나오고, 소파에 앉아 첫 모금을 들이켜는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와인의 맛이 혀 끝에 느껴지는 듯했다. 그때 주유 판매점으로 달려나가 술을 사지 않은 것은 단 하나, 첫 잔은 바로 둘째 잔으로 이어지고, 둘째 잔은 다음 잔, 또 다음 잔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중의 하나다. 한 잔도 마시지 않거나, 한 잔을 마시고 한 병 혹은 그 이상을 갈망하는 것. 이러한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렇게 첫 잔 이후의 일을 있는 힘껏 생각하는 것뿐이다. 내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딱 한 잔'이란 없었다는 것은.(349p)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알코올 중독자든 아니든 간에)이 그렇듯이, 나 또한 내 인생의 많은 시간을 성숙이 외부에서 불쑥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지냈다. 마치 성숙이라는 것이 하룻밤ㅇ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인 것처럼. 아버지나 줄리안 같은 남자들이 소량의 세련미와 자신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성장이란 우리에게 닥치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며 중독을 벗어나는 것은 이런 오해를 뒤집어서 성장은 안에서 뻗어 나오는 것이며,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과정을 통해 얻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술을 끊으면 우리는 이제 기다리지 않게 된다.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서 내가 해야 할 성장의 노역을 대신해줄 거라는 끈질기고도 인간적인 소망을 버리게 된다.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360p)

 

 

 

ㅡ 캐롤라인 냅,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中, 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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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5/24

 

학술적인 책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대와는 달리 훨씬 실용적인 책이었다. 실용적이어서 좋았다는 말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강 닭'이라는 요리의 레시피를 알고 싶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책의 앞 절반은 장내미생물에 대해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알려주고 나머지 절반은 건강한 장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실용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여러 가지를 실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겠으나 이 많은 정보 중에서 내가 적용할 수 있도록 거칠게 요약한 건 결국 과거의 인류가 먹었음직한 음식을 먹자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마이클 폴란이 여러 저작에서 주장했던 100년 전의 인류가 먹었을 법한 음식을 먹자는 주장과도 유사하다. 즉 100년 전에는 상상도 못 할 끝도 없는 식품첨가물이 포함된 과자나 가공식품보다는 프리바이오틱스 섬유소가 풍부하게 포함된 재료를 먹거나, 그 재료로 요리를 해서 먹자는 것.

 

 

 

락토바실루스 루테리 종은 인간 숙주를 위해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는 장내미생물 세계의 스타다. 20세기 중반까지 서구인 대부분은 자연분만과 모유수유를 통해 아기 때 어머니에게서 이 세균 종을 받았고, 이 종이 위장관에 서식하면서 주는 유익함을 누렸다. 정글과 산에 사는 원주민이나 닭, 돼지를 비롯한 다른 생물도 이 미생물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락토바실루스 루테리가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세균 종은 현대 서구인의 96%에서 제거되어 버렸다. 오늘날에는 스무 명 중 한 명 이하의 비율인 4%만이 이 훌륭한 세균 종이 주는 혜택을 누린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이 여러 실험으로 입증한 바에 따르면, 락토바실루스 루테리는 인간의 뇌에서 옥시토신 호르몬을 분비하도록 촉진하는 독특한 능력을 지녔다. 생각해 보라. 당신의 위장관에 사는 미생물이 당신의 뇌 기능 중 중요한 측면을 결정하는 것이다.(51p)

 

 

사람들이 되찾아야 할 미생물 목록이 길어지고 있지만, 나는 이 목록에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를 추가하지 않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고 본다. 이 미생물 덕분에 줄어드는 질병보다 이 미생물이 일으키는 질병이 더 위험하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박멸은 소장세균 과증식과 장내세균 불균형에 맞서는 상쾌한 장 프로그램의 일부다. 기존에는 궤양을 진단한 뒤에 이 미생물을 확인하고 박멸하는 식으로 치료했다. 그러나 궤양을 비롯한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천연 약제 치료법으로 직접 미생물의 존재를 확인하고 박멸할 수도 있다.(57p)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이크로바이옴에서 미생물을 잃어버린다. 엄격한 저탄수화물 식단, 즉 케토제닉 다이어트, 팔레오 다이어트(구석기 다이어트), 육식 다이어트, 앳킨스 다이어트(황제 다이어트) 등의 식단을 유지하다 보면 다양한 프리바이오틱스 섬유소와 폴리페놀은 물론이고, 미생물에게 필요한 (식물에서만 얻을 수 있는) 영양소를 섭취하지 못한다. 이렇게 굶겨 죽인 세균 종은 다시 출현하지 못하므로 마이크로바이옴에 해를 입히는 셈이다. 미생물에 필요한 영양분이 부족한 식단을 먹으면 대개 건강의 지표 중 하나인 '세균 종의 다양성'이 줄어든다. 즉 장 속에 존재하는 독특한 미생물 종의 수가 감소하는 것이다. 어떤 세균 종은 사라지지만, 위장관 내벽을 보호하는 점액층을 먹는 세균 종, 예컨대 아커만시아 뮤시니필라는 증식한다. 그 결과 소장 점액층의 보호 효과가 사라지고, 시간이 지나면 장 내벽에 염증이 일어나 결장염 등 여러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

체중감량과 건강 증진을 위해 탄수화물을 제한하는 식이요법은 지방이나 칼로리를 제한하는 방법보다 확실히 효과가 뛰어나다. 그러나 장내미생물 균총에 필요한 영양분까지 포기하는 치명적인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한다.(58-59p)

 

 

육류를 섭취하는 사람의 트라이메틸아민옥사이드 농도가 높다는 사실은 동물단백질 섭취가 심장질환의 원인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나타나는 논리의 오류는 명확하다. 트라이메틸아민옥사이드 농도를 높여서 심장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은 생선, 닭, 돼지고기, 소고기가 아니다. 원인은 장내미생물 균총의 붕괴이며, 트라이메틸아민옥사이드를 생산하는 후벽균과 장내세균이 증가한 탓이다.

(...)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

(...)

고고학자와 미생물학자의 협력 연구를 통해, 약 1만 2,000년 전에 농업이 시작되고 중동에서 밀과 보리를 주요 작물로 재배하면서 구강세균 구성이 충치와 치주염과 연관된 세균 종에 급격히 호의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구강 미생물 균총이 곡물에서 나오는 당을 발효하는 종으로 바뀌면서 구강이 산성화하자, 인간은 충치에 취약해졌다. 사람들은 농업을 시작하기 전의 수렵채집인에게 충치가 드물었다는 사실을 알면 종종 놀란다.(74-75p)

 

 

지방이나 열량이 문제가 아니라 유화제가 문제다. 식품첨가제가 염증장병, 궤양성결장염, 크론병 발생률을 높이는 기저 원인일 수 있다는 추정이 힘을 얻고 있으며, 이 질병들은 최근 서구식 식생활을 도입한 다른 나라에서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

굳이 요점을 다시 짚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폴리소베이트 80, 카복시메틸셀룰로스를 비롯한 유화제는 완벽히 배제하라. 땅콩버터, 아이스크림, 그 외 지방을 함유한 식품을 고를 때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뜻이다. 달걀과 아보카도처럼 품질 표시가 필요 없는 식품을 선택하면 훨씬 더 좋다.

(...)

항생제, 청량음료, 주스, 통조림과 냉동식품에 든 수백 가지의 식품첨가제, 수천 가지의 처방전 약품이 점액을 무너뜨리는 효과는 아직 언급하지도 않았다. 스티로폼 용기나 전자레인지 사용이 가능한 용기에 담겨 배달되는 음식, 절대 분리되지 않는 아이스크림, 관절병 건선을 '치료'하기 위한 항염증제가 우월한 삶의 방식이라고 설득당한 우리들의 삶에는 이런 점액 붕괴 요인이 어디에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요인을 피하고 장 점액 생산을 촉진하는 세균 종을 복구하는 일은 우리의 건강과 삶에 매우 중요하다.(88-89p)

 

 

어디까지가 장내세균 불균형, 즉 결장 내 미생물 균총 구성의 붕괴고, 어디부터가 소장세균 과증식일까? 장내세균 불균형에서는 해로운 세균 종이 증식하면서 이로운 세균 종의 증식을 억누르지만, 소장으로 이동하지는 않는다. 소장세균 과증식은 결장 내 세균 불균형이 더 심각해진 상황으로 해로운 세균 종이 증식하면서 소장까지 이동하는 것이다.(101p)

 

 

인간에게는 채소, 버섯, 콩과 식물, 견과류, 과일에 든 섬유소를 당류로 분해할 소화효소가 없다. 당신은 섬유소를 당류로 생각하지 않겠지만 섬유소는 사실 긴 사슬 형태의 당 분자다. 인간과 달리 세균은 다양한 형태의 섬유소를 대사할 효소가 있다. 당신은 인터넷을 돌아다닐 수있고, 공과금 고지서를 보관할 수 있으며, 10대 자녀와 삼각법을 논할 수도 있지만, 섬유소를 소화할 수는 없다.

(...)

세균이 소화하기 쉬운 섬유소는 ‘프리바이오틱스’섬유소라고 부른다.

(...)

그러므로 건강한 마이크로바이옴은 인간이 먹지만 소화할 수는 없는 프리바이오틱스 섬유소가 필요하다. 건강해지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며, 장기적인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프로바이오틱스보다 중요하다.(211-212p)

 

 

사람들은 프로바이오틱스와 프리바이오틱스라는 용어를 두고 때로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사실 아주 간단한 문제다. 프로바이오틱스는 미생물 자체를 가리킨다.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아주 작은 생물로 인간 숙주에게 유익한 효과를 선사한다고 추정된다. 락토바실루스와 비피도박테리움은 프로바이오틱스로 분류하는 가장 일반적인 세균이다. 프로바이오틱스는 우리가 음식으로 먹는 프리바이오틱스를 '먹는다'. 즉 흡수한 뒤 대사 작용을 한다.

프리바이오틱스는 식물에 포함된 영양성분으로 미생물이 이것을 먹어서 처리한다. 프리바이오틱스에는 이눌린, 렌즈콩과 강낭콩에 든 갈락토올리고당, 유제품에 든 젖당 같은 당류 등 다양한 섬유소가 포함된다.(215p)

 

 

마이크로바이옴을 붕괴시키는 요인들을 바로잡기 위해 따라야 할 사항이다.

· 당류를 먹지 않는다.

· 합성 무칼로리 감미료를 피한다.

· 유화제를 배제한다.

· 유기농을 선택한다.

· 물을 정화해서 마신다.

· 밀과 곡물을 먹지 않는다.

· 순 탄수화물 섭취량을 제한한다.

· 수분을 공급한다.

· 술을 적게 마신다.

· 마이크로바이옴을 붕괴시키는 약을 먹지 않는다.

· 항생제 노출을 최소화한다.

 

추가로, 한 가지 성분으로 된 진짜 식품을 선택한다. 라벨이 필요 없는 식품이면 더 좋다. 아보카도와 달걀은 안전하고, 브로콜리, 연어, 견과류 한 줌도 좋다.(245-247p)

 

이게 쉽게 실천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건강해지겠지... 그걸 누가 몰라서 실천하지 않을까.

 

 

 

 

ㅡ 윌리엄 데이비스, <내 장은 왜 우울할까> 中, 북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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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15

 

전자책으로 읽어서 페이지는 따로 없다.

 

 

인셀의 논리는 절망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여성은 남성과 잠자리를 한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 동시에 남성과의 잠자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다.

 

 

여성이 성적 자율성을 누리는 통에 남성의 삶을 사악하고 압제적으로 통제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남성의 고통의 근원에는 여성해방이 있다. 그러므로 확실한 해결책은 여성의 자유와 독립성을 박탈하는 것인데, 특히 이를 위해 (강간과 성노예 같은) 성적인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

 

 

한 개인의 폭력 행위가 집단 전체를 반드시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그 커뮤니티 소속이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단순히 넘겨짚을 수도 없다. 실제로 위의 사례 대부분에서 정신건강 문제, 유년기의 학대, 순탄치 않은 가족사 등 살인범의 행위에 일정하게 기여했을 수도 있는 다른 여러 요인이 있었다. 하지만 정신건강 문제를 겪거나, 유년기 학대에서 살아남았거나, 가족 붕괴를 경험한 사람들이 모두 대량의 인명을 살상하는 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데도, 어째서 범인들은 유독 남성들뿐인지 이런 요인들로는 설명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한 게시글에서 어떤 이용자는 강간에 대한 처벌이 훨씬 가벼워져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고대 그리스 도시에서는 강간을 오로지 벌금형으로 다스렸을 뿐이라는 말을 갖다 붙인다. 과거 문명은 위대하고 고귀하다는 식의 이런 자동적인 전제는 고대사회의 법칙과 고정관념에 대한 광범위하고 향수 어린 갈망과 맞닿아 있다. 이런 경향은 인셀 커뮤니티와 그를 포괄하는 매노스피어 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날 뿐 아니라 대안우파와 백인민족주의자들과의 추가적인 연결고리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처럼 젊은 개종자들을 유혹해서 왜곡되고 편향된 신념의 이름으로 폭력을 저지르게 만드는 다른 형태의 온라인 급진화의 위협은 재빨리 파악하고 조치를 한다. 인셀이 등한시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표적이 여성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인터넷은 고사하고 오프라인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폭력을 진지하게 여기는 일이 좀처럼 없고, 장난이니 농담이니 하면서 쉽게 웃어넘긴다. 어떤 무슬림 공격자가 온라인 급진화를 거쳐 길을 가던 백인을 차로 덮치면 언론 보도와 정치 논평가들은 즉각 우리에게 그 관계에 대해 경보를 울리고, ‘테러’라는 단어가 재빨리 신문 1면을 장식하며, 살인범의 이데올로기와 온라인 행적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낱낱이 까발려진다. 남성이 노골적인 여성혐오 때문에 살인을 저지를 때는 이렇지가 않다. 축소 보도된 이런 유의 공격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 사람들조차도 범인이 명백하게 밝힌 의도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인셀 커뮤니티는 조용히 성장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충원하고, 승리에 도취한다.

 

 

그리고 인셀들이 섹스에 대해 절망하듯 픽업아티스트들은 섹스를 쉴 새 없이 추구한다. 하지만 이 두 집단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 두 집단 모두 남성과 여성을 고정관념에 갇힌 협소한 범주로 구분한다. 두 집단 모두 이성애적 섹스를 남성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로 여기고, 여성을 마치 포르노적인 슬롯머신처럼 남성에게 성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물건으로 취급한다. 차이가 있다면 인셀은 이 기계를 이미 정해진 사회적으로 우월한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일확천금을 안기는 편협한 존재로 여기고, 다른 남자들은 이 기계에 아무리 동전을 넣어도 보상을 받지 못하거나, 애당초 접근하지 못한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픽업아티스트가 쓰는 용어들은 매노스피어처럼 사이비 과학과 심리학자연 하는 말투를 활용해서, 이 경우에는 여성혐오를 재밌고, 용인 가능하고, 궁극적으로는 바보라도 써먹을 수 있는 섹스용 지침으로 포장한 다음 남자들에게 팔아먹을 수 있는 인상적이고 학술적인 느낌을 풍기는 근거를 만들어낸다. 수천 달러짜리 입문자용 캠프를 제공하는 한 픽업 전문가는 ‘세포 수준의 심오한 정체성 변화에서 절정에 달한’ 집중 연구와 몰두를 통한 자기 변화의 경험을 언급하며 자신의 기술을 홍보한다. 그리고 단 몇천 달러면 당신의 세포 역시 바꿔줄 수 있다고 암시한다.

 

 

젊은 신도들에게 교훈은 분명하다. 너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여자들을 대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그리고 옥상에 올라가서 그 사실을 마음껏 외쳐도 된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나는 공공장소 외에서 벌어졌을 경우 여성을 폭력적으로 취하는 것을 법으로 처벌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더 들어가서 강간법은 ‘골목길과 조깅 코스에서 강간 피해자를 임의로 골라잡는 추잡하고 정신 나간 남자들을 위해’ 남겨둬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다른 강간의 경우, 특히 주거지나 사유지 내에서 벌어졌을 경우, 일체의 강간은 완전히 합법화해야 한다.’ 그 후 발리자데는 이 글을 ‘반어적인 사고실험’의 일환으로 작성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매노스피어에서 태동한 생각들이 오프라인에서 대대적인 여파를 갖게 되는 아주 실제적인 방식 중 하나를 보여주었다. ‘추잡하고 정신 나간 남자들’에게만 강간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발상은 강간범이 전혀 모르는 여자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서 음지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낯선 인물이라는 사회적 고정관념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고정관념은 이미 힘든 현실을 더욱 악화한다. 젊은 남성들은 이미 강간에 대해 섬세하게 사고하지 못하고, 성적 파트너로부터 적극적인 동의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여성이 마지막 순간 혹은 성적 친밀감을 나누는 동안 마음을 바꿨을 때 남성이 중단하지 않을 경우, 이 역시 강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권리운동은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소수의 여성 집단을 선전용으로 내세움으로써 극단적이고 난폭한 여성혐오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개별적이고 감정적이며 종종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을 부각하고, 그것이 마치 광범위한 패턴이라는 또는 성 중립적인 상황이라는 듯한 암시를 주기 위해 왜곡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아무리 압도적인 통계적 증거가 그 반대를 가리키고 있더라도 말이다.

 

 

이 페이지의 주요 구성원은 허위 강간 고발에 대한 뉴스 보도를 부각하고 여성 우주비행사가 수행하는 미션에 대한 분노(혈세 낭비)나 그와 유사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남성들이다.

 

 

하지만 수천 건의 유사한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한 리케네디의 사례는 이렇게 대대적으로 조직된 작전들이 피해자의 커리어를 중단시키거나 심각하게 저해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 작가, 예술가, 제작자 등 다양한 분야의 종사자들에게 소셜미디어는 말 그대로 커리어의 생사가 달린 문제일 수 있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두각을 나타내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에게 그냥 전원을 끄라거나,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라거나, 어떤 웹사이트 방문을 그만두라고 이야기할 때, 사실상 그 말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트롤링의 부정적인 결과를 감내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르키시안이 자신의 게임 비평 유튜브 시리즈인 ‘비유 대 여성Tropes vs Women’에 새 영상을 출시하자 이미 퀸을 공격 중이던 무리가 이 두 여성을 연결 지어서 같은 ‘위협’의 일부로 보게 되었고, 그래서 트롤들은 사르키시안 역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집 주소가 온라인에 유포된 뒤 새로운 살인 및 강간 위협에 시달리던 사르키시안은 퀸이 그랬듯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집에서 나와야 했다. 괴롭힘이 점점 고조되던 2014년 10월, 사르키시안은 유타주립대학교에서 진행하기로 한 강연 때문에 유타로 떠났다. 하지만 사르키시안의 강연을 취소하지 않으면 참석자뿐 아니라 인근 여성센터의 직원과 학생들까지 모두 공격할 거라는 익명의 위협이 대학 측으로 날아들었다. 협박범은 이렇게 덧붙였다.

 

 

게이머게이트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면서 오프라인의 괴롭힘과 온라인의 괴롭힘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안전을 우려하도록 공포에 떨게 만들겠다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자유자재로 신상을 털었다. 온라인 폭도들은 신상 털기를 통해 노출된 개인 정보를 오프라인에서 무기로 활용했다. 표적의 집으로 피자를 수천 판씩 주문하고 몰래 사진을 찍고 온라인에 이미지를 유포하는가 하면, 피해자의 집 창문에 벽돌을 집어 던지고, 협박하고 괴롭히는 전화를 수차례 거는 등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게이머게이트에서는 심지어 여러 표적을 상대로 ‘스와팅swatting’이라는 전략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방법은 긴급 구조대에 가짜 폭탄 협박을 넣어서 특별기동대SWAT가 표적의 집에 출동하게 하는, 표적을 아주 실제적인 신체적 위험에 빠뜨리는 괴롭힘의 한 형태다.

 

 

온라인 폭력이 우리의 현실에 피해를 주지 못하는 별개의 영역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무해한 일이라는 생각은 이런 폭력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만 공감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 말은 이런 문제를 보도하는, 다수가 백인 이성애자 중산층 남성인 언론인들과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플랫폼을 만들고 감시하는 책임을 지닌 기술업계 종사자들, 그리고 온라인 폭력을 규제하는 법을 만드는(또는 만들지 않는) 남성 정치인과 의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문제의 근본적인 부분은 온라인 폭력으로 크게, 끝없이 삶이 피폐해지는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그걸 중단시킬 권력이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일부 그걸 중단시킬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사실상 이런 공격을 영속시키는 자들과 동일인물이다. 여성 하원의원 중 다수가 대중으로부터 온라인 공격과 언어 폭력을 당했다는 것도 대단히 우려스럽지만, BBC 설문조사 응답자 가운데 거의 2/3가 동료 직원 또는 남성 하원의원에게서 성차별적인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는 사실 역시 똑같이 우려스럽다. 어떻게 이런 남자들이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남자들은 여자들을 해친다. 이건 사실이다. 전염병 수준으로, 공중보건을 위협하는 재앙이며,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상이다. 전 세계 여성의 1/3 이상이 인생의 한 시기에 물리적·성적 폭력(여기에는 성적 괴롭힘이 포함되지 않는다)을 경험한다. 전 세계에서 매일 137명의 여성이 가족 구성원에게 살해당한다.

 

 

언론 보도의 속성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2011년 미국의 한 미디어 연구는 “국제 테러에서는 특히 ‘기독교 미국’에 맞서 무슬림/아랍인/이슬람이 테러조직과 협력한다는 공포가 지배적인 반면, 국내 테러에서는 문제적 개인들이 일회성으로 일으키는 중대치 않은 위협으로 그려지는 식으로 테러 보도에는 주제별 패턴”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이 같은 상황은 자신의 착하고 순진한 아들이 갑자기 튀어나온 허위 강간 고발 때문에 인생을 망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트윗한 미국 여성의 일화에 가장 압축적으로 녹아 있는지 모른다. 이 여성은 결국 아들에게 모든 만남을 영상으로 녹화하고 기술과 소프트웨어에 돈을 들여 온라인 교류를 감시하고 기록하도록 했다. 다른 트위터 이용자도 반응했듯 이는 끔찍하게 많은 수고와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특히 이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저 여성을 성폭행하지 말라고 가르치기만 해도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이다.

 

 

2018년 10월 영국의 공영방송 채널4가 탄탄한 국가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상세한 조사를 진행한 결과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평범한 성인 남성이 한 해에 허위 강간 고발을 당할 가능성은 0.0002%인 것으로 확인됐다.[23]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 조사 결과에 대단히 충격받는다. 그들은 실제 수치가 이보다 훨씬 높을 거라고 생각한다. 거짓말쟁이 여성과 마녀사냥이라는 편향된 생각이 얼마나 은밀하게 우리의 집단 무의식에 침투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당신이 그 주제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로 이제 막 인터넷에 접속한 젊은 사람이라고 상상해보자. 제공되는 영상들은 모두 고품질이고, 진행자들은 세련되고 유명한 인물들이며, 토크쇼는 인기가 많다. 이 모든 것을 처음 보는 시청자로서는 이게 비주류적이거나 극단적인 발상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타당한 관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유튜브 알고리즘이 젊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할 만한 구체적인 이유가 있을까? 이런 콘텐츠에 그저 노출되는 것만으로 실제 영향을 받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렇다.

 

 

톰은 학교에서 애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자주 들으며, 애들이 ‘종종 위협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톰 또래의 소년들은 친구들의 압박과 ‘혐오’ 때문에 공개적으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밝히기가 ‘절대적으로’ 어렵다.

 

 

학자들은 이 패턴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했다. 사회학자 제이넵 투펙치Zeynep Tufekci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평범한 영상으로 시작했으나 유튜브 알고리즘이 자신과 연관된, 하지만 더 강도 높은 콘텐츠로 어떻게 자신을 끌고 갔는지 설명했다. ‘채식주의에 대한 영상은 비거니즘 영상으로 이어졌다. 조깅에 대한 영상은 울트라마라톤 영상으로 이어졌다.’[10] 《월스트리트저널》의 한 탐사보도도 이와 똑같은 현상을 폭로했다.[11] 물론 재미난 댄스 동작이나 조리법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무해한 패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주류의 유명 정치 콘텐츠를 이제 막 보기 시작한, 외부의 영향에 취약한 젊은 사람들에게는 훨씬 깊은 함의가 있다. 샬로는 뉴스 웹사이트 《데일리비스트Daily Beast》에 자신은 ‘유튜브의 추천이 사람들을 필터버블23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 빠져나갈 출구는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2018년 샬로는 다양한 매체에 우려를 표하며 한 가지 중요한 대중의 오해를 바로잡았는데, 그것은 알고리즘이 이용자들에게 가장 관련성이 높은, 또는 고품질의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착각이다. 샬로의 말에 따르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대신 알고리즘은 전적으로 ‘시청 시간’에 초점을 맞춘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시청하게 하고 더 많은 것을 보도록 클릭하게 하는 것은 차츰 강도가 올라가는 극단적인 콘텐츠다.

 

 

소년들에게 뉴스의 출처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인 개입 목록의 상단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필요한 큰 변화는 조직이나 정부에서 여러 형태의 테러리즘을 모니터링하고 관련 법안을 만들고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세울 때 남성우월주의와 여성혐오 극단주의를 반드시 포함시키는 것이다(가령 국내 테러법을 도입하거나 개정해서 이런 범죄들이 극단주의적 혐오가 빚어낸 다른 폭력 행위와 똑같이 엄중하게 다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충격적이게도 인셀 관련 살인사건에서 테러로 기소된 건 (캐나다 당국에 의해) 단 한 번이었다. 이런 공격이 테러리즘의 정의에 분명하게 포함될 경우 다른 나라들도 그 전철을 따르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필요한 중요한 변화는 끔찍할 정도로 일상화된 테러리즘의 형태들(가정폭력 같은) 역시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사회적 집단인 이성애자 백인 남성에게서 비롯된 문제를 규명하는 게 꺼림칙하다는 이유만으로 극단주의적 여성혐오의 존재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 집단의 주장을 그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주고 이들에게 여성과 소수자를 훨씬 능가하는 개별성과 지위를 부여하는 우리의 풍조가 극단주의자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부터 오랜 시간 보호해왔다.

 

 

소년들이 함께 어울리고 사회화할 수 있는 현실의 장소들이 점진적이고 체계적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년들은 그 대신 온라인 세계에 의지한다. 이들이 스스로 의미와 만족감을 찾을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을 만들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기에는 소속감과 자율성, 독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시기에 젊은 사람들은 강렬한 감정들을 다스리느라 애를 먹는다.

 

 

내가 이 장을 쓰는 동안 트위터와 똑같은 용기를 내는 데 수개월이 걸린 페이스북이 결국 야노폴로스와 존스, 그 외 다른 유명 극단주의 인사 5명의 활동을 영구 금지키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매노스피어가 그토록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폐쇄된 커뮤니티와 알고리즘의 지원을 받아 계속 유사한 영상을 추천하는 방식이 본질적으로 완전한 세뇌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반대되는 관점은 절대 공유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반대 의견을 나눠야 한다. 젊은 사람들에게 다른 생각, 다른 의견도 있다는 걸 전하자. 매노스피어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질문을 던지자. 젊은 사람들이 ‘증거’라며 접했을 그릇된 사실과 조잡한 과학의 한계를 뒤흔들자. 젊은 사람들에게 신뢰할 만한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제시하고 이들이 스스로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들을 소외시키거나 무시하지 않고 이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ㅡ 로라 베이츠, <인셀 테러>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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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사실 가장 친환경적인 건축물은 태양광 발전 장치가 많거나 친환경 건축 자재로 지어진 건축물이 아닌, 기둥식 구조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이 건물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살아남을 수 있고, 신축을 안 해도 된다. 신축을 안 해도 되면 콘크리트나 철의 소비를 줄일 수 있다. 이는 곧 콘크리트나 철을 생산하는 과정 중에 엄청나게 많이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줄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친환경적인 건축은 세월의 변화에 살아남을 수 있는 기둥식 구조 건축이다. 이러한 기둥식 구조를 주거에서 활성화시킬 법적 제도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기둥식 구조를 70퍼센트 이상 적용한 경우에는 높이 제한, 층수 제한을 풀어 주고 용적률의 인센티브를 주는 식의 당근 정책이 있다면 좋겠다.

 

 

ㅡ 유현준, <공간의 미래> 中,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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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5/21

 

 

소설집이 나오기 전에 여러 형태로 작가의 작품을 미리 접했다. '소설 보다'에서 '롤링 선더 러브', '창비 계간지'에서 '보편 교양',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세상 모든 바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적어도 김기태 작가의 팬이거나 그게 아니라도 한국문학의 현재를 성실히 따라가는 독자처럼 보이는데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소설집에 실린 9작품 중 3편은 미리 읽은지라 건너뛰고 다른 작품을 순서대로 읽었는데 어째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그나마 제일 마지막에 실린 '팍스 아토미카'가 기억에 남는다.

묘사가 다른 예술과 구분되는 소설의 유일한 특징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기를 거의 이용하지 않고 소설을 전개한다는 사실이 작품을 모아놓고 읽으니 확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작가가 대중문화 일반에 관심이 많고 잘 알며 그 소재를 자주 작품에 사용하는데 그게 그렇게 유효한지 모르겠다. 재밌지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솔로'를 위시한 한국의 짝짓기 예능을 소재로 만든 '롤링 선더 러브', 아이유 및 다양한 아이돌을 소재로 만든 '로나, 우리의 별'은 소재를 제하면 작품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아마도 비슷한 연배로 생각되는 남성 작가가 다루는 세계와 소재를 동시대를 살고 있는 내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소설적 재미를 크게 못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다 그렇지 않나. 자신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타인이 이야기할 때 관용이 부족해지는 것처럼.

 

 

 

 

결국 모두가 헤어질 이유는 많고 계속 만나야 할 이유는 적었다.(88p)

 

 

귀화할 수 없느냐고 진주가 물었다. 그건 니콜라이조차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과정이었다.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수나 필기시험, 면접 따위를 따져 보기 전에 일단 귀화 신청 자격을 갖추려면 영주권을 취득해야 했다. 물론 영주권을 받는 데도 여러 조건이 있었다.

니콜라이는 전년도 한국인 평균 이상을 벌어야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으며, 그건 연봉 삼천팔백만원 정도라고 설명했다. 진주는 마트에서 받는 월급에 열둘을 곱해봤다. 공무원 시험에 붙는다고 해도 금방은 어려운 돈이었다.(125p)

 

 

때로는 팬을 자처하는 이들이 더욱 날카롭게 광고 상품의 생산과정과 음악적 동료들의 언행과 신곡 가사의 함의를 따졌다. '개념 연예인'이나 '소셜테이너' 딱지를 달았던 스타들이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진정성을 검증하는 눈이 많아지면 행동반경이 좁아진다. 로나는 급기야 잠시 상업광고 출연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조차 돈을 벌 만큼 벌었느냐는 비아냥을 샀다. 우리는 로나가 불필요하게 소모되기보다는 음악에만 집중하길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위축되었을 뿐, 우리보다 멀리 가고 있었다.

 

이런 저런 구설 때문에 저에게 흠집이 나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에 닿았어요. 저는 완벽하지 않아요.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결과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하죠.(190p)

 

 

나는 잘 살고 있을까.

잠들기라는 마지막 과제를 수행하려면 "나는 잘 살고 있다"라고 핵에게 알려주는 편이 좋다. 그러나 그 주문은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다. 내가 연구한바, 구체적 행위나 상태에 대한 간결한 주문일수록 효과가 높다. 나는 통원 치료중인 질병이 없다. 나는 임금 근로자 평균 이상을 번다. 나는 일 년에 삼 주 이상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소송에도 연루되지 않았다. 나는 건조기와 식기세척기와 세 곡 이상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가졌다. 나는 방 세 개에 화장실이 두 개인 자가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주택의 자산 가치는 상승중이다. 나는 명절이나 경조사가 아니더라도 연락하는 친구가 세 명 이상 있다······ 이런 주문들의 총합이 어떤 임계점에 도달하면 '나는 잘 살고 있다'라는 주문이 유효해질까. 위에서 나열한 주문들은 나에게 대개 사실이 아니지만, 전부 사실이라면 충분한 걸까.(281-282p)

 

 

지구 종말 시계가 자정 90초 전을 가리키는 2024년은 '슈퍼 선거의 해'로 불린다. 76개국에서 대선 혹은 총선이 시행되어, 인류의 절반에 가까운 사십억 명이 참여한다. 그중 약 육 퍼센트인 이억삼천만 명만이 미국 대선 투표권을 갖고 있으며 실제로 투표하는 이는 더 적다.(283p)

 

 

 

ㅡ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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