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5/14

 

 

하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일은 상상을 초월했다. 역사를 공부하고 매일 끔찍한 뉴스를 접하면서 그걸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피부로 느끼지 못했던 탓이리라. 아미의 곁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시적인 태도가 가능했다. 그런 아미의 척수에 권정현지는 현실의 주삿바늘을 꽂아넣었다. 더 이상 행동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137p)

 

 

어느 날에는 아미가 집착하는 체외인 출생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동일하든 어머니가 동일하든 무슨 문제란 말인가 어차피 부모와의 교류는 금지되어 있는데! 스스로가 자신을 단독자로 자각하면 되는 일이다. 현재의 자아와 삶에 만족한다면 부모를 따질 필요가 없다. 생물학적 부모는 스트레스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철멍은 가끔은 자신도 체외인이길 바랐다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심어둔 저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의무가 없고 자유로운 체외인이 부럽다고 생각했고 이런 자신의 생각에 깜짝 놀랐다. 체외인 혐오자나 뉴 휴머니스트들이 하는 말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건 두 극단적인 세력이 같은 이유로 체외인을 혐오하거나 애호한다는 사실이었다. 해방된 존재가 누군가에겐 공포였고 누군가에겐 축복이었다. 하지만 실제의 체외인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147p)

 

 

사람들은 행복을 입에 달고 살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불행을 원했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불행과 고통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사회가 반복해서 차별을 생산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차별 없는 세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따라서 뉴 휴머니스트는 해방과 행복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속박과 고통을 제시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혁명 뒤에 공포 정치와 숙청이 뒤따르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새로운 시대 이면에는 전 시대만큼 억압적인 이데올로기가 존재했고 사람들은 거기에 매혹됐다. 가족은 그중 가장 오래되고 힘이 센 이데올로기였다. 이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게 존재할까?(152-153p)

 

 

 

ㅡ 정지돈, <브레이브 뉴 휴먼> 中, 은행나무

,

2024/5/13

 

 

자신이 고른 금서가 왜 금서가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설명, 책의 요약, 그리고 자신의 감상 및 이 책의 현대적 의의로 한 편의 글이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런 글을 30개 모아서 낸 책이다. 서평을 다루는 책의 너무나 전형적인 구성이라 뻔하고 개성이 없다.

 

 

왜 우리가 기억하는 금서는 언제나 과거로만 향하는가. 과연 그 논쟁적 주제가 과거의 문제이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금서는 안타깝게도 현재의 문제다. 우리가 안전한 책들 사이에 파묻혀 살아간다고 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2024년에 금서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13p)

 

 

브랜디의 이야기는 세 가지 시사점을 줍니다. 사람의 신체 세포는 7~8년이 지나면 새것으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첫째, 정신을 육체와 분리할 수 없을 경우 '진짜 나'의 규정은 과연 어느 시점에 가능한 걸까요. 또 인간은 누구나 신체 속에 미생물이나 세균을 갖고 있습니다. 불결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인간은 그것들이 몸속에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둘째, 인간이 '내가 아닌 것'과 공존해야 생존하는 존재라면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의 구분은 과연 가능한 걸까요. 브랜디가 던지는 철학적 사유는 점점 깊어집니다. 한 사람을 규정하는 조건이 단지 그 사람 고유의 의지만으로 가능할까요.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미 누군가가 떠올렸던 생각의 조합이 아니었던가요. 그러니 묻습니다. 셋째, 우리 내부에서 진행된 사유를 타자의 것과 분리할 수 없다면 '내 고유의 생각'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인비저블 몬스터」는 세 난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긴 여정입니다.(117p)

 

 

왜 몇 세기 동안 역대 파라오들이 피라미드를 지었는지를 쿠푸에게 말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은 고문헌과 전승을 넘나들면서 파라오에게 피라미드의 비밀을 일러줍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러했습니다. '피라미드는 왕권의 상징 따위와는 별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왕정 국가 이집트의 진짜 위기는 파라오의 힘이 약화됐을 때가 아니라, 이집트의 부가 더없이 풍요로웠을 때 발생했다. 생활이 안락해지면 백성은 독립적인 정신을 가지고 파라오의 권위에 도전하고 반항한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피라미드 건축은 파라오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며, 마땅히 시행되어야 할 과업이다.' 대신들은 목숨을 걸고 파라오에게 주장합니다. 자신들이 다스려야 할 세계를 백성에게 영구히 내주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육체의 권리를 박탈해야 한다고, 그들의 힘을 소진시키고 무에 가까울 정도로 고갈시켜 피폐한 정신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만에 하나 벌어질지도 모를 사회 변혁 가능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심신을 지치게 하고 파괴하는 동시에 철저히 무용한"일은 바로 피라미드 건축이었습니다.(196-197p)

 

 

그런 까닭에 오늘날의 전쟁은 옛날의 전쟁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단지 사기 행위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치 소나 염소 같은 반추동물들이 뿔이 잘 못 나서 피차 상처를 입힐 수 없는 상태에서 싸움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이 비현실적이라고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잉여 소비품을 소모시키고, 계급사회가 요구하는 특수한 심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쟁이란, 뒤에서 말하겠지만 순전히 국내의 문제이다. 과거에는 모든 국가의 지배자들이 자신들이 공동이익을 인정하고 전쟁으로 인한 파괴의 범위를 제한해가며 서로 전쟁을 치렀고 승자는 늘 패자를 약탈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결코 서로 적대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전쟁은 각 지배집단이 그 백성에 대해 싸우는 것이며, 또 전쟁의 목적이 영토 확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체제를 고스란히 지키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전쟁'이라는 바로 그 낱말도 잘못 쓰인 것이다. 전쟁은 늘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375-376p)

 

 

 

ㅡ 김유태, <나쁜 책> 中, 글항아리

,

2024/5/10

 

 

근자에 읽은 어떤 책보다 공감되고 흥미롭게 읽었다.

 

 

그 후로 P2P의 시대가 저물고, 토렌트의 시대가 도래하고, 모종의 사건으로 웹하드들이 몰락하고, 또 여러 가지 굿 다운로드 운동과 함께 한국의 수많은 토렌트들이 몰락하고, 또 여러 가지 굿 다운로드 운동과 함께 한국의 수많은 토렌트 사이트들이 단속되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이용했다. 어떤 어둠의 경로가 위험하다고 생각된다면, 비용을 지불해 콘텐츠를 합법적으로 구매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누구처럼 토렌트에서 영화와 드라마들을 내려받고, 웹하드에서는 게임과 예능을 다운받고, 포쉐어드와 소울식에서 음악들을 다운받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구태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이 시기까지만 해도 자신을 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 해적이 되었는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해적이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에 가까운데, 이 책에서는 그 궤적을 살펴보고자 한다.(7p)

 

 

하지만 내가 이 장에서 할 이야기는 따로 있다. 그것은 한국에서 공식적인 경로로 서비스도고 있는 상당수의 고전 영화들과 몇몇 아트하우스 영화들의 경우에, 정품과 불법 복제판(리핑판)의 경계가 기실 희미하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서비스되는 고전 영화를 구입해 재생했을 때 미국의 DVD/블루레이 제작사인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의 로고가 뜨는 경우는 굉장히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대개 고전 영화의 리핑판 DVD가 그대로 2차 시장에 서비스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사실 공식적으로 서비스되는 영화라 할지라도 많은 경우가 도둑질한 카피, 도둑질한 자막, 출처 미상의 복제된 소스롤 통해서 제공된다. 그리고 이는 한국에서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고전 영화를 접하게 되는 시네필들의 곤경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공식적인 경로를 고집하면 고집할수록 대개 빈곤한 이미지와 빈곤한 자막을 통해 영화를 접하게 될 뿐이다.(18p)

 

 

하지만 해적들의 도시 중에서 가장 전설적인 플랫폼은 카라가르가일 것이다. 카라가르가는 비공개 트래커 사이트로, 가입하기 위해서는 초대장이 필요하며 회원제로 운영된다. 이러한 비공개 트래커들은 까다로운 가입 절차 때문에 아이피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저작권망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저작권 피난처로 사용된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어떤 자료의 최초 배포는 비공개 트래커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중간의 밀수꾼이나 도매상이라고 할 만한 이들이 최초 배포된 자료를 공개된 토렌트 사이트(대표적으로 최근에 폐쇄된 RARBG 같은 곳이 다)나, 앞서 말한 디스코드나 텔레그램, 또는 유튜브나 씨네스트, 웹하드 등으로 산포하는 것이 영화와 관련된 해적질 네트워크의 대략적인 구조이다. 카라가르가와 같은 비공개 트래커 사이트들은 대부분 가입 시에 초대장이 필요하고, 사이트마다 지켜야 하는 규칙 같은 것들도 있다.(29p)

 

 

어떤 영화가 소실되는 것이 꼭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다. 당장 최근의 사례로, 2021년에 있었던 브라질 시네마테크의 화재 사건이나, 하라 마사토 감독의 저택에 난 화재로 인해 감독 본인만이 소장하고 있던 여러 필름들이 소실된 사건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은 비물질적인 '파일'이 아닌 물질적인 대상인 '필름'에 대한 사례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대개 비물질적인 파일을 물질적인 대상(마그네틱 하드 드라이브)에 보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디지털 파일들도 천재지변 하에서는 같은 위치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운성 평론가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 '수집'<소유에서 공유로, 유물에서 비트로> 심포지엄에서 디지털 영상작품의 최선의 보존 전략을 산포(dissementation)라고 말한 바 있다. 가능한 많은 플랫폼에 영상 작품을 퍼뜨리고 각자의 저장 장치에 보관하도록 하는 것이 디지털 영상 작품에 대한 최선의 보전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다.(37-38p)

 

 

일반적인 온라인 스크리닝은 다른 행사들처럼 짧게는 하루, 길면 한두 달 정도로 상영 기간이 한정되어 있는데, 그런 한시적인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이 해적질-아카이브 충동의 큰 요잉니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겠다. 중요해 보이는 어떤 작품의 온라인 상영이 발표되었을 때, 해적들의 심정은 '정해진 시간 안에 이 영화를 봐야만 한다'라는 강박이 아닌, '온라인으로 상영되었으니 추출해서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로 온라인 영화제를 통해서 영화를 몇 편 감상 해 본 이들이라면 이런 한정된 관람 시간이 극장과 같은 편안한 구속력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 시간 안에 영화를 봐야만 한다는 피로감을 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할 것이다. 시간제한의 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냐, 영화를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는 상태로 두고 그걸 보는 것은(어쩌면 영원히) 유예하느냐의 문제에서 해적들은 당연히 후자를 택한다. 이러한 해적들의 아카이브 충동이 분명히 상호수동성의 상태를 강화한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겠다.

 

cf) 상호수동성이란 오스트리아 철학자인 로베르트 팔러가 제시한 개념으로, 사물이나 기술이 우리를 대신해 '소비'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팔러가 예시로 든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영화를 녹화하면서 그 녹화 행위 자체에 만족감을 느끼고 막상 영화 자체는 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녹화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대신해서 영화를 본다고 느낀다. 외장하드나 클라우드에 영화를 수집하는 행위도 이런 상호수동적 행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들이 영화를 보는 것을 반드시 무작정 유예하기만 할 것인지는 진정으로 따져 볼 문제다.(44p)

 

 

나는 그보다 어떠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시기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항상 시네필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의 '생애 주기'가 존재하고, 그것이 아주 짧다고 생각했다. 2015년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해서, 여러 커뮤니티를 전전하며 인터넷에서 수많은 젊은 (자/타칭) 시네필들을 보았다. 하지만 의아한 것은 그들의 상당수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다. 마치 <배니싱>의 여주인공처럼. 아주 열성적으로 시네마테크까지 다니며 영화를 보던 관객들도 어느 순간부터 영화를 아예 보지 않거나, 인터넷에서 자취를 감춰 버린다. 그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물론 가장 쉬운 설명은 그들이 '갓생'을 살러 갔다는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갓생'과 영화가 양립할 수 없다는 건 내게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진다. 내가 어릴 적에 공장 노동자였던 나의 아버지는 일이 끝나면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자주 빌려 왔고, 그렇게 온 가족이 함께 거실에서 할리우드 액션 영화들을 보곤 했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는 것과 달리 오즈나 브레송의 영화를 보는 일은 따로 어떤 열정을 요하는 일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나의 지인 중에 영화와 관련이 없는 공무원 일을 하고 있는 아버지뻘 시네필이 있어, 그에게 어떻게 영화를 계속해서 꾸준히 볼 수 있었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의 대답은 '진급을 포기하면 된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농담이기도 했지만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는 듯했다.

실제로 많은 시네필들의 생애 주기는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해서 취업전선으로 뛰어드는 시기까지인 것 같다. 물론 계속해서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많은 경우 영화와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고, 영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다수가 사라진다.(당신이 이 케이스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부디 사라지지 말아주시기를 바란다···)(60-61p)

 

 

많은 시간을 들여서 자막을 번역하고 또 그걸 무상으로 공유하고, 그 근간에 있는 멘탈리티는 무엇일까요?

 

음, 첫 번째로는 나 자신의 우울증 예방, 일종의 소일거리? 소일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자막을 만들기 전까지 저는 주로 남이 만들어 놓은 걸 즐겼어요. 몸 움직이는 걸 싫어하니까 집에서 음악을 듣는다든가 영화를 본다든가 책을 읽는다든가, 이 세 가지를 평생 했죠. 민수 님은 젊어서 모를 수도 있는데, 내 나이쯤 되면 시간이 너무 많아서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이냐가 고민이거든요. 그런데 그 세 가지만 하고 있으니까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남이 해 놓은 걸 즐기기만 하는 거니까요. 자막 번역은 달랐어요. 내가 하는 것, 내가 만들어 내는 거잖아요. 어떻게 말하면 일종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게 굉장한 보상이 돼요. 나 자신한테 보상이 커요.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남이 해 놓은 걸 5시간 보는 거랑, 내가 5시간 동안 뭔가를 만드는 거랑은 천지 차이예요. 그게 제일 큰 이유예요. 하루 종일 남이 해 놓은 것만 듣고 보고 읽고 있으면 쳐지거든요. 아무리 평생 해 온 것이지만 왠지 무기력하고, 남한테 도움 되는 일도 아니고요. 그런데 자막 작업은 남한테도 도움 되고 나한테도 좋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또 거기서도 보상이 오고요. 돈을 못 벌어도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해야죠. (웃음) 사람들이 못 보던 영화를 나 덕분에 봐서 너무 고맙다고, 내가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게 아니고, 첫 번째로는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남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100-101p)

 

 

물론 번역하신 모든 작품이 소중하시겠지만,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정말 꼭 보시라' 추천하고 싶으신 베스트 10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백만 냥의 항아리(1935) / 야마나카 사다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1960) / 이오시프 카이피츠

구름에 가린 별(1960) / 리트윅 가탁

카이샤스 항(1963) / 파울로 세자르 사라세니

사랑할 시간(1965) / 메틴 에륵센

경쟁자(1970) / 사티야지트 레이

바그너(1981) / 토니 팔머

모로메티 가족(1987) / 스테레 굴레아

집시의 시간(1988) / 에밀 쿠스트리차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2014) / 뤼디거 슈흐란트(102-103p)

 

 

한민수가 솔직한 어조로 고백하듯 해적질에는 법리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영화를 훔치는 행위가 불법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창작물은 법적인 권리에 귀속된다. 지금 한국에서 (십대에 한민수가 직접 유통한) 힙합 음악, 무협 소설, 애니메이션 등을 유통했다간 법의 심판대에 서야만 한다. 그의 경험은 특수하거나 독특하지 않다. 해적질은 밀레니얼 세대라면 누구나 겪은 보편적 경험이다. 무턱대고 토렌트를 사용하는 바람에 송사에 휘말리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다. 창작자도 불법 공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윈도우 OS, 음악 창작 프로그램, 영상 편집 프로그램 불법 다운로드 등, 우리가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도 불법 공유는 흔적기관처럼 남아 있다.

법이 저작권을 보호한다 해도 그것이 온전히 창작자만을 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곧바로 귀속되지 않고, 기업에 의해 일부분 점유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불법 공유한 대부분의 이용자는 영화를 제작한 스태프가 아니라, 저작권이 귀속되어 있는 영화사에 의해 고발당한다. 또한 영화의 성공으로 얻은 러닝 개런티는 주로 영화 투자자와 제자자, 주연배우, 영화감독에게 돌아간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성공의 과실을 누릴 수 없다.

(...)
하지만 예술가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서 이뤄지는 저작권 보호 정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작픔 제작이라는 노동에 참여하는 이들보다도, 투자사와 배급사를 비롯한 기업에 더 많은 돈을 쥐어준다. 한민수나 나나, 저작권에 반대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을 무너트리자고 주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화도둑일기」는 영화를 소유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물어 본다. 영화를 배급하는 기업, 영화 제작에 투자하는 기업의 이익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향유함으로써 창출되는 이익이다. 해적질은 영화 제작은 물론이고, 투자, 소비까지 영화제도 전반을 성찰하게 만든다. 창작자가 예술작품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소유하는 주체는 누구여야 하는가? 저작권을 양도받은 기업? 한민수는 글 초두에서 인용한 "지적 재산권 같은 건 없다."라는 문구의 의미를 조금 더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그렇다면 시네필의 소유욕은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을까? 어뗜 경험을 완전히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은? 영화적 경험을 완성하는 방법은 더 많은 파편들을 연결하는 데 있다. 동일한 영화를 봤을지라도 관객들은 각자 다르게 기억한다. 영화를 본 과거와 현재, 미래의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들이 서로를 반영하고 얽혀든다. 이런 맥락에서 한민수와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다. 예전에 트위터에 베레나 파라벨과 루시엔-카스탱 테일러 테일러의 <카니바>가 궁금증을 표현한 적 있다. <카니바>는 자신의 연인을 죽이고 그 시체를 먹은 살인마 '사가와 잇세이'(그는 20203년에 죽었다)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당시에 영화제 말고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성배'였다. 일면식도 없던 한민수는 트위터 쪽지로 중국어 자막이 달린 <카니바>의 다운로드 링크를 보내주었고 덕분에 나는 이 성배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한민수는 영화를 공유했고, 나는 영화를 관람했다. 우리는 하나의 영화로 서로 다른 기억들을 산포시켰다.(145-147p)

 

 

ㅡ 한민수, <영화도둑일기> 中, 미디어버스

,

2024/5/9

 

 

트위터에서 화제가 된 가속노화 선생님 책을 사놓고 안 읽고 있다가 이번에 읽음. 요즘 몸이 좋지 않아 더 와닿기도 한데 실천은 역시 쉽지 않다. 그래도 꾸준히 이 내용을 떠올리며 경각심을 가져야겠다.

 

 

여기에 운동을 하지 않고 근육을 쓰지 않으면 그림 1의 가로 점선 높이는 더 낮아진다. 당처리 체계의 성능이 떨어져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혈당은 더 높아진다(인슐린저항성). 더 많은 에너지가 뱃살로 간다. 혈당이 높아지면 췌장을 쥐어짜 인슐린이 쏟아져나온다. 잠도 쏟아진다. 이렇게 좋다 깨면 갑자기 당이 당긴다. 인슐린이 급히 혈당을 떨어뜨린 탓이다. 갑자기 떨어진 혈당은 스트레스호르몬의 양대 산맥인 노르에피네프린과 코르티솔을 분비시킨다. 음식이 당겨 어쩔 줄 모른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짜증이 난다. 그래서 달달한 간식을 찾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뱃살과 지방간, 근내지방에 있는 지방세포는 여러 가지 나쁜 호르몬을 만들며 염증물질을 쏟아낸다. 특히 스트레스호르몬과 염증물질은 혈관을 손상시켜 혈압을 올리고 멀쩡한 근육단백질을 녹여 혈당을 높일 뿐만 아니라 뇌로 가서 인지기능을 떨어뜨린다. 인지기능이 떨어지면 판단과 자제를 담당하는 전두엽의 또 다른 기능도 떨어진다. 자제력이 떨어지니 더 자극적인 것을 찾고 더 먹는다. 본능에 더 충실해진다. 운동 생각이 날 수가 없다. 운동을 하지 않으니 근육은 더 빠르게 녹고 배는 볼록해진다. 호르몬 이상도 더 과격해지고 염증물질 또한 더 늘며 판단력과 집중력은 더 떨어진다. 실제로 우리가 먹는 것이 전두엽의 기능들에 영향을 준다는 과학적 증거가 최근 여러 분야에서 확인되고 있다.

집중력이 떨어지니 낮은 집중력으로도 볼 수 있는 유튜브나 틱톡 동영상을 뒤적이는 일이 잦아진다.(22-23p)

 

 

결국 쾌락의 총량을 늘리는 방향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틀렸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쾌락의 총량을 지속적으로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비만 늘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져(돈이 아무리 많아도 궁핍을 느끼게 된다) 고통을 받고, 가속노화 사이클에 빠져서 더 빨리 아프고 더 오래 고생하게 될 뿐이다. 욕심은 두 배 네 배씩 늘지만 그렇게 즐겨 봐야 만족의 크기는 재조정된다. 사람은 누울 수 있는 반 평의 공간만 있어도 충분하고 하루에 2,000킬로칼로리를 소비하는 것이 전부인 생물학적 존재인데, 기하급수적 증가의 마법에 걸려버리면 아방궁을 짓고도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게 2,000을 가지면 4,000을 만들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는 상태가 반복된다.

(...)

반대로

이 적응 개념을 이해하면 몸과 마음에 유익하고 사회적으로도 지속 가능한 삶을 설계할 수 있다. 삶에서 어떤 자극원이 지금 도파민을 분비시키는지 알고, 해롭고 강력한 것들부터 덜어내는 식으로 '도파민 리모델링'일지를 적어보자. 예를 들어 단것이나 술이 당긴다면 언제 당기는지, 그때의 마음은 어땠는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냥 목이 말랐던 것인지,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은 아닌지, 당이 든 음료수나 맥주를 마시는 대신 물 두 컵을 마시고나니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록해본다.

(...)

인지행동치료와 비슷한데, '하지 말아야지, 하지 말아야지'하고 억누르는 것보다 이렇게 멈추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효과가 좋다. 억누르기만 하면 스프링을 누르고 있다가 잘못하면 튕겨나가는 것처럼 더 큰 반작용을 만들게 된다.

도파민 리모델링을 하는 데는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며칠 내에 악순환의 고리가 약해지는 것을 느끼고, 2~3주면 일상에 변화가 꽤 생기며, 2~3개월이면 인지와 정서, 체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변화가 생긴다.(36-38p)

 

 

많은 사람이 개별 도메인에서 발견된 문제를 해결하면 내재역량이 개선된다고 오해한다. 체중과 근육이 계속 줄어드는 사람에게 단백질을 더 섭취하라고 권유하는 것 등이 그 예다. 물론 단백질을 먹으라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체중과 근육이 계속 줄어드는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다. 그동안의 진료 경험에 비춰보면 도메인들의 불균형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도메인의 문제가 쌓이면 다른 도메인의 문제로 파급되어 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

어디가 불편하면 그 부위만을 진료하는 전문화된 의료 시스템의 문제가 보이는 대목이다.

(...)

이런 복잡적응계의 상호작용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일이 많으니 잠을 줄이거나,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를 강제로 책상에 앉혀놓는 언 발에 오줌 누기 식 대책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76-78p)

 

 

이 책의 다음 장에서부터는 각각의 내재역량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접근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분류는 미국병원협회와 미국노인병학회 등이 만들고 보급한 4M이다. 이동성, 마음건강, 건강과 질병, 나에게 중요한 것의 앞 글자를 땄다. 이 네 기둥 안에서 삶의 태도와 방법 그리고 조금은 세부적이기도 한 내용들을 살펴보려고 한다.(82-83p)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의 신체기능을 연결해 생각하기 어려워한다. 사회체제와 통계의 해석, 보건의료행정이 모두 그렇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65세가 되면 갑자기 온몸이 노인의 몸으로 바뀔 거라는 막연한 착각도 한몫하는 것 같다. 이처럼 나이가 든 후의 삶이 현재의 삶과 완전히 분리된 먼 미래라고 생각하는 경향은 젊은 사람일수록 더욱 강한 듯하다. 그들은 짧고 굵게 살겠다고 호기롭게 이야기한다. 지금은 다른 중요한 일이 많아서 바쁘니, 운동을 비롯한 몸 관리는 나중으로 미루겠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신체기능은 생애주기에 걸쳐서 연속적,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어느 순간 갑작스레 노인의 몸을 갖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점진적으로 노력해서 만들고 관리한 신체기능은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는다.(119p)

 

 

단순당과 정제곡물 섭취를 피하는 자연스러운 식사는 식욕을 조절하는 데 두 가지 추가적인 효과를 제공한다. 이는 식욕을 억제하는 호르몬인 렙틴과 관련이 있다. 첫째, 렙틴은 지방을 섭취하면 분비되는데, 지방을 상대적으로 충분히 섭취하게 되어 더 많은 렙틴이 분비될 수 있다. 둘재, 렙틴에 대한 저항성을 서서히 개선하므로 더 적은 양의 렙틴이 분비되어도 쉽게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

가장 우스꽝스러운 사례는 몸의 염증을 줄이고 체내 독소를 배출해준다는 '해독주스'다. 어떤 재료를 갈고 짜 넣든 간에 탄수화물을 액체로 만들어서 들이켜면 즉각적으로 혈당이 상승하고 인슐린이 분비되며 곧바로 혈당이 떨어지기 때문에 몸이 정화될 리가 만무하다.

자연스럽지 않은 당 섭취가 끼치는 악영향을 실감하고 싶은가? 일단 2~3일 동안 초저탄수화물 식이를 하거나 단순당과 정제곡물을 일주일 이상 먹지 않는 상태를 유지한다. 그리고 평소에 즐기던 무언가를 먹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자세히 느끼고 기록해보자. 콜라나 오렌지주스를 300밀리리터 들이켜고 1시간 정도 지나면 음식을 찾아 헤매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174p)

 

 

돌봄은 어떨까? 2022년을 기준으로 80~89세 인구(190만 명)와 90세 이상 인구(28만 명)에 발생한 노쇠와 질병, 장애를 돌보는 연령층은 주로 50~59세(850만 명)와 60~69세(720만 명)다. 이 연령대 모두 대가족이 평균적 가족 형태이던 시절의 부모 자식 세대인데도 현재 간병과 관련된 돌봄 인력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60년 뒤를 그려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지금의 20~29세 인구(670만 명)는 대부분 80대까지 생존할 것이고 이들이 공적, 상업적 돌봄서비스에 의지한다면 그 서비스를 물리적으로 제공할 핵심 연령층은 지금의 0~9세 인구(360만 명)가 된다. 그야말로 '각'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노인장기요양보험 등에 기반한 공적 돌봄서비스가 현재 모습 그대로 유지된다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이는 등의 대책을 마련해서라도 근본적으로 인구피라미드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상업적인 돌봄서비스 역시 유복한 계층의 전유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

결론적으로 현재 20~40대가 믿고 의지할 것은 40~50년 후에도 잘 작동하는 스스로의 내재역량밖에는 없다. 질병과 노쇠 때문에 돌봄이 필요해지는 기간을 되도록 단축하려면 젊을 때부터 4M 도메인의 상태를 건강하게 준비해야 한다.

 

 

 

ㅡ 정희원,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 中, 더퀘스트

,

2024/5/8

 

 

맡겨진 소녀보다는 좋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ㅡ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버터와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들면서도 펄롱의 생각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일, 그리고 누구한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주문받은 물건을 언제 어떻게 배달할지, 누구한테 무슨 일을 맡길지, 받을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을지에 닿아 있었다. 내일이 저물 때도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29p)

 

 

좋은 사람들이 있지, 펄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102-103p)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ㅡ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120-121p)

 

 

 

 

ㅡ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中, 다산북스

,

2024/5/7

 

 

 

사람들은 속임수에 넘어가서 심한 두려움과 모멸감을 느끼게 될 조짐이 보일 때 큰 충격을 받는다. 사회적, 문화적, 개인적 차원에서 우리는 이런 두려움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고 직관적인 경험인 데 비해 '속임수에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하나의 일관적인 현상으로는 주목받지 못했다.

사실 사기당하지 않는 방법을 다룬 책과 글은 많지만,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속고 속일 때 작용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중점적으로 탐구하는 한편, 개인의 자아와 사회 질서의 측면에서 '무엇을 가리켜 사기라 하고, 누구를 호구라 부르는가?'하는 문화적 동기에 의문을 던진다.

(...)

사람들은 대부분 어떻게 해야 성공적이면서도 선한 삶을 살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하지만 속임수에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성공한 삶과 선한 삶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방해할 뿐만 아니라, 성공하는 동시에 착하게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 책은 이 속삭임의 볼륨을 높여 더욱 명확하게 듣고, 우리가 이 속삭임을 언제는 귀담아듣고 언제는 무시해야 할지, 또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놓아줘야 할지 결정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8p)

 

 

가짜 사이트에 개인정보를 해킹당하거나 속아서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는 등 아픈 경험을 하고 나면 우리는 다음에는 같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불에 데고 나면 다음부터는 불에 섣불리 다가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속임수에 당하는 것을 지나치게 경계해서 생기는 문제는 잘 언급하지 않는다. 하마터면 사기꾼에게 당할 뻔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교훈을 마음에 새길까? 그리고 이 교훈은 다음번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누군가에게 무언가 베풀려는 순간 우리 마음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울까?(11-12p)

 

 

인간은 호구가 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하면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공격을 저지하고자 맞받아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겁에 질린 호구가 투쟁이 아닌 도피 혹은 회피로 대응할 때다. 도피나 회피는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지나치게 겁에 질리고 회의주의에 빠진 나머지 누군가를 믿지 못하거나 무언가를 섣불리 시도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는 마찬가지다. 호구가 될까 두려워서 어떤 일에 발을 들이지 않고 물러난다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도 있고, 협력하기를 멈출 수도 있으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너그러이 베풀던 친사회적 욕구조차 억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호구 잡힐까 불안한 마음에 후퇴하려는 경향은 의료 보험, 복지, 이민 정책 등에도 영향을 끼친다.(22p)

 

 

사실 우리가 치르는 진짜 비용은 돈도 시간도 번거로움도 아니다. 아주 잠깐이나마 사기에 말려들 때 치러야 하는 비용은 바로 '자신의 바로 같은 모습을 직면해야 하는 심리적 비용'이다. 많은 사람이 혹시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자동차 정비소에 전화할 것이고, 정말 돈을 그냥 주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저하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험을 감수했다가 혹여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까 봐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혹시 모를 이익을 포기할 만큼 끔찍하다.(39p)

 

 

호구 공포증이 조금 아리송하면서도 괴상한 이유는 엄밀히 말해 이 공포가 '착취자'를 향한 두려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호구 공포증은 근본적으로는 '내가 바보가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다. 이런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자기를 호구로 만드는 가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속임수로 인해 '내가 무엇이 되느냐'이다. 이렇게 구별하면 정확히 어떤 경험이 공포 반응을 유발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기존의 계층 구조에 이미 익숙한 탓에 혹여 정부나 부자처럼 힘 있는 존재에게 당한다고 해도 이것을 모욕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나와 동등한 사람 혹은 심지어 나보다 아랫사람에게 이용당한다면 나는 대체 뭐가 되겠는가?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68-69p)

 

 

'너 그러다 사람들한테 바보 취급 받는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 고속도로에서 차선을 변경하려는 차를 끼워주지 않거나 종업원에게 팁을 조금만 주고, 일찍 퇴근하는 동료의 일을 대신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일상 속 사소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택하느냐가 결국 사회, 문화, 정치적 수준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속임수에 당할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나라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베푸는 정책을 어떻게 생각할까? 사정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망명을 신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호구 공포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재분배 정책을 보면 복지 사기를 걱정하고, 선거권을 부여한다고 하면 투표자 사기를 우려한다. 또 교육 영역에서는 부모들이 주소를 허위로 등록해서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려 한다고 의심한다. 시민 의식이 있어야 할 자리에 호구 공포증이 떡하니 자리 잡은 결과다. 자격 없는 수혜자 한 명이 나머지 사람 전부를 호구로 만들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보호하려는 선한 동기를 가로막는다.(88p)

 

 

사기꾼으로 주로 의심받는 사람이 이민자, 여성, 졸부, 죄수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비록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큰 위협을 가할 힘이 없지만, 이들에게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사회적 지위가 엄청나게 흔들리거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사람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수준의 공포를 느낀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는 잠재적 사기꾼이 누구냐에 따라 착취에 대한 두려움은 그 정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우리가 사기 위협을 마주할 때, 원초적인 감정 수준에서 나오는 반응은 다음과 같다.

"네가 어떻게 감히?“

그러나 같은 문장의 강조점을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네가 어떻게 감히?“

자녀 혹은 학생처럼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속아 넘어가면 그 사람은 패배자가 된다.(90-91p)

 

 

그러나 호구 공포증 때문에 우리가 취약해질 수 있는 상황을 전부 회피한다면, 그 부작용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서 나타날 수 있다. 문제는 단지 비트코인에 투자하지 않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호구 공포증에 빠지면 사람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어려운 이들을 지원하거나 시민으로서 마땅히 협력해야 할 때도 이를 거부한다. 호구 공포증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협력에 대한 우리의 선호를 왜곡한다.(100p)

 

 

시대니어스와 그의 동료는 집단 간 억압을 사회과학적으로 완벽히 설명한 책 <사회적 지배>를 출간했다. 그들에 따르면 특정 종류의 사회적 계층화에는 보편성이 존재한다. 또한 모든 문화에는 나이와 성별에 따른 계층 구조가 존재한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어른이 아이를 지배하는 현상은 거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결정적으로 거의 모든 문화에는 시대니어스가 말한 '임의 결정 체계'가 존재한다. 임의 결정 체계는 민족, 계급, 종파, 씨족, 국적, 인종 혹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모든 집단 구별'등 사회적으로 형성되었거나 겉으로 두드러지는 특성에 따라 사회 구성원을 계층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

'사회적 지배 이론'은 인간의 광범위한 행동을 사회적 지배라는 궁극적 목표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사회적 지배 이론에 따르면 인종차별주의에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는 바로 '권력'이다. 시대니어스에 따르면 인종적, 민족적 고정관념은 임의로 세워진 계층 구조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거의 모든 형태의 집단 편견, 고정관념, 집단의 우열에 관한 관념과 개인적, 제도적 차별은 집단 기반의 사회적 계층 구조를 양산하고 반영한다. 또한 특정 집단에 관해 떠도는 이야기는 사회 불평등을 도덕적, 지식적으로 정당화한다.(175-176p)

 

 

진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호구가 될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호구가 될 것이냐'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주체로서 우리는 손 놓고 있다가 그대로 '비관적인 호구'가 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진정성 있는 호구'가 될지 선택할 수 있다.(251p)

 

 

호구 짓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비합리적이지도 않다. 단지 여러 가지 고려할 사항 중 하나일 뿐이다. 호구 짓이 우리의 선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판단하려면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노트에 기록해 보면 된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때로는 그저 명쾌한 계산 한 번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내가 이루려는 목표는 무엇이고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엇인가? 이러한 분석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날 때는 공포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이 책의 핵심은 바로 '호구 공포증이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포가 두드러지고 말고는 돌에 새겨진 듯 고정된 사실이 아니고, 우리가 거기에 주의를 기울일지 말지 역시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다. 어쩌면 생각보다 간단하게 호구 공포증의 무기화를 막을 수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가 가진 선택지를 조사하고 계산하는 것이다.(323p)

 

 

물론 호구가 되면 실질적으로 손해를 입을 때도 있다. 호구가 된 표적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물질적, 사회적 결과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은 호구가 될 때 느끼는 것은 단지 감정에 지나지 않고, 이 감정을 지나 중요한 다른 문제보다 더 우선시 할 이유는 없다.(338p)

 

 

 

 

ㅡ 테스 윌킨슨 라이언, <호구의 심리학> 中, 한문화

,

2024/5/7

 

역시 크게 관심 없는 작가의 우울한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 건 재미없구나. 시종 우울한 정서로 자신의 감정과 헤어진 애인 등에 대해 계속해서 얘기하는 걸 내가 왜 읽고 있는지 문득 깨닫고 내려놓는다.

 

 

 

예전에는 탄산음료를 자주 마시던 친구한테 그만 좀 마시라며 잔소리를 달고 살았는데, 이제는 내가 탄산을 입에 달고 사네. 웃긴다. 인생은 웃겨.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점점 더 가벼운 사람으로 만들어. 노인이 된다면 나는 얼마나 우스운 사람으로 기억될까. 젊은 시절 탄산을 많이 마셔서 뚱뚱하고 당뇨를 달고 있는 노인? 새벽에 사이다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66p)

 

 

 

ㅡ 김남숙, <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 中, 민음사

,

2024/5/2

 

이제 이 책까지 포함하면 저자의 책 3권을 읽었다. 이 책을 끝으로 당분간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책을 쓰지 않을 예정이라고 한다.

 

 

 

 

같은 나라, 같은 시대를 같은 나이와 같은 성별로 살더라도 사람마다 다른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

출생 시 정해진 법적 성별이 남성이었지만 스스로를 여성으로 인지하는 MTF(male-to female) 트랜스젠더들의 옷차림을 탈코르셋 운동의 맥락에서 반동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인정받지 못해 고통받았던 숱한 시간들 속에서 온전한 자신이 되고자 외모를 꾸미는 길을 찾은 이들을 두고서, 가부장제가 강요한 여성의 옷을 입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폭력이다. 시스젠더 여성과 MTF 트랜스젠더는 같은 시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각기 다른 전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31-32p)

 

 

또 하나는 모든 인간은 특정한 맥락에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의 피해자였던 한국인이, 한국에서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 결혼 이민자나 이주 노동자에게 인종차별의 가해자일 수 있습니다. 남성이 권력을 가진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성과의 관계에서 약자인 여성들이, 시스젠더만을 정상적인 몸으로 취급하는 성별 이분법의 사회에서는 트랜스젠더와의 관계에서 기득권일 수 있습니다.(47p)

 

 

하지만 실제 그 사회가 평등한지는 다른 문제이다. '원칙-실행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흑인이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서 집을 살 수 있었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으면 95%가 넘는 사람이 "그렇다"라고 답하지만 집주인이 상대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집을 팔지 않는 것을 금지하는 법에 찬성하는지 물으면 65%만이 "그렇다"라고 답한다. 주거뿐 아니라 많은 영역에서 인종차별 금지 원칙에 찬성하는 것과, 모든 사람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것 사이에는 대부분 30%가량의 차이가 존재한다.(68-70p)

 

 

사람들은 보통 차별을 두고 특정한 경험이나 사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설문지를 이용한 연구로 차별이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이 따로 떨어진 사건들이 아니라 연속적인 상태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소수자들은 차별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행위와 무관하게 무시당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하고 그 긴장은 삶을 지배한다. 나는 이러한 관점이 기존에 진행된 일반적인 차별 경험과 건강에 대한 연구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한다.

(...)

'강화된 경계심 측정'설문지로 실제 차별 경험이 아니라 차별을 경험할 것 같다는 우려만으로도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가령 집을 떠나기 전에 미리 오늘 어떤 일을 당할지 걱정하고 무시나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 등의 스트레스가 삶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

차별적인 환경은 삶의 모든 시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72-73p)

 

 

김승섭: 제도적 차별은 법률로 막을 수 있고, 일대일 관계에서 누군가를 차별하는 행동은 혐오 발언 규제 등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차별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무의식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윌리엄스: 내가 타인을 차별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를 차별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차별적인 행동을 하기에 최적화된 사람일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편견은 스스로에 대한 경계를 풀 때 더 쉽게 나타난다.

(...)

고정관념을 가진 대상을 계속해서 직접 만나 관계를 맺는 것 역시 내재적 편견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76-77p)

 

 

연구자가 고통받는 이들의 삶과 건강에 대한 연구를 하더라도, 모든 고통이 동등하게 주목받지는 않는다. 2015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던 당시, 나는 해고 노동자의 아내가 겪었던 고통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못했다.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여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었던 '와락'에서 아내분들을 만나 인사하면서도 그분들을 고통의 '당사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111p)

 

 

피부색은 피부에 존재하는 멜라닌색소의 양에 따라 결정됩니다.

(...)

인간의 피부색을 결정하는 멜라닌색소는 선크림처럼 자외선 흡수를 방해합니다. 멜라닌색소가 풍부한 흑인의 경우, 백인과 같은 양의 비타민D를 합성하려면 자외선에 5배가량 더 노출되어야 합니다. 햇빛 노출량이 많은 적도 부근 지역에 피부색이 진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멜라닌색소가 많아도 비타민D를 합성하는 데 필요한 햇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고, 멜라닌색소가 많아야 피부암에 덜 걸릴 수 있으니까요. 이는 반대로 위도가 높은 러시아나 북유럽 지역에 상대적으로 백인이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햇빛에 적게 노출되는 지역에서는 피부색이 연한 이들이 생존할 가능성이 높았고, 수만 년 동안 그런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치며 결국 연한 피부색을 지닌 이들이 다수가 된 것입니다. 즉, 피부색은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한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라 일조량에 따른 진화의 결과물입니다.(130-131p)

 

 

야간 교대 노동이 발암 요인이라는 근거는 학술적으로도 확고해지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는 2007년 생체리듬을 파괴하는 "교대제 근무"를 납과 같은 등급인 유력한 발암물질로 분류했습니다.

(...)

2019년 7월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국제암연구소에서 주최한 회의에 참석한 과학자 27명은 2007년의 분류 결정 이후 출판된 논문을 재검토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습니다. 이들은 교대제 근무를 여전히 유력한 발암물질로 분류하는 게 타당하다며,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발암 물질의 이름을 "야간 교대제 근무"로 바꿉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할 뿐, 야간 교대제 근무는 유력한 발암물질입니다.(134p)

 

 

2017년 미국질병관리본부의 AIDS팀에서 공식적으로 'U=U'를 발표했다. '검출되지 않으면, 전염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HIV 감염인이 치료 약을 꾸준히 복용해서 체내 바이러스 농도가 일정 수준 미만으로 내려갈 경우, 콘돔 없이 성관계를 하는 경우에도 비감염인 파트너가 감염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174-175p)

 

 

그런 측면에서 저는 감염인을 'HIV 보균자'라고 부르는 일이 조심스럽습니다.

(...)

HIV 감염인을 특정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뿐,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영어로 HIV 감염인을 PL, 즉 'HIV 감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187-188p)

 

 

우리는 타인의 성적 지향이나 인종을 포함한 여러 정보를 이유로 그 사람에 대해 쉽사리 판단하곤 합니다. 스스로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가 상대방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고정관념은 편리한 만큼, 그릇된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215p)

 

 

피해자는 항상 고통받고 있어야 하고 항상 슬퍼야 하고 절대로 행복해선 안 되고···이런 것들이 정말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이 죽어도 장례식장에서 유족은 밥도 먹고,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지요. 일상을 살아가야 하니까요.

(...)

당당하고 확신에 찬 생존자의 모습이 한국 사회에 필요한 거 같아요.(254p)

 

 

이제 질문을 해야 할 시점이다. 인종주의와 비장애중심주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소외된 흑인 맹인의 삶에 가슴 아파하고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헬렌 켈러와, 중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를 의사의 판단에 따라 안락사시키는 일을 두고 "뛰어난 인간애"라고 말했던 헬렌 켈러는 다른 인물인가? 후자를 헬렌 켈러가 젊은 날 저지른 실수로 치부하거나, 혹은 짐짓 무시하며 헬렌 켈러의 삶에서 지우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헬렌 켈러의 삶을 구미에 맞게 변형시켜 박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질문해 볼 수는 없을까? 1915년은 어떤 시대였기에 헬렌 켈러조차도 하이젤든 박사의 행동을 옹호하는 글을 썼을까?

(...)

첫째, 당시는 우생학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둘째, 당시 농과 맹을 지니고 있던 헬렌 켈러는 '신생아 볼린저'와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헬렌 켈러는 신체적 손상이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장애가 된다고 보는 현대 장애학의 관점, 몸의 차이를 긍정하고 장애를 정체성과 자부심으로 여기는 장애 인권 운동의 감수성을 접할 수 없는 시대를 살다 갔다.

(...)

당대의 시간을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냈던 헬렌 켈러의 삶에는 많은 사람이 경이롭게 생각하는 성과만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한계와 모순이 함께 새겨져 있다. 그 모든 점을 함께 바라 본다고 해서 헬렌 켈러라는 놀라운 인간이 폄하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장애를 극복한'박제된 영웅보다, 오류와 모순을 품고 당대를 살아낸 한 인간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279-285p)

 

 

 

ㅡ 김승섭,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中, 동아시아

,

2024/4/13

 

 

안녕, 잘 지냈니,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네,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동안은 상갓집이나 결혼식에서 어색하게 마주치기라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다들 멀어져서 그렇게 모일 일도 없구나,

(...)

혹시 내가 너에게 무언가 잘못한 게 있을까. 너희 부모님이 집을 한 채 네 명의로 돌려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약간은 조롱조로 너에게 유산계급이라고 말했던 일 때문일까, 그리고 그 일을 다른 친구들한테 이야기해서? 모르겠네, 사실은 그 이야기를 한 시점도 잘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나는 자주 너에 대해 생각해왔어, 우리가 이제 와서 친구로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쩌면 살면서 계속 담아두고 있었던 마음의 앙금들이 사실 한 번의 대화, 단 한 번의 용기로 해소할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될까 봐,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걸기만 한다면 멀리서나마 서로를 응원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편지를 써····(46-47p)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 이런 회의를 견뎌내고 나아간 사람들이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 아닐까, 앞서 살아간 사람들도 삶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괴감이나 죄책감이나 열등감이나 상실감을 느끼고, 불안도 안도도 사랑도 미움도, 그 모든 것을 경험한 것 아닐까, 그리고 그다음 이 세상에서 완전히, 영원히 소멸되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이상하게 이미 살고 사라진 모든 사람들이나, 지금 살고 있고 앞으로 태어나 살고 사라질 모든 사람, 모든 존재들을 생각하면 뭉클해져, 그런 걸 생각하면 그냥 살아가면 되는 거라는 생각도 들어, 아무 회의도 갖지 않고, 말없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다가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사라져가는 거야, 그게 다라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58-59p)

 

 

 

ㅡ 정영수 외, <2024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中, 현대문학

,

2024/4/23

 

제목만 보고 국내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과 마진율에 대해 이야기할거라고 생각해서 굉장히 재밌을 줄 알았는데 그냥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생각을 적은 에세이었다. 제목은 수록 작품 중 오한기 작가가 쓴 에세이 제목을 따서 지은 거였다. 뭐 그렇다고.

 

 

 

다만, 모두가 입을 모아, 많이 쓰는 행위 자체를 우려하는 것에 대해, 혹은 소설을 쓰는 행위가 내 안의 무언가를 소진하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반감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어째서 소설을 쓰는 행위가 계속해서 소진되는 과정이어야만 하는 걸까? 소설을 쓰는 행위가 나 자신을 추동하는 힘으로만 작동할 수는 없는 걸까? 쓰는 행위 자체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성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러므로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그런 작가가 존재한다고, 쓰는 행위 자체를 동력으로 삼아서 쓰고 쓰고 또 쓰는 작가가 있다고.(74-75p)

 

 

 

ㅡ 김사과 외,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 中, 작가정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