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16

 

한 저자가 쓴 비슷한 기획의 책을 3권째 읽으니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부각되어 느껴졌다. 지난 2권의 책에서는 크게 못 느꼈던 것 같은데 이번에 확 느껴진 걸 얘기해 보자.

우선 어떤 상황을 비유를 들어 많이 표현하는 데 그게 너무 아재 감성이랄까. 이를테면 이런 거,

 

상차 작업에 익숙해지면 고구려인 못지않은 축성의 대가가 될 것 같았다. 선배는 감탄스러울 만큼 잘 쌓았다. 내가 쌓은 쪽은 높이도 제각각이고 빈틈도 많았다. 선배가 쌓은 쪽이 대한치과협회 홍보 모델의 치열을 떠올리게 한다면 내 쪽은 '마이쮸'를 삼촌보다 사랑하며 동시에 치약을 '하얀 똥'이라고 부르는 내 다섯 살짜리 조카의 치아 상태를 재현한 것 같았다. 쌓여 있는 상태의 위태로움이 잠시 후 '젠가!'를 외쳐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152p)

 

또한 등장 인물을 '응답하라 시리즈'의 캐릭터에서 따와서 표현하는 데서는 이 책이 5~10년 전에 쓰인 책인가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했다.

다음으로 첫번째와 비슷한 단점일 수도 있는데 재밌지도 않은 농담ㅡ독약이나 지진계 등에 대한 거듭된 언급ㅡ을 열심히 던지는데 목표물에 명중하지 못하고 맥 없이 땅에 꽂히는 느낌이었다.

 

 

 

콜센터에선 모두가 혼자다. 이곳에선 다른 직원들과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답답해서 옆 사람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긴 하지만 전화 상담은 근본적으로 혼자 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과 자료를 주고받거나 의논을 하거나 보고를 해야 하는 일도 없다. 9시부터 6시까지 자기 모니터만 바라보며 헤드셋의 마이크에 대고 떠들기만 할 뿐이다. 콜센터에는 직원 문화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회식도 회의도 공동 업무도 없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직원이 들어오면 팀원들과 인사도 하고 자기소개도 하지만 이곳에서 팀이란 서류상의 구분일 뿐 팀으로 해야 할 역할도 공간도 없었다. 퇴사할 때까지 2팀에 속한 사람이 누구라든지 그들이 앉은 자리가 어딘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팀과는 무관하게 배정되는 자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바뀌었다. 점심은 11시부터 3시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4개조로 나누어서 먹었다. 밥 먹는 시간도 다 쪼개어져 있어서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길게 이야기를 나눌만한 기회도 여의치 않았다. 의도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자리가 아무리 바뀌어도 바로 옆 사람과 같은 식사 시간 조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모두가 눈인사 정도만 하고 출근해서 각자 자리에 앉았다가 6시가 되면 사무실을 떠났다. 팀워크의 측면에서 봤을 때 콜센터는 공유 오피스를 이용하는 개인 사업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

많은 사람이 직장 내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어하고 어떤 경우엔 다른 누구와도 말 섞지 않고 그저 내 일만 하다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도 백번 공감한다. 그런데 콜센터는 다르다. 말 같지 않은 소리의 대가인 나로서도 대꾸할 말을 찾기 힘든, 전화를 건 고객의 부모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극도로 궁금해지는 통화를 마치고 나면 같은 일을 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당신은 어떠냐고 묻고 싶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고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선 관리자한테 혼날 때 빼고는 다른 사람과 길게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다. 나는 하다못해 양돈장에서 똥만 치우던 시절에도 그곳 돼지들과 콜센터에서보다 많은 대화를 나웠다.(60-62p)

 

 

콜센터를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이렇게 설명한다. 상담사의 일과는 여덟 시간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신에게 달린 악플들을 소리 내서 읽는 거랑 같다고. 상담사의 가장 평범한 하루일지라도 가족들이 함께 통화를 듣게 된다면 펑펑 울며 다른 일을 찾아보자고 하게 될 거다.(81p)

 

 

내가 경험한 바로, 인간의 감정은 식물과 같은 방식으로 다뤄야만 한다. 따뜻한 봄바람만이 봉우리 속의 꽃을 끄집어낼 수 있듯이, 상담사의 내부 열정과 친절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상냥한 말, 그것뿐이었다. 어떠한 친절 교육도 아무리 호된 질책도 따뜻한 말 한마디만 못했다. 우리가 보호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을 때, 우리가 친절하게 대하고 싶은 대상을 구체적으로 설정할 수 있을 때 이 일은 더할 나위 없이 보람찼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어째서 평범한 사람이 성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사람의 허무함을 몰아내는 감각이 분명 우리가 하는 일에 녹아 있었다. 다만 그 감각을 경험하기 위해선 거대한 원석에서 참깨만 한 다이아몬드를 추출할 때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감정을 낭비해야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밖에서 이 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견해와는 다르게 우리가 유한하게 보유한 에너지의 일부였다.(86-87p)

 

 

상담사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죄송합니다"라면 고객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윗사람 바꿔"였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고객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서 빨리 이 사람이 상급자 바꿔달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게 된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관리자 문제다. 하지만 내가 이관시킨 고객을 내 옆에 앉은 관리자가 상대하는 걸 듣고 있으면 어쩔 땐 눈을 마주칠 수 없을 미안해진다. 게다가 이관시킨 상담은 절대 간단하게 끝나는 법이 없다. 기본으로 이삼십 분은 훌쩍 넘긴다. 일반 상담사가 불특정 다수를 상대한다면 관리자들은 검증받은 사이코들만 상대한다. 아무리 정신 나간 사람일지라도 일단 이관을 받으면 관리자가 끝을 내야 한다. 그다음은 없다. 그래서 관리자들이 통화할 때는 상담사들이 보통 그러듯이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기운이 없다. 반대로 가족 중에 정신병 환자가 있는 사람만이 몸에 지닐 수 있을 법한 단호함과 침착함으로 상대를 대한다.(96p)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 먹고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113p)

 

 

처음 까대기를 할 때는 다들 험하게 짐을 다뤄서 놀란다. 물류센터는 손님들이 "덜 맵게 해주세요"라든가 "콩나물 많이 넣어 주세요"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절대 주방에 전달하는 법이 없는 심보 고약한 웨이터와 비슷하다. '파손 주의', '취급 주의', '이쪽이 위로 올라가게 해주세요', '던지지 마세요', '밟지 마세요', '유리 주의' 등등 상자들이 조심스레 다뤄줄 것을 끊임없이 호소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의식하며 짐을 다루는 걸 본 적이 없다. 뭐든지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고 내동댕이친다. 레일에 떨어지는 건 그나마 다행이고 어떤 건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어떤 건 벽을 맞고 뒹군다. 관리자들도 그런 걸 당연하게 여기는 걸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

여기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트럭 기사는 건당 돈을 받는 게 아니라 시간당 돈을 받는다. 트럭이 물류센터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기사에게 지불해야 할 비용도 늘어난다. 따라서 어떻게든 짐을 빨리 내려서 트럭을 돌려보내는 게 수익률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128-129p)

 

 

까대기 작업의 하루 강도를 대략 계산해 보면 이렇다. 작업이 끝나면 바코드 리더기의 모니터를 통해 해당 컨테이너에서 나온 화물의 개수를 확인 할 수 있다. 대개 한 트럭당 1000개가 넘는다. 한 차를 끝내는데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회사에서는 도크별로 최소 아홉 대는 처리하길 바란다. 실제로는 하루에 열에서 열두 대 정도 작업한다. 우리 집 고양이가 5킬로그램에 약간 못 미치는데 들어 올렸을 때 평범하다고 느껴지는 화물들, '잔바리'처럼 특별히 가벼운 것도 아니고 쌀이나 음료수처럼 특별히 무겁지도 않은 화물을 들었을 때의 무게감이 대략 그 정도다. 화물 하나의 평균 중량을 5킬로그램이라고 하고 계산해 보자.

하루에 평균 열 대 작업하고 한 차에는 짐이 1000개, 평균 중량은 5킬로그램이다. 이걸 두 사람이 작업하면 한 사람당 하루에 운반하는 총 중량은 25톤이다. 전체 화물 중 3분의 1 정도는 옮길 때 몸을 굽혔다 일어서는 동작을 수반하므로 하루 전체에 걸쳐 그런 동작을 반복하는 횟수는 적게 잡아도 1500번이다. 즉, 하루에 25통과 1500번이다. 한반도에서 하루에 이 정도 신체 활동량을 요구하는 곳은 물류센터를 제외하면 태릉 선수촌뿐이다.

사람들은 흔히 몸으로 하는 일과 머리로 하는 일을 구분하곤 한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까대기는 몸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몸으로 하는 일은 이삿짐을 나르거나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는 거다. 까대기는 남은 수명을 팔아서 돈을 버는 일이다. 자신의 육체 안에 품고 있던 생명력을 레몬즙 짜듯이 쥐어짜 내서 그 대가로 먹고사는 일이다.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140-141p)

 

 

사람들이 이 일에서 못 벗어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하는 날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서다. 거기에는 단순히 출퇴근이 자유롭다는 것 이상의 심리적 이점이 있다. 까대기를 하는 동안엔 어떤 경계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일자리가 있으면서도 일반적인 직장이 요구하는 업무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부담감도 시간에 얽매임도 없다. 힘들게 일해서 돈 버는 건 똑같지만 직장에 다닌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매일 같은 일터로 출근하면서도 꼴 보기 싫은 사람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고 일하기 싫으면 아무런 눈치 안 보고 쉴 수 있다. 어제 왜 안 나왔냐, 오늘 나올 거냐, 눈치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일당이 센 일용직으로 일하면 일정한 수입은 있으면서 마음만은 일이 없는 사람처럼 홀가분하게 살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그런 맛에 일용직에 계속 남는다.

(...)

믈류센터에서 이것만큼이나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심리적 풍경은 20대 젊은이들의 테스토스테론 내뿜는 자신감이다. 20대 중에서도 경력이 아직 몇 개월 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다. 나는 천하무적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해내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외치는 자신감을 말투에서 표정에서 몸동작에서 드러내지 않는 순간이 없다. 까대기 작업 열두 시간을 온전하게 끝마친 사람은 자기 자신이 헤라클레스나 드웨인 존슨의 동급이라고 확신하게 된다.(147-148p)

 

 

물류센터에서 내가 가장 놀란 점은 까대기하는 사람 중에 우울해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다. 이것이 내가 일터를 전전하는 동안 경험한 최고의 미스터리였다.

(...)

'본업'이야기를 해보면 다니던 회사나 공장이 문을 닫았다거나 정리해고를 당했다거나 해서 방황하던 차에 물류센터를 찾았다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도 우울해하거나 실의에 빠진 사람이 없었다. 나이 상관없이 다들 밝고 자신감이 넘쳤다. 이 일을 통해 그려볼 수 있는 미래가 너무 빤한데도 그랬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물류센터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자유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선 아무리 들락날락해도 눈치 주지 않기 때문에 남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까대기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성장의 감각 때문이라고 믿는다.

(...)

일당을 받는 육체노동은 인생을 고체화시킨다. 물류센터에선 매일매일 내가 한 일의 성과를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쓸모 있는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을 한순간도 잃지 않는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인생은 모호하기로 악명 높은 시간 개념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무언가, 두 손으로 꼭 붙들고서 집고 휘두를 수 있는 단단하고 구체적인 무언가였다. 그렇게 일을 끝내면 일당이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더니 잔고의 앞자리 숫자가 변하는 것이 보인다. 마치 하루하루 레벨업을 하는 느낌이다. 물론 까대기가 성장시켜 줄 삶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온몸의 관절을 박살 내버리려는 듯 돌아가는 작업 속에서도 그 감각, 내 삶이 전진하고 있다는 감각만큼은 분명하게 전해진다.

이곳에선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이 워낙 높고 험하기 때문에 일이 년후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애태울 기운도 애초에 남아나지 않았다. 그렇게 산 하나를 넘고 나면 통쾌한 노곤함과 절대적인 숙면만이 남았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까대기는 우리가 오직 현재, 오늘 하루에만 집중하도록 도왔다. 그것은 미래를 방기하는 삶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말고 미래를 준비하는 더 나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174-176p)

 

 

그는 글로 세상을 상관있게 만들고 싶었다. 그는 한국어에서 가장 공격적인 단어가 바로 '상관없어'라고 믿었다. 칼이나 총은 사람을 죽이지만 '나랑 상관없어'는 관계를 죽이고 환경을 죽이고 세상을 죽인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과 닭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람과 돼지도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고시생과 선원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장과 직원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인간과 자연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관있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었다. 비록 그가 성공했다는 증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말이다.(385-386p)

 

 

ㅡ 한승태, <어떤 동사의 멸종> 中, 시대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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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1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을 썼던 100여년 전과 달리 요즘 지배적 문화 엘리트들은 단순한 과시적 소비 대신 과시적 생산, 과시적 여가, 비과시적 소비에 참여하는 쪽을 선호하는데, 이 모든 행태가 물질적 재화의 소비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도 은밀하게 계급 격차를 확대한다는 이야기.

내용 이해에는 크게 무리가 없으나 개인적으로 번역이 너무 별로.

 

 

 

과시적 소비는 참으로 자본주의적인, 산업혁명 이후의 스펙터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인간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계속해서 지위 전쟁을 벌였다. 베블런은 20세기 전환기에 자신이 관찰한 많은 현상이 이미 선사시대부터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대 로마 사회에 관한 앤드루 월리스해드릴의 연구를 보면, 서기 79년보다 한참 전부터 과시적 소비가 넘쳐났음을 알 수 있다. 평면스크린 텔레비전과 저금리 할부 자동차가 등장하며 현재의 계급 구분선을 흐릿하게 만들기 수천 년전에도 부유하지 못한 이들은 상층계급을 모방했다.(21-22p)

 

 

너무도 많은 사람이 사치품에 돈을 쓸 수 있게 된 탓에 그런 상품이 더는 구별짓기의 표지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부의 과시는 '철 지난'행동으로 간주되며 이제 과시적 소비는 최상위 부유층보다 오히려 다른 모든 계층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되었다.

(...)

그리하여 진정한 엘리트들은 부와 소비 습관 대신 암묵적인 지위의 표지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26p)

 

 

이 새로운, 지배적인 엘리트 문화집단을 아주 간단하게 야망계급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들의 상징적 지위는 간혹 물질적 재화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지식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문화적 기표들ㅡ디너파티에서 신문 칼럼을 놓고 나누는 대화, 정치적 견해와 그린피스 지지를 나타내는 범퍼 스티커, 농민 직거래 시장에서 장보기 등ㅡ을 통해 드러난다. 이런 행동과 기표들은 야망계급의 가치관을 함축하고 있으며, 그런 가치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습득한 지식 또한 넌지시 드러내준다. 오늘날의 야망계급은 커리어에서부터 식품점에서 구입하는 식빵 종류에 이르기까지 온갖 선택을 하고 의견을 형성하는 데서 가치관과 문화적·사회적 의식, 지식 습득을 소중히 여긴다. 이들은 크고 작은 선택을 할 때마다 자신이 사실에 근거해(유기농 식품, 모유 수유, 전기차 등의 장점에 관해) 올바르고 합당한 결정을 했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결정이 식견 있는 것이며 정당하다고 느끼고 싶어 한다. 요컨대 베블런의 유한계급이나 데이비드 브룩스의 '보보스'와 달리, 이 새로운 엘리트는 경제학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야망계급은 특정한 가치관과 지식 습득에 기반한 집단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을 얻는 데 필요한 희소한 사회적·문화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40-41p)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인의 소비 행동에는 세 가지 중요한 거시적 추세가 있었다. 첫째, 부유층과 상층 중간계급ㅡ즉 소득 상위 1퍼센트와 상위 5퍼센트 및 10퍼센트 계층ㅡ은 과시적 소비에서 미국인의 평균 지출액 대비 덜 지출하는 반면, 중간계급ㅡ소득 상위 40~60퍼센트ㅡ은 더 많이 지출한다. 둘째, 지출 비중으로 볼 때 중간계급은 소득에 비해 과시적 소비의 비중이 큰 반면, 부유층(그리고 극빈층)은 적다. 셋째, 부유층의 과시적 소비는 '비과시적 소비'로 대체되고 있다. 즉, 이들의 소비는 더 많은 여가를 얻고, 장기적으로 삶의 기회를 창출하는, 비과시적이면서도 고가인 서비스로 대체되고 있다. 교육, 의료, 육아, 보육, 정원사, 가사도우미 같은 노동집약적 서비스가 여기에 포함된다.(55p)

 

 

다른 모든 요인을 통제하고 인종의 영향만 살펴본 찰스와 동료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흑인과 히스패닉은 동일한 소득 및 교육집단에 속하는 백인에 비해 소득에서 더 많은 비중을 과시적 소비에 쓴다. 찰스는 이런 결과를 차별의 영향으로 추측한다. 이들은 소수자로서 백인이나 아시아계보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더 큰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좋은 차를 타고 잘 차려입은 모습 등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계급을 암시한다. 차별을 겪은 역사를 지닌 소수자들에게 과시적 소비는 사회적·경제적 위치를 효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차별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결과는 상층계급 와스프WASP 문화에서 관찰되는 것과 거의 정반대다. 어떤 차별이나 억압도 경험하지 않은 와스프집단은 물질적 재화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한다. 피부색만으로도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68-69p)

 

 

물질적 소비는 더 이상 교육이나 은퇴, 의료같이 중요한 지출에 자원을 투자하는 것보다 우선시되지 않는다. 교육, 은퇴, 의료 등에 대한 소비는 모두 높은 가격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동시에 야망계급 지위를 재생산하고 이들이 나머지 전체와 자신들을 한층 더 분리하는 결정적인 통로다.

이런 소비에는 많은 돈이 들지만, 언뜻 보면 지위를 드러내려는 시도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실제로는 지위를 드러낼지라도 말이다). 이처럼 비과시적 소비는 두 가지로, 거의 양분된 형태를 띤다. 매니큐어 색깔이나 특정한 문화적 지식같이 그리 비싸지 않고 돈과 무관하다시피 한 기표들인 정보비용이 드는 비과시적 소비와, 육아, 의료, 대학 수업료같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의 삶의 질을 크게 개선하는 동시에 기존의 계급 구분선을 강화하고 보강하는 대단히 갑비싼 비과시적 소비가 그것이다.

(...)

거의 모든 비과시적 소비의 핵심은 아는 사람만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비가시적이며, 따라서 암묵적 정보나 상당한 돈이 없으면 모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비과시적 소비는 새로운 계급 구분의 원천이다.(94p)

 

 

사회학자 더글러스 홀트가 이야기한 예시를 빌리자면, 오페라를 관람하는 행위는 문화자본이라기보다는 공연 일정이 언제이고 어디서 표를 사야 하는지에 관한 지식, 음악을 감상하는 법, 다른 주제를 논할 때도 공연을 참고할 수 있는 능력, 그 경험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 여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페라 관람이 가치 있는 시간 활용임을 인식하는 능력으로 결합된 결과물이다.

(...)

(송구스럽지만) 크루그먼의 시각이 아니라 그의 이름과 <뉴욕타임스>를 아는 것이 문화자본을 보여준다.(98p)

 

돈과 무관한 비과시적 소비와 지위의 관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건 야망계급 내에서도 경제적 하위집단의 행동이다. 잉글랜드 여왕이나 시티뱅크 은행장과 파티에 참석하는 건 고사하고 집세나 간신히 낼 정도의 돈을 버는 힙스터ㅡ영화계 종사자나 시나리오 작가, 출판계에서 일하는 20대 젊은 도시인ㅡ들 말이다. 이 우스꽝스럽고 아이러니한 하위문화에서는 무엇이 쿨하고 알 만한 것인지에 관한 정보야말로 그들이 가진 전부이며, 따라서 이들 또한 돈과 무관한 비과시적 소비에 몰두한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블로그와 트위터 글을 읽고 참조하며, NPR 에코백을 들고 다니고, 픽시 자전거를 타는 식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규정할 수 있기 때무이다. 그들은 우유 대신 헴프 밀크를 마시고, 중고 혼다 어코드 대신 식물성 기름으로 달리도록 개조된 낡은 메르세데스를 몰며, 맥도날드보다 푸드트럭에서 패스트푸드를 사 먹는다. 가격이 대충 비슷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식물성 연료 차량과 아몬드버터는 야망계급의 문화자본을 보여준다. 이는 실천과 제품이 값이 비싸지는 않지만, 도시의 하위문화와 골목 안쪽에 자리한 좁고 어둑어둑한 술집, 특정 푸드트럭의 위치 등에 관한 내부자 정보 게임을 통해 확인되고 선택된다.(106-107p)

 

 

21세기의 모유 수유는 모성의 다른 많은 측면과 마찬가지로 계급과 그에 따른 수단의 문제가 되었다.

양육은 베블런이 말한 과시적 유한에 참여하는 새로운 통로가 되고 있다. 모유 수유와 출산은 베블런 시대에 스포츠나 그리스어 공부처럼 과시적 유한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다. 루이비통 가방이나 고급 자동차와 달리, 이 기표들은 명백하게 비싼 건 아니지만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시간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소중한 재화가 되었다. 베블런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과시적 유한은 대부분 돈을 연상시킨다. 모성의 많은 측면ㅡ출산 선택, 아이와 함께 자기, 아이 안고 다니기, 모유 수유 등ㅡ은 돈이 들지 않는 듯 보이지만, 이런 활동에 참여할 수 있으려면 시간과 여가가 풍부하고 이런 형태의 모성을 장려하는 문화적·사회적 집단에 속해야만 한다.(143p)

 

 

모유 수유는 주로 특정한 문화적·계급적 집단에서 활발하게 이뤄진다ㅡ교육수준이 높아 모유 수유의 장점에 관해 배우는 여성들, 그리고 24시간 상주 간호사와 모유 수유 강습을 제공하는 수유 상담사, 값비싸고 효율적인 유축기, 산모의 입원 기간 동안 내내 도움을 주는 신생아 친화적인 병원에서 출산할 정도로 넉넉한 보험을 든 고소득집단 여성들 말이다. 모유 수유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또 다른 중요한 지표는 출산휴가 기간이다.

(...)

미국에서 넉넉한 출산휴가는 모든 여성에게 희귀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런 휴가를 받는 이들은 주로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표면상 심한 압박을 받는 일을 하는 여성(가령 관리자, 법률가, 최고 경영자)이 넉넉한 출산휴가를 받으며, 따라서 모유 수유에 성공할 확률도 높다. 물론 그들의 교육수준과 모유 수유의 장점에 관한 지식 접근성(또한 전문직 종사자라는 사실)은 그들의 선택과 밀접하게 연결된다.(147-148p)

 

 

베블런 시대의 지위는 제품 자체로 좌우됐지만, 21세기의 지위는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원산지는 어디인지에 달려 있다. 과시적 소비와 달리, 오늘날 많은 재화는 과시적 생산을 통해 그 지위를 획득한다.(195p)

 

 

과시적 생산으로 만들어진 재화는 야망계급 소비의 핵심 영역이다. 야망계급이 볼 때 우리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것 그 자체이면, 이 때문에 일부 재화의 불투명한 생산과정은 매 단계에서 투명성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 투명성은 단지 더 많은 문화적 가치를 더하는 게 아니다ㅡ투명성 자체가 가치다. 우리는 농민 직거래 시장에서 더 작고 못생긴 사과를 사 먹는다. 직접 농부를 만났고, 그가 과일에 유해한 화학물질을 뿌리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

새롭게 구성되는 경제 및 문화 시스템에서 과시적 지위 표지의 핵심은 소비가 아닌 생산에 있다. 이것이 바로 할리우드의 성공한 시나리오작가와 실업자 힙스터를 같은 카페에서 보게 되는 이유다. 수백 년간 정반대에서 대립한 끝에 마침내 야망계급으로 한데 뭉친 이 두 집단은 똑같은 물건을 원하고 높이 평가한다. 21세기에 과시적 생산이 등장한 데는 세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다. 세계화에 대한 반발, 정보의 홍수 속에서 투명한 정보에 대한 선호, 탈희소성 포스트모던 사회와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의 결과로서 이런 일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사치가 그것이다.(204-206p)

 

 

하지만 홀푸드의 성공은 유기농도 맛 좋은 식품 때문도 아니다. 홀푸드의 성공 비결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싶어 하는 정체성과 스토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창조했는지에 있다. 홀푸드 및 과시적 생산 운동 전반을 이해하는 열쇠는 상품 자체가 아니라 과정과 거기에 내포된 의미의 중요성이다. 홀푸드에서 식료품을 산다는 것은 소비자 의식, 동물권 의식, 환경 의식, 그리고 좀 더 광범위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식견 있고 양심적인 사회 구성원이라는 인식을 함의한다.(209p)

 

 

이 책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의 소비주의ㅡ특히 과시적 소비ㅡ는 오늘날 새로운 미국 내부에 존재하는 거대한 불평등을 감춘다. 21세기 미국의 야망계급은 역사적으로 지위를 드러내온 많은 물질적 수단을 거부한다. 그들은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더 높은 사회적·문화적 기준을 열망하고 있다. 이런 열망은 계급적 위치를 보여주기 위한 새로운 수단의 활용으로 이어진다. 이 지배적 문화 엘리트들은 단순한 과시적 소비 대신 과시적 생산, 과시적 여가, 비과시적 소비에 참여하는 쪽을 선호하는데, 이 모든 행태는 물질적 재화의 소비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계급 격차를 확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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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문화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들은 한가하게 빈둥거리기는커녕 자신과 자녀의 물리적·정신적 이득을 취하고자 생산에 몰입하는 야망계급이다. 이들의 소비 행동은 과거 물질적 과시에서 벗어나 암묵적이면서도 은근히 암호화된 수단으로 사회적·경제적 위치를 보여주고 부를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야망계급은 소비주의의 보편화에 따른 '월마트 효과', 즉 대중시장의 물질적 재화를 경멸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과 자신을 한층 더 구별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제조업 소비재의 가격이 떨어짐으로써 계급 구분선을 가로질러 많은 이가 이러한 재화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 착취와 유해 화학물질 사용, 열대우림 파괴 등 가격 인하에 따라 인간과 환경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도 드러났다. 그 결과로 과시적 생산이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제품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어떻게 보이는지보다 훨씬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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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로운 엘리트층의 소비 실천은 중간계급의 과시적 소비에 대한(그리고 평범한 미국인들과의 차별화를 위한) 단순한 대응이 아니다. 대학 교육이나 풀타임 아기 돌보미 같은 소비는 좋은 차나 코치 핸드백 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며, 단순히 지위를 보여주는 물질적 신호로서의 소비보다 한층 폭넓은 영향을 미친다. 이런 소비 선택에는 사회적 비용이 따른다. 야망계급이 내리는 결정과 이들이 확립하는 규범은 과거 유한계급의 소비주의가 사회에 미친 영향보다 훨씬 더 유해하다. 은수저를 사거나 장기 휴가를 가는 대신 교육과 건강, 은퇴, 양육에 쏟는 투자는 어떤 물지적 재화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녀들이 계급(그리고 종종 부) 재생산을 보장한다. 이와 같은 문화자본과 그 산물의 재생산을 통해 우리는 찰스 머리가 말한 '새로운 상층계급'과 '새로운 하층계급'의 등장을 마주한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격차가 아니라, 전례가 없는 심대한 문화적 격차다. 양육, 지식, 환경 의식 등의 모호한 규범을 둘러싼 문화적 차이에도 그 이면에는 경제적 위치가 자리하며, 이런 상징적 경계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오늘날의 엘리트집단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도덕적이거나 가치로 충만한 선택으로 보이는 행동이 실은 사회경제적 위치의 한 층위로 깊이 내재되어 있고, 이런 선택 중 대개가 거창한 물질적 기표가 아니라 일상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 엘리트, 올리가르히, 금권정치인 등의 사치스러운 라이프 스타일에 집착하는 미디어의 행태로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계층화라는 훨씬 더 시급한 쟁점이 가려진다. 슈퍼리치의 삶이 흥미롭긴 해도 이들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우리 대다수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위 1퍼센트, 5퍼센트, 10퍼센트 소득구간에 다수가 속하는 야망계급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이들이 점점 더 비과시적으로 행하는 결정과 투자는 중간계급이라면 시도할 수 없는, 따라서 이들은 배제하는 방식으로 부와 상향 이동성을 재생산한다. 과시적 여가와 비과시적 소비ㅡ즉 교육, 의료, 육아, 가족과 보내는 시간ㅡ에 투자할 수 있는 자유는 사회학자 울리엄 줄리어스 윌슨의 용어를 빌리자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야망계급에게만 주어지는 '삶의 기회'에 진정으로 영향을 미친다. 자녀의 중등교육에 투자하고, 장바구니를 과일과 채소로 채우고, 정기 건강검진을 받고, 심지어 모유 수유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까지도 모두 다음 세대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전에는 미니밴과 교외 주택이 있으면 '성공했다'는 의미가 되었지만, 이제 그런 것들로는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지 못하며, 그런 대학(그리고 수업료를 내줄 수 있는 능력)이 점차 부유층과 나머지 모두를 갈라놓는 기준이 되고 있다. 야망계급은 0.01퍼센트가 아닐지 몰라도 이들은 다른 모든 이들과 동떨어진, 완전히 다른 특권적 문화 세계에 산다.(317-321p)

 

 

 

 

ㅡ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야망계급론> 中,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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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8

 

 

일단 읽은 곳까지 먼저 정리.

 

 

 

만약 당신이 살기 위해 달리는 얼룩말이거나 먹이를 잡기 위해 달리는 사자라면, 그런 단기적 신체의 위급 상황을 처리하기 위한 당신의 신체의 생리적 반응 메커니즘은 훌륭하게 적응되어 있다.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동물들에게, 스트레스는 내가 죽느냐 네가 죽느냐가 걸린 단기적인 위기이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스트레스를 주는 일들에 대해 생각을 하기만 해도 똑같은 생리적 반응이 작동된다. 그러나 이런 일이 만성적으로 일어난다면 이는 재앙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급격한 신체적 위기 상황에 반응하기 위해 진화된 생리 체계를 너무 자주 작동시켜서라기보다는, 집세나 인간 관계, 승진 등을 걱정하며 몇 달씩 작동시킨 체계 때문에 스트레스 관련 질환이 생긴다는 수많은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

'스트레스'란 신체의 항상성을 깨뜨릴 수 있는 외부 세계의 어떤 것을 말하며, '스트레스 반응'은 항상성을 재정립하기 위해 신체가 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병에 걸리는 것을 걱정하는 인간의 성향을 고려해 보면, 스트레스라는 개념을 단순히 항상성의 균형을 깨뜨리는 것에서 더욱 확장할 필요가 있다. 스트레스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감'일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정도로 현명하며, 단지 예감만으로도 마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과 같은 강한 스트레스 반응을 작동시킬 수 있다.(25-27p)

 

 

스트레스 반응의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저장 부위로부터 신속하게 에너지를 동원함과 동시에 더 이상 에너지가 저장되지 않도록 억제하는 것이다. 지방 세포, 간, 근육에서 넘쳐 나온 포도당과, 가장 단순한 형태의 단백질 및 지방들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근육에 쏟아져 들어간다.

만약 신체가 모든 포도당을 동원하고 있다면, 이를 주요 근육에 가능한 한 빨리 전달해야 할 필요도 있다. 즉 산소와 영양분을 더 많이 수송하기 위해 심박수, 혈압, 호흡량이 증가하게 된다.

스트레스 반응의 또 다른 양상 역시 똑같이 논리적이다. 위급한 상황 동안, 신체가 장기간에 걸친 비용이 많이 드는 건설 계획을 중지한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만약 거대한 회오리 바람이 집을 급습한다면, 이날은 창고의 칠 작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이 충분해질 때까지 장기 계획을 연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받는 동안에는 소화 작용이 억제된다. 천천히 일어나는 소화 과정에서는 당장 필요한 에너지라는 이익을 얻을 충분한 시간이 없는데 왜 그런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겠는가? 다른 누군가의 점심거리가 되는 것을 피하려면 아침에 먹은 것을 소화시키는 것보다 더 급한 다른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고 낙관적인 일들인 성장과 생식(여성이라면 특히 그렇다.)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사자가 당신의 꼬리 바로 뒤에서 두 걸음 뒤처져 쫓아오고 있다면, 배란이나 정자 생산, 뿔을 기르는 걱정은 나중에 해야 한다. 스트레스를 받는 동안에는 성장과 손상 조직의 수복이 감소하며, 성별을 불문하고 성욕이 저하한다. 여성은 배란하거나 임신을 끝까지 유지할 가능성이 적으며, 남성은 발기에 문제가 생기고 테스토스테론 분비가 감소한다.

이러한 변화들과 함께 면역력 역시 억제된다. 신체를 감염이나 질병으로부터 방어하는 면역계는 1년 내에 당신을 죽게 만들 종양 세포를 미리 찾아내거나,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충분한 항체를 몇 주 내에 만들어내는 데는 이상적인 체계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순간에 정말로 필요한가? 여기서 나타나는 논리는 동일하다. 종양은 나중에 찾고 지금은 더 현명하게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8장에서 설명하겠지만, 스트레스를 받는 동안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면역 체계가 억제된다는 생각에는 큰 문제가 있다. 그러나 당분간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스트레스 반응의 또 다른 양상은 극도의 신체적 고통을 받을 때에 분명해진다. 스트레스가 충분히 지속되면, 우리의 고통을 지각하는 능력이 둔해진다.(33-34p)

 

 

그는 스트레스 반응이 작용하는 방법에 관한 3단계의 관점을 제안했다. 초기(경고) 단계에서는 스트레스가 인식된다. 즉 피를 흘리고 있다든가, 너무 춥다든가, 혈당이 낮다든 것을 알리는 비유적인 경고가 머릿속에 울린다. 두 번째 단게(적응 또는 저항)에서는 성공적인 스트레스 반응 체계가 동원되며 신항상성이 다시 확립된다.

스트레스가 길어지면 세 번째 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셀리에는 이를 스트레스 관련 질병이 발생하는 '피로'단계라고 불렀다. 셀리에는 스트레스 반응 중에 분비되는 호르몬이 고갈되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병이 나게 된다고 믿었다. 탄약이 떨어진 군대처럼 갑자기 위협적인 스트레스에 대항할 방어력이 바닥나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살펴보겠지만, 스트레스가 아무리 오래 지속된다 하더라도 그 어떤 주요 호르몬이 실제로 바닥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군대의 탄약이 떨어지는 일은 없는 것이다. 대신, 신체가 너무 많은 예산을 국방에 사용하기 때문에 교육과 의료, 사회 보장 제도를 경시하게 된다(그렇다, 나는 은근히 또 다른 주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트레스 반응이 바닥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활성화되어서, 특히 그 스트레스가 순수하게 정신적일 때, '스트레스 반응은 스트레스 그 자체보다 더 파괴적이 될 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스트레스 관련 질병 발생의 기본이 되는 결정적인 개념이다.

스트레스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사해 보면, 스트레스 반응 자체가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트레스 반응은 시야가 좁고 비효율적이며, 작은 일에 매달려 큰일을 그르치기도 하지만, 위급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반응하기 위해 신체가 해야 하는, 비용이 많이 드는 종류의 일이다. 그리고 만약 매일같이 위급 상황을 겪는다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

만약 에너지를 저장하는 대신에 꾸준히 에너지를 동원한다면, 남는 에너지를 저장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빨리 피곤해지고, 일종의 당뇨병에 걸릴 위험성이 훨씬 더 커진다. 심혈관계를 만성적으로 활성화하면 비슷하게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난다. 만약 사자를 피해 뛰어 달아날 때 혈압이 180/100으로 높아진다면 적응하고 있는 것이지만, 10대 아이가 어질러 놓은 방을 볼 때마다 혈압이 180/100이 된다면, 심혈관계의 재앙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장기적 건설 계획을 지속적으로 가동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회복시킬 수가 없다.(36-37p)

 

 

표면적으로 이 개념이 주는 메시지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스트레스가, 즉 만성적 또는 반복적인 스트레스가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만성적 또는 반복적 스트레스가 사람을 병들게 할 가능성이 있으며, 병에 걸릴 위험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사실 대량의 반복적 또는 만성적 스트레스가 있더라도 자동으로 질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같은 스트레스를 겪는데도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자주 스트레스 관련 질병에 걸리는지를 다룰 것이다.

추가로 강조해야 할 것이 있다. "만성적 또는 반복적 스트레스가 당신을 병들게 할 위험성을 높인다."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부정확한 표현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애초에 단어의 미묘한 의미에 관해 사소한 트집을 잡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스트레스가 당신을 아프게 하거나 아프게 할 위험성을 높이는 경우는 전혀 없다. 스트레스는 당신을 아프게 만들 '질병'에 걸릴 위험성을 높이거나, 그런 질병을 갖고 있는 경우에 당신의 방어력이 질병에 의해 압도당할 위험성을 높인다. 이 구분은 몇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스트레스와 병에 걸리는 것 사이에 더 많은 단계를 둠으로써, 왜 몇몇 사람들만 실제로 병에 걸리는지, 개인차에 대한 더 많은 설명이 존재하게 된다. 또 스트레스에서 병을 앓게 되는 상태까지의 진행 과정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 과정에 개입할 방법을 고안하기가 쉬워진다. 마지막으로, 왜 많은 의사들이 스트레스라는 개념을 자주 의심스럽고 애매한 것으로 여겼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41-42p)

 

 

지휘자 샘인 뇌는 스트레스를 경험하거나 스트레스가 되는 어떤 것을 생각하면 호르몬을 통해 스트레스 반응의 구성 요소들을 활성화한다. 스트레스를 받는 동안 일부 시상 하부ㅡ뇌하수체ㅡ말초 샘의 연결이 활성화되고 일부는 억제된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스트레스 반응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가지 호르몬은 교감 신경계가 방출하는 에피네프린과 노르에피네프린이다. 스트레스 반응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또 하나의 호르몬은 '당질 코르티코이드'라고 불린다. 나는 이 호르몬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책이 끝날 때까지 당질 코르티코이드에 대해 매우 자세히 듣게 될 것이다. 당질 코르티코이드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부신이 이러한 호르몬들을 분비하면 에피네프린과 유사하게 작용한다. 에피네프린은 몇 초 내에 작용하며, 당질 코르티코이드는 몇 분에서 몇 시간에 걸쳐 에피네프린의 작용을 지원한다.

부신은 기본적으로 무분별하기 때문에, 결국은 뇌가 당질 코르티코이드 분비를 조절해야만 한다.(59-61p)

 

 

쾌락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는 것이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스트레스에 관련된 질병은 스트레스 때문에 촉발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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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분노 또는 극도의 쾌락은 생식 기능, 성장 또는 아마도 면역계에도 서로 다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심장 혈관계에 한해서는 이 두 감정이 상당히 비슷한 영향을 준다. 다시 한 번, 극도의 추위나 더위, 또는 먹잇감과 포식자가 같은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설명할 때의 그 스트레스 생리학의 핵심 개념을 상기해 보자. 심장도 그렇지만, 우리 신체의 어떤 부분은 어느 방향에서 신항상성적 균형이 파괴되는지와는 무관하게, 단지 그 파괴의 정도에 대해서만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므로 깊은 슬픔에 울부짖으며 벽을 두들기든, 즐거움에 취해서 뛰어오르고 소리를 지르든, 병든 심장에는 부담이 된다. 즉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화가 났을 때나 성적 도취를 느낄 때나 당신의 교감 신경계는 관상동맥에 대해 거의 같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정반대되는 감정들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생리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장 혈관계에 한해서는 분노와 도취, 슬픔과 승리감 등이 모두 신항상성적 평형을 위협한다.(86-87p)

 

 

그렇지만 정말로 재미있는 것은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단순히 식욕을 자극한다기보다는 당분이나 설탕, 지방이 많은 음식에 대한 식욕을 선택적으로 자극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로 하여금 샐러리 줄기보다는 크림이 든 비스킷을 집게 만든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점이 생긴다. CRH는 식욕을 억제하는 반면에 당질 코르티코이드는 반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둘 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연구의 결과, 타이밍이 결정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스트레스가 발생하면, 몇 초 이내에 CRH가 분비된다. ACTH는 약 15초가 지나면 증가하지만,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혈류 속에 분비되도록 하는 수준에 이르려면 동물의 종에 따라 몇 분이 더 걸린다. 그러므로 CRH는 부신 다단계 작용의 첫 번째 파장을 이루고,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가장 느리다. 이러한 시간 경과의 차이는 이 호르몬들이 신체의 다른 부분에 작용할 때의 속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CRH는 며 초 이내에 그 효과를 느낄 수 있게 만들지만, 당질 코르티코이드는 그 효과를 나타낼 때까지 몇 분에서 몇 시간이 필요하다. 최종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이 종료되면, CRH가 혈류에서 사라지는 데는 몇 초밖에 안 걸리지만 당질 코르티코이는 몇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만약 혈류 속에 CRH가 다량 존재하고 아직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거의 없다면, 아마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해서 몇 분밖에 경과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식욕을 감퇴시켜야 할 때이며, 높은 수준의 CRH와 낮은 수준의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그 일을 해낸다.

그다음, 만약 다량의 CRH와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혈류 속에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지속적인 스트레스에 휩싸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시 식욕을 감퇴시켜야 할 때이다. CRH의 식욕을 억제하는 효과가 당질 코르티코이드의 식욕을 증진시키는 효과보다 크다면 이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마지막으로, 만약 혈류 속에 당질 코르티코이드는 풍부한데 CRH가 거의 없다면, 아마도 회복기에 들어선 것이다. 소화가 다시 시작되고, 신체가 미친 듯이 초원을 달리느라고 소비했던 에너지를 다시 보충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인 것이다. 따라서 식욕이 자극된다. 4장에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어떻게 은행에 저장된 에너지를 고갈시키는지를 보았다. 이 경우에 당질 코르티코이드는 스트레스 반응의 매개자 역할이 아닌, 스트레스 반응으로부터의 '회복'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스트레스의 지속 시간과 회복 기간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이제 점차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정말로 심한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어떤 사건이 발생해서 최대한 CRH, ACTH 그리고 당질 코르티코이드를 분비하라는 신호가 촉발되었다고 가정하자. 만약 스트레스가 10분 후에 사라진다면 우림 몸은 누적적으로 볼 때 12분 동안의 CRH 방출(스트레스를 받는 10분간 및 그 후 혈류 속에서 제거하는 데 걸리는 수십 초를 더해서)과 두 시간 동안의 당질 코르티코이드 분비(스트레스를 받는 동안의 약 8분과 당질 코르티코이드를 혈류 속에서 제거하는 데 걸리는 훨씬 긴 시간의 합)에 노출된다. 그러므로 당질 코르티코이드 수준이 높고 CRH 수준이 낮은 기간이 CRH 수준이 높은 기간보다 훨씬 길다. 종합적으로 식욕을 자극하는 상황인 것이다.

대조적으로 스트레스가 며칠에 걸쳐 끊임없이 지속된다고 생각해보자. 다르게 표현해서, 며칠 동안 CRH와 당질 코르티코이드 수준이 상승되어 있다가, 체계가 회복될 때에 몇 시간쯤 당질 코르티코이드 수준이 높고 CRH 수준이 낮은 상태가 뒤따랐다고 치자. 가장 그럴듯한 결과는 아마도 식욕의 억제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과식이 되는지 소식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스트레스의 유형이다.

(...)

스트레스를 받을 때 과식을 하느냐 소식을 하느냐를 예측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변수는 특정한 스트레스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다. 피험자 집단을 동일한 실험적인 상황에 처하게 하면, 예를 들어 자전거를 처음 배운다거나 수학 시험을 본다거나, 남들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된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은 수준의 당질 코르티코이드를 분비하지는 않는다. 또 스트레스 상황이 끝난 뒤, 모든 사람의 당질 코르티코이드 수준이 동일한 속도로 기준 수준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이러한 개인차의 원인은 정신적일 수도 있다. 동일한 실험적 스트레스가 어떤 사람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생리학적인 차이도 있을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간의 당질 코르티코이드 분해 속도가 느릴 수도 있다.(116-119p)

 

 

 

ㅡ 로버트 새폴스키, <스트레스> 中, 사이언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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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8

 

 

수학에서 어떤 명제를 증명했다고 하면, 그것은 영원히 유효하고 그 증명된 명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바뀌거나 폐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학이론은 자주 바뀌고 확실하다고 했던 이론도 폐기되곤 합니다. 그러면 원래부터 증명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증명은 안 되었다 해도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뭔가 믿을 만하고 다르다고 하고 싶은데, 과연 그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봅시다.(24-25p)

 

 

많은 과학철학자들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방법론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포퍼입니다. 포퍼가 말하는 과학의 정수는 비판정신이고, 그 정신은 모든 이론을 사정없이 시험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와 비교해 이론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멋진 이론이라도 아깝지만 버리는 것입니다.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정말 있는지를 감히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교리에 의해 세상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간절히 기도드렸던 일이 이루어진다면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감사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역시 하느님의 뜻이고, 자신의 믿음이 부족해서라든지 하느님께서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시련을 내리셨다든지 하는 식의 해석이 나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건 간에 독실한 신자는 하느님은 존재하고 자애로운 분이라는 믿음을 유지합니다.

포퍼는 그런 식의 믿음이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과학적이지는 못하다고 본 것입니다. 과학은 뭔가 새로운 것을 계속 배워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이론을 포기하고 더 좋은 새로운 이론을 얻는 것은 중요하고 유익한 일입니다. 반면 종교적 교리는 불변하며, 신앙이란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포퍼는 그런 경건하고 독단적인 태도를 과학적 태도의 정반대로 보았습니다.

 

포퍼의 철학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경험에 뿌리 박힌 것입니다.(28-29p)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강가에 서 있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구하러 뛰어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들러 파의 심리학자는 '아, 이 사람은 영웅적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라는 해석을 하면서 '역시 아들러 이론이 맞아'하고 만족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물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그러면 즉시 '이 사람은 우월해지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열등감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무력해졌어'하는 진단을 내립니다. 또 아들러 이론이 맞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들러의 이론으로 문제없이 설명할 수 있고, 그 설명을 잘함으로써 이 이론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포퍼는 아들러가 이런 식으로 만나보지도 않은 환자에 대해 자신 있는 진단을 내리면서 엉터리로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는 것을 보고 실망해서 그 밑을 떠났다고 회고합니다. 결국, 뭐든지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종교처럼 독단적이거나 음모설처럼 사람을 홀리는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포퍼는 판단했습니다.(30-31p)

 

 

해가 매일 아침 동쪽에서 뜨는 것조차도 북극이나 남극에 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6개월 내내 밤이고 6개월 내내 낮이기 때문에, 방향은 둘째 치고 매일 아침 해가 뜨지도 않습니다. 또 정확히 북극점이나 남극점에 서면 동서남북의 개념 자체가 파괴되어버립니다. 북극점에서는 지구상의 어느 방향이나 다 남쪽입니다. 동은 뭐고 서는 뭔지 구분이 안 되고, 북도 실종됩니다. 머리 위(북극성을 향해 가는 방향)가 북쪽이고 발밑(남극을 향해 가는 방향)이 남쪽이라고 다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남북을 잡앚놓고 나면 평소에 생각하던 동서의 개념은 전혀 무의미해집니다. 이렇듯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상황이 우리 지구상에 있는 북극점에만 가도 벌어집니다. 해가 매일 아침 동쪽에서 뜬다는 것은 북극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의 일상생활이 얼마나 한정돼 있고, 우리의 상상력은 얼마나 제한되어 있습니까?(72p)

 

 

인간도 살다 보면 자신이 자주 경험하는 일에 버릇이 들어 방심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귀납적 추론의 근본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들도 종종 당합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가 갑자기 부서질 수도 있고, 차로 한강을 잘 건너가고 있는데 다리가 무너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

저도 사실 대학과 대학원을 다 캘리포니아에서 다녔는데 조금 큰 지진도 두 번 경험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일시적 충격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땅은 굳게 버티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다시 계속 살았습니다. 그런 귀납적인 추론에 의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회의론적인 의심에 사로잡혀 마비가 되어서 아무 행동도 할 수 없게 됩니다. 포퍼도 이것은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초인적인 존재라면 귀납적인 사고를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73-74p)

 

 

저는 과학이 자연에 숫자를 갖다 붙이는 '수량화'과정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데, 그 목적은 수량화가 당연한 것도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매일 몇 도 몇 도 하면서 주워섬기는 온도도 원래는 차갑다, 뜨겁다 하는 질적인 개념이었지 수량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직정 경험하는 온도는 느낌이지, 숫자가 아닙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요. 나는 지금 한 22도쯤 된다고 느낀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도계를 항상 보고 거기 나온 숫자와 자신의 느낌을 연관 짓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나 하는 말이지, 덥고 추운 것 자체가 숫자로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도 '뜨겁다', '차갑다'는 '습하다', '건조하다'와 함꼐 가장 중요한 성질이었는데 정량적인 개념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럽의 과학자들이 1600년경에 온도계를 발명했고,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이론적인 연구를 한 결과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온도 개념을 수량적으로 제대로 정립해냈습니다. 그 수량화된 개념을 한국 등에서는 나중에 별 생각 없이 수입했던 것 같습니다.

과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정말 우리가 상식적으로 수량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처음에는 수량이 아니었고, 어떤 식으로 수량화되었는지 그 과정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서 속도는 당연히 수량이라고 생각하는데, 중세 유럽의 물리학자들은 속도가 수량이냐 아니냐를 두고 많은 논란을 벌였습니다.(92-93p)

 

 

이것이 역설적이면서 아주 중요한 인식과정입니다. 처음에 어떤 기준을 기반으로 탐구를 시작하여, 그 탐구의 결과를 기반으로 원래 채택했던 기준 자체를 수정하고 개선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발달은 몇 단계에 걸쳐 계속될 수 있습니다. 감각을 넘어서게 해준 그 측정기구로 연구를 해서 지식을 더 쌓아 더 훌륭한 이론을 세우고, 그 이론을 이용하여 측정기구를 수정하거나 더 훌륭한 새로운 측정기구를 만듭니다. 그렇게 개선된 측정기구가 생기면 또 개선된 연구를 하여 더 배우고, 드 새로운 지식을 이용해 또 측정기구를 개선합니다.

다시 시간 측정의 예로 돌아가봅시다. (1)사람들은 처음에 감각적으로 하루의 길이는 대략 일정하고 태양은 하늘을 일정한 속도로 가로지른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 느낌을 기반으로 해시계를 만들었습니다. 그 해시계가 잘 만들어지니까 거기에 의존해서 시간을 정의했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가 하는 느낌 자체는 너무 주관적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2)해시계를 기준으로 관측하면서 물리학·천문학 연구를 한 결과,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지동설을 거쳐 뉴튼역학을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뉴튼역학을 기반으로 하면 추시계가 해시계보다 더 정확하고, 해시계가 대강은 맞지만 오차가 있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오차를 계산해서 해시계를 수정했습니다. (3)추시계를 사용해서 많은 물리학 연구를 할 수 있었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역학뿐 아니라 전자기학, 광학 등 여러 분야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이것이 모두 시간 자체를 주제로 하지는 않지만, 정밀한 시간 측정 없이는 발달시키기 불가능했던 학문들입니다.

(...)

이러한 과학의 발달과정을 볼 때, 탐구를 하다 보면 원점으로 돌아와 그것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과학에서 이런 식의 개선은 비일비재합니다. 과학이 이렇게 발달하는 과정을 저는 「온도계의 철학」에서 '인식적 반복'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자연을 탐구하는 과정은 어떤 주어진 기준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측정기구는 그러한 기준의 중요한 한 예이고, 그 외에도 1장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패러다임에 포함되어 받아들여진 연구방법이나 판단 기준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어진' 기준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장에서 살펴보았듯, 기준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개선할 수 있고 완벽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완벽한 기준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아무 일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갖추어진 기준에 의존하여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탐구를 시작하여 결과가 잘 나오면, 그 탐구의 시발점이 된 기준도 재검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원래의 기준을 수정하고 정제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물려받은 기준을 존중하고 사용하되 거기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또 그런 과정을 계속 반복할 수 있습니다. 인식적 반복이란 처음에 믿고 시작한 전제들을 단순히 유지하고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매 단계에서 재검토하며 지식을 쌓고 개선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인식과정을 통해 지식이 발달하는 과정을 좀 기하학적으로 비유하자면, 나선의 형태입니다. 나선은 동그랗게 돌아서 계속 같은 점으로 돌아오는데 한 번 돌아올 때마다 더 높아집니다. 이것이 덧없는 순환논리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관점이 '지식의 완벽한 정당화'라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요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무한히 높은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기 때문에 나선이 그냥 원으로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와서, 옆에서 나선형을 보면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확실히 보입니다. 이 나선형의 발전형태를 원형의 순환 논리로 잘못 이해하고 저도 측정에 관한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지식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 완벽하지 않은 지식을 우리가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 그것도 보입니다.(114-117p)

 

 

과학은 그런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까요? 어떤 사람이 정말 멋진 아이디어를 내서 그 퍼즐을 푼다면 붕괴되어가던 기존의 정상과학 패러다임이 다시 소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퍼즐을 풀긴 풀었는데 기존의 패러다임에 전혀 맞지 않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푸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위기를 해결할 조짐이 보이면 그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충분히 모이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는데, 그때 기존의 패러다임은 크게 흔들리기는 했지만 아직 버티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신-구 패러다임 간에 경합이 시작됩니다. 정치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많은 경우 내전을 하지요. 과학에서도 그렇게 내전이 일어납니다. 신출내기 패러다임이 그 내전에서 이기면 과학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혁명이 종료되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또 다른 스타일의 정상과학이 시작됩니다. 또 그 새로운 정상과학도 조금 나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변칙사례들을 만나게 되고, 위기를 맞고, 결국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교체됩니다. 쿤은 계속 끝없이 정상과학, 혁명, 정상과학, 혁명의 과정이 반복되는 것으로 과학사를 해석하고 과학의 미래도 그런 식으로 암묵적으로 예견했습니다. 이 반복된다는 개념이 재미있고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말의 '혁명'에는 그런 의미가 없지만 영어 단어 혁명에는 '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도는 것과 혁명이 무슨 상관일까요? 어원을 생각해보면 원래 혁명의 의미는 쿤이 말하는 것처럼 세상이 돌고 또 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제국이 흥망성쇠하면서 역사가 이루어지듯이.

(...)

쿤의 철학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패러다임들이 어떤 관계를 갖는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비정합성'이라는 개념입니다. 기본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는 패러다임은 서로 동의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서로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말이 안 통한다고 느슨하게 표현했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거기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패러다임이 바뀌면 판단기준이 바뀝니다.

비정합성의 두 번째 차원은 패러다임이 바뀌면 여러 가지 개념과 용어의 의미 자체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비정합성의 세 번째 차원은 가장 심각합니다. 정말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부분인데요. 쿤은 패러다임이 바뀌면 관측된 현상 자체가 바뀐다고 했습니다. 2장에서 논의했던 '관측의 이론적재성'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패러다임이 바뀔 때는 이론이 많이 바뀝니다. 그런데 그 이론이 바뀌면 그 이론의 영향을 받는 관측내용도 바뀐다는 것입니다.(127-138p)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철학적 문제들이 대두됩니다. 패러다임 간의 비정합성 때문에 과학의 객관성이나 중립성, 진실성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많이들 했고, 정말 큰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1장에서 쿤의 정상과학 개념 때문에 포퍼 등과 격한 논쟁을 벌였다고 이야기했는데, 과학혁명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싸움입니다.

(...)

첫째, 이렇게 쿤이 말하는 식으로 혁명이 일어난다면 과학적 지식이 축적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주어진 어떤 패러다임 안에서 지식이 축적된다는 것은 분명한데, 혁명이 일어나 그 패러다임 자체가 무너진다면 그 안에서 축적된 지식도 함께 없어져버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

둘째, 과학이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는 걱정이 생깁니다. 쿤은 과학지식 중에 가장 근본적이고 깊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일수록 뚜렷한 방향 없이 발전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진리가 저 멀리에 있고, 아직 과학이 발달하지 못해서 우리가 지금은 여기쯤 있지만 노력을 통해 점점 진리에 다가간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쿤은 과학의 발전에 그런 식의 방향성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143-145p)

 

 

성공적인 이론도 나중에 폐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과학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증거에 의한 이론의 과소결정'과도 통합니다. 과소결정은 우리가 어떤 경험적 증거를 가지고 있을 때 그와 부합되는 이론이 여러 가지인 상황을 가리킵니다. 반프라센 식으로 말하면 주어진 그 증거를 가지고 볼 때 여러 이론이 다 경험적 적합성을 지니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여러 가지 이론 중 하나를 찾아낸 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성공적이라고 만족해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가능성이 발견되면 그 이론을 따라가면서, 예전 이론은 싫고 틀렸다고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반실재론을 따르면 그렇게 과소결정에 걸려 넘어질 염려는 없습니다.(162p)

 

 

둥근 지구에 집을 짓는 새로운 비유의 이미지는 토대주의의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이런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인식론적 입장을 제시해줍니다. 또한 정합주의적 과학이 어떻게 진보할 수 있는지도 확실히 보여줍니다. 우선 생각해봅시다. 구형으로 된 지구가 실제로 어떻게 토대가 될 수 있을까요? 건물을 지을 때 우리는 분명히 지구를 토대로 사용하고, '흙 토'자를 쓰는 '토대'라는 개념 자체가 지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 지구란 전혀 어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광대한 우주의 진공 속을 떠다닙니다. 이는 마치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노이랏의 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게다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런 지구가 어떻게 토대가 될 수 있습니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첫째, 지구는 큽니다. 우리 인간보다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우리는 개미새끼처럼 그 표면에 붙어서 모든 일을 합니다. 또, 지구는 클 뿐 아니라 조밀합니다. 전통적 토대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견고한 것이 아니라 그냥 상당히 딱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편에 서 있고 그 안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중력입니다. 지구가 인간과 돌과 유리와 콘크리트 등 모든 것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구 표면에 붙어서 건물을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구가 크고 딱딱하고 중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토대 역할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데카르트가 찾던 그런 절대적 기초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기초가 없기 때문에 지식을 올릴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식과 확실성의 동일시는 데카르트로부터 내려오는 근대 서양 철학 전통의 큰 결함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만이 지식이라는 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데, 과학의 역사와 과학의 실체를 냉정하게 보면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확실하지만 지식은 있습니다.

(...)

데카르트처럼 뭔가 확실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지식을 쌓으려는 시도를 떠나서, 인간이 실제로 태어나서 어떻게 지식을 얻는지를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어린아이가 회의적인 질문을 하나요? 아닙니다. 무조건 어머니, 아버지가 하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언어조차도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확실한 증거나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 참 많습니다.

(...)

직접적인 경험을 근거로 하지 않는 말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나서야 우리는 인식행위 자체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정당화한 후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집 짓는 비유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지구에 태어났으니까 지구에 집을 짓는 것이지 지구가 객관적인 기준으로 볼 때 전 우주에서 제일 훌륭해서 여기다 짓는 것은 아닙니다. 화성에서 태어났다면 화성에 지었겠지요. 확실성을 포기하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지식을 미래의 지식을 쌓아올리는 토대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199-201p)

 

 

요즘 은유를 논의하는 많은 사람들은 레이코프와 존슨의 은유론을 기점으로 합니다. 이들은 이간의 모든 개념 체계에 속속들이 은유가 박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글자 그대로 이야기한다고 할 때도 사실 많은 은유적 표현을, 은유라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종종 씁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귀가 '어둡다'고 하는데, 이는 청각상태를 시각상태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누가 뭘 좀 이해했는지를 물을 때 우리는 알아 '들었냐'고 하는데 이해가 꼭 귀로 들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팽배한 은유적 표현에는 문화적 차이도 확실히 있습니다. 영어에는 귀가 '어둡다'는 표현은 없고, 알아들었냐고 하는 말은 통상 '보이냐'고 묻습니다(Can you see? 또는 Do you see?).

공간적인 은유는 특히나 많습니다. 우리는 뭐든지 '앞으로' 잘 하겠다고 합니다. 미래를 '앞으로'라고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팽배한 은유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이야기할 때 꼭 '앞으로'라는 은유를 써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반대로 미래를 뒤로 말하는 은유도 있습니다.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으라고 하는데, 그 '전'은 한문의 '앞 전' 자입니다. 그러니까 '전후'로 이야기할 때는 과거가 앞이고 미래가 뒤입니다. 순수한 우리말로도 손을 씻은 뒤에 밥을 먹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향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왠지 시간의 순서를 공간적 은유로 써서 표현하는 버릇이 들어 있습니다.

더 중요하면서도 더 이상한 예로 물건 값이 '올랐다'는 말을 들 수 있습니다. 온도도 '올랐다'고 합니다. 도대체 비싼 것과 위에 있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고, 가열하는 것과 올라가는 것이 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더워지면 온도계 속의 액체가 팽창해서 유리관 속에서 올라가기 때문일까요? 석연치 않습니다. 요새 전광판에 표기되는 온도계는 숫자만 나오지, 뭐가 오르내리지 않습니다. 9장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더워질수록 온도를 나타내는 숫자가 작아지는 온도계도 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우리가 수량 자체를 '높다, 낮다'고 생각하는 은유입니다. '하나, 둘, 셋'하면서 더 많아지는 것과 공간적 위치가 올라간다는 것은 잘 생각해보면 논리적으로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365-366p)

 

 

다원주의의 타당성을 우선 농담으로 한번 표현해보겠습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글짓기 대회를 했는데, 지정된 주제가 '우리 집 강아지'였습니다. 그 주제로 어떤 학생이 써낸 글을 보고 선생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거, 너희 누나가 낸 글과 한 글자도 안 틀리고 똑같아. 그대로 베꼈지?" 그랬더니 이 아이가 한다는 말이 "아뇨, 같은 개거든요"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웃겠지만,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사실 실재와 과학이론의 관계에 대해 종종 그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모든 과학에서 다루는 대상은 결국 하나뿐인 우주이니까, 옳은 이론은 궁극적으로 단 한가지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380-381p)

 

 

예를 들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세워서 전 우주의 작동원리를 정립하고자 했던 뉴튼의 꿈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깨졌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훌륭한 뉴튼역학을 아주 팽개쳐버리겠습니까? 아닙니다. 일상생활 범위부터 태양계 정도 스케일까지는 뉴튼역학을 아직도 잘 쓰고 있습니다. 스케일이 아주 작아지면 양자역학을 쓰고, 아주 커지면 일반상대론을 씁니다. 속도가 높아지면 특수상대론을 씁니다. 그런데 환원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하겠지요ㅡ원칙적으로는 상대론적 양자역학 이론을 잘 세우면 필요한 모든 내용을 표현할 수 있고, 다루는 대상이 복잡해질 때 계산하기가 힘들어지는 것뿐이다. 그렇게 말 하기는 쉽지만, 양자역학으로 로켓을 쏠 수는 없습니다. 양자역학이 진짜 진리냐 하는 생각을 떠나서 말이지요. 우리가 실제로 어떤 이론을 써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로켓을 쏘는 과학은 아직 뉴튼역학이라는 것이 명백합니다.(391-392p)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의미로서의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는 전혀 입장이 다릅니다. 상대주의란 판단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 너도 좋고, 네 말도 맞고, 난 상관없어'하는 태도인데, 다원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원주의가 표방하는 것은 한 가지만 하지 말자는 것이지, 아무거나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의 체계를 동시에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관용의 이점과 상호작용의 이점을 추구하자는 것이지, 모든 체계를 다 허용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402p)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장님입니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도 관측 불가능으로 남아 있는 무궁무진한 우주를 그래도 알고 이해해보려는 인간의 노력이 바로 과학입니다. 상황을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자연히 겸허해집니다. 그런데 이 겸허한 태도에서 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쉬운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의 입장은 다릅니다. 우리가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들이라면, 장님이라도 여러 명을 동원해서 협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분업을 해서 다양한 다른 부분을 더듬고, 그렇게 해서 알아낸 내용을 서로 비교하고 토의해서 다듬어야 합니다.(407p)

 

 

 

ㅡ 장하석,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中, 지식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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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8

 

 

그런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서사가 없다, 약하다, 삽화적이다, 일화가 그냥 나열되었을 뿐이지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등등이죠.

그러한 서사에 대한 추구는 인생이 통일성과 정합성을 갖고 있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도블라토프가 바라보는 인생은, 세게는 그렇지 않죠. 그것은 부조리한 일화들의 느슨한 연결입니다. 커다란 통일성도, 정합성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도 없어요. 다만 도블라토프가 내세운 화자의 특유의 톤, 다시 말해 도블라토프의 테크닉을 통해 하나의 소설을 형성하는 거죠.

하지만 일상을 그렇게 일화적인 것의 느슨한 연속으로 파악함으로써 도블라토프에게 삶은 부조리하지만 견딜 만한 것이 됩니다. 굉장히 거대하고 정교한 악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라, 작은 악의들, 작은 실수들, 작은 부조리들이 있는 거죠. 일화의 특징이 뭐예요. 짧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도블라토프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끔찍하다.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진정한 용기란 삶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알면서도 그 삶을 사랑하는 데 있다.(60-61p)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떠한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이 정치와 관계가 없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이다." 그렇죠, 어떤 작품이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어서 불편하다느니, 예술 작품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느니 하는 주장들은 다 개소리입니다.(80-81p)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의하면 19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라는 '상상된 공동체'가 형성된 데에는 소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인쇄술의 발달로 표준어가 정립되고, 단일한 언어로 쓰여진 소설이 널리 읽히며 '공감'의 공동체가 만들어진 거죠. "소설이 지식인과 대중 또는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공감'을 통해 하나로 만들어 네이션(근대국가)을 형성한다는 것" "그 결과, 그때까지만 해도 낮기만 했던 소설의 지위가 상승"했다고 고진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절은 이미 지나가버렸죠.

한때 우리 사회에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결국 '문학'이 끝났다는 게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 의해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받았던 문학의 어떤 형태, 즉 '근대문학=소설'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향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92-93p)

 

 

이제 책은 더 이상 문자를 독점하는 매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부드럽고 유동적인 매체(뇌)에서 딱딱하고 고정적인 매체(책)로 옮겨갔던 문자는 이제 다시 유동적이며 검색 가능한 매체(인터넷)로 옮겨가는 중이지요.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억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머릿속에 있던 정보가 과거의 어느 순간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책이라는 외부 저장 장치로 옮겨갔고, 이제 기억과 기록을 구분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 없을 정도로 혼합된ㅡ내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외부도 아닌ㅡ공간으로 옮겨가는 과정중에 있다고요.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일단 책 밖으로 뛰쳐나간 문자들을 도로 가둘 수는 없습니다. 방대한ㅡ거의 무한에 가까운ㅡ저장 공간, 간단한 키워드만으로 평생 읽지 못할 자료들을 찾아주는 검색 능력, 무엇보다 실시간 발행과 실시간 상호작용이라는 인터넷의 역량을 책을 결코 따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책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책이 제공하는 종류의 정제되고 정돈된 지식을 인터넷은 제공할 수 없다'같은 말을 해봤자 별다른 울림을 갖지 못하겠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패러다임 자체가 바뀐 상황에서 그런 말들은 책을 반대하고 기억을 옹호한 소크라테스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들립니다.

오해하면 안 됩니다. 저는 책이 사라져도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책이 나왔다고 기억이 사라진 게 아닌 것처럼요. 다만 지금과는 다른, 좀더 축소되고 분화된 역할을 맡게 되겠죠. 그게 무엇인지는 저도 알 수 없고, 중요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서는요.(104-105p)

 

 

그 방을 떠나지 않았다면, 담을 넘지 않았다면, 읽고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 있는 체하고 있다면, 가족들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읽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먹고 있습니다. 읽기는 몰래 먹기입니다.

읽기는 금단의 열매를 먹는 것이고, 금단의 사랑을 하는 것이고, 시대를 바꾸는 것이고, 가족을 바꾸는 것이고, 운명을 바꾸는 것이고, 낮을 밤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읽기는 모든 것을 정확히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몰래'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두 가지의 읽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여기에서의 읽기입니다. 교과서를 읽고, 참고서를 읽고, 자기계발서를 읽고,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에 관한 책을 읽고, 육아나 요리에 관한 책을 읽고, 교양을 위해 가벼운 사회학 서적이나 대중심리학 서적을 읽고, 취미에 관한 책을 읽고····· 이것들은 우리를 바깥으로 데려가지 않고, 담을 넘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 이곳에 단단히 발붙이게 합니다. 이것을 '한낮의 읽기'라고 해두죠.

그렇지 않은 책, 다른 책, 그러니까 어떤 소설이나 시, 그리고 어떤 종류의 철학이나 이론처럼 우리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이끌어가는 책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식수가 말하는 읽기죠. 저는 이걸 '가장 어두운 순간에 읽기' '한밤의 읽기'라고 부르고 싶어요. 밤에 읽어서가 아니라, 지금-여기를 '몰래' '밤으로 바꾸는'읽기니까요.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지금 어느 한쪽의 책/읽기가 더 낫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독서를 말할 때면 너무 전자만, 그러니까 한낮의 읽기만 이야기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124-125p)

 

 

물리적인 시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책 읽기에 시간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불닭볶음면처럼 짧은 시간에 나를 자극해서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혹은 사이다처럼 타는 갈증을 즉각적으로 시원하게 씻어주는 그런 콘텐츠를 찾을 수밖에요.

여기에는 일종의 악순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유가 없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습니다. 대신 즉각 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가용 시간을 쏟아붓죠.

그런데 사람들이 가용 시간을 즉각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쏟아붓는 사회는 점점 더 여유가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치의 일을 모두 끝낸 늦은 밤, 책을 읽거나 다른 무언가를 할 기운은 없지만 그냥 자고 싶지는 않을 때 우리는 트위터를 보고 넷플릭스를 보고 쇼츠를 보고 틱톡을 봅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작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 시간을 확인하고 비명을 지른 다음 서둘러 잠자리에 듭니다. 아마도 내일은 더 피곤할 테고, 스마트폰 말고 다른 걸 볼 기력은 더욱 없겠죠.(145-146p)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전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24시간이 주어졌고, 우리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그 24시간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그것을 살아내야 합니다. 얼마 있지 않은 달콤한 밤의 시간을 쪼개고 희생해서 자기가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죠. 저는 그중 하나가 한밤의 읽기라는 말씀을 드리는 거고요.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이라고 느껴져도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눈앞에 보이는 가능한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한밤의 읽기입니다.(168-169p)

 

 

물론 글쓰기와 책 읽기, 혹은 문학이라는 것에는 어떤 종류의 '환상'이 전제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읽고 쓰는 동안 내가 지금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내 삶이 나아지고 있고 이것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까지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읽기와 쓰기가 만들어내는 문학이라는 행위의 핵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환상이 없다면 문학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으니까요. 롤랑 바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학에서 환상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게 어느 정도냐는 거예요. 쓰기와 읽기의 핵심에는 환상이 있어요. 하지만 환상과 기만은 같지 않습니다. 이 모든 행위의 핵심에는 환상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과 독자들에게 정직하려고 노력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반대로 어차피 환상이라면 그냥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작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말을 아주 열렬히, 최선을 다해서, 마치 그것이 더없는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거죠. 제 생각엔, 적극적으로 환상을 이용하는 그들이야말로 문학에서 환상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독자들을 향해 환상을 현실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으니까요.(177-178p)

 

 

여기서 읽기에 대한 작은 팁을 하나 드릴게요. 한번 책을 끝까지 읽은 다음 처음으로 돌아와서 서문이나 앞부분을 다시 읽어보세요. 처음에는 몰랐던 게 보이기도 하고, 전혀 다르게 읽히기도 하거든요. 꽤 재미있어요.(187p)

 

 

 

ㅡ 금정연, <한밤의 읽기> 中, 스위밍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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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6

 

 

그런데 해러웨이가 내세운 사이보그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페미니스트 화가 린 랜돌프가 그리기도 했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이미지는 가슴에 IC칩이 부착된 유색여성이었고 그의 손가락은 고양이과의 그것과 해부학적인 구조가 흡사했다. 해러웨이가 제시한 새로운 사이보그는 여성-동물-기계가 융합된 모습이었다. 이 형상은 이중으로 불경스러운 모습이었다. 한편으로는 남성의 전유물인 기계를 탐했다는 면에서, 또 한편으로는 무구한 자연적 신체인 여성과 동물을 파괴적 기계와 결합했다는 면에서 그랬다. 이는 사이보그 재형상화를 통해 이중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사이보그를 통해 전쟁과 정복의 야욕에 혈안이 된 테크노사이언스와 대결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구한 여성성에 호소하는 정체성의 정치에도 대항하려 했다.(25-26p)

 

 

자연은 문명의 자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호되어야 할 고귀한 무엇도 아니기 때문이다. 해러웨이가 보기에 자연은 문화와 분리된 저 어딘가에 있는 황야가 아니라 처음부터 자연문화natureculture였다. 자연-문화가 아님을 주의하시라. 자연과 문화는 하이픈(-)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해러웨이는 자연과 문화는 분리된 채로 서로 교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 불가능한 자연문화임을 주장한다. 「반려종 선언」은 개와 인간의 관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이를 이야기하는 책이다.(29p)

 

 

「반려종 선언」에서 해러웨이는 개와 인간의 상호적인 협동의 역사를 이야기함으로써 일방적인 정복의 신화에 맞서고자 했다. 하지만 협동의 역사를 일구어 왔다고 해도 목줄에 매여서 묶여 있는 것은 개이지 인간이 아니다. 그런 엄연한 사실이 내게 소화불량을 유발한다. 「사이보그 선언」에서부터 해러웨이가 지속적으로 해온 작업은 상대적으로 권력이 취약한 자들을 수동화하지 않는 것이었다. 권력이 약한 자들을 고통받는 피해자로만 위치시키는 것은 그들을 영원히 노예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 많은 지금/여기의 이 세상을 만든 책임을 그들(남성들)에게 떠넘기게 되면, 도덕적인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노예상태를 면하기는 어렵다. 무구한 노예로 살면서 혹시 올지도 모를 구원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력이 약한 자들은 무구성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어떻게 지금과는 다른 삶을 만들 수 있을까를 모색하는 정치투쟁을 벌여야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개와 인간 사이에, 여성과 남성 사이에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평등한 권력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권력이 약한 자들의 삶은 취약성을 면하기는 어렵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반려종 선언」이 탐사하는 개와 인간이 함께 일구어온 진화적이고,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개와 인간의 관계, 더 나아가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에 놓인 자들에 대한 아주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열지만, 위화감과 체기가 가시지는 않는다. 어질리티 경기는 인간이 만든 것이고, 품종 개발도 인간의 기준이 일차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태적으로는 수많은 생물종이 멸종을 당하고, 정치적으로는 난민들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조그만 차이에 대해서도 극심한 혐오가 난무하는 위급한 시대에, 어질리티 게임 이야기는 다소 위화감을 주기까지 한다. 해러웨이는 미국의 대학 교수로 백인 중산층 여성이라는 계급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가 미즈 카이엔 페퍼와 즐기는 어질리티 스포츠는 돈도 많이 드는 경기이고, 필시 그의 이야기는 백인여성의 경험이 잔뜩 묻어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처한 역사적이고 계급적인 상황을 벗어나서 살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특정한 상황 속에 있고, 그 상황 속에 있는 유망한 실천들을 건져 올려야 한다. 해러웨이는 카이엔과 어질리티를 연마하면서 종도 종류도 다른 자들이 접촉지대에서 눈길을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 상대를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응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특정한 계급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이유로 그 배움이 가치 없게 되지는 않는다. 배움은 상황 속에, 무구하지 않은 이야기 속에 있고, 누구도 무구한 위치에서 말하고 행동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의 소화불량이 해소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소화불량의 느낌을 서둘러 제거하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해소하려는 싸움은 중요하지만, 모든 것이 평등해지는 꿈같은 날을 기준으로 현실을 비난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은 어쩔 수 없다고, 이것으로 최선이라고 재빨리 소화제를 삼켜서 도덕적 편안함을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더 살 만한 세상을 위한 지속적인 싸움을 주저앉히는 반동이 될 것이다.

소화불량의 느낌은 싸움을 정당화하지 않으면서 싸움을 지속하게 하고, 응답의 불충분함을 알지만 그럼에도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응답을 모색하게 하는 힘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편안함을 방해하기에 이제 그만 됐다고 문제를 종결짓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소화불량의 그 갑갑한 느낌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일상의 싸움을 계속하게 하고, 응답-능력을 키운다.(61-63p)

 

 

이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공-산의 함의는 이렇다. 함께 만든다고 해도 주체와 대상은 있다. 하지만 전적으로 주체이기만 한 것도 전적으로 대상이기만 한 것도 없다. 공-산은 모두 힘을 합쳐서 무언가(대상)를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대가 나의 몸을 만들고, 나는 상대의 몸을 만든다. 상대가 만들어준 나의 몸으로 다시 상대를 만들기에 참여한다. 그래서 사실상 나는 상대와 함께 그의 몸을 만드는 셈이다. 이는 상대가 나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달리 말하면 나는 상대를 부분적으로 만들고, 상대는 나를 부분적으로 만든다. 이렇게 주체와 대상은 번갈아 바뀐다. 하지만 이것이 곧 기계적인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분성이라 할지라도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모두 같지는 않고, 능동과 수동의 양도 같지 않다. 그러므로 공-산의 또 다른 함의는 만들기에 개입되는 모든 주체들의 권력이 동등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뜨기놀이는 실을 떨어뜨리지 않고 계속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실뜨기의 릴레이가 이어지기 위해서는 "특정한 종류의 성실"이 요구된다. 그것은 내가 수동이 되었을 때, 상대가 실뜨기를 할 수 있도록 가만히 패턴을 내밀어주는 성실이고, 비록 결말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열려 있을지라도, 어떻게든 플레이를 이어나가는 성실이고, 상대가 내민 패턴에 기계적으로 응대하지는 않을 성실이다. 기계적인 응대는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게 해서 상대의 성실한 노력을 잠식하고, 종국에는 실뜨기가 중단되게 만든다. 이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공-산의 함의는 계속성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실뜨기의 패턴이 릴레이 되어온 것처럼, 공-산의 관계도 오랜 세월 이어져 왔다. 그것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실뜨기는 실을 놓치기 쉬운 놀이다. 공-산 또한 실패하기 쉽다. 그 많은 멸종들을 생각해보라. 일방의 실수이든, 일방의 탐욕이든, 혹은 우발적인 어떤 이유이든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할 수 없게 되는 일은 흔하다. 그럼에도 공-산적인 파트너 관계가 중단되지 않고 오랜 세월 이어져 올 수 있었다면, 그들 사이에는 필시 상호 의존을 위한 윤리와 정치가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예외주의는 이러한 윤리와 정치를 실종시킨다. 그 결과 지금 우리 삶의 계속성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70-71p)

 

 

마굴리스와 세이건이 말하는 공생발생에 근거한 진화모델은, 협력적인 개체들이 그렇지 않은 것들보다 생존경쟁에서 우리하다는 집단유전학의 협력모델과는 다른 것임을 지적한다. 소화불량의 사태는 우발적인 사태이지, 살아남으려면 협력하라는 지상명령에 대한 복종이 아니다. 마굴리스의 공생발생모델은 숙주+기생자의 이익교환의 협력모델이 전혀 아니다. 그것보다는 이질적인 것들의 우연한 접촉과 먹기, 침입, 감염, 흡수합병 등 살벌한 관계가 일차적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실패가 그렇지 않았다면 적대적이었을 관계를 전혀 다른 관계로 변모시켰다.(76p)

 

 

마굴리스가 제시한 공생의 모델 시스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믹소트리카 파라독사다. M. 파라독사는 낮은 배율의 현미경으로 보면, 단세포 섬모충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다섯 종의 생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섬모를 가진 구형의 박테리아 부대와 머리카락 같은 스피로헤타들의 군체가 그들이다. M. 파라독사는 오스트레일리아 흰개미의 내장에 산다. 나무를 갉아먹는 흰개미는 M. 파라독사가 없으면 섬유질을 분해하지 못한다. M. 파라독사가 흰개미의 내장에 살 수 있는 것은 흰개미가 먹이에 섞여 들어간 M. 파라독사를 소화시키지 못해서이다. 개미가 소화시키지 못한 M. 파라독사는 흰개미의 내장에서 섬유질을 분해하여 영양을 섭취한다. 이 모든 공생적 관계들이 먹기와 그것의 부분적인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

독식은 불가능하고, 100%의 지배도 불가능하다. 그 실패가 만들어내는 틈은 결말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가는 문이다. 생명은 기회를 잘 잡아채는 데 능하다. 새로운 관계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토록 많은 종류의 생명체들이 존재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먹기를 포함한 많은 관계에서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100%는 아니다.(77-79p)

 

 

크로셰 산호를 전시하고, 여우원숭이에 관한 그림책을 만드는 예술실천은 떄로 사소해보일 수도 있다. 지구 온나화가 멈추지 않으면, 마다가스카르의 화전이 중단되지 않으면, 산호와 여우원숭이는 계속 위기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가 야기된 원인은 하나가 아니고, 마다가스카르의 화전이 계속되는 이유도 복잡하기 그지없다. 그러므로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요술지팡이는 어디에도 없다. 쌍곡선 공간의 수많은 표면들은 요술지팡이라는 구원을 기다리지 않고 응답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 이를 위해서는 응답을 위한 수많은 표면이 필요하다. 창의적인 응답은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 관련도 없을 사람들을 공-산의 표면들로 불러 모은다. 산호와는 별로 관련이 없었을 많은 사람들이 다함께 산호의 삶에 뛰어들었고, 여우원숭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던 마다가스카르인들이 여우원숭이의 삶에 뛰어들게 되었다. 공-산의 상대에게 책임responsibility을 다하기 위해선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쌍곡선 공간은 응답-능력을 기를 수 있는 많은 표면을 제공한다.(92p)

 

 

타자에게 열린 질문을 하려고 하는 로웰의 인식론적인 태도는 데스프레가 "정중함의 미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식에 있어서 '정중함'이란 무엇보다 상대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통념적인 믿음을 뒤로하고,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를 흥미롭게 할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능력과 태도를 요구한다. 호기심이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고, 쉽게 알아챌 수 없는 답을 감지하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요구된다. 이는 해러웨이가 종이라는 말의 어원에서 끄집어낸 경의, re-specere의 실천, 즉 몇 번이고 거듭 바라보는 실천을 요구한다.(94-95p)

 

 

이런 식의 박멸은 종종 생태계 침해종 제거, 혹은 종의 재배치라는 용어로 불리지만, 해러웨이는 이런 식의 명명법에 대해서 반대한다. 생태계 침해종 제거라는 말은 고양이를 죽어 마땅한 것으로 만드는 용어이고, 종의 재배치라는 말은 죽이기를 상당히 유화시킨 말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죽이기를 정당화하거나 감추는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누구에게든 '죽이기'라는 말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힘들고 고통스런 말을 정면으로 하지 않으면, 그 죽이기의 행위는 더 이상 논쟁거리도 아니고 재고의 여지도 없게 된다. 그래서 고양이 박멸은 고양이 박멸로 불러야 한다.

낙태에 대한 논쟁도 마찬가지다. 해러웨이는 낙태합법화를 찬성하지만 임신중단이라는 말에는 위화감을 가진다. 임신중단은 낙태합법화를 위한 전략상의 용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임신의 지속이 어려운 성인 여성의 삶과 태아의 삶 중에서 성인 여성의 삶을 선택한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좋았다는 것이다.(102-103p)

 

 

해러웨이는 인류세라는 용어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 용어는 정치적으로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을 지극히 단순화하기 때문이다. 호모사피엔스종 일반의 행위로 이 원인을 돌려버리면 실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이 쉽게 감추어진다. 이를테면 화석연료 채굴에서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에너지 기업들과 국가자본의 행위가 인간의 이름 뒤에 숨는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도시민들에게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시골마을에 핵발전소가 지어지고, 나바호의 토착민들은 석탄 채굴이 야기한 대수층 고갈로 물 부족에 시달린다. 하지만 인류세는 호모사피엔스의 행위라는 일반화된 이름으로 이 불평등을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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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새로운 화석연료로 각광받는 셰일가스의 추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수압파쇄라 불리는 이 공법은 암석 사이사이 스미어 있는 셰일가스를 추출하기 위해 고압의 액체를 지하 깊숙이 분사해서 심층의 광물들을 깨트린다. 그런데 지하에는 셰일가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하수가 흐르고, 그 지표에는 사람과 동물이 산다. 고압으로 분사되는 액체는 심층의 지층을 붕괴시켜서 지반 침식을 일으키면서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그 물을 마신 가축과 사람들은 병이 들거나 죽는다. 수천 년 혹은 수백년 살아온 동물들과 사람들이 삶이 수압파쇄라는 무지막지한 채굴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여기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피해를 당하는가? 인류세라는 일반화된 용어는 이런 질문을 숨긴다. 해러웨이는 이러한 파괴를 지칭할 수 있는 말은 인류세가 아니라 당연히 자본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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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는 자본주의가 야기한 이런 변화와 더불어 대규모의 플랜테이션 농업이 야기한 변화 또한 주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18세기 카리브해 연안에 있었던 노예쩨 하의 사탕수수농장과 21세기 인도네시아에서 대규모로 경작되는 팜유농장을 빼놓을 수 없다. 산업화된 농업은 비단 사탕수수와 팜유만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식물이 다국적 종자회사의 씨앗으로부터 나온다. 이 씨앗들은 대부분 불임으로 조작되어 있고, 종자회사가 생산하는 제초제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플랜테이션 농업은 이익을 위해 생태계를 지극히 단순하게 만든다. 돈이 되는 작물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모두 제거되고 있는데, 거기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가진 토착민들도 포함된다. 아마존의 토착민 중 카리푸나족은 이제 부족이 59명뿐이고, 그 부족의 땅 절반 이상을 불법적인 벌목꾼들에게 빼앗긴 상태다. 토착민들에게 강제로 빼앗은 땅은 브라질의 급성장하는 소고기 무역을 위해서 목장으로 만들어지거나 가축사료용 콩을 심는 농장이 된다. 이런 파괴의 시대를 지칭하는 이름은 플랜테이션세여야 할 것이다.

(...)

인류세 담론을 이끌고 있는 지구 온난화, 기후 급변과 같은 지구 시스템의 현상들은 복수종들의 관계 변화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114-117p)

 

 

해러웨이가 불어 어원까지 끌어들여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트러블의 의미는, 문제를 쉽게 해소해버리기보다는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고, 문제 해결을 위해 상황을 잘 정리하기보다는 더욱 뒤섞어버리는 것이고,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트러블과 함께 한다는 의미는 쉬운 해결책을 찾고 그것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트러블과 마주하면서 지금 당장 가능한 응답을 모색하는 것이다. 현실의 트러블들을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하고 그 문제를 해소해버리려 한다면, 많은 문제들이 감추어진다. 하지만 복잡하고, 해결이 어렵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더욱 해로운 일이다. 트러블과 함께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임과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냉소와 무능과도 싸우는 것이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결코 실현되지 않을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가능한 응답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응답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120-121p)

 

 

영어의 촉수tentacle는 라틴어tentare에서 유래했고, 그 의미는 "더듬다", "시도하다"이다.

(...)

해러웨이가 "촉수적인 사유tentacular thinking"라고 부르는 것에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피모아 쑬루Pimoa Chthulu'라는 이름을 가진 한 마리의 거미다. 이 거미는 여덟 개의 긴 다리를 촉수로 가지고 있다. 촉수는 외부로 뻗고, 어떤 상대를 자신과 연결한다. 신체와 신체의 접촉을 만드는 촉수는 때로 눈이 판단한 것을 무화시키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도 한다. 보기에는 낯설고, 심지어 끔찍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부드럽고 따뜻한 촉수적인 느낌이 시각적인 인식을 애매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촉수는 외부로 뻗어나가지만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피모아 쑬루'라는 이름의 거미는 캘리포니아 중북부 삼나무 숲에서 사는 것처럼 촉수는 몸이라는 특정한 상황 속에 산다. 그래서 축수적인 인식은 저 하늘에서 굽어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이고, 총체적이고, 중립적인 인식을 주장할 수 없다. 누구도 모든 곳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땅에 붙박인 자'들은 어떤 곳에 살지 모든 곳에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땅에 붙박인 자'들의 인식이 중립적이거나 보편적익나 총체적인 것일 수는 없다. 인식은 언제나 특정한 상황 속의 인식이다.

하지만 촉수적인 사유가 주관적이라거나 판단이 불가능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황 속에 있는 자들은 혼자가 아니고,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일상의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해러웨이를 포함한 페미니스트 인식론자들은 중립성과 보편성을 무기로 가진 과학도 사실은 특정한 상황 속의 인식임을 주장해왔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과학연구들 속에는 상당한 정도의 권력적인 이해가 반영되어 있고,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과학자들 역시 땅에 붙박인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러웨이는 가장 객관적인 인식은 중립성을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식이 처한 특정한 상황을 드러내는 것임을 주장한다. 촉수적인 사유는 이를 위한 형상이다.(124-125p)

 

 

 

 

ㅡ 최유미,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中, 도서출판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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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

 

진단과 분석은 탁월하나 대안은 여전히 원론적인 이야기다.

 

 

 

수능이란 결국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한 오지선다 시험으로, 그 특성상 신비평주의 사조와 궤를 같이하게 됩니다. 1920년대에 태동한 신비평주의는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 텍스트 그 자체를 이론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비평이론의 한갈래입니다. 즉, 종래의 문예비평에서는 작가의 삶이 강력한 판단기준이었다면, 신비평주의자들은 글이 이루는 내적 질서와 외부적 이론을 통해 작품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예컨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작가가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듯이, 하지만 해당 작품이 공존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 또한 사실이듯이, 텍스트가 작가를 배신하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37p)

 

 

고등학생이 배워야 하는 내용은 줄어들었는데 어째서 공부 시간은 늘어만 갈까요. 한국의 교육열이, 성취보다는 승리에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일 겁니다. 내 아이가 미분계수의 쓰임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아이보다 수학 성적이 1점이라도 더 높아야 하지요. 더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요. 달리 말하자면 청소년의 학습 부담은 안보 딜레마와 유사한 성격을 지닙니다. 한 나라가 군사력을 증강하면 다른 나라들도 앞다투어 군비 경쟁에 나서면서 최종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부담과 불안이 동시에 커지듯이, 교육에 대한 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는 그럴듯한 대학 간판이 필요하다는 믿음이 사회에 팽배한 이상, 교육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74p)

 

 

학습범위가 줄어들고 시험이 테스트하는 지식이 얕은 수준에 머무른다고 해서 학습 부담이 줄어들지는 않으며, 그렇게 구성된 시험의 경쟁 압력이 강해질 경우 시험의 합당성이나 적절성은 오히려 퇴보한다는 결론이 가능하겠습니다.(106p)

 

 

정리하자면 1960년대 전후는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에 머무르던 시기이자 갖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던 시기입니다. 체계화된 사교육 시스템은 존재할 수 없었지요. 그 소비층 또한 얇았습니다. 수강료를 내고 강의실에 앉을 여력조차 없는 사람이 절대다수였던 겁니다. 방송 인프라가 부족하니 TV 강의를 기대할 수도 없고요. 이러한 시대적 상황하에서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강사가 나오지 못합니다. 반면 저자들은 책을 썼습니다. 출판의 힘은 인프라가 부족할수록 강해집니다. 책은 읽거나 옮기는 데 값비싼 수상기나 대규모 기지국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썩지도 않습니다. 남이 쓰던 것을 물려받을 수도 있고, 하다못해 버려진 것을 주워서 읽는 일도 가능합니다. 게다가 대다수의 수험서는 독학을 전제로 쓰이니만큼 정권의 심기를 건드릴 일이 없습니다.

결국 '스타 저자'들의 등장 시기가 1960~70년대에 집중된 데에는, 90년대가 되어서야 1세대 '스타 강사'들이 나타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 셈입니다. 기술 발전과 인프라 개선, 그리고 정치 구조의 변화가 맞물려 시장의 중심축이 이동한 것이지요. 즉, 한국사회는 1990년대를 기점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 사교육 시장은 그 흐름 속에서 새로운 형상을 갖췄습니다. 여기에 IT 열풍과 '스타 인터넷 강사'의 등장이 가세하면서, 사교육 시장에서 저자의 존재는 갈수록 희미해졌습니다.(132p)

 

 

시대인재가 명실상부한 업계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하고 확장에 나서는 과정에서, 그런 '선발 효과'의 덕을 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금의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업계 1위로 올라서기 전까지는 선발 효과 자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1990년대 후반 대성학원이 종로학원을 이기고 업계 1위에 등극했을 때는 '종로학원 등록을 거절당한 특목고 자퇴생들'을 받아 주었다는 외부 요인이 작용했지만, 2010년대 중후반부터 2020년대까지의 변화기에는 그런 것조차 없었습니다. 강남대성학원이 급속도로 수험생의 민심을 잃을 만한 사건이 있지도 않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전이 가능했다는 것은 '원래부터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 누리는'선발 효과 외에 다른 요인이 매우 강하게 작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수능 콘텐츠가 바로 그 요인입니다.(176p)

 

 

다시 강조하건대, 2020년대의 입시 판도는 10년 전은 물론이고 5년 전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크게 바뀌었습니다. 1부와 2부에서 설명한 수능 해킹과 사교육 서비스의 공진화가 거듭되면서 입시 전략의 복잡성과 요구사항의 허들이 크게 올라간 것입니다. 학력고사 시절에는 교과서만 달달 외워도 대학에 갔다면 2000년대 중반부터는 인터넷강의쯤은 들어야 했고, 2020년대에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2000년대 초중반에 송고된 기사를 근거 삼아 "산간 오지에 사는 학생들도 인터넷강의를 듣고 대학에 가는데 지역 격차가 어디에 있느냐"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당시와 지금 사이에는 20년이라는 시간과 그만큼의 변화가 가로놓여 있으니까요.

물론 "나는 2020년대에 수능을 쳤지만 인강만 듣고 좋은 대학에 갔다"는 반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그런 사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공부에는 타고난 역량과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하니까요.

(...)

다만 사회적 논의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대상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사례보다는 전반적인 경향성이며, 이 책이 다루는 내용 역시 큰 범주에서의 경향입니다(예컨대,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보다 키가 크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키 차이에 대해 어떤 사실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를 논하려면 평균 키를 말해야 합니다).(200-201p)

 

 

'인터넷 강의는 지방을 죽이는 독이다'라는 문장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터넷강의는 지역 학원가를 고사시킴으로써 지방의 입시 인프라를 해체했고, 이로 인해 정보의 사각지대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수능이라는 영역에서 지방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217p)

 

 

확신할 만한 탈출구가 없다는 것, 비슷한 실력에도 운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과목의 점수가 매번 50점과 30점 사이에서 출렁거리는 상황은 그 자체로도 스트레스고, 하필 30점이 수능에서 나와버린다면 큰 문제입니다.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난 수험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깔끔하게 받아들일 만하지만, 실력이 비슷한 학생들이 훌쩍 대학으로 떠나버리고 홀로 수능에 발목이 잡힌다면 견디기 어렵겠지요. 또래들보다 몇 년 씩 뒤처졌다는 감각에 행운의 부조리함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정신 건강에 좋을 리가 없습니다.(253p)

 

 

저는 이제 3수를 끝낸 입장인데요. 해가 갈수록 제 실력이 50만큼 늘면 사람들이 100만큼 고인다는 걸 느껴요. 왜 그런가 생각을 해봤더니 지방 메디컬 간 애들은 또 최대한 인서울로 올라가려고 한번 더 치고. 인서울 메디컬 간 애들은 그래도 약대보다는 수의대가, 수의대보다는 치대가 낫지 않나, 이런 식으로 계속 위를 보면서 치고. 결국 인설의(서울 시내 의대) 오면 또 인설의에서 메이저(서울대학교 의대를 비롯한 몇몇 인기 의대)로 가야 되지 않을까 해서 또 치고 이런 식으로 반복되니까.

그래서 저는 고3 학생들이 재수한다고 하면 웬만하면 반대해요. 제 주변도 그렇고 재수로 끝나는 케이스를 한명도 본 적이 없어요. 한번 더 하면 될 것 같아. 한번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하면서 무한정 N수를 반복해요. 재도전을 하면 실력도 오르지만 실력보다 꿈이 더 커져요. 내가 이 정도 실력이 커졌으니까 꿈도 이 정도 키워도 될 것 같거든요. 그러면 절대 꿈에 안 닿거든요. 그럼 다시 해요. 다시 하면 꿈이 더 커져요. 조금만 더 하면 의대를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원래 잡힐 듯 안 잡힐 듯한 데를 더 갈망하잖아요.(270p)

 

 

또한 사교육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다양하고 과목별 특징이 존재하는 만큼 직무 형태 또한 파편화되어 있다는 점, 이에 따라 도급제 노동과 임금제 노동이 혼재된다는 점, 각자의 동기와 입장이 상이하다는 점에서 정당한 급여가 논의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TA 조교가 겪는 일과 강사 조교가 겪는 일은 다르며, '스타 저자가 되려는 꿈을 품고' 출제팀에 들어온 사람과 ' N수 비용이 필요해서, 겸사겸사 공부도 할 겸' 검토자가 된 사람의 경험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당장 대학 입시가 급한 판에, 거쳐 가는 일자리의 노동 여건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많지 않지요.

그리고 또다른 복병도 있습니다. 바로 고용주를 향한 존경과 감사입니다.

(...)

결국 열정적인 염가의 노동력이 없다면 지금과 같은 서비스 규모와 품질이 유지될 수 없다는 점에서, 사교육 노동의 문제는 다시 사교육 고도화의 문제가 됩니다.(294-295p)

 

 

결국 수능 콘텐츠 산업은 이런 식으로 작동합니다.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은 스타 저자와 강사들의 영예를 좋아 이 시장에 들어오며, 그들 중 극히 일부만이 성공을 거둡니다. 나머지는 20대 초중반을 콘텐츠 생산에 소모한 상태로 신규 진입자들에게 밀려나 사라집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성공은 부분적으로나마 탈락자의 초과노동에 힘입은 것입니다. 성공을 거두려는 이들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품질뿐만이 아니라 양적인 측면에서도 승부를 보아야 하는데, 출제팀 체제하에서는 소모당할 보조 저자가 없으면 이토록 많은 문제를 쏟아내는 것부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수능 콘텐츠 산업은 스포츠 산업이나 연예 산업과 유사하면서도 다릅니다. 비록 스포츠 스타나 유명 아이돌은 수많은 탈락자들 위에 선 존재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탈락자들의 노동과 생산에 빚지고 있진 않습니다. 또한 해당 분야에서의 숙련도는 어떤 식으로든 누적됩니다. 베컴의 성공과 무명 축구 선수의 경기 사이에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촬영에 계속 참여할수록 능력을 잃는 조연출가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수능 콘텐츠 산업은 그 종사자의 커리어가 길어질수록 필수적인 감각이 둔해질 공산이 큰 분야이고, 따라서 원활한 생산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젊음이 소모될 필요가 있는 분야입니다. 개개인의 악의나 착취적 의도가 결부되지 않더라도 구조로 인해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316-317p)

 

 

대학들은 단순히 학생들을 선별하는 데에서 그치는 대신 적극적인 플레이어가 되어 게임에 참전합니다.

예컨대 2022학년도에는 서울대가 정시모집군을 가군에서 나군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러자 연세대와 고려대가 나군에서 가군으로 옮겨갔지요. 같은 모집군 안에 있으면 서울대와 정면대결을 벌여야 하는 반면, 다른 모집군에 있으면 '서울대를 주력으로 쓰되 보험이 필요한 학생'들을 거두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면 성균관대의 일부 학과에 불똥이 튑니다. 소프트웨어학과의 경우 고려대·연세대와 같은 군이 되었을 때 누적백분위 커트라인이 1% 이상 하락했을 정도니까요.

(...)

과목별 반영비율을 정하거나 변환표준점수를 보정하는 작업에도 동일한 역학이 존재합니다. 과목 반영비를 2:4:3과 3:4:2 사이에서 선택한다거나, 난도가 유독 높았던 과목에 대해 극단적인 '물보정'을 적용한다거나 하는 시도에는 결국 '상위 대학이 놓친 학생들, 경재 대학에 갈 학생들을 우리가 데려가야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이는 대학이 입시전형 파편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핵심 기제입니다. 경쟁 대학과 반영 방식이 상이해지도록 반영식을 바꾸면, 조정된 반영식 기준으로 유리해진 학생들은 경쟁 대학에 지원할 가능성이 낮아지니까요.(419-420p)

 

 

2024학년도 성균관대 입시를 보면 대학이 매년 정시 결과에 따라 실질반영비율을 조작하며 기존 입시요강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해당 연도에는 영어가 특히 어렵게 출제되었습니다. 평년에는 절대평가 기준 8~9% 선이었던 1등급 비율이 4%대로 곤두박질쳤지요. 이는 고득점자 중에서 영어를 망친 학생들이 늘어났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성균관대로서는 '고려대·연세대에 갈 수 있었지만 아쉽게 미끄러진 학생들'을 주워 담을 기회입니다. 이에 따라 성대는 영어 1·2등급을 구분하여 감점하던 작년까지의 기조를 원서 마감 3주 전에 뒤집어, 영어 변환표준점수를 1·2등급 132점, 3등급 129점, 4등급 103점으로 발표하지요. 이렇게 되면 모집요강에 쓰인 '영어 반영비율 10%'는 유명무실해지고 맙니다. 3등급까지는 사실상 1등급과 동일하게 처리하고, 4등급 이하는 볼 것도 없이 탈락시키겠다는 의미니까요.(424-425p)

 

 

즉, 문제의 본질은 각 영역의 주권자(수능에서의 평가원, 학교에서의 교사, 원서 영역에서의 대학········)가 공익이 아닌 편익(보신주의, 통제력, 대외적 위상·······)을 위해 재량권을 남용함으로써 공교육 현장이 거기에 말려들고, 대응 과정에서 학생 부담이 커지며 사교육이 팽창하는 데에 있습니다. 사회적 격차 심화와 학벌주의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폐단입니다. 게다가 ('특목고 학생들 많인 뽑고 싶다'는 동기를 '대학 자율성' 논의로 가리는 것처럼) 편익을 전문가적 명분 뒤에 숨기다보니 문제제기가 어렵거니와 명분 자체가 껍데기로 전락합니다. 양두구육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밀가루를 가루약으로 속인다면 환자는 다른 약을 구하지도 못한 채 시름시름 앓기만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권자만을 탓할 수 없는 것은 한 영역의 주권자가 다른 영역의 '을'인 경우가 잦으며, 이에 따라 별도의 권력관계가 설정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을'들 역시 일방적으로만 당하는 대신 권력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이익을 얻어가기도 합니다. 학종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즉, 교육 영역에서의 문제 상황이 '비용 떠넘기기'와 '해킹'의 연쇄로 나타난다 치면, 누구 하나만 해킹을 시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가원과, 대학과, 고등학교와, 사교육과, 학생 모두가 자기 몫의 전략을 짜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자기 몫의 과오와 책임을 짊어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3부에서 논했듯 수시와 정시는 분리된 제도일지라도 밀접히 엮여 있기 때문에, 한 영역에서의 전략이 다른 영역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주게 됩니다. 각각의 영향력이 다양한 층위에서 뒤섞이다보니 어느 하나의 책임만을 묻기가 더더욱 까다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양비론이나 상대주의를 펼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는 그 용법상 "우리 중 누구도 잘못이 없다"와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각 영역의 위계가 존재하는 이상, 주도하는 측과 적응하는 측이 나뉘는 이상 각 플레이어의 과실 비율은 상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이 권력 게임의 최상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

다시 말해 게임판의 문제는 그 자체로 다루더라도, 플레이어 중에서는 대학에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의 선발권과 결정권, 재량권이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와 결합하며 대학의 에고티즘을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게임판을 왜곡시키는'구조의 연결고리를 해체해야 합니다.(450-452p)

 

 

 

ㅡ 문호진, 단요, <수능 해킹>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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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3

 

 

이 책의 큰 골자는 인간 뇌의 예측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확신'이 형성되고, 그 '확신'이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도록 도와주는 게 아님에도ㅡ뇌는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데는 관심이 없다ㅡ진화적으로 적응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인간에게 남아 있다는 얘기를 진화 생물학을 기본으로 인지심리학 얘기 조금, 철학 얘기도 조금,  뇌과학 및 신경과학까지 엮어 만들었다. 이런 주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겠는데, 글쎄 종합선물세트가 꼭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지.

 

 

 

상황은 고착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자신의 확신을 의문시하고 캐묻는 대신 다른 확신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흠, 정말 제 정신이 아니네'라며 폄하해버린다. 우리는 확신을 '정상적인 것'과 '제정신이 아닌 것', 합리와 비합리, 건강한 것과 병든 것으로 양분한다. 우리 모두가 이런 구분을 한다. 이런 구분이 직관적으로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은 복잡성을 줄여주며, 구조를 부여한다. 한마디로 이렇게 구분하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세상에서 방향을 잡는 것이 더 수월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 어떤 근거와 정당성으로 이처럼 교집합이 없는 이분법적 구분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책에서 확신을 단순히 '정상'과 '비정상'같은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게다가 이런 이분법은 위험하다. 건설적인 대화에 장애물이 되고, 사회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

핵심 명제는 바로 이것이다. 어떤 확신이 '정상적인' 것으로 혹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언제나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가설은 종종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이 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견하게 해주고, 그런 사건에 더 쉽게 대응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설은 가설일 따름이다. 즉 아직 입증되지 않은 가정이므로, 언제든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확신하고 싶어 하고, 확신을 고집스럽게 부여잡고 싶어 하는 경향은 심리학적으로나 진화론적으로 십분 이해가 가는 일이다. 하지만 확신은 가설에 불과하므로,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자신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다른 관점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18-20p)

 

 

우리는 현실과의 접점을 잃고 자신의 머릿속에서 우리가 아는 세계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세상을 지어내는 사람을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머릿속에서 말도 안되는 망상을 지어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믿거나 황당한 이야기를 확신한다.

(...)

요컨대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47p)

 

 

우리는 스스로 여러모로 굳게 확신하는 세계상을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의 확신이 자신의 확신과 일치하면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한다.

심리 질환과 관련해서도 이런 이분법적 구분을 한다. 건강과 비건강의 경계가 종종 유동적임에도 말이다.(50p)

 

 

여러분은 우리의 세계상이 환상임을 알게 될 것이다. 어느 때는 현실과 더 많이 일치하고, 어느 때는 더 적게 일치하는 환상이다. 더 적게 일치할수록 '제정신이 아닌 것'이 된다. 하지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유동적이다.(56p)

 

 

어떻게 해야 진실에 최소한 근접이라도 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 세계가 제한돼 있음을 받아들이면서도ㅡ가능한 한ㅡ어떤 이론이나 진술이 우리의 경험 세계와 어느 정도로 일치하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론이나 진술이 지각, 즉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들어맞는가? 그런 경험이나 자료가 우리에게 주어진 증거다. 우리의 이론이 증거에 부합하지 않으면, 이론을 그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철학에서는 이런 접근을 대응성 혹은 '진리 대응론'이라 부른다.

(...)

또 다른 시각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외부 현실은 고작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산물이기에 대응설은 맞지 않다. 우리의 경험 세계는 순수 주관적인 것이기에 이론이나 진술의 진실성을 점검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그리하여 이론의 진실성을 판단하기 위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이론이 그 자체로 모순이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을 바로 정합설, 혹은 '진리 정합론'이라 부른다.

(...)

여기서 대응설이 더 맞다고 볼지, 정합설이 더 맞다고 볼지 확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절대적 진실을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대응설이나 정합설처럼 어떤 이론을 판단하는 기준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만 염두에 두자.

(...)

다시 말해 진술은 참이나 거짓, 어느 한쪽이 아니라 늘 '굉장히 있을 법하지 않은'에서 '굉장히 있을 법한'이라는 눈금 위에서 움직인다.(63-65p)

 

 

종교적 믿음은 선험적 확신을 요구한다. 확증이나 증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선험적으로ㅡ애초부터ㅡ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신자에게는 이런 특성이 확신이라는 기분 좋은 감정을 동반한다.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매우 바람직한 효과가 아닐 수 없다.

앞서 말했듯 '내게 도움이 되니까 믿는다'라는 진술을 종교적 믿음의 적절한 근거로 받아들이면서, 많은 신자에게 실용적 합리성을 인정해줄 수 있다. 신자들에게 인식적 합리성은 믿음이 주는 실용적 유익에 비해 중요성이 떨어진다. 삶에서 의지가 되고, 방향을 제시하고, 의미를 주는 것에 대한 필요가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진실에 대한 필요보다 크다. 이제 이런 데 비중을 두는 건 사적인 문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선험적 확신으로 표방되는 신념은 위험과 부작용도 동반한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확신을 지닌 개개인이나 집단이 충돌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종교를 빌미로 일어난 전쟁 목록은 길며, 여기에 희생됐고 여전히 희생되는 사람들의 수가 어마어마하다.(78p)

 

 

음모론이 많은 사람아게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것은 지각과 사고의 왜곡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모든 사건에서 원인 혹은 의도를 찾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를 이용한다. 우이는 순수한 우연이나 카오스를 참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일 더하기 일'을 하고,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고, 현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단순한 설명을 좋아하고, 인과관계, 패턴을 찾아낸다. 심지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부분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권모술수나 어떤 힘을 찾아낸다. 우리는 이웃한 사건을 서로 연결한다. 그 사건들이 그냥 서로 우연히 가까이 있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우리의 사고는 이런 인지 왜곡에 취약해 종종 비합리적 판단에 이른다.

비합리적 확신의 모든 예는 인식적 비합리성이 결코 망상만의 특성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에게서도 만연한 것임을 보여준다. 종교적 믿음이나 미신처럼 인식적 합리성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확신이든, 이성의 옷을 입었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비이성적인 음모론이든, 인식적 비합리적 확신은 예외라기보다는 규칙에 가깝다. 대부분 병리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히 '평범한'것들이다.(83p)

 

 

여기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망상적 사고와 '정상적' 사고가 우리 생각만큼 확연히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망상은 인식적으로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상적'사고 역시 우리 생각만큼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제정신이 아닌'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 생각보다는 '더 제정신이 아닌'듯하다. 또는 최소한 소위 '정신 나간' 확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정신이 헤까닥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96p)

 

 

진화론적인 설명은 종종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영어에 '그냥 고안한 이야기just so story'라는 개념이 있다. 그 이야기는 그럴듯하고 그 자체로 일관성이 있다. 그리하여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증거가 없고, 학문적 증거도 없다. 최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 이것이 바로 진화론적 설명에 종종ㅡ때로는 정당하게ㅡ제기되는 비난이다. 복잡한 현상을 설명한느 것이나 특히 우리 인간과 인간의 고유한 특성에 해당하는 현상인 경우는 무엇보다 그러하다. 그래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넘어가고자 한다. 내가 여기서 하는 진화론적 설명은 부분적으로는 '그냥 고안한 이야기'다. 이는 이런 설명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가 주장하는 많은 것은 증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제시된 명제를 학문적 증거로 뒷받침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늘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 제시하는 생각 중 다수는 아직 추측으로 남는다. 아마도 언젠가는 그것들이 학문적 연구로 이어지고, 제기된 명제가 맞거나 틀리다는 증거가 나올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입증되거나 반증되거나 할 것이다. 어떤 영원히 사유로 남을 것이다. 경험적 검증을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믿음처럼 근본적 이유에서 검증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관찰이 필요하거나 검증에 필요한 실험이 윤리적 원칙과 합치되지 않는 등 실제적 이유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약간 마음을 편안히 가져야 할 것이다. 최소한 지금 여기서 모든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리고 그럼에도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숙고하고 의미 있고 그럴듯하며, 나아가 도움이 되는 설명을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 이론이 기존 지식에 근거하고, 앞으로의 경험적 검증에 열려 있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 이론은 언제나 가설이므로,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반박될 가능성에 늘 열려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 이론은 인식론적 의미에서 합리적이어야 한다. 이는 여기서 제안되는 아이디어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113-114p)

 

 

조현병이나 망상 경햠도 그와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볼 수 있다. 작은 집단을 이루어 모여 살고, 빠듯한 자원을 두고 적과 경쟁해야 했던 선조들에는 불신과 편집증적 경향이 생존에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더욱 조심하고 위험을 더 빨리 알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초자연적 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사회집단에서 명망을 얻었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조현병의 특징으로 보는 정신병 증상은 원시사회에서는 저세상의 영이나 귀신과 접촉하는 것으로 해석됐을 것이고, 그런 증세를 보이는 사람에게 종종 사회적으로 특별한 샤먼이라는 지위를 부여했을 것이다.

(...)

조현병의 유전자 위험 변이가 한떄 적응적이었다는 생각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꽤 그럴듯하고 경험적으로 맞다는 것을 시사하지만, 이런 생각이 조현병의 진화론적 패러독스를 완전히 풀어주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능 손상을 동반한 심각한 정신 질환이 옛날에는 적으적일 수 있었다는 걸 상상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

조현병의 진화적 패러독스 관점에서 그런 정신증이 규칙적 또는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원시사회 공동체에서 크게 유익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정신증이 심하지 않거나 가벼운 환각 혹은 망상 증세가 샤먼 같은 특별한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상상이 간다.

(...)

이런 이유에서 자주 논의되는 특징은 창조성과 관련한 것으로 자연선택의 한 가지 유형인 성적 선택에 대한 다윈의 해묵은 생각과 통한다. 성적 선택에 따르면 많은 종이 아름다운 외모에 들이는 어마어마한 노력은 짝짓기 파트너에게 구애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

따라서 조현병에 대한 유전적 리스크 변이가 살아남은 것은 그 변이가 창조성을 촉진하기 때문이었던 걸까? 이런 질문에 아직은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다(결론을 내리는 데는 늘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발견으로 조현병의 진화론적 모순을 푸는 데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할 수 있다. 심한 조현병의 경우는 다르지만, 유전적으로 가볍게 망상적 사고를 하는 경향은 10만 년 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자연선택에서 이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과관계를 도출하는 것은 어렵지만, 창의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암시가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신증 경향을 유발하는 유전적 위험 변이와 자연선택의 이점을 연결할 수 있는 요소가 창의성뿐만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혹시 있을 수 있는 위험, 특히 사회적 위협에 민감하도록 하는 것은 원시사회에서만 적응적 특질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그다지 심하지 않다면 이런 특질은 자신과 가까운 유전적 친척의 생존에 도움을 줄 수 있다.(117-125p)

 

 

요약하자면 신경정신과 의학자들은 건강한 상태와 병든 상태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연구 결과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와 병든 상태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최소한 증상의 심각성만 가지고 결론을 내릴 수 없음을 보여준다. 최소한 증상의 심각성만 가지고 결론을 내릴 수 없음을 말이다. 연구 결과들은 '정상적'확신과 '정신 나간' 확신이 생겨나는 토대가 되는 메커니즘, 즉 뇌 속 가정과 관련해 범주적 구분은 존재하지 않고 연속체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132p)

 

 

우선 가능한 한 진실에 가까운 세계상을 만들 때 우리의 적합성에 이로울 거라는 건 자명하다. 로봇이 주변 세계를 되도록 현실적으로 파악할 때 성공적으로 주변 세계를 누빌 수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합리성은 그 자체로는 자연선택에 중요한 기준이 아니다. 비이성적 행동이 더 많은 섹스파트너를 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런 행동도 진화적 적합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매함이 인간 같은 생물학적 존재로 하여금 여러 파트너와 더불어 많은 섹스를 할 가능성을 높인다면 자연선택은 이런 생물학적 존재가 우매하게끔 작용할 것이다. 섹스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손을 낳으려면 최소한 성적으로 성숙할 때까지 생존해야 하고, 이상적인 경우 그보다 좀 더 오래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138p)

 

 

따라서 잘못된 확신을 지녀도 그것이 그리 큰 피해를 가져오지 않을 때도 비합리적 확신이 생겨날 수 있다. 높은 존재의 은총을 믿으면 안 될 게 뭐란 말인가? 또는 때로 미신적 의식에 참여하거나 작은 제물을 바쳐야 한다면 이런 잘못된 확신의 대가는 그리 크지 않다. 이렇듯 상대적으로 별로 손해가 나지 않는 오류는 이것들이 진화적 적합성 면에서 별로 중대하지 않기에 존속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론에 따르면 비이성적 경향은 맹장의 충수 돌기, 귓불, 혹은 남성의 젖꼭지와 비슷한 것이다. 진화사의 곁가지이자 자연선택 차원에서 사라지지 않더라도 생존이나 번식 면에서 별로 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쓸데없는 격세유전 정도인 것이다.(139-140p)

 

 

여기서도 세계를 가능하면 현실에 충실하게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단순한 비용-편익-계산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 두뇌를 설계하는 진화에게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갖는 상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알 바 아니다'.

진화는 뇌를 굉장히 예민한 패턴 인식 기계이자 행위 감지 기계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야 생존하고 번식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비합리적 결론, 확신, 행동으로 이어지는 인식적 오류를 저지른다. 그러나 오류 관리 이론에 따르면 이렇게 현실을 오인하는 것은 적응적일 수 있다.(144-145p)

 

 

법률가이자 사회과학자인 예일대학교 댄 카한 교수는 확신은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보여주기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기후변화나 진화 같은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확신은 관련 정보가 얼마나 있는지, 혹은 그 지식이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게 전달되는지와 별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그런 솩신이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정치 진영이 표방하는 가치와 맞아떨어지느냐가 중요하다. 가령 단결이 중요하냐, 자기 결정이 중요하냐,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느냐, 이익을 관철시키느냐,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사느냐, 자연을 지배하느냐. 카한에 따르면 확신은 그 자체로 독립된 산물이 아니라 늘 배경에 좌우된다. 그는 서로 다른 집단이 기후 변화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로 다른 견해 사이의 논쟁은 오히려 '문화적 지위 경쟁'이라는 것이다.(159p)

 

 

다시 말해 인식적 비합리성은 아주 정상적이고 평범한 것이며, 결코 병리학적, 즉 망상적 확신이나 취약한 인간만의 특징이 아니다. 진화적 안경을 쓰고 관찰하면 인식적 비합리성은 '버그'가 아니라 '특징'이며, 오류가 아니라 기능이다.(168-169p)

 

 

호주 멜버른에서 활동하는 철학자이자 신경과학자 제이컵 호위는 이 문제를 문도 창문도 없는 집 안에 갇힌 사람의 상황에 비유했다. 바깥세상에서 주어지는 유일한 신호는 벽을 두드리는 소리뿐인 상황에서 소리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든 알아내야 한다. 깜깜한 집에 갇힌 사람처럼 두개골 블랙박스에 갇힌 뇌는 자신에게 주어진 감각 데이터가 밖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반영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데이터가 곧 세상이 아니며, 세상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데이터는 감각기관이 무엇을 받아들이는지만 보여줄 따름이다.

가령 주변 공간을 보는 일을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눈의 망막은 뇌에 2차원적 데이터만 공급한다. 세 번째 차원은 순수 해석의 문제다. 밖에서 정말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세상에서 어떤 대상과 사건이 감각 데이터를 유발하는지, 뇌는 직접적으로 접근하지 못한다. 다만 자신의 활성 패턴을 통해 상황을 유추할 따름이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뇌는 신뢰할 수 없는 감각 데이터(인풋)에서 가능한 원인을 유추해 전 유기체의 생존 가능성을 최대화하는 행동(아웃풋)으로 반응해야 한다.(182p)

 

 

확신이 쓸모 있으려면 안정적이어야 한다. 확신은 '큰 그림', 즉 커다란 연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블랙박스 속 예측 기계가 바깥 세계에 부여하는 법칙성이다. 많은 것이 변할지라도, 전반적으로 세상은 상당히 안정적이다. 법칙은 하루아침에 변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것이 매우 안정되어 있다는 가정하에 자신의 확신에 굳게 달라붙어 있는 것은 진화적으로 적응적이다. 굳은 확신이 사회적 존재인 우리가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연선택상의 이점을 제공한다는 점을 차치하고도 말이다. 확신(내지 확신의 토대가 되는 예측)은 뇌가 사용하는 트릭으로, 뇌는 이 트릭을 활용해 감각기관이 공급하는 신뢰할 수 없는 데이터에 안정된 질서와 구조를 부여한다.

그 밖에 우리는 이렇게 예측하는 일이 원래 어디에 좋은지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우리 뇌에 중요한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투성이인 세상에서 가능하면 안전하게 지내는 것이다. 생존 가능성과 재생산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잘 지내려면 행동을 분명히 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다.(211p)

 

 

'존재''당위'로 연결시켜 그릇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에 따르면 우리는 기술적 진술에서 직접 규범적 진술을 이끌어낼 때 이런 오류를 범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이러이러하다는 존재로부터 어떤 것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를 이끌어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연과학적으로 뭔가가 자연적이기에 좋은 것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칭한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인식적 비합리성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서술에서 인식적 비합리성이 규범적 의미에서 좋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선언한다면, 바로 이런 오류를 범하는 셈이 된다.(300p)

 

 

뇌가 내적 모델의 바탕으로 만들어내는 모든 예측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확신 역시ㅡ우리가 아무리 그것이 확실하다고 여긴다고 해도ㅡ언제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가설일 따름이다.

우리의 확신이 가설이라는 것은 그것이 언제든 틀린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결국 세상에는 뇌의 수만큼 많은 서로 다른 내적 모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모델들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이 모델들이 우리가 똑같은 현실 세계를 살아가며 경험하는 것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유전적 소인이 다르고 삶의 경험이 다른 만큼(우리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경험을 하기에) 모든 뇌는 자신의 개인적 내적 세계 모델을 바탕으로 기능한다.

확신이 생겨나고 기능하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각자의 확신이 서로 많이 다를 거라는 건 분명하다. 확신은 각자의 경험과 각자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웠거나, 묻지 않고 넘겨받은 인식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우리는 열과 성을 다해 확신에 차서 그것을 표방한다. 우리가 확신을 확신 있게 부여잡을 수밖에 없는 것은 뇌에서 이루어지는 예측의 위계질서 안에서 확신이 하는 기능 때문이다. 새로 주어지는 정보에 따라서 금세 확신을 뒤집는다면 확신은 확신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 그 밖에도 그리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확신을 표방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스스로를 관철시키도록 도와준다.

어느 정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라야 쓸모가 있는 것이다. 새로운 정보에 따라 금방 뒤집히는 확신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그러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모든 확신은 원칙적으로 반박될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가설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모든 확신에는 그것이 틀릴 가능성이 내재한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사회적 영향은 우리 모두가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확신을 고수한다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서로를 '정신 나간'사람으로 여길 것이고, 이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것을 힘들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확신에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확신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확신을 고수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초래한다. 그러나 사실은 겉보기에만 딜레마다. 딜레마처럼 보이는 것은 존재를 당위로 그릇되게 연결하는 데서 비롯한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적응적이며, 자신의 확신을 흔들림 없이 고집하는 것이 지금 여기 우리 삶에도 더 유익하거나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확신을 부여잡는 것이 타인과 더불어 공존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지식 있는 생물종'으로서 이런 진화적 경향에 '반하여 행동할' 자유가 있다.

이런 자유를 활용해 능동적으로 확신을 의문시하고 비판적으로 검증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확신이 다른 사람들의 확신과 충돌할 때는 그래야 한다.(306-308p)

 

 

불확실함은 거부감과 두려움을 안겨주기 때문에 도무지 견디고 싶지가 않다. 확신을 주는 확실하고 안전한 상태로 도망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안정감 있게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지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서로 심각한 갈들을 빚는 충돌의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확실성을 용인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좋으며, 이 일 역시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면 가장 좋을 것이다.(332p)

 

 

 

 

ㅡ 필리프 슈테르처, <제정신이라는 착각> 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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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7

 

 

행복에는 몇 종류가 있는데 사람은 그중에서 자기 몸에 맞는 행복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해. 잘못된 행복을 잡으면 그건 손바닥 안에서 금세 불행으로 바뀌어버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행이 몇 종류인가 있을거야, 분명. 그리고 사람은 거기서 자기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는 거지. 정말로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면, 그건 너무 잘 맞아서 쉬이 익숙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행복과 분간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24-25p)

 

 

그러나 그런 괴로움, 정신적 이중생활은 그리 오래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당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당원이었기 때문에 배신자가 된 거다. 그래, 너처럼 무당파이면 절대 배신자가 될 일이 없잖은가. 나 역시 당을 떠나면 그때는 그냥 평범한 학생에 지나지 않을 거다.

그렇지만 나는 당을 떠날 수가 없었다. 만약 당에서 떠난다면 그때의 나는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 자신에게 긍지를 가졌던 유일한 것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

그래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도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처음으로 정식 당원이 되었을 때의 흥분을 잊을 수 없다. 너는 그런 기분을 경험한 적 있는지? 당을 떠난다는 것은 그런 과거의 자신을 전부 부인하는 일이다.(63-64p)

 

 

그러나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학창 시절 생각했던 것과는 한참 다르더라. 처음에는 생각했던 대로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 돌아오면 편안한 마음이 되어 지금부터가 나를 위한 시간이라며 한가로이 책을 읽기도 하고 음악도 들으며 보냈다. 삼 개월의 수습 기간, 그후 반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나는 한 가지 일을 맡게 되고 책임도 지게 되었다. 그러자 점점 자유로워야 할 내 시간에까지 일이 침투했다. 학생 시절에는 취직해도 일은 일, 내 시간은 내 시간, 내 생활은 그 후자에 있다고 딱 자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일을 가져보니 일과 생활을 분리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 아니 오히려 일이 생활의 실체가 되어가더라.(73p)

 

 

그러나 격렬한 감정이 공허함을 지탱해주지는 않았다. 그 격렬함은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을 나는 바로 깨달았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격렬한 감정 속에 있으면서 그것이 자신을 전적으로 채우지 않는다는 것, 그 격렬함은 영원히 이어질 공허라는 유희 속에 잠깐의 휴식, 아이들이 말하는 '타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113p)

(...)

애초부터 없었다···· 사실이다. 약간의 선망은 있었겠지만, 실망은 없었다. 우리 세대는 기대와는 무관하다. 아니, 나는, 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내일 일어날 것을 미리 가르쳐주는 세계에서 자라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것은 계속해서 일어나는 사실뿐이었다. 나는 사실로부터 세계란 무엇인가를 배웠다. 나하고 실망이란 것은 무관했다.(113-114p)

 

 

하지만 그때의 나는 물론, 유코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의 나도, 그리고 유코와의 이야기를 약혼자 세쓰코에게 한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겨울밤의 나도,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갠가의 생의 풍경이 내 속에 흔적을 남기고 지나가야만 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 이해가 이미 그의 생에 아무 의미가 없어졌을 때에야 가능한 걸까.(123p)

 

 

하지만 그것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한여름 속으로 시간을 허무하게 지나갔다. 유코의 죽음을 슬퍼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언제부턴가 내 속에 싹텄다. 그것은 희미한 의혹이었다. 그러나 그 의혹을 깨달았을 때, 내 속에 갑자기 그 병원 뜰에서 다른 친구들의 천진난만한 쾌활함을 증오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

그날 내 어두운 표정은 유코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신을 감추기 위한 허세였을지도 모른다.

(...)

나는 내 속에 결코 회한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내 속에서 자기혐오가, 죄의식이, 그리고 그것과의 싸움이, 충실한 생활이 물결치듯 되살아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것을, 나의 공허함은 일시적이거나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동의어라는 것을 알았다.

(...)

그걸 감히 무시할 수는 없더라도 나의 노력으로 채울 수 있는 공백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충실한 생활은 바랄 수 없다 해도 적어도 내실 있는 생활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

어떤 노력도 내 공허함을 메울 수 없다는 것, 공허함을 공허함으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쎄쓰코와 약혼했다.(133-135p)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아니, 가지려고 한 적도 없고 그저 당신 속에서만 무언가를 찾아 그걸 그대로 우리 두 사람의 것으로 공유하기를 바라고 있었어. 당신이 가진 그 무엇에 몸을 맡기고, 거기에 나 자신을 지탱하고자 하는 나태한 바람을 가졌던 것뿐이었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됐어. 그래, 당신이 나와 보낸 이 년 동안 무엇 하나 바뀐 게 없었다면, 우리의 약혼에 아무런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건 그저 당신 앞에 있던 나라는 사람이 '무'였다는 것을 얘기하는 걸 거야. 무였던 나와의 사이에 당신이 아무런 역사를 가질 수 없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 당신도 나와 이 년이란 세월을 보내는 동안 달라지지 않았을 리 없고·····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다고 이 편지의 앞부분에 쓴 것도, 반대로 나 자신이 '무'여서 당신을 바꿀 계기가 되지 못한 것을 이미 그때는 또렷이 깨닫고 있었다는 증거이지 않을까.(186-187p)

 

 

그러게. 반한다는 것. 혹은 반했다고 인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하는 건 아니지만, 나와는 다른 희망을 가진 사람과 내가 서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내가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는 것은 결국 그 상태를 인정하는 거지.(192-193p)

 

 

 

ㅡ 시바타 쇼, <그래도 우리의 나날>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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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7

 

 

좋아요, 그 말이 사실이고 작품을 읽는 데 꼭 필요한 문학적 관습이 정말 존재한다고 쳐요. 그럼 어떻게 해야 그런 건 알아볼 수 있죠?

카네기홀에 데뷔하는 방법과 똑같다. 계속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평범한 독자는 소설을 읽을 때 당연히 줄거리와 등장인물에 집중한다. 이들이 누구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놀라은, 또는 끔찍한 일을 겪는지 주시하는 것이다. 이런 독자들은 일단 작품의 감정적 차원에 반응하는데, 개중에는 오직 감정적인 차원에만 반응하는 이들도 있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기쁨이나 혐오, 웃음, 슬픔, 근심, 고양감을 느끼고 거기에 감정적, 본능적으로 휘말리는 것이다. 종이든 컴퓨터든 어딘가에 작품을 쓰는 소설가는 원고를 출판사로 보낼 때 자기 책이 독자들로부터 바로 이런 반응을 얻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런데 문학 교수들이 책을 읽을 때는 이야기의 감정적인 차원에도 반응하지만 대개는 다른 요소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20p)

 

 

독자 입장에서는 정말 궁금할 것이다. 작가들은 왜 폭풍이 몰아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씨를 좋아할까? 왜 영주의 저택이나 오두막, 피곤에 지친 여행자들을 심한 비바람에 시달리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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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에서 날씨는 절대로 그냥 날씨가 아니다. 비가 그저 비가 아니라는 말이다. 눈, 태양, 더위, 추위, 그리고 어쩌면 진눈깨비도 마찬가지다.

(...)

그렇다면 비가 특별한 이유는 뭘까? 우리가 땅으로 기어 올라와 살기 시작한 때부터 물은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 듯하다. 강은 주기적으로 범람하여 그동안 우리가 이룩해 놓은 문명을 집어삼키고 우리를 다시 물로 끌고 들어가려 한다. 많은 비, 대홍수, 방주, 큐빗, 비둘기, 올리브 가지, 무지개가 등장하는 노아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고대 인류에게 정말 큰 안도감을 선사했을 것이다.(121p)

 

 

폭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행위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문화적, 사회적 함의를 갖고 있다. 그것은 상징적이거나, 어떤 주제를 내포하거나, 성서적이거나, 셰익스피어 풍이거나, 낭만주의적이거나, 우의적이거나, 초월적일 수 있다. 반면 현실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그저 폭력일 뿐이다. 누군가가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당신의 코를 후려치는 것은 그저 단순한 공격 행위일 뿐이다. 현실 속의 폭력에는 그 이상의 의미는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문학에서의 폭력은 문자 그대로의 폭력이면서 동시에 다른 의미도 갖게 마련이다. 누군가의 코를 후려치는 주먹은 문학에서는 뭔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주먹일 수도 있다.(155p)

 

 

「써니의 블루스」는 1957년에 출간됐다. 볼드윈으로서는 당시 자기가 지닌 최대한의 지식을 동원해 이 작품을 썼고, 약물 중독에 관한 연구 논문이 아니라 형제간의 관계를 파헤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써니의 블루스」는 속죄에 대한 글이지 약물 중독 치료에 대한 글이 아니다. 만약 후자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읽는다면, 다시 말해서 당신의 눈과 마음을 볼드윈이 살았던 1957년으로 이동시키지 못한다면 소설이 어떤 식으로 결말을 맺든 완전한 감상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약점을 지니고 있고 그것이 정상이다. 뭔가를 보고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이 납득할 수 있는 일정 수준의 개연성을 갖고 있고, 우리가 아는 세계와 어느 정도 유사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허구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세계와 모든 면에서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는 경직된 자세를 갖는다면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놓치게 될 뿐 아니라 제대로 작품을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대치는 어느 정도여야 적정한가? 작품에 대해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합리적인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그건 여러분에게 달렸다.

(...)

당신만의 눈으로 읽지 말라.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서기 2천 몇 년이라는 현재의 입장에 고정되어 있는 당신만의 시각으로 작품을 대하지 말고, 그 이야기가 쓰인 역사적 순간을 공유할 수 있는 관점에서, 그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고유의 사회·역사·문화·개인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관점에서 바라보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점이 없지 않지만, 나중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겠다.(339-340p)

 

 

 

ㅡ 토마스 C. 포스터, <교수처럼 문학 읽기> 中,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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