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16
한 저자가 쓴 비슷한 기획의 책을 3권째 읽으니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부각되어 느껴졌다. 지난 2권의 책에서는 크게 못 느꼈던 것 같은데 이번에 확 느껴진 걸 얘기해 보자.
우선 어떤 상황을 비유를 들어 많이 표현하는 데 그게 너무 아재 감성이랄까. 이를테면 이런 거,
상차 작업에 익숙해지면 고구려인 못지않은 축성의 대가가 될 것 같았다. 선배는 감탄스러울 만큼 잘 쌓았다. 내가 쌓은 쪽은 높이도 제각각이고 빈틈도 많았다. 선배가 쌓은 쪽이 대한치과협회 홍보 모델의 치열을 떠올리게 한다면 내 쪽은 '마이쮸'를 삼촌보다 사랑하며 동시에 치약을 '하얀 똥'이라고 부르는 내 다섯 살짜리 조카의 치아 상태를 재현한 것 같았다. 쌓여 있는 상태의 위태로움이 잠시 후 '젠가!'를 외쳐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152p)
또한 등장 인물을 '응답하라 시리즈'의 캐릭터에서 따와서 표현하는 데서는 이 책이 5~10년 전에 쓰인 책인가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했다.
다음으로 첫번째와 비슷한 단점일 수도 있는데 재밌지도 않은 농담ㅡ독약이나 지진계 등에 대한 거듭된 언급ㅡ을 열심히 던지는데 목표물에 명중하지 못하고 맥 없이 땅에 꽂히는 느낌이었다.
콜센터에선 모두가 혼자다. 이곳에선 다른 직원들과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답답해서 옆 사람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긴 하지만 전화 상담은 근본적으로 혼자 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과 자료를 주고받거나 의논을 하거나 보고를 해야 하는 일도 없다. 9시부터 6시까지 자기 모니터만 바라보며 헤드셋의 마이크에 대고 떠들기만 할 뿐이다. 콜센터에는 직원 문화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회식도 회의도 공동 업무도 없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직원이 들어오면 팀원들과 인사도 하고 자기소개도 하지만 이곳에서 팀이란 서류상의 구분일 뿐 팀으로 해야 할 역할도 공간도 없었다. 퇴사할 때까지 2팀에 속한 사람이 누구라든지 그들이 앉은 자리가 어딘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팀과는 무관하게 배정되는 자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바뀌었다. 점심은 11시부터 3시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4개조로 나누어서 먹었다. 밥 먹는 시간도 다 쪼개어져 있어서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길게 이야기를 나눌만한 기회도 여의치 않았다. 의도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자리가 아무리 바뀌어도 바로 옆 사람과 같은 식사 시간 조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모두가 눈인사 정도만 하고 출근해서 각자 자리에 앉았다가 6시가 되면 사무실을 떠났다. 팀워크의 측면에서 봤을 때 콜센터는 공유 오피스를 이용하는 개인 사업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
많은 사람이 직장 내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어하고 어떤 경우엔 다른 누구와도 말 섞지 않고 그저 내 일만 하다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도 백번 공감한다. 그런데 콜센터는 다르다. 말 같지 않은 소리의 대가인 나로서도 대꾸할 말을 찾기 힘든, 전화를 건 고객의 부모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극도로 궁금해지는 통화를 마치고 나면 같은 일을 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당신은 어떠냐고 묻고 싶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고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선 관리자한테 혼날 때 빼고는 다른 사람과 길게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다. 나는 하다못해 양돈장에서 똥만 치우던 시절에도 그곳 돼지들과 콜센터에서보다 많은 대화를 나웠다.(60-62p)
콜센터를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이렇게 설명한다. 상담사의 일과는 여덟 시간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신에게 달린 악플들을 소리 내서 읽는 거랑 같다고. 상담사의 가장 평범한 하루일지라도 가족들이 함께 통화를 듣게 된다면 펑펑 울며 다른 일을 찾아보자고 하게 될 거다.(81p)
내가 경험한 바로, 인간의 감정은 식물과 같은 방식으로 다뤄야만 한다. 따뜻한 봄바람만이 봉우리 속의 꽃을 끄집어낼 수 있듯이, 상담사의 내부 열정과 친절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상냥한 말, 그것뿐이었다. 어떠한 친절 교육도 아무리 호된 질책도 따뜻한 말 한마디만 못했다. 우리가 보호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을 때, 우리가 친절하게 대하고 싶은 대상을 구체적으로 설정할 수 있을 때 이 일은 더할 나위 없이 보람찼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어째서 평범한 사람이 성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사람의 허무함을 몰아내는 감각이 분명 우리가 하는 일에 녹아 있었다. 다만 그 감각을 경험하기 위해선 거대한 원석에서 참깨만 한 다이아몬드를 추출할 때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감정을 낭비해야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밖에서 이 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견해와는 다르게 우리가 유한하게 보유한 에너지의 일부였다.(86-87p)
상담사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죄송합니다"라면 고객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윗사람 바꿔"였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고객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서 빨리 이 사람이 상급자 바꿔달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게 된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관리자 문제다. 하지만 내가 이관시킨 고객을 내 옆에 앉은 관리자가 상대하는 걸 듣고 있으면 어쩔 땐 눈을 마주칠 수 없을 미안해진다. 게다가 이관시킨 상담은 절대 간단하게 끝나는 법이 없다. 기본으로 이삼십 분은 훌쩍 넘긴다. 일반 상담사가 불특정 다수를 상대한다면 관리자들은 검증받은 사이코들만 상대한다. 아무리 정신 나간 사람일지라도 일단 이관을 받으면 관리자가 끝을 내야 한다. 그다음은 없다. 그래서 관리자들이 통화할 때는 상담사들이 보통 그러듯이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기운이 없다. 반대로 가족 중에 정신병 환자가 있는 사람만이 몸에 지닐 수 있을 법한 단호함과 침착함으로 상대를 대한다.(96p)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 먹고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113p)
처음 까대기를 할 때는 다들 험하게 짐을 다뤄서 놀란다. 물류센터는 손님들이 "덜 맵게 해주세요"라든가 "콩나물 많이 넣어 주세요"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절대 주방에 전달하는 법이 없는 심보 고약한 웨이터와 비슷하다. '파손 주의', '취급 주의', '이쪽이 위로 올라가게 해주세요', '던지지 마세요', '밟지 마세요', '유리 주의' 등등 상자들이 조심스레 다뤄줄 것을 끊임없이 호소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의식하며 짐을 다루는 걸 본 적이 없다. 뭐든지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고 내동댕이친다. 레일에 떨어지는 건 그나마 다행이고 어떤 건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어떤 건 벽을 맞고 뒹군다. 관리자들도 그런 걸 당연하게 여기는 걸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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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트럭 기사는 건당 돈을 받는 게 아니라 시간당 돈을 받는다. 트럭이 물류센터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기사에게 지불해야 할 비용도 늘어난다. 따라서 어떻게든 짐을 빨리 내려서 트럭을 돌려보내는 게 수익률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128-129p)
까대기 작업의 하루 강도를 대략 계산해 보면 이렇다. 작업이 끝나면 바코드 리더기의 모니터를 통해 해당 컨테이너에서 나온 화물의 개수를 확인 할 수 있다. 대개 한 트럭당 1000개가 넘는다. 한 차를 끝내는데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회사에서는 도크별로 최소 아홉 대는 처리하길 바란다. 실제로는 하루에 열에서 열두 대 정도 작업한다. 우리 집 고양이가 5킬로그램에 약간 못 미치는데 들어 올렸을 때 평범하다고 느껴지는 화물들, '잔바리'처럼 특별히 가벼운 것도 아니고 쌀이나 음료수처럼 특별히 무겁지도 않은 화물을 들었을 때의 무게감이 대략 그 정도다. 화물 하나의 평균 중량을 5킬로그램이라고 하고 계산해 보자.
하루에 평균 열 대 작업하고 한 차에는 짐이 1000개, 평균 중량은 5킬로그램이다. 이걸 두 사람이 작업하면 한 사람당 하루에 운반하는 총 중량은 25톤이다. 전체 화물 중 3분의 1 정도는 옮길 때 몸을 굽혔다 일어서는 동작을 수반하므로 하루 전체에 걸쳐 그런 동작을 반복하는 횟수는 적게 잡아도 1500번이다. 즉, 하루에 25통과 1500번이다. 한반도에서 하루에 이 정도 신체 활동량을 요구하는 곳은 물류센터를 제외하면 태릉 선수촌뿐이다.
사람들은 흔히 몸으로 하는 일과 머리로 하는 일을 구분하곤 한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까대기는 몸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몸으로 하는 일은 이삿짐을 나르거나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는 거다. 까대기는 남은 수명을 팔아서 돈을 버는 일이다. 자신의 육체 안에 품고 있던 생명력을 레몬즙 짜듯이 쥐어짜 내서 그 대가로 먹고사는 일이다.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140-141p)
사람들이 이 일에서 못 벗어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하는 날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서다. 거기에는 단순히 출퇴근이 자유롭다는 것 이상의 심리적 이점이 있다. 까대기를 하는 동안엔 어떤 경계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일자리가 있으면서도 일반적인 직장이 요구하는 업무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부담감도 시간에 얽매임도 없다. 힘들게 일해서 돈 버는 건 똑같지만 직장에 다닌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매일 같은 일터로 출근하면서도 꼴 보기 싫은 사람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고 일하기 싫으면 아무런 눈치 안 보고 쉴 수 있다. 어제 왜 안 나왔냐, 오늘 나올 거냐, 눈치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일당이 센 일용직으로 일하면 일정한 수입은 있으면서 마음만은 일이 없는 사람처럼 홀가분하게 살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그런 맛에 일용직에 계속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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믈류센터에서 이것만큼이나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심리적 풍경은 20대 젊은이들의 테스토스테론 내뿜는 자신감이다. 20대 중에서도 경력이 아직 몇 개월 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다. 나는 천하무적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해내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외치는 자신감을 말투에서 표정에서 몸동작에서 드러내지 않는 순간이 없다. 까대기 작업 열두 시간을 온전하게 끝마친 사람은 자기 자신이 헤라클레스나 드웨인 존슨의 동급이라고 확신하게 된다.(147-148p)
물류센터에서 내가 가장 놀란 점은 까대기하는 사람 중에 우울해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다. 이것이 내가 일터를 전전하는 동안 경험한 최고의 미스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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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이야기를 해보면 다니던 회사나 공장이 문을 닫았다거나 정리해고를 당했다거나 해서 방황하던 차에 물류센터를 찾았다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도 우울해하거나 실의에 빠진 사람이 없었다. 나이 상관없이 다들 밝고 자신감이 넘쳤다. 이 일을 통해 그려볼 수 있는 미래가 너무 빤한데도 그랬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물류센터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자유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선 아무리 들락날락해도 눈치 주지 않기 때문에 남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까대기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성장의 감각 때문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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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을 받는 육체노동은 인생을 고체화시킨다. 물류센터에선 매일매일 내가 한 일의 성과를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쓸모 있는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을 한순간도 잃지 않는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인생은 모호하기로 악명 높은 시간 개념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무언가, 두 손으로 꼭 붙들고서 집고 휘두를 수 있는 단단하고 구체적인 무언가였다. 그렇게 일을 끝내면 일당이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더니 잔고의 앞자리 숫자가 변하는 것이 보인다. 마치 하루하루 레벨업을 하는 느낌이다. 물론 까대기가 성장시켜 줄 삶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온몸의 관절을 박살 내버리려는 듯 돌아가는 작업 속에서도 그 감각, 내 삶이 전진하고 있다는 감각만큼은 분명하게 전해진다.
이곳에선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이 워낙 높고 험하기 때문에 일이 년후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애태울 기운도 애초에 남아나지 않았다. 그렇게 산 하나를 넘고 나면 통쾌한 노곤함과 절대적인 숙면만이 남았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까대기는 우리가 오직 현재, 오늘 하루에만 집중하도록 도왔다. 그것은 미래를 방기하는 삶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말고 미래를 준비하는 더 나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174-176p)
그는 글로 세상을 상관있게 만들고 싶었다. 그는 한국어에서 가장 공격적인 단어가 바로 '상관없어'라고 믿었다. 칼이나 총은 사람을 죽이지만 '나랑 상관없어'는 관계를 죽이고 환경을 죽이고 세상을 죽인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과 닭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람과 돼지도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고시생과 선원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장과 직원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인간과 자연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관있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었다. 비록 그가 성공했다는 증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말이다.(385-386p)
ㅡ 한승태, <어떤 동사의 멸종> 中, 시대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