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12

 

 

몽테뉴의 에세를 들여다봐야겠다.

 

 

 

몽테뉴에게 자연스럽다는 건, 솔직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바로 나'를 알아보는 일, 그토록 까다로운 작업을 몽테뉴는 어떻게 해낸 걸까?

내가 운영하는 글방의 합평 시간에도 '솔직하다'는 좋은 에세이를 칭찬하는 표현으로써 빈번하게 등장한다. 여러 용례를 관찰한 바 '솔직하다'에는 다양한 함의가 있다. 사회적으로 지탄받거나 삼가야 한다고 여겨지는 행동, 신념, 욕망 따위를 드러냈다는 의미일 때도 있고, 일반적으로는 좋아할 만한 대상을 싫다고 했거나 일반적으로 싫어할 만한 대상을 좋다고 했다는 의미일 때도 있다. 그도 아니면 그냥 섹스 얘기를 자주 하신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일 수도 있다.

'솔직하다'는 표현이 가장 흥미로울 때는 작가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적었음이 느껴진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경우다. 이 말은 정말 묘한데, 왜냐하면 타인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 좋은 글에는 독자가 작가의 '있는 그대로'를 만나는 대목,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인 나머지 이야기가 작가의 현실을 넘어 독자의 현실이 되어버리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대목이 작가로서는 가장 '있는 그대로' 쓰지 않기 위해 저항한 흔적이라는 고약한 주장도 해봄 직하다. 우리는 경험을 스스로 인식하는 단계에서조차 진부한 틀을 적용한다. 제아무리 독특한 고난이 찾아온다 한들, 그 경험을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다'는 수사를 통해 감각하는 게 정확하다고 믿는 상투적 자아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편안하고 익숙한 방향으로 굳어 있는 경험을 진실에 가까울 때까지 구부리는 게 작가의 주된 업무라면, 에세이를 쓰려는 사람에게 '솔직하게 쓰라'는 조언이 알려주는 것은 거의 없다.

대신 '솔직하다'의 용례들은 에세이 읽기에 관한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알려준다. 에세이를 읽는 독자는 이렇게 전제한다. 에세이란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일을 적는 글이다. 에세이의 서술자는 작가의 일상적 자아와 일치한다.

이런 전제는 에세이스트들을 아주 곤란하게 한다.

에세이의 서술자인 '나'는 과연 지금 책상에 앉아 있는 '나'와 일치하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 버지니아 울프의 대답이다.

 

자아란 문학에서 본질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적수이다. 결코 자기 자신이 되지 않되 항상 자기 자신이라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다.(182-184p)

 

 

어떤 머리는 딸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죽이자고 말하고, 어떤 머리는 우리들 딸의 과업이란 게 아버지는 죽이는 것밖에는 없느냐고 말한다. 어떤 머리는 남자의 펜과 이성을 갈취하여 자매들에게 쥐여주고, 어떤 머리는 마녀의 피와 광기를 보전했다가 귀신과 짐승에게 잉크로 준다. 어떤 머리는 분명하고 건조하게 웅변하길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머리는 사유를 뒤집고 접고 꺾어 소문으로도 못 쓸 말을 중얼거린다. 한 여자는 어느 저녁 농담의 기능이란 공동체 내부의 문법을 공고히 하고 착취를 은폐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우스워지지 말고 있는 힘껏 진지해지자고 말한다. 여자는 같은 날 새벽에 일어나 우리 같은 존재들은 농담을, 유머를 잃는 순간 끝장나는 거라고,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다 바쳐 우스워지자고 오직 우리만이 우리를 웃음거리로 만들자고 말한다. 하나도 안 야했어, 그런 말에 안도하는 가슴이 있고, 야해 너도 야해, 그런 말에 비로소 불을 켜보는 등도 있다.

(...)

그러므로 나는 대개 지쳐 있다. 웬만하면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아무것도 쓰지 않기를 원한다. 되도록 입을 다물고 싶다. 참다 못해 말을 하게 된다면 그 중 어느 것도 기록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더 좋은 말이 나타날 테니까.

(...)

이론과 사상의 층위를 떠나도 분열은 여전하다. 나와 지극한 편애를 주고받는 여러 우정 공동체의 모습 또한 제각각이다. 운동화 끈을 탄탄하게 묶고 늘 어딘가로 사뿐히 뛰어가는, 유리병을 소독해서 토마토 절임을 만들고 그걸 내게도 한 병씩 선물하는 애들이 있다. 반대로 씻어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누워 있는 애들도 있다.

(...)

복싱 선수가 줄넘기 하듯 글 쓰기는 애도 있고 환자가 토하듯 글 쓰는 애도 있다. 그들은 한 명이고 또 만 명이다.(192-195p)

 

 

그러므로 윤리적 삶을 산다는 것은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인과 상호의존관계를 맺는데서 오는 온갖 지리멸렬함, 가령 비굴함이나 빚을 졌다는 느낌, 홀로 서는 데에 실패했다는 이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결백의 상태에 놓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윤리적 삶을 산다는 것은 도리어 그 지리멸렬의 소용돌이로 기꺼이 뛰어드는 일, 타인과 나를 잇는 끈을 더 촘촘하게 인지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용기를 내어, 혼자서 말끔한 비건이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아무것도 혼자서는 못 하는 사람이기를 자처하고 싶다. 어떤 깨끗함과 홀가분하다는 느낌을 '잘' 살고 있음의 징표로 간주하는 일을 멈추어야만 보이기 시작하는 관계들, 마치 빠르게 저은 낫또를 한 스푼 떠올릴 때 생겨나는 끈적하고 무수한 실타래와 같은, 존재들 사이에서 찰랑이는 섬세하고 연약하며 복잡한 냄새가 나는 관계들을 더 많이 감각하고 싶다. 그 일은 충분히 마르지 않은 몸을 가지고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진다.(232-233p)

 

 

 

ㅡ 안담, <친구의 표정>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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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7

 

 

사람들은 세계의 어느 지역은 사회적이고 다른 지역은 자연적이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여긴다. 극단적인 폭력, 대량 실업과 투옥, 소비 문화는 사회적 문제이고 사회적 불의다. 기후, 생물 다양성, 자원 고갈은 자연의 문제이고 생태의 위기다. 사람들은 세계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회'와 '자연'이 따로 작동하는 것처럼, 생명망이 인간의 권력관계와는 접촉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세계를 그렇게 만든다.

우리 저자들은 '자연'과 '사회'라는 두 단어를 이러한 일상적인 용법과는 다르게 쓰려고 한다. 우리가 '자연'과 '사회'라고 강조해 표기하는 것은 이 두 단어가 세계를 묘사하는 것뿐 아니라 지금과 같은 인간과 세계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개념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학자들은 이런 개념을 '실질적인 추상'이라고 부른다. 이런 추상은 존재론적 질문(그것은 무엇인가)과 함께 인식론적 질문(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도 제기한다. 실질적인 추상은 세계를 묘사하는 동시에 세계를 만든다. 실질적인 추상은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우리는 세계 생태계라는 아이디어를 활용해 폭력의 숨은 형태인 '자연'과 '사회'를 독자들에게 드러내고자 한다. 이 둘은 아직도 건재하다. 그리고 실질적인 추상은 결백하지 않다. 실질적인 추상은 권력층의 이익을 반영하고 그들이 세계를 조직하도록 허용한다.(72-73p)

 

 

나는 신의 도움으로 우리가 (너희 나라로) 강력하게 진입할 것임을 너희에게 확언한다. 우리는 또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전쟁을 벌여 너희를 복종시키고 교회와 폐하들의 신민으로 삼을 것이다. 우리는 너희와 너희 부인들과 아이들을 취해 노예로 삼고 폐하들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팔고 처분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너희 소유물도 취하겠다. 주군을 받들어 모시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며 부인하는 신민에게는 모든 괴로움과 손상을 가할 것이다. 그에 따른 죽음과 손실은 너희 잘못이지, 폐하들의 책임이 아니다. 우리 또는 우리와 함께 온 사람들 탓도 아니다.(129p)

 

 

임금노동은 인간의 지능, 힘, 기술을 취한 뒤에 또 다른 '현대 발명'을 활용해 규율 속에서 만들어낸 생산적인 노동이었다. 여기서 현대 발명이란 시간을 측정하는 새로운 방식을 가리킨다. 토지 생산성보다 노동의 실행이 자본주의 생태를 형성한다면, 이 과정에서 불가결한 것이 기계식 시계다. 돈이 아니라 시계가 노동의 가치를 측정하는 핵심 기술로 등장했다. 이 구분이 중요하다. 흔히들 임금을 위한 노동이 자본주의의 표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13세기 잉글랜드의 경제활동인구 중 3분의 1이 이미 생존을 임금에 의존했다. 임금이 삶과 공간과 자연을 조직하는 결정적인 방식이 된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시간 모형 덕분이다.

14세기 초에 이르면 새로운 시간 모형에 따라 산업 활동이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현재 벨기게에 속한 이프르 같은 지역에서 직물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계절이나 활동의 흐름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선형적이고 반복적인 새로운 종류의 시간에 따라 규율되었다. 이프르에서 노동시간은 종소리로 측정되었다. 각 근무조의 작업 시간이 시작되고 끝날 때 종이 울렸다. 16세기에 이르면 꾸준히 째깍대는 분과 초로 시간을 측정했다. 노동과 놀이, 수면과 기상, 신용과 화폐, 농업과 공업, 모든 것은 이 추상적인 시간에 따랐다.

(...)

그러므로 아메리카 정복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주민에게 주입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유럽인이 침략한 곳마다 '게으른' 토착민이라는 이미지가 함께 들어갔다. 토착민이 예수와 시계의 가르침에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시간 정책의 실행은 자본주의 생태에서 중심에 놓였다. 이미 1553년부터 스페인 왕은 주요 식민지 도시마다 공공 시계를 적어도 한 대씩 설치해나갔고, 다른 뭉명들도 스스로 정교한 시간 규칙을 만들어 활용했다. 이 새로운 노동 체제가 토착민의 속도, 비인간과의 관계를 대체했다. 마야 캘린더는 시간과 천문 판독의 복잡한 위계에 따른다. 그래서 우주 속에 놓인 인간의 질서를 다양하게 제시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런 질서를 존중한 것은 오로지 마야 캘린더의 신성한 시점에 맞춰 식미지를 공격할 때뿐이었다.(134-135p)

 

 

산업혁명과 관련해 화석연료가 18세기에 발명되었다고 상상하곤 한다. 사실 화석연료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긴 16세기의 산물이었다. 최초의 대규모 산업화는 1450년 이후 1세기가량 진행되었다. 산업화는 거대한 설탕공장과 은 광산의 프런티어뿐만 아니라, 우리가 본 것처럼 조선, 양조, 유리 제조, 인쇄, 직물, 철·구리 제련에서도 펼쳐졌다. 그리고 이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했다.(225-226p)

 

 

 

 

ㅡ 라즈 파텔, 제이슨 무어 ,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中, 북돋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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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4

 

 

아무리 주거비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도 1997년 이후로 밀워키와 다른 거의 모든 지역의 복지수당은 동결되었다. 이미 수년 동안 정치인들은 복지수당만으로 생존 가능한 가정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000년대 내내 임대료와 각종 제반 비용이 치솟기 전에도 그랬으니, 그 후로는 상황이 더욱 열악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88p)

 

 

한 건의 퇴거는 퇴거당한 가족이 원래 살던 구역뿐 아니라 마지못해 옮겨가야 하는 새로운 구역까지 여러 도시 구역들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강제 이주는 이주의 속도를 높이고 원망과 투자 회수의 속도를 훨씬 더 빠르게 가속화하여 제이콥스가 말한 "영구적인 슬럼"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영구적인 슬럼의 핵심 고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빠르게 그곳으로 흘러들어가고 그와 동시에 거길 빠져나가겠다는 꿈을 꾼다는 데 있다." 도린이 퇴거당하면서 32번가는 꾸준히 존재하던 한 사람(동네를 사랑하고 여기에 정성을 쏟음으로써 안전한 동네를 만드는 데 기여했던 사람)을 잃었지만, 라이트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103p)

 

 

임대료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보니 세입자 가족들은 때로 어쩔 수 없이 다른 장소로 이사 갈 돈을 충분히 모으면서 퇴거를 먼저 유발하기도 했다. 이쪽 집주인의 손실이 저쪽 집주인의 소득인 것이다.

(...)

당시 밀워키에서 침실 두 개짜리 아파트의 임대료 중간 값은 600달러였다. 480달러 이하에 임대되는 집과 750달러 이상에 임대되는 집이 각각 10퍼센트였다. 270달러 차이로 밀워키 시에서 가장 싼 집과 가장 비싼 집이 갈렸다. 이는 가장 열악한 동네의 임대료가 그보다 훨씬 나은 지역의 임대료보다 크게 싸지도 않다는 뜻이다. 가령 최소한 40퍼센트의 가정이 빈곤선 이하에서 살아가는 밀워키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침실 두 개짜리 아파트의 임대료 중간값은, 밀워키 시 전체의 임대료 중간 값보다 겨우 50달러 적었다. 셰리나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방 두 개짜리는 다 그게 그거야.“

오래전부터 그랬다. 1800년대 중반에 뉴욕 시에서 공동주택이 등장하기 시작할 무렵, 최악의 슬럼가 임대료는 시 외곽보다 30퍼센트 더 높았다.

(...)

빈민들이 슬럼에 모여드는 건 임대료가 싸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허락된 곳이 거기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가난한 흑인들은 더욱 그렇다.(109-110p)

 

 

가난한 흑인 동네 출신 남성들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투옥이었다면, 여성들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퇴거였다. 가난한 흑인 남성들은 잠긴 문 안에 갇혀 살았고, 가난한 흑인 여성들은 잠긴 문밖으로 내몰렸다.(140p)

 

 

하지만 러레인에 관한 한 대릴 목사는 사람들이 많은 고난을 자초하기도 한다고 믿었다. "그 여성은 자기 돈을 허투루 쓰면서 몇 가지 어리석은 선택을 했죠··· 잠시 좀 없이 지내보는 게 그녀에겐 최고의 상태일지 몰라요. 그러면 이런 생각이 날 수도 있겠죠. '아, 내가 멍청한 선택을 하니까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구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이야기하는 건 쉬웠다. 하지만 이름과 얼굴과 역사와 많은 필요를 가진 어떤 가난한 한 사람을 돕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이 어떤 실수를 저지르고 어떤 판단 착오를 범했는지를 아는 상태에서 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려운 문제였다.(179p)

 

 

스콧은 팸과 네드가 퇴거통지서를 받고서 소파와 침대·서랍 같은 큰 물건들을 놔두고 급하게 집을 떠나기 직전까지 함께 어울리며 약에 취하곤 했다. 스콧은 네드와 팸이 당연한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기 전이었다면 그는 좀 더 동정심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그는 동정을 일종의 순진함으로, 미숙한 중산층들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드러내는 감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는 이동 주택단지에서 살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동정할 수 있는 건 자기들한테는 다른 선택지가 있기 때문이지." 네드와 팸의 경우, 스콧은 이들의 퇴거는 간단히 말해 크랙 습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헤로인 수지 역시 스콧과 같은 생각이었다. "모든 퇴거에는 공통분모가 있지." 그녀가 말했다. "나도 거의 퇴거당할 뻔 한적이 있었어. 돈을 다른 데 썼거든.“

이동주택단지 거주민들은 이웃이 퇴거당할 때 그 사람이 소문난 약물중독자든 그렇지 않든 간에 거의 법석을 떨지 않았다. 퇴거는 개인의 실패가 가져온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누군가는 퇴거가 "쓰레기들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그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들 자신이 가난을 당연하게 여겼다.

(...)

하지만 부정의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대중 저항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변화를 일으킬 집단 역량이 있다고 믿을 때만 가능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는 스스로를 피억압자로 여겨야 하는데, 대부분의 이동주택단지 거주자들은 절대로 그럴 의사가 없었다.

(...)

대부분의 거주자들에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스콧에게 목표는 그곳을 뜨는 것이지 뿌리를 내리고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 거주자들은 스스로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자신들이 거의 평생 동안 스쳐 지나기만 하고 있어도 말이다.

(...)

사람들이 자신의 동네를 궁핍과 부덕이 넘치고 '모든 종류의 부서진 인간'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정치적 역량에 관한 자신감을 잃게 된다. 동네의 트라우마 수준이 높다고 인식한(즉 동네 사람들이 투옥과 학대·중독 등 끔찍한 일을 겪었다고 믿는) 밀워키의 세입자들은 동네 사람들이 힘을 합쳐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믿을 가능성이 훨씬 낮았다. 이 같은 신뢰 부족은 동네의 실제 빈곤 및 범죄율보다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인지한 밀도 있는 고난의 수준과 더 관계가 있었다. 자신의 고통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는 지역공동체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감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토빈의 세입자들은 종종 토빈이 남기는 이윤에 관해 지나가는 말을 던지거나 그를 탐욕스런 유대인이라고 부르곤 했다.

(...)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세입자들은 불평등에 높은 관용을 보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난과 토빈의 부유함을 가로지르는 널찍한 계곡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어째서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낡은 트레일러의 임대료를 내느라 소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하는지 따지지도 않았다. 이들의 관심은 그보다 더 작고 더 구체적인 문제에 집중되었다.

(...)

밀워키에서는 대부분의 세입자들이 집주인을 존경했다. 딸내미가 다시 발이 빠지기 전에 썩어서 구멍 난 마룻바닥을 때워야 하는 데 누가 불평등에 저항할 시간이나 있겠는가? 내가 다시 자립할 때까지 집주인이 나에게 일을 시켜줄 의향이 있는데 누가 집주인이 얼마나 버는지 관심을 가지겠는가?(249-253p)

 

 

새미나 대릴 목사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 러레인이 가난한 것은 돈을 막 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실에 가까운 건 그와 정반대였다. 러레인이 돈을 막 쓰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이었다.

러레인이 퇴거당하기 전에는 월세를 내고 나면 164달러가 남았다. [유료] 케이블 텔레비전과 월마트를 멀리하면 이 가운데 일부는 모을 수 있었다. 러레인이 월세를 내고 난 뒤 남는 소득의 3분의 1에 달하는 50달러를 어떻게든 남기며 1년이면 600달러를 모을 수 있었다. 이 돈이면 한 달 치 임대료를 낼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엔 상당한 희생이 뒤따랐다. 때로 그녀는 온수나 옷 같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케이블로 지출되는 돈을 아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자가용도 없이 도시에서 외따로 고립된 이동주택 단지에서 사는 나이 든 여자에게, 인터넷 사용법도 모르고, 전화도 가끔만 쓰고, 일은 없고, 때로 섬유근육통 발작과 군집형 편두통에 시달리는 나이 든 여자에게 케이블은 소중한 친구였다.

러레인 같은 사람들의 삶에는 복합적인 제약이 워낙 많아서 좋은 행동 혹은 자기통제를 얼마나 많이 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헤어날 수 없는 가난과 어느 정도 안정된 가난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너무 멀어서, 어쩌면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자린고비처럼 굴어도 가난에서 헤어날 가망이 거의 없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자린고비처럼 굴지 않기로 선택한다. 돈 한 푼에 벌벌 떠느니 고통에 즐거움이라는 양념을 곁들여 화려한 생존을 시도한다. 마약에 약간 취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사기도 한다. 식료품 구매권으로 랍스터를 살 수도 있다.

러레인이 현명하지 못한 방식으로 돈을 쓴다면 그건 수당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너무 적어서였다. 러레인은 랍스터 정찬을 먹기 위해 구매권을 써버렸다. 이제 남은 한 달은 얻어온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다 언젠가 허기를 느낄 수도 있다. 그건 그렇게 감당하면 되는 일이다. "나는 내가 한 짓에 만족해."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남은 한 달 동안 국수만 먹는다 해도 기꺼이 감당할 거야."(298-299p)

 

 

하지만 아무리 평등한 대우를 해도 사회가 불평등한 이상 여전히 불평등을 양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투옥의 경험은 흑인 남성들에게, 퇴거의 경험은 흑인 여성들에게 기형적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에 최근 범죄 기록이나 퇴거 기록이 있는 사람의 주거 신청을 균등하게 거부하는 경우라도 여전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과도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털과 바네타 역시 어포더블렌탈로부터 자신들의 체포와 퇴거 이력 때문에 신청이 거부되었다는 답을 들었다.(343-344p)

 

 

집주인들이 부동산을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든지 간에(땀·지능·독창성의 덕을 본 사람도 있겠고, 유산이나 운·사기의 덕을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임대료 상승은 집주인들에게는 더 많은 돈을, 세입자들에게는 더 적은 돈을 의미한다. 이들의 운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해관계는 배치된다. 도시 임대없자들의 이윤이 변변치 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가 않다. 미국에서 네 번째로 가난한 도시의 가장 열악한 이동주택단지를 소유한 임대업자의 연소득은 최저임금을 받으며 전일제로 일하는 그의 세입자보다 서른 배가, 복지 수당이나 SSI를 수령하는 세입자보다는 쉰다섯 배가 더 많다. 여기서 두 가지 자유, 즉 임대료에서 이윤을 얻을 자유와 안전하고 적정한 가격의 주택에서 살 자유는 상충한다.

(...)

이 두 가지 자유의 균형을 재조정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저소득 가구가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주택바우처 프로그램을 크게 확대하는 것이다.

(...)

기본 개념은 간단하다. 일정한 소득 수준 이하의 모든 가정에 주택바우처를 받을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마치 식료품 구매권이 있으면 사실상 아무 데서나 식료품을 구매할 수 있듯, 이 바우처가 있으면 주택이 너무 비싸거나 크거나 호화롭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허름하고 황폐한 경우가 아닌 이상 원하는 어디서든 살 수가 있다. 이들의 집은 대단하지는 않아도 품위 있고 가격이 적정해야 할 것이다. 프로그램 관리인들은 민간시장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알고리즘 등의 수단을 차용하여 정교한 분석을 진행하고, 이를 통해 집주인들이 너무 높은 집세를 매기거나 저소득 가정들이 필요 이상의 큰 집을 선택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다. 바우처를 소지한 가구들은 소득의 30퍼센트만 주거비로 지출하고 나머지는 바우처로 부담한다.(416-417p)

 

 

 

 

ㅡ 매튜 데스몬드, <쫓겨난 사람들> 中,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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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11

 

 

이렇게 거대한 조직이나 사회에 스며든 습관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기복제를 한다. 내가 중국어를 배울 때 사용하던 교과서는 중국에서 제작한 것이었는데,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눌 때 담배를 권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대화로 가르쳤다. 논산 훈련소에서는 두세 시간의 훈련이나 작업을 마친 후에 흡연을 위한 휴식 시간을 제공한 것은 물론 훈련생에게 담배를 무료로 지급하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흡연을 권한다면 담배를 끓는 것이 과연 '개인의 선택, 개인의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15p)

 

 

2017년 <버즈피드>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실험에 참가한 남성 네 명의 옷에 달린 주머니를 꿰매어 사용할 수 없게 하고 일상생활을 하게 한 것이다. 실험 참가자들은 밖에 나가면서 사원증이나 지갑을 놓고 나가는 실수를 했고, 테이크아웃 음식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데 애를 먹었으며,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면서 폰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고생했다. 그렇게 하루를 살아본 남자들은 여자가 현대 사회에서 주머니 없이 사는 건 전기가 발명된 세상에서 어둠 속에 사는 거나 다름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머니가 없거나 지나치게 작고 적은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고 살아온 여자들은 하루 실험에 참여한 남자들보다는 익숙하게 일상생활을 할 것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불편함에 익숙해진 것뿐이다.

(...)

진짜 문제는 남성과 여성 중 남성만이 기능하는 옷을 입을 수 있고 입게 될 것을 당연하게 기대하고 그걸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기여는 제한적이라는 사고방식, 여자를 전통적인 위치에 묶어두려는 태도가 여자의 옷을 만드는 데 반영된다.(122-123p)

 

 

사람은 단순히 남성 Y염색체를 갖고 있다고 해서 체력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원래 AIS는 남성 호르몬인 안드로젠 무감응 증후군이기 때문에 이걸 가진 사람은 체력과 경기력을 높여주는 남성 호르몬의 덕을 보지 못한다. 애초에 조직위가 선수의 염색체까지 살피면서 여성임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호르몬으로 인한 불공정한 이점을 없애려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마르티네즈 파티뇨 선수는 애초에 자신에게 있지도 않은 이점 때문에 그 모든 일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모든 일을 겪은 세계육상연맹은 성염색체를 기준으로 한 성별 검사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마르티네즈 파티뇨 선수에 비하면 캐스터 세메냐의 경우는 다른 여자 선수들에 비해 호르몬상 분명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평균 여성들에 비해 몇 배나 많은 테스토스테론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운동 능력에 미치는 영향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이를 악용하려는 도핑은 경기조직위원회의 감시 대상이다. 문제는 이 호르몬을 주사하지 않았는데도 몸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다. 스포츠중재재판소는 2019년에 세메냐는 몸에서 평균 여성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테스토스테론이 나오기 때문에 강저젝으로 수치를 떨어뜨리지 않으면 여성으로 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언뜻 들으면 과학적인 판단인 것 같지만 과연 그럴까?

똑같은 일이 남성 선수에게 일어나면 어떨까? 테스토스테론이 평균보다 많이 나오는 남성은 남들보다 키가 큰 농구선수처럼 그저 '신체적 조건이 유리한' 선수일 뿐이다. 엘리트 체육의 꽃인 올림픽은 물론이고, 프로 스포츠계는 그렇게 신체적 이점을 타고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의 몸에서 같은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면? 그건 부당한 이점이라는 것이 스포츠중재재판소의 주장이다.

(...)

요약하면, 남자가 여자 종목에 몰래 들어와서 경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별을 확인하는 절차를 만들었는데, 과거에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생각했던 성이 살펴볼수록 복잡해서 칼로 자르듯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연구를 해보니 외부에 드러난 생식기도 성염색체도 여성과 남성을 구분해주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158-160p)

 

 

나와 다른 인종이나 문화를 '배려'하는 것과 다양성의 가치를 아는 것은 다른 얘기다. 후자의 경우에는 다양성이 조직과 사회에 실질적인 이익임을 아는 것이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내가 '베푼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내가 힘들거나 반대에 부딪힐 경우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193p)

 

 

소셜미디어를 떠돌며 앰버 허드를 조롱하는 영상들은 거의 예외 없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허드는 어설픈 연기를 한다. 그게 연기이기 때문에 허드의 주장은 거짓이다. 그리고 그런 뻔뻔한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그가 소시오패스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세 주장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 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설프게 우는 연기와 폭행 사건과 관련한ㅡ증거가 필요한ㅡ사실 관계는 서로 무관하고, 소시오패스 여부는 정신과의사의 진단이 필요한 문제이지, 몇 초짜리 영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지적을 하는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분노한 사람들(압도적으로 남성이다)에게서 "그럼 앰버 허드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냐"라는 말을 듣게 된다.

(...)

사람들은 재판에서 다루는 증거(팩트)와 피고의 성격 혹은 평판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203-204p)

 

 

앰버 허드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허드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허드는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고, 뎁과 허드 둘 모두 미성숙한 사람들로 보인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비폭력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마하트마 간디의 경우 아내를 공개적으로 조롱했고 아들들을 학대했다. 아버지의 학대에 분개한 간디의 아들들이 훗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은 이제는 잘 알려진 일이다. 하지만 간디가 그랬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를 소시오패스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부부가 서로 폭력을 주고받았음에도 사람들은 조니 뎁을 소시오패스라고 부르지 않는다.

(...)

반면 대중은 앰버 허드와 같은 여성에게 ‘착하고 죄 없는 피해자’혹은 ‘남자를 속이고 괴롭히는 소시오패스’중 하나의 역할만을 허용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남성은 독특한 면이 존재하는 입체적 인물인 반면 여성은 평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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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피해자도 완벽하지 않다. 어떤 피해자도 완벽한 필요가 없다. 상대 여성이 완벽하지 않은 한 때리는 남성이 폭력적인 인간으로 규정 될 수 없다면, 도대체 여성은 얼마나 완벽해야 때리면 안 되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했다. 서두에서 언급한 메리 웹스터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완벽하지 않은 여성을 공격하는 일은 인류가 가진 아주 오래된 습관임을 알 수 있다. 성격이 유별난 사람은 세상에 널렸다. 여기에는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거나 말해도 그저 ‘유별난 사람’, ‘독특한 사람’으로 인식될 권리는 남자들에게만 부여된다. 여자가 유별나다면? 17세기에는 마녀였고, 21세기에는 소시오패스가 된다.(214-217p)

 

 

옷 벗기를 원치 않는 어린 여자 배우의 노출 장면을 찍기 위해 50대 남자 감독과 남성 스태프들이 짜고 거짓말을 했고, 여자 배우에게 알리지 않은 채 쥐를 떨어뜨려서 나체를 찍었다는 얘기다. 김 감독은 일단 그렇게 여자 배우의 몸을 도둑 촬영한 후에 “미스 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단다. 많은 돈이 투자된 영화의 성공이 달려 있는 상황에서 어린 여자 배우에게 “마음대로 하라”는 말은 한마디로 영화를 위해 네가 희생하라는 압력임을 모르는 사람은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357p)

 

 

ㅡ 박상현, <친애하는 슐츠씨>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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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

 

 

맨날 세계사ㅡ거의 유럽사라고 봐야겠지만ㅡ입문서만 보다가 까먹고 다시 비슷한 입문서 수준의 책만 보니까 발전이 없다. 특정 지역이나 시기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논하는 책을 읽어야 할 텐데 손이 잘 안 간다. 이 책도 1789년부터 1989년까지 200년의 역사를 거칠게나마 개괄하긴 좋지만 주마간산식이라 이대로 일주일만 지나도 또 다 까먹겠지?

 

 

 

19세기의 마지막 15년 동안 유럽 열강은 전 세계에 영향력을 넓히고자 불꽃 튀는 경쟁을 벌였다. 이 제국주의의 시대에는 지구 땅덩어리 중 4분의 1 이상이 유럽 6개국에 점령되었다. 경쟁은 특히 아프리카에서 심했다. 그때까지 아프리카는 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유럽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유럽인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서, 유럽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있었다. 1880년 당시에는 아프리카의 약 90퍼센트를 아프리카인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20년 후 아프리카 쟁탈전이라 불린 영토 차지 경쟁이 한바탕 휩쓴 뒤에는 사실상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분할되어 유럽 국가들의 손에 넘어갔다.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만이 독립을 유지했다.(167p)

 

 

사회다윈주의의 대표적 옹호자인 영국인 허버트 스펜서는 다윈의 적자생존 개념이 생물종만이 아니라 민족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우월감은 극단적인 형태를 띠기도 했다. 한 예로 1904년 독일 함부르크의 한 동물원에서는 사모아인 여자들이 우리에 갇힌 채 전시되었다.(172p)

 

 

아프리카 대륙 쟁탈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79년이었다. 당시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는 영국계 미국인 기자 헨리 스탠리를 중앙아프리카의 콩고로 보냈다. 스탠리의 손에는 그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레오폴드 2세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합의서가 잔뜩 들려 있었다. 스탠리는 합의서를 들고 500여개 부족을 찾아다니며 각 부족 추장에게 서명을 받아 1884년 돌아왔다. 유럽 내 경쟁 상대가 갑작스레 아프리카 영토를 손에 넣어 버리자, 마음이 급해진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유럽 국가들의 아프리카 대륙 분할에 규칙을 마련하고자 1884년부터 이듬해까지 이어진 베를린 회의를 주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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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회의를 기점으로 아프리카 땅에 대한 미친 듯한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유럽 각국은 서로 선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프리카로 달려들었다. 그로부터 겨우 15년만인 1900년 경,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유럽 열강의 손에 분할되었다.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만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고, 그나마 원주민이 직접 통치하는 제국은 에티오피아뿐이었다.(174-175p)

 

 

1500년에 유럽 국가들이 지배한 지역은 지구 땅덩어리 전체의 7퍼센트에 불과했지만, 1800년에는 35퍼센트로 늘어났고 1914년에는 무려 84퍼센트가 되었다. 20세기 초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이었고 제국에 속한 인구는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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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동'과 '극동'이라는 용어는 유럽을 기준으로 해당 지역까지 상대적인 거리를 나타냈다. 1884년 어느 학회에서는 영국 런던 근교에 있는 그리니치를 지나는 자오선을 경도 0도, 즉 본초자오선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세계 전역의 표준시간대는 그리니치표준시GMT를 기준으로 하여 몇 시간을 더하거나 빼는 방식으로 표기하게 되었다.(180-181p)

 

 

 

ㅡ 데이비드 메이슨, <처음 읽는 유럽사> 中, 사월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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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6

 

 

이 정도는 써야 과학 전문 저널리스트구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이 책에 깊게 영향을 받았다길래 분기학자에 대해서만 좀 더 찾아볼 요량으로 읽다가 그냥 휘리릭 다 읽음. 칼 린나이우스(칼 린네)로 시작하여 분기학자의 등장으로 물고기라는 종이 사라지는 것까지, 그리고 마지막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는 존재한다며 자신의 의견을 밝히며 마무리하는 책이다. 꽤나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지나치게 상세하다시피 분류학의 역사ㅡ칼 린나이우스, 다윈, 진화분류학, 수리분류학, 분자분류학, 분기학으로 이어지는ㅡ에 대해 훑어주는 책인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다만 저자가 움벨트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ㅡ어떤 부분이 걱정되는지는 알겠지만ㅡ하던데, 그 부분은 내 생각과는 좀 다르다.

 

 

움벨트는 글자 그대로 '환경' 또는 '주변 세계'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지만,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그 단어로 더 구체적인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 생물학자들에게 움벨트란 지각된 세계, 즉 한 동물이 감각으로 인지한 세계를 의미한다. 각 종이 지닌 특수한 감각 및 인지 능력에 의해 키워지고, 그 종에게 결핍된 부분에 의해 제한된 결과 그 종이 특유하게 지니게 된 시각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이 용어는 익숙하지 않지만, 그 개념은 아주 익숙하다. 우리는 개들이 색깔을 볼 수 없어서 색채가 아니라 냄새로 그려진 우주에서 산다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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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수님이 애지중지하던 벌들은 다면적인 구조의 눈으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외선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벌들은 꽃에서 꿀이 있는 위치로 정확히 날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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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인간에게도 있다. 우리는 그걸 '실제'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사실 그건 우리를 둘러싼 생명의 세계에 대해 우리 특유의 감각이 그려낸 그림이다. 그런 게 바로 움벨트다. 그리고 거기에 답이 있었다.

인간의 움벨트에는 내내 드러나지 않고 있던 중요한 의미 하나가 들어 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생물의 체계적 질서를 감지하는 방식, 처음부터 내장돼 있으며 판에 박힌 그 방식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이 바로 움벨트(우리가 공통적으로 지각하는 세계)라는 깨달음이었다.(35-36p)

 

 

나는 늘 분류학이라는 과학의 역사가 일련의 가지런하고 순차적인 통찰과 실험실의 야근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겼고, 또한 그런 것들이 모든 타당한 과학의 진보를 이끄는 것이라 배웠다. 그런데 분류학은 철저한 이성에서 태어나 명쾌한 실험을 통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일반적인 과학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움벨트에서 받은 충동으로 태고부터 해왔던 일(생명의 질서 짓기와 이름 짓기)에서 파생된 과학이었다. 하지만 움벨트는 금세 분류학 분야의 크고도 끈질긴 약점이 되었다. 생명에 대한 움벨트의 시각은 과학의 토대가 되기에는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움벨트와 과학은 왜 그렇게 철저히 상반되는 것일까? 움벨트는 어느 모로 보나 우리 인간 종이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시절에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굴에서 살던 사람들이 걸어서 탐험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세계의 한 조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움벨트이니, 전체 지구의 종들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의 과학자가 해야 하는 일에는 쓸모가 없거나 심지어 방해가 된다. 그리고 움벨트는 생명과 자연의 질서를 명쾌한 시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 시각은 객관성이나 기나긴 세월에 걸친 진화적 변화, 과학적 엄밀함이나 가설 검증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전혀 알지도 못한다. 사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움벨트의 시각은 과학의 진화적 생물 분류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대신 움벨트는 철저하게 감각적이며 극도로 주관적이다.

(...)

알고 보니 움벨트는 그간 보이지 않았고 인지되지 않았던 과학의 적수였고, 맞서 싸우기에 더없이 힘겨운 상대였다. 어찌나 버거운 적수였는지 그 때문에 분류학자들은 그 싸움을 2세기가 넘도록 계속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과학이 승리를 거두었고, 움벨트를 내버리고생명에 대한 그 비과학적이고 비진화론적인 시각에서 탈출했다.

(...)

어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기학자들의 선언은 단순히 분류학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혁명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선언은 과학이 움벨트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최종적으로 폐기하는 행위였다. 그것은 분류의 과학을 너무나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그 태곳적에 지각된 시각(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치던 시각!)에 대해 진화와 과학의 관점이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서야 마침내 이뤄낸 승리였다. 분기학자들의 손에 어류가 죽어나간 그 일은 분류학이 진정으로 현대적인 과학으로 태어나는 순간으로 기록됐다.(38-39p)

 

 

해야 할 분류 작업이 무엇이든 간에 전부 과학자들에게 맡겨버리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확실히 더 수월하겠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생명의 세계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만 맡겨 두는 데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의 생명에게 눈길도 주지 않게 됐다. 수많은 야생의 생물들이 자기 좀 보라는 듯 눈에 띄는 모습으로 끈덕지게 우리 앞에 나타날 때도 우리는 그 존재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모두가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일 가운데 우리가 생명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하는 일, 바로 '먹기'를 할 때조차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사실은 생명의 세계임을 점점 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고기가 콧김을 뿜어대는 덩치 큰 포유동물에서 잘라낸 살덩어리가 아니라 스티로폼 접시에 놓인 새빨간 타원형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생명의 세계는 항상 바로 우리 눈앞에 있지만 우리는 그걸 모두 놓치고 있다.

우리가 치를 대가는 그보다 더 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 중 가장 큰 것을, 바로 야생의 자연 자체를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는데, 우리는 생명과 너무 심하게 단절된 탓에 그에 대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심지어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확신도 없다.

(...)

우리는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 그리고 이 지경에 와 있음을 깨달은 지금, 어떻게 여기서 탈출해야 할까? 이 책은 이 질문들에 답하고자 하는 나의 시도다. 이 책에는 우리가(과학자들과 나머지 사람들 모두)이 낯선 장소에 도달한 여정의 이야기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지도가 담겨 있다.

우선 나는 내 물고기들을 되찾고 싶다. 알고 보니 나는 뱀들과 새들과 물방울을 튕기는 매혹적인 물고기들로 가득한 세계를 내게 보여줬던 유년기의 숲에서 마음껏 활개 치는 움벨트와 함께하던 그 시절, 처음부터 올바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비록 과학을 대단히 존경하는 사람이기는 해도 나는 물고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해야겠다.

(...)

미끌미끌하고 반짝거리며 물속을 헤엄치는 그 동물들은 우리와 생명의 세계를 연결하는 중심점에 자리하고 있다.(44-45p)

 

 

칼 린나이우스 무대에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동물과 식물은 사람들이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이치에 맞는 존재들이었다. 사람들은 주변에서 만나는 생명의 세계에서 쉬이 질서를 목격하고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질서를 찾아주는 열쇠는 기분 좋을 정도로 단순했다. 우리 인간 종의 역사 대부분에 걸친 그 긴 세월 동안, 사람들 대부분은 그리 먼 거리를 여행할 일이 없었고 따라서 볼 수 있는 생물의 종류도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전체적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생물의 범위는 어느 한도를 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경이롭지만 단순하고 지리상으로 엄격히 제한된 세계에는 깊이 생각해볼만한 생물이 별로 없었으므로, 거기서 지극히 타당하고 이치에 맞아 보이는 질서를 찾아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특징을 쉽게 묘사할 수 있는 부류들은 척 봐도 정체가 뭔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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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단순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말았다. 18세기 초, 린나이우스가 살던 시절에 이르자 유럽의 범선들은 이제 미지의 세계 가장자리만 탐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세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몰려갔다.

(...)

그리하여 모험심 넘치는 식물학자와 동물학자는 범선에 올라 지구 전역을 누비고, 온갖 생명이 바글대는 열대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이국적인 야생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

이제 500종의 동물이나 550종의 식물만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꼬리를 물고 해안에 당도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물이라는 파도가 그들 앞에 수천 종의 동식물이라는 현실을 들이밀었다.

이 모든 새로운 생명에 대한 열광이 커지는 한편으로 혼란도 커져갔다.(50-54p)

 

 

린나이우스는 겸손과는 심히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스스로도 자주 들먹이고 자화자찬했던) 자신의 재능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신의 의지였다.

(...)

린나이우스는 전능한 신이 창조의 날 이후 전혀 변하지 않은 무수한 생명 형태들에 관해 그 누구보다 큰 통찰력을 자신에게 주었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는 칼 린나이우스니까.

(...)

린나이우스는 여러 면에서 현대의 과학자와는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

그는 속속들이 감각적인 사람으로 아름다움과 경이, 세상의 찬란함과 비참함에 탐닉했으며, 멜로드라마적 취향이 다분하고 극단적인 관점을 좋아했다.(77-78p)

 

 

자기 입으로 그렇게 부단히 자화자찬해댄 그를 칭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연의 체계」는 정말로 굉장한 성취였다. 린나이우스는 이십 대 백수 시절에 그 책을 씀으로써, 자기 힘으로 서른도 되기 전에 과학적 분류의 아버지로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영예를 거머쥐었다. 「자연의 체계」를 씀으로써 그는 이제 막 생겨나던 분류학을 탄생시키는 산파 역할을 했다.(83p)

 

 

생명의 세계에 대한 린나이우스의 비전은(다른 모든 이의 비전도 마찬가지로) 불변의 생물들로 가득한 세상의 비전이었다. 생물 종은 누구나 알고 있듯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곧 다윈이 따개비의 도움을 받아 진화에 대한 깨달음으로 세상에 충격을 가할 참이었다. 그럼으로써 다윈은 수많은 사람이 생명의 세계와 단절되고 물고기는 죽음에 이르게 되기까지, 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많은 일이 펼쳐질 무대를 마련하게 될 터였다.(86-87p)

 

 

린나이우스의 시대 이후 분류학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린나이우스가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하고서 모든 생물에 대한 전문성을 주장할 수 있던 시절은 지났다. 수집가들은 신속하게 작업을 이어갔고, 그 결과 이제는 생명의 세계가 그러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 분명해진 상태였다.

(...)

각자 특정하고 한정된 분류군의 전문가인 이들은 자신이 연구하는 생물의 작은 소집단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여러 생애에 걸쳐 전념해도 충분치 않을 만큼 막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식물학자와 동물학자만이 아니라 이제는 수십 가지 전문분야가 존재했다.(91-92p)

 

 

그는 변이가 진화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것이 그를 완전히 꼼짝 못 하게 만들고 있었다. 생명이 얼마나 가변적인지를, 깔끔한 틀과 범주에 들어가는 걸 얼마나 거부하는지를 분명히 밝혀주는 진실을 알아봄으로써 다윈은 자기도 모르게 분류학을 거의 불가능한 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일단 진화론자의 눈으로 생명을 보기 시작하여 그 모든 혼란스러운 변이들과 그 모든 진화적 변화의 시초를 알아보기 시작한 사람들이라면 종에 대한 시각도 바뀐다. 생명은 단순히 가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생명은 항상 변화하고 있다. 어느 순간이든 우리에게 보이는 건 흐르는 식산 속의 스냅숏 한 컵, 그 계통이 새로운 종들로 갈라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유장한 변화의 흐름 속 한순간일 뿐이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건 당신이 위대한 진화적 통찰을 얻은 쾌거다. 유일한 문제는 이제부터는 생명의 세계를 분류할 방법을 도저히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112p)

 

 

이렇게 서로 매우 유사해서 우리의 감각으로는 자연의 질서에서 서로 나란히 두어야 마땅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둘은 진화적으로 상당히 먼 친척들이라 생명의 나무에서 서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반대로 모습이 서로 매우 다르고 따라서 우리 감각으로는 자연 질서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은 두 유기체가 진화적 생명의 나무에서는 가까운 관계일 수 있다. 예컨대 둘 다 갑각류인 따개비와 바닷가재가 그렇다. 자연에는 우리가 자연의 질서로 인식하는 것이 진화적 생명 분류와 완전히 충돌하는 예들이 가득하다.(119p)

 

 

그러니 세분-병합의 딜레마를 우리가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펴보자.

(...)

가령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코카콜라와 세븐업, 미스터핍, 시에라미스트, 펩시콜라, 닥터페터, 오렌지크러시, A&W 루트비어, 스프라이트, 프레스카를 한 캔씩 주고, 유형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해보라고 요구한다고 하자. 세분화 경향이 있는 우리의 도시인은 이 음료들을 맛보고 곧바로 알아차리고, 명백한 상태까지 살펴본 뒤, 아마 자기가 보기에 너무나 뻔히 구별되는 범주들로 분류할 것이다. 이 사람은 탄산수의 10가지 유형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좀 더 병합적인 사고방식의 사람에게 묻는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하나하나 조금씩 마셔보고 상표를 살펴본 다음 10가지 음료를 10가지 범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4개의 그룹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펩시콜라와 코카콜라를 포함하는 콜라 그룹, 시에라미스트와 세븐업, 스프라이트, 프레스카를 포함하는 레몬라임 그룹, 미스터핍과 닥터페터, A&W 루트비어를 포함하는 갈색 비콜라 그룹, 그리고 오렌지크러시 하나만 들어가는 오렌지탄산수 그룹이라는 명칭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분류를 본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잠깐, 시에라미스트와 세븐업, 스프라이트는 셋 다 맛이 같지만 프레스카는 상당히 달라. 프레스카는 따로 떼어서 혼자만의 다섯째 그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그러면 또 다른 누군가는...

(...)

"그냥 어떤 사람들에게는 분리하는 게 더 성향에 맞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데 모으는 게 더 맞는 것이다."(142-143p)

 

 

소칼이 반대한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가중치 조정 과정이었다. 그는 벌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으며, 이 행복한 무지 속에서, 직관이 장악한 이 단계를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건너뛸 수 있었다. 소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들이었고, 97개 종 각각에서 122가지 형질을 단 하나의 숫자로 기술한 이 수는 무려 총 11,834개의 데이터 포인트로 이루어진 거대한 행렬을 구성했다. 이 분류학적 구성에서 모든 형질은 똑같은 크기의 영향력을 지닌다. 각 형질이 얼마나 중요한지 혹은 중요하지 않다고 인식되든 상관없이, 가장 많은 수의 유사성을 공유한 종들은 함께 모여 동일한 속에 들어갈 터였다. 두 종이 공유하는 유사성이 적을수록 이 분류에서 그 종들은 더 먼 거리에 배치될 것이었다. 계산이 진행되는 동안 모든 형질에게 완전히 평평한 운동장이 펼쳐질 것이고, 그 결과로 어떤 나무가 만들어지든 그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전반적인 유사성만을 기반으로 한 나무일 터였다.(282p)

 

 

분자들을 비교하면 ( 한 유기체의 다른 어떤 특징과도 달리) 바다에 사는 의충동물과 돼지처럼 전혀 다른 동물들을 포함해 어떤 두 생물도 비교 연구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인 단백질은 영장류나 다양한 동물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분류학자들은 자신들이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유기체들의 분류학 연구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한 무리의 야생화들에서 자연적 질서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꽃의 구조와 잎의 특징 등을 비교하고 대조한다. 그러나 야생화 한 종을 말코손바닥사슴과 어떤 박테리아와 비교할 방법은 한마디로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것들이 상당히 거리가 먼 관계로 보인다는 주장을 하는 정도가 다였다. 비교할 만한 부분이나 조각, 토막이 전혀 없었고, 명백히 유사하거나 다른 점도 없어서, 그것들 사이 관계의 세부적인 사항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모든 유기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단백질들을 가지고 작업함으로써 이 화학자들은 모든 생물의 질서를 한꺼번에 들여다볼 수 있는 문을 열어놓았다.(307-308p)

 

 

분류학은 처음부터 항상 외양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분자생물학자들의 성공으로 과학자들은 사실상 분류학자들에게 생물의 외양은 무시해도 되며 오히려 무시하는 게 좋겠다고, 이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단백질과 DNA뿐이라고 제안하고 있었다. 나머지 과학자 공동체의 다수가 분자생물학자들이 마침내 생명을 분류하는 이상적인 방법을 찾아낸 것인지도 모른다고 열광하고 있었다.(312p)

 

 

전통 분류학은 1970년대가 끝나가던 무렵 이미 험난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수리분류학자들은 분류학 전반을 폭풍처럼 휩쓸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자기들이 주장하는 객관성과 점점 더 복잡해지는 통계학에 대한 집요한 숭배를 품은 채 계속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분자생물학자들 쪽에서는 만만찮은 추진력을 얻으며 무서운 속도로 세를 불려갔다. 바로 이 괴로운 시절에, 젊은 무뢰한들 가운데서도 가장 경악스러운 자들이 나타나 자기들 특유의 새로운 대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수리분류학이 현대 과학으로서 분류학의 유아기였다면, 그리고 분자분류학이 생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향해 비틀비틀 첫걸음을 내디디며 신기함과 놀라움을 채워가던 유년기였다면, 가장 최근에 등장한 이 불행은 분류학의 청소년기였을 것이다. 누구나 알 듯이 청소년기는 항상 어여쁘지만은 않다. 이 시기는 분류학이 삐딱함을 장착하고 모히칸 스타일로 머리를 밀고 군데군데 피어싱도 하고 엄마 아빠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분기학자라고 불리게 될 이들, (...) 그들은 다가오고 있었다.(331-332p)

 

 

헤니히는 진화분류학자들과 달리 어떤 경우에도 유기체들 사이의 어떤 유사성이나 차이점이 더 혹은 덜 중요할지를 감지하는 데 직관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수리분류학자들과 달리, 얻을 수 있는 최대한 많은 유사성과 차이점의 방대한 통계분석에 의지해 미묘한 관계와 분기의 진실을 완력으로 뽑아내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가 책을 쓰던 당시 DNA는 아직 완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으니 DNA를 사용할 생각도 분명 없었다.

모든 분류학자가 그렇듯 헤니히도 진정한 생명 진화의 계통수를 향한 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유사성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역사상 다른 모든 분류학자와 달랐던 것은 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유사성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에 유사한 분류군들, 다시 말해 특정 종의 공통 후손들을 식별하려면, 다른 어떤 분류군도 아닌 그 후손들만이 특유하게 공유하는 유사성들을 밝혀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아가 그들이 공유하는 유사성은 정확히 한 유형, 바로 그 공통 조상에게서 새로 진화되어 그들에게 유전된 새롭고 특유한 형질이리라는 점도 깨달았다. 이 유사성은 그 공통 후손들 모두에게 회원식별용 배지 같은 역할을 할 터였다. 각각의 특정 계통에 고유하게 나타나는 진화상의 새로움을 보면 친척 분류군 전체를 식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헤니히의 머리에서 나온 독창적인 생각이었다. 공통된 진화상의 참신함만을 가지고 진화상의 친척 분류군들을 식별하라는 것.(334-335p)

 

 

분기학자들의 나라에서는 상황이 더 기괴해진다. 헤니히가 온전한 후손들의 분류군만을 인정하고 명명할 수 있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자.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진화의 나무에서 온전한 가지 전체만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나무를 살펴보면 작은 문제 하나가, 검고 흰 얼룩이 있고 음메 하고 소리를 내는 문제가 보인다. 소들이 우리의 물고기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이는 만약 당신이 모든 물고기가 포함된 가지를 쳐낸다면 소도 함께 딸려 나올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당신은 거기서 소를 떼어낼 수 없다. 가지를 두 번 쳐서 당신 마음에 맞게 불완전한 무리 짓기를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다시 우리가 어류라고 부르는 것은 헤니히의 기준에 따르면 진정한 진화적 분류군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고기들은 한 조상의 모든 후손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다. 거기에 소를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어류는 '진짜 분류군'이 아니다. 이 말은 폐어나 잉어나 연어 같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분기학자들의 기준에서도 다른 기준에서도 정말로 실재한다. 당신은 가지를 하나만 잘라서 폐어만 있는 가지를 가질 수도 있고, 연어만 있는 가지 하나만 잘라낼 수도 있다. 분기학자들이 인위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모든 물고기를 하나의 분류군으로 묶는 것이다. 혹은 그들이 하는 말로는, 당신이 정말로 폐어와 연어와 잉어 등등을 '어류'라는 하나의 분류군에 모아 넣고 싶다면, 그 분류군에 그들과 조상을 공유하는 모든 후손도 함께 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는 베시도 들어가고 오리어리 부인도 들어가며, 지구상의 모든 소도 들어간다.

소만 포함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어류'라 불리는 이 분류군을 유지하고 싶다면, 거기에 모든 포유동물도, 심지어 인간도 포함시켜야 할 터이다.

(...)

이렇게 된 사정이었다. 물고기들의 죽음은. 다윈이 분류학은 생명의 계통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천명하며 시동을 건 일의 필연적인 결과. 그가 우리에게 감지된 자연의 질서 저변에 거대한 생명의 나무가 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생명은 정말로 진화한다는 것을 목격한 순간부터 과학이 피할 수 없이 달려온 지점. 다윈이 방향을 알려주었고, 이제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했다.(352-355p)

 

그만해 아니 계속해. 분류학자들 울겠다...

 

 

 

 

ㅡ 캐럴 계숙 윤, <자연에 이름 붙이기> 中, 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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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6

 

 

 

챗GPT나 이후 구글에서 나온 제미니 같은 인공지능은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언어를 처리하는 데 초점을 맞춘 초거대 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입니다. 초거대 언어모델은 인터넷과 책, 문서 등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럴듯한 단어와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공지능입니다. 한번 더 정리하면, 생성형 AI 기반이 초거대 언어모델인 것입니다. 생성형 AI는 인공지능의 한 분야이고요.(36p)

 

 

신라면은 있는데 왜 백제면, 고구려면은 없는지 이유를 알려주세요.

 

제미니는 이렇게 답하더군요.

 

신라가 한국의 문화와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반면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보다 덜 알려져 있고, 쌀을 주식으로 한 백제와 고구려와 달리 신라에서는 밀가루로 만든 면 요리가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

인공지능 대답을 보면 문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내용도 매우 그럴듯합니다. 깔끔한 보고서를 써 놓은 듯합니다. 다만 내용이 전혀 사실과 맞지 않을 뿐이죠.

(...)

이런 현상은 초거대 언어모델이 기본적으로 '다음에 나올 적절한 단어를 확률적으로 예측'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정확한 정보를 찾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서 나타납니다. 초거대 언어모델은 블랙박스 안에서 무슨 이유인가로 어떤 단어나 문장을 생성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결과일 확률이 높다고 계산되면 그를 따르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등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58-59p)

 

 

이처럼 생성형 AI는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애매한 것도 자신 있게 제시합니다. 사용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더구나 언어모델은 매우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이런 경향은 더 커집니다. 생성형 AI는 말이나 그림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하는 것이지, 정확한 자료를 찾아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

거듭 말하지만, 생성형 AI는 기본적으로 '다음 말을 계속 이어 가는 기계'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결과물을 활용해야 합니다. 적절한 정보가 없는 경우에는 그냥 없는 말도 만들어 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인공지능 답변이라고 철석같이 믿을 것이 아니라 항상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60-62p)

 

 

음악, 미술, 디자인, 영상, 문학, 광고 등의 분야를 흔히 '크리에이티브'한 영역이라고 합니다. 규정이나 절차보다는 아이디어와 창의력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창의력 하면, 고독한 천재 예술가나 과학자가 어느 순간 영감을 받아 놀라운 결과물을 쏟아 내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곤 하는데, 창의력이 꼭 그렇게만 정의되는 것은 아닙니다.

창의력은 과거부터 쌓아 온 경험과 지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해서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 내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

우리가 창의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던 업무 대부분은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재구성할 수 있고, 이제 인공지능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인정해야 할 듯합니다. 일상적인 디자인이나 일러스트 작업, 실용적인 글쓰기나 번역 같은 일들은 인공지능 때문에 많이 줄어들 전망입니다.(98-99p)

 

 

이런 점을 짚는 이유는 혹시 인공지능 시대니 인공지능이 이제 다 알아서 하겠지 하고 생각할 분도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공부할 필요도, 외국어를 익힐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인공지능 시대이기 때문에 더 공부하고 더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늘어날수록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일을 생각해 내고 해결할 사람이 그만큼 더 중요해질 테니까요. 그리고 누구나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게 되면, 인공지능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큰 격차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106-107p)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서버들은 데이터 센터라는 특수한 시설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서버는 네이버나 구글, 카카오 같은 기업이 인터넷 서비스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고성능 컴퓨터입니다. 데이터 센터는 서버를 모아 놓은 '서버 호텔'같은 곳이지요. 우리는 데이터 센터의 서버에 접속해 검색을 하거나 톡을 보내고, 영상을 봅니다.

데이터 센터는 전기를 많이 씁니다. 수많은 서버가 바쁘게 돌아갑니다. 서버가 작동하면 이때 나오는 열을 식히기 위해 또 에너지를 써야 합니다. 자연 전기가 많이 필요하죠. 전기를 만들어 낼수록 탄소 배출량이 늘어나고요. 데이터 센터에서 쓰는 전기는 세계 전력 소모량의 1퍼센트 정도라고 합니다.

(...)

아일랜드 한 나라가 1년 동안 쓰는 전력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구ㅡ글이라는 한 기업이 한 국가만큼 전기를 쓰는 셈이지요.

구글이 생성형 AI에 요청한 것 하나를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은, 구글 검색 1건을 처리하는 비용의 10배에 이릅니다.(118-120p)

 

 

인공지능이 편향된 시각을 보이거나 다양성을 위협하는 결과물을 내놓자 인공지능 기업들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느라 많이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이 지나쳐 도리어 어색한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제미니가 그 예입니다.

(...)

제미니에 "1820년 독일 시골의 연인 이미지를 그려 줘"라고 넣었더니 흑인 남성과 아시아 여성이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만들어 냈습니다. 19세기 초 독일 시골에 흑인과 아시아인 커플이 있지는 않았겠죠.

(...)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세상이 통념과 너무 다르면 사용자는 불편해합니다. 편향된 시각을 줄이는 것만큼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세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한데,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편향된 시각이 없는 상태'라고 여기는 것 역시 어떤 사람들(주로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백인 엘리트들)의 생각이 반영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인공지능에서 편향된 시각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가능할까요?(130-132p)

 

 

미국 경찰은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범죄 발생 가능성이 큰 시기나 지역을 예측하고 순찰을 강화합니다. 순찰을 자주 나가니 사람이 많이 잡히고, 이런 기록 때문에 인공지능이 그 지역을 더 우범 지역으로 지목하는 악순환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최적화된 결론을 얻는 데 집중하는데, 이런 특성이 자칫 특정 집단에 대한 편향된 시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145-146p)

 

 

그런데 자율 주행 차량이 사고를 냈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요? 자동차 제조사, 자율 주행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만든 회사, 운전자나 차주 중 누구의 책임이 가장 클까요?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은 차량 탑승자와 피해자, 보험사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책임 소재가 명확해지지 않으면 자율 주행 차량은 현실화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 또는 기꺼이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일지도 모르겠습니다.(163p)

 

 

 

ㅡ 한세희,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인공지능 이야기> 中, 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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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5

 

미안하지만 이런 주제는 확실히 다큐멘터리로 보는 게 훨씬 강력하고 효과적인 것 같다.

 

 

훗날 마이애미와 뉴욕, 베네치아와 기타 연안 도시를 잠기게 할 대부분의 물은 다음 두 군데에서 비롯될 것이다. 한 곳은 남극, 또 한 곳은 그린란드다. 킬리만자로산의 눈이나 파타고니아의 빙하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여러분도 종종 들어 보았겠지만, 도시를 잠기게 만드는 규모로 말하자면 육지에 있는 빙하는 이에 별로 기여하는 바가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구 양쪽 끝에 있는 커다란 얼음덩어리 두 개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과학자들이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린란드와 남극에서의 위험은 서로 매우 다르다. 남극은 그린란드보다 7배나 더 크고, 얼음도 훨씬 더 많다. 만약 남극대륙 전체가 녹는다면(물론 그 과정만 해도 수천 년이 걸릴 수 있다) 지구의 해수면은 약 60미터 높아질 것이다. 만약 그린란드 전체가 녹는다면(물론 남극이 녹는 것에 비해서는 시간이 더 적게 걸릴 것이다) 해수면은 약 7미터 높아질 것이다.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물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전 세계 인구 70억 명이 한꺼번에 바다로 뛰어든다 치더라도, 그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기껏해야 약 0.25밀리미터에 불과하다.(84-85p)

 

 

어째서 그 장벽은 샌디 수준의 홍수에 더해서 (예를 들어) 미래의 해수면 상승을 감안하여 추가로 1.5미터까지 더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은 걸까?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노골적이면서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문제는, 이 장벽이 단지 그 뒤에 있는 사람들만 보호해 준다는 점이다. 로어이스트사이드에 건설될 새로운 방벽은 몇몇 대규모 공공 주택 개발지를 보호하는 동시에, 샌디 때 물에 잠겨서 로어맨해튼에 대규모 정전을 야기한 핵심 시설인 콘에디슨 변전소를 보호한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벽은 그저 로어맨해튼 장벽 두르기의 시작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 "빅유의 실제 목적은 월스트리트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컬럼비아대학의 재난 전문가 클라우스 야코프의 말이다. 월스트리트가 미국 경제에 갖는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이는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역시나 샌디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주민 대부분이 가난하고 흑인인 브루클린의 레드후크에 비야케잉엘스그룹이 설계한 방벽이 건설되려면 과연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까?(226p)

 

 

또한 현실 안주의 문제도 있다. 장벽과 제방 덕분에 사람들은 안전한 느낌을 받는다. 심지어는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렇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에 닥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제방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대피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잘못된 가정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다. 2008년에 중국의 주장 삼각주에 폭풍이 닥쳤을 때, 인근 도시 주하이의 화강암 해벽 3분의 1이 무너져서 물이 시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장벽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어리석어집니다." 리하르트 요리센의 말이다. "장벽 때문에 우리는 위태로운 장소에서 살아가는 것의 위험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다 뭔가가 잘못되면 그야말로 파국이 되는 거죠.“

로어맨해튼을 보호하는 방법에 관해서라면 이와는 다른, 그리고 덜 가혹한 방안들도 있었다. 샌디가 닥치기 전에도 뉴욕의 조경건축가 겸 도시설계가 수재너 드레이크가 이끄는 연구진은 로어맨해튼의 가장자리를 2미터쯤 돋우고, 보도 아래 지하의 공공 시설물을 방수 처리하고, 홍수가 나면 물을 붙잡아 둘 수 있도록 거리를 높이고 재설계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물가에 소금물 늪지와 일반 습지대를 완충지로 조성함으로써 파도의 힘을 흡수하고 우수를 정화하자고 제안했다. 이 같은 새로운 기반 시설의 재원을 마련하는 한편 땅을 돋운 도시를 물가와 어우러지게 하기 위해, 드레이크의 계획에서는 이스트강을 따라 일련의 새로운 고층 건물을 짓도록 허용했다. 전반적으로 이는 물이 상승하는 세계의 로어맨해튼에 관한 우아한 재상상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계획은 섬세하고, 복잡하고, 비용이 커서 신속한 처방전으로 내놓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세계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지금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사람들이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그러니 이보다는 차라리 장벽을 건설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리는 편이 훨씬 더 쉽다. "물론 큰 폭풍이 닥쳐서 장벽을 쓸어가 버리기 전까지 그렇다." 드레이크의 말이다.(228-229p)

 

 

 

 

ㅡ 제프 구델, <물이 몰려온다> 中, 북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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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5

 

 

끝으로 한 가지 비밀을 말해주자면, 편의점의 영수증 하단 귀퉁이에는 ㅇㅇ두 자리 숫자가 찍혀 있는데 이는 객층 분류 번호다. 주민등록증 번호처럼 앞자리 1은 남자, 2는 여자를 나타내고 뒷자리는 1부터 5까지 어린이, 중고생, 젊은, 중년, 노인 순으로 표기된다. 이 말인즉, 근무자가 내 나이를 어떻게 판단했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구매 영수증이 편의점에서 발급하는 나이 평가표 되시겠다. 자신 없으면 보지 말 것이며 혹여 보게 되더라도 결과에 대한 클레임은 노노.(94p)

 

 

 

ㅡ 유철현, <어쩌다 편의점> 中,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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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3

 

 

구성에 공을 많이 들였네. 재밌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도 읽어봐야지

어류라는 전통적인 분류 체계가 고정불변한 게 아니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며 전통적인 성별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긍정하고 세계속에서 사물에 강박적으로 질서를 구축하려고 했던 시도의 무의미함을 생각하게 됨.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 무는 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

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을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다.(57p)

 

 

늘 자신의 선지자로 모시던 루이 아가시의 제자답게 데이비드는 자신이 관찰하는 생물에게서 도적적 교훈을 찾으려 했다. 아가시의 흐릿한 "퇴화"개념에 다윈의 진화론을 함께 버무린 것을 가지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느는 미끌미끌한 먹장어를 나태함이나 기생충 같은 "나쁜 버릇"이 한 종을 퇴보 또는 타락시키거나, "더 나쁜 쪽으로 변화시킬"수 있다는 증거로 보았다. 한 과학 논문에서 그는 한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주머니 모양의 몸으로 여과 섭식을 하는 멍게가 한때는 더 고등한 물고기였지만 "게으름", "무활동성과 의존성"이 더해진 결과 현재와 같은 형태로 "강등"된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한 쇠퇴를 초래하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알지 못했지만, 데이비드에게 멍게는 명백한 경고이자 게으름에 대한 교훈담이고, 말 그대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주머니였다.(74p)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데이비드는 청교도답게 손을 게으름에서 벗어나게 하라고 권한다. "활동적인 야외 생활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건강과 함께" "영혼의 고통은 사라진다."

(...)

그러면 나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면 어떻게 하라는 걸까? 데이비드는 나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절망의 철학>의 최종 결론은 절망이 선택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이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거쳐 가는 단계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멸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은 "축 늘어진 정신의 유행"을 따르고, 문학 속 "슬픈 왕들"을 흉내 내는 게으른 모방자들이며, 그들이 "지옥불 같은" 숨결을 내뿜는다고 비난한다. 죽음의 냄새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은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

"이러한 인생관은 염세주의로 이어지는가?" 강의가 끝나갈 무렵 그는 학생들에게 일종의 마술 같은 주문을 걸었다. 혼돈이 주는 냉기를 떨쳐버리는 한 가지 방법을 말이다. 특별한 활자체로 된 여덟 개의 단어.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127-128p)

 

 

이 문제에 관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자기기만이 데이비드와 내 아버지가 경고한 것만큼 그렇게 위험한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오랫동안 사회의 도덕적 권위자들은 그렇다고 말해왔다. 내가 알기로 성서는 자기기만을 경멸하고, 오만을 대죄라 부르고, 오만을 부리지 않는다면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될 거라면서,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오만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카로스는 태양에 밀랍으로 만든 날개 깃털이 녹는 바람에 하늘에서 떨어졌다. 계몽주의 시대에 볼테르는 낙관주의가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음흉한 해악이라고 비난했다. 20세기에는 의학 전문가들이 일치된 의견을 내놓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에이브러햄 매슬로, 에릭 에릭슨 같은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들은 자기기만을 정신적 결함이자 시각에 생긴 문제여서 치료로 교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정확한 시각은 "정신의 건강을 보여주는 표지라고 여겼다.

그러나 20세기가 기운차게 달려가는 동안, 임상심리학자들은 이상한 일들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볼 때 더 건강한 환자들, 인생을 더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 좌절을 겪은 뒤에도 재빨리 회복하는 사람들, 직업과 친구, 연인을 얻고 인생이라는 회전목마에서 황금기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장밋빛 자기기만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1970년대부터 연구자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실험을 시작했다. 실제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매력적이고, 남들을 더 잘 도우며, 더 지적이고, (주사위를 던지거나 복권 번호를 뽑는 것 같은) 우연한 사건들을 가능한 정도보다 훨씬 더 잘 통제하는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꾸준히 확인됐다. 그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볼 때도 자기가 실패한 것보다 성공한 것들을 훨씬 더 쉽게 기억해냈다. 미래를 내다볼 때는 친구들이나 급우들보다 자신이 성공할 가능성을 훨씬 더 크게 잡았다.

반면 그토록 칭송받던 정확한 인식이라는 미덕을 지닌 사람들은 어떨까? 짐작했겠지만 그들은 병적인 수준의 우울증에 걸렸다. 그들은 살아가는 일을 힘들어했고, 좌절을 겪은 뒤에는 회복이 더 어려웠으며,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종종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은 몇 차례에 걸쳐 수정되었다. 몇 가지는 건강하지 않은 특징들 항목에서 건강한 특징들 항목으로 옮겨졌다. '기만'이라는 용어는 '긍정적 착각'이라는 중립적 표현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자 약간의 자기기만은 강한 정신력에 더 유익하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는 주로 심리학자 셸리테일러 Shelley Taylor와 조너선 브라운Jonathon Brown이 쓴 매우 영향력 있는 논문 덕분이다. 이 논문에서 그들은 긍정적으로 왜곡된 세계관을 갖고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이점을 보여준 200가지가 넘는 연구를 검토하고 정리했다.

여기까지는 이미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다음 이야기는 모를 수도 있다. 현실에 대해 건강한 태도를 취하는 관점이 바뀌면서 심리치료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다는 것 말이다. 많은 치료사들이 "스토리 에디팅" 또는 "리프레이밍reframing" 이라는 기법을 사용해 환자가 자신에 대한 인식을 좀 더 긍정적인 빛으로 물들이도록 부드럽게 유도하기 시작했다. 이때 핵심은 자기기만이 적당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연구가 밝혀낸바, 극단적 부인이나 기만은 오히려 적응에 해롭다고 나타났다. 그러나 순한 거짓말, 하얀 거짓말, 작은 장미봉오리 같은 거짓말은 무척 이로운 효과를 낼 수 있다. 요컨대 힘들어하는 어떤 사람을 붙잡고 그 사람이 자신에 관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약간 더 긍정적인 이야기그가 실제보다 조금 더 강한 사람, 실제보다 더 친절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이야기, 연인과의 이별에서 자신의 잘못이 겉보기만큼 그렇게 크지 않게 보이는 이야기로 이끌어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 심오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버지니아대학의 심리학자 팀 윌슨Tim Wilson은 이야기를 살짝 조정하는 것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에 감명받아 그중 가장 극적인 결과들을 모아 《방향 바꾸기Redirect》라는 책을 펴냈다. “스토리 에디팅"을 받은 대학생들은 더 높은 학점을 받고, 중퇴하는 비율이 줄었으며, 심지어 여러 해 뒤에는 건강이 더 좋아졌다. 직장인들은 출근하는 비율이 더 높아졌다. 또 정신적 충격을 입은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벌어진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수정하도록 가르치자 평온한 감정을 회복하는 시간이 더 빨라졌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괜찮을까요?" 내가 윌슨에게 물었다.

"해로울 게 뭔가요? 두려움을 잠재워주고, 미래에 적응을 방해하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 문제 될 게 없다고 봐요.“

"작은 거짓말이 큰 효과를 낸다고요?“

"물론이죠!"(138-141p)

 

 

2000년대 초에 앤절라 더크워스라는 한 고등학교 수학교사는 심리학 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여러 해 동안 더크워스는 왜 어떤 학생은 다른 학생들보다 공부를 더 힘들어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성취도가 높은 학생들에게는 무슨 비밀이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몇 년 뒤 더크워스는 그 비밀의 요소라 여겨지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고 그 특징에 '그릿Grit'(끈질긴 투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릿. 끈질김을 뜻핮디만 그보다 귀에 착 붙는 단어, 그릿.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것, 그릿. 머리로 벽을 반복적으로 들이받을 수 있는 능력. 더크워스는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사관생, 촤고경영자, 뮤지션, 운동선수, 셰프 등 거의 모든 직업에서 정상에 선 사람들에게서 그릿을 발견했다. 재능, 창의력, 친절함, IQ는 다 잊어라. 순수한 그릿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바로 그것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인지적 결함이 그릿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될까? 바로 긍정적 착각이다. 다른 연구들도 마찬가지로 긍정적 착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좌절을 겪은 뒤에 낙담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릿이란 여러 특성들이 섞인 칵테일 같은 것이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능력, 또는 더크워스의 표현을 빌리면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하는 것"말이다.(142-143p)

 

데이비드가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비판받을 때 그 비판의 따가움을 한 번이라도 느낀 적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혹시 그 믿음직한 방패로 막아내는 데 너무 능숙해져서 비판의 가시가 한 번도 그의 심장에 가닿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어느 쪽이든 그 방패는 그에게 효과가 있었다. 그는 아내 수전을 잃고 재빨리 또 다른 아내 제시를 얻었다. 물고기 컬렉션을 잃었지만 규모가 더 큰 컬렉션을 재구축했다. 그리고 점점 더 높은 직책으로 승진했다. 가르치는 일에 대해, 어류학에 대해, 고등교육에 기여한 일에 대해 상들과 메달들이 요란하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만의 기이한 연금술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작은 거짓말들이 동으로, 은으로, 금으로 변했다. 겸손을 유지하라는 수천 년 이어져온 경고는 잊어라. 어쩌면 이것이 신이 없는 세계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지속적으로 오만을 복용하는 것이야말로 실패할 운명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보여주는 증거인지도 모른다.(146p)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이 나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현실을 무시하는 게 편리할 때는 무시하도록,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데 필요하다면 어떤 말이든 자신에게 속삭이도록 프로그래밍하고 있다. 그런데 장밋빛 렌즈를 끼고 살아가는 일이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할까?

알고 보니 어느 작은 연구자 집단이 세계 곳곳에서 바로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조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이 쓴 방법을 상상해보면 재미있다. 이 연구자들은 클립보드를 손에 들고 자만심 강한 사람들을 직장과 학교에서 따라다니며 그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모든 사소한 기벽들을 기록하고 집계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내놓은 결과를 보면, 긍정적 착각이 순전히 좋은 결과만 가져온다고 믿기가 꺼림칙해진다.

델로이 폴허스는 대학생들이 처음에는 자존감이 높은 학생들에게 끌리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들에게 싫증을 내고 그들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토마스 차모로-프레무지크는 직장에서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고용 안정성을 더 떨어뜨릴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긍정적 착각이 더 나은 신체 건강과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들 중 가장 널리 인용되던 한 연구는 그 결과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많은 오류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자기고양self-enhancement”에 관한 수백 건의 연구를 메타 분석한 마이클 더프너는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사람들의 자기과시가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공동체 안에서 좋은 평판을 받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놓치기도 한다는 걸 발견했다. 이를테면 도구를 빌리거나 파티에 초대받거나 좋은 일자리를 소개받을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

리처드 로빈스와 제니터 E. 비어는 4년에 걸쳐 대학생들을 관찰하면서, 긍정적 착각을 더 많이 하는 학생들이 단기적으로는 (자신이 과제에서 실제로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행복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평온 지수가 급감한다는 걸 밝혀냈다. 로빈스와 비어는 그들이 스스로 실망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즉 "단기적으로 혜택을 얻는 대신 장기적으로 비용을 치르는"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기만은 나중에라도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장밋빛 렌즈의 힘에는 한계가 수반된다. 그리고 그 힘이 떨어지면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받아들여야 한다.(147-148p)

 

 

쉽게 말해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다. (...) 거창한 자기상을 확인받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비판당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며 자기를 비판한 사람을 사납게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151p)

 

 

내가 받은 전체 교육과정 가운데 이 나라가 우생학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우생학은 미국식 신여성과 포드 모델T 못지않게 미국 문화의 두드러진 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비주류가 아니었고, 당파를 가리지 않았으며, 20세기의 첫 다섯 대통령이 모두 우생학의 밝은 전망을 찬양했고, 하버드부터 스탠퍼드, 예일, 캘리포니아 버클리, 프린스턴까지 전국의 모든 명망 있는 대학들에서 우생학을 가르쳤다. 우생학 잡지, 우생학 화장품, 심지어 우생학 경진 대회도 있었다. 주 박람회의 축제 분위기 물씬 나는 흰 천막 아래서 가장 적합한 가족과 최고의 아기를 뽑는 콘테스트가 종종 열렸다. 호박의 크기와 무게를 재듯 아기들의 무게와 치수를 쟀다. 흰 피부, 둥근 두상, 가장 대칭이 잘 이뤄진 이목구비에 파란 리본이 주어졌다.

(...)

그러나 모든 미국인이 유전적 정화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자는 계획에 열성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매우 큰 목소리로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185-186p)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알려주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점이다. 사다리는 없다. 나투라 논 파싯 살툼Natura non facit saltum,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고 다윈은 과학자의 입으로 외쳤다. 우리가 보는 사다리의 충들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며, 진리보다는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다윈에게 기생충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경이였고, 비범한 적응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크건 작건, 깃털이 있건 빛을 발하건, 혹이 있건 미끈하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그어마어마한 범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생존하고 번성하는 데는 무한히 많은 방식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데이비드는 왜 그걸 보지 못한 걸까? 사다리에 대한 그의 믿음을 반증하는 증거들이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식물과 동물이 배열되는 방식에 관한 이 자의적인 믿음을 왜 그토록 보호하려 한 걸까? 그 믿음에 도전이 제기되면 왜 더욱 강하게 그 믿음을 고수하고 폭력적인 조치를 합리화하는 데 그 믿음을 사용했을까?

아마도 그 믿음이 그에게 진실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단지 페니키스 섬에서 젊은 그에게 처음으로 불꽃을 당긴 목적의식만도, 경력과 대의와 아내와 편안한 생활에 대한 보장만도 아니었다. 훨씬 더 심오한 무엇, 그것은 바다와 별들과 현기증 나는 그의 인생을 휘몰아가는, 소용돌이치는 늪을 깔끔하고 빛나는 질서로 바꾸는 방법이었다.

처음 다윈을 읽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우생학을 밀어붙일 때까지 어느 시점에서든 그 믿음을 놓아버리는 것은 다시 현기증을 불러들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방금 자신의 형을 앗아간 세상 앞에서 상실감에 가득 차 떨고 있던 어린 소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세상 앞에서, 그 세상을 전혀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겁에 질린 무력한 아이로.

(...)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그가 자연의 질서라는 비전을 그토록 단단하게 붙잡고 늘어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과 이성과 진실에 맞서면서까지 그가 그렇게 맹렬하게 그 비전을 수호한 이유를. 바로 그 때문에 그를 경멸했음에도 어느 차원에서는 나 역시 그가 갈망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갈망했다.(206-207p)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 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

이제야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을 찾아냈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226-228p)

 

 

"어류"가 견고한 진화적 범주라는 말은 실제로 완전히 헛소리라는 진실 말이다. 윤의 설명을 빌리면, 그것은 마치 "빨간 점이 있는 모든 동물"이 한 범주에 속한다는 말이거나 "시끄러운 모든 포유동물은 한 범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뭐, 원한다면 그런 범주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무의미하다. 진화적 관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헷갈리는가? 그러면 달리 설명해보자. 수천 년 동안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이 산꼭대기에서 사는 모든 생물을 진화적으로 동일한 '산어류'라는 집단에 속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상상해보자. 산에 사는 어류, 그러니까 산어류에는 산염소와 산두꺼비, 산독수리, 그리고 건강하고 수염을 기르고 위스키를 즐기는 산사람이 포함된다. 그러면 이제는 이 모든 생물이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우연히도 그 고도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비슷한 외피를 갖도록 진화해왔다고 가정해보자. 그 외피가 비늘이 아니라 격자무늬라고 해보자. 모두가 격자무늬를 갖고 있다. 격자무늬 독수리, 격자무늬두꺼비, 격자무늬 사람. 이렇게 서식지(산꼭대기)와 피부 유형(격자무늬)이 같다 보니 이들은 동일한 종류의 생물처럼 보인다. 모두 산어류인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모두 한 종류라고 착각한다.

우리가 어류에 대해 해온 일이 바로 이와 똑같다. 수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어류"라는 하나의 단어 아래 몰아넣은 것이다.

(...)

이를테면 육기어류ㅡ폐어와 실러캔스ㅡ는 우리와 상당히 가까우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진화적 사촌, 허파가 위에 꼬리가 저 아래 있는 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거대한 진화의 분계선 너머에 조기어류가 있다. 연어, 농어, 송어, 장어, 가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겉보기에는 물고기처럼 미끌미끌하고 비늘이 있어 육기어류와 쌍둥이 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

“어류”라는 범주가 이 모든 차이를 가리고 있다. 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덮어버리고, 지능을 깎아내린다. 그 범주는 가까운 사촌들을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놓음으로써 잘못된 거리 감각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상상 속 사다리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제일 윗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240-242p)

 

 

그 “질서”라는 단어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르디넴이라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베틀에 단정하게 줄지어 선 실의 가닥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단어는 사람들이 왕이나 장군 혹은 대통령의 지배 아래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은유로 확장되었다. 1700년대에 와서야 이 단어가 자연에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자연에 질서정연한 계급구조가 존재한다는 추정ㅡ인간이 지어낸 것, 겹쳐놓기, 추측ㅡ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267-268p)

 

 

 

ㅡ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中, 곰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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