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3

 

나와는 많은 부분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공감되는 부분이 상당했다. 공산당에 투표하던 노동 계급이 왜 우파 혹은 극우파에게 표를 주는 일이 발생하는지를 프랑스의 맥락에서 논한 3부가 제일 힘들고, 나머지는 사회학적인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중간중간 이해가 안 되면 적당히 넘어가도ㅡ물론 맥락을 다 알면 좋겠지만ㅡ내용에 파악에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그는 아버지가 심하게 편찮으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문병을 최대한 미루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덧붙였다. "어머니에게는 내가 아버지를 증오했기에 그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진실은 내가 그를 증오했었고 그 증오를 계속 간직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나는 폐허로 변해버린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증오했던 것은 폐허가 아니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 더욱 마음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증오의 감정에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리는 이유는 증오가 사라지고 나면 고통에 직면할 것임을 예감하기 때문이다."(32-33p)

 

 

학업에서의 도태는 마치 스스로의 선택과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 양, 많은 경우 자발적인 도태의 과정을 거친다. 학업 기간의 연장은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형편이 되는'사람들을 위한 것인데, 이들이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사람들과 결국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가능성의 장ㅡ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은 고사하고, 단순히 구상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조차ㅡ은 계급 위치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된다. 마치 각각의 사회세계가 거의 물샐틈없이 가로막혀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54-55p)

 

 

사회적 운명은 일찌감치 결정된다. 모든 것이 미리 작동된다!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판결은 이미 내려져 있다. 태어나는 순간 선고문이 우리 어깨에 낙인처럼 새겨지고, 우리가 차지할 자리도 우리에 앞선 것들, 그러니까 우리가 속한 계층과 가족의 과거에 의해 규정되고 제한된다.(57p)

 

 

실제 가족은, 법적인 가족뿐만이 아니라 생물학적 가족과도 겹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른바 '혼합'가족은 1990년대에 와서야 생겨난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이 세계에서 부부와 가족의 구조는 아주 오래전부터, 좋고 나쁨을 떠나 복잡성, 다양성, 절연, 잇단 선택, 재구성 등으로 특징지어져 왔다('동거하는'남녀, '배다른'아이들, 이혼하지 않은 채 각각 다른 여자, 다른 남자와 사는 유부남, 유부녀 등등). 외할머니와 그녀의 새 남자친구는 결혼하지 않았다.(77p)

 

 

누군가가 내게 외할머니가 레지스탕스였다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숨겨주었다고, 혹은 그저 자기가 일하던 공장의 설비를 일부러 파손했다고, 아니면 그 밖에 우리가 뽐낼 만한 또 다른 무언가를 알려주었더라면 물론 더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영예로운 가족을 꿈꾼다. 그 영예의 이름이야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뿐이다.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역사와 맺는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87p)

 

 

수프를 준비하면서 사용하고 있던 전기 믹서기 손잡이를 아버지에게 던진 것이다.

(...)

어머니의 관점에서 그것은 그녀가 결코 "호락호락 끌려다니는"스타일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이러한 분위기를 매일매일 살아내는 것은 힘겹고 고통스러웠다. 아니,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부부 전쟁의 풍토, 반복되는 말싸움 장면, 고함, 아이들을 증인으로 삼는 이 두 사람의 광란은 아마도 주변 환경과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내 의지를 굳히는 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91p)

 

 

"난 어머니의 사랑과 그 부당성을 확신했다. 그녀는 내가 플라톤 강의를 들으러 대강당에 앉아 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감자와 우유를 손님들에게 내놓았다." 오늘날 어머니를 볼 때면, 나는 사회적 불평등이 구체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무슨 의미를 띠는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는 거의 15년 동안 이어온 고된 작업에서 비롯된 고통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하신다. 그녀는 오전 오후 각각 10분씩 화장실에 가기 위한 교대시간 말고는, 계속 조립 라인 앞에 서서 유리병에 뚜껑을 끼워야 했다. 내겐 '불평등'이라는 말조차, 착취라는 적나라한 폭력의 실상을 현실감 없게 만드는 완곡어법처럼 비친다.

(...)

솔직히 말하자면, 이 시절 공장의 세계를 지배하는 무자비한 노동 강도는 추상적인 방식이 아니라면,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문화와 문학, 철학의 발견에 너무나 매료되어 있었던 나머지, 내가 그것들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 조건들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내가 꿈꾸던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혹은 반 친구들 몇몇의 부모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녀의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닌 그냥 부모일 뿐이라는 것을 많이 원망했다.(95-97p)

 

 

나는 이 시절의 이미지들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가? 그것들은 듬성듬성하고 흐릿하며 불확실하다. 내 머릿속을 끈질기게 괴롭힌느 정확한 하나의 이미지만 제외하면. 아버지가 2~3일 동안 사라졌다가 술에 취해 거의 실신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발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서, 기름병, 우유병, 포도주병 등 병이란 병은 다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씩 쥐고서 반대편 벽을 향해 던져 깨뜨리기 시작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돼서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왜 장례식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들과 함께 이 장면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어머니는 깜짝 놀란 듯했다. "너 그걸 기억하니? 너 아주 어렸을 때였는데." 그렇다. 기억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원초경'과 관련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처럼,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106-107p)

 

 

그보다는 내가 사회적인 거울 단계라고 일컫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자기에 대한 의식, 그리고 일정한 유형의 행동과 실천이 펼쳐지는 환경에 대한 소속 의식이 확보된다. 하나의 자리와 정체성을 지정하는 계급의 사회학적 상황을 발견함으로써 일어나는 사회적인ㅡ심리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ㅡ호명의 장면. 우리가 되어야 하는 타자에 의해 되비쳐진 이미지를 매개로 한, 우리의 현재 모습과 미래 모습에 대한 자기 인지··· 내게 예정된 미래를 거역하려는 완고하고 집요한 의지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적 출신의 흔적이 내 정신 속에 영원히 새겨져 있었다. 장차 나라는 존재가 겪을 어떤 전환도, 어떤 문화적 학습도, 어떤 가면이나 책략도 지워내지 못할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라"는 주문.(108-109p)

 

 

"사회학 교육을 받기 전에 내가 어떠한 '계급의식'을 갖고 있었는지 떠올려보려고 해도, 나는 거기에 어렴풋하게만 다다를 수 있을 뿐이다. 시간적인 간격 때문에 대상이 명료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근대 사회의 개개 구성원이 전체 사회에 내재하는, 계급이라는 이름의 명확히 규정된 집단에 소속 의식을 가진다는 사실은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계층화된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객관적 현실이지만, 자의식을 가진 계급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내가 보기에는 계급 소속감의 부재가 부르주아의 유년기를 특징짓는다는 점이야말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지배자들은 그들이 특정한 세계 안에 위치지어져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한다(이는 백인이나 이성애자가 스스로 백인이나 이성애자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러한 언급은 있는 그 자체 명백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기술하고 있을 뿐이면서 사회학을 하고 있다고 믿는 어떤 특권층 인사가 내놓는 순진한 고백인 것이다.(112-113p)

 

 

우리 가족의 사회적 동질성에서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

그 중 세무서에 취직한 사촌 여동생이라든가 비서로 일하는 제수씨 등이 사회적 상승을 체현한 인물이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어린 시절 겪었던 과거의 비참한 생활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었다. "얘네들은 불행하지 않지" "얘는 잘 벌어." 어머니는 내가 가리킨 사람들의 작업을 알려준 뒤에, 확실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사회 공간 안에서 우리는 동일한 위치로 되돌아간다. 가족집단 전체의 상황과 계급 구조 내에서의 상대적 위치는 조금도 이동하지 않았다.

(...)

예술에 대한 취향은 학습되는 것이다. 나는 배워서 얻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세계, 다른 계급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내 출신 계급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수행해야 했던, 나 자신에 대한 거의 완전한 재교육의 일부였다. 예술적·문학적 대상에 대한 흥미는 언제나,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이에 접근 기회가 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차별화하고, 자기-구성적인 간격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구별짓기'를 함으로써, 타인들ㅡ'열등한''교양 없는'계급ㅡ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스스로를 가치 있게 정의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나중에 나는 '교양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전시회나 음악회, 오페라 공연에 참석하게 되었을 때, 가장 '고상한'문화적 실천에 열심인 사람들이 이러한 활동으로부터 자신에 대해 엄청난 만족감과 우월감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수없이 자주 확인했다. 그러한 사실은 그들의 입을 결코 떠나지 않는 사려 깊은 미소와 몸가짐, 전문가로서 말하고 여유로움을 드러내는 방식 속에서 그대로 읽혔다. 이 모든 것은 '세련된'예술의 향유를 뽐낼 수 있는 특권적인 세계에 속해 있다는 데서, 또 그 세계의 기대에 부응하는 데서 비롯하는 사회적 기쁨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119-121p)

 

 

이후 나는 이런 질문들에 직면했다. 만일 내가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그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더라면? 그들이 책 읽기에 흥미를 갖도록 해주었더라면? 공부의 당위성, 책에 대한 애정, 독서 욕구는 보편적으로 분포된 성향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개인이 속한 환경과 사회적 조건들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성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사회적 조건들이, 나와 같은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일종의 기적이 나를 추동하는 쪽을 향해 가는 것을 거부하고 포기하도록 부추긴다. 나는 그런 그런 기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자각을 가져야 했을까? 우리 가운데 한 명이 이미 그것을 성취했으니, 그 한 명ㅡ바로 나!ㅡ이 그를 뒤따르는 이들에게 그가 배운 것, 배우려는 욕망을 전수해주는 일도 개연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가족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려면 적지 않은 인내와 시간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교육 제도에서의 탈락에 내재하는 무자비한 논리를 저지하는 데 그것으로 충분했을까? 사회적 재생산 메커니즘에 맞서 싸우는 일이 우리에게 허용되었을까? 그 메커니즘의 효능이 대부분 계급 하비투스의 관성에 기초해 있는데도? 나는 어떤 면에서도 동생들의 '보호자'가 아니었고, 그 이후로ㅡ때늦은 일이긴 하지만ㅡ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는 어려웠다.(132-133p)

 

 

어쨌든 우리는 투표가 대개 우리가 표를 주는 정당이나 후보자의 담론 혹은 프로그램에 대한 부분적이거나 삐딱한 지지에 지나지 않는다ㅡ그리고 이는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다ㅡ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어머니가 낙태한 적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나는, 르펜에 투표함으로써 그녀가 낙태의 권리에 결사반대하는 정당을 지지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대답했다. "아! 그건 아무 관계없어. 내가 르펜에 투표한 건 그래서가 아니야." 이 경우에 우리가지지 결정에 고려하고 영향을 끼친 요인들과 의식적으로 한쪽에 제쳐둔 요인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핵심은 개인적으로 혹은 집합적으로, 비록 불완전하거나 불충분할지언정, 우리가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지받고 대표된다는 것을 알거나 그렇게 믿는 감정에 있을 것이다. 선거에서의 이러한 몸짓과 단호한 행동을 통해, 정치적 삶에서 존재감과 중요성을 인정받는다는 감정 말이다.(157-158p)

 

 

학교에서 "모종의 문화적 특징들"을 발견하고 불편하게 여겼던 베아른 시골 마을의 소년이, 파리 제일의 엘리트 그랑제콜 입시 준비반에 들어가고 윌므 가의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러한 변환은 왜, 어떻게 일어났을까?(183p)

 

 

우정도 역사라는 중력을 벗어나지 않는다. 두 친구는 공존을 시도하는 두 개의 체화된 사회적 역사이다. 얼마나 친밀하든 간에, 관계가 진행되는 동안 하비투스의 관성 효과에 의해 두 계급이 맞부딪힌다. 태도나 발언은 엄밀한 의미에서 공격적이거나 의도적으로 무례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본의 아니게 상대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르주아나 평범한 중산층 정도의 환경에서 지내다보면, 우리도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일 것이라는 추정에 맞부딪힌다. 이느느 이성애자가 자기와 대화하는 상대가, 자신이 조롱하고 비방하는 낙인찍힌 종에 속할 수도 있다는 상상은 해보지도 않고 동성애자에 관해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교분을 나누는 사람에게, 마치 그 역시 예전부터 자신과 동일한 실존적·문화적 경험을 해왔다는 듯이 말한다. 그들은 바로 그렇게 전제함으로써 상대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195-196p)

 

 

그랑제콜 입시 준비반이라든가 고등사범학교 선발시험을 치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입시 준비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 최종반일 때도 그러한 준비반의 존재조차 몰랐다. 과거나 현재나, 그리고 아마도 미래에는 한층 더 그렇게 될 텐데, 이러한 기관들에 들어갈 가능성은 (나아가 그러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한 단순한 지식조차) 민중 계급 출신이 아닌 학생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주어져 있다. 따라서 내게는 질문의 여지조차 없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에도 대입자격시험에 붙은 뒤에도 [그랑제콜 입시 준비반에 들어가] 고등학교의 틀 안에서 계속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상해 보였고, 그들에 대해 우월감까지 느꼈다ㅡ얼마나 순진했던가! 내 눈에는 '대학에 가는 것'만이 모든 학생이 마땅히 열망해야 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교육의 위계서열 구조에 무지하고 선발 메커니즘에 숙달되어 있지 못한 학생은 가장 역효과를 내는 선택, 가장 나쁜 결과가 예정된 경로를 고르도록 이끌린다. 미리 알고 있는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피해 가는 것에 다가가는 스스로에 감탄하면서 말이다. 빈곤층은 이전에는 배제되었던 것들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실상은 다르다. 그들이 어느 위치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 위치가 체계의 이전 단계에서 갖고 있던 위상과 가치를 상실한 뒤다. 유배는 더 느리게 이루어지고 배제는 더 나중에 일어나겠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격차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자리를 옮겨가며 재생산된다. 부르디외는 이를 "구조의 평행이동"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것, 그 변화의 외양 바깥에서, 경직된 구조는 전과 다름없이 유지, 영속되며 평행이동을 한다.(203-204p)

 

 

나는 어떤 유형의 철학적 사유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것은 내 사회적 위치에 의해 추동된 결과였다. 내가 파리의 대학생이었더라면, 혹은 이론과 사유의 새로운 노선들이 정교화되는ㅡ또 높이 평가받는ㅡ중심 가까이에 있었더라면, 내 선택은 사르트르가 아닌 알튀세르, 푸코 또는 데리다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르트르를 경멸적으로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중에 알게 된 파리 지식사회의 규칙대로 말이다.(211p)

 

 

모욕은 과거로부터 나온 인용이다. 그것은 이전에 수많은 발화자에 의해 반복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의미를 지닌다. 장 주네의 시구가 잘 표현하고 있듯, 그것은 “시대 깊숙이에서 온, 현기증 나는 단어"이다. 그런데 모욕어는 또 그것이 겨냥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를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말들과 거기 담겨 있는 폭력이 그들이 살아가는 내내 따라붙을 것이라는 끔찍한 예감. 게이가 된다는 것은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전에, 즉 그러한 의식을 갖기도 전에, 그동안 숱하게 들어왔고 오래전부터 그 모욕적인 힘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는 그 어휘를 통해 스스로가 이미 잠재적인 표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에 앞서, 낙인찍힌 정체성이 있다. 우리는 그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 신체를 부여하며, 그것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 그것과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는 방식은 다양할 테지만, 거기엔 하나같이 모욕하기의 구성적인 힘이라는 인장이 새겨져 있다. 사르트르는 주네에 관한 수수께끼 같은 경구에서 동성애는 누군가가 질식하지 않기 위해 창안한 출구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보다 동성애는 누군가가 질식하지 않기 위해 출구를 발견하도록 강제한다. 나는 내 사회적 환경과 나 사이에 만들어진ㅡ내가 애써 정초한ㅡ거리,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나의 자기-창조가 모두 내가 되어가고 있던 존재[즉 동성애자]를 맞이하기 위해 창아한 하나의 방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을 주변 사람들과 다르게 발명하지 않고서는 내가 되어가고 있던 존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226-227p)

 

 

'규범'에 편입되지 않은 이들에게는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가가 문제가 된다. 마찬가지로 이 시공간에 의해 부분적으로 그 존재를 규정당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 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게이나 퀴어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차라리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 하나의 시간성에서 또 다른 시간성으로 (비정상의 세계에서 정상의 세계로, 또 그 반대로) 계속해서 옮겨갈 수 있는 능력ㅡ혹은 그래야 할 필요성ㅡ일 터이다.(244-245p)

 

 

절대적인 '전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방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언가를 전복한다고 해도 그것은 특정한 시점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는 살짝 이동하고 옆으로 한 보 옮겨 편차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푸코식 용어로 말해, 불가능한 '해방'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 기껏해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제도화되어 우리 존재에 속박을 가하는 몇몇 경계를 돌파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주네에 관한 책에 나오는 다음 문장이 내겐 핵심으로 다가왔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가지고서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금세 내 존재의 원칙을 구성했다. 자기에 대한 자기의 작업으로서 수행의 원칙.

그런데 이 문장은 내 삶에서 이중적 의미를 띠었으며, 성적인 영역과 사회적인 영역에서 서로 모순된 방식으로 적용되었다. 즉 성적 영역에서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모욕당한 성적인 존재로서 자기 주장을 했다면, 사회적 영역에서는 나 자신의 계급적 출신 조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내 본래 모습대로 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되어야 했을 모습을 거부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작동했다.(258-259p)

 

 

 

ㅡ 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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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1

 

두 권 중 한 권만 읽을 거면 '커리어 그리고 가정'에 한 표.

 

 

특히 호주 연방 의회의 성폭력 스캔들이 터져 나온 때와 집필 시기가 겹치며 나의 격분과 화는 절정에 치달았다. 여성 보좌관에 대한 강간으로 추정되는 스캔들이 의회 한가운데에서 터졌고, 피해자는 혐의를 일체 부인하는 장관을 전례 없이 고발했지만 이후 자살했다.(13p)

 

남성 종특인가. 세계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행태가 똑같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공장에서 일하는 백인 남성을 대체하며 블루칼라로서 전후 노동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앞서가게 된 것은 여성이 아니라 흑인 남성이었다.

(...)

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처럼 미국의 공공 정책은 여성보다 남성, 특히 퇴역 군인의 이익에 집중됐다. 실업 회계의 역사적 기록이 보여 주듯 이런 공적 노력은 차별적인 임금 조건에도 보람 없는 구직을 이어 나간 여성의 의지를 거스른 일이었다.

하지만 여성의 상황은 다른 수단을 통해 진화했으며, 여성 노동에 관한 사회적 관습과 규범이 지속적으로 영향 받았다. 여성 노동자의 아들은 전쟁 동안 여성이 공장에 나갔을 때도 바깥 세상과 가정이 여성의 가사 노동 덕에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를 당연시했다. 하지만 문화적 변화는 시작되었고, 이 책에서 수업이 확인하듯 여성 진보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이 문화적 변화다. 전시에 엄마가 공장에서 일했던 미국 남성은 여성 노동에 더 우호적이며 아내가 노동하는 것에 더 개방적이다. 게다가 일하는 여성과 결혼할 가능성이 더 크다.(37p)

 

 

피임약이 섹스의 가격을 상당히 낮추면서 약을 먹는 여성들이 결혼 내 협상력은 줄어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를 설명하기 전에 내가, 그러니까 사회 과학 연구자들이 섹스의 가격이라는 표현으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설명해 보겠다.

여기서 엄밀한 의미의 성매매를 대상으로 하는 제한된 시장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관념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교환되고, 모든 것은 시장이며, 이 모든 것에 수요와 공급이 존재한다. 분명 환원주의적인 시각이지만 이런 관점을 탈규제 시장에 동조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봐서는 안 된다. 환원주의적 시각은 몇몇 특정한 동역학을 더 정확히 이해하는 것만을 위한 단순화일 뿐이다.

시장을 적절히 규제하려면 서로 다른 재화를 대상으로 한 각 시장의 경계를 인식해야 한다. 모든 것이 시장이고 모든 것에 수요와 공급이 존재한다는 단순화 속에서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모든 성관계는 시장 교환의 대상으로 개념화된다. 여기에 특히 중요한 것은 동의 여부다. 성폭력과 섹스 시장의 관계는 노예제가 노동 시장과 맺는 관계와 같이 순수하게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제약적인 지배 관계라는 점에서 시장 개념에 반대된다. 성관계의 대가가 반드시 돈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나 섹스 파트너, 친구를 비롯한 타인이 내게 품는 이미지, 애정, 더 나아가서는 결혼 기회 등이 존재한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성매매의 대가가 바로 돈인 셈이다. 경제학자들은 섹스 시장을 남성의 수요가 여성의 공급보다 높은 시장으로 모델화한다. 대부분 남성인 내 경제학과 동료들이 때로는 성차별적이지만 이런 예시와 관련해 꼭 그렇지는 않다는 점에 주의하자.

경제학자들이 섹스의 수요를 남성에, 공급을 여성에 귀속시키는 이유는 남성이 자연적으로 섹스를 더 많이 원한다거나 섹스를 선호한다거나 섹스에서 더 큰 이득을 본다고 가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학자들이 고려하는 것은 섹스를 원하는 성향이 아니라 섹스의 비용이다. 여성이 섹스에서 얻는 이득이 남성과 같다고 하자. 하지만 이 경우에도 섹스의 가격은 같지 않다. 여성에게 비용이 전가될 수밖에 없는 잠재적 임신이라는 요인이 있어서다. 잠재적 임신은 생리학적일 뿐 아니라 경제학적이기까지하다. 남성이 임신한 상대와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득은 남성과 여성이 같으나 비용은 남성이 적으므로 남성이 여성보다 섹스를 더 많이 욕망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만약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 비용은 자연히 상승한다. 여기에서 여성이 결정하는 섹스의 가격은 잠재적 임신에 대한 경제적 비용 혹은 이에 가장 가까운 것, 곧 결혼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성매매를 제외하고서 섹스에 접근하기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 남성은 여성과 결혼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구용 피임약은 피임을 일반화해 여성의 임신 위험과 여성에게 최종적으로 전가될 비용을 줄여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이뤘고, 섹스의 비용을 감소시켰다. 이로써 결혼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니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 일반화된 임신 중절 접근권이 지닌 효과 역시 같았다. 경구용 피임약이 약속하는 성 해방은 섹스를 위해 남성이 지불하는 가격을 낮춘 동시에 결혼 자체가 크게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일반적으로 미혼 여성이 더 많이 일하므로 이러한 추세는 자동적으로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를 증가시켰다. 피임약이라는 기술은 다른 모든 여성의 섹스 공급을 늘려서 결혼 관계 내에서 여성의 협상력 또한 감소시켰고, 여성의 노동 공급에 추가적인 긍정적 효과를 이끌어 냈다.(48-51p)

 

 

프랑스는 유럽의 이웃 국가에 훨씬 앞서 1946년 이미 '여성 임금'이라는 통념을 폐지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임금을 더 적게 받는 것은 법적으로 정당했다. 고용주들은 여성 임금을 후려치는 조항이 폐지된 것에 손쉬운 노동과 고된 노동을 구분하는 여러 단계를 만드는 식으로 응수했다.

(...)

이들은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요구하는 최저 임금법을 우회하고자 온갖 종류의 수당을 만들고 필요 숙련도를 설정하는 등 고용과 관련된 변별적인 범주와 단계를 고안하기 시작했다.(54p)

 

 

여러 연구는 이 해방의 기계들과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 증가를 연결 짓는다. 몇몇 연구는 심지어 해방의 기계들이 베이비 붐을 촉발했다고 보기도 한다. 여성의 시간이 해방되면서 이들이 더 많이 일할 뿐 아니라 더 많은 자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이러한 상관관계가 오류일 가능성을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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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최근에 내 동료 세라 워커와 고탐 보즈, 테런 제인은 여성 노동과 가전제품 채택 사이의 인과성이 실은 반대로 향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노동과 소득 덕분에 이런 기계를 살 수 있었지 그 역이 아니다. 가전제품이 늘린 시간상 이득도 생각만큼 놀랍지 않았다. 기계 사용은 여성을 해방했다기보다는 가사 노동을 둘러싼 상황과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기준을 바꿔 놓았다. 청결한 의복과 신선한 음식을 향한 사회적 기대치가 커지면서 기계가 여성에게 주었을 혜택의 상당 부분이 제거되었다.(56-58p)

 

 

미국 미시간 대학 법학 전공 학위가 있는 여성 변호사와 남성 변호사는 동일한 임금 수준에서 시작해 곧 자녀를 가질 나이가 된다. 여성 변호사는 장기 프로젝트를 거절하고 미국에서 특히 더 짧은 육아 휴직을 써 탁아소에서나 유모에게서 자녀를 데려온다. 이 모든 상황 때문에 야근을 할 수 없다. 여성은 자녀를 돌보려 일정 기간 일을 쉬고 또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자녀가 있는 여성의 42%가 그러한 반면 동일 표본에서 남성은 어떨까? 고작 0.68%가 그렇다. 또한 이들은 변호사로서의 삶과 엄마로서의 삶을 양립할 수 있는 환경을 지닌 팀에 합류하려 회사를 옮긴다. 이렇게 15년이 지나면 같은 시기 경력을 시작한 남성 동료보다 50% 더 적은 돈을 벌게 된다. 여성은 더욱이 경력을 유지하는 데 드는 개인적 비용이 더 크다. 이 연구에서 여성 중 70%가 결혼하고 남성 중 85%가 결혼한 것처럼 여성은 남성보다 덜 결혼하고, 자녀가 더 적고, 자녀가 없을 확률이 남성의 두 배다. 여성은 자녀가 평균 1.31명, 남성은 1.86명이었고 여성의 36%가 자녀가 없는 데 반해 남성은 19%가 그러했다. 자녀가 없는 여성 변호사의 보수 수준은 남성 변호사의 일반적인 보수 수준과 일치했다. 자녀는 여성에게만 경력상 비용으로 작용한다.

이렇듯 1980년대에 여성은 직업 영역에서 진보했지만 보수가 가장 좋은 직업에서는 꾸준히 배제되었다. 최소한 엄마인 여성은 그랬다.

(...)

여성의 진보는 항상 자녀의 유무와 연결되어 있다. 아이가 있는 노동자에게 경력 단절, 일정이 유연한 일터 찾기, 노동 시간 단축, 파트타임 노동은 불가피하다. 불행히도 이 모든 책임은 불균등한 방식으로 엄마에게 전가된다. 앞서 살핀 변호사 표본에서 엄마가 파트타임으로 일할 가능성은 아빠보다 62배 더 높았다.(63-64p)

 

 

그렇다면 오늘날 여성-남성 불평등 설명에서 '전통적인' 요인이 차지하는 몫은 매우 적다고 볼 수 있다.

(...)

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른 영역에 고용되었고 지금도 변함 없이 그렇다. 경제 영역의 상당수는 초등 교육처럼 여성화되었다. 여성은 법관, 의사, 고등 교육자, 연구자가 되었고 정치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두 요인이 여남 소득 평등화에 제동을 걸었다. 첫째, 여성은 특정 영역에서 다수 혹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지만 여전히 위계질서상 유리 천장 아래 직급을 차지하고 있다. 의회에는 입성했지만 대통령 집무실까지 진입하지는 못한 것이다.

(...)

유리 천장은 거의 완전히 여성화된 직업군에조차 존재한다. 학교 교사의 82%가 여성임에도 교육 감독관에서 그 비율은 20.5%에 불과하다.

둘째, 여남 소득 격차는 여성화된 직능이 종종 본래 갖고 있던 명예와 보상을 상실하면서 유지되었다. 지난 몇십 년간 언론인 직군에서 일어난 변화가 대표적이다.(79-80p)

 

 

2013년 출간된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의 저서 「린 인」에서 그는 여성이 책임을 지는 직책을 맡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며 성공과 야망을 여성적 자질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지적했다. 내가 보기에 그 추론은 심각하게 제한적이고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 특히 「99%를 위한 페미니즘」의 저자들은 이 같은 주장이 여성이 가장 큰 책임을 지는 직책을 맡으면 여성-남성 불평등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경제 체제에서 낮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99%의 다른 여성의 존재를 무시할뿐더러 데이터에 의해 완전히 반박된다. 일반적으로 직업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서는 여성은 임금 사다리의 아래에 있는 여성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거나 그들을 위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

그의 생각은 부당하거니와 순진할 따름인데, 여성적 또는 남성적이라 간주되는 특성은 부분적으로 사회적 구성물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항상 결정된 방식으로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회적 구성물은 굳어진 것이 아니다.(82p)

 

 

또 허위 이력서에 기반한 연구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을 보이지 않지만 엄마에 대한 차별이 있다는 점은 분명히 드러낸다. 다른 어떤 실험은 고용주들에게 모든 점에서 비교 가능하며 부모인지 아닌지 여부가 포함된 여남 지원자의 허위 이력서를 보냈다. 그 결과 여성이 엄마인 것은 고용 전망뿐 아니라 임금 측면에서도 상당한 불이익을 주었고, 그와 달리 남성이 아빠인 것은 이득이었다! 엄마들은 이력이 같음에도 덜 유능하고 업무에 덜 헌신적이라 인식되었으며 더 낮은 임금을 제안받았다. 반면 업무에 더 헌신적이라 판단된 아빠들은 더 높은 임금을 제안받았다. 아빠는 영웅으로 인식된 것이다.

나 또한 임신했을 때 학생들로부터 완전히 바닥인 강의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나 자신은 처음이 아닌 그 강의의 질이 특별히 나빴다고 인지하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반면 육아 휴직을 치고 복귀했을 때는 밤에 잘 잠들지 못하는 딸을 돌보느라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로 저녁 수업을 해야 했지만 평가는 평소 거의 다름없이 좋았다. 이러한 차이는 임신해 불룩해진 배가 생산한 효과다.(90p)

 

 

앞으로 사회적 규범과 그 규범에 따른 유형화, 가정 및 교육 환경이 이 문제에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강하고 용감하고 경쟁적인 남자아이, 수줍고 얌전한 여자아이라는 구분은 클리셰에 불과하다. 이는 결국 스테레오 타입을 만드는 유형화이며, 고정관념이 만든 예언이 실현되게끔 한다. 여자아이는 부드럽고 수줍음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녀를 경쟁적인 환경에 밀어 넣지 않는다. 이들은 소녀를 가여워하고 그들의 아픔을 달래 주지만 남자아이에게는 울지 말고 일어나라고 말한다.

(...)

학력이 같을 때 임금이나 전일제 일자리에 대한 접근권에서 나타나는 불평등 등을 보면 말이다. 우리는 이런 측면을 설명하고자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일자리가 더 많고 보상이 더 큰 이공계에 진학하는 경향이 더 짙다는 점을 관찰했다. 남학생들은 프랑스의 HEC나 미국과 중국의 엘리트 대학 입시처럼 빛나는 커리어를 약속하며 학생을 선발하는 시험에서 더 성공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시험의 본성은 여학생에게 불이익을 주며 고소득층에서 여남 불평등을 재생산한다.(104-105p)

 

 

자녀 출산과 관련한 소득 불이익은 엄마의 역할과 노동에 관한 사회적 규범 및 기대에 따라 각 국가에서 달라진다. 더욱이 한 국가에서도 이 불이익은 여성이 가정을 지탱해야 하고 자녀가 태어나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도식에 가족들이 순응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며, 이러한 가족 내에서 세대를 거쳐 전승된다.(114p)

 

 

애초에 여성이 다수였지만 기술 발달로 보수 수준이 높아지면서 남성적으로 변한 영역도 있다. 사람들은 정보공학이 바로 그런 사례라는 것을 잘 모른다. 오늘날 남성 지배적인 직업의 본보기인 정보공학은 원래 여성이 많은 직군이었다. 1940년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개발한 초창기 컴퓨터 중 한 대는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팀이 만들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활용한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해 낸 연합군 통신 센터 블레츨리 파크의 직원 1만 명 중 3분의 2는 여성이었다. 1967년 《코즈모폴리턴》에 실린 기사 「컴퓨터 소녀들」은 정보공학이 전형적으로 여성적인 자질을 요구한다고 설명했다. 프로그래밍과 코딩은 정확히 다음과 같은 일로 묘사되었다. "저녁 식사 준비하기 : 미리 생각하고, 무언가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계획해두어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세부 사항에 주의해야 한다. 프로그래밍은 여성에게 본성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심지어 여성은 이 직군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다. 자료 처리와 관리 분야 최초의 직능 단체가 1969년 처음으로 수여한 '올해의 남성'(!)상을 받은 사람은 여성인 그레이스 호퍼였다.

1940년대에 여성은 최초의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이를 쉬운 일로 여겼다. 노동, 그러니까 컴퓨터를 만드는 '진짜' 노동은 남성의 일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래밍과 코딩이 사소한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고 프로그래밍이 권위를 얻게 되면서, 프로그래밍에 요구되는 자질이 저녁 식사 준비에 필요한 것보다 천재적인 특성에 가깝다고 간주되면서 남성이 이 영역에서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됐고 여성은 사라졌다. 비율로 보자면 오늘날 정보공학을 공부하는 여성은 40년 전보다 더 적다!" 이제 집단적 상상계와 대중문화, 영상에서 컴퓨터 괴짜는 오로지 남성으로 표현된다. 그 결과 이 분야에 요구되는 자질은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정보공학 분야의 천재는 약간의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자신의 감정과 거리를 두고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항상 남자인 논리적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유복한 환경의 백인이기도 하다.

서로 연결된 두 물병 속 물이 '남성' 직업과 '여성' 직업 사이에서 움직일 때마다 그 직업의 사회적 이미지는 달라진다. 따라서 여성이 특정 직군에 진출하기 시작하면 시소 효과가 관찰된다. 어떤 산업에서 여성 참여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그 산업이 빠르게 여성화하는 것이다. 클로디아 골딘은 남성의 이러한 집단 탈출을 오염으로 인한 분리 이론으로 설명한다. 여성적 자질과 결부된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려하면 어떤 직능의 사회적 이미지는 여성이란 존재 때문에 손상되고 오염된다.

요약하자면 여성이 어떤 직능을 수행할 수 있으면 이는 그 일이 어렵지 않고 높은 신체적·지적 자질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 프로그래밍은 저녁 식사를 계획하는 것 정도의 숙련이 필요한 쉬운 일로 취급되었으나 이제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천재로 불린다. 초등학교 교사는 존경받고 보수가 좋은 엘리트 직종이었지만 지금은 존경도 못 받고 보수도 적다. 만약 어떤 직능이 여성이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고 많은 자질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을 왜 굳이 존중하겠는가?

여성이 어떤 직능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이 일의 사회적 이미지는 변한다. 이러한 변화로 이 직능에 속한 남성이 품는 자기 이미지가 손상될 수도 있다.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 남자는 남성의 일을 하는 쪽이 편할 것이다. 모두 각자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 이유로 이들은 여성의 일을 맡길 거부한다. 이 해석은 성차별적인 사회일수록 여성화하는 직종에서 남성의 이탈이 더 빨리, 아마 여성이 맨 처음 진입하는 때부터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이다.

자신이 속한 직군에서 자기 이미지와 관련된 이득을 보는 여성에게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여자들이 더 여성적인 직군에서 여성을 채용하길 선호한다는 점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짚자면 이는 정확히 앞서 살펴본 채용에 관한 성차별 데이터와 그러한 차별의 동역학이 보여 주는 바다.(119-121p)

 

 

사람들은 자기 어필을 열심히 하고 나흘에 한 번씩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경쟁적이고 야심 있는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여성은 '섹시'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경쟁적이고 야심 있고 잘 뽐내는 남성은 가치를 인정받고 섹시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말이다.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진행한 스피드 데이트 실험은 이 점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남성은 자기보다 더 야심차거나 똑똑한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런 상대의 연락처를 묻지 않는다. 또 일터에서 협상을 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체계적으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게 된다.

여성들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친애하는 셰릴 샌드버그 여사님, 여자들은 미치지 않아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반드시 경쟁심이나 야심이 덜한 것이 아니다. 여성은 야망을 드러내면, 자기 자신을 뽐내면, 경쟁에서 이기면 남들에게 안 좋은 시선을 받고 부정적인 결과를 겪게 되리라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을 뿐이다. 여러 영역에서 나타날 부정적 결과들을 말이다.(141-142p)

 

 

'진보'는 농업의 등장과 정주화, 더 나아가 농업의 기술적 집약화와 쟁기 발명으로 여성을 급격히 퇴보시켰다. 여성은 가정에 유폐되었고 자율성과 경제적 독립을 잃었다. 생산의 성별 전문화는 수렵과 채집에서보다 농업에서 훨씬 두드러지며, 이러한 경향은 쟁기와 같은 기술이 남성 노동 생산량을 특권화하거나 증가시키면서 더 강해진다. 이에 따라 남성은 밭에서의 노동을, 여성은 가사와 자녀 돌봄을 할당받는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농업 도입을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로 꼽는다. 농업은 경제적 부정의, 정치적 계층화와 전제 정치, 전염병 그리고 여성과 남성 사이 불평등의 악화를 의미했다.

(...)

농업의 집약화 이전에 잉여를 생산하고 비축하지 못한 무능력은 그 사회의 평등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음식 생산에서 여성의 지배적 역할은 이들에게 사회적 지위는 물론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해 주었다. 하지만 축적과 함께 불평등이 나타났다. 더욱이 농업의 집약화와 노동 생산성 증가는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했고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키웠는데, 노동력은 여성만 만들 수 있다. 이 때문에 여성은 노동력을 생산하는 역할로 길들여지고 강등되었으며 심지어 이런 역할에 전문화되기도 했다. 남성은 재산을 생산하고 소유하며, 여성은 자녀를 재생산한다. 농업의 발명이 인류의 비극적인 실수라면 여성에게는 훨씬 심각한 잘못이었다.

또 이 현상은 수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매우 긴 시간에 걸쳐 우리의 습관이 형성되었고, 이를 통해 문화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오늘날까지 그 결과를 경험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농업에 기초하지 않은 산업 사회에서조차 말이다.(168-169p)

 

 

 

ㅡ 폴린 그로장, <가부장 자본주의>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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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1

 

 

초반부 읽으면서 제목이랑 내용이 너무 안 어울려서 원제를 찾아보니 uncivilised. 그렇다면 책 내용이 이렇게 전개되는 게 이해가 간다. 다만 지금까지 서양 문명이 사람들에게 전달했던 것 중 많은 부분이 거짓이며, 사실은 이런거라고 호들갑을 떨려면 뭔가 대단한 주장을 해야 할 거 아닌가. 프로이트 보고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하질 않나, 심리학계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지도 않는 매슬로 욕구위계설이 대단한 뭔가고 그것에 너희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고 얘기하는 걸 읽으며 짜게 식는다. 아는 얘기만 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본인이 알고 있는 사실을 과장하지 말고 담백하게 적어 보는 건 어떨지? 근래에 읽은 책 중에 눈에 띄게 별로다.

 

 

 

 

합리적 사고, 인류의 진보, 법 앞의 자유와 평등. 사랑하지 않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런 전제들(전제인 동시에 약속이다)은 우리 사회의 핵심이요, 우리를 제자리에 묶어두고 붙들어두는 맹세이자, 우리를 통치하는 법이다. 그렇지만 잠시 생각을 해보자. 이 신념들이 사실인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런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이는 누구일까? 이런 얘기는 진짜일까? 믿을 수 있는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문명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들이 사실은 거짓말이라면, 이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를 이해하려면, 이런 이상 너머에서 서양 문명을 유지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실마리는 '서양'이라는 말 속에, 그리고 서양과 비서양이 구분은 단 한 번도 순수하게 지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 속에 있다. 유럽의 작은 왕국에서, 북아메리카의 탁 트인 평원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를 지나, 전 세계 소수 민족 거주지까지, 서양 문명의 심장부 곳곳을 살펴본다면, 이 모두가 지닌 단 하나의 공통점은 자명하다. 서양이란 바로 백인이 있는 곳이다.

서양 문명이 의미를 띠게 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서양 문명과 연관 짓는 관행과 가치들(몇 가지만 언급해보자면, 민주주의, 정의, 과학의 합리성 등이다)은 점점 커져가는 유럽 제국의 야망과 권력에 발맞춰 나타났다. 어디가, 또 무엇이 문명화되었는가를 결정한 것은 바로 식민지 통치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자신들만의 프레임 속에서 문명을 규정했다. 그리하여 유럽 바깥에, 그러니까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정착형 식민지, 사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서구인 이곳들은 현재 서양의 문명 세계를 이루는 곳들이라 여겨지고 있다.

(...)

서양이 자칭 우세를 점하게 되면서,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은 지적으로 뒤처진 곳으로 강등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문명이라는 커다란 '거짓말'이었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후진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후진적인 사람들이며, 인류와 인류의 진보에 제대로 공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거짓말'이었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비서구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비서구적이라 여겨지고 따라서 비문명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줄곧 여기 존재해왔다.(14-15p)

 

 

무엇이 문명화된 것이고 무엇이 미개한 것인지를 나누고 규정하는 프레임은 권력 게임의 승자가 결정한다.

(...)

문명화된 서구와 비문명적인 '타자'사이에 그어진 선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겠다고 결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보는지를 얘기한다. 또,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아주 특수한 시각에서 제외된 사람들에 관한 책이며, 그렇게 제외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포함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지를 담은 책이다.(18p)

 

 

1735년, '분류학의 아버지'라 알려진 스웨덴의 생물학자 칼 린나이우스(칼 린네)는 중요한 저작인 「자연의 체계」를 발표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을 'Anthropomorpha'(인간 형상)라는 용어로 묶어 분류했으며, 인간을 다시 네 집단으로 나눴다. 바로 유럽인, 아메리카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이었다. 린나이우스의 분류는 외양을 문화와 행동과 연관지었다. 예를 들어, 유럽인은 "예민하고, 창의적이고, 법에 따라 행동한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아프리카인은 "교활하고, 나태하고, 느긋하며, 변덕스럽게 행동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백인 우월주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유럽 사상의 선구적인 지성이라고 일컬어지던 사람의 책이 백인 우월주의를 지지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칼 린나이우스 한 사람만의 일은 아니었다.(35p)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누가 썼는가라는 흥미로운 사안을 제기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느 정도는 그가 문서 기록에는 비교적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남은 공백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채워질 수가 있었다. 스스로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런 점은 글이 지닌 힘과 생각의 본성에 관해 무언가를 알려준다. 살아남는 생각, 전해지는 이야기,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해서 말이다. 현실에서는 글은 글 자체만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98-99p)

 

 

블레어는 자신이 바라본 언어와 문화의 진보를 바탕으로 역사의 발전을 세 가지 단계로 나누었다. 원시, 고대, 그리고 현대였다. 블레어의 정의에 따르면, 원시적인 사람들은 문자가 없고 구어와 몸짓 언어에만 의존했다. 이 몸짓 언어는 북아메리카 일부 토착민들이 사용하던 수어부터 지중해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폭넓은 제스처까지 광범위했다(이탈리아 사람들은 손으로 말한다는 스테레오타입은 여기까지 거슬러가는 것 같다). 블레어는 언어를 도덕성과 인지 능력과 결부시켰다. 이에 따라 중국인, 이집트인, 히브리인, 그리스인, 로마인 같은 고대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두 번째 단계에서는 문자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이는 블레어가 명시적으로 밝힌 지도 지침이라기보다는, 별다른 의문 없이 받아들여지는 암묵적인 논리에 가깝다. 자신만의 가정으로 뒷받침하는 주장인 것이다. 블레어는 세 번째 단계에 이르렀다. 현대인, 그러니까 별로 놀라울 것도 없겠지만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현대 유럽인들은 구어와 문자 모두를 발전시켰다. 그는 현대 유럽인들이 인간의 발전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언어가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질서가 뚜렷하기 때문이라며 말이다.(104-105p)

 

진짜 지 마음대로 생각하는구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른다...

 

 

이러한 명백한 모순은 오랫동안 '잉카 패러독스'라고 불렸다. 잉카가 그 어떤 것들을 기록하는 체계 없이도 건축, 공학 기술, 관료제와 같이 복잡한 필수 조건들을 모두 거느리고 문명을 건설했다는, 이해하기 힘든 인류학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실이라기에는 너무 이상한 소리처럼 들린다면, 그 이유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잉카에는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 알고 있는 문자, 그러니까 종이에 쓰인 흔적은 없었지만, 매듭을 지은 실을 사용하는 '키푸'라는 고유한 기록 시스템이 있었따. 비교적 최근까지도, 그러니까 누군가 굳이 키푸에 관해 생각 해보기 전까지는, 키푸는 일반적으로 수르르 세거나 계산할 때 쓰는 기초적인 시스템이라 여겨졌다.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설형 문자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최근 10년 동안 이뤄진 연구들은 잉카의 키푸가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 세계 여느 문자만큼이나 복합적인 기록 시스템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

재료, 색깔, 가닥의 방향, 매듭의 방향이 이루는 수없이 많은 조합 방법이 서로 다른 소리와 모든 단어를 가리킨다는 것이었다.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으로 읽는, 표음문자와 그림문자가 혼합된 알파벳이었다.

(...)

연구자들이 큰 도약을 일궈내며 키푸를 해독하는 점은 훌륭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초에 왜 우리가 키푸를 간과했는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학자들은 무언가 발견할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은 채로 키푸를 쳐다보기만 했다. 자신만의 이미지 속에서 문명을 일굴 때면, 다른 문화에 있는 흥미롭고 가치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심각하게 희생되는 것 같다.(111-115p)

 

 

 

 

ㅡ 수바드라 다스,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中, 북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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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1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프랑스인들은 그를 폐위시켰다. 그리고 나폴레옹에게 엘바라는 작은 섬을 영지로 주고는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길 바랐다. 하지만 그를 격퇴한 유럽의 제후와 황제들은 1814년 빈에서 회의를 열고 유럽을 다시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의 판단에 따르면, 계몽주의 기본 원칙, 이른바 인간의 자유라는 이념이야말로 수차례의 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을 낳은 것이고 이런 사건들로 인해 온갖 무질서와 희생이 초래된 것이었다. 이들은 모든 혁명을 완전히 무효로 만들고 싶었다. 특히 메테르니히는 모든 것을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고 다시는 혁명이 일어날 수 없게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정부나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인쇄물이나 저작물을 금하는 정책을 주도적으로 펼쳤다.

프랑스에서는 혁명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 버렸다.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이 루이 18세로 즉위했다. 이 새로운 루이왕은 26년에 걸친 혁명과 황제 시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불행한 죽음을 맞은 형과 다름없이 사치스럽고 몰지각한 궁정 생활을 했다.(353-354p)

 

 

 

 

ㅡ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 세계사> 中,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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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6

 

 

일단 이까지 정리

 

 

채굴 과정은 19세기 채굴업자들의 기술을 그대로 답습한 방식으로 간단한 편이었다. 단지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는 점만 달랐다. 땅속의 암반층을 폭파하여 작은 바위로 쪼개고, 갈아서 고운 가루로 만든 다음, 시안화물 용액과 혼합해 금을 추출했다.

이것이 21세기에 천연자원을 개발하는 현장의 현실이었다.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암석을 작게 쪼개 화학적으로 가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탄을 자아냈지만, 동시에 심란한 장면이기도 했다. 추출 과정에서 사용한 시안화물과 수은이 주변 생태계로 흘러들어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

계산해보니, 골드바 표준 중량인 400트로이온스(약 12.4킬로그램) 하나를 만들려면 5,000톤의 흙을 파내야 했다. 이는 세계 최대 여객기인 A380 10대가 만석일 때의 무게와 비슷하다.

어쩌면 당신은 금이 오늘날 이런 식으로 채굴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연에 금덩어리가 묻혀 있다거나 대자연 속 금맥에서 그대로 채금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혹자는 금이 독성 혼합물을 사용한 화학 작용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단순히 땅속에서 캐내는 것이 아니라 산 전체를 폭파하여 얻어낸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내가 순진한 편이었을지도 모르겠다.(12-13p)

 

 

연필에 쓰이는 나무는 미국 서부에서 자라는 삼나무이다. 용광로에서 만든 강철로 삼나무를 베고 작업장에서 마무리한다. 그러고는 다시 잘라서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건조하고, 염색한 뒤 또 말린다. 작은 조각에 홈을 낸 뒤 서로 이어 붙여서 고정한다. 연필의 핵심인 연필심은 스리랑카에서 채광한 흑연에 미시시피주의 흙, 동물성 지방과 황산으로 만든 화합물을 섞어서 만든다. 피마자 씨앗에서 추출한 피마자 유로 만든 액체로 연필의 나무와 심을 코팅하고, 수지를 써서 라벨을 붙인다. 연필 끝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채광한 구리와 아연으로 만든 놋쇠를 붙인다. 지우개는 인도네시아의 유채씨유, 그리고 염화황부터 황화카드뮴에 이르는 수많은 화학물을 사용하여 만든다.

연필처럼 매우 간단한 물건을 하나 만드는 데도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각각의 부품을 만드는 제조업자들로부터 제조 공정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발전소 근무자들까지 "수백만 명의 사람이 나(연필)의 탄생에 참여하지만,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극히 일부밖에 알지 못한다"라고 리드는 썼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 번째, 일상용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하여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이토록 복잡한 제조 과정을 단 한 사람이 맡거나, 더 나아가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대에 집필된 <나, 연필>은 특히 두 번째 교훈을 강조한다.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는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 에세이를 예로 들면서 소련 경제학자들이 주장, 즉 중앙위원회에서 경제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됐다고 반격했다.(20-21p)

 

 

여기에 매우 중요한 아이러니가 있다. 단기적·중기적으로 환경 보호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화석연료를 대체할 전기차, 풍력발전 터빈, 태양광 패널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상당히 많은 물질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결론이 나온다. 앞으로 수십 년간 이전보다 지표면에서 더 많은 물질을 추출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기나긴 이야기 중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일 뿐이다. 이런 일은 그 전에도 이미 존재했다. 인류 역사 초창기부터 1950년까지 캐낸 물질의 총량보다 더 많은 물질을 우리는 2019년에 채광, 채굴, 폭파를 통해 얻었다. 단 한 해만에 인류사 대부분의 시기 동안 채굴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채굴한 셈이다. 광산업 초창기부터 산업혁명, 1~2차 세계대전, 그리고 이후 시간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물질을 말이다. 비단 2019년 한 해에 그친 단발성 사건이 아니었다. 2012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같은 일이 반복됐다. 원자재를 얻으려는 인간의 욕구는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나서 2019년에는 2.8퍼센트나 상승했고, 광물업 전 분야, 그러니까 모래, 금속, 석유, 석탄 분야에서 단 하나도 감소하지 않고 계속 상승했다.

아마도 당신에게는 낯선 소식일 테다. 만약 이야기를 들어봤더라도 화석연료라는 프리즘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여전히 채굴 중인 탄화수소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이유가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지하에서 엄청난 양의 석탄과 석유를 캐냈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 것이다. 화석연료 사용을 서서히 줄여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지하에서 화석연료를 채굴하는 속도를 조금씩 늦추고 있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그래서 광물에 대한 광범위한 욕구 역시 줄어들고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하기 쉽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는 지하에서 채굴하는 천연자원의 전체 양에서 적은 부분만 차지하기 때문이다. 화석연료 1톤을 기준으로 모래, 돌, 금속, 소금, 기타 화학물질 같은 다른 물질들은 6톤을 채굴한다. 비물질 세계의 시민들은 화석연료 소비를 줄이는 대신 다른 물질에 대한 소비를 몇 배나 늘렸던 셈이다. 실상이 이런데도 우리는 그와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다.(26-27p)

 

 

모래알의 주성분은 실리카이다. 이산화규소나 석영으로 알려져 있다. 더 좋은 표현이 있으면 좋겠지만, 유리는 녹인 모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리카는 유리의 기본 요소가 된다. 유리는 종류에 따라 실리카 함량이 매우 다른데, 물컵이나 유리창에 들어가는 유리는 통상적으로 약 70퍼센트의 실리카를 포함한다. 흑요석은 65퍼센트, 텍타이트는 80퍼센트이다. 반면에 리비아사막유리의 실리카 함량은 놀랍게도 98퍼센트이다. 리비아사막유리는 자연에서 발생한 유리 중에서 가장 높은 순도를 지니며,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유리보다 더 순수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47-48p)

 

 

기후변화가 심해지고 해수면이 상승할수록 장벽 건설이나 홍수 방지에 쓰이는 모래를 구하려는 경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21세기 내내 해수면이 상승하면 물밑으로 가라앉으리라고 과학자들이 예측하는 몰디브는 수도 말레 주위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기 위해 엄청난 양의 모래와 바위를 사용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간척이야말로 기후변화, 해수면 상승, 수자원 고갈에 대비한 최선의 방어책이라고 선언했고, 그리하여 세계 최대 모래 수입국의 자리에 올랐다. 국토는 10년 동안 26제곱킬로미터 이상 늘었다.

(...)

사람들은 모래를 거의 무제한으로 존재하는 흔한 물질로 생각한다. 만약 모든 모래가 똑같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

이에 대해 가장 간단한 답은 어떤 모래가 다른 모래보다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거대한 모래 바다에는 엄청나게 많은 실리카 결정이 있지만, 로칼린이나 퐁텐블로의 모래 순도에는 미치지 못한다.(87-89p)

 

 

모로코와 사하라 서부 일대의 기다란 해안 지역이 모래를 준설하는 바람에 사라졌다. 여기서 나온 모래는 유럽과 카나리아 제도로 운반되어 관광 명소로 유명한 해변의 모래를 보충하는 데 사용됐다. 유럽의 해변이 실제로는 수입 모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당신은 크게 놀랄지도 모르겠다. 수천 년에 걸쳐서 자연적으로 조성된 폭풍우 방파제가 모래 준설로 다 깎여 나간 셈이다.(91p)

 

 

모래는 중요한 비즈니스다. 유엔환경계획에 따르면, '모래 위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모래를 흔해 빠진 천연자원이 아니라 전략적 광물로 여겨야 한다. 그러니까 리튬 같은 배터리 원료 또는 구리 등과 비슷한 수준의 광물 취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한 걸음 물러서서 모래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래가 없다면 건설 환경도 경제 성장도 성립할 수 없다. 모래는 수백만 명의 사람을 결핍과 가난으로부터 구해내어 함께 잘 살도록 돕는 물질이다.(93p)

 

 

중국은 유령 도시와 유령 마천루가 잔뜩인 데다가 콘크리트 생산량이 더는 기하급수적인 증가율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용량을 보면 눈이 휘둥그래진다. 당신이 이 책의 한 페이지를 읽는 동안 중국에서는 손수레 12만 대 분량의 콘크리트가 타설된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간 중국이 타설한 콘크리트 양은 미국이 콘크리트를 발명하여 지금까지 타설한 양보다 더 많다. 그러니까 조지프 애스피딘이 특허를 낸 포틀랜드시멘트의 발명 이래로 미국에서 후버 댐 건설, 고속도로 완공, 맨해튼 지구 및 기타 중요한 시설물을 짓는 데 사용한 콘크리트 보다 더 많은 양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

부실 시공의 문제는 콘크리트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콘크리트의 또 다른 저주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물질 중 하나라는 점이다.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으로 항공업과 삼림 파괴가 집중포화를 맞고 있지만, 시멘트 산업은 이 두가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시멘트 산업은 전체 탄소 배출량의 무려 7~8퍼센트를 차지한다.

시멘트 산업에서 배출하는 탄소량 중 60퍼센트는 백악이나 석회가 가마에서 시멘트로 바뀌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화학반응이고, 나머지 40퍼센트는 가마를 가열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차지한다.(103-105p)

 

 

 

ㅡ 에드 콘웨이, <물질의 세계> 中,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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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6

 

한 저자가 쓴 비슷한 기획의 책을 3권째 읽으니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부각되어 느껴졌다. 지난 2권의 책에서는 크게 못 느꼈던 것 같은데 이번에 확 느껴진 걸 얘기해 보자.

우선 어떤 상황을 비유를 들어 많이 표현하는 데 그게 너무 아재 감성이랄까. 이를테면 이런 거,

 

상차 작업에 익숙해지면 고구려인 못지않은 축성의 대가가 될 것 같았다. 선배는 감탄스러울 만큼 잘 쌓았다. 내가 쌓은 쪽은 높이도 제각각이고 빈틈도 많았다. 선배가 쌓은 쪽이 대한치과협회 홍보 모델의 치열을 떠올리게 한다면 내 쪽은 '마이쮸'를 삼촌보다 사랑하며 동시에 치약을 '하얀 똥'이라고 부르는 내 다섯 살짜리 조카의 치아 상태를 재현한 것 같았다. 쌓여 있는 상태의 위태로움이 잠시 후 '젠가!'를 외쳐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152p)

 

또한 등장 인물을 '응답하라 시리즈'의 캐릭터에서 따와서 표현하는 데서는 이 책이 5~10년 전에 쓰인 책인가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했다.

다음으로 첫번째와 비슷한 단점일 수도 있는데 재밌지도 않은 농담ㅡ독약이나 지진계 등에 대한 거듭된 언급ㅡ을 열심히 던지는데 목표물에 명중하지 못하고 맥 없이 땅에 꽂히는 느낌이었다.

 

 

 

콜센터에선 모두가 혼자다. 이곳에선 다른 직원들과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답답해서 옆 사람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긴 하지만 전화 상담은 근본적으로 혼자 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과 자료를 주고받거나 의논을 하거나 보고를 해야 하는 일도 없다. 9시부터 6시까지 자기 모니터만 바라보며 헤드셋의 마이크에 대고 떠들기만 할 뿐이다. 콜센터에는 직원 문화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회식도 회의도 공동 업무도 없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직원이 들어오면 팀원들과 인사도 하고 자기소개도 하지만 이곳에서 팀이란 서류상의 구분일 뿐 팀으로 해야 할 역할도 공간도 없었다. 퇴사할 때까지 2팀에 속한 사람이 누구라든지 그들이 앉은 자리가 어딘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팀과는 무관하게 배정되는 자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바뀌었다. 점심은 11시부터 3시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4개조로 나누어서 먹었다. 밥 먹는 시간도 다 쪼개어져 있어서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길게 이야기를 나눌만한 기회도 여의치 않았다. 의도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자리가 아무리 바뀌어도 바로 옆 사람과 같은 식사 시간 조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모두가 눈인사 정도만 하고 출근해서 각자 자리에 앉았다가 6시가 되면 사무실을 떠났다. 팀워크의 측면에서 봤을 때 콜센터는 공유 오피스를 이용하는 개인 사업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

많은 사람이 직장 내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어하고 어떤 경우엔 다른 누구와도 말 섞지 않고 그저 내 일만 하다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도 백번 공감한다. 그런데 콜센터는 다르다. 말 같지 않은 소리의 대가인 나로서도 대꾸할 말을 찾기 힘든, 전화를 건 고객의 부모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극도로 궁금해지는 통화를 마치고 나면 같은 일을 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당신은 어떠냐고 묻고 싶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고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선 관리자한테 혼날 때 빼고는 다른 사람과 길게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다. 나는 하다못해 양돈장에서 똥만 치우던 시절에도 그곳 돼지들과 콜센터에서보다 많은 대화를 나웠다.(60-62p)

 

 

콜센터를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이렇게 설명한다. 상담사의 일과는 여덟 시간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신에게 달린 악플들을 소리 내서 읽는 거랑 같다고. 상담사의 가장 평범한 하루일지라도 가족들이 함께 통화를 듣게 된다면 펑펑 울며 다른 일을 찾아보자고 하게 될 거다.(81p)

 

 

내가 경험한 바로, 인간의 감정은 식물과 같은 방식으로 다뤄야만 한다. 따뜻한 봄바람만이 봉우리 속의 꽃을 끄집어낼 수 있듯이, 상담사의 내부 열정과 친절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상냥한 말, 그것뿐이었다. 어떠한 친절 교육도 아무리 호된 질책도 따뜻한 말 한마디만 못했다. 우리가 보호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을 때, 우리가 친절하게 대하고 싶은 대상을 구체적으로 설정할 수 있을 때 이 일은 더할 나위 없이 보람찼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어째서 평범한 사람이 성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사람의 허무함을 몰아내는 감각이 분명 우리가 하는 일에 녹아 있었다. 다만 그 감각을 경험하기 위해선 거대한 원석에서 참깨만 한 다이아몬드를 추출할 때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감정을 낭비해야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밖에서 이 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견해와는 다르게 우리가 유한하게 보유한 에너지의 일부였다.(86-87p)

 

 

상담사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죄송합니다"라면 고객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윗사람 바꿔"였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고객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서 빨리 이 사람이 상급자 바꿔달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게 된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관리자 문제다. 하지만 내가 이관시킨 고객을 내 옆에 앉은 관리자가 상대하는 걸 듣고 있으면 어쩔 땐 눈을 마주칠 수 없을 미안해진다. 게다가 이관시킨 상담은 절대 간단하게 끝나는 법이 없다. 기본으로 이삼십 분은 훌쩍 넘긴다. 일반 상담사가 불특정 다수를 상대한다면 관리자들은 검증받은 사이코들만 상대한다. 아무리 정신 나간 사람일지라도 일단 이관을 받으면 관리자가 끝을 내야 한다. 그다음은 없다. 그래서 관리자들이 통화할 때는 상담사들이 보통 그러듯이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기운이 없다. 반대로 가족 중에 정신병 환자가 있는 사람만이 몸에 지닐 수 있을 법한 단호함과 침착함으로 상대를 대한다.(96p)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 먹고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113p)

 

 

처음 까대기를 할 때는 다들 험하게 짐을 다뤄서 놀란다. 물류센터는 손님들이 "덜 맵게 해주세요"라든가 "콩나물 많이 넣어 주세요"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절대 주방에 전달하는 법이 없는 심보 고약한 웨이터와 비슷하다. '파손 주의', '취급 주의', '이쪽이 위로 올라가게 해주세요', '던지지 마세요', '밟지 마세요', '유리 주의' 등등 상자들이 조심스레 다뤄줄 것을 끊임없이 호소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의식하며 짐을 다루는 걸 본 적이 없다. 뭐든지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고 내동댕이친다. 레일에 떨어지는 건 그나마 다행이고 어떤 건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어떤 건 벽을 맞고 뒹군다. 관리자들도 그런 걸 당연하게 여기는 걸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

여기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트럭 기사는 건당 돈을 받는 게 아니라 시간당 돈을 받는다. 트럭이 물류센터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기사에게 지불해야 할 비용도 늘어난다. 따라서 어떻게든 짐을 빨리 내려서 트럭을 돌려보내는 게 수익률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128-129p)

 

 

까대기 작업의 하루 강도를 대략 계산해 보면 이렇다. 작업이 끝나면 바코드 리더기의 모니터를 통해 해당 컨테이너에서 나온 화물의 개수를 확인 할 수 있다. 대개 한 트럭당 1000개가 넘는다. 한 차를 끝내는데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회사에서는 도크별로 최소 아홉 대는 처리하길 바란다. 실제로는 하루에 열에서 열두 대 정도 작업한다. 우리 집 고양이가 5킬로그램에 약간 못 미치는데 들어 올렸을 때 평범하다고 느껴지는 화물들, '잔바리'처럼 특별히 가벼운 것도 아니고 쌀이나 음료수처럼 특별히 무겁지도 않은 화물을 들었을 때의 무게감이 대략 그 정도다. 화물 하나의 평균 중량을 5킬로그램이라고 하고 계산해 보자.

하루에 평균 열 대 작업하고 한 차에는 짐이 1000개, 평균 중량은 5킬로그램이다. 이걸 두 사람이 작업하면 한 사람당 하루에 운반하는 총 중량은 25톤이다. 전체 화물 중 3분의 1 정도는 옮길 때 몸을 굽혔다 일어서는 동작을 수반하므로 하루 전체에 걸쳐 그런 동작을 반복하는 횟수는 적게 잡아도 1500번이다. 즉, 하루에 25통과 1500번이다. 한반도에서 하루에 이 정도 신체 활동량을 요구하는 곳은 물류센터를 제외하면 태릉 선수촌뿐이다.

사람들은 흔히 몸으로 하는 일과 머리로 하는 일을 구분하곤 한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까대기는 몸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몸으로 하는 일은 이삿짐을 나르거나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는 거다. 까대기는 남은 수명을 팔아서 돈을 버는 일이다. 자신의 육체 안에 품고 있던 생명력을 레몬즙 짜듯이 쥐어짜 내서 그 대가로 먹고사는 일이다.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140-141p)

 

 

사람들이 이 일에서 못 벗어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하는 날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서다. 거기에는 단순히 출퇴근이 자유롭다는 것 이상의 심리적 이점이 있다. 까대기를 하는 동안엔 어떤 경계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일자리가 있으면서도 일반적인 직장이 요구하는 업무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부담감도 시간에 얽매임도 없다. 힘들게 일해서 돈 버는 건 똑같지만 직장에 다닌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매일 같은 일터로 출근하면서도 꼴 보기 싫은 사람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고 일하기 싫으면 아무런 눈치 안 보고 쉴 수 있다. 어제 왜 안 나왔냐, 오늘 나올 거냐, 눈치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일당이 센 일용직으로 일하면 일정한 수입은 있으면서 마음만은 일이 없는 사람처럼 홀가분하게 살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그런 맛에 일용직에 계속 남는다.

(...)

믈류센터에서 이것만큼이나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심리적 풍경은 20대 젊은이들의 테스토스테론 내뿜는 자신감이다. 20대 중에서도 경력이 아직 몇 개월 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다. 나는 천하무적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해내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외치는 자신감을 말투에서 표정에서 몸동작에서 드러내지 않는 순간이 없다. 까대기 작업 열두 시간을 온전하게 끝마친 사람은 자기 자신이 헤라클레스나 드웨인 존슨의 동급이라고 확신하게 된다.(147-148p)

 

 

물류센터에서 내가 가장 놀란 점은 까대기하는 사람 중에 우울해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다. 이것이 내가 일터를 전전하는 동안 경험한 최고의 미스터리였다.

(...)

'본업'이야기를 해보면 다니던 회사나 공장이 문을 닫았다거나 정리해고를 당했다거나 해서 방황하던 차에 물류센터를 찾았다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도 우울해하거나 실의에 빠진 사람이 없었다. 나이 상관없이 다들 밝고 자신감이 넘쳤다. 이 일을 통해 그려볼 수 있는 미래가 너무 빤한데도 그랬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물류센터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자유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선 아무리 들락날락해도 눈치 주지 않기 때문에 남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까대기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성장의 감각 때문이라고 믿는다.

(...)

일당을 받는 육체노동은 인생을 고체화시킨다. 물류센터에선 매일매일 내가 한 일의 성과를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쓸모 있는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을 한순간도 잃지 않는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인생은 모호하기로 악명 높은 시간 개념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무언가, 두 손으로 꼭 붙들고서 집고 휘두를 수 있는 단단하고 구체적인 무언가였다. 그렇게 일을 끝내면 일당이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더니 잔고의 앞자리 숫자가 변하는 것이 보인다. 마치 하루하루 레벨업을 하는 느낌이다. 물론 까대기가 성장시켜 줄 삶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온몸의 관절을 박살 내버리려는 듯 돌아가는 작업 속에서도 그 감각, 내 삶이 전진하고 있다는 감각만큼은 분명하게 전해진다.

이곳에선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이 워낙 높고 험하기 때문에 일이 년후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애태울 기운도 애초에 남아나지 않았다. 그렇게 산 하나를 넘고 나면 통쾌한 노곤함과 절대적인 숙면만이 남았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까대기는 우리가 오직 현재, 오늘 하루에만 집중하도록 도왔다. 그것은 미래를 방기하는 삶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말고 미래를 준비하는 더 나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174-176p)

 

 

그는 글로 세상을 상관있게 만들고 싶었다. 그는 한국어에서 가장 공격적인 단어가 바로 '상관없어'라고 믿었다. 칼이나 총은 사람을 죽이지만 '나랑 상관없어'는 관계를 죽이고 환경을 죽이고 세상을 죽인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과 닭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람과 돼지도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고시생과 선원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장과 직원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인간과 자연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관있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었다. 비록 그가 성공했다는 증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말이다.(385-386p)

 

 

ㅡ 한승태, <어떤 동사의 멸종> 中, 시대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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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1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을 썼던 100여년 전과 달리 요즘 지배적 문화 엘리트들은 단순한 과시적 소비 대신 과시적 생산, 과시적 여가, 비과시적 소비에 참여하는 쪽을 선호하는데, 이 모든 행태가 물질적 재화의 소비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도 은밀하게 계급 격차를 확대한다는 이야기.

내용 이해에는 크게 무리가 없으나 개인적으로 번역이 너무 별로.

 

 

 

과시적 소비는 참으로 자본주의적인, 산업혁명 이후의 스펙터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인간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계속해서 지위 전쟁을 벌였다. 베블런은 20세기 전환기에 자신이 관찰한 많은 현상이 이미 선사시대부터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대 로마 사회에 관한 앤드루 월리스해드릴의 연구를 보면, 서기 79년보다 한참 전부터 과시적 소비가 넘쳐났음을 알 수 있다. 평면스크린 텔레비전과 저금리 할부 자동차가 등장하며 현재의 계급 구분선을 흐릿하게 만들기 수천 년전에도 부유하지 못한 이들은 상층계급을 모방했다.(21-22p)

 

 

너무도 많은 사람이 사치품에 돈을 쓸 수 있게 된 탓에 그런 상품이 더는 구별짓기의 표지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부의 과시는 '철 지난'행동으로 간주되며 이제 과시적 소비는 최상위 부유층보다 오히려 다른 모든 계층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되었다.

(...)

그리하여 진정한 엘리트들은 부와 소비 습관 대신 암묵적인 지위의 표지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26p)

 

 

이 새로운, 지배적인 엘리트 문화집단을 아주 간단하게 야망계급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들의 상징적 지위는 간혹 물질적 재화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지식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문화적 기표들ㅡ디너파티에서 신문 칼럼을 놓고 나누는 대화, 정치적 견해와 그린피스 지지를 나타내는 범퍼 스티커, 농민 직거래 시장에서 장보기 등ㅡ을 통해 드러난다. 이런 행동과 기표들은 야망계급의 가치관을 함축하고 있으며, 그런 가치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습득한 지식 또한 넌지시 드러내준다. 오늘날의 야망계급은 커리어에서부터 식품점에서 구입하는 식빵 종류에 이르기까지 온갖 선택을 하고 의견을 형성하는 데서 가치관과 문화적·사회적 의식, 지식 습득을 소중히 여긴다. 이들은 크고 작은 선택을 할 때마다 자신이 사실에 근거해(유기농 식품, 모유 수유, 전기차 등의 장점에 관해) 올바르고 합당한 결정을 했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결정이 식견 있는 것이며 정당하다고 느끼고 싶어 한다. 요컨대 베블런의 유한계급이나 데이비드 브룩스의 '보보스'와 달리, 이 새로운 엘리트는 경제학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야망계급은 특정한 가치관과 지식 습득에 기반한 집단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을 얻는 데 필요한 희소한 사회적·문화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40-41p)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인의 소비 행동에는 세 가지 중요한 거시적 추세가 있었다. 첫째, 부유층과 상층 중간계급ㅡ즉 소득 상위 1퍼센트와 상위 5퍼센트 및 10퍼센트 계층ㅡ은 과시적 소비에서 미국인의 평균 지출액 대비 덜 지출하는 반면, 중간계급ㅡ소득 상위 40~60퍼센트ㅡ은 더 많이 지출한다. 둘째, 지출 비중으로 볼 때 중간계급은 소득에 비해 과시적 소비의 비중이 큰 반면, 부유층(그리고 극빈층)은 적다. 셋째, 부유층의 과시적 소비는 '비과시적 소비'로 대체되고 있다. 즉, 이들의 소비는 더 많은 여가를 얻고, 장기적으로 삶의 기회를 창출하는, 비과시적이면서도 고가인 서비스로 대체되고 있다. 교육, 의료, 육아, 보육, 정원사, 가사도우미 같은 노동집약적 서비스가 여기에 포함된다.(55p)

 

 

다른 모든 요인을 통제하고 인종의 영향만 살펴본 찰스와 동료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흑인과 히스패닉은 동일한 소득 및 교육집단에 속하는 백인에 비해 소득에서 더 많은 비중을 과시적 소비에 쓴다. 찰스는 이런 결과를 차별의 영향으로 추측한다. 이들은 소수자로서 백인이나 아시아계보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더 큰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좋은 차를 타고 잘 차려입은 모습 등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계급을 암시한다. 차별을 겪은 역사를 지닌 소수자들에게 과시적 소비는 사회적·경제적 위치를 효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차별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결과는 상층계급 와스프WASP 문화에서 관찰되는 것과 거의 정반대다. 어떤 차별이나 억압도 경험하지 않은 와스프집단은 물질적 재화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한다. 피부색만으로도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68-69p)

 

 

물질적 소비는 더 이상 교육이나 은퇴, 의료같이 중요한 지출에 자원을 투자하는 것보다 우선시되지 않는다. 교육, 은퇴, 의료 등에 대한 소비는 모두 높은 가격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동시에 야망계급 지위를 재생산하고 이들이 나머지 전체와 자신들을 한층 더 분리하는 결정적인 통로다.

이런 소비에는 많은 돈이 들지만, 언뜻 보면 지위를 드러내려는 시도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실제로는 지위를 드러낼지라도 말이다). 이처럼 비과시적 소비는 두 가지로, 거의 양분된 형태를 띤다. 매니큐어 색깔이나 특정한 문화적 지식같이 그리 비싸지 않고 돈과 무관하다시피 한 기표들인 정보비용이 드는 비과시적 소비와, 육아, 의료, 대학 수업료같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의 삶의 질을 크게 개선하는 동시에 기존의 계급 구분선을 강화하고 보강하는 대단히 갑비싼 비과시적 소비가 그것이다.

(...)

거의 모든 비과시적 소비의 핵심은 아는 사람만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비가시적이며, 따라서 암묵적 정보나 상당한 돈이 없으면 모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비과시적 소비는 새로운 계급 구분의 원천이다.(94p)

 

 

사회학자 더글러스 홀트가 이야기한 예시를 빌리자면, 오페라를 관람하는 행위는 문화자본이라기보다는 공연 일정이 언제이고 어디서 표를 사야 하는지에 관한 지식, 음악을 감상하는 법, 다른 주제를 논할 때도 공연을 참고할 수 있는 능력, 그 경험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 여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페라 관람이 가치 있는 시간 활용임을 인식하는 능력으로 결합된 결과물이다.

(...)

(송구스럽지만) 크루그먼의 시각이 아니라 그의 이름과 <뉴욕타임스>를 아는 것이 문화자본을 보여준다.(98p)

 

돈과 무관한 비과시적 소비와 지위의 관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건 야망계급 내에서도 경제적 하위집단의 행동이다. 잉글랜드 여왕이나 시티뱅크 은행장과 파티에 참석하는 건 고사하고 집세나 간신히 낼 정도의 돈을 버는 힙스터ㅡ영화계 종사자나 시나리오 작가, 출판계에서 일하는 20대 젊은 도시인ㅡ들 말이다. 이 우스꽝스럽고 아이러니한 하위문화에서는 무엇이 쿨하고 알 만한 것인지에 관한 정보야말로 그들이 가진 전부이며, 따라서 이들 또한 돈과 무관한 비과시적 소비에 몰두한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블로그와 트위터 글을 읽고 참조하며, NPR 에코백을 들고 다니고, 픽시 자전거를 타는 식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규정할 수 있기 때무이다. 그들은 우유 대신 헴프 밀크를 마시고, 중고 혼다 어코드 대신 식물성 기름으로 달리도록 개조된 낡은 메르세데스를 몰며, 맥도날드보다 푸드트럭에서 패스트푸드를 사 먹는다. 가격이 대충 비슷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식물성 연료 차량과 아몬드버터는 야망계급의 문화자본을 보여준다. 이는 실천과 제품이 값이 비싸지는 않지만, 도시의 하위문화와 골목 안쪽에 자리한 좁고 어둑어둑한 술집, 특정 푸드트럭의 위치 등에 관한 내부자 정보 게임을 통해 확인되고 선택된다.(106-107p)

 

 

21세기의 모유 수유는 모성의 다른 많은 측면과 마찬가지로 계급과 그에 따른 수단의 문제가 되었다.

양육은 베블런이 말한 과시적 유한에 참여하는 새로운 통로가 되고 있다. 모유 수유와 출산은 베블런 시대에 스포츠나 그리스어 공부처럼 과시적 유한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다. 루이비통 가방이나 고급 자동차와 달리, 이 기표들은 명백하게 비싼 건 아니지만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시간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소중한 재화가 되었다. 베블런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과시적 유한은 대부분 돈을 연상시킨다. 모성의 많은 측면ㅡ출산 선택, 아이와 함께 자기, 아이 안고 다니기, 모유 수유 등ㅡ은 돈이 들지 않는 듯 보이지만, 이런 활동에 참여할 수 있으려면 시간과 여가가 풍부하고 이런 형태의 모성을 장려하는 문화적·사회적 집단에 속해야만 한다.(143p)

 

 

모유 수유는 주로 특정한 문화적·계급적 집단에서 활발하게 이뤄진다ㅡ교육수준이 높아 모유 수유의 장점에 관해 배우는 여성들, 그리고 24시간 상주 간호사와 모유 수유 강습을 제공하는 수유 상담사, 값비싸고 효율적인 유축기, 산모의 입원 기간 동안 내내 도움을 주는 신생아 친화적인 병원에서 출산할 정도로 넉넉한 보험을 든 고소득집단 여성들 말이다. 모유 수유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또 다른 중요한 지표는 출산휴가 기간이다.

(...)

미국에서 넉넉한 출산휴가는 모든 여성에게 희귀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런 휴가를 받는 이들은 주로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표면상 심한 압박을 받는 일을 하는 여성(가령 관리자, 법률가, 최고 경영자)이 넉넉한 출산휴가를 받으며, 따라서 모유 수유에 성공할 확률도 높다. 물론 그들의 교육수준과 모유 수유의 장점에 관한 지식 접근성(또한 전문직 종사자라는 사실)은 그들의 선택과 밀접하게 연결된다.(147-148p)

 

 

베블런 시대의 지위는 제품 자체로 좌우됐지만, 21세기의 지위는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원산지는 어디인지에 달려 있다. 과시적 소비와 달리, 오늘날 많은 재화는 과시적 생산을 통해 그 지위를 획득한다.(195p)

 

 

과시적 생산으로 만들어진 재화는 야망계급 소비의 핵심 영역이다. 야망계급이 볼 때 우리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것 그 자체이면, 이 때문에 일부 재화의 불투명한 생산과정은 매 단계에서 투명성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 투명성은 단지 더 많은 문화적 가치를 더하는 게 아니다ㅡ투명성 자체가 가치다. 우리는 농민 직거래 시장에서 더 작고 못생긴 사과를 사 먹는다. 직접 농부를 만났고, 그가 과일에 유해한 화학물질을 뿌리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

새롭게 구성되는 경제 및 문화 시스템에서 과시적 지위 표지의 핵심은 소비가 아닌 생산에 있다. 이것이 바로 할리우드의 성공한 시나리오작가와 실업자 힙스터를 같은 카페에서 보게 되는 이유다. 수백 년간 정반대에서 대립한 끝에 마침내 야망계급으로 한데 뭉친 이 두 집단은 똑같은 물건을 원하고 높이 평가한다. 21세기에 과시적 생산이 등장한 데는 세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다. 세계화에 대한 반발, 정보의 홍수 속에서 투명한 정보에 대한 선호, 탈희소성 포스트모던 사회와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의 결과로서 이런 일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사치가 그것이다.(204-206p)

 

 

하지만 홀푸드의 성공은 유기농도 맛 좋은 식품 때문도 아니다. 홀푸드의 성공 비결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싶어 하는 정체성과 스토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창조했는지에 있다. 홀푸드 및 과시적 생산 운동 전반을 이해하는 열쇠는 상품 자체가 아니라 과정과 거기에 내포된 의미의 중요성이다. 홀푸드에서 식료품을 산다는 것은 소비자 의식, 동물권 의식, 환경 의식, 그리고 좀 더 광범위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식견 있고 양심적인 사회 구성원이라는 인식을 함의한다.(209p)

 

 

이 책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의 소비주의ㅡ특히 과시적 소비ㅡ는 오늘날 새로운 미국 내부에 존재하는 거대한 불평등을 감춘다. 21세기 미국의 야망계급은 역사적으로 지위를 드러내온 많은 물질적 수단을 거부한다. 그들은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더 높은 사회적·문화적 기준을 열망하고 있다. 이런 열망은 계급적 위치를 보여주기 위한 새로운 수단의 활용으로 이어진다. 이 지배적 문화 엘리트들은 단순한 과시적 소비 대신 과시적 생산, 과시적 여가, 비과시적 소비에 참여하는 쪽을 선호하는데, 이 모든 행태는 물질적 재화의 소비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계급 격차를 확대한다.

(...)

오늘날 문화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들은 한가하게 빈둥거리기는커녕 자신과 자녀의 물리적·정신적 이득을 취하고자 생산에 몰입하는 야망계급이다. 이들의 소비 행동은 과거 물질적 과시에서 벗어나 암묵적이면서도 은근히 암호화된 수단으로 사회적·경제적 위치를 보여주고 부를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야망계급은 소비주의의 보편화에 따른 '월마트 효과', 즉 대중시장의 물질적 재화를 경멸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과 자신을 한층 더 구별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제조업 소비재의 가격이 떨어짐으로써 계급 구분선을 가로질러 많은 이가 이러한 재화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 착취와 유해 화학물질 사용, 열대우림 파괴 등 가격 인하에 따라 인간과 환경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도 드러났다. 그 결과로 과시적 생산이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제품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어떻게 보이는지보다 훨씬 중요해졌다.

(...)

이 새로운 엘리트층의 소비 실천은 중간계급의 과시적 소비에 대한(그리고 평범한 미국인들과의 차별화를 위한) 단순한 대응이 아니다. 대학 교육이나 풀타임 아기 돌보미 같은 소비는 좋은 차나 코치 핸드백 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며, 단순히 지위를 보여주는 물질적 신호로서의 소비보다 한층 폭넓은 영향을 미친다. 이런 소비 선택에는 사회적 비용이 따른다. 야망계급이 내리는 결정과 이들이 확립하는 규범은 과거 유한계급의 소비주의가 사회에 미친 영향보다 훨씬 더 유해하다. 은수저를 사거나 장기 휴가를 가는 대신 교육과 건강, 은퇴, 양육에 쏟는 투자는 어떤 물지적 재화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녀들이 계급(그리고 종종 부) 재생산을 보장한다. 이와 같은 문화자본과 그 산물의 재생산을 통해 우리는 찰스 머리가 말한 '새로운 상층계급'과 '새로운 하층계급'의 등장을 마주한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격차가 아니라, 전례가 없는 심대한 문화적 격차다. 양육, 지식, 환경 의식 등의 모호한 규범을 둘러싼 문화적 차이에도 그 이면에는 경제적 위치가 자리하며, 이런 상징적 경계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오늘날의 엘리트집단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도덕적이거나 가치로 충만한 선택으로 보이는 행동이 실은 사회경제적 위치의 한 층위로 깊이 내재되어 있고, 이런 선택 중 대개가 거창한 물질적 기표가 아니라 일상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 엘리트, 올리가르히, 금권정치인 등의 사치스러운 라이프 스타일에 집착하는 미디어의 행태로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계층화라는 훨씬 더 시급한 쟁점이 가려진다. 슈퍼리치의 삶이 흥미롭긴 해도 이들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우리 대다수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위 1퍼센트, 5퍼센트, 10퍼센트 소득구간에 다수가 속하는 야망계급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이들이 점점 더 비과시적으로 행하는 결정과 투자는 중간계급이라면 시도할 수 없는, 따라서 이들은 배제하는 방식으로 부와 상향 이동성을 재생산한다. 과시적 여가와 비과시적 소비ㅡ즉 교육, 의료, 육아, 가족과 보내는 시간ㅡ에 투자할 수 있는 자유는 사회학자 울리엄 줄리어스 윌슨의 용어를 빌리자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야망계급에게만 주어지는 '삶의 기회'에 진정으로 영향을 미친다. 자녀의 중등교육에 투자하고, 장바구니를 과일과 채소로 채우고, 정기 건강검진을 받고, 심지어 모유 수유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까지도 모두 다음 세대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전에는 미니밴과 교외 주택이 있으면 '성공했다'는 의미가 되었지만, 이제 그런 것들로는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지 못하며, 그런 대학(그리고 수업료를 내줄 수 있는 능력)이 점차 부유층과 나머지 모두를 갈라놓는 기준이 되고 있다. 야망계급은 0.01퍼센트가 아닐지 몰라도 이들은 다른 모든 이들과 동떨어진, 완전히 다른 특권적 문화 세계에 산다.(317-321p)

 

 

 

 

ㅡ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야망계급론> 中,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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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8

 

 

일단 읽은 곳까지 먼저 정리.

 

 

 

만약 당신이 살기 위해 달리는 얼룩말이거나 먹이를 잡기 위해 달리는 사자라면, 그런 단기적 신체의 위급 상황을 처리하기 위한 당신의 신체의 생리적 반응 메커니즘은 훌륭하게 적응되어 있다.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동물들에게, 스트레스는 내가 죽느냐 네가 죽느냐가 걸린 단기적인 위기이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스트레스를 주는 일들에 대해 생각을 하기만 해도 똑같은 생리적 반응이 작동된다. 그러나 이런 일이 만성적으로 일어난다면 이는 재앙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급격한 신체적 위기 상황에 반응하기 위해 진화된 생리 체계를 너무 자주 작동시켜서라기보다는, 집세나 인간 관계, 승진 등을 걱정하며 몇 달씩 작동시킨 체계 때문에 스트레스 관련 질환이 생긴다는 수많은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

'스트레스'란 신체의 항상성을 깨뜨릴 수 있는 외부 세계의 어떤 것을 말하며, '스트레스 반응'은 항상성을 재정립하기 위해 신체가 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병에 걸리는 것을 걱정하는 인간의 성향을 고려해 보면, 스트레스라는 개념을 단순히 항상성의 균형을 깨뜨리는 것에서 더욱 확장할 필요가 있다. 스트레스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감'일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정도로 현명하며, 단지 예감만으로도 마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과 같은 강한 스트레스 반응을 작동시킬 수 있다.(25-27p)

 

 

스트레스 반응의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저장 부위로부터 신속하게 에너지를 동원함과 동시에 더 이상 에너지가 저장되지 않도록 억제하는 것이다. 지방 세포, 간, 근육에서 넘쳐 나온 포도당과, 가장 단순한 형태의 단백질 및 지방들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근육에 쏟아져 들어간다.

만약 신체가 모든 포도당을 동원하고 있다면, 이를 주요 근육에 가능한 한 빨리 전달해야 할 필요도 있다. 즉 산소와 영양분을 더 많이 수송하기 위해 심박수, 혈압, 호흡량이 증가하게 된다.

스트레스 반응의 또 다른 양상 역시 똑같이 논리적이다. 위급한 상황 동안, 신체가 장기간에 걸친 비용이 많이 드는 건설 계획을 중지한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만약 거대한 회오리 바람이 집을 급습한다면, 이날은 창고의 칠 작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이 충분해질 때까지 장기 계획을 연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받는 동안에는 소화 작용이 억제된다. 천천히 일어나는 소화 과정에서는 당장 필요한 에너지라는 이익을 얻을 충분한 시간이 없는데 왜 그런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겠는가? 다른 누군가의 점심거리가 되는 것을 피하려면 아침에 먹은 것을 소화시키는 것보다 더 급한 다른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고 낙관적인 일들인 성장과 생식(여성이라면 특히 그렇다.)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사자가 당신의 꼬리 바로 뒤에서 두 걸음 뒤처져 쫓아오고 있다면, 배란이나 정자 생산, 뿔을 기르는 걱정은 나중에 해야 한다. 스트레스를 받는 동안에는 성장과 손상 조직의 수복이 감소하며, 성별을 불문하고 성욕이 저하한다. 여성은 배란하거나 임신을 끝까지 유지할 가능성이 적으며, 남성은 발기에 문제가 생기고 테스토스테론 분비가 감소한다.

이러한 변화들과 함께 면역력 역시 억제된다. 신체를 감염이나 질병으로부터 방어하는 면역계는 1년 내에 당신을 죽게 만들 종양 세포를 미리 찾아내거나,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충분한 항체를 몇 주 내에 만들어내는 데는 이상적인 체계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순간에 정말로 필요한가? 여기서 나타나는 논리는 동일하다. 종양은 나중에 찾고 지금은 더 현명하게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8장에서 설명하겠지만, 스트레스를 받는 동안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면역 체계가 억제된다는 생각에는 큰 문제가 있다. 그러나 당분간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스트레스 반응의 또 다른 양상은 극도의 신체적 고통을 받을 때에 분명해진다. 스트레스가 충분히 지속되면, 우리의 고통을 지각하는 능력이 둔해진다.(33-34p)

 

 

그는 스트레스 반응이 작용하는 방법에 관한 3단계의 관점을 제안했다. 초기(경고) 단계에서는 스트레스가 인식된다. 즉 피를 흘리고 있다든가, 너무 춥다든가, 혈당이 낮다든 것을 알리는 비유적인 경고가 머릿속에 울린다. 두 번째 단게(적응 또는 저항)에서는 성공적인 스트레스 반응 체계가 동원되며 신항상성이 다시 확립된다.

스트레스가 길어지면 세 번째 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셀리에는 이를 스트레스 관련 질병이 발생하는 '피로'단계라고 불렀다. 셀리에는 스트레스 반응 중에 분비되는 호르몬이 고갈되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병이 나게 된다고 믿었다. 탄약이 떨어진 군대처럼 갑자기 위협적인 스트레스에 대항할 방어력이 바닥나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살펴보겠지만, 스트레스가 아무리 오래 지속된다 하더라도 그 어떤 주요 호르몬이 실제로 바닥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군대의 탄약이 떨어지는 일은 없는 것이다. 대신, 신체가 너무 많은 예산을 국방에 사용하기 때문에 교육과 의료, 사회 보장 제도를 경시하게 된다(그렇다, 나는 은근히 또 다른 주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트레스 반응이 바닥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활성화되어서, 특히 그 스트레스가 순수하게 정신적일 때, '스트레스 반응은 스트레스 그 자체보다 더 파괴적이 될 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스트레스 관련 질병 발생의 기본이 되는 결정적인 개념이다.

스트레스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사해 보면, 스트레스 반응 자체가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트레스 반응은 시야가 좁고 비효율적이며, 작은 일에 매달려 큰일을 그르치기도 하지만, 위급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반응하기 위해 신체가 해야 하는, 비용이 많이 드는 종류의 일이다. 그리고 만약 매일같이 위급 상황을 겪는다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

만약 에너지를 저장하는 대신에 꾸준히 에너지를 동원한다면, 남는 에너지를 저장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빨리 피곤해지고, 일종의 당뇨병에 걸릴 위험성이 훨씬 더 커진다. 심혈관계를 만성적으로 활성화하면 비슷하게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난다. 만약 사자를 피해 뛰어 달아날 때 혈압이 180/100으로 높아진다면 적응하고 있는 것이지만, 10대 아이가 어질러 놓은 방을 볼 때마다 혈압이 180/100이 된다면, 심혈관계의 재앙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장기적 건설 계획을 지속적으로 가동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회복시킬 수가 없다.(36-37p)

 

 

표면적으로 이 개념이 주는 메시지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스트레스가, 즉 만성적 또는 반복적인 스트레스가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만성적 또는 반복적 스트레스가 사람을 병들게 할 가능성이 있으며, 병에 걸릴 위험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사실 대량의 반복적 또는 만성적 스트레스가 있더라도 자동으로 질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같은 스트레스를 겪는데도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자주 스트레스 관련 질병에 걸리는지를 다룰 것이다.

추가로 강조해야 할 것이 있다. "만성적 또는 반복적 스트레스가 당신을 병들게 할 위험성을 높인다."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부정확한 표현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애초에 단어의 미묘한 의미에 관해 사소한 트집을 잡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스트레스가 당신을 아프게 하거나 아프게 할 위험성을 높이는 경우는 전혀 없다. 스트레스는 당신을 아프게 만들 '질병'에 걸릴 위험성을 높이거나, 그런 질병을 갖고 있는 경우에 당신의 방어력이 질병에 의해 압도당할 위험성을 높인다. 이 구분은 몇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스트레스와 병에 걸리는 것 사이에 더 많은 단계를 둠으로써, 왜 몇몇 사람들만 실제로 병에 걸리는지, 개인차에 대한 더 많은 설명이 존재하게 된다. 또 스트레스에서 병을 앓게 되는 상태까지의 진행 과정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 과정에 개입할 방법을 고안하기가 쉬워진다. 마지막으로, 왜 많은 의사들이 스트레스라는 개념을 자주 의심스럽고 애매한 것으로 여겼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41-42p)

 

 

지휘자 샘인 뇌는 스트레스를 경험하거나 스트레스가 되는 어떤 것을 생각하면 호르몬을 통해 스트레스 반응의 구성 요소들을 활성화한다. 스트레스를 받는 동안 일부 시상 하부ㅡ뇌하수체ㅡ말초 샘의 연결이 활성화되고 일부는 억제된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스트레스 반응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가지 호르몬은 교감 신경계가 방출하는 에피네프린과 노르에피네프린이다. 스트레스 반응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또 하나의 호르몬은 '당질 코르티코이드'라고 불린다. 나는 이 호르몬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책이 끝날 때까지 당질 코르티코이드에 대해 매우 자세히 듣게 될 것이다. 당질 코르티코이드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부신이 이러한 호르몬들을 분비하면 에피네프린과 유사하게 작용한다. 에피네프린은 몇 초 내에 작용하며, 당질 코르티코이드는 몇 분에서 몇 시간에 걸쳐 에피네프린의 작용을 지원한다.

부신은 기본적으로 무분별하기 때문에, 결국은 뇌가 당질 코르티코이드 분비를 조절해야만 한다.(59-61p)

 

 

쾌락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는 것이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스트레스에 관련된 질병은 스트레스 때문에 촉발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

극도의 분노 또는 극도의 쾌락은 생식 기능, 성장 또는 아마도 면역계에도 서로 다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심장 혈관계에 한해서는 이 두 감정이 상당히 비슷한 영향을 준다. 다시 한 번, 극도의 추위나 더위, 또는 먹잇감과 포식자가 같은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설명할 때의 그 스트레스 생리학의 핵심 개념을 상기해 보자. 심장도 그렇지만, 우리 신체의 어떤 부분은 어느 방향에서 신항상성적 균형이 파괴되는지와는 무관하게, 단지 그 파괴의 정도에 대해서만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므로 깊은 슬픔에 울부짖으며 벽을 두들기든, 즐거움에 취해서 뛰어오르고 소리를 지르든, 병든 심장에는 부담이 된다. 즉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화가 났을 때나 성적 도취를 느낄 때나 당신의 교감 신경계는 관상동맥에 대해 거의 같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정반대되는 감정들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생리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장 혈관계에 한해서는 분노와 도취, 슬픔과 승리감 등이 모두 신항상성적 평형을 위협한다.(86-87p)

 

 

그렇지만 정말로 재미있는 것은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단순히 식욕을 자극한다기보다는 당분이나 설탕, 지방이 많은 음식에 대한 식욕을 선택적으로 자극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로 하여금 샐러리 줄기보다는 크림이 든 비스킷을 집게 만든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점이 생긴다. CRH는 식욕을 억제하는 반면에 당질 코르티코이드는 반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둘 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연구의 결과, 타이밍이 결정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스트레스가 발생하면, 몇 초 이내에 CRH가 분비된다. ACTH는 약 15초가 지나면 증가하지만,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혈류 속에 분비되도록 하는 수준에 이르려면 동물의 종에 따라 몇 분이 더 걸린다. 그러므로 CRH는 부신 다단계 작용의 첫 번째 파장을 이루고,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가장 느리다. 이러한 시간 경과의 차이는 이 호르몬들이 신체의 다른 부분에 작용할 때의 속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CRH는 며 초 이내에 그 효과를 느낄 수 있게 만들지만, 당질 코르티코이드는 그 효과를 나타낼 때까지 몇 분에서 몇 시간이 필요하다. 최종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이 종료되면, CRH가 혈류에서 사라지는 데는 몇 초밖에 안 걸리지만 당질 코르티코이는 몇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만약 혈류 속에 CRH가 다량 존재하고 아직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거의 없다면, 아마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해서 몇 분밖에 경과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식욕을 감퇴시켜야 할 때이며, 높은 수준의 CRH와 낮은 수준의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그 일을 해낸다.

그다음, 만약 다량의 CRH와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혈류 속에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지속적인 스트레스에 휩싸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시 식욕을 감퇴시켜야 할 때이다. CRH의 식욕을 억제하는 효과가 당질 코르티코이드의 식욕을 증진시키는 효과보다 크다면 이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마지막으로, 만약 혈류 속에 당질 코르티코이드는 풍부한데 CRH가 거의 없다면, 아마도 회복기에 들어선 것이다. 소화가 다시 시작되고, 신체가 미친 듯이 초원을 달리느라고 소비했던 에너지를 다시 보충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인 것이다. 따라서 식욕이 자극된다. 4장에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당질 코르티코이드가 어떻게 은행에 저장된 에너지를 고갈시키는지를 보았다. 이 경우에 당질 코르티코이드는 스트레스 반응의 매개자 역할이 아닌, 스트레스 반응으로부터의 '회복'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스트레스의 지속 시간과 회복 기간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이제 점차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정말로 심한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어떤 사건이 발생해서 최대한 CRH, ACTH 그리고 당질 코르티코이드를 분비하라는 신호가 촉발되었다고 가정하자. 만약 스트레스가 10분 후에 사라진다면 우림 몸은 누적적으로 볼 때 12분 동안의 CRH 방출(스트레스를 받는 10분간 및 그 후 혈류 속에서 제거하는 데 걸리는 수십 초를 더해서)과 두 시간 동안의 당질 코르티코이드 분비(스트레스를 받는 동안의 약 8분과 당질 코르티코이드를 혈류 속에서 제거하는 데 걸리는 훨씬 긴 시간의 합)에 노출된다. 그러므로 당질 코르티코이드 수준이 높고 CRH 수준이 낮은 기간이 CRH 수준이 높은 기간보다 훨씬 길다. 종합적으로 식욕을 자극하는 상황인 것이다.

대조적으로 스트레스가 며칠에 걸쳐 끊임없이 지속된다고 생각해보자. 다르게 표현해서, 며칠 동안 CRH와 당질 코르티코이드 수준이 상승되어 있다가, 체계가 회복될 때에 몇 시간쯤 당질 코르티코이드 수준이 높고 CRH 수준이 낮은 상태가 뒤따랐다고 치자. 가장 그럴듯한 결과는 아마도 식욕의 억제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과식이 되는지 소식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스트레스의 유형이다.

(...)

스트레스를 받을 때 과식을 하느냐 소식을 하느냐를 예측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변수는 특정한 스트레스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다. 피험자 집단을 동일한 실험적인 상황에 처하게 하면, 예를 들어 자전거를 처음 배운다거나 수학 시험을 본다거나, 남들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된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은 수준의 당질 코르티코이드를 분비하지는 않는다. 또 스트레스 상황이 끝난 뒤, 모든 사람의 당질 코르티코이드 수준이 동일한 속도로 기준 수준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이러한 개인차의 원인은 정신적일 수도 있다. 동일한 실험적 스트레스가 어떤 사람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생리학적인 차이도 있을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간의 당질 코르티코이드 분해 속도가 느릴 수도 있다.(116-119p)

 

 

 

ㅡ 로버트 새폴스키, <스트레스> 中, 사이언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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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8

 

 

수학에서 어떤 명제를 증명했다고 하면, 그것은 영원히 유효하고 그 증명된 명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바뀌거나 폐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학이론은 자주 바뀌고 확실하다고 했던 이론도 폐기되곤 합니다. 그러면 원래부터 증명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증명은 안 되었다 해도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뭔가 믿을 만하고 다르다고 하고 싶은데, 과연 그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봅시다.(24-25p)

 

 

많은 과학철학자들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방법론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포퍼입니다. 포퍼가 말하는 과학의 정수는 비판정신이고, 그 정신은 모든 이론을 사정없이 시험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와 비교해 이론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멋진 이론이라도 아깝지만 버리는 것입니다.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정말 있는지를 감히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교리에 의해 세상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간절히 기도드렸던 일이 이루어진다면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감사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역시 하느님의 뜻이고, 자신의 믿음이 부족해서라든지 하느님께서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시련을 내리셨다든지 하는 식의 해석이 나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건 간에 독실한 신자는 하느님은 존재하고 자애로운 분이라는 믿음을 유지합니다.

포퍼는 그런 식의 믿음이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과학적이지는 못하다고 본 것입니다. 과학은 뭔가 새로운 것을 계속 배워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이론을 포기하고 더 좋은 새로운 이론을 얻는 것은 중요하고 유익한 일입니다. 반면 종교적 교리는 불변하며, 신앙이란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포퍼는 그런 경건하고 독단적인 태도를 과학적 태도의 정반대로 보았습니다.

 

포퍼의 철학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경험에 뿌리 박힌 것입니다.(28-29p)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강가에 서 있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구하러 뛰어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들러 파의 심리학자는 '아, 이 사람은 영웅적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라는 해석을 하면서 '역시 아들러 이론이 맞아'하고 만족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물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그러면 즉시 '이 사람은 우월해지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열등감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무력해졌어'하는 진단을 내립니다. 또 아들러 이론이 맞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들러의 이론으로 문제없이 설명할 수 있고, 그 설명을 잘함으로써 이 이론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포퍼는 아들러가 이런 식으로 만나보지도 않은 환자에 대해 자신 있는 진단을 내리면서 엉터리로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는 것을 보고 실망해서 그 밑을 떠났다고 회고합니다. 결국, 뭐든지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종교처럼 독단적이거나 음모설처럼 사람을 홀리는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포퍼는 판단했습니다.(30-31p)

 

 

해가 매일 아침 동쪽에서 뜨는 것조차도 북극이나 남극에 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6개월 내내 밤이고 6개월 내내 낮이기 때문에, 방향은 둘째 치고 매일 아침 해가 뜨지도 않습니다. 또 정확히 북극점이나 남극점에 서면 동서남북의 개념 자체가 파괴되어버립니다. 북극점에서는 지구상의 어느 방향이나 다 남쪽입니다. 동은 뭐고 서는 뭔지 구분이 안 되고, 북도 실종됩니다. 머리 위(북극성을 향해 가는 방향)가 북쪽이고 발밑(남극을 향해 가는 방향)이 남쪽이라고 다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남북을 잡앚놓고 나면 평소에 생각하던 동서의 개념은 전혀 무의미해집니다. 이렇듯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상황이 우리 지구상에 있는 북극점에만 가도 벌어집니다. 해가 매일 아침 동쪽에서 뜬다는 것은 북극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의 일상생활이 얼마나 한정돼 있고, 우리의 상상력은 얼마나 제한되어 있습니까?(72p)

 

 

인간도 살다 보면 자신이 자주 경험하는 일에 버릇이 들어 방심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귀납적 추론의 근본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들도 종종 당합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가 갑자기 부서질 수도 있고, 차로 한강을 잘 건너가고 있는데 다리가 무너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

저도 사실 대학과 대학원을 다 캘리포니아에서 다녔는데 조금 큰 지진도 두 번 경험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일시적 충격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땅은 굳게 버티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다시 계속 살았습니다. 그런 귀납적인 추론에 의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회의론적인 의심에 사로잡혀 마비가 되어서 아무 행동도 할 수 없게 됩니다. 포퍼도 이것은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초인적인 존재라면 귀납적인 사고를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73-74p)

 

 

저는 과학이 자연에 숫자를 갖다 붙이는 '수량화'과정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데, 그 목적은 수량화가 당연한 것도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매일 몇 도 몇 도 하면서 주워섬기는 온도도 원래는 차갑다, 뜨겁다 하는 질적인 개념이었지 수량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직정 경험하는 온도는 느낌이지, 숫자가 아닙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요. 나는 지금 한 22도쯤 된다고 느낀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도계를 항상 보고 거기 나온 숫자와 자신의 느낌을 연관 짓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나 하는 말이지, 덥고 추운 것 자체가 숫자로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도 '뜨겁다', '차갑다'는 '습하다', '건조하다'와 함꼐 가장 중요한 성질이었는데 정량적인 개념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럽의 과학자들이 1600년경에 온도계를 발명했고,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이론적인 연구를 한 결과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온도 개념을 수량적으로 제대로 정립해냈습니다. 그 수량화된 개념을 한국 등에서는 나중에 별 생각 없이 수입했던 것 같습니다.

과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정말 우리가 상식적으로 수량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처음에는 수량이 아니었고, 어떤 식으로 수량화되었는지 그 과정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서 속도는 당연히 수량이라고 생각하는데, 중세 유럽의 물리학자들은 속도가 수량이냐 아니냐를 두고 많은 논란을 벌였습니다.(92-93p)

 

 

이것이 역설적이면서 아주 중요한 인식과정입니다. 처음에 어떤 기준을 기반으로 탐구를 시작하여, 그 탐구의 결과를 기반으로 원래 채택했던 기준 자체를 수정하고 개선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발달은 몇 단계에 걸쳐 계속될 수 있습니다. 감각을 넘어서게 해준 그 측정기구로 연구를 해서 지식을 더 쌓아 더 훌륭한 이론을 세우고, 그 이론을 이용하여 측정기구를 수정하거나 더 훌륭한 새로운 측정기구를 만듭니다. 그렇게 개선된 측정기구가 생기면 또 개선된 연구를 하여 더 배우고, 드 새로운 지식을 이용해 또 측정기구를 개선합니다.

다시 시간 측정의 예로 돌아가봅시다. (1)사람들은 처음에 감각적으로 하루의 길이는 대략 일정하고 태양은 하늘을 일정한 속도로 가로지른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 느낌을 기반으로 해시계를 만들었습니다. 그 해시계가 잘 만들어지니까 거기에 의존해서 시간을 정의했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가 하는 느낌 자체는 너무 주관적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2)해시계를 기준으로 관측하면서 물리학·천문학 연구를 한 결과,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지동설을 거쳐 뉴튼역학을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뉴튼역학을 기반으로 하면 추시계가 해시계보다 더 정확하고, 해시계가 대강은 맞지만 오차가 있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오차를 계산해서 해시계를 수정했습니다. (3)추시계를 사용해서 많은 물리학 연구를 할 수 있었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역학뿐 아니라 전자기학, 광학 등 여러 분야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이것이 모두 시간 자체를 주제로 하지는 않지만, 정밀한 시간 측정 없이는 발달시키기 불가능했던 학문들입니다.

(...)

이러한 과학의 발달과정을 볼 때, 탐구를 하다 보면 원점으로 돌아와 그것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과학에서 이런 식의 개선은 비일비재합니다. 과학이 이렇게 발달하는 과정을 저는 「온도계의 철학」에서 '인식적 반복'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자연을 탐구하는 과정은 어떤 주어진 기준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측정기구는 그러한 기준의 중요한 한 예이고, 그 외에도 1장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패러다임에 포함되어 받아들여진 연구방법이나 판단 기준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어진' 기준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장에서 살펴보았듯, 기준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개선할 수 있고 완벽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완벽한 기준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아무 일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갖추어진 기준에 의존하여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탐구를 시작하여 결과가 잘 나오면, 그 탐구의 시발점이 된 기준도 재검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원래의 기준을 수정하고 정제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물려받은 기준을 존중하고 사용하되 거기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또 그런 과정을 계속 반복할 수 있습니다. 인식적 반복이란 처음에 믿고 시작한 전제들을 단순히 유지하고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매 단계에서 재검토하며 지식을 쌓고 개선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인식과정을 통해 지식이 발달하는 과정을 좀 기하학적으로 비유하자면, 나선의 형태입니다. 나선은 동그랗게 돌아서 계속 같은 점으로 돌아오는데 한 번 돌아올 때마다 더 높아집니다. 이것이 덧없는 순환논리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관점이 '지식의 완벽한 정당화'라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요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무한히 높은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기 때문에 나선이 그냥 원으로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와서, 옆에서 나선형을 보면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확실히 보입니다. 이 나선형의 발전형태를 원형의 순환 논리로 잘못 이해하고 저도 측정에 관한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지식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 완벽하지 않은 지식을 우리가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 그것도 보입니다.(114-117p)

 

 

과학은 그런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까요? 어떤 사람이 정말 멋진 아이디어를 내서 그 퍼즐을 푼다면 붕괴되어가던 기존의 정상과학 패러다임이 다시 소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퍼즐을 풀긴 풀었는데 기존의 패러다임에 전혀 맞지 않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푸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위기를 해결할 조짐이 보이면 그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충분히 모이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는데, 그때 기존의 패러다임은 크게 흔들리기는 했지만 아직 버티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신-구 패러다임 간에 경합이 시작됩니다. 정치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많은 경우 내전을 하지요. 과학에서도 그렇게 내전이 일어납니다. 신출내기 패러다임이 그 내전에서 이기면 과학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혁명이 종료되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또 다른 스타일의 정상과학이 시작됩니다. 또 그 새로운 정상과학도 조금 나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변칙사례들을 만나게 되고, 위기를 맞고, 결국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교체됩니다. 쿤은 계속 끝없이 정상과학, 혁명, 정상과학, 혁명의 과정이 반복되는 것으로 과학사를 해석하고 과학의 미래도 그런 식으로 암묵적으로 예견했습니다. 이 반복된다는 개념이 재미있고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말의 '혁명'에는 그런 의미가 없지만 영어 단어 혁명에는 '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도는 것과 혁명이 무슨 상관일까요? 어원을 생각해보면 원래 혁명의 의미는 쿤이 말하는 것처럼 세상이 돌고 또 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제국이 흥망성쇠하면서 역사가 이루어지듯이.

(...)

쿤의 철학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패러다임들이 어떤 관계를 갖는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비정합성'이라는 개념입니다. 기본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는 패러다임은 서로 동의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서로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말이 안 통한다고 느슨하게 표현했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거기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패러다임이 바뀌면 판단기준이 바뀝니다.

비정합성의 두 번째 차원은 패러다임이 바뀌면 여러 가지 개념과 용어의 의미 자체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비정합성의 세 번째 차원은 가장 심각합니다. 정말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부분인데요. 쿤은 패러다임이 바뀌면 관측된 현상 자체가 바뀐다고 했습니다. 2장에서 논의했던 '관측의 이론적재성'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패러다임이 바뀔 때는 이론이 많이 바뀝니다. 그런데 그 이론이 바뀌면 그 이론의 영향을 받는 관측내용도 바뀐다는 것입니다.(127-138p)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철학적 문제들이 대두됩니다. 패러다임 간의 비정합성 때문에 과학의 객관성이나 중립성, 진실성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많이들 했고, 정말 큰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1장에서 쿤의 정상과학 개념 때문에 포퍼 등과 격한 논쟁을 벌였다고 이야기했는데, 과학혁명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싸움입니다.

(...)

첫째, 이렇게 쿤이 말하는 식으로 혁명이 일어난다면 과학적 지식이 축적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주어진 어떤 패러다임 안에서 지식이 축적된다는 것은 분명한데, 혁명이 일어나 그 패러다임 자체가 무너진다면 그 안에서 축적된 지식도 함께 없어져버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

둘째, 과학이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는 걱정이 생깁니다. 쿤은 과학지식 중에 가장 근본적이고 깊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일수록 뚜렷한 방향 없이 발전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진리가 저 멀리에 있고, 아직 과학이 발달하지 못해서 우리가 지금은 여기쯤 있지만 노력을 통해 점점 진리에 다가간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쿤은 과학의 발전에 그런 식의 방향성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143-145p)

 

 

성공적인 이론도 나중에 폐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과학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증거에 의한 이론의 과소결정'과도 통합니다. 과소결정은 우리가 어떤 경험적 증거를 가지고 있을 때 그와 부합되는 이론이 여러 가지인 상황을 가리킵니다. 반프라센 식으로 말하면 주어진 그 증거를 가지고 볼 때 여러 이론이 다 경험적 적합성을 지니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여러 가지 이론 중 하나를 찾아낸 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성공적이라고 만족해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가능성이 발견되면 그 이론을 따라가면서, 예전 이론은 싫고 틀렸다고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반실재론을 따르면 그렇게 과소결정에 걸려 넘어질 염려는 없습니다.(162p)

 

 

둥근 지구에 집을 짓는 새로운 비유의 이미지는 토대주의의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이런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인식론적 입장을 제시해줍니다. 또한 정합주의적 과학이 어떻게 진보할 수 있는지도 확실히 보여줍니다. 우선 생각해봅시다. 구형으로 된 지구가 실제로 어떻게 토대가 될 수 있을까요? 건물을 지을 때 우리는 분명히 지구를 토대로 사용하고, '흙 토'자를 쓰는 '토대'라는 개념 자체가 지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 지구란 전혀 어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광대한 우주의 진공 속을 떠다닙니다. 이는 마치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노이랏의 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게다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런 지구가 어떻게 토대가 될 수 있습니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첫째, 지구는 큽니다. 우리 인간보다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우리는 개미새끼처럼 그 표면에 붙어서 모든 일을 합니다. 또, 지구는 클 뿐 아니라 조밀합니다. 전통적 토대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견고한 것이 아니라 그냥 상당히 딱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편에 서 있고 그 안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중력입니다. 지구가 인간과 돌과 유리와 콘크리트 등 모든 것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구 표면에 붙어서 건물을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구가 크고 딱딱하고 중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토대 역할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데카르트가 찾던 그런 절대적 기초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기초가 없기 때문에 지식을 올릴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식과 확실성의 동일시는 데카르트로부터 내려오는 근대 서양 철학 전통의 큰 결함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만이 지식이라는 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데, 과학의 역사와 과학의 실체를 냉정하게 보면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확실하지만 지식은 있습니다.

(...)

데카르트처럼 뭔가 확실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지식을 쌓으려는 시도를 떠나서, 인간이 실제로 태어나서 어떻게 지식을 얻는지를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어린아이가 회의적인 질문을 하나요? 아닙니다. 무조건 어머니, 아버지가 하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언어조차도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확실한 증거나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 참 많습니다.

(...)

직접적인 경험을 근거로 하지 않는 말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나서야 우리는 인식행위 자체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정당화한 후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집 짓는 비유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지구에 태어났으니까 지구에 집을 짓는 것이지 지구가 객관적인 기준으로 볼 때 전 우주에서 제일 훌륭해서 여기다 짓는 것은 아닙니다. 화성에서 태어났다면 화성에 지었겠지요. 확실성을 포기하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지식을 미래의 지식을 쌓아올리는 토대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199-201p)

 

 

요즘 은유를 논의하는 많은 사람들은 레이코프와 존슨의 은유론을 기점으로 합니다. 이들은 이간의 모든 개념 체계에 속속들이 은유가 박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글자 그대로 이야기한다고 할 때도 사실 많은 은유적 표현을, 은유라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종종 씁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귀가 '어둡다'고 하는데, 이는 청각상태를 시각상태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누가 뭘 좀 이해했는지를 물을 때 우리는 알아 '들었냐'고 하는데 이해가 꼭 귀로 들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팽배한 은유적 표현에는 문화적 차이도 확실히 있습니다. 영어에는 귀가 '어둡다'는 표현은 없고, 알아들었냐고 하는 말은 통상 '보이냐'고 묻습니다(Can you see? 또는 Do you see?).

공간적인 은유는 특히나 많습니다. 우리는 뭐든지 '앞으로' 잘 하겠다고 합니다. 미래를 '앞으로'라고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팽배한 은유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이야기할 때 꼭 '앞으로'라는 은유를 써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반대로 미래를 뒤로 말하는 은유도 있습니다.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으라고 하는데, 그 '전'은 한문의 '앞 전' 자입니다. 그러니까 '전후'로 이야기할 때는 과거가 앞이고 미래가 뒤입니다. 순수한 우리말로도 손을 씻은 뒤에 밥을 먹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향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왠지 시간의 순서를 공간적 은유로 써서 표현하는 버릇이 들어 있습니다.

더 중요하면서도 더 이상한 예로 물건 값이 '올랐다'는 말을 들 수 있습니다. 온도도 '올랐다'고 합니다. 도대체 비싼 것과 위에 있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고, 가열하는 것과 올라가는 것이 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더워지면 온도계 속의 액체가 팽창해서 유리관 속에서 올라가기 때문일까요? 석연치 않습니다. 요새 전광판에 표기되는 온도계는 숫자만 나오지, 뭐가 오르내리지 않습니다. 9장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더워질수록 온도를 나타내는 숫자가 작아지는 온도계도 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우리가 수량 자체를 '높다, 낮다'고 생각하는 은유입니다. '하나, 둘, 셋'하면서 더 많아지는 것과 공간적 위치가 올라간다는 것은 잘 생각해보면 논리적으로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365-366p)

 

 

다원주의의 타당성을 우선 농담으로 한번 표현해보겠습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글짓기 대회를 했는데, 지정된 주제가 '우리 집 강아지'였습니다. 그 주제로 어떤 학생이 써낸 글을 보고 선생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거, 너희 누나가 낸 글과 한 글자도 안 틀리고 똑같아. 그대로 베꼈지?" 그랬더니 이 아이가 한다는 말이 "아뇨, 같은 개거든요"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웃겠지만,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사실 실재와 과학이론의 관계에 대해 종종 그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모든 과학에서 다루는 대상은 결국 하나뿐인 우주이니까, 옳은 이론은 궁극적으로 단 한가지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380-381p)

 

 

예를 들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세워서 전 우주의 작동원리를 정립하고자 했던 뉴튼의 꿈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깨졌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훌륭한 뉴튼역학을 아주 팽개쳐버리겠습니까? 아닙니다. 일상생활 범위부터 태양계 정도 스케일까지는 뉴튼역학을 아직도 잘 쓰고 있습니다. 스케일이 아주 작아지면 양자역학을 쓰고, 아주 커지면 일반상대론을 씁니다. 속도가 높아지면 특수상대론을 씁니다. 그런데 환원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하겠지요ㅡ원칙적으로는 상대론적 양자역학 이론을 잘 세우면 필요한 모든 내용을 표현할 수 있고, 다루는 대상이 복잡해질 때 계산하기가 힘들어지는 것뿐이다. 그렇게 말 하기는 쉽지만, 양자역학으로 로켓을 쏠 수는 없습니다. 양자역학이 진짜 진리냐 하는 생각을 떠나서 말이지요. 우리가 실제로 어떤 이론을 써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로켓을 쏘는 과학은 아직 뉴튼역학이라는 것이 명백합니다.(391-392p)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의미로서의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는 전혀 입장이 다릅니다. 상대주의란 판단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 너도 좋고, 네 말도 맞고, 난 상관없어'하는 태도인데, 다원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원주의가 표방하는 것은 한 가지만 하지 말자는 것이지, 아무거나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의 체계를 동시에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관용의 이점과 상호작용의 이점을 추구하자는 것이지, 모든 체계를 다 허용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402p)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장님입니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도 관측 불가능으로 남아 있는 무궁무진한 우주를 그래도 알고 이해해보려는 인간의 노력이 바로 과학입니다. 상황을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자연히 겸허해집니다. 그런데 이 겸허한 태도에서 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쉬운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의 입장은 다릅니다. 우리가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들이라면, 장님이라도 여러 명을 동원해서 협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분업을 해서 다양한 다른 부분을 더듬고, 그렇게 해서 알아낸 내용을 서로 비교하고 토의해서 다듬어야 합니다.(407p)

 

 

 

ㅡ 장하석,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中, 지식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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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8

 

 

그런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서사가 없다, 약하다, 삽화적이다, 일화가 그냥 나열되었을 뿐이지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등등이죠.

그러한 서사에 대한 추구는 인생이 통일성과 정합성을 갖고 있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도블라토프가 바라보는 인생은, 세게는 그렇지 않죠. 그것은 부조리한 일화들의 느슨한 연결입니다. 커다란 통일성도, 정합성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도 없어요. 다만 도블라토프가 내세운 화자의 특유의 톤, 다시 말해 도블라토프의 테크닉을 통해 하나의 소설을 형성하는 거죠.

하지만 일상을 그렇게 일화적인 것의 느슨한 연속으로 파악함으로써 도블라토프에게 삶은 부조리하지만 견딜 만한 것이 됩니다. 굉장히 거대하고 정교한 악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라, 작은 악의들, 작은 실수들, 작은 부조리들이 있는 거죠. 일화의 특징이 뭐예요. 짧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도블라토프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끔찍하다.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진정한 용기란 삶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알면서도 그 삶을 사랑하는 데 있다.(60-61p)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떠한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이 정치와 관계가 없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이다." 그렇죠, 어떤 작품이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어서 불편하다느니, 예술 작품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느니 하는 주장들은 다 개소리입니다.(80-81p)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의하면 19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라는 '상상된 공동체'가 형성된 데에는 소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인쇄술의 발달로 표준어가 정립되고, 단일한 언어로 쓰여진 소설이 널리 읽히며 '공감'의 공동체가 만들어진 거죠. "소설이 지식인과 대중 또는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공감'을 통해 하나로 만들어 네이션(근대국가)을 형성한다는 것" "그 결과, 그때까지만 해도 낮기만 했던 소설의 지위가 상승"했다고 고진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절은 이미 지나가버렸죠.

한때 우리 사회에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결국 '문학'이 끝났다는 게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 의해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받았던 문학의 어떤 형태, 즉 '근대문학=소설'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향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92-93p)

 

 

이제 책은 더 이상 문자를 독점하는 매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부드럽고 유동적인 매체(뇌)에서 딱딱하고 고정적인 매체(책)로 옮겨갔던 문자는 이제 다시 유동적이며 검색 가능한 매체(인터넷)로 옮겨가는 중이지요.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억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머릿속에 있던 정보가 과거의 어느 순간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책이라는 외부 저장 장치로 옮겨갔고, 이제 기억과 기록을 구분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 없을 정도로 혼합된ㅡ내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외부도 아닌ㅡ공간으로 옮겨가는 과정중에 있다고요.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일단 책 밖으로 뛰쳐나간 문자들을 도로 가둘 수는 없습니다. 방대한ㅡ거의 무한에 가까운ㅡ저장 공간, 간단한 키워드만으로 평생 읽지 못할 자료들을 찾아주는 검색 능력, 무엇보다 실시간 발행과 실시간 상호작용이라는 인터넷의 역량을 책을 결코 따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책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책이 제공하는 종류의 정제되고 정돈된 지식을 인터넷은 제공할 수 없다'같은 말을 해봤자 별다른 울림을 갖지 못하겠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패러다임 자체가 바뀐 상황에서 그런 말들은 책을 반대하고 기억을 옹호한 소크라테스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들립니다.

오해하면 안 됩니다. 저는 책이 사라져도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책이 나왔다고 기억이 사라진 게 아닌 것처럼요. 다만 지금과는 다른, 좀더 축소되고 분화된 역할을 맡게 되겠죠. 그게 무엇인지는 저도 알 수 없고, 중요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서는요.(104-105p)

 

 

그 방을 떠나지 않았다면, 담을 넘지 않았다면, 읽고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 있는 체하고 있다면, 가족들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읽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먹고 있습니다. 읽기는 몰래 먹기입니다.

읽기는 금단의 열매를 먹는 것이고, 금단의 사랑을 하는 것이고, 시대를 바꾸는 것이고, 가족을 바꾸는 것이고, 운명을 바꾸는 것이고, 낮을 밤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읽기는 모든 것을 정확히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몰래'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두 가지의 읽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여기에서의 읽기입니다. 교과서를 읽고, 참고서를 읽고, 자기계발서를 읽고,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에 관한 책을 읽고, 육아나 요리에 관한 책을 읽고, 교양을 위해 가벼운 사회학 서적이나 대중심리학 서적을 읽고, 취미에 관한 책을 읽고····· 이것들은 우리를 바깥으로 데려가지 않고, 담을 넘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 이곳에 단단히 발붙이게 합니다. 이것을 '한낮의 읽기'라고 해두죠.

그렇지 않은 책, 다른 책, 그러니까 어떤 소설이나 시, 그리고 어떤 종류의 철학이나 이론처럼 우리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이끌어가는 책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식수가 말하는 읽기죠. 저는 이걸 '가장 어두운 순간에 읽기' '한밤의 읽기'라고 부르고 싶어요. 밤에 읽어서가 아니라, 지금-여기를 '몰래' '밤으로 바꾸는'읽기니까요.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지금 어느 한쪽의 책/읽기가 더 낫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독서를 말할 때면 너무 전자만, 그러니까 한낮의 읽기만 이야기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124-125p)

 

 

물리적인 시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책 읽기에 시간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불닭볶음면처럼 짧은 시간에 나를 자극해서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혹은 사이다처럼 타는 갈증을 즉각적으로 시원하게 씻어주는 그런 콘텐츠를 찾을 수밖에요.

여기에는 일종의 악순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유가 없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습니다. 대신 즉각 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가용 시간을 쏟아붓죠.

그런데 사람들이 가용 시간을 즉각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쏟아붓는 사회는 점점 더 여유가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치의 일을 모두 끝낸 늦은 밤, 책을 읽거나 다른 무언가를 할 기운은 없지만 그냥 자고 싶지는 않을 때 우리는 트위터를 보고 넷플릭스를 보고 쇼츠를 보고 틱톡을 봅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작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 시간을 확인하고 비명을 지른 다음 서둘러 잠자리에 듭니다. 아마도 내일은 더 피곤할 테고, 스마트폰 말고 다른 걸 볼 기력은 더욱 없겠죠.(145-146p)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전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24시간이 주어졌고, 우리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그 24시간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그것을 살아내야 합니다. 얼마 있지 않은 달콤한 밤의 시간을 쪼개고 희생해서 자기가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죠. 저는 그중 하나가 한밤의 읽기라는 말씀을 드리는 거고요.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이라고 느껴져도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눈앞에 보이는 가능한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한밤의 읽기입니다.(168-169p)

 

 

물론 글쓰기와 책 읽기, 혹은 문학이라는 것에는 어떤 종류의 '환상'이 전제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읽고 쓰는 동안 내가 지금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내 삶이 나아지고 있고 이것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까지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읽기와 쓰기가 만들어내는 문학이라는 행위의 핵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환상이 없다면 문학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으니까요. 롤랑 바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학에서 환상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게 어느 정도냐는 거예요. 쓰기와 읽기의 핵심에는 환상이 있어요. 하지만 환상과 기만은 같지 않습니다. 이 모든 행위의 핵심에는 환상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과 독자들에게 정직하려고 노력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반대로 어차피 환상이라면 그냥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작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말을 아주 열렬히, 최선을 다해서, 마치 그것이 더없는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거죠. 제 생각엔, 적극적으로 환상을 이용하는 그들이야말로 문학에서 환상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독자들을 향해 환상을 현실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으니까요.(177-178p)

 

 

여기서 읽기에 대한 작은 팁을 하나 드릴게요. 한번 책을 끝까지 읽은 다음 처음으로 돌아와서 서문이나 앞부분을 다시 읽어보세요. 처음에는 몰랐던 게 보이기도 하고, 전혀 다르게 읽히기도 하거든요. 꽤 재미있어요.(187p)

 

 

 

ㅡ 금정연, <한밤의 읽기> 中, 스위밍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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