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18

 

굉장히 과격한 주장인 듯하나 읽어보면 수긍되는 지점들이 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사적인 핵가족과 오이디푸스 서사(어머니, 아버지, 아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통해 자아가 형성된다는 걸 상상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아가 항상 이런 식으로 형성된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한다면 다른 방식으로도 자아를 형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당신이 “가족을 폐지하라”는 표현에 거의 반사적으로 “그치만 난 우리 가족을 사랑한다구”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행운아라는 걸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당신이 가족을 사랑한다니 참 다행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운이 좋은 건 아니다, 그렇지 않겠는가?

가족을 사랑한다는 건 가족 폐지에 찬성하는 것과 상충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상대가 충분한 돌봄뿐만 아니라 자율성을 만끽할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ㅡ자본이 숨통을 조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런 풍요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만약 이런 사랑의 정의가 옳다면, 내가 “진짜” 어머니라는 사실을 근거로 아이가 접근할 수 있는 어머니(어느 젠더든 간에)의 수를 제한하는 건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사랑이라고 하기 힘들다. 어쩌면 당신은(핵가족에서 성장했다면)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할당된 기능이 얼마나 억압적인지 은연중에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10-11p)

 

 

요컨대 가족이 없으면 부르주아 국가도 없다. 가족의 기능은 복지를 대신 수행하고 채무자의 보증을 서는 것이다. 가족은 개인의 선택이니, 개인의 탄생이니, 개인의 욕망 같은 허울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노동력 재생산을 저렴하게 관장하고 빚을 확실하게 갚게 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잠깐, 가족은 이미 위태롭지 않은가! 혹은 그렇다는 전설이 있다. 요즘 애들은 자식을 낳으려고 하질 않아, 요즘 애들은 가족을 돌보질 않아, 그냥 부모 집에서 살아, 집 나가면 전화도 안 하고, 자기 집을 사려는 꿈을 안 꿔, 결혼도 안 하려고 하고,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가정을 꾸릴 기반을 다지지도 않고. 하지만 생각해보라. 가족은 위태롭지 않은 적이 없었다.(19p)

 

 

장담하건대 당신은(특정한 계급에 속한) 한 명, 두 명, 세 명, 또는 네 명의 개인에게 임의로 신생아를 떨어뜨리는 복권 시스템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들에게 아기를 삶에서 가장 중요한 20여 년 동안(아기 자신의 동의도 없이) 맡겨놓고, 아기가 자신의 육체적 생존, 법적인 존재 상태, 경제적 정체성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들고, 또 그들의 자기 인생을 노동에 바치는 이유가 되게끔 강제하는 시스템 말이다. 당신은 사랑하는 아이에 대한 헌신이 성인들(특히 여성)의 족쇄가 되는 규범보다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다. 함께 머리를 맞대면 우리는 인간“본성”에 대한 다른 설명을, 사회적 재생산을 조직하는 다른 방식을 발명할 수 있다. 오늘날에 가족은 허울을 걷어내고 보면 국가와의 경제적 계약 또는 노동자 교육 프로그램일 뿐이다. 힘을 합치면 우리는 합의에 기반한 세대 초월적인 공동 거주 양식을, 일상의 노동이라는 부담을 분배하고 최소화하는 대대적인 방법들을 확립할 수 있다.(38-39p)

 

 

ㅡ 소피 루이스, <가족을 폐지하라> 中,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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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5/17

 

 

 

“살면서 말이지,” 그가 말한다. “난 내가 뭘 안 원하는지밖에 몰랐어. 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 하나가 있거든, 그래서 항상 생각을 해, 이 가시만 빠지면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을 해보겠다고. 한데 막상 그 가시가 빠지고 나면 또 텅 빈 기분이 되더라고. 그러다 금세 또 새로운 가시가 옆구리를 파고들지. 그러면 또다시 그 가시에서 벗어날 생각밖에 할 수가 없는 거야. 도무지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할 시간이 없어.”(31p)

 

 

“어떤 무리에 속한 사람이든 여느 누구만큼이나 똑같이 좋은 사람들이다.” 키츠가 스물다섯도 되기 전에 알았던 사실을 나는 영영 깨닫지 못할 것이었다. 이제 나를 기다리는 건 셰익스피어식 인생이었다. 그렇게 경험을 확실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키츠는 최소한의 인간적 교류만으로도 스스로 확보해둔 명료한 내면에 가닿을 수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과 그게 가능했다. 자기와의 대화가 자양분이 되는 정신의 천국에 그는 살았던 것이다. 나는 망명이라는 연옥에 갇혀 앞으로도 평생 마침맞은 대화 상대를 찾아 헤맬 텐데.(65p)

 

 

 

ㅡ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中, 클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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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30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더 자주 찾아오는 회의와 냉소의 시기였을까. 기계처럼 움직이며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책이 뭘까? 이 많은 책들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지? 그렇게 책에 묻혀 산 다음 나는 어떤 인간이 되었지? 박학다식한 지성인이 되지도 못했고 성숙한 인격자가 되지도 못했고 젊은 시절 예술과 문학에 빠져 현실 파악을 못한 바람에 경제적 여유와 멀어진 삶을 살게 된 것만 같았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말에 공감을 할 뻔하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게 뭐 있겠니? 책에서 뭘 배우라는 거니? 나는 내 인생으로 다 겪었다.” 또한 읽기와 쓰기가 직업이 되면서 책은 서운함과 서글픔과 소외감이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가져다주기도 했다.(80-81p)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말이지 모르겠어요.” 요가 선생님에게, 엄마에게, 친구에게, 길 가다가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었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어요? 무엇 때문에 살고 있어요? 50년 가까이 살았지만 매일 점점 더 모르겠어요.”

일을 열심히 해서 연금과 저축 액수를 높이면 잘 살고 있는 걸까. 매일 저녁을 더 정성껏 차리면 될까. 산책과 등산을 자주 하면서 자연의 변화를 접하면, 부모님에게 자주 전화를 드리면, 운동을 빠지지 않고 피아노 연습을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고 자선 단체 후원금을 늘리면 잘 사는 걸까. 아니 그냥 살아 있기만 하면 될까.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에 따라 자의식을 버리고 들꽃이나 다람쥐처럼 살면 되는 걸까.

하지만 도서관에서 돌아온 나는 알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일곱 권이나 빌려서 집에 오는 길, 갑자기 모닥불처럼 붉게 타오르던 하늘을 바라보면서 가방이 하나도 무겁지 않아 이상하다고, 문득 삶이 두렵지 않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마음에 드는 소설책 한 권이면 크리스마스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그림 같은 풍경이나 멋들어진 숙소를 보면서 저기서 책을 읽을 수만 있다면 행복이 보장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오늘도 나를 몰입하게 해 줄 책을 찾아 서점과 도서관을 헤매는 나는 친구네 집에서 셜록 홈스를 읽던 어린이나 집에 있던 단 한 권의 수필집을 쓰다듬어 보던 소녀와 똑같은 사람이다. 번역가가 되어 일로서 책을 읽어야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하고 허무와 냉소에 젖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었다. 책은 언제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갑게 맞아 주고 차와 쿠키를 내어 주고 꽃과 정원과 하늘을 보여 주었다. 책은 끝이 없는 선물이자 변치 않는 약속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책에 한 번 더 의지하며 혹독하고 목마른 계절들을 나 보려고 한다.(91-92p)

 

 

ㅡ 금정연 외,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 中, 편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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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30

 

 

일본의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는 2017년 「관광객의 철학」을 출간했다. 여행자, 순례객도 아닌 관광객에게 무슨 철학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즈마가 노린 건 바로 그 지점이다. 관광객의 철학을 간단히 설명하면, 가벼운 접근이 우연을 만나고 이러한 우연이 우리에게 연대의 가능성을 연다는 거다. 말하고 보니 지나치게 간단해지는데 실은 철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복잡하고 예민한 문제다.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객의 철학」을 출간하기 전 「후쿠시마 제1원전 관광지화 계획」을 출간했고 극렬한 비난을 받았다. 책은 제목 그대로 후쿠시마를 관광지로 만들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비난의 세세한 내용을 짚어보지 않아도 어떤 반응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누군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진도항 관광지화를 주장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나 아즈마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이러한 관광화를 실천하고 있다.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체르노빌, 광주 등등 역사적 비극과 재난의 현장에는 공원과 박물관, 투어 프로그램이 존재하고 해마다 수천에서 수십만의 사람이 방문한다. 단지 이곳을 가리키는 단어가 추모, 기억, 순례 등 관광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일뿐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여기에는 언어의 문제가 존재하고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제한한다. 경박한 관광과 진지한 추모의 간극. 아즈마 히로키가 도발하는 건 이러한 태도와 규정이다. 기존의 시선으로는 진짜 사건과 만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추모는 비극을 물신화한다. 추모객은 자신이 보고자 한 것만 본다. 반면 훨씬 가벼운 태도의 관광은 예상치 못한 경로로 사람들을 사건과 조우하게 만든다. 일종의 산책자처럼 말이다.(69-70p)

 

 

 

ㅡ 정지돈, <스페이스 (논)픽션> 中,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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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25

 

 

 

우리의 통화 목소리는 디지털 전환 이후 더 나빠졌습니다. 마이크 성능이 나빠져서는 아니에요.

(...)

그렇지만 현재 우리는 통화 상대방의 목소리를 덜 듣습니다.

(...)

그 이유는 구형 아날로그 전화기와 달리 휴대폰은 마이크에 잡힌 소리의 전 범위를 전송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 대신 디지털 처리를 합니다. 그 소리를 압축하고 엔지니어들이 불필요한 것으로 판정한 데이터는 모두 제거하는 것이죠.

이러한 효율성은 디지털 소통의 도달 범위를 놀랄 만큼 확대 시킵니다. 음반을 mp3로, 사진을 jpeg로, 필름을 유튜브 영상으로 축소하는 등의 여타의 손실 압축과 마찬가지로, 휴대폰 통화 음성을 압축하면 디지털 통신망을 통해 더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데이터 패킷이 만들어져요.

엔지니어들은 이와 같은 손실 압축 포맷이 이상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다만 그 목적은 본질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목소리의 본질적인 부분은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무엇인가요? 휴대폰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말을 전달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치워져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배경 소음은 밀려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수많은 작은 소리들도요. 우리의 숨소리. 우리가 듣고 있음을 알려주는 소리.(62-63p)

 

하지만 레코드숍에 가면 제가 찾고 잇는지 몰랐던 음반을 만날 수 있어요. 우연한 발견을 노리고 가는 거죠.

살 만한 게 없을 때도 누구든 거기서 만난 사람에게서 항상 뭔가를 얻어듣게 됩니다. 음반 수집가나 점원은 굉장히 특이한 취향을 가졌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강한 의견도요.

(...)

“나는 다른 데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을 찾아 종종 그곳에 간다. 구식이고, 깨졌고, 쓸모없고, 뭐에 쓰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심지어는 변태적인 물건을 찾아서.”(90-91p)

 

 

그 각각의 접근법이 가진 문제에도 불구하고 폴 라메르와 그의 동료들의 추천 알고리즘이 현재 도달한 단계는 꽤나 경이롭습니다. 저는 스포티파이의 ‘디스커버’(발견하기) 기능을 이용하는데 제 음악 취향에 대한 예측이 너무 정확해서 무서울 정도입니다. ‘이 음반을 내가 좋아할 줄 어떻게 알았지?’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 음반은 제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제껏 수많은 음반을 구경하면서 본 기억조차 없지만 저의 컬렉션에 있는 다른 음반들과 정말 비슷한 느낌이어서 어쩐지 들은 적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제가 들은 적 있는 음악과 실제로 비슷하기 때문일 겁니다. 놀랍지 않은 음악이죠.

놀라움은 ‘발견’과 다릅니다. 우리 모두를 끌어들이고 우리의 시간을 최대한 그들의 제품에 쓰게 하는 데 혈안이 된 거대 디지털 기업에 놀라움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온라인에서 그러한 기업들의 영향력을, 그리고 우리 각자가 보는 정보의 부분집합을 생성하는 그 기업들의 알고리즘을 벗어나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터넷의 자유와 혼돈을 그들의 만든 프로그램의 지배력과 예측력으로 바꾸어놓는 중입니다.

그런데 오프라인에서는 그와 같은 시스템을 전복하기가 쉽습니다.(103-105p)

 

 

우리는 인간이니 각자 욕망이 있고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만약 저쪽으로 걸어가고 싶다면, 가장 좋은 건 제가 그냥 당신을 통과해서 직진하고 사람들이 좍 갈라지는 것일 테죠. 그러면 저는 거뜬히 저쪽에 도착할 겁니다. 그런 게 아마 인간의 욕망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세상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적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디지털이 의미하는 것은 언제나 물이 갈라지듯 길이 열리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얻는 것은 우리가 미리 예상한 경험뿐이라는 겁니다.

(...)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좋아요, 당신이 필요한 게 딱 하나고 그것 말고는 정말로 아무것도 필요 없다면, 그럼 문제없습니다. 거기서 사세요. 단, 그 밖의 모든 것은 놓치고 만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하세요. 정말로 그건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저기 밖에 있는 세상은 넓고, 인터넷 바깥에는 물리적인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다른 종류의 경험도 해야 합니다. 그 세상은 훨씬 풍요롭거든요. 거기에는 당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만 있지 않죠. (107-108p)

 

 

왜냐하면 진정한 차이는 소음으로 풍요로운 세상과 오로지 신호만을 얻으려 애쓰는 세상 사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소통으로의 전환 속에서 우리가 겪어온 근본적인 변화입니다.(133p)

 

 

 

ㅡ 데이먼 크루코프스키, <다른 방식으로 듣기> 中,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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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18

 

이 책에서 진행될 논지가 1장에 요약정리 되어 있으므로 바쁜 사람은 1장만 읽어도 도움이 될 듯.

탐욕스러운 일과 온콜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기.

 

 

 

그렇다면 드디어 직장에서 [노골적인 유형의 차별이 거의 없어지고] 성평등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것처럼 보이고 전에 없이 많은 전문 직종이 여성에게 열려 있는 오늘날, 성별 소득 격차는 왜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인가? 정말로 여성들은 동일한 노동에 대해서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가? 대체로 이제는 그렇지 않은 편이다. 임금 차별을 ‘동일한 노동에 대해 차등적인 임금을 받는다’는 의미로 규정한다면, 이것은 전체 소득 격차 중 아주 일부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오늘날의 문제는 이와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성별 소득 격차를 직종 분리 때문으로 설명한다. 여성과 남성이 자기선택의 과정에 의해서, 혹은 그렇게 선택하도록 유도되어서 젠더 고정관념에 따라 직업을 택하게 되는데, 그렇게 젠더에 따라 패턴화된 직종(간호사-의사, 교사-교수 등) 사이에 임금 격차가 존재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데이터가 말해주는 바는 이와 다소 다르다. 미국 인구총조사 목록에 있는 약 500개 직종에서, 성별에 따라 발생하는 소득 격차의 3분의 2는 [직종 간의 요인이 아니라] 각 직종 안에 있는 요인들 때문에 발생했다.(15p)

 

 

이 논리의 핵심 주장은 모든 유형의 무보수 돌봄 노동이 단지 돈을 받지 않고 국민소득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치 절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내 노동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특히 돌봄 노동자 일반, 구체적으로는 여성 돌봄 노동자들이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경제 전체에 걸쳐 무보수 돌봄 노동의 가치를 추산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어왔다. 가장 최근의 추산치를 보면 규모가 어마어마하다(국민총생산의 20%가량). 일찍이 리드는 이러한 계산을 위한 몇몇 기법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국민소득 계상 방식은 쿠즈네츠의 방식이며 이 방식은 가내에서, 또 그 밖의 곳에서 이뤄지는 무보수 노동을 포함하지 않는다.(85-86p)

 

 

 

 

ㅡ 클라우디아 골딘, <커리어 그리고 가정> 中, 생각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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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17

 

 

 

세 번째 배경은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상 작품이 늘어난 데 있다. 본래 영상 작품에서는 배우의 표정으로 슬픔을 드러내고, 땀을 닦는 동작으로 곤란한 상황임을 나타낸다. 배우가 “슬프다”, “어떡하지”등을 입에 담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신이 기쁜지 슬픈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배우가 대사로 일일이 설명하려는 작품이 많다. 연출을 보고 읽어낼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TV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제1회.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가 눈 속을 달리면서 “숨이 차다, 얼어 있던 공기 때문에 폐가 아프다”라고 말한다. 눈이 쏟아지는 가운데 절벽에서 낙하하고는 “눈 덕분에 살았군”이라고 한다.(28-29p)

 

 

어떤 장면에서 남녀가 서로 말없이 응시하면서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분명히 호감이 있다는 묘사다. 그런데 어떤 시청자는 이렇게 반론했단다.

“그런데 누구도 좋아한다는 말을 안 했으니 호감은 아닌 것 같아요. 좋아한다면 직접 말하지 않았을까요?”

트위터에서도 암묵적인 비유, 풍자, 우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주 관찰된다. 이를테면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한 유명인에 대해 누군가가 “이 사람은 구석기시대에서 왔나?”라는 풍자적인 글을 올리자 “뭐? 그 사람 나이가 몇 살인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하고 댓글을 단다.(73-74p)

 

 

예전보다 관객이 유치해졌고, 그에 따라 설명이 과도한 작품을 많이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결론짓는 것은 성급하다. 예나 지금이나 ‘유치한 관객’이 있다는 건 변함없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로 나오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바로 인터넷과 SNS의 발달이다.

20년 전, 30년 전에도 ‘유치한 관객’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유치함을 작품 탓으로 돌릴 수단이 없었다. 2000년대 초에도 블로그와 익명 게시판은 있었으나 다수의 민심을 대표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후반 이후 트위터를 비롯한 SNS가 생겨나고 보급되면서 누구나 무료로 작품에 감상을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가장 하기 쉬운 말이 “잘 모르겠다(그래서 재미없었다)”이다. 여기에는 논리적인 설명이나 근거가 필요하지 않다. 이런 감상이 폭발적으로 퍼지고, 이에 동조하고 부응하는 의견이 많아질수록 투자자나 제작자는 이 의견을 무시하기 힘들어진다. 결과적으로는 이들을 관객으로 붙잡기 위해 작품에 설명식 대사가 늘어난다.(82-83p)

 

 

“작품을 칭찬하는 쪽보다 비판하는 쪽이 우위를 차지하죠.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작품을 만들다니’하고 분노하면 피해자가 되는 거니까. 게다가 피해 사례는 온라인에서 동조자를 구하기도 쉬워요.”

SNS의 탄생으로 사실상 아무런 비용 없이 간단하게 ‘피해 사례’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의견을 막고, “잘 모르겠다(그래서 재미가 없었다)”라는 리뷰를 피하는 방법은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뿐이다.(84-85p)

 

 

원작 만화의 대사를 최대한 살려 충실하게 영상화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따지지 않겠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요즘은 영상화하면서 대사를 바꾸면 그것이 적절한 각색의 범위 내여도 원작 팬이 ‘원작 파괴’라며 불만을 토로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우려를 없애려면 처음부터 ‘원작 그대로’가는 것이 무난하다.(91p)

 

 

“옛날 사람들이 빨리 감기를 한 건 자신을 위해서였죠. 콘텐츠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한정된 시간 안에 많은 작품을 보고 만족하려고요. 그런데 요즘은 무리에 속해야 안심이 되니까 빨리 감기를 합니다. 생존 전략인 거죠.”

노래방에서 진심으로 부르고 싶은 곡이 아니라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인기곡을 선곡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들은 작품의 감상자가 아니다.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콘텐츠를 활용하는 기술이 탁월한 소비자다.(111p)

 

 

요컨대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 익숙한 사람이 적은 개성은 개성으로서의 가성비가 좋지 않다는 말이다. 발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적은 탓에 화제로 발전하기 어렵다.

“아이돌 그룹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영화, 일반적인 엔터테인먼트가 화제로 삼기에는 훨씬 낫지요.”

너무 개성적인 개성은 개성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113-114p)

 

 

1980년대나 1990년대에는 개성이 있어야 한다는 압박이 지금만큼 크지 않았다. 오히려 ‘다수에 속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주류 집단에 속해 있거나 다수와 비슷한 기호를 가지면 크게 틀릴 일이 없다. 모두가 투표하는 정당에 투표하고, 유명한 간식을 먹고, 모두가 보는 드라마를 보는 식이다. 다들 좋다고 하는 것이니 실패할 확률이 적다. 실패하더라도 모두 같이 창피를 당하니 그리 부끄럽지도 않다. 모두가 같이 불평을 말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지금은 문화적으로 주류가 사라졌다. 가치관의 다양성을 추구하다 보니 취미나 취향이 완전히 나누어져 ‘압도적인 다수가 좋아하는 것’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

‘보통’을 잃어버렸죠. 결과적으로 개성이 없으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매우 불안합니다. 그런 불안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취미를 가지고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고 애써요.

(...)

인기 있는 블로거, 일러스트에 ‘좋아요’가 끊이지 않는 작가, 박식함을 내세운 유튜버, 반짝이는 교우 관계를 자랑하는 학생 기업가 등 ‘개성 있는’사람들과 ‘개성 없는’자신을 비교하면 조급함을 느끼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밀레니얼 세대나 그 위 세대가 ‘라이벌’로 삼은 것은 교실이나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Z세대에게는 SNS에서 유명한 또래들이 모두 라이벌이 된다.(116-118p)

 

 

인터넷을 많이 사용할수록 ‘틀리는 것’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한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로부터 엄격하게 비판받거나 비웃음을 사는 참상을 지겹도록 봐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감상도 하기 전에 리뷰 사이트를 읽고 범인을 알아둔다. ‘정답’을 알고 싶어서. “그들은 빠른 정답만 원한다”라고 젊은이들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누구든 상처받기를 꺼린다. 창피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126p)

 

 

결국 영상 작품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이 등장인물에 공감할 수 있느냐 아니냐로 결정된다. 분명 공감도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의 행동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지 이해하게 되는 것도 감상을 풍요롭게 해주는 요소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에는 자신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타자’가 존재한다. 그 가치관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존재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존중은 ‘마주하고 이해하는’의무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가치를 공감에서만 찾으려는 사람은 ‘공감하기 어려운 가치관을 마주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일이 익숙하지 않다. 그러려면 큰 에너지가 필요한 데다 가성비가 좋지 않으니 말이다.(161p)

 

 

그들은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즉 비판이나 지적을 하지 않고, 당하지도 않는다. 이는 언뜻 보기에 ‘타자’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나와 다른 가치관을 접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는’행위가 결여되어 있다. 관용이 아니라 단지 연결을 피하는 것뿐이다.

(...)

자신을 향한 비판에도 내성이 없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흘려보내지 못한다. 마음이 흔들리고 ‘불쾌하다’며 곧장 비명을 지른다. 이는 다양성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일종의 좁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183p)

 

 

 

ㅡ 이나다 도요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中, 현대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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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6

 

생각보다 철학 얘기가 많지 않았다.

 

 

중국 농부의 우화를 생각해보자. 어느 날 농부의 말이 달아났다. 그 날 저녁 이웃들이 위로해주러 찾아왔다.

이웃들이 말했다. “자네 말이 달아났다니 정말 유감이네. 정말 안된 일이야.”

“그럴 수도.” 농부가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

그다음 날 말이 일곱 마리의 야생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이웃들이 말했다. “오, 정말 행운 아닌가. 이제 말이 여덟 마리나 있잖나. 이렇게 상황이 뒤바뀌다니.”

“그럴 수도.” 농부가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

그다음 날 농부의 아들이 야생마 중 한 마리를 길들이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오, 이런. 정말 안됐구려.” 이웃들이 말했다.

“그럴 수도.” 농부가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

그다음 날 징병관이 전쟁에서 싸울 군인을 징집하러 마을로 찾아왔으나 다리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농부의 아들은 데려가지 않았다. 모든 이웃들이 말했다. “정말 잘된 일 아닌가!”

“그럴 수도.” 농부가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

우리는 광각의 세상에서 망원 렌즈로 찍은 사진 같은 삶을 살아간다. 전체적인 그림은 전혀 볼 수 없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건강한 반응은, 중국의 농부처럼 ‘아마도 철학’을 취하는 것이다.(171-172p)

 

 

종류와 상관없이 어떤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수색에 아무런 성과가 없자 잃어버린 공책의 미적 탁월함뿐만 아니라 그 안에 쓰인 내용의 우수함도 점점 커진다. 수색 이틀째, 나는 영국 여행에서 기록한 그 공책 안에 든 생각이 통찰 면에서나 독창성 면에서나 독보적이라고 확신한다. 수색 나흘째, 나는 그 공책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공책이라고 선언한다. 진짜다. 다빈치의 작업 노트인 코덱스 레스터나 헤밍웨이가 쓴 노트 까이에보다 더 귀중하다(250-251p)

 

 

ㅡ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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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20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 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 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185-186p)

 

 

 

ㅡ 금정연,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中, 지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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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13

 

 

읽음.

 

 

 

ㅡ 노지양, 홍한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中,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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