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5

 

 

몇 년 전에 파괴적 습관을 고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사전 약속’이라는 것임을 사회과학자들에게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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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가 이 유혹적인 여성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알아냈다. 배가 세이렌이 사는 바다에 접근하기 전에 선원들에게 자기 손발을 돛대에 단단히 묶어두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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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살을 뺄 때 이 방법을 썼다. 평소에는 탄수화물을 잔뜩 사다 두고 스스로에게 너는 천천히 적당량을 먹을 수 있을 만큼 강인하다고 말한 뒤, 결국 새벽 2시에 와구와구 먹곤 했다. 그래서 탄수화물을 사두지 않았다. 새벽 2시에 프링글스를 사러 나갈 생각은 없었다.(36-37p)

 

 

그저 시스템에 정보를 더욱 채우기만 하면 되었다. 정보를 더 많이 주입할수록 사람들이 개별 정보에 집중하는 시간이 줄었다.

“왜 이런 가속화가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수네가 말했다. “그저 오늘날의 시스템에 정보가 더 많은 겁니다. 100년 전을 생각해보면, 뉴스가 이동하는 데 말 그대로 시간이 걸렸어요. 노르웨이의 피오르에 크나큰 재앙이 발생했다면 피오르에 있는 사람들이 오슬로까지 내려와야 했고, 누군가가 그에 관한 기사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 기사는 아주 천천히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2019년에 발생한 뉴질랜드 대학살과 비교해보라. 당시 타락한 인종차별주의자가 모스크에서 무슬림을 죽이기 시작했을 때 그 상황은 “말 그대로 실시간 방송”되었고, 전 세계 모든 사람이 그 영상을 시청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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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내가 묻자 수네가 빙긋 웃었다. “속도는 기분을 좋게 해주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속도에 빠지는 건 그게 좋기 때문이기도 하잖아요. 온 세상과 연결되었다고 느끼고, 어느 주제에 관해 무엇이든 알아내고 배울 수 있다고 느끼게 되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노출되는 정보량의 엄청난 팽창과 정보가 들이닥치는 속도를 아무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착각이다. "점점 진이 빠지게 됩니다." 수네가 말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차원에서 깊이를 희생하고 있다는 겁니다····깊이는 시간을 요구합니다. 깊이는 사색을 요구해요. 모든 것을 다 따라 잡아야 하고 늘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면 깊이를 가질 시간이 없어져요.(51-52p)

 

 

그리고 모든 인간이 이해해야 하는 사실, 자신이 앞으로 설명할 모든 내용의 근원이 되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고 말했다. 그건 바로 "우리 뇌는 동시에 한두 개의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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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미신을 만들어냈다고, 얼이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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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신을 사실로 둔갑하기 위해 우리는 애초에 인간에게 적용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던 용어를 하나 빌려왔다. 1960년대에 컴퓨터 과학자들은 프로세서가 여러 개라서 동시에 두 가지(또는 그 이상)의 작업을 처리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계의 성능에 '멀티태스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이 개념을 가져와 인간에게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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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사실 사람들은 (얼이 설명한 것처럼) "저글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일 저 일을 전환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해요. 뇌가 그 사실을 가려서, 의식에서는 아주 매끄러운 경험을 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작업 사이를 오가면서 순간순간 뇌를 재설정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는 대가가 따르고요."(59-60p)

 

 

그때, 주의력을 되찾으려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방해물들을 제거하는 방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면 그저 텅 비게 될 뿐이다. 우리는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을 제거하고, 몰입의 원천으로 그 자리를 대체해야 한다.(93p)

 

 

록산느는 18시간 내내 깨어 있다면(아침 6시에 일어나 자정까지 깨어 있다면) 하루가 끝날 무렵의 반응 속도는 혈중알코올농도가 0.05일 때와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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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빼앗겨도 살 수는 있습니다. 잠을 줄이지 않으면 아마 아이들을 키울 수 없을 거예요. 허리케인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을 거고요. 우리는 분명 잠을 줄일 수 있어요. 하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라요. 그 대가는 바로 몸에서 교감신경계가 활성화 된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 몸은 이렇게 생각해요. '어, 잠을 줄이고 있네. 비상 상황인 게 분명해. 그러니 비상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온갖 생리적 변화를 일으켜야겠어. 혈압을 올리자. 패스트푸드가 당기게 만들어야지. 빠르게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도록 당도 더 당기게 만들 거야. 심박도 올릴 거고····' 이 모든 변화는 나는 대기 상태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몸은 자신이 왜 깨어 있는지 모른다. "뇌는 우리가 빈둥거리면서 드라마 <시트 크릭>을 보느라 잠을 안 자고 있다는 걸 몰라요. 우리가 잠을 안 자는 이유를 모르죠. 하지만 그 결과로 일종의 생리적 비상벨이 울리는 겁니다."(107-108p)

 

 

침실은 적정 온도여야 하는 데, 거의 추울 만큼 서늘해야 한다. 잠들기 위해서는 심부 체온이 낮아져야 하기 때문이며, 체온을 낮추기 힘들수록 잠들기까지의 시간도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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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야 하는 많은 일이 따분할 만큼 뻔하다. 속도를 늦추고,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고, 잠을 더 자면 된다. 모두가 이 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데도 실제로는 정반대로 하고 있다. 속도를 높이고, 전환을 더 많이 하고, 잠을 적게 잔다. 우리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동과 할 수 있다고 느껴지는 행동 사이의 괴리 속에 산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그 괴리를 만드는가? 사람들은 왜 명백히 집중력을 개선해줄 행동들을 하지 못하는가? 어떤 힘이 우리를 막고 있는가?(119-120p)

 

 

그러나 레이먼드가 누구보다 먼저 지적하듯이, 이 결과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소설 읽기가 오랜 기간에 걸쳐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을 수도 있지만, 이미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소설 읽기에 더 끌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그의 연구는 논란과 반박이 많다. 레이먼드는 소설 읽기가 공감 능력을 강화한다는 점과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소설 읽기에 끌린다는 점이 둘 다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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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설명하는 효과가 종이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를 모방한 복잡한 서사에 몰입하는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연구는 긴 텔레비전 시리즈 또한 종이책만큼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또 다른 그의 연구는 동화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아이들이 공감 능력이 더 좋지만, 길이가 짧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발견했다. 내가 보기에 이 연구 결과는 우리가 소셜미디어에서 목격하는 현상과 일치하는 듯 보인다. 토막 난 파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는 무언가에 오랜 시간 집중할 때만큼 공감이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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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이 노출되는 목소리의 결을 내면화한다. 타인의 내면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 이 이야기가 우리의 의식 패턴을 다시 형성한다. 우리는 더욱 통찰력 있고 개방적이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반면 소셜미디어를 장악한 단절된 비명과 분노의 파편에 하루에 몇 시간씩 노출되면 우리의 사고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136-138p)

 

 

케이프코드로 달아나기 전에는 정신적 토네이도 속에 살았다. 팟캐스트를 듣거나 통화를 하지 않고서는 절대 산책을 나서지 않았다. 상점에서 핸드폰을 보거나 책을 읽지 않고 2분 이상 기다리는 일도 절대 없었다. 모든 순간을 자극으로 채우지 않는다는 생각은 나를 패닉에 빠트렸고, 그러지 않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여섯 시간 동안 그저 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을 보면 다가가 이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냥 확인하고 싶어서요. 살아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거, 죽음을 카운트다운 하는 시계가 끊임없이 째깍거리고 있다는 거,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는 이 여섯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 알고 계시죠? 그리고 죽으면 죽음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거 알고 계신 거 맞죠?(142-143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는 내게 디지털 디톡스가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했다. "일주일에 이틀씩 바깥에서 방독면을 쓰는 노력이 환경오염의 해결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예여. 개인 차원에서는 단기간 특정 효과를 볼지 몰라요. 하지만 지속 불가능하고,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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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는 환경의 변화만이 진정한 차이를 만들 수 있는"상황에서 개인의 절제가 주요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라고 말했다.(163p)

 

 

오랫동안 내 집중력 악화의 원인이 나 자신의 탓이거나 하나의 기술로서의 스마트폰 자체에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핸드폰이 등장해 자신을 파괴했다고 되뇐다. 나는 모든 스마트폰이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진실이 더욱 복잡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물론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우리 삶을 방해하는 요소가 어느 정도 많아졌겠지만, 우리의 집중 시간이 입는 가장 큰 피해는 좀 더 미묘한 데서 온다. 문제는 스마트폰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스마트폰의 앱과 노트북에서 여는 웹사이트가 설계되는 방식이다.

트리스탄은 전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우리의 주의력을 최대한 많이 빼앗으려는 의도로 우리가 사진 핸드폰과 그 핸드폰에서 실행되는 프로그램을 설계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이러한 설계가 불가피한 것이 아님을 사람들이 이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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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집중력을 좀먹는 현재의 기술 작동 방식은 과거나 지금이나 선택의 결과다. 이 방식은 실리콘밸리의 선택이며, 실리콘밸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는 사회 전반의 선택이다. 과거에 인간은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었고, 현재에도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다. 트리스탄은 이러한 기술을 전부 그대로 보유하면서, 최대한 우리를 산만하게 하는 방향으로 설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199-200p)

 

 

우리가 더 심각한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탓하는 방식이 니르에게 더 편리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더 기본적인 차원을 살펴보자. 진실은, 그와 똑같이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잔혹한 낙관주의의 문제 중 하나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보통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특수한 사례를 가져다가 그것이 평범한 일인 양 행세한다. 막 실직해서 어떻게 하면 다음 주 화요일에 집에서 쫓겨나지 않을지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명상을 통해 평정심을 찾기가 더 쉽다. 완전히 소진되고 스트레스에 휩싸여 또다시 스트레스로 가득할 다음 몇 시간을 버티게 해줄 위안이 절박하지 않다면, 다음번의 햄버거와 페이스북 알림, 마약성 진통제를 거부하기가 더 쉽다. 사람들에게 이게 "꽤 쉬운"문제라고, "그 방해 금지 버튼만 누르"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대다수의 삶의 현실을 무시하는 일이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우리의 집중력을 망가뜨리는 시스템을 바꿀 수 없으므로 우리 개개인의 행동을 바꾸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왜 우리가 이 시스템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를 "낚고" "미치게"만들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이 가득한 환경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가?(236p)

 

 

듣기 좋은 자기계발 강의로 연경 끊기의 장점을 알려주는 것은, 그럴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실제로 상사 때문에 긴장을 풀 수 없는 사람들에게 긴장 풀기의 장점을 눌어놓는 것은 분노를 유발하는 조롱과 같다. 기근 피해자들에게 리츠 호텔에서 식사하면 얼마나 기분 좋은지를 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산이 많아서 일할 필요가 없다면 아마 당장 이러한 변화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우리는 빼앗긴 시간과 공간을 되찾기 위해, 그래서 마침내 휴식을 취하고, 자고, 집중력을 회복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305p)

 

 

 

ㅡ 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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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

 

 

어떤 한 가지에 집중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무시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떤 책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깊이 몰입한 나머지 옆에 앉은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집중의 힘을 뒤집어서 말하면 다른 것들을 지우는 힘이다. 결핍이 ‘집중하게 한다.’고 말하지 않고 결핍이 사람들로 하여금 터널링을 하도록, 즉 임박한 결핍을 제어하는 데만 오로지 모든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게끔 유도한다고 쉬운 말로 말할 수 있다.(60-61p)

 

 

결핍도 사람의 정신적인 프로세서에 비슷한 짓을 한다. 다른 처리 사항들을 정신에 끊임없이 짐 지울 때 정신은 긴급한 과제를 수행할 여유가 적어진다. 이로써 우리는 이 장의 중심적인 가설인 ‘결핍은 대역폭을 직접적으로 축소한다.’에 도달했다. 개인이 처음부터 타고난 능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이냐가 중요하다.(94-95p)

 

 

그렇다면 무엇이 결핍에 대해서 그렇게 특별할까?

결핍은 기본적인 속성상 여러 중요한 근심거리가 다발로 한 데 뭉친 것이다. 어느 곳 혹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부부싸움과 다르게, 돈 문제나 시간 문제와 관련된 몰입은 가난한 사람과 바쁜 사람 주변에 꼬여서 좀처럼 떠나지를 않는다. 가난한 사람은 끊임없이 돈과 관련된 근심거리와 씨름해야 하고, 바쁜 사람 역시 시간과 관련된 근심거리와 씨름해야 한다. 결핍은 다른 근심거리들보다 우선되는 짐을 추가로 생성한다. 그리고 당연하게 지속적으로 대역폭에 세금을 부과한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부자든 빈자든 자기 배우자와 싸울 수 있고, 또 자기 상사로부터 질책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풍족함을 경험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일부만 이런 문제에 사로잡히는 반면에 결핍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이런 문제에 사로잡힌다.(123p)

 

 

패스트푸드 가게의 매니저는 자기 직원들이 보이는 행동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숙련된 기술이 부족하다거나, 동기부여가 되어 있지 않다거나, 손님 응대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거나 하는 등의 일상적인 대상으로 눈을 돌린다. 사실상 세금이 부과된 대역폭은 실제 현실에서 이런 식으로 비쳐질 수 있다. 즉, 회사일로 급하게 준비해야 하는 프레젠테이션 작업에 사로잡힌 아버지가 딸에게 퉁명스러운 말을 쏘아붙일 때 이 사람은 나쁜 아버지로 보인다. 돈에 쪼들리는 대학생이 시험에서 쉬운 문제 몇 개를 틀렸을 때, 이 학생은 게으르거나 무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업무에 숙련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부주의한 것도 아니다. 단지 무거운 대역폭 세금에 짓눌려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 사람 개인이 아니라 결핍이다.(127p)

 

 

덜 바쁜 사람의 경우, 느슨함은 실수를 흡수해서 부정적인 결과를 최소화한다. 이에 비해서 바쁜 사람은 실수의 부정적인 결과를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추가되는 시간만큼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대가를 훨씬 더 크게 치러야 한다. 우리는 조금 전에 느슨함이 얼마나 비효율적일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우리는 한 번도 쓰지 않을 물건을 사며 돈과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느슨함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유효성을 발견할 수 있다. 느슨함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 만회할 수 있는 여지, 실패를 해도 괜찮을 여유 공간을 제공한다.(157-158p)

 

 

 

ㅡ 센딜 멀레이너선·엘다 샤퍼, <결핍의 경제학> 中, 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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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7

 

 

숨가쁜 추모와 기간을 정한 애도를 하며 ‘슬픔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자못 엄숙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본 뒤 슬픔에만 머무르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하다. 구경하는 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본 뒤에는 우리끼리 눈을 마주치고 우리가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함께 고민하는 일이 남아있으니까. 어쩌면 이런 선언은 참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 정치가 가동되는 순간을 원천 봉쇄하는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34p)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날씨는 경제이기도 한데, 농업과 어업 같은 1차 산업은 물론, 물류의 흐름과 인력의 출퇴근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날씨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가혹하고 무정해 보이지만, 실은 차별 없음과 거리가 멀다. 날씨가 몰고 오는 위험함과 불쾌함은 일정 부분 값비싼 주거 환경이나 적절한 냉난방 시설로 다스릴 수 있다. 그러니 날씨로 인해 가장 먼저 취약해지는 건 약자들이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그리고 노인.(77p)

 

 

기후 위기를 취재해 온 미국 언론인 제프 구델은, 폭염 같은 기후 위기가 가장 약한 사람들을 약탈적으로 추려내던 시기가 곧 지나갈 것이라고 예견한다. 위기가 심화될수록, 앞으로는 훨씬 더 공평하고 민주적으로 이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89p)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통계는 이 기사 저 기사에 인용되며 산업재해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기도 하지만, 잘 정리된 숫자 속으로 진짜 이야기들을 빨아들여 감춰버리기도 한다. 산업재해가 흔하면 흔할수록 ‘끊이지 않는 산재’같은 제목을 단 기사를 계속해서 만들기도 새삼스러워진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94p)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소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120-121p)

 

 

그런데 취재에 응하는 미화원들의 표정이 좀 떨떠름해 보였다. 지하에 휴게실이 있었을 때가 낫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화원들이 쉬는 모습이 지상으로 나와 ‘눈에 띄게’되자 입주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이었다.(123p)

 

 

강자들의 선행만큼은 아니겠지만, 약자들의 선행은 종종 스포트라이트를 받곤 한다. 물론 약자들의 선행이 과다 재현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다만 약자들이 선행이 뉴스가 될 때는, 이들이 약자라는 부분에 뉴스 가치가 실린다. 약자라는 점이 필요 이상으로 강조될 때도 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공동체의 도덕심을 환기하는 역할까지 약자들에게 과다 부여된 것은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서 온다. 연말이면 자기 재산을 다 기부하는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뉴스에 등장한다. 이런 뉴스들에는 “아직 회망이 있다”, “사람 사는 사회다”, “따스한 온전을 느꼈다”는 반응들이 따라오곤 한다.

이들이 겪는 ‘불우함’, 그걸 견뎌낸 ‘근면함’과 ‘베푸는 마음’이 순차적으로 조명될 때, 이런 뉴스들은 누구를 향해 어떠한 메시지를 보내게 될까? 뉴스 매체의 메시지 주입 능력을 과신하는 건 아니지만, 혹여 이런 뉴스가 약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행동의 폭을 더 옭아매는 것은 아닐까?(132p)

 

 

앞서 말했듯 특혜에서 배제된 집단으로 묘사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선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악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약자라는 맥락 안에서 조명받곤 한다. 약자의 선행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계층의 특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개인의 독특한 선함의 질감을 놓치지 않도록, 악행을 바라볼 때는 개인의 악함으로는 다 포착되지 않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사회적 요인과 모순에 고루 책임을 묻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136p)

 

 

<공감의 배신>에서 폴 블룸이 이야기했듯,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와도 같아서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148p)

 

 

 

ㅡ 김인정, <고통 구경하는 사회> 中,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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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은주와의 대화 이후, 그제야 기본을 다 갖춘 삶 이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밥벌이해 먹고사는 데야 이 월급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 이후는 어떻게 꾸려나갈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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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기계처럼 일했고 공장에서 열두 시간을 보냈다. 힘들진 않았다. 다만 허무했다. 집에 돌아와 샤워하고 영화 한 편이나 애니메이션 네 편 보면 또 회사. 맘놓고 쉴 수 있는 날은 고작 하루. 그나마도 야간에서 주간 전환 시엔 반나절 남짓. 이 굴레 안에 청춘을 계속 가두어놓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47p)

 

 

그제야 나 자신의 안일함을 깨달았다. 내가 누린 일상이란 그저 불행이 닥치지 않았기에 유지됐을 뿐. 나 또한 언제든 다칠 수 있으며, 사고로 인해 삶이 끝날 수 있단 생각이 들자 온갖 나쁜 미래상이 그려졌다. 일상이 무너진 현실을 상상하니 두려워졌다. 누가 중소기업의 이런 현실을 알아줄까? 기자? 정치가? 금속노조? 진보 지식인? 아니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없는 공론은 허상일 뿐. 그날부터 현장의 모습을 촘촘하게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211-212p)

 

 

냉소는 인간의 가장 나쁜 감정입니다. 분노나 증오마저 마음먹기 따라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냉소는 그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 뿐이에요. 대상을 이해할 생각도 없고 공감하지도 못하니 무슨 발전이 가능하겠습니까.(272p)

 

 

ㅡ 천현우, <쇳밥일지>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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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5

 

 

뻔히 책 표지에 적혀있어서 할 말은 없는데 대충 봐서 그랬는지 현대사상이라고 해놓고 프랑스 현대철학자들만 나와서 좀 당황스러웠다. 입문서에 깊이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므로 평소 여러 책에서 조금씩 접했던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의 사상에 조금 더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데리다, 들뢰즈, 푸코로 시작하는 초반은 굉장히 간명하고도 쉽게 설명하므로 쉬이 따라갈 수 있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어려워진다. 철학 초심자를 위한 배려로 상이한 입장을 가진 철학자들을 하나의 큰 도식으로 뭉뚱그려 엮었다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확실히 사람은 일을 더 진척시키려면 다른 가능성을 잘라 버리고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 무엇인가를 잘라 버렸다. 고려에서 배제해 버렸다는 것에 대해 창피하다는 생각이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 잘라 버린 것을 다른 기회에 회복하려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또 가고정과 차이의 이야기를 떠올려 주었으면 하는데요, 모든 결단은 그것으로 이제 아무 미련 없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미련을 동반하는 것이고, 그러한 미련이야말로 바로 타자성에 대한 배려입니다. 우리는 결단을 거듭 되풀이하면서 미련의 거품 속에서 다른 기회에 어떻게 응할 것인가를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탈구축적으로 사물을 봄으로써 편향된 결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항상 편향된 결단을 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잠재적인 아우라처럼 타자성에 대한 미련이 뒤따른다는 것을 의식하자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데리다적인 탈구축의 윤리이며, 바로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친절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51-52p)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밖에서부터 반강제로 주어지는 모델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도전을 해서 스스로 준안정상태를 만들어 나가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꽤 엄격한 요구입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생각하는 것은 모종의 예술적, 준예술적 실천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활 속에서 독자적인 거처가 되는, 자신의 독자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여러 가지 만들어 나가자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고, 관엽식물을 기르는 것도 좋고, 사회 활동에 몰입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활동을 다양하게 조직화함으로써 인생을 준안정화해 나가면 되는 것이지, ‘진정한 나의 본모습’을 탐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를 하자, 여러 가지를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그렇게 낙관적이고, 행동으로 사람들의 등을 떠밀어 주는 사상이거든요.(72p)

 

 

그런데 그러한 정신분석은 어떤 식으로 현대사상과 연결되어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현대사상은 정신분석을 비판하지만, 원래는 정신분석에서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앞 장에서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기에 표면의 질서 아래 숨겨져 있는 힘의 차원이 발견되고 20세기에 이르러 그러한 탈질서적인 것의 창의성이 얘기되었습니다. 표면의 질서는 이항대립적으로 조립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도망치는 것은, 데리다라면 탈구축에 의해 질문되는 회색 지대이고, 들뢰즈라면 도주선 끝의 외부라는 것이 됩니다. 인간의 사고나 행위에는 질서 정연한 것만이 아니라 불합리한 힘의 흐름에 맡겨져 있는 면이 있고,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르려면 질서를 벗어나는 디오니소스적이고 꺼림칙한 것을 인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정신분석은 인간에 대한 하나의 정의를 줍니다. 그것은 “인간은 과잉의 동물이다”라는 것입니다.(144p)

 

 

그런데 언어는 분별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이쪽은 이쪽, 저쪽은 저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언어습득이란 어떤 의미에서 세계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인간은 도구를 제대로 조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아마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겁니다. 동물의 경우라면 언어를 습득하지 않고서도 일정한 행동을 취할 수 있지만, 동물이 본능적으로 사물을 구별하고 분절하여 파악하는 반면, 인간은 언어습득과의 관계에서 세계를 다시 분절하는 ‘제2의 자연’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 안에서 목적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습니다. 언어란 들뢰즈의 어휘를 사용하면 ‘제도’의 일종입니다.

목적적, 실리적으로 사물을 구별하고 행동하는 ‘제대로 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경계를 넘어 여러 사물을 접속하는 상상력은 약해집니다.

그런데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상상력의 리좀적 전개와 언어적 분절성은 인간에게 병립되어 있습니다.(158p)

 

 

 

데리다, 들뢰즈, 푸코에서 공통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올바른 의미다”라고 확정할 수 없고 항상 취하는 관점에 따라 의미 부여가 변동한다는 의미의 결정 불가능성 혹은 상대성입니다.

다만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정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은 복잡하다”라는 것입니다. 다의적, 양의적이라는 거죠.

예를 들어 푸코라면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지배자가 지배에 가담하는 면이 있고, 그래서 단순히 어느 한쪽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역학이 복잡하게 있다는 식으로 현실의 복잡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둘 다 그게 그거니까 “둘 다 나쁘지 않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현대사상의 경향은 단순화되고 소박한 상대주의로 파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물은 어떻게든 파악된다”라거나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 역사수정주의가 된다”라거나 “‘탈진실’이라고 일컬어지는 제멋대로의 사실 인식 강요나 음모론을 허용하게 되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확실히 현대사상은 그러한 현대의 곤란한 현상을 일도양단으로 [과단성 있게]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의 사고·언어에는, 예를 들어 음모론에도 이르게 될 가능성이 애초에 있다는 것을 먼저 냉정하게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건 안 좋으니까 없애 버리세요”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어요.

인간은 애초에 정신분석적으로 말해도 ‘과잉’적인 존재이며, 일정한 의미의 틀을 벗어나 사물에 다르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그것이 뚱딴지같은 망상으로 전개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설정으로서 있을 수 있습니다.(196-198p)

 

 

다시 푸코가 등장하게 됩니다. 푸코는 왜 고대로 회귀했을까요?

3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성의 역사 Ⅳ』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마음에 해소할 수 없는 죄책감을 설치함으로써 무한하게 반성을 강요받는 주체를 정립했습니다. 이 죄책감, 즉 원죄란 바로 부정신학적 X입니다. 기독교의 주체화는 바로 부정신학적 주체화입니다. 거기서 푸코는 그 이전의, 말하자면 무한하게 반성하지는 않았던 시대의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세네카 같은 로마의 현인들은 뭔가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것을 근원적인 죄로 여기지 않고 하루의 일과 끝에 일기를 쓰고 반성하며 “더 이상 하지 말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

즉, 수수께끼의 X를 파고들지 않고, 생활 속에서 과제가 하나하나 완료되어 간다는 그런 이미지의, 담담한 유한성입니다. 주체란 우선 행동의 주체이지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반드시 하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관련된 문제는 있지만, 모든 문제가 연결되어 하나로 뭉칠 때, 사람은 엄청난 정체성의 고민으로 폐색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문제는 분할해서 하나하나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데카르트도 말하지만, 바로 그 거대한 수수께끼, 거악이 일어나지 않도록 개별적으로 사물에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복수성으로 향해 가는 방향 지어짐의 의미가 아닐까요?

(...)

어쩔 수 없이 고민하는 것이 깊은 삶의 방식인 것 같은 인간관이 근대에 의해 성립되고, 그것이 다양한 예술을 산출해 낸 것인데요,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세속적으로 사태와 씨름하는 것은, 인간이 변화가 없이 단조롭게 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세속성에야말로 거대한 고민을 품고 있는 게 아닌 또 다른 인생의 깊이, 희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깊이가 있지 않을까요?

문제와 씨름한다는 것은 그저 해석을 이러쿵저러쿵 쓸데없이 만지작거리며 농락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하고 아주 조금이라도 세계를 움직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고뿐만이 아닙니다. 신체가, 사물이, 물질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개개의 문제에는 물론 어려운 것이 있고, 그것은 스트레스를 강요하지만, 그 고통을 무한한 고민으로부터 구별합니다.

(...)

세계는 수수께끼의 덩어리가 아닙니다. 세계는 산재하는 문제의 장입니다.

바닥없는 늪 같은 깊이가 아닌 다른 깊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속성의 새로운 깊이이며, 지금 여기에 내재하는 것의 깊이입니다. 그때 세계는 근대적 유한성에서 보았을 때와는 상이한, 다른 종류의 수수께끼를 획득합니다. 우리를 어둠 속으로 계속 끌어들이는 수수께끼가 아닌, 밝고 맑은 하늘의 수수께끼. 맑기 때문에 수수께끼입니다.(207-213p)

 

 

ㅡ 지바 마사야, <현대사상 입문> 中,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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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22

 

 

되게 못 쓴 에세이다. 저자의 만화는 예전에 몇 권 재밌게 읽었던지라 아주 약간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재미도 감동도 웃음도 전혀 나지 않는 소소한 일상에 대한 글이 계속 이어져 읽다가 중간중간 현타가 와서 길지도 않은 책을 읽는데 오래도 걸렸다. 힘을 빼고 글을 쓰는 것과 성의 없이 글을 쓰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젠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되도록 일찍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막상 해도 오래 못 하는 경우가 제법 있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10년 동안 계속했지만 그 사이에도 나는 다양한 것에 손을 댔다.(96p)

 

 

그러나 ‘전부 말하기족’은 죄다 끝까지 말한다. “이동해주세요”까지 말한다. 끝까지 전부 말하는 걸 듣고 조금 상처받는 건, 전부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사람으로 여겨진 것 같아서다.(103p)

 

 

2층 호텔 창에서 내려다본 한밤중의 도노역 플랫폼,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가. 결국 잊을 것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나.(255-256p)

 

 

 

 

ㅡ 마스다 미리, <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 中, 티라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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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15

 

후반부의 김영총 씨의 인터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기억해두었다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던 다큐멘터리가 완성된다면 꼭 봐야지.

 

 

한도현: 출생부터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굵직한 사건들은 다 얘기했기 때문에 뭐라고 할까, 정말 인사이드 아웃이 돼버린 것 같아요. 좋으면서도 무섭네요. 우리 이야기 나눌 때 그런 모습은 별로다, 이런 얘기까지 나왔으니까. 당신은 지금 내 모습의 원인과 결과를 다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쟤 이상해, 하고 거리를 두진 않더라도, 굳이 가까이하진 않을 수 있겠다 싶어요. 내 모든 면을 다 보여줬으니 나한테 호감을 갖긴 어렵겠죠. 그런데 더 가까워져서 신기해요.

 

정성은: 상대의 안 좋은 모습까지 다 알게 되면 거리를 두기보다 오히려 좋아하게 되는 사람들이 더 많을걸요. 카사노바도 자신의 불우한 가정사부터 얘기한다고 하잖아요. 그 사람의 맥락을 다 알게 되면 이해 못할 일이 없고,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면 세상은 뭐든 이해해줍니다.(176-177p)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면 어떤 기분이야?” 키스는 어떤 느낌이냐고 묻는 초등학생을 달래듯 그는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 연애한다고 해서 매일 신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니야. 그냥 같이 맛있는 거 먹고, 마음의 안정을 주는 내 편이 생기는 거지. 내가 보기엔 네가 더 재밌게 사는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인지 연애를 해보고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고, 여행을 훌쩍 떠나도 그것만으로는 기쁨이 영원하지 않다. 또다시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 우리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193-194p)

 

 

ㅡ 정성은, <궁금한 건 당신> 中, 안온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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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8

 

칼럼 모음집이라 그런지 각 글들이 짧아서 조금 아쉽다. 너무 긴 글도 싫지만 이건 너무 짧은 걸.

 

 

 

“말하는 데 한 푼도 들지 않은 당신의 찬사가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는 먼저 생각해 보시죠.” 18세기 영국 문인 새뮤얼 존슨 박사가 한 말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칭찬이 모두 무가치하냐 아니냐가 아니고, 칭찬을 말한 쪽이 빠지는 고유의 착각이다. 그는 원가(=제로)와 무관하게 자신의 칭찬이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받은 쪽이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수표라도 써 준 것처럼 말이다.(43-44p)

 

 

중고생 시절, 미국의 ‘물질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처음 의심하게 된 계기는 히틀러를 피해 건너온 망명자들이 제공했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기들 ‘문화’를 우리 ‘천박한 물질주의’와 대비시키곤 했다. 들여다보니 그들의 ‘문화’라는 건 유럽 시절 하인을 부리고 살았다는 것과 그들이 황홀해하는 릴케, 슈테판 츠바이크, 브루크너, 말러에 대한 지식 정도가 다였다. 그들이 말하는 ‘문화’가 신세계에서 형편만 허락한다면 제대로 누리고 싶은 중산 계급식 물질주의와 감상주의를 뜻할 뿐이라는 걸 발견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폴린 케일, 「나는 영화관에서 그것을 잃었다」, 1965)(53p)

 

 

우정의 다이내믹은 꽤 관대한 편이어서 가장 친한 친구의 순위 바꿈이나 연락의 휴지를 허용한다. 하지만 한번 금이 간 친구 관계는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 연애가 거의 무한정 누리는 사치, 즉 싸움을 우정은 한 번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친구 관계는 별로 질기지 않고, 한번 못 볼 꼴을 보면 바로 해소된다. 그런 오점만 없다면, 십 년간 겨울잠을 자던 밍밍한 친교도 나중에 잘 이어지곤 한다.(60p)

 

 

“그는 다른 작가들을 그들이 보인 업적으로 평가했지만, 그들이 그를 평가할 때는 장차 달성할 업적을 가지고 평가해 주길 바랐다.” 나는 네 겉만 보겠으나 너는 내 속을 봐 줘야 한다는 이런 태도. 내면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태도.(71p)

 

 

 

「에지웨어로 뒷골목의 조촐한 극장」(1939)은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이 남긴 아마 단 한 편의 환상소설이다.

(...)

대영 박물관 열람실을 나와 저녁 거리를 쏘다니던 한 사람이 영화관에 간다.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지만, 돈은 없고 비는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들어선 꾀죄죄한 극장은 무성영화 전용관을 표방하고 있다. 즉 ‘고급문화도 아니고 싸구려에다가 임시적이고 욕구불만에 가득 찬 어떤 시대착오적 오락’이 이미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거의 손님이 없는데, 영화에서 자살 장면이 나오자 옆자리에 앉은 사내가 말을 건다. 아니 대놓고 귀에다 속삭인다. “엉터리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피가 많이 나오는데.” “뭐가요?” “사람을 죽이면.” “저건 살인이 아닌데요.” “나도 알아.” “뭘 안다는 거죠?” “저런······것을.” 사내는 혼잣말로 뭔가 불길하고 낯익은 거리 이름을 중얼거리다 나간다. 불이 들어오고 사내가 앉았던 곳 스쳤던 곳 모두가 피투성이다. 최근 뉴스에 난 살인 사건이 뇌리에 스친 주인공은 달려 나가 경찰에 전화를 건다. 틀림없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자는 살인범이다·····. 흥미롭게 듣고 있던 경찰이 대꾸하는 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려온다. “아니요. 범인은 잡았습니다·····. 없어진 것은 시체뿐입니다.”(161-163p)

 

 

아마 한 조직이 선한지 악한지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두목보다 착한 부하가 생존이 가능한지를 살펴보는 것일지 모른다.

(...)

그러나 잠자코 있으면 살릴 사람들을 굳이 죽이기 위해 그가 의식적인 선택을 한 것은 분명하다. 이런 선택을 평범함이나 복종이라는 말로 포장하기는 어렵다.(분명히 그는 복종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아이히만은 이십 년 뒤 바로 평범함과 복종의 대표자로 부활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때문인데,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본 그녀는 그를 사악하기보다는 평범하고, 고지식하게 명령을 수행하려 애쓴 다소 머리가 둔한 공무원적 인물로 묘사했다.

(...)

아이히만이 평범한 인물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게다가 아렌트가 말한 평범함은 보통 사람의 특출하지 못한 면을 중립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가 견딜 수 없어 하는 모든 특성의 총합 같은 인상을 준다. 나중에 그녀는 좀 더 힌트를 주었다. “그의 특징은 천박함이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는 그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대중화될 수 없는 전제 위에 서 있었다. 자신이 몹시 싫어하는 부류에게 ‘평범하다’는 수식어를 부여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렌트 같은 지식인 귀족이 아니라면 말이다.

(...)

내용이 없어진 개념들이 그렇듯 악의 평범성은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적용해도 되는 말이 되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겁을 주는 말이기 쉬웠다. 악당들도 마찬가지로 겁을 먹으면 좋을 테지만, 그 개념이 그런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인지는 조금 의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악당이 되는 것보다, 악당이 자신을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기기 시작하는 것, 그게 훨씬 두려운 일이 아닐까.(190-193p)

 

 

 

ㅡ 김영준,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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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7

 

https://www.donga.com/news/It/article/all/20230608/119682722/1

필즈상을 받은 수학자 허준이는 자극을 피하고자 몇 달째 같은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라서 링크를 남겨준다.

읽기 전에 대략적인 내용을 들었지만 그래도 읽어보길 잘했다. 다만 각종 사례를 바탕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후반부는 너무 처지고 일반화가 심하다. 이 책을 읽기 전 노년내과 의사인 정희원이 ‘불교는 왜 진실인가’가 이 책의 상위호환(?)이라고 해서 일단 이것도 빌려두긴 했음.

 

 

 

 

유아기의 경험이 오랫동안 잊히거나 의식적인 자각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도 평생 심리적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설명은 정신 분석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유아기의 트라우마가 성인의 정신병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통찰은, 모든 도전적인 경험이 우리를 심리치료용 소파로 데려갈 수 있다는 확신으로 변질됐다.

 

생각해 볼 만한 말인 것 같다. 결국은 정도의 문제겠지만 그 정도란 건 사람마다 다른 것이고 그걸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도 없는 일이라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양육과 교육 과정에서 발달심리학과 공감이 강조되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가치를 성취도와 별개로 인정하고, 학교 운동장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신체적·정신적 야만 행위를 삼가며, 사고하고 배우며 논의할 수 있는 안전한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완충재를 가득 채운 독방 같은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유년기를 너무 질병처럼 대하고 과하게 관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이러면 아이들은 상처받을 일이야 없겠지만 세상에 대처할 방법도 모르게 된다.

 

 

하지만 저울에 관한 중요한 속성이 하나 있다. 저울은 수평 상태, 즉 평형equilibrium을 유지하려고 한다. 한쪽이나 다른 한쪽으로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울이 쾌락 쪽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저울을 다시 수평 상태로 돌리려는 강력한 자기 조정 메커니즘self-regulating mechanism이 작동한다. 이러한 자기 조정 메커니즘은 의식적 사고나 별도의 의지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반사 작용처럼 균형을 잡으려 한다.

 

 

1970년대에 사회과학자 리처드 솔로몬Richard Solomon과 존 코빗John Corbit은 이러한 쾌락과 고통의 상호 관계를 대립-과정 이론opponent-process theory이라고 칭했다. “쾌락적 혹은 정서적 중립으로부터 오랫동안 혹은 반복해서 벗어나면 … 그만큼의 대가를 치른다.” 그 대가란 자극과 반대되는 가치를 갖는 이후 반응after-reaction이다. 그러니까 옛말처럼 올라가는 건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쾌락 자극에 동일하게 혹은 비슷하게 반복해서 노출되면, 초기의 쾌락 편향은 갈수록 약해지고 짧아진다. 반면 이후 반응, 즉 고통 쪽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갈수록 강하고 길어진다. 과학자들은 이 과정을 신경 적응neuroadaptation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쾌락을 추구할수록 우리의 그렘린은 점점 더 커지고 빨라지고 많아지며, 우리는 이와 동일한 효과를 얻기 위해 앞서 선택한 쾌락을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고통 쪽으로 기울어진 쾌락-고통 저울은 앞서 상당한 절제 기간을 거친 사람들도 다시 중독에 빠지게 만든다. 왜 그럴까? 우리의 저울이 고통 쪽으로 기울어 있으면, 그저 평범한 기분(수평 상태)을 느끼려 해도 중독 대상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경과학자 조지 쿱George Koob은 이러한 현상을 “불쾌감에 따른 재발dysphoria driven relapse”이라고 표현한다. 중독 대상에 과거와 같이 다시 의존하게 되는 이유는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랜 금단에 따른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완화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인간이라고 다를까? 상담을 하면서 나는 심각한 중독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수년 동안 의존을 멈추고도 단 한 번의 노출로 다시 강박적인 의존에 빠진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인간은 궁극적인 추구자다. 쾌락을 좇고 고통을 피하는 세상의 시험에 너무나 잘 대응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이 세상을 결핍의 공간에서 지나치게 풍족한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이 풍요로운 세상에 맞게 진화하지 않았다. 만성적인 좌식 식사 환경에서의 당뇨병을 연구한 톰 피누케인Tom Finucane 박사는 이를 두고 “인간은 열대우림의 선인장입니다”라고 말했다. 건조기후에 살아가는 선인장이 열대우림에 던져진 것처럼 우리는 과도한 도파민에 둘러싸인 환경에 살고 있다.

 

 

둘째, 젊은 사람들은 심각한 중독자라 해도 의존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로부터 영향을 덜 받는다. 어느 고등학교 선생이 내게 얘기한 것처럼 “정말 뛰어난 학생이라도 매일 대마를 피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만성적 의존에 따른 의도치 않은 결과는 늘어난다.

 

 

마음챙김은 절제의 초기 단계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중 다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고도의 도파민 물질과 행동에 기댄다. 그러나 중독 대상에서 탈피하려고 도파민 사용을 멈추면 처음엔 고통스러운 생각, 감정, 감각 들이 몰려든다. 이때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려 하지 말고 이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 마음챙김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경험은 새롭고 예기치 못한 다채로운 조화를 만들어낸다. 고통은 계속 그 자리에 있지만 다양하게 변화하고, 결국 자기만의 고통으로 남는 게 아니라 모두의 고통을 대승적으로 아우르게 한다.

 

 

내 환자 중 중독 대상을 스스로 조절하는 데 성공한 이들도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힘들다고 얘기했다. 결국 그들은 최종적으로는 중독 대상과의 이별을 택했다. 하지만 음식에 중독된 환자들은 어떨까? 아니면 스마트폰? 완전히 끊을 수 없는 중독 대상이라면? ‘어떻게 조절하느냐’는 현대인들의 생활에서 점차 중요한 질문이 되고 있다

 

 

자기 구속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물리적 전략(공간), 순차적 전략(시간), 범주적 전략(의미). 그러나 자기 구속은 완벽한 안전장치가 아니다. 심각한 중독을 앓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자기 구속 역시 자기기만, 불신, 엉터리 과학의 희생양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범주적 자기 구속은 도파민을 여러 범주로 나누어 사용을 제한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허락하는 하위 유형, 그리고 허락하지 않는 하위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는 중독 대상뿐 아니라 그 대상을 갈구하게 만드는 계기도 금지하는 방식이다.

 

 

수년 동안 만난 다양한 환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향정신성 약물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단기적으로 완화하는 것을 넘어서 감정 자체를 제한한다. 비탄과 경외심 같은 강렬한 감정을 특히 무디게 한다. 어떤 환자는 항우울제 덕분에 조울증의 고통에서 해방됐다고 기뻐했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올림픽 광고를 보고도 더 이상 울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보였다. 그녀는 우울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격 중 감성적인 부분을 기꺼이 희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울 수 없자 나를 다시 찾아왔다. 내 처방에 따라 그녀는 항우울제를 끊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많은 우울과 불안을 비롯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폭의 감정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녀는 바닥에 가까운 감정도 인간다움을 느끼게 하기에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오해는 없길 바란다. 약물 치료는 구명 도구가 될 수 있고, 나 또한 약물을 환자 치료에 활용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하지만 인간의 온갖 고통을 약물로 없애려면 댓가를 치러야 한다. 앞으로 함께 보겠지만 더 효과적인 대안이 있다. 바로 고통 받아들이기다.

 

 

고통이 우리가 쾌락에 지불하는 대가인 것처럼, 쾌락 역시 우리가 고통을 통해 얻는 보상이다.

 

우리의 뇌는 쾌락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내성을 갖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통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뇌는 고통 쪽에 내성을 갖게 된다. 스카이다이버들을 대조군(뱃사공들)과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스카이다이빙을 반복적으로 즐긴 이들이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무쾌감증을 경험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있는 그대로 말하기는 주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자신의 약점을 서슴없이 드러낼 때 특히 그렇다. 이는 반직관적이다. 우리는 자신의 바람직하지 못한 면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떠나갈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내 성격적 결함이나 일탈 행위를 알면 거리를 둔다는 게 논리적으로는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솔직할수록 사람들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 당신의 엉망인 모습을 통해 자신의 약점과 됨됨이를 돌아보고 의심, 두려움, 나약함이 자신만의 약점이 아님을 알게 되면 안심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한 번에 몇 주 동안 술을 안 드실 수 있는데, 술을 드시기만 하면 안 좋죠

 

내 얘기 하는 것 같아서 좀 찔림.

 

 

 

일반적으로 종교 단체나 사회적 집단이 여러모로 관대하고 규칙과 제한이 적을수록 더 많은 추종자를 끌어들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더 엄격한 교회들’이 무임 승차자를 걸러내고 더 탄탄한 집단선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분방한 단체들보다 더 많은 추종자를 거느릴 뿐 아니라 성공적으로 안착할 확률도 더 높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친밀감을 만드는 방법은 완벽함이 아니다. 실수를 바로잡는 데 다 같이 노력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가 친밀감을 높인다.

 

 

 

 

ㅡ 애나 렘키, <도파민네이션> 中,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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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22

 

 

모든 에세이가 그렇겠으나 김초엽 작가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글쎄...

 

 

 

나는 과학에 관해, 과학자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을 존경하지 말자. 개인에게 기대를 걸지도 말자. 한 사람은 언제나 틀릴 수 있고 무수한 오류와 실수를 저지른다. 어쩌다 충분히 신뢰할 만한 누군가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그가 스스로의 오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자가 검증을 멈추는 순간 다시 문제가 시작된다. 합리성은 뛰어난 개인에게 깃드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검증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열린 시스템에서 생겨난다. 과학이 우리가 지닌 많은 질문에 꽤 괜찮은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내놓은 잠정적 결론이 다시 시험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과학의 결론은 언제나 잠정적이다. 그런 생각은 내 안에서 정립하게 됐다.

하지만 좀 더 근본으로 들어가서, 나는 과학이 갖는 합리성에 대해서도 재검토해야 했다.

(...)

이제 사람들은 과학으로부터 유래한 풍요와 안전만큼 위협과 불평등이 존재함을, 과학이 얼마든지 자본 및 권력과 영합할 수 있는 또 다른 ‘사회적’영역임을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과학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일에도 기여했지만 더 나쁘게 만드는 일에도 기여해왔다. 때로 과학은 무언가를 연구함으로써가 아니라 연구하지 않음으로써, 즉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대상을 배제한다.

(...)

한편 기술이 당대의 차별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디지털 알고리즘이 어떻게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반영하는지는 사피야 우모자 노블의 「구글은 어떻게 여성을 차별하는가」가 잘 다루고 있는데, 이와 같은 기술 분야의 데이터 편향은 이전부터 많은 과학기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온 문제다.

(...)

그렇게 내가 합리성의 원천이라고 믿어온 과학의 지위에 균열을 내온 연구들을 접하면서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하는 근본적 틀이라고 여겨왔던 과학이 결국 단점과 오류투성이의, 특별할 것 없는 학문 체계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조금씩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학자 개인뿐만 아니라 과학이라는 시스템도 큰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과학도 인간이 실천하는 활동인 만큼 수많은 오류를 품고 삐거덕거리며 때로는 퇴보하고 이따금 힘겹게 나아간다는 것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과학, 그 자체로 완벽하게 합리적인 과학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과학이 불완전하다는 결론을 내린 이후에도, 아직 나는 과학이 꽤 많은 영역에서 ‘우리가 가진 더 나은 도구’일 수 있다는 견해에 마음이 기울어 있다.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에서 과학기술학자 해리 콜린스와 로버트 에번스는 불완전한 과학의 가치를 옹호하려고 시도한다. 저자들은 과학적 지식이나 그 결과물보다 그것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과학자 공동체가 지지하고 열망하는 가치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정직성, 성실성, 명확성, 개방성과 같은 과학적 가치들이 과학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다.(274-278p)

 

 

 

ㅡ 김초엽, <책과 우연들> 中,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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