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18

 

이 책에서 진행될 논지가 1장에 요약정리 되어 있으므로 바쁜 사람은 1장만 읽어도 도움이 될 듯.

탐욕스러운 일과 온콜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기.

 

 

 

그렇다면 드디어 직장에서 [노골적인 유형의 차별이 거의 없어지고] 성평등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것처럼 보이고 전에 없이 많은 전문 직종이 여성에게 열려 있는 오늘날, 성별 소득 격차는 왜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인가? 정말로 여성들은 동일한 노동에 대해서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가? 대체로 이제는 그렇지 않은 편이다. 임금 차별을 ‘동일한 노동에 대해 차등적인 임금을 받는다’는 의미로 규정한다면, 이것은 전체 소득 격차 중 아주 일부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오늘날의 문제는 이와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성별 소득 격차를 직종 분리 때문으로 설명한다. 여성과 남성이 자기선택의 과정에 의해서, 혹은 그렇게 선택하도록 유도되어서 젠더 고정관념에 따라 직업을 택하게 되는데, 그렇게 젠더에 따라 패턴화된 직종(간호사-의사, 교사-교수 등) 사이에 임금 격차가 존재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데이터가 말해주는 바는 이와 다소 다르다. 미국 인구총조사 목록에 있는 약 500개 직종에서, 성별에 따라 발생하는 소득 격차의 3분의 2는 [직종 간의 요인이 아니라] 각 직종 안에 있는 요인들 때문에 발생했다.(15p)

 

 

이 논리의 핵심 주장은 모든 유형의 무보수 돌봄 노동이 단지 돈을 받지 않고 국민소득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치 절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내 노동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특히 돌봄 노동자 일반, 구체적으로는 여성 돌봄 노동자들이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경제 전체에 걸쳐 무보수 돌봄 노동의 가치를 추산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어왔다. 가장 최근의 추산치를 보면 규모가 어마어마하다(국민총생산의 20%가량). 일찍이 리드는 이러한 계산을 위한 몇몇 기법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국민소득 계상 방식은 쿠즈네츠의 방식이며 이 방식은 가내에서, 또 그 밖의 곳에서 이뤄지는 무보수 노동을 포함하지 않는다.(85-86p)

 

 

 

 

ㅡ 클라우디아 골딘, <커리어 그리고 가정> 中, 생각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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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17

 

 

 

세 번째 배경은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상 작품이 늘어난 데 있다. 본래 영상 작품에서는 배우의 표정으로 슬픔을 드러내고, 땀을 닦는 동작으로 곤란한 상황임을 나타낸다. 배우가 “슬프다”, “어떡하지”등을 입에 담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신이 기쁜지 슬픈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배우가 대사로 일일이 설명하려는 작품이 많다. 연출을 보고 읽어낼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TV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제1회.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가 눈 속을 달리면서 “숨이 차다, 얼어 있던 공기 때문에 폐가 아프다”라고 말한다. 눈이 쏟아지는 가운데 절벽에서 낙하하고는 “눈 덕분에 살았군”이라고 한다.(28-29p)

 

 

어떤 장면에서 남녀가 서로 말없이 응시하면서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분명히 호감이 있다는 묘사다. 그런데 어떤 시청자는 이렇게 반론했단다.

“그런데 누구도 좋아한다는 말을 안 했으니 호감은 아닌 것 같아요. 좋아한다면 직접 말하지 않았을까요?”

트위터에서도 암묵적인 비유, 풍자, 우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주 관찰된다. 이를테면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한 유명인에 대해 누군가가 “이 사람은 구석기시대에서 왔나?”라는 풍자적인 글을 올리자 “뭐? 그 사람 나이가 몇 살인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하고 댓글을 단다.(73-74p)

 

 

예전보다 관객이 유치해졌고, 그에 따라 설명이 과도한 작품을 많이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결론짓는 것은 성급하다. 예나 지금이나 ‘유치한 관객’이 있다는 건 변함없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로 나오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바로 인터넷과 SNS의 발달이다.

20년 전, 30년 전에도 ‘유치한 관객’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유치함을 작품 탓으로 돌릴 수단이 없었다. 2000년대 초에도 블로그와 익명 게시판은 있었으나 다수의 민심을 대표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후반 이후 트위터를 비롯한 SNS가 생겨나고 보급되면서 누구나 무료로 작품에 감상을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가장 하기 쉬운 말이 “잘 모르겠다(그래서 재미없었다)”이다. 여기에는 논리적인 설명이나 근거가 필요하지 않다. 이런 감상이 폭발적으로 퍼지고, 이에 동조하고 부응하는 의견이 많아질수록 투자자나 제작자는 이 의견을 무시하기 힘들어진다. 결과적으로는 이들을 관객으로 붙잡기 위해 작품에 설명식 대사가 늘어난다.(82-83p)

 

 

“작품을 칭찬하는 쪽보다 비판하는 쪽이 우위를 차지하죠.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작품을 만들다니’하고 분노하면 피해자가 되는 거니까. 게다가 피해 사례는 온라인에서 동조자를 구하기도 쉬워요.”

SNS의 탄생으로 사실상 아무런 비용 없이 간단하게 ‘피해 사례’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의견을 막고, “잘 모르겠다(그래서 재미가 없었다)”라는 리뷰를 피하는 방법은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뿐이다.(84-85p)

 

 

원작 만화의 대사를 최대한 살려 충실하게 영상화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따지지 않겠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요즘은 영상화하면서 대사를 바꾸면 그것이 적절한 각색의 범위 내여도 원작 팬이 ‘원작 파괴’라며 불만을 토로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우려를 없애려면 처음부터 ‘원작 그대로’가는 것이 무난하다.(91p)

 

 

“옛날 사람들이 빨리 감기를 한 건 자신을 위해서였죠. 콘텐츠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한정된 시간 안에 많은 작품을 보고 만족하려고요. 그런데 요즘은 무리에 속해야 안심이 되니까 빨리 감기를 합니다. 생존 전략인 거죠.”

노래방에서 진심으로 부르고 싶은 곡이 아니라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인기곡을 선곡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들은 작품의 감상자가 아니다.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콘텐츠를 활용하는 기술이 탁월한 소비자다.(111p)

 

 

요컨대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 익숙한 사람이 적은 개성은 개성으로서의 가성비가 좋지 않다는 말이다. 발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적은 탓에 화제로 발전하기 어렵다.

“아이돌 그룹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영화, 일반적인 엔터테인먼트가 화제로 삼기에는 훨씬 낫지요.”

너무 개성적인 개성은 개성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113-114p)

 

 

1980년대나 1990년대에는 개성이 있어야 한다는 압박이 지금만큼 크지 않았다. 오히려 ‘다수에 속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주류 집단에 속해 있거나 다수와 비슷한 기호를 가지면 크게 틀릴 일이 없다. 모두가 투표하는 정당에 투표하고, 유명한 간식을 먹고, 모두가 보는 드라마를 보는 식이다. 다들 좋다고 하는 것이니 실패할 확률이 적다. 실패하더라도 모두 같이 창피를 당하니 그리 부끄럽지도 않다. 모두가 같이 불평을 말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지금은 문화적으로 주류가 사라졌다. 가치관의 다양성을 추구하다 보니 취미나 취향이 완전히 나누어져 ‘압도적인 다수가 좋아하는 것’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

‘보통’을 잃어버렸죠. 결과적으로 개성이 없으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매우 불안합니다. 그런 불안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취미를 가지고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고 애써요.

(...)

인기 있는 블로거, 일러스트에 ‘좋아요’가 끊이지 않는 작가, 박식함을 내세운 유튜버, 반짝이는 교우 관계를 자랑하는 학생 기업가 등 ‘개성 있는’사람들과 ‘개성 없는’자신을 비교하면 조급함을 느끼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밀레니얼 세대나 그 위 세대가 ‘라이벌’로 삼은 것은 교실이나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Z세대에게는 SNS에서 유명한 또래들이 모두 라이벌이 된다.(116-118p)

 

 

인터넷을 많이 사용할수록 ‘틀리는 것’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한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로부터 엄격하게 비판받거나 비웃음을 사는 참상을 지겹도록 봐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감상도 하기 전에 리뷰 사이트를 읽고 범인을 알아둔다. ‘정답’을 알고 싶어서. “그들은 빠른 정답만 원한다”라고 젊은이들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누구든 상처받기를 꺼린다. 창피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126p)

 

 

결국 영상 작품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이 등장인물에 공감할 수 있느냐 아니냐로 결정된다. 분명 공감도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의 행동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지 이해하게 되는 것도 감상을 풍요롭게 해주는 요소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에는 자신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타자’가 존재한다. 그 가치관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존재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존중은 ‘마주하고 이해하는’의무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가치를 공감에서만 찾으려는 사람은 ‘공감하기 어려운 가치관을 마주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일이 익숙하지 않다. 그러려면 큰 에너지가 필요한 데다 가성비가 좋지 않으니 말이다.(161p)

 

 

그들은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즉 비판이나 지적을 하지 않고, 당하지도 않는다. 이는 언뜻 보기에 ‘타자’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나와 다른 가치관을 접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는’행위가 결여되어 있다. 관용이 아니라 단지 연결을 피하는 것뿐이다.

(...)

자신을 향한 비판에도 내성이 없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흘려보내지 못한다. 마음이 흔들리고 ‘불쾌하다’며 곧장 비명을 지른다. 이는 다양성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일종의 좁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183p)

 

 

 

ㅡ 이나다 도요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中, 현대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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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6

 

생각보다 철학 얘기가 많지 않았다.

 

 

중국 농부의 우화를 생각해보자. 어느 날 농부의 말이 달아났다. 그 날 저녁 이웃들이 위로해주러 찾아왔다.

이웃들이 말했다. “자네 말이 달아났다니 정말 유감이네. 정말 안된 일이야.”

“그럴 수도.” 농부가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

그다음 날 말이 일곱 마리의 야생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이웃들이 말했다. “오, 정말 행운 아닌가. 이제 말이 여덟 마리나 있잖나. 이렇게 상황이 뒤바뀌다니.”

“그럴 수도.” 농부가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

그다음 날 농부의 아들이 야생마 중 한 마리를 길들이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오, 이런. 정말 안됐구려.” 이웃들이 말했다.

“그럴 수도.” 농부가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

그다음 날 징병관이 전쟁에서 싸울 군인을 징집하러 마을로 찾아왔으나 다리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농부의 아들은 데려가지 않았다. 모든 이웃들이 말했다. “정말 잘된 일 아닌가!”

“그럴 수도.” 농부가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

우리는 광각의 세상에서 망원 렌즈로 찍은 사진 같은 삶을 살아간다. 전체적인 그림은 전혀 볼 수 없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건강한 반응은, 중국의 농부처럼 ‘아마도 철학’을 취하는 것이다.(171-172p)

 

 

종류와 상관없이 어떤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수색에 아무런 성과가 없자 잃어버린 공책의 미적 탁월함뿐만 아니라 그 안에 쓰인 내용의 우수함도 점점 커진다. 수색 이틀째, 나는 영국 여행에서 기록한 그 공책 안에 든 생각이 통찰 면에서나 독창성 면에서나 독보적이라고 확신한다. 수색 나흘째, 나는 그 공책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공책이라고 선언한다. 진짜다. 다빈치의 작업 노트인 코덱스 레스터나 헤밍웨이가 쓴 노트 까이에보다 더 귀중하다(250-251p)

 

 

ㅡ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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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20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 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 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185-186p)

 

 

 

ㅡ 금정연,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中, 지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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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13

 

 

읽음.

 

 

 

ㅡ 노지양, 홍한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中,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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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12

 

 

오랜만에 짧은 책 한 권을 읽었다.

책을 의식적으로 읽기 시작한 이후로 이렇게까지 장기간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처음에는 걱정도 되고 의무적으로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그 스트레스가 오히려 더 꺼리게 만든 것 같다. 책 안 읽는 게 뭐 대수라고 정 읽고 싶다면 자연스레 다시 펼쳐들겠지.

 

 

우리가 영화사의 공부를 통해 배우는 걸작들의 계보는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계보가 아닙니다. 끊임없는 양의 되먹임을 통해 강제적으로 만들어진 탑이죠. 그래서 중요해요. 모두가 공유하는 일반 교양이니까요. 하지만 그 작업 바깥엔 이들만큼, 심지어 이들보다 더 훌륭한, 적어도 더 재미있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

걸작만으로 이루어진 영화 경험은 그냥 빈약해요. 이건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걸작만 보시나요? 그러고 싶으신가요? 아니잖아요. 하지만 옛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갑자기 까다로워집니다. 세월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영화들은 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럴 리가요. 모든 경험은 어느 정도 잡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한 것도 보고 나쁜 것도 봐야 자신의 경험을 통제할 수 있지요. 그리고 형편없는 영화, 평범한 영화를 보는 것 역시 중요한 경험입니다. 전 과거의 평범한 영화들을 보는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입니다. 종종 이들의 역사적 데이터로서의 가치는 걸작보다 더 큽니다.

(...)

그중에는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경험도,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경험도 있습니다. 모험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32-34p)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다 보면 작품을 만든 사람에게 경외감 같은 걸 느낄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런 마음은 작가가 아닌 작품을 향하도록 해라.(설사 대단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인간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112p)

 

 

 

ㅡ 듀나,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中, 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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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1

 

 

1990년대에 캐나다에서 통계학을 공부하던 알라나는 아직 성경험이 없고 외로우며 섹스 파트너나 애인을 찾지 못하는 모든 남녀를 위한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플랫폼에 ‘알라나의 비자발적 독신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이름은 곧 인셀incel이라는 약어로 축약되었다. 자존감이 낮은 외로운 개인들에게 자신감과 위로를 전하자는 선의에서 나온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셀은 20년이 조금 안돼서 완전히 다른 곳으로 변해버렸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아진 이 커뮤니티는 여성을 매력적인 ‘스테이시’와 덜 매력적인 ‘베키’로 나누고 남성을 매우 남자다운 ‘알파메일’과 남성성이 약한 ‘제타메일’, 또는 ‘소이보이’로 나누고 시작했다. 처음에 알라나는 ‘러브 샤이’와 ‘에프에이FA’ 같은 용어를 사용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비인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언어가 더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제 여성은 ‘여성’과 ‘휴머노이드’를 합쳐서 만든 ‘피모이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긍정적인 의도에서 시작된 알라나의 자기 계발 커뮤니티는 사실상 여성을 증오하고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외로운 개인들의 위험한 에코체임버로 변했다.(87p)

 

 

다른 온라인 상담 게시판과 달리 본인이 겪는 문제의 조언을 구하려고 레드필 커뮤니티를 방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국 이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머무르게 된다. 이들은 점차 세뇌되어 코치와 다른 회원들이 규범과 이념을 내면화한다.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체성과 태도, 행동의 변화는 이러한 온라인 사회화 기구가 얼마나 효과적이고 위험한지를 잘 보여준다. 나는 트래드와이브즈에서의 경험을 통해 정반대의 이념 성향도 극단주의자들이 조종 전략을 확실히 막아주지 못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의 이념 성향은 트래드와이브즈의 성향과 이보다 다를 수는 없을 만큼 달랐다. 그러나 그런 나도 이들의 강력한 집단 역동에 거의 말려들 뻔했다. 나는 극단주의자에게 뚜렷한 특성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계급이나 젠더, 인종, 정치적·종교적 견해는 그 사람이 극단주의자에게 길들여질지 아닐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약해진 시기에는 모두가 극단주의자에게 이용당할 수 있으며 취약함은 상당히 일시적인 개념일 수 있다.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패는 바로 정보다. 우울과 공황 발작 같은 다른 무의식적 과정과 마찬가지로 각 단계와 약한 부분, 사고의 왜곡을 인지하는 것은 머릿속에서 시작된 인지적 악순환을 끊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다. 결국 내가 트래드와이브즈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레드필위민 게시판에 들어가기 전에 급진화의 단계와 징후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98-99p)

 

 

2017년 여름 이후 이슬람국가는 지하드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정책을 크게 바꾸었다. 이제 이슬람국가는 여성을 무하지랏(여성 이민자)으로 보지 않고 무자히닷(여성 전사)으로 인정한다. 처음에 여성 전투원에 반대했던 <루미야>는 2017년 7월 호에서 여성들에게 우후드 전투에서 선지자 무함마드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던 움 아마라의 선례를 따르라고 권고했다. 2017년 10월 이슬람국가는 여성의 지하드 참여가 의무라고 공식 선언하기까지 했다. 전례 없는 조치였다.

지하드가 더는 물리적 폭력의 형태를 띨 필요가 없다는 사실 덕분에 여성들은 가상의 전선에서 온라인 회원 모집과 미인계, 심지어 해킹 같은 핵심 임무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

온라인 에코체임버의 등장은 극단주의 운동이 신입 회원을 세뇌시키고 집단 의존성을 강화하고 집단 가치를 내면화시키는 방식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정체성이나 불안과 관련된, 극도로 개인적인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조언하는 플랫폼들은 유해한 이념으로 향하는 흔한 관문이다. 레드필위민처럼 공공연하게 연애 관계에 대해 조언하는 게시판과 ‘테러를 실행하는 자매들’처럼 비밀리에 여성에게 상담을 제공하는 채팅방은 모두 극단주의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문턱 낮은 입구 역할을 한다. 개인의 성생활과 연애 생활보다 더 사적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러한 장소들은 신입 회원을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친밀한 내집단 관계를 형성하고 신입의 정체성을 다른 회원의 정체성과 결부시킴으로써 강력한 잠금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 목표는 신입 회원이 집단에 감정적으로 얽매이게 함으로써 그곳을 나가는 것을 최대한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115-117p)

 

 

대략 온라인 사용자의 40퍼센트가 가볍거나 심각한 온라인 괴롭힘을 당했으며 70퍼센트 이상이 괴롭힘을 목격했다. 뉴스 기사의 댓글창을 조금만 읽어보아도 혐오 표현이 디지털 시대에 어디에나 존재하는 현상이라는 환상에 굴복하기 쉽다. 그러나 소셜미디어 어디에서나 보이는 혐오는 현실을 심각하게 호도한다. 많은 경우 혐오 콘텐츠를 퍼뜨리는 것은 일반적인 온라인 사용자가 아니며 극단주의 비주류인 극우가 뉴스 기사의 혐오 댓글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실제로 아주 적은 소수가 대부분의 온라인 혐오 표현을 생산한다. 페이스북 커뮤니티 #ichbinhier(이히빈히어)와 함께한 연구에서 전략대화연구소는 모든 활성화 계정의 5퍼센트가 페이스북의 독일 뉴스 기사 댓글란에 있는 혐오 댓글의 ‘좋아요’ 중 50퍼센트 이상을 눌렀음을 발견했다. 이러한 현상이 페이스북 사용자 수백만 명의 머릿속에서 현실을 왜곡하고 온라인 담론에 영향을 미치며 정치인과 언론인에게 압박을 가한다.(166p)

 

 

ㅡ 율리아 에브너, <한낮의 어둠> 中,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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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6

 

나는 딱 여기까지만.

 

 

 

다차원의 다중 우주는 실제로 관측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다중 우주론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중 우주론을 전제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점 때문이다. 인류가 현재까지 답하지 못한 우주에 대한 수많은 질문이 다중 우주를 가정할 때 강력한 정합성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질문은 이 것이다.

“왜 우주는 다른 모습이 아니라 하필이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물리학자들에게 매우 난처한 질문이다. 그것은 우리 우주의 모습이 매우 임의적이기 때문이다.(77p)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창조론을 옹호하는 종교인들에게 미세 조정 문제는 환영할 만한 논쟁점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신이 우주에 개입한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많은 이가 지금까지도 미세 조정 문제를 신 존재 증명에 활용하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는 우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이것을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는 것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다행인 것은 다중 우주론이 과학을 구원할 구세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다중 우주론에 따르면 미세 조정은 신에 의한 조율도, 단순한 우연도 아니다. 이것은 우주가 무수히 많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필연이다. 다중 우주론은 저마다 물리량의 값이 다른 무한히 많은 우주가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가능한 우주가 있다. 그 수많은 우주는 저마다의 상수 값과, 저마다의 힘의 종류와 세기, 그에 따른 형태, 그에 따른 역사를 가진다. 이러한 다채로운 우주들은 무한한 시간 동안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우리 우주는 그저 수많은 가능성 중 다만 한 가지 형태를 가진 우주일 뿐이다. 지금과 같은 물리량을 가진 까닭에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과 생명이 탄생했고, 지능을 가진 존재가 태어나 자기 우주에 대해 질문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을 인간 중심 원리라고 한다.

(...)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우주는 다른 모습이 아니라 하필이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을 함의한다. ‘왜 오직 우리 우주만이 존재하는가?’‘왜 극도의 우연적인 확률로 인류가 탄생했는가?’ 다중 우주론에 기반을 둔 인간 중심 원리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신의 개입 혹은 우연으로 우리 우주와 인류의 탄생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우리 우주 외에 다른 우주 전체를 포함하는 ‘대우주’를 고려할 때, 이 질문은 쉽게 해소된다.(80p)

 

이러한 결론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상식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되는가? 인간 중심 원리와 다중 우주론의 결합은 인류에게 우주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정말 과학인가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영국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과 유사 과학을 나누는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반증가능성이라는 기준을 제시한다. 어떤 이론이 과학의 범위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이론이 스스로 틀릴 가능성, 즉 반증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증가능성을 가진 이론이 여러 번의 검증을 거쳐서도 살아남았을 때, 그 이론은 좋은 과학 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증가능성은 과학과 유사 과학을 구분하는 좋은 기준처럼 보인다.

(...)

과학과 유사 과학의 차이는 그 이론이 많은 것을 맞히느냐가 아니라 반대로 그 이론이 틀릴 가능성을 갖느냐, 즉 반증될 가능성을 갖고 있느냐에 있다. 점성술과 사주가 과학이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틀릴 가능성 자체가 없어서다.(82-83p)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자연이 종의 진화 방향을 선택했다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자연의 손을 빌려 신이 진화에 손을 댄다거나, 혹은 자연이 뛰어난 존재의 탄생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종을 발전시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공선택과 자연선택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목적의 유무다. 인간은 이익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생물의 번식에 개입하지만, 자연선택의 주체로서의 자연은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다. 자연은 그 자체로 펼쳐진 환경일 뿐이다. 진화는 목적 없이 이루어진다.(141p)

 

 

 

ㅡ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편학> 中,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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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6

 

하지만 이렇게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어도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아요. 천동설을 신봉하는 과학자들은 자신의 패러다임 안에서도 밤하늘의 움직임을 아무런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지금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복잡한 가정들을 도입함으로써 천동설로 당시의 밤하늘을 완벽하게 그렸고요.

그러니 과학 혁명의 과정은 비판-토론-승복과 같은 이상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마치 현실의 프랑스 혁명(1789)이나 러시아 혁명(1917)과 같은 정치 혁명이 전쟁을 동반한 피 튀기는 과정이었듯이, 과학 혁명 역시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따르는 과학자 공동체 간의 때로는 죽음도 감수해야 하는 큰 갈등을 거쳐야 합니다.(37p)

 

 

나는 우리 과학자들이 하는 일을 사랑하며 이 점에서 과학이 뭔가 줄 것이 있다고 믿지만, 과학의 힘에 대해서는 덜 오만한 태도를 선호한다. 우리는 과학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좀 더 겸손해야 하며, 과학의 객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과학을 사회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선언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과학은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이 어느 정도의 지침을 제공하고 특정한 가설을 제외시킬 수는 있다. 과학의 추구에 관여하는 것은 우리가 실수를 덜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다.” 이 정도면 나를 만족시키기엔 충분하다.(109p)

 

 

ㅡ 강양구, <강양구의 강한 과학>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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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30

 

나쁘지는 않았는데 저자가 예전에 기고했던 아래의 글만 읽었어도 충분했을 것 같다. 이 책은 안 읽어도 저 글은 모두가 읽어보면 좋겠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freely465&logNo=222021137517&categoryNo=¤tPage=&sortType=&isFromSearch=true

 

 

 

어른 되기, 나아가 ‘해야 할 일’ 목록을 완료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현대 세상에서 사는 일이 그 어떤 시대보다도 쉬운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해서다. 이 틀을 통해 보니 내가 ‘해야 할 일’ 목록에 붙박아 놓은 일들을 기피해 왔던 이유가 뚜렷해졌다. 우리에겐 매일 해야만 하는 일들의 목록이,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가 제일 먼저 할당되어야 하는 영역이 있다. 정신적 에너지는 유한하다. 아닌 척하려고 애쓰다 보면, 그때 번아웃이 찾아온다.(17p)

 

 

문제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흘러내리는 모래 위에 견고한 토대를 지으려 애쓰는 기분이 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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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워라밸’을 잘 잡고 있다는 분위기도 함께 풍겨야 한다. 우리는 아이에게 대단히 세심한 어머니여야 하되, 헬리콥터 부모가 되어선 안 된다. 남자들은 아내와 동등한 반려 관계로 지내면서도, 남성성을 유지해야 한다. SNS에서 자기 브랜드를 구축해야 하지만, 삶을 진정성 있게 꾸려나가야 한다. 숨 가쁘게 터져 나오는 뉴스들을 시시각각 알고 의견을 표해야 하지만, 뉴스에서 다루는 현실이 앞서 말한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라도 저해하게끔 놔두어선 안 된다.

우리는 사회적 지원이나 안정망을 거의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 일을 전부 해내려고 아등바등한다. 그래서 밀레니얼 세대는 번아웃 세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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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로부터 ‘경이’라고 불러 마땅한 것들을 선사받았음에도, 우리에겐 잠재력이 막혀버렸다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투한다. 다른 방법을 모르니까. 밀레니얼에게 번아웃은 밑바탕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길러졌는지, 우리가 세상과 어떻게 상호작용했고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일상을 살아가는지 가장 잘 묘사하는 말은 번아웃이다. 번아웃은 우리를 둘러싼 기온과도 같다.(26-28p)

 

 

부머가 나이 먹고 쿨하지 못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날이 갈수록 나이 먹고 쿨하지 못해지는 건 모든 세대가 똑같다. 하지만 현재 밀레니얼에게 부머는 점점 더 위선적이고, 공감 능력이 떨어지며, 자신들이 얼마나 쉽게 모든 걸 손에 넣었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자기가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는 세대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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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이런 반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부머들에게서 온 허다한 이메일을 읽고 나니 분노에 더욱 불이 붙었다. 그러나 미국 중산층의 대확장에 기여한 흐름들에 대해 더 많은 자료를 찾아 읽고 나니 입장이 조금 달라졌다. 베이비붐 세대 전체가 전례 없는 경제적 안정기에 성장하긴 했으나, 그들의 성년기는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이 여러 압박들로 얼룩져 있었다. 베이비붐 세대 역시 그들이 부모 세대에게 싸잡아 조롱 받았고, 특히 특출난 권리 인식을 지닌 듯 보였다. 또한 부모들은 삶에 뚜렷한 목적이 없다고 사회로부터 경멸받았다. 중산층 자리를 유지하려는 (혹은 차지하려는) 능력을 두고 공황에 빠지기도 했다.

부머들은 불안했고, 과로했으며, 자신들을 겨냥한 비판에 대해 마음 깊이 분노했다. 그럼에도 부머들은 너그럽게 여기기가 어려운 것은,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도 우리 세대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불안이나 일을 대하는 태도가 밀레니얼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80~90년대 베이비붐 세대의 정신은 우리 유년기의 배경에 스며들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 품었던 기대들의 토대에도 녹아들었고, 그 미래를 쟁취하기 위한 로드맵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 밀레니얼 세대의 번아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리를 만든 베이비붐 세대가 어떤 배경에서 어떻게 자라왔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번아웃에 빠졌는지 이해해야 한다.(39-41p)

 

 

엄마의 잘못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의 경제적 불안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나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라는 결심을 굳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이별로 인해 커리어와 재정적 안녕이 위태로워지게 두지 않을 것이며, 실제로 그런 적이 없다. 대학원에 가고 싶을 때 대학원에 갔다. 결혼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여전히 그렇다. 그리고 나는 계속 일하는 것이야말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패닉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이런 대응기제는 겉보기엔 논리적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수많은 밀레니얼이 증언할 수 있듯, 건강한 대응기제이거나 감당할 수 있는 대응기제이긴 어렵다.(97p)

 

 

좋아할 수 있는 직업은 사람들이 무척 탐을 내기에, 그만큼 지속 불가능하다. 너무나 적은 자리를 두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경쟁하는 상황에서는, 보상 기준이 점차 낮아져도 별다른 여파가 없다. 당신만큼 열정을 불태우며 당신의 자리를 대체할만한 누군가가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복지를 대폭 축소하거나 없애도 된다. 연봉을 입에 겨우 풀칠한 수준으로 낮춰도 된다. 특히 예술계라면 더 문제없다. 웹사이트에서 콘텐츠 작가에게 돈을 주는 대신, 역으로 작가가 웹사이트에 이름을 올릴 기회를 얻기 위해 무급으로 노동하는 경우도 많다. 한편으로 고용주들은 구직자의 최소 자격 조건을 상향시킨다. 업무에 필요한 조건인지는 상관없다. 더 높은 학력, 더 많은 학위, 더 많은 훈련을 지닌 자만이 후보에 오를 수 있다.

그리하여 ‘멋진’ 직업 및 인턴십은 수요-공급의 법칙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직업 자체가 근본적으로 보람이 없거나, 알량한 보수에 비해 너무 많은 노동을 요구해 있던 열정도 사그라지게 만든대도, 1000:1의 경쟁률을 뚫고 그 일을 해낼 사람으로 어렵게 뽑혔다는 사실 자체가 그 일자리를 더더욱 열망의 대상으로 만든다.(135-136p)

 

 

‘좋아하는 일을 해라’ 윤리에 대한 자라나는 밀레니얼들의 환멸과, 매력 없는 일에 대한 꾸준한 수요 증가가 합쳐져 이런 직업들은 새로운 종류의 광채를 얻고 있다.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 사이에서 직업의 조건과 야망에 관한 “개종”의 순간이 퍼져나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더 이상 꿈의 직업을 원하지 않는다. 보수가 너무 적지 않고, 과로하지 않아도 되고, 죄책감을 주입해 자신의 권익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지 않으면 된다. 어쨌거나, 그들은 모두 좋아하는 일을 하려다가 번아웃에 빠져 하나의 잿더미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들은 이제 그냥 일을 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일과 맺은 관계를 재설정하고 있다.(159-160p)

 

 

너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열심히 일한 끝에 큰 행운이 따랐고, 나는 임시적 안정에 다다랐다. 일자리가, 사생활이, 연애 관계가 안정되었다. 그리고 나는 많이 읽고 많이 관찰했기에 내가 처한 시나리오에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안정이 물거품이 되리라는 걸 안다.

정말 분명하게 말해두고 싶다. 아이들 자체는 사회적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은 훌륭하다. 부모들에게 번아웃에 대해 물을 때, 나는 그들에게 크나큰 즐거움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도 반드시 물었고, 돌아온 답변들은 매우 숭고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의 구조로 인해ㅡ학교와 일 그리고 젠더가 그 둘과 교차하는 방식으로 인해ㅡ아이들은 소형 폭탄이 되어 버렸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들 자체보다는, 아이들에게 수반되는 기대와 재정적 현실, 노동의 현주소가 폭탄이 되었다.(373p)

 

 

 

ㅡ 앤 헬렌 피터슨, <요즘 애들> 中, 알에이치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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