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

 

 

어떤 한 가지에 집중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무시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떤 책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깊이 몰입한 나머지 옆에 앉은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집중의 힘을 뒤집어서 말하면 다른 것들을 지우는 힘이다. 결핍이 ‘집중하게 한다.’고 말하지 않고 결핍이 사람들로 하여금 터널링을 하도록, 즉 임박한 결핍을 제어하는 데만 오로지 모든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게끔 유도한다고 쉬운 말로 말할 수 있다.(60-61p)

 

 

결핍도 사람의 정신적인 프로세서에 비슷한 짓을 한다. 다른 처리 사항들을 정신에 끊임없이 짐 지울 때 정신은 긴급한 과제를 수행할 여유가 적어진다. 이로써 우리는 이 장의 중심적인 가설인 ‘결핍은 대역폭을 직접적으로 축소한다.’에 도달했다. 개인이 처음부터 타고난 능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이냐가 중요하다.(94-95p)

 

 

그렇다면 무엇이 결핍에 대해서 그렇게 특별할까?

결핍은 기본적인 속성상 여러 중요한 근심거리가 다발로 한 데 뭉친 것이다. 어느 곳 혹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부부싸움과 다르게, 돈 문제나 시간 문제와 관련된 몰입은 가난한 사람과 바쁜 사람 주변에 꼬여서 좀처럼 떠나지를 않는다. 가난한 사람은 끊임없이 돈과 관련된 근심거리와 씨름해야 하고, 바쁜 사람 역시 시간과 관련된 근심거리와 씨름해야 한다. 결핍은 다른 근심거리들보다 우선되는 짐을 추가로 생성한다. 그리고 당연하게 지속적으로 대역폭에 세금을 부과한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부자든 빈자든 자기 배우자와 싸울 수 있고, 또 자기 상사로부터 질책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풍족함을 경험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일부만 이런 문제에 사로잡히는 반면에 결핍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이런 문제에 사로잡힌다.(123p)

 

 

패스트푸드 가게의 매니저는 자기 직원들이 보이는 행동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숙련된 기술이 부족하다거나, 동기부여가 되어 있지 않다거나, 손님 응대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거나 하는 등의 일상적인 대상으로 눈을 돌린다. 사실상 세금이 부과된 대역폭은 실제 현실에서 이런 식으로 비쳐질 수 있다. 즉, 회사일로 급하게 준비해야 하는 프레젠테이션 작업에 사로잡힌 아버지가 딸에게 퉁명스러운 말을 쏘아붙일 때 이 사람은 나쁜 아버지로 보인다. 돈에 쪼들리는 대학생이 시험에서 쉬운 문제 몇 개를 틀렸을 때, 이 학생은 게으르거나 무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업무에 숙련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부주의한 것도 아니다. 단지 무거운 대역폭 세금에 짓눌려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 사람 개인이 아니라 결핍이다.(127p)

 

 

덜 바쁜 사람의 경우, 느슨함은 실수를 흡수해서 부정적인 결과를 최소화한다. 이에 비해서 바쁜 사람은 실수의 부정적인 결과를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추가되는 시간만큼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대가를 훨씬 더 크게 치러야 한다. 우리는 조금 전에 느슨함이 얼마나 비효율적일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우리는 한 번도 쓰지 않을 물건을 사며 돈과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느슨함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유효성을 발견할 수 있다. 느슨함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 만회할 수 있는 여지, 실패를 해도 괜찮을 여유 공간을 제공한다.(157-158p)

 

 

 

ㅡ 센딜 멀레이너선·엘다 샤퍼, <결핍의 경제학> 中, 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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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7

 

 

숨가쁜 추모와 기간을 정한 애도를 하며 ‘슬픔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자못 엄숙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본 뒤 슬픔에만 머무르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하다. 구경하는 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본 뒤에는 우리끼리 눈을 마주치고 우리가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함께 고민하는 일이 남아있으니까. 어쩌면 이런 선언은 참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 정치가 가동되는 순간을 원천 봉쇄하는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34p)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날씨는 경제이기도 한데, 농업과 어업 같은 1차 산업은 물론, 물류의 흐름과 인력의 출퇴근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날씨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가혹하고 무정해 보이지만, 실은 차별 없음과 거리가 멀다. 날씨가 몰고 오는 위험함과 불쾌함은 일정 부분 값비싼 주거 환경이나 적절한 냉난방 시설로 다스릴 수 있다. 그러니 날씨로 인해 가장 먼저 취약해지는 건 약자들이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그리고 노인.(77p)

 

 

기후 위기를 취재해 온 미국 언론인 제프 구델은, 폭염 같은 기후 위기가 가장 약한 사람들을 약탈적으로 추려내던 시기가 곧 지나갈 것이라고 예견한다. 위기가 심화될수록, 앞으로는 훨씬 더 공평하고 민주적으로 이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89p)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통계는 이 기사 저 기사에 인용되며 산업재해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기도 하지만, 잘 정리된 숫자 속으로 진짜 이야기들을 빨아들여 감춰버리기도 한다. 산업재해가 흔하면 흔할수록 ‘끊이지 않는 산재’같은 제목을 단 기사를 계속해서 만들기도 새삼스러워진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94p)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소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120-121p)

 

 

그런데 취재에 응하는 미화원들의 표정이 좀 떨떠름해 보였다. 지하에 휴게실이 있었을 때가 낫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화원들이 쉬는 모습이 지상으로 나와 ‘눈에 띄게’되자 입주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이었다.(123p)

 

 

강자들의 선행만큼은 아니겠지만, 약자들의 선행은 종종 스포트라이트를 받곤 한다. 물론 약자들의 선행이 과다 재현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다만 약자들이 선행이 뉴스가 될 때는, 이들이 약자라는 부분에 뉴스 가치가 실린다. 약자라는 점이 필요 이상으로 강조될 때도 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공동체의 도덕심을 환기하는 역할까지 약자들에게 과다 부여된 것은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서 온다. 연말이면 자기 재산을 다 기부하는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뉴스에 등장한다. 이런 뉴스들에는 “아직 회망이 있다”, “사람 사는 사회다”, “따스한 온전을 느꼈다”는 반응들이 따라오곤 한다.

이들이 겪는 ‘불우함’, 그걸 견뎌낸 ‘근면함’과 ‘베푸는 마음’이 순차적으로 조명될 때, 이런 뉴스들은 누구를 향해 어떠한 메시지를 보내게 될까? 뉴스 매체의 메시지 주입 능력을 과신하는 건 아니지만, 혹여 이런 뉴스가 약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행동의 폭을 더 옭아매는 것은 아닐까?(132p)

 

 

앞서 말했듯 특혜에서 배제된 집단으로 묘사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선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악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약자라는 맥락 안에서 조명받곤 한다. 약자의 선행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계층의 특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개인의 독특한 선함의 질감을 놓치지 않도록, 악행을 바라볼 때는 개인의 악함으로는 다 포착되지 않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사회적 요인과 모순에 고루 책임을 묻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136p)

 

 

<공감의 배신>에서 폴 블룸이 이야기했듯,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와도 같아서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148p)

 

 

 

ㅡ 김인정, <고통 구경하는 사회> 中,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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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7

 

 

 

나는 이 취미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취미란 단어는 악취미의 줄임말과 같은 뜻으로 종종 사용된다. 사람들이 진짜로 즐기는 유희는 고상한 것보다는 다분히 악의적인 것들이 훨씬 많다. 실제로 언제 어디서든 당당하게 클래식 음악 감상이 취미라고 말하던 커피 전문점 사장의 진짜 취미는 유부녀 홀리기였다. 사장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 취미는 돈도 들지 않고, 위험 부담도 없는 데다, 짜릿한 재미까지 철철 넘친다고 했었다. 이 취미에 문제가 있다면 신상카드에 떳떳이 기록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

사람들이 때때로 어떤 거래나 협상의 자리에서 아주 진지한 얼굴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절대 믿지 않는다. 그런 말은 기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돈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13-14p)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21p)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다면 훨씬 흥미로울 것이었다. 설령 영화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 다음의 시간들이 백지 상태로 놓여 있다면 그만큼 더 흥미가 발생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영규라면 절대로 시간을 그런 식으로 방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영화를 보아야 하는 사람이고, 마음에 정해둔 음식점에서 정해진 메뉴대로 식사를 해야 할 사람이며, 역시 마음에 계획한 도로를 달려서 나를 집에 데려다주는 것으로 오늘의 일과를 끝내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76p)

 

 

“내 이름은 안진진. 돈 갚을 때는 조용히 안진진을 찾으세요. 아셨죠?”(113p)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127p)

 

 

‘8월 27일. 밤 10시 정도. 장소는 유리 천장이 있는 환상적 분위기의 카페로 정한다. 먼저 여자의 손을 잡는다. 별다른 저항이 없으면 십 분쯤 후 청혼한다·····.’

그것은 나영규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작성해온 8월 27일자 인생계획서 중의 한 부분일 것이었다. 그의 청혼에는 놀라지 않았지만, 상상 속의 이 인생계획서는 나를 전율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그리고 나는 또 보았다. 조금 전 상상 속에서 보았던 그의 인생계획표 다음 구절을.

‘성공적인 청혼 후에 기회를 봐서 기습적인 키스 감행. 서두르지 말고 자연스럽게 할 것······’

(...)

그런데 그것도 모두 미리 짜놓은 인생계획서대로 움직인 것이라면? 여자에게 샌드위치를 먹인다, 약 한 달간 매일 함께 먹는다, 그리고 말한다, 자꾸 좋아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라고 메모하고 있었던 일이라면·····.

(...)

나는 몹시 궁금했다. 그가 나영규이든 김장우이든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160-165p)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188p)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처음으로 나, 안진진의 사랑을 상면한 이후 내 기분은 급격히 저조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나는 다만 이것이 사랑인가, 하고 사랑을 묻다가 이것이 사랑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답했을 뿐이었다.

오직 그것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가라앉기만 했다. 걸음은 자꾸 허방을 디뎠고, 눈길은 쓸쓸하게 텅 빈 허공을 헤매었다.

(...)

나는 당황했다. 누구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사랑을 만난 다음이 이렇다는 고백을 나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자매에게서 물려받은 기질로 잡다한 책들을 제법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영화광은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도 많이 보았는데, 그렇다면 모든 책과 영화들이 나를 속인 것이었을까. 사랑을 맞은 후의 느낌이 이토록 황폐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나에게, 이 안진진에게 문제가 있음이 확실했다.(195-196p)

 

 

나에게 있어서 결혼은 전력투구할 내 삶의 중대한 출발점이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결단 중에서 나는 결혼을 선택한 것이었다.

내가 결혼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제발, 부탁이니, 누구도 비난하지 말기를 바란다. 여자 나이 스물다섯에 할 수 있는 결단이 꼭 결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나처럼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결혼 대신 공부를 택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 대신 자기만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으며, 결혼을 비웃으며 결혼할 나이에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는 여자도 분명 있다. 나라고 해서 그 모든 길들에 대해 충분히 사색하지 않았겠는가. 이미 섭렵은 끝났다. 사색이 깊은 나머지 인생 자체가 졸렬해지고 말았다면, 이젠 이해할 수 있을까.(217p)

 

 

그러다가 나는 마침내 중요한 단서 하나를 찾아내었다. 김장우와 나영규에게로 향하는 화살표의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 변별해낼 수 있는 하나의 단서.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유사 사랑인지 알 수 있는 하나의 단서.

미리 말하지만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하는 특별사유일지도 모른다.

(...)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218p)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229p)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296p)

 

 

 

ㅡ 양귀자, <모순> 中, 도서출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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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4

 

하루키 신간 읽고 나서 뭔가 허전해서 옛날 작품 중 한 권과 비교하며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봤다. 데미안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감상과 비슷한 느낌이 이 책에 들었다. 어떤 책은 특정한 시기에 읽는 것이, 아니, 오직 특정 시기의 독서에서‘만’ 영향을 발휘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항상 가벼운 혼란에 휩싸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제에 따라다니는 고전적인 패러독스에 발목을 붙잡히기 때문이다. 즉, 순수한 정보량을 두고 말한다면 나 이상으로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내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기에서 설명되는 나는 필연적으로 그 설명을 하는 나에 의해(그 가치관이나 감각의 척도, 관찰자로서의 능력, 여러 가지 현실적 이해 관계에 의해) 취사 선택된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설명되는 ‘나’의 모습에 어느 정도의 객관적 진실이 있을까? 나는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린다. 아니, 예전부터 일관성 있게 마음에 걸렸던 문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공포나 불안을 거의 느끼지 않는 듯하다. 사람들은 기회가 있으면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표현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바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직하고 개방적인 사람입니다.”

“나는 쉽게 상처받기 때문에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상대의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는,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정직하고 개방적인 사람이 자기는 깨닫지 못하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변명과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교언영색에 너무나 쉽게 속아넘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만약 그럴 필요가 있을 경우라 해도)보류하고 싶어진다.(79p)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멀리서 보면 유성처럼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인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두 개의 위성이 그려 내는 궤도가 우연히 겹쳐질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볼 수 있죠. 또는 마음을 합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잠깐,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의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거예요. 언젠가 완전히 연소되어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161-162p)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의 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항이 거의 같은 비율로 감추어져 있으니까.

 

이해는 항상 오해의 전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여기에서의 이야기지만)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작은 방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사실 샴쌍둥이처럼 숙명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혼돈으로서 존재한다. 혼돈, 혼돈.

대체 누가 바다와, 바다가 반영시키는 그림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 또는 비와 외로움을 구분할 수 있을까?(182p)

 

 

 

ㅡ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中, 자유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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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8

 

장편은 7년 만에 읽는 듯.

 

 

 

“뭐가 있었냐고? 아아, 그걸 설명할 수 있다면 오죽 좋겠나.”

(...)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ㅡ거기 있던 게 결코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세계의 광경이었다는 걸세.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구나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지. 내 안에도 있고, 자네 안에도 있어. 그럼에도 역시,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광경이라네. 그렇기에 우리는 태반이 눈을 감은 채로 인생을 보내는 셈이고.”

(...)

“이해하겠나? 그걸 보면, 사람은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해. 일단 눈으로 보면····· 자네도 모쪼록 조심하게나.”102p)

 

 

매일 먹을 음식을 직접 만들고, 헬스장에 가서 건강을 챙기고, 일상을 청결히 유지하고, 남은 시간에는 책을 읽는다. 독신 생활에는 규칙성을 중시하는 것이 제일이다ㅡ규칙성과 단조로움 사이에 선을 긋기가 가끔 어렵다 해도.

주위에는 내 생활이 자유롭고 속 편하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나는 그 자유를, 일상의 평온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라는 인간이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는 유의 삶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너무 단조롭고, 너무 고요하고, 무엇보다 고독했으므로.(193-194p)

 

 

“나는 내 그림자가 아무래도 신경쓰여. 특히 최근 들어서. 자기 그림자에 대해 인간으로서 져야 할 책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과연 나는 내 그림자를 지금껏 정당하게, 공정하게 대해왔을지.”(247p)

 

 

“기다리는 것엔 익숙해”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내뱉는 숨이 딱딱한 물음표가 되어 허공에 하얗게 떠오른다.

나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게 아니라,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게다가 애당초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기다려왔다는 건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해지기를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게 전부인 건 아닐까? 나무상자 하나에 들어간 더 작은 나무상자, 그 나무상자에 들어간 더 작은 상자. 끝없이 정묘하게 이어지는 세공품, 상자는 점점 작아진다ㅡ그리고 또한 그안에 담겨 있을 것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사십몇 년을 살아온 인생의 실상이 아닐까?(681p)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냐 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그렇습니다. 그림자와 본체는 아마 서로 교체되기도 할 겁니다. 역할을 교환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본체가 됐건 그림자가 됐건,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 사실은 틀림이 없어요.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인가를 따지기보다,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맞을지도 몰라요.”(751-752p)

 

 

 

 

ㅡ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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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은주와의 대화 이후, 그제야 기본을 다 갖춘 삶 이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밥벌이해 먹고사는 데야 이 월급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 이후는 어떻게 꾸려나갈 건가.

(...)

또 기계처럼 일했고 공장에서 열두 시간을 보냈다. 힘들진 않았다. 다만 허무했다. 집에 돌아와 샤워하고 영화 한 편이나 애니메이션 네 편 보면 또 회사. 맘놓고 쉴 수 있는 날은 고작 하루. 그나마도 야간에서 주간 전환 시엔 반나절 남짓. 이 굴레 안에 청춘을 계속 가두어놓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47p)

 

 

그제야 나 자신의 안일함을 깨달았다. 내가 누린 일상이란 그저 불행이 닥치지 않았기에 유지됐을 뿐. 나 또한 언제든 다칠 수 있으며, 사고로 인해 삶이 끝날 수 있단 생각이 들자 온갖 나쁜 미래상이 그려졌다. 일상이 무너진 현실을 상상하니 두려워졌다. 누가 중소기업의 이런 현실을 알아줄까? 기자? 정치가? 금속노조? 진보 지식인? 아니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없는 공론은 허상일 뿐. 그날부터 현장의 모습을 촘촘하게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211-212p)

 

 

냉소는 인간의 가장 나쁜 감정입니다. 분노나 증오마저 마음먹기 따라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냉소는 그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 뿐이에요. 대상을 이해할 생각도 없고 공감하지도 못하니 무슨 발전이 가능하겠습니까.(272p)

 

 

ㅡ 천현우, <쇳밥일지>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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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6

 

 

제목만 보고 예상했던 내용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그러니까 나는 대충 멋진 신세계의 ‘소마’와 같은 약물을 모두가 사용하는 세계를 다룬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는 말. 오히려 그런 약물을 원래 의도했던 목적과는 다른 의도로 사용하는 사이비 집단과 그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에 더 가까웠다. 정보라 작가가 쓴 작품 중 처음으로 읽은 책.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고통에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284-285p)

 

 

 

 

ㅡ 정보라, <고통에 관하여> 中,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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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5

 

 

뻔히 책 표지에 적혀있어서 할 말은 없는데 대충 봐서 그랬는지 현대사상이라고 해놓고 프랑스 현대철학자들만 나와서 좀 당황스러웠다. 입문서에 깊이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므로 평소 여러 책에서 조금씩 접했던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의 사상에 조금 더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데리다, 들뢰즈, 푸코로 시작하는 초반은 굉장히 간명하고도 쉽게 설명하므로 쉬이 따라갈 수 있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어려워진다. 철학 초심자를 위한 배려로 상이한 입장을 가진 철학자들을 하나의 큰 도식으로 뭉뚱그려 엮었다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확실히 사람은 일을 더 진척시키려면 다른 가능성을 잘라 버리고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 무엇인가를 잘라 버렸다. 고려에서 배제해 버렸다는 것에 대해 창피하다는 생각이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 잘라 버린 것을 다른 기회에 회복하려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또 가고정과 차이의 이야기를 떠올려 주었으면 하는데요, 모든 결단은 그것으로 이제 아무 미련 없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미련을 동반하는 것이고, 그러한 미련이야말로 바로 타자성에 대한 배려입니다. 우리는 결단을 거듭 되풀이하면서 미련의 거품 속에서 다른 기회에 어떻게 응할 것인가를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탈구축적으로 사물을 봄으로써 편향된 결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항상 편향된 결단을 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잠재적인 아우라처럼 타자성에 대한 미련이 뒤따른다는 것을 의식하자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데리다적인 탈구축의 윤리이며, 바로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친절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51-52p)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밖에서부터 반강제로 주어지는 모델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도전을 해서 스스로 준안정상태를 만들어 나가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꽤 엄격한 요구입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생각하는 것은 모종의 예술적, 준예술적 실천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활 속에서 독자적인 거처가 되는, 자신의 독자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여러 가지 만들어 나가자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고, 관엽식물을 기르는 것도 좋고, 사회 활동에 몰입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활동을 다양하게 조직화함으로써 인생을 준안정화해 나가면 되는 것이지, ‘진정한 나의 본모습’을 탐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를 하자, 여러 가지를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그렇게 낙관적이고, 행동으로 사람들의 등을 떠밀어 주는 사상이거든요.(72p)

 

 

그런데 그러한 정신분석은 어떤 식으로 현대사상과 연결되어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현대사상은 정신분석을 비판하지만, 원래는 정신분석에서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앞 장에서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기에 표면의 질서 아래 숨겨져 있는 힘의 차원이 발견되고 20세기에 이르러 그러한 탈질서적인 것의 창의성이 얘기되었습니다. 표면의 질서는 이항대립적으로 조립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도망치는 것은, 데리다라면 탈구축에 의해 질문되는 회색 지대이고, 들뢰즈라면 도주선 끝의 외부라는 것이 됩니다. 인간의 사고나 행위에는 질서 정연한 것만이 아니라 불합리한 힘의 흐름에 맡겨져 있는 면이 있고,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르려면 질서를 벗어나는 디오니소스적이고 꺼림칙한 것을 인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정신분석은 인간에 대한 하나의 정의를 줍니다. 그것은 “인간은 과잉의 동물이다”라는 것입니다.(144p)

 

 

그런데 언어는 분별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이쪽은 이쪽, 저쪽은 저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언어습득이란 어떤 의미에서 세계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인간은 도구를 제대로 조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아마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겁니다. 동물의 경우라면 언어를 습득하지 않고서도 일정한 행동을 취할 수 있지만, 동물이 본능적으로 사물을 구별하고 분절하여 파악하는 반면, 인간은 언어습득과의 관계에서 세계를 다시 분절하는 ‘제2의 자연’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 안에서 목적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습니다. 언어란 들뢰즈의 어휘를 사용하면 ‘제도’의 일종입니다.

목적적, 실리적으로 사물을 구별하고 행동하는 ‘제대로 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경계를 넘어 여러 사물을 접속하는 상상력은 약해집니다.

그런데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상상력의 리좀적 전개와 언어적 분절성은 인간에게 병립되어 있습니다.(158p)

 

 

 

데리다, 들뢰즈, 푸코에서 공통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올바른 의미다”라고 확정할 수 없고 항상 취하는 관점에 따라 의미 부여가 변동한다는 의미의 결정 불가능성 혹은 상대성입니다.

다만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정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은 복잡하다”라는 것입니다. 다의적, 양의적이라는 거죠.

예를 들어 푸코라면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지배자가 지배에 가담하는 면이 있고, 그래서 단순히 어느 한쪽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역학이 복잡하게 있다는 식으로 현실의 복잡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둘 다 그게 그거니까 “둘 다 나쁘지 않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현대사상의 경향은 단순화되고 소박한 상대주의로 파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물은 어떻게든 파악된다”라거나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 역사수정주의가 된다”라거나 “‘탈진실’이라고 일컬어지는 제멋대로의 사실 인식 강요나 음모론을 허용하게 되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확실히 현대사상은 그러한 현대의 곤란한 현상을 일도양단으로 [과단성 있게]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의 사고·언어에는, 예를 들어 음모론에도 이르게 될 가능성이 애초에 있다는 것을 먼저 냉정하게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건 안 좋으니까 없애 버리세요”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어요.

인간은 애초에 정신분석적으로 말해도 ‘과잉’적인 존재이며, 일정한 의미의 틀을 벗어나 사물에 다르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그것이 뚱딴지같은 망상으로 전개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설정으로서 있을 수 있습니다.(196-198p)

 

 

다시 푸코가 등장하게 됩니다. 푸코는 왜 고대로 회귀했을까요?

3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성의 역사 Ⅳ』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마음에 해소할 수 없는 죄책감을 설치함으로써 무한하게 반성을 강요받는 주체를 정립했습니다. 이 죄책감, 즉 원죄란 바로 부정신학적 X입니다. 기독교의 주체화는 바로 부정신학적 주체화입니다. 거기서 푸코는 그 이전의, 말하자면 무한하게 반성하지는 않았던 시대의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세네카 같은 로마의 현인들은 뭔가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것을 근원적인 죄로 여기지 않고 하루의 일과 끝에 일기를 쓰고 반성하며 “더 이상 하지 말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

즉, 수수께끼의 X를 파고들지 않고, 생활 속에서 과제가 하나하나 완료되어 간다는 그런 이미지의, 담담한 유한성입니다. 주체란 우선 행동의 주체이지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반드시 하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관련된 문제는 있지만, 모든 문제가 연결되어 하나로 뭉칠 때, 사람은 엄청난 정체성의 고민으로 폐색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문제는 분할해서 하나하나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데카르트도 말하지만, 바로 그 거대한 수수께끼, 거악이 일어나지 않도록 개별적으로 사물에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복수성으로 향해 가는 방향 지어짐의 의미가 아닐까요?

(...)

어쩔 수 없이 고민하는 것이 깊은 삶의 방식인 것 같은 인간관이 근대에 의해 성립되고, 그것이 다양한 예술을 산출해 낸 것인데요,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세속적으로 사태와 씨름하는 것은, 인간이 변화가 없이 단조롭게 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세속성에야말로 거대한 고민을 품고 있는 게 아닌 또 다른 인생의 깊이, 희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깊이가 있지 않을까요?

문제와 씨름한다는 것은 그저 해석을 이러쿵저러쿵 쓸데없이 만지작거리며 농락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하고 아주 조금이라도 세계를 움직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고뿐만이 아닙니다. 신체가, 사물이, 물질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개개의 문제에는 물론 어려운 것이 있고, 그것은 스트레스를 강요하지만, 그 고통을 무한한 고민으로부터 구별합니다.

(...)

세계는 수수께끼의 덩어리가 아닙니다. 세계는 산재하는 문제의 장입니다.

바닥없는 늪 같은 깊이가 아닌 다른 깊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속성의 새로운 깊이이며, 지금 여기에 내재하는 것의 깊이입니다. 그때 세계는 근대적 유한성에서 보았을 때와는 상이한, 다른 종류의 수수께끼를 획득합니다. 우리를 어둠 속으로 계속 끌어들이는 수수께끼가 아닌, 밝고 맑은 하늘의 수수께끼. 맑기 때문에 수수께끼입니다.(207-213p)

 

 

ㅡ 지바 마사야, <현대사상 입문> 中,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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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22

 

 

되게 못 쓴 에세이다. 저자의 만화는 예전에 몇 권 재밌게 읽었던지라 아주 약간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재미도 감동도 웃음도 전혀 나지 않는 소소한 일상에 대한 글이 계속 이어져 읽다가 중간중간 현타가 와서 길지도 않은 책을 읽는데 오래도 걸렸다. 힘을 빼고 글을 쓰는 것과 성의 없이 글을 쓰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젠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되도록 일찍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막상 해도 오래 못 하는 경우가 제법 있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10년 동안 계속했지만 그 사이에도 나는 다양한 것에 손을 댔다.(96p)

 

 

그러나 ‘전부 말하기족’은 죄다 끝까지 말한다. “이동해주세요”까지 말한다. 끝까지 전부 말하는 걸 듣고 조금 상처받는 건, 전부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사람으로 여겨진 것 같아서다.(103p)

 

 

2층 호텔 창에서 내려다본 한밤중의 도노역 플랫폼,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가. 결국 잊을 것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나.(255-256p)

 

 

 

 

ㅡ 마스다 미리, <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 中, 티라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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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20

 

 

 

“우정은 우정이고 자선은 자선이지.” 프리다가 말했다. “할머니가 어릴 때 독일에 살았던 거 너도 잘 알지, 얘기 많이 들었을 테니 또 하진 않으마.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는데, 너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절대 네 친구가 될 수 없어. 친구한테 적선을 받는다는 건 불가능하거든.”(47p)

 

 

<솔루션>의 요체는, 게이머가 무작정 장치를 만드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고 간간이 질문도 하고 정보도 얻으면 점수는 낮아지지만 자신이 독일 제 3제국에 공급되는 기계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정보를 입수하고 나면 게이머는 생산량을 낮출 수도 있다. 제국이 감지하지 못하는 선에서 최소량만 만들어낼 수도 있고, 부품 생산을 아예 중단할 수도 있다. 질문을 하지 않는 게이머는 ‘선한 독일인’으로서 태평하게 최고점을 얻겠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공장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독일식 활자체 문구가 화려하게 화면을 수놓는다. 축하하오, 나치당원! 귀하는 제 3제국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 했소! 귀하는 진정 효율화의 달인이구려! 미디로 손본 바그너가 울린다. <솔루션>의 핵심은 게임을 점수로 이기면 윤리적으로는 진다는 점이다.(59-60p)

 

 

여기에, 난관이 있었다. 샘과 세이디는 둘 다 게임에 관한 한 자신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좋은 게임과 나쁜 게임을 금방 구별할 수 있었다. 세이디의 입장에선 그 지식이 꼭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도브와 함께 보낸 시간과 게임을 공부했던 세월이 뭘 보든 비판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어떤 게임을 갖다줘도 잘못된 점은 콕 집어 말할 수 있었지만, 어떻게 훌륭한 게임을 만드는지는 꼭 안다고 할 수 없었다. 모든 풋내기 예술가들에겐 취향이 제 능력치를 앞서는 시점이 있다. 이 시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것저것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통과하도록 세이디를 밀어붙인 샘(이나 샘 같은 누군가)이 없었다면, 세이디는 지금과 같은 게임 디자이너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116p)

 

 

샘은 자신이 무척 성숙한 줄 알았지만, 그 반응은 민망하리만치 유치했고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었다. 한번은 그때의 절교를 마크스한테 설명하려고 해봤는데, 마크스는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지금 이해를 못하는 거야. 그건 원칙에 관한 거라고. 세이디는 내 친구인 척했지만 사실은 봉사활동 때문에 그랬던 거잖아. 마크스는 멍하니 샘을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동정심만으로 뭔가에 수백 시간을 쓰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샘.(264p)

 

 

 

ㅡ 개브리얼 제빈,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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