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0

 

 

그냥 정지돈이 정지돈 했네.

 

 

소년 윌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알게 되는 순간 할 말이 없어진다. 이삭 바벨은 말했다. 나는 새로운 장르를 발명했습니다. 그것은 침묵이라는 장르입니다.(16p)

 

 

선우학원이 처음 소개했을 때 정웰링턴은 그녀를 유쾌하지만 깊이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10년을 넘게 만난 유일한 사람이었다.

깊이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 윌리는 헬레나를 통해 깨달았다. 그리고 병은 사람을 매혹한다는 사실도.(54-55p)

 

 

다시 말해 진실은 기능하지 못한다. 기능하는 것은 진실이라고 인정된 형식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진실이 없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악명 높은 진실의 상대성, 시대를 앞서간 포스트 트루스? 그렇지 않다. 하셰크의 잘 알려진 소설 「착한 병사 슈베이크」역시 그렇듯 「정신의학의 신비」에도 진실은 명백히 존재한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은 후리흐 씨도 그를 구하는(?) 이발사도 경찰관도 제도도 아니다. 책을 읽는 독자다. 아이러니한 상황은 독자 앞에 명확히 상연되고 오직 독자만이 진실의 증인이 된다. 그러므로 사실상 모호한 것은 없다. 그리하여 하셰크의 세계는 풍자가 되고 계몽이 된다. 반면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다. 독자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상황ㅡ왜 오해가 발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우왕좌왕하게 되는 건 독자다. 「시학」에서부터 동시대 영화까지 서사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기율 중 하나는 등장인물은 속이되 관객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카프카는 이 기율을 위반했고 국민 작가가 된 하셰크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건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카프카의 작품은 비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역사가 그를 구제하기 전가지 단지 조금 이상하고 실패한 작품일 뿐이다.(145-146p)

 

 

”동지! 스탈린이 그 모든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때 지도부였던 당신은 뭐 하고 있었습니까?“ 흐루쇼프는 연설을 중지하고 연방 각지에서 모인 1,355명의 열성당원을 쳐다봤다. ”누가 말했습니까?“ 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서기장은 회중 시계를 꺼내들었다. ”1분의 여유를 주겠습니다. 누군지 일어나서 다시 말해보시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지만 기다리는 동안 어떤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흐루쇼프는 시계를 호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저는 스탈린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때 아까 소리를 지른 동지가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177p)

 

 

 

 

ㅡ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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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8

 

생각보다는 너무나 당연한 말들의 연속이라서 아쉽네. 초중반부에서 국내 기업의 성공 사례를 분석하는 것은 좋았다. 

 

 

‘저기 성공한 사람들을 보라. 저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아느냐? 그러니 성공하려면 노력해라’라는 주장은 반론하기가 쉽지 않다.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많은 노력을 한 점은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맹점이 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노력이라고 하더라도, ‘노력하면 성공한다’라는 명제가 참이 되지는 않는다. 노력했는데도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29p)

 

 

그러나 이 중에서 쥬씨의 대표가 직접적으로 밝힌 내용은 대량 구매와 직매입, 유통혁신뿐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건, 의도한 발언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성공한 사업가들이 성공 원인에서 100% 사실이 아니라 일부만 이야기한다는 하나의 사례이다. 그리고 그만큼 덜어낸 사실의 자리에는 때로는 과장이, 때로는 사업가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이 대신 채워진다.(75p)

 

 

그렇다면 우리가 프릳츠의 성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적자본의 축적을 통한 실력의 증진은 사업과 경쟁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나의 인적자본으로 주도할 수 있는 시장이 열리는 시점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노력하고 열심히 하면 그만큼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순간에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거나 열리지 않는다면 그 시장의 주도권을 쥐기는 힘들다. 프릳츠의 대표들이 대단한 점은 그 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128p)

 

 

사업을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 또 배수진은 단기결전을 위한 임시적 방법일 뿐이지 장기전을 위한 방법이 아니다. 사업을 한 달 정도만 하고 말 생각이 아니라면 그런 생각은 멀리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런 절실한 마음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어떤 자원을 가지고 있는지도 잘 살펴보자.(203p)

 

 

가끔 언론이나 사석에서 ”명문대 학벌? 그런 거 필요 없어~“라고 호기롭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학벌이 좋은 경우가 많다. 아마도 자기가 좋은 학벌을 가져봤지만, 딱히 이득을 얻은 것도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의 함정은 그들이 그 학벌이 없는 환경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학벌로 인해 얻을 수 있었던 혜택을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한 것, 혹은 당연한 것 정도로 믿는 경우이다.(207p)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만 보면 모두 고난을 겪고 성공을 이루었기에, 나도 고난을 견디면 언젠가 저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한 사업가들만을 관찰했기에 나오는 생존편향에 불과하다. 대학병원의 로비에 가면 세상에는 아픈 사람만 있는 것처럼 보이고, 공항에 가면 모두가 해외여행을 하고 불경기와 가난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그러나 고생은 누구나 겪는 것이며, 성공은 고생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이 아니다. 고난이나 고생을 성공의 요소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는 비슷한 것을 겪고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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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나치게 자신의 고난을 강조하거나, 더 나아가 고난을 권유하는 사업가들은 성공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업가로 여긴다. 고난을 강조하고 자신이 겪은 고난을 대단하게 이야기할수록,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잘 통제된 고난을 짧게 겪었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직도 고난을 겪어야 성공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생각하기 바란다. 그러한 사고는 2100년 전에 태어난 사마천의 사고보다도 뒤처진 것이다. 고난은 되도록 짧게 겪는 것이 좋다. 고난은 성공의 필요조건도 아니요, 충분조건도 아니며, 보상은 더더욱 아니다. 고난은 그냥 고난일 뿐이다.(233-234p)

 

 

 

 

 

ㅡ 김영준, <멀티팩터> 中, 스마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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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5

 

 

 

이제는 가난의 문법이 바뀌었다. 도시의 가난이란 설비도 갖춰지지 않은 누추한 주거지나 길 위에서 잠드는 비루한 외양의 사람들로만 비추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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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강서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작은 골목을 지나는데, 1km가 채 안 되는 거리에서 모두가 다른 편인, 재활용품 줍는 노인 무리를 보았다. 물론 그들이 함께 다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경쟁 중이었고 갈림길에 다다르자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엔 몰랐지만, 고물은 먼저 발견한 사람의 차지가 되니까 남의 뒤를 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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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에게 가난은 경쟁을 통해 드러난다. 이들은 경쟁 속에서 팔 만한 재활용품을 획득해 생계를 꾸렸다.(28-29p)

 

 

몇몇 노인들은 가족으로 인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겪기도 한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복지계 안팎에서 재고를 요청하고 있는 ‘부양의무자’로 인한 문제다. ‘부양의무자’는 정부가 2000년 10월부터 시작한 국민기초생활제도에서 기초수급자로 지정받는 조건으로서, 개인의 사정으로 기초수급자가 될 때, 자녀/부모의 소득과 재산이 일정 기준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법이 개정되며 부양의무자의 기준에서 손자와 형제·자매, 홀로 남은 사위·며느리를 제외해왔고, 이제는 부모와 자식이 각각 일정 기준의 소득과 재산 이하여야 기초수급자로 지정받을 수 있다. 이는 개인이 아닌 가족 전체의 부를 기준으로 사회복지 서비스를 이용할 자격을 부여한 것으로, 가족이 개인을 부양할 의무가 있다는 옅어진 관습의 흔적이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영자씨는 연락이 끊어진 자식들의 경제적 수준이 기준 이상이라는 이유로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처지다.

(...)

보건복지부는 2020년 제2차 기초생활 보장 종합계획을 발표하며, 2021년 노인과 한부모 가구를 대상으로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고, 2022년에는 그 외의 가구를 대상으로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기로 발표했다. 그렇지만 이는 생계비를 지급하는 생계급여에 한해서만 폐지했을 뿐이며 의료비를 지원하는 의료급여에서는 기준을 일부 완화하는 수준일 따름이다. 의료급여에서 역시 부양의무자 기준을 완전히 폐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54-55p)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가난한 노인들에 대해 ‘열심히 살지 않은 젊은 날의 결과’라거나 ‘부양해줄 자녀와의 어떤 문제’가 있어 저렇게 사는 사람이라고 단언하고 만다. “역시 가난한 노인들은 가난한 이유가 있어.”라며 혀를 차기도 한다. 그렇지만 노인들의 삶이 순전히 개인의 잘못 때문에 생겨나는 걸까? 가난하고 싶어 가난해진 사람은 없다.

영자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지게 한다. 개인의 선택이 우연한 연유로 잘못되었다고 한들, 왜 국가와 사회는 그녀를 구하지 않았을까?(126-127p)

 

 

이들을 ‘청소부’로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노인들은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있지만, 이들은 ‘청소부’가 아니다. 버려진 것들을 주워 돈을 벌지만, 그 돈은 쓰레기를 버린 이들이 주는 게 아니다. 노인들의 행위는 같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청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게 아니라, 재활용 산업에서 발생하는 돈 일부를 스스로 취하고 있을 뿐이다.

(...)

바우먼은 사람들이 기부나 자선활동을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빈공층을 인도주의적 관심의 대상으로 제시할 경우, 이들이 처한 운명의 잔인함과 냉혹함에 분노하게 되는데 이렇게 분출된 분노는 ‘안전하게’ 자선활동으로 전환”된다고 했다. 가난한 노인의 문제는 연민과 감동, 그리고 기부와 자선사업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정작 필요한 건 ‘안전한’자선활동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 인식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일이다.

(...)

“결국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빈곤층의 존재란, 끊임없이 불확실성이라는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소비자’의 삶이 야기하는 혐오스럽고 끔찍한 결과를 상쇄하는지도 모른다.(206-209p)

 

 

노인들이 일하는 풍경은 보기 좋다. 그들은 서로의 일을 돕기도 했고, 돈을 번다는 데 뿌듯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렇지만 경로당의 그녀들 사이에는 은근한 이질감이 있었다. 더 가난하지 못해서 이 일을 할 수 없는 누군가와 몸이 아픈 이들은 일하는 이들을 부러워했다. 어떤 이는 사정이 있어 일을 그만뒀다가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빈자리가 없어 난감해하기도 했다. 반면에 일을 하는 이들 역시 일하지 않는 사람을 부러워했다.(254-255p)

 

 

노인들을 두고 ‘문명화’가 덜 됐다거나, ‘열심히 살지 않은 젊은 날의 결과’가 ‘규칙 없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거라며 가타부타 탓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노인들 역시 나름대로 도시공간을 자신의 몸에 맞춰 전유하고 있다는 점 역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도시는 노인들의 마음과 몸에 알맞을까?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이 차도로 이동하는 이유가 뭘까? 무법자이기 때문일까? 이 사회에서 모두가 신체의 속도와 살아가는 방법이 각기 다르다는 걸 이해한다면 좋겠다. 노인들이 얼마 나가지도 않는 몸으로 100~200kg이 넘는 리어카를 끄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바닥이 울퉁불퉁할 때, 노인들은 더 많은 힘을 쓰게 된다. 게다가 인도의 폭이 좁은 상황에서라면 지나치는 사람들을 피해야 하기에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쉽게 지치게 된다. 사실 노인들은 차도로의 통행이 위법이라는 걸 알고 있고, 위험하다는 사실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체력을 감안해 위험을 감수하며, 차도를 걷는 중이다. 이런 사정을 이해한다면, 노인에게 ‘몰염치스럽고 이기적’이라는 댓글 하나를 달기보다는 노인이 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될 삶을 살 길 바라는 마음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265-266p)

 

 

종교시설은 노인과 여러 면에서 관계를 맺고, 이들을 안도케 하는 기능이 있다. 현재 시점에서는 종교 시설에서 쌀과 같이 부족한 필수 자원을 지원받을 수 있고, 미용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해 현금 소비를 하지 않게끔 한다. 한 달에 한두 번 문안인사를 하는 자녀들과 달리, 성직자와 임원들과 봉사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 축복을 나누며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269p)

 

 

ㅡ 소준철, <가난의 문법> 中,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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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1

 

 

건강과 기회, 사회 참여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가장 적은 전 세계 10개국 중 7개국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전 세계에서 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들이기도 하다. 정반대로 성별 격차가 가장 큰 6개국은 소득이 가장 낮은 국가군에 속한다. 부가 여성의 건강, 기회, 사회 참여를 보장하는지, 아니면 이런 요소들 덕에 부유함이 가능해지는지가 명확하지는 않다. 아마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성별 격차가 작은 사회의 여성은 성별 격차가 큰 사회의 여성이 출산하는 자녀 수의 절반 정도만 낳는다는 점이다.

(...)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메커니즘은 성별 불평등의 폐지와 관련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29p)

 

 

육류를 생산하려면 엄청난 자원 투입이 필요하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양의 자원이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 집중 투입되는 과정이라 하겠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용하는 담수의 30퍼센트는 고기를 얻기 위한 가축의 생산과 사육, 도살에 쓰인다. 감금 상태에서 도축을 기다리는 250억 마리의 소와 돼지, 닭에게는 엄청난 양의 약이 주어진다. 1990년만 해도 미국에서 사용된 항생제의 3분의 2가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들에게 투여됐다. 이는 명백히 성장 촉진과 폐사율 저하를 위한 것이었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 두 가지 목적 중 어느 것에도 효과를 내지 못했다.

(...)

이런 새로운 고안물 안에서조차, 동물에게 3킬로그램의 곡물을 먹여서 얻는 고기는 0.5킬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인간이 10억 톤의 곡물을 먹어 소비하는 동안 또 다른 10억 톤의 곡물이 동물의 먹이로 소비되고 있다. 그렇게 먹여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1억 톤의 고기와 3억 톤의 분뇨다.(74-75p)

 

 

물고기는 비교적 짧은 소화관 때문에 육지에서 사는 동물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단백질을 필요로 한다. 이런 단백질 공급을 위해 양식 시설에서는 작은 물고기를 잡아 익혀 압착하고 건조한 후 가루 형태로 만든다. 이런 작은 물고기들은 외해에서 잡은 것이다.

1킬로그램의 연어를 얻으려면 3킬로그램의 연어 먹이가 필요하다. 1킬로그램의 연어 먹이를 얻으려면 5킬로그램에 이르는 물고기를 갈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양식장에 가둬놓고 키우는 연어 1킬로그램을 얻으려면 바다에 사는 작은 물고기 15킬로그램이 필요해진다. 지금은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 3분의 1가량이 분쇄되어 양식장 물고기의 먹이로 사용된다.(88p)

 

 

지구상에서 바이오 연료의 상당 부분은 세 곳에서 생산하고 사용한다. 미국에서는 옥수수에 기반한 에탄올을, 브라질에서는 사탕수수에 기반한 에탄올을, 유럽연합은 대두와 카놀라 원료의 바이오디젤을.

(...)

오늘날 연료 소비 수준을 볼 때, 바이오 연료는 석유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

1킬로그램의 바이오 연료를 만들려면 20킬로그램의 사탕수수가 필요한데, 이런 전환에 필요한 옥수수와 대두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

우리는 자동차에 중독되어 있고 자동차는 석유에 중독되어 있는 상황에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 듯하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자동차들이 대부분 석유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자동차 범퍼와 문, 대시보드, 엔진 케이스, 타이어 등 모든 것이 석유에서 만들어낸 ‘폴리머’를 사용한다. 우리가 타는 자동차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모두가 ‘플라스틱’이라 부르는 물질로 채워지고 포장되는데, 이는 석유에서 기인한 또 다른 제품이다.(152-154p)

 

 

우리가 에너지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이 화석연료든 재생 가능한 에너지든 비율과 총량 사이에서 헛갈리기 쉽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이용한 책략을 잘 쓰는 정치가와 과학자를 모두 보아왔다. 설명하자면, 이런 방식으로 작동된다. 내 친구 브라이언은 몇 년 전 흡연을 그만두었는데 수십 년간 담배에 중독되어 있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16세의 그는 친구들과 함께 수업 후 담배를 피웠는데 한 갑이면 일주일 정도 지낼 수 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시간제로 일을 하며 이 습관이 더 심해져 일주일에 두 갑 정도 피우곤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전일제로 건축 현장에서 일하게 되자 흡연량이 매일 한 갑으로 늘어났다.

브라이언의 삶에서 담배의 중요성을 최소화하고 싶을 때, 나는 그의 담배 구입비가 급료에서 차지한 비중이 지난 20년 동안 급격하게 줄어들었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담배가 브라이언의 삶에서 차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면, 나는 그가 매주 피운 담배의 전체 개수를 강조해 그 기간 동안 일곱 배가 늘었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사실을 놓고 보면 이 두 설명은 모두 맞는 이야기지만 맥락 없이 독자적으로 제시할 경우, 브라이언의 흡연 습관은 각각의 설명에 따라 서로 다른 인상을 줄 것이다. 브라이언의 삶에서 담배가 행사한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양쪽을 모두 잘 살펴야 한다.(158-159p)

 

 

 

ㅡ 호프 자런,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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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1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내러 돌아온다.”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 주치의로 일하면서 30년 동안 332명이 넘는 여자 선수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래리 나사르에게 법정에서 피해자가 한 말이다.(96p)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는 점점 많아지는데 사법부는 여전히 가해자의 정신 질환을 들먹이고 그들의 미래를 염려한다. 서울역 ‘묻지마 폭행’을 저지른 삼십대 남성의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강남역 살인 사건의 가해자 김씨 역시 심신미약 상태가 인정되어 감형됐다.

여성에게는 당장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검찰은 가해자의 영장을 기각하고 재판부는 형량을 낮추고 있다.

(...)

범죄를 예방하는 일은 여성들 각자의 일이 될 수 없다. 여성 혐오범죄의 해결은 국가의 일이다.(106-107p)

 

 

오토바이를 탄 누군가 지나가면서 당신의 가방을 휙 채갔다.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경찰에 신고한다”가 일반적인 답변일 것이다. 경찰을 찾아간 당신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말할 것이다. “가방을 도둑맞았어요!” 여기서 경찰이 가방을 도둑맞은 당신에게 “그러게, 가방을 잘 간수했어야죠”라며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가방을 훔쳐 간 사람이 잘못했으니까. 근데 성범죄 피해에 한해서만은 유독 사회의 인식이 엄격하다.

(...)

피해자가 한 행동이 상식에 부합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성범죄에 한해서는 ‘피해자로서 완벽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보호하겠다는 인식은 틀렸다. 피해자의 말, 글, 행동을 평가하여 합격 조건을 통과하지 못하면 비난하고 의심한다.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는 인식 때문에 성범죄 피해자는 세상에 쉽게 나서지 못한다. 당할 만해서 당하는 피해자는 없다. 이 부분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해하지 못하겠으면(설혹 싫더라도) 그냥 외웠으면 좋겠다.(263-264p)

 

 

 

ㅡ 추적단 불꽃,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中, 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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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0

 

며칠 동안 새로 나온 책에 관심을 덜 두었더니 보고 싶은 책 엄청 많네. 언제 다 읽지?

 

 

A씨의 범행으로 제공된 영상자료는 타인에게 유포될 위험성이 있고 유포 시 피해자는 돌이키기 어려운 인격적 피해를 볼 수 있다. A씨의 범행을 알게 된 피해 여성은 성적 수치심과 모멸감은 물론 커다란 정신적 충격과 고통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A씨는 피해를 변상하거나 용서받지 못했다. 다만 A씨가 B씨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듣게 되자 술을 마신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점, 형사처벌 전력이 없다는 점, 젊어서 자신의 성행을 개선할 가능성이 기대되는 점 등을 고려했다.(부산지법 형사3단독 이영욱 부장판사)

 

한마디만 하자. 말세다.(29-30p)

 

 

대체 어린 여자아이들의 성매매를 자발적/비자발적으로 나누는 것이 가능한가. 이런 인위적인 구분 때문에 피해자로 보호받아야 할 위기의 아이들이 구금되고, 처벌받고 있다. 의지할 어른도, 의지하고 싶은 어른도 없는 아이들은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가장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다. 성구매자들인 성인 남성들은 이처럼 취약한 여자아이들의 상태를 이용해 성을 착취하고 임신이나 성병 감염과 같은 위험까지 이들에게 전가한다. 그런데도 자발적인 성매매라는 이름으로 여자아이들은 피해자가 아닌 범죄자 취급을 당한다. 성구매자인 성인 남성은 잠시 ‘쪽’팔리고 말면 그만. 심지어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들에게는 이것도 하나의 무용담이자 자랑거리가 된다. 얼마나 어린 여자아이와 했는지···.

(...)

이에 반해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아동 성착취의 형태로 성매매를 명확히 열거하고 있고, ‘아동 성매매’라는 용어 대신 ‘성매매 상황에 있는 아동 성착취’라는 용어를 쓰도록 권고하고 있다. 성매매에 동원된 아동은 아동의 합의나 동의 여부를 떠나 성매수 범죄의 피해자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2019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한국에서 13세 이상 아동이 성행위에 동의할 수 있다고 취급되어 성착취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했다고 간주된 아이들은 범죄자로 취급되고 보호처분에 의해 구금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신고를 못 하는 것은 물론 법률적 조력 및 성폭력 피해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성매매 아동·청소년의 지위를 범죄자가 아닌 피해자로 분류할 것을 촉구했다.(60-62p)

 

 

남성들이여, 제발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성범죄를 저지르고 ‘동의’나 ‘사랑’을 했다고 말하지 말라. 그렇게 사랑한다면 아직은 어린 그들이 건강하게 무사히 성인으로 성장하게 지켜보라.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라. 미성년자가 돈을 벌기 위해 성매매했다는 이유로 그것을 자발적이라고 하지 말라. 아이들의 성을 사는 사람이 누구인가.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더 이상 아이들에게 묻지 말라. ‘남성’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66-67p)

 

 

낙태를 하는 여성도, 낙태에 찬성하는 여성도, 그 누구도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 속의 태아일 때든 태어난 뒤든, 아이를 감당해야 할 ‘이미 태어난 사람’인 여성이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일 뿐이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온갖 어려움은 오롯이 여성에게 짊어지게 하면서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고귀함만을 내세우는 것은 위선이다. 그렇게 생명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태아의 성별을 감별하여 여아인 경우 수없이 낙태가 이루어졌다.

(...)

오직 금하는 것은 여성의 사정, 여성의 결정에 의한 낙태뿐이다.(139-140p)

 

 

1951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 보낸 아동의 수는 무려 11만 1,148명으로 추정된다. 아시안게임이 있었던 1986년에는 8,600여 명, 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에는 6,400여 명의 아이가 해외로 입양되었다. 그들 중 90퍼센트가량이 미혼모의 아이였다고 한다. 이는 해외 입양이 전쟁고아보다 미혼모 아이의 입양을 위해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통계 수치다. 해외 입양이 한국 내에서 보호하기 어려운 아동을 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고 하더라도, 미혼모 아이의 수가 지나칠 만큼 많은 이 입양 통계는 가부장 사회가 결국 결혼하지 않고 아이 낳은 여자를 수치스러운 존재로 치부해 모성을 존중하지 않았음은 물론, 그 아이조차 한국 내에서 용인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154p)

 

 

오늘날의 대리모 산업은 “부자 나라 불임 부부에겐 꿈에도 소원인 예쁜 아기를, 가난한 나라 빈곤층 여성에겐 온 가족을 먹여 살릴 일확천금을”이라는 슬로건하에 ‘여성이 여성을 돕는다’고 미화하면서, 결국 가난에 내몰린 여성을 착취하고 도구화하고 있다. 미국, 캐나다 등 부유한 나라에서 아이를 원하는 커플들이 인도, 네팔,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 등 가난한 나라 여성들의 자궁을 이용하고, 이를 중개하는 블루드 등의 기업은 이 과정을 관리하며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 이들은 대리모 계약을 체결하면서 엄격한 조건(술·담배는 물론 성관계를 비롯하여 많은 금지 목록이 부여되고 위반 시 엄청난 위약금을 물게 된다)을 거는데, 기형아를 임신하는 경우 낙태한다는 항목이 있으며, 낙태하지 않고 출산하는 경우 의뢰인은 양육비 등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내용을 담기도 한다.

(...)

필리핀 등 가톨릭 국가의 여성이 대리모인 경우 종교적 이유로 낙태를 거부하는데, 쌍둥이 중 하나가 장애아로 태어나자 의뢰인 부부가 비장애인 아이만 데려가는 사례도 있었다. 대리모 계약에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은 철저히 돈의 지배하에 놓이고, 인격을 가진 여성은 사라지며, 생명은 선별된다. 이것이 바로 현재 성행하고 있는 대리모 계약의 민낯이다.(173-174p)

 

 

 

ㅡ 김수정, <아주 오래된 유죄> 中,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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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

 

 

 

여행준비라는 취미의 장점 중 하나는 화제가 풍부해진다는 것이다. 여행준비를 많이 하고 떠난 여행일수록 이야깃거리가 많아지는 건 당연하지만, 준비만 하고 떠나지 않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말 중요한 점은 내가 떠들 수 있는 소재만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더 많은 말을 하도록 부추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71p)

 

 

별을 찍을 때의 유의 사항. 결코 집착하면 안 된다. 더 많은 별을 모으려고 뜻 없이 아무 곳이나 퍽퍽 누를 필요는 없다. 이 별은 열두 개 모은다고 무료 음료가 생기는 그런 별이 아니다. 정말 관심 있는 곳, 다음에 더 한가할 때 홈페이지에 들어가보거나 관련 문서를 더 검색해볼 생각이 있는 곳에만 찍는 게 좋다. 내가 왜 여기에 별을 붙이는지, 그 이유를 잊지 않도록 별도로 메모를 하거나 하는 노력을 굳이 안 해도 된다. 그곳이 정말 (나에게) 매력적인 장소라면 시간이 흐른 후 그 별을 다시 만났을 때 불현듯 기억이 날 테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잊고 살아도 대세에 지장이 없는 장소이리라.(90-91p)

 

 

별 받은 집들이 좀 부담스럽다면, ‘빕구르망’이나 ‘더플레이트’ 목록에 있는 집들도 충분히 믿을 만하다. 아시아 지역에 특화되어 있는 밀레 가이드도 참고할 만하고, www.theworlds50best.com 같은 사이트도 재미삼아 볼 만하다. 아주 유명한 ‘팻투바하’ 같은 분의 포스팅도 좋은 자료다.(101p)

 

 

노르웨이 로포텐 제도에 있는 헤닝스베르 스타디움, 크로아티아 이모트스키에 있는 스타디온 고스핀 돌라치, 그리고 아이슬란드 베스트만나에이야르에 있는 하스테인스뵐루르 스타디움.(136p)

 

 

 

ㅡ 박재영, <여행준비의 기술> 中,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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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4

 

 

하지만 그래서 회고록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진짜 이유는 단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회고록/고백을 믿을 수가 없다. 그 속에 든 사실을 믿지 못한다기보다는 그 의도를 신뢰할 수 없다. 요즘 시대의 회고록을 읽고 내가 받는 느낌은 그 회고록에 작가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목적이란 작가가 자신을 무한히 매혹적이며 중요하다고 느끼는 만큼 독자도 그렇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작가들의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나는 회고록 대부분이 그래서 처량해 보인다. 물론 올해의 미국 최고 에세이에도 회고록 비슷한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특이한 상황에 대한 글이거나 고백을 훨씬 더 크고 더 풍부한(내가 더 풍부하다고 느끼는) 구도 혹은 이야기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다.(271-272p)

 

 

·····이 시나리오에서 우리는 힘을 빼앗긴 왕 혹은 불안하고 경직된 대통령처럼 정보와 해석에 압도당하는 상황에 빠지거나 냉소주의와 아노미로 인해 마비되거나, 가장 심하게는 특정한 도그마의 논지들에 매혹된다. 정치적 올바름만을 추구하는 논리든 전미총기협회의 논리든 합리주의, 복음주의, “치고 빠지는”외교 정책, “석유를 위해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구호이든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누차 말하지만)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객원 편집자의 서문에서 충분히 논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으로 2007년 미국 최고 에세이 선정작을 고를 때 노골적으로 그리고 편파적으로 선호한 에세이는 바로 반사적인 도그마를 약화시키는, 성실하고 전폭적으로 스스로 ‘결정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작품들이다. 공립학교에서 과학과 함께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고집하는 멍청한 근본주의자들이나 모든 진지한 기독교인이 근본주의자들처럼 멍청하다고 고집하는 냉소적인 유물론자들처럼 좁은 구멍에 맞지 않는 현실을 죄다 삭제해버리는 행위를 피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런 행위가 꽤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이 우리에게 닥친 위급 상황의 일부다. 우리는 편협한 교만, 미리 형성된 입장, 경직된 거름망, 성숙하지 못한 ‘도덕적 명확성’ 속으로 자꾸 후퇴하고 싶어 한다. 대안은 방대한 고엔트로피의 정보량과 모순과 갈등과 불안정과 마주하는 것이다. 개인의 무지와 망상의 새로운 경지를 끊임없이 발견하는 일이다. 요약하자면 오늘날 제대로 정보를 습득하고 교양을 쌓으려면 거의 항상 내가 바보라는 기분이 들게 되고 도움을 구하게 된다. 이 이상으로 더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이 수상집의 작가들은 같은 말을 더 잘, 더 간결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서비스적 ‘가치’라고 할 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지금까지 말한 대로이며, 정치문제나 갈등을 빚는 문제와 동떨어진 주제에 관한 에세이들도 여기에 해당된다. 여러 에세이들이 단지, 가장 높은 경지의 예술적인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특정한 사실 집합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일부 아이들이 사용하는 주파수 17kHz의 휴대폰 벨 소리, 개가 해석하는 움직임의 언어, 지진을 경험하고 묘사하는 무한대에 가까운 방법, 실존에 대한 제유로서의 무대 공포, 내가 믿고 우러러봤던 대부분의 것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쓰레기였다는 깨달음 등 주제는 다양하다.(279-280p)

 

 

 

ㅡ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中,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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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6

 

다음은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처음에 나는 그의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버는 돈이 많은데 왜 빚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까? 그 안의 시스템은 바깥세상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계산법과 달랐다. 30일간의 일을 채워야 돈을 벌 수 있고 그중 하루라도 기본 테이블을 채우지 못하면 그날은 계산일에서 빠진다. 선불금을 받게 되면 우선 그 돈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급여에서 빠지는데, 그러면 생활비가 부족해서 다시 가불 형태로 돈을 받고 이런 식으로 일종의 빚이 계속 쌓였다고 했다. 업소를 옮기게 되면 다시 소개비와 여러 필요 비용이 발생해 빚이 된다.

(...)

알선업자들이 미성년 성매매 여성에게 유사 가족의 호칭을 쓰는 것은 당연히 용이한 통제를 위해서다.(93-94p)

 

 

꾸준한 선호 직업군으로서 너도나도 공무원 시험에 뛰어드는 시대에 공무원들이 어렵게 얻은 직장을 잃을 것도 두려워 않고 성매매 사업에 다리를 걸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매매 알선이 그만한 위험쯤 무릅쓸 만큼 돈이 되고 심지어 권력이 되며 또한 이에 대한 단속과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공권력이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

온갖 직군의 사람들이 성매매 알선에 나서는 것은 손쉽게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개인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포주와 공모하고 조직 폭력 단체부터 현직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성매매로 기꺼이 이득이 취한다. 한편에서는 사채업자가 다른 한편에서는 무당이 성매매를 종용한다. 한국 사회의 온갖 자리에서 이들은 성매매 알선에 각자의 권력을 사용하고 이로써 부를 축적하고 있다.(98-99p)

 

 

대한민국 법은 이러한 여성들의 존재를 명문화하고 있다. [식품위생법 시행령]에는 유흥종사자를 둘 수 있는 시설로 ‘유흥주점’을 규정하고 “‘유흥종사자’란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으로 손님의 유흥을 돋우는 부녀자인 유흥접객원을 말한다.”고 되어있다(제22조). 한국사회의 독특한 영업 형태이며 속칭 ‘룸살롱’으로 대표되는 유흥주점은 유흥과 접대를 위한 대표적 공간이다. 보건복지부 [성매개감염병 및 후천성면역결핍증 건강진단규칙]은 식품위생법의 유흥접객원과 티켓다방 종업원, 안마 시술소 여성 종업원을 대상으로 한다. 대상자들은 매독, 임질 같은 성병을 타인에게 감염시킬 우려를 가진 자들로서 의무적으로 정기검진을 받도록 되어 있다.

국가가 직접 공창을 관리해가며 성매매를 인정하는 구시대적 유물을 우리는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

(...)

일제강점기의 유곽과 함께 들어온 과거의 유흥 접대에서 유흥은 분명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이 같은 방식의 접대는 어쩌면 한국 경제가 대외 의존적이던 긴 시기 동안 갑질에 휘둘리며 외세에 조아렸던 수많은 이의 상처였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독재 정부는 그들의 정치적 불의를 덮기 위해 ‘이제 너희들도 즐길 수 있다’고 속삭였고 그 시간들을 지나 현재 한국의 일반 남성은 성 착취의 주역이자 공모자가 되었다.(104-107p)

 

 

성매매를 노동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성매매를 합법적 계약으로 인정하고 제도로서 보장하면 오히려 폭력의 위험성을 낮출 수 있다고 한다. 계약 조건은 ‘콘돔을 낀다’‘입에 사정하지 않는다’등 여러 가지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지키고 정해진 체위만 할 것 등을 미리 약속한다 해서 성매매가 안전하고 할 만한 것, 폭력이 아닌 정당한 노동 행위가 될 수 있을까? 보아온 수많은 실제 사례가 그렇지 않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계약 조건은 누가 만드는가. 성매매 여성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조정할 수 있다는 건 환상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성매매 여성이라고 하면 강남의 텐프로 같은 업소에서 손님을 가려 받고 평소 사치를 하며 화려하게 지내는 모습을 떠올린다. 원하지 않는 행위는 까칠한 태도로 거절하며 모든 남성을 눈 아래 두는 어떤 여성을 상상한다. 하지만 실제 성매매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상거래 행위에 가깝다. 여성이 노동자가 아닌 상품으로 취급되고 일정 가치를 기대하는 구매자들이 존재하며 그 기대를 배반할 때 가차 없이 훼손당하고 버려지는 이 과정에서 여성은 인간으로서 존중되지 않는다.(148-149p)

 

 

이런 선불금은 종류도 다양하고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쌓여버리기 때문에, 여성 개인이 이런 구조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성매매를 시작했거나 금세 현실을 파악했다 해도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누군가는 자신만 잘하면 혹은 조금만 견디면 스스로 문제르르 해결하고 성매매를 그만둘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이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현장의 증언들에 따르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이 자신의 선불금을 충분히 갚고 나올 수 있겠다는 계산으로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 동료의 선불금에 연대보증을 서게 되고, 며칠 동안 앓아눕는 바람에 결근비가 쌓이며, 구매자의 비위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테이블비를 덤터기 쓰거나 이런 지출로 인해 월세 낼 돈이 부족해 일수를 찍게 된다. 도처에 함정이 도사린 이 시장에서 빚은 빠르게 불어나며 나중에는 그 금액조차 불투명해진다. 본인이 직접 채무자인 경우에는 갚은 금액이라도 알 수 있고, 불법원인급여에 의한 무효로 주장하기도 용이하지만 함께 일하는 여성들 간에나 가족이나 친구들을 연대보증한 경우에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런 식으로 생존하는 동안 그만두리라는 결심은 자꾸 지연되고 대다수가 곧 그 미래는 오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성매매로 유입될 수밖에 없었던 삶의 조건들에 더해 이 ‘일’로 얻은 피해가 더해져 시간이 갈수록 이들을 둘러싼 굴레는 점점 더 촘촘해지는 것이다.(155-156p)

 

 

빈곤하고 자원이 없는 채 아동-청소년기를 보낸 여성들에게 사회는 안전망을 제공하는 대신 정글에 버려진 먹잇감으로서 그들을 맞는다. 취약 계층 여성 청소년은 젠더 폭력에 의해 고립된 채 안전망이 전무한 생활을 전전하다가 거리에서 다시 성폭력에 노출되고 마침내 성매매 업소를 그나마 동료가 있는 안전한 곳, 폭력은 동일하지만 그래도 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절망적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성매매가 유일한 선택지가 되지 않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한 나라의 국경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성매매 시장은 상대적으로 더 빈곤하고 더 취약한 여성들로 채워진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합법화된 성매매 시장이 자국에서 공급되지 않는 여성들을 이주여성으로 채우는 것처럼 한국도 이미 그렇다. 성매매 여성 개인을 악마화하고 지탄하며 왜 성매매를 하느냐 여성에게 묻는 것은 더 이상 의미 없는 일이다. 거대한 성매매 시장을 어떻게 줄여나가고 이 구조 자체를 바꿔나갈지를 물어야 한다. 아니 답해야 한다.(165p)

 

 

2018년, 여성 인권을 고려하는 맥락으로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들의 성매매 실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독일과 네덜란드를 방문했다. 그리고 목격한 현장은 각종 매체와 연구를 통해 보고 듣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다. 우선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화려한 생활로 주목받는 성매매 알선업자들이었다. 네덜란드와 독일의 대형 성매매 업소 포주들은 성공적 사업가로서 자서전을 출간하고, 이들이 성매매 알선업소 운영을 컨설팅해주는 리얼리티 쇼가 제작되었다.

(...)

그들은 직접 프로그램을 제작할 만큼의 재력과 전방위 로비스트가 될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 ‘포주들’은 정계로 나아간다.(176p)

 

 

성매매가 합법화된 나라들의 모습을 보면, 한번 성매매 합법화를 하게 되면 다시 되돌아오기란 지극히 어려워진다는 걸 알게 된다. 일제 강점기 이후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던 2004년까지 국가가 조장해온 한국의 상황에서도 이미 우리는 배웠다. 이미 거대해질 대로 거대해진 성매매 시장이 사회를 통제하는 권력 자체가 되며, 여성들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그 시장 안에서 권력층의 부패와 비리와 유착이 이루어지고, 남성들의 관념 속에서 섹스는 성매매를 기준으로 치환된다.

성매매를 ‘자유’라는 말로 포장한 나라에서 그 시장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는 이미 독일과 네덜란드의 현재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매매 여성의 권리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성 노동을 낭만화하며 독일과 네덜란드를 추종할 만한 사례로 꼽기도 한다. 그러한 주장을 단지 하나의 의견으로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성매매가 합법화된 사회에서 그로 인해 벌어들인 자본을 포식하는 알선업자들이 그런 주장의 뒤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매매 여성들의 동의를 당당함으로 포장한다고 해서 성 구매와 알선의 폭력적 본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성매매 안에서 인간 여성의 존엄은 없다. 성매매를 긍정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일한 것은 이들이 언제든 돈만 내면 사용할 수 있는 육체로서 준비된다는 것뿐이다. 성매매 합버화는 성 구매를 당당한 소비로 만들고 포주를 자랑스러운 사업가로 만들어주었다.(184p)

 

 

‘여성들이 성을 판매할 권리’만이 보장되는 이곳에서 그들은 포주들의 경쟁 속에 점점 저렴해지고 더욱 노골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게다가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능동적 성 판매자로 상정하는 허울 좋은 인식은 실제 여성들이 경험하는 착취와 학대를 개인 선택의 결과로 만든다. 그로 인해 성매매 여성이 안게 되는 트라우마는 ‘할 만한 일’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며, 여성 자신 역시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 성매매가 법적으로 전혀 문제되지 않는, 오히려 자랑스러운 ‘사업’인 나라에서 모든 문제는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성매매 여성 개인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187p)

 

 

우리 사회는 성매매를 통한 지배에 지극히 길들여져 있다. 불법적 이권을 챙겨온 거대한 알선 조직과 연결된 채 삶을 유지하는 이들이 잔뜩 버티고 있는 까닭이다. 성매매를 통해 부와 권력을 얻은 자들이 군림하는 사회는 인간의 몸을 착취해 돈을 버는 일에 모두를 공모자로 만든다. 반복하지만, 한국은 이 좁은 땅덩이로 전 세계 6위의 성매매 국가다. 성매매가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217p)

 

 

무엇보다 성매매가 사생활의 영역이며 성인 간 자발적 거래라는 주장에는 성매매로 넘쳐나는 현 시대를 너무도 순순히 믿는 성 구매자의 가장된 무지가 엿보인다. 마치 자발적 성매매 여성과 강요된 성매매 여성을 자신들이 잘 구별할 수 있고 우리 사회에 더 이상 강요된 성 판매는 없으리라는 듯 태평스러운 확신이다. 한국 성매매 역사에서 이런 주장들은 매순간 등장했다. 일제가 이식한 공창제를 없애자는 주장이 비등할 때도 언론은 ‘아무런 생활 수단도 배운 것도 없는 성매매 여성들은 어떻게 할 것이며, 성적으로 소외된 남성 계층의 성적 욕구는 어찌할 것이냐’고 걱정했다. 독립 후 빈곤 속에서 여성들이 성매매로 유입되는 ‘강요된 자발’의 구조가 확연히 드러났음에도 그러한 주장은 한결같았다. 더러 발생하는 문제들은 제도적으로 관리하고 지원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도 함께,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 남성들의 당당한 목소리로 수십 년간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실질적 노력으로 이어졌던 적은 없다. 단지 언제나 성매매는 힘 있는 남성들이 즐기고 누려야 마땅한 멋진 세상이었을 뿐이다.

성매매 여성의 ‘자발성’을 이유로 성매매 시장을 자유롭게 놓아두자는 주장, 그로써 성매매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고 착취가 사라지리라는 망상을 말하지 말자. 그러한 시장은 없다. 2년 전 인신매매되어 성 판매자가 된 여성이 다른 대안이 없어 성매매를 하기로 결심했다면 그 여성의 행위는 자발인가 강요인가. 돈을 벌기 위한 ‘일’은 모두 착취와 노동의 경계로 오간다. 그를 구분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노동법을 만들어놓고도 늘 불안정과 착취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런데 근본적 성격부터가 착취적인 성매매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성매매가 인간의 권리, 즉 인권과 관련된 것이라면 우리는 이 문제를 그렇게 쉽게 경제적 이슈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226-227p)

 

 

성매매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계급 구조를 집약한 거대한 착취의 시장이다. 성별과 자본과 인맥으로 인간의 급을 나눠 위력을 행사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산업이다. 이 폭력에서 자유로운 사회 구성원은 없다. 인권과 평등에 대한 의지만 있다면 이 거대하고 뿌리 깊은 폭력의 실체를 직시하기는 어렵지 않다. 성매매는 특수한 별개의 현상이 아니다. 성매매에 대해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내가 속한 이 사회를 알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의미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나도 그 안에 있다.(239-240p)

 

 

ㅡ 신박진영,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 中, 봄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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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4

 

 

다 읽어 봤는데, 젊은 작가상 작품집에서 이미 읽었던 ‘우리들’이 여전히 베스트. 그 소설의 한 대목은 정말 잊히지 않는다. 책의 세 작품을 묶어 해설한 신형철의 글도 좋았음.

 

 

그녀는 내게 며칠 전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유명한 해안 절벽에 올랐는데, 지나온 삶이 너무 허망해서 거기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 동안 거품이 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막상 정말 그렇게 있다보니 자기는 그 일을 해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고 나니까 오히려 이제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

나는 진심으로 어머니가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 그녀가 정말로 바란 삶이 그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와 같은 사람을 바란 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남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그날 모질게 마음을 먹고 병원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더라면 이영선이 살았을 삶에 대해서는 이제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그녀가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그렸던 인생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많이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가 이번에는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고, 그녀의 말대로 시골에 근사한 집을 짓고 호박이나 고추 같은 거 말고, 라일락과 해바라기를 가꾸고 살았으면, 그리고 긴 세월이 지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가 그를 그리워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정말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이기만 했다면 지금까지 그녀의 삶에 일어난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지켜봐야 했던 그 많은 불행한 장면들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후 서울에 올라온 그녀가 예정대로 법원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

그것이 모든 가능성을 지닌 채로 온전한 자유 속에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결과가 자신을 또다시 전형적인 고난과 불행 속으로 밀어넣는 것이라고 해도, 스스로 상상해낼 수 없는 삶을 선택하지 못한 그녀를 누가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210-211p)

 

 

이 모든 것은 화자가 그들과 보낸 한 시절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들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냥 화자가 배운 것이다. 애초 나를 선택한 것은 그들이지만, 그들에게서 스승을 발견한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와는 종류가 다른 사람이라는 강렬한 발견은 그 시절의 나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스승을 우리가 원하는 시절에 만난다. 기적처럼 나타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내기 때문이다. 정은과 현수가 정말 ‘어른의 삶’ 혹은 ‘진정한 삶’을 살았는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이럴 땐 가르치는 자의 실패까지도 가르침이다. 성숙한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배우면서 화자는 한 걸음 더 성숙해졌을 것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219-220p)

 

 

이 소설에서도 역시 스승은 가르친 게 없다. 선애는 자신에게 닥쳐온 인생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저 살았을 뿐이니까.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스승은 낯선 자가 되고, 삶의 낯선 부분을 보여주는 자가 된다. 덕분에 나는 자신이 모르는 게 있음을 알게 됐고, 삶에는 배울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배웠으니 된 것이다. 가르칠 수 없음을 가르치고 배울 수 없음을 배운다는 것,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이야기가 우리를 교육하는 방식이다.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앎(지식)은 쉽게 말로 전달되지 않는 비명제적 지식에 속한다. 비명제적 지식을 배우는 일은 그냥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을 겨우 배우는 데서 멈추는 일이다.(223p)

 

 

 

ㅡ 정영수, <내일의 연인들>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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