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17

 

 

친구들과의 대화도 읽어볼까 싶다.

 

 

 

메리앤이 세면대에서 블라우스를 빨았다는 이야기를 할 때, 다들 그냥 우스울 뿐인 척하지만, 코넬은 그 이야기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메리앤은 학교에서 어느 누구와도 사귄적이 없어서 아무도 그녀가 옷을 벗은 모습을 본 적이 없으며, 남자를 좋아하는지 여자를 좋아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그녀 또한 아무한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들 그녀의 그런 점을 못마땅해한다. 코넬이 생각하기로는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이 그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것 같다. 보는 것이 금지된 대상을 볼썽사납게라도 쳐다보고야 마는 수단인 셈이다.(15p)

 

 

이제 몇 주 후면 메리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될 것이고, 삶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그녀 자신의 몸속에 갇힌 똑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녀가 거기서 벗어나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다른 장소, 다른 사람들, 그게 뭐가 중요한가?(84p)

 

 

그는 나무랄 데 없는 미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는 그림, 영화, 심지어 소설이나 텔레비전 쇼도 미적 감각이 조금이라도 부족해 보이면 민감하게 반응한다. 때때로 메리앤이 최근에 본 영화 이야기를 꺼내면, 그는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한다. 그 영화는 내 기대에는 못 미쳐. 이렇게 탁월한 안목을 지녔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님을 그녀는 깨달았다. 그는 옳고 그름에 대한 진정한 판단력은 조금도 기르지 않은 채, 섬세한 예술적 감수성만 간신히 키워냈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메리앤은 혼란스럽고, 갑작스럽게 예술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235p)

 

 

문학은 교육받은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감정적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해서, 그들이 즐겨 읽은 소설 속에서 그들을 대신해 그 여행을 경험하는 사람들, 즉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느끼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맹목적인 숭배를 받았다. 설령 작가 자신이 좋은 사람이고 그의 책이 정말로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라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책이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 마케팅이 되고, 모든 작가가 어느 정도는 이 마케팅에 가담한다. 아마 이것이 문학계가 돈을 버는 방식일 터였다. 문학은, 이런 공개적인 낭독회에서 드러나듯, 무언가에 저항하는 형식으로서는 발전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271-272p)

 

 

 

ㅡ 샐리 루니, <노멀 피플> 中,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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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16

 

 

그러나 실패는 주저앉기 쉽지만 언제까지나 머물 수는 없는 집과 같다.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고 너무나 미워하지만, 일단 한번 찾아오면 언제까지나 거기 있고 싶다는 마음도 든다. 또 다른 실패는 더 크고, 더 아프고, 더 강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미 맛본 실패는 헤어날 수 없는 나쁜 친구처럼 어느새 편안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온한 실패를 언젠가는 떠난다.(31p)

 

 

대부분 신중하게 파트너를 고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뭔가 어긋나 있는걸 발견하게 된다. 그래,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만하다. 왜일까?

이 칼럼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시간이 지나서야 발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자신의 성격조차도 잘 모른다. 기분 좋고 느긋할 때의 나와 일에 몰리거나 위험할 때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사람의 다면적인 모습을 다 알기란 불가능하고,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우리는 행복을 찾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익숙한 것을 행복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외로워서 실수를 저지르며, 좋은 느낌을 영구히 고착하려고 결혼을 하지만, 결혼 자체가 인생의 변화로 우리를 밀고 나간다. 이 글의 논리대로라면, 잘못된 사람과 결혼할 가능성이 ‘제대로 된’ 사람과 결혼할 가능성보다도 더 높다.

(...)

다시 알랭 드 보통의 칼럼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하는 선택인 결혼의 경우에도 실망은 찾아오며, 그것은 ‘보통의 일’이다. 대다수 사람이 결국은 실망하게 된다는 것, 그것이 그렇게 드문 경험이 아니라는 말이다.(39-44p)

 

 

충고에서 제일 중요한 해답은 결국 나 자신에게 있다. 어떤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내게 충고를 해준 타인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즉, 내가 앤 엘리엇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충고는 타인의 판단이지만 그 판단을 따를지 말지는 나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아니, 적어도 그 판단을 따른 나와 타인을 원망하지 않는 것도 자신의 결정이다.

(...)

무엇보다 내게는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남을 원망하지 않는 인내와 현명함이 없다. 나는 남의 탓을 할 수 있다면 진심으로, 한껏 원망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나는 가르침은 일단 받되, 결정은 내가 하겠다고 다짐하는 방식으로 마음의 평화를 조금이나마 찾았다.(112-113p)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 존재를 정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 모두의 고민이다. 나의 노력이나 곧은 원칙이 언제나 이해받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의 긍정적인 관심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도 어렵다. 내가 원하는 애정과 호의를 받으려고 해도 미묘한 경쟁이 존재한다. 나는 쭉 나의 길만 가려고 했는데, 누군가 내 앞으로 끼어든다. 혹은, 내가 그들 앞에 기어들고 만다.(123p)

 

 

인생은 무언가를 얻고 좋아하고 식어버리는 과정의 연속이다. 애착이 없는 인간은 없다. 대상이 꼭 사람이나 생물이 아니라도, 물건 혹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개념일 뿐이라도, 거기에 지속적인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가상의 상호작용을 하고,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 그러다 어느 날 서서히, 혹은 갑자기 마음이 멀어지고, 그러다 잊어버린다. 대체로 영원히 이러한 과정을 반복한다.

(...)

그러나 애착은 시간과 함께 다른 방식으로 변모해간다. 처음의 들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편안함이 자리 잡는다. 편안함은 이제 곧 소홀함으로 바뀌어간다. 뜨거운 햇볕을 쬐어 색이 변색될까, 비를 맞아 얼룩질까 실내 주차장을 찾아 몇 바퀴를 돌던 것도 과거의 일, 이제는 어디든 가장 가까운 데 세운다. 아직도 손세차를 맡기지만, 주기가 길어졌다. 여전히 살뜰한 감정은 있지만, 차에는 점점 세월의 흔적이 묻었다. 언젠가 이 차를 쉽사리 팔거나 폐차하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어느 날에는 내 인생에서 사람은 없고 인간은 늘 고독하며 친구는 쇳덩어리 너뿐이야, 라고 생각했대도,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잊을 것이다.(182-183p)

 

 

 

ㅡ 박현주, <당신과 나의 안전거리> 中, 라이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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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12

 

 

“집 나가서 아프면 서럽다”라거나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은 집이 존재하고, 그 집에서는 보호받을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 집은 또한 ‘가족’이 함께 사는 상황을 전제한다. 복지도 여전히 가족에게 맡기거나 가족 단위로 계산한다. 그러나 친족으로만 구성된 ‘가족’이 복지의 단위가 되면, 가족 안에서 안전하지 않거나 집에서 나와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는 복지가 닿을 수 없다.(46-47p)

 

 

유리잔 그림과 ‘취급 주의’라는 글자가 붙은 택배 상자처럼 장애인을 대할 필요가 없다. 조금만 더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되, 모르는 것은 물어본다면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실수가 생긴다면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이니 그걸 두려워하지는 말자.(144-145p)

 

 

그래서 체험은 무용하며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해롭기도 하다. 체험을 통해 장애는 ‘불편’하고, ‘아프’고, ‘힘든’것으로, 따라서 장애인은 ‘불행한’사람으로 인식된다. 체험은 몸의 경험이므로 참가자는 편견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장애인은 ‘그럼에도 행복한’ 혹은 ‘그럼에도 열심히 사는’사람이 된다. 장애인의 차별 경험은 휠체어 하루 타보면 다 알 수 있는 얄팍한 것이 되어버린다. 체험은 그래서 위험하다. 체험은 어설픈 사이비 당사자성을 잠시 걸쳤다가 벗는 일시적인 연극일 뿐이기에 체험자는 결코 그것을 통해 당사자에게 이입할 수 없으며, 체험이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는 기적이라고 보아도 좋다. 체험은 철저한 타자화를 바탕으로 하며 그 결과는 봉사 활동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현장에서’ ‘겪어서’ 그 힘듦과 고통을 ‘이해’한다는 오만함을 얻게 됨으로써 시혜적 태도는 더욱 강화된다.(167p)

 

 

이런 모든 체험 방식은 경험을 오로지 감각으로 축소해 버린다. 장애를 몸에 결부된 생물학적 요소로 환원하는 문제도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체험들은 ‘장애인들에 대한 공포와 오해를 줄이고자 기획되었으나, 정작 장애인들의 목소리와 경험은 부재’한다. 따라서 장애인의 권리에 대한 정치적 논의도 사라진다. 즉 체험 행사는 장애를 문화적으로 상상하기보다 개인적으로, 또 제한적으로 상상하는 데 그친다.(171p)

 

 

질병은 그저 불행이 아니다. 불쌍한 것도, 안타까운 것도 아니다. 질병은 다만 삶의 어떤 조건이다. 자는 시간이 바뀌고, 화장실에 가는 횟수가 바뀌고, 먹는 약의 종류와 개수가 바뀌고, 일하는 시간과 장소가 바뀌는, 그런 조건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질병을 그저 어쩔 수 없는 불행으로 보거나 온전히 치료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 적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일터와 가정에서 자기 몸을 돌볼 환경이 제공된다면, 사회가 질병을 치료의 대상보다는 적절히 관리할 대상으로 이해한다면, 환자와 아픈 사람도 얼마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비로소 질병은 죽음이 아닌 삶의 조건이 된다.(209p)

 

 

 

ㅡ 안희제, <난치의 상상력> 中,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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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29

 

 

 

쇠락의 상징 같은 악취나 숨 막히는 먼지, 진득한 웅덩이 따위는 사실 활발한 생명 활동의 증거이다. 악취는 왕성한 미생물 활동의 결과이고 먼지의 상당수는 동물의 분변이나 생물의 죽은 세포이며 웅덩이는 그것들이 순환한다는 증거다. 이끼나 곰팡이, 거미줄 같은 것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생명 활동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런 것들은 쇠락은커녕 오히려 번성의 증거일 때가 많다. 사막이나 극지, 달 표면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그래서 그곳들은 황량하지만 지저분하지는 않다.(57p)

 

 

하늘엔 체렌코프복사에 대한 LSD 복용자의 묘사 같은 빛에 휘감겨 있는 형체들이 있을 뿐이었다.(137p)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목깃과 소맷부리를 잘 여미는 것이 좋다. 바람에 날려 온 모래와 흙먼지로 옷 안쪽이 낮은 수준의 아이언 메이든처럼 되는 걸 즐기지 않는다면, 그리고 가축 떼가 이동하면 당연히 흙먼지가 부옇게 일어나는 법이다.(139p)

 

이런 묘사가 군데군데 등장하는데 예전 같으면 다방면에 지식이 많다는 생각을 했겠지만, 지금은 크게 감흥이 없다.

 

 

 

ㅡ 이영도, <시하와 칸타의 장>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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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15

 

2020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이현석 작가의 작품으로 알게 된 책.

 

 

세계 66개 국가의 전체 인구 중 25퍼센트는 임신중지가 법적으로 완전히 금지되거나 모체의 생명이 위험할 때만 허용되는 조건 아래 살아간다. 이런 국가 대부분은 남반구·중앙아시아·동아시아에 있다. 물론 여성들은 합법인지 불법인지와 상관없이 임신중지를 한다. 더욱이 확률로 따지면 임신중지가 합법인 나라보다 법적 제약이 있는 나라에서 임신중지가 더 많이 이뤄진다. 법은 임신중지를 막지 못하며 그 안전성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임신중지로 해마다 여성 약 500만 명이 입원하고 4만 7000명이 사망하는데, 대부분 임신중지가 불법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다.(12-13p)

 

 

내가 이 장에서 역사화한 임신중지의 애매성이란, 임신중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불완전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으로 여겨졌음을 나타낸다. 이 시대 임신중지 정치의 심장부에 위치하는 이 속성을 두고 학자들은, 임신중지에 낙인찍기 혹은 임신중지를 ‘끔찍한 일로 만들기’라 부른다. 임신중지 법이 자유화되었더라도,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유해하고, 끔찍하며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조치라는 상식은 팽배하다.(85p)

 

 

1980년대 중반, 반임신중지 운동은 태아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목표를 더욱 숨긴 채, 임신중지를 한 여성을 염려하는 듯이 활동했다. 그때부터 태아중심적 애통함이 반임신중지 운동 진영을 넘어 임신중지에 대한 대중적 논의를 지배했고 다른 해석의 여지를 막았다. 태아중심적 애통함은 임신중지ㅡ자율적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이자, 여성이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영원히 애도하게 만드는 행위ㅡ의 해로움에 관한 반임신중지 주장을 강력히 수호하는 규범적 전제를 주관한다.

(...)

애통함은 행복과 나란히 작동해, 임신에 관한 좋고 나쁜 선택을 만들어 낸다. 이 시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임신중지 선택의 감정경제는 존재와 부재의 관계로 구조화된다. 즉 아이를 갖는 것은 규범적이고, 여성에게 행복을 약속하는 일이며, 그 궤도에서 일탈하는 것은 상실·애통함·후회·갈망으로 얼룩지는 일이라고 말이다. 이 감정경제는 모성 욕망을 자연화해 읽음으로써 발생하며, 그런 읽기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또한 임신한 여성을 이미 어머니로 만들며, 다른 여성들 또한 어머니, 대기 중인 어머니, 결코 가질 리 없는 아이를 갈망하는 어머니로 만들어 낸다. 이 서사가 임신을 그려 내는 유일한 방법인 한, 임신중지는 자연·질서·윤리·행복·올바름을 거스르며 비자연·파괴·혼돈·트라우마의 편에 서게 된다.(169-170p)

 

 

태아가 임신한 여성에게 행복의 대상으로 위치 지어질 때, 태아는 임신중지에 따른 ‘애통함’의 대상이 되며, 임신중지에는 애통함이라는 약속이 따른다. 애통함은 임신중지에 관한 이야기를 지배한다. 임신중지에 대한 다양하고 심지어 상반돼 보이는 관점에서도 말이다. 애통함은, 여성이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죽음을 영원히 애도한다는 식으로 가장 자주 묘사된다. 태아중심적 애통함은 임신한 여성을 이미 자신의 자궁에 자율적인 ‘아이’를 품은 어머니로 만드는 한편,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도덕적으로 문제 있고 해롭다고 이야기한다.

행복과 애통함은 아이의 존재 혹은 부재로 구조화된 감정경제를 형성한다. 이 감정경제에서, 여성에게는 임신과 관련해 좋은 선택 혹은 나쁜 선택이 있고, 여성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 모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임신중지의 감정경제는 여성의 임신중지 경험과 그다지 연관이 없다. 실제로 가장 흔히 보고되는 감정은 안도이며, 심각하고 오래가는 애통함은 드문 경험이다.

(...)

임신중지에 대한 ‘침묵’과 ‘비밀에 부추기’는 수치와 낙인이 내면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임신중지를 숨기는 여성이 비율이 높다는 것은, 임신중지를 겪어 본 적 없는, 더군다나 임신중지는 고사하고 임신도 하지 않을 남성들이 임신중지를 재현하는 장본인이 된다는 뜻이다. (...) 더 이상 임신을 지속하길 원치 않는 여성의 시각으로 임신중지를 말하는 일은 거의 없다. 임신중지는 원치 않은 임신의 중지라기보다는, 자율적인 생명을 파괴하는 절차로 묘사될 때가 훨씬 더 많다. 물론 임신중지 절차는, (유산되지 않는다면) 자율적 인간이 되었을지 모를 배아/태아의 발달을 멈추게 하는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임신중지를 바라본다는 게 반드시 반임신중지 관점을 지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데 임신중지를 배아나 태아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로만 본다면, 임신한 여성보다는 태아에게 초점이 갈 것이다. 임신이라는 게 늘 의지나 의도에 따라 이뤄지진 않는다. 원치 않은 임신과 계획하지 않은 임신은 여성의 재생산 적 삶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임신중지는 의도치 않게 임신한 여성이 그 상황을 타개할 수단으로서 유일하게 보장받은 것이다. 임신 혹은 임신중지의 초점을 태아에게 둘 때, 태아는 자율적인 존재로 탈바꿈하며, 임신한 여성은 이미 어머니로 간주된다. 이런 도식에서 말하는 임신중지란, 가장 좋게 봐서 불쾌하지만 필요한 일이고, 가장 나쁘게 보자면 도덕적으로 비난받은 만한 위험한 일이다. 임신중지 반대론자들은 인심중지를 겪은 여성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길 거부한 ‘이기적인 어머니’. 임신중지에 어떤 일이 따르는지, 그 심리적·감정적 후유증이 어떠한지도 모른 채 아이를 죽인 ‘불운하고 취약한 희생자’. 이와 반대로 여성이 임신중지에 접근하는 것을 지지하는 이들은, 여성에게 임신중지를 ‘강요하는’ 경제적·사회적 상황을 강조한다.(245-247p)

 

 

선택으로 환원된 정치는 근본적으로 개별화돼 있다. 그런 정치가 참조하기도 하고 생산하기도 하는 자율적 주체란 허구일 뿐이다.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자발적인 선택의 주체는 철저하게 여성화된 가사노동과 재생산노동에 완전히 의존하며, 이로써 유지된다. ‘여성이 그런 노동을 하는 이유는 스스로 선택했고, 거기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라는 가정을 되풀이하는 와중에 경제적·정치적·사회경제적 맥락은 제거된다. 임신중지에 자유가 존재하려면, 자율적인(선택하는) 주체에 기반한 자유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에 살고 있다. 따라서 웬디 브라운이 주장하듯 “개별적 자유라는 건 없다. (···) 인간에게 자유란 결국, 언제나 타인과 함께 세계를 만드는 기획이다.” 오늘날 선택의 주체는, 이를테면 여성이 무한한 선택지를 가졌고, 행복의 대상인 아이에게로 향하기 마련이며, 따라서 그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모성을 선택한다고 하는 식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여기서 그 주체는 여성의 재생산적 신체라는 차원에서, 선택에 깃든 긴장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균형은 깨지기 쉽다. ‘자율성’과 ‘선택’이 있는 곳에 ‘제약조건’과 ‘의존’이 있다. 개인의 선택은 정치적이다.

(...)

임신중지를 비범죄화한다고 해서 임신중지에 접근하는 데 지역·비용의 장벽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임신중지가 문화적으로 합당하거나 정상적인 선택으로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임신중지 법이 임신중지를 제한하는 근원은 아니다. 법은 젠더·임신·모성 규범을 반영하고 강화하는 장치일 뿐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사법 관할구역에서 임신중지는 비범죄화됐다. 그러나 방금 말한 규범은 법보다 오래 살아 남는다. 임신중지의 감정경제는 법의 규제가 필요 없을 만큼, 스스로 행동을 규제하는 자기감시적 주체를 만들어 낸다.(250-251p)

 

 

나는 임신중지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했다.

내가 알기로, 나는 세상에 용서를 구하면서

평생 땅을 기어 다녀야 할 사람이다. 두 번의

임신중지야말로 내가 내린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외치면서 고개를 숙여야 하고,

그 결정을 날마다 생각해야 하고, 스스로 비정한

영아살해자라는 사실에 극심한 고통을 느껴

지독한 우울에 빠져야 한다. 집어치우라. 나는

두 번의 결정 중 무엇에도 수치를 느끼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고,

미안해할 일은 없다.

 

임신중지를 미안해하지 않겠다는 서사는, 이 책에서 살펴본(미안해하는) 임신중지 서사의 규범적 힘을 반증하는 명료한 대항담론이다. 아울러 이는, 임신중지의 문화적 의미를 꽉 쥐고 있던 헤게모니에, 우리가 바랄 만한 균열이 생겼음을 알려 준다.(252-253p)

 

 

 

ㅡ 에리카 밀러, <임신중지> 中,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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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8

 

 

soso.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텍스트 뿐만 아니라 컨텍스트를 함께 살피자는 이야기.

 

 

“소고기 사주는 사람을 주의하세요. 순수한 마음은 돼지고기까지입니다.”(85-86p)

 

 

누군가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궁극의 지도를 만들겠다고 꿈꾼다. 그는 실제의 풍경과 모든 점에서 일대일로 정확하게 대응하는 지도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의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될수록 그 지도는 점점 더 커져 간다. 그래서 마침내 지도가 현실과 완벽하게 조응하게 되었을 때, 그 지도의 크기는 현실과 똑같은 크기가 된다. 문제는 그렇게 큰 지도는 들고 다닐 수도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실과 똑같다면 그냥 현실을 들여다보면 되는데, 무엇하러 똑같은 크기의 지도를 들여다보겠는가?(217-218p)

 

 

 

ㅡ 김영민,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中,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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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8

 

 

재미없다.

 

 

승호는 빤한 굳이 표현하는 애였다. 꼭 자기 영화처럼 나이브했다. 예전에는 그게 촌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게 내가 갖지 못한 승호의 재능이라는 것을 안다.(168p)

 

 

 

ㅡ 정대건, <GV 빌런 고태경> 中,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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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1

 

 

감탄이 나오는 작품은 없었다. 무난무난. 다만 이현석 작가의 다른 작품은 좀 궁금하다. 김초엽 작가와 장류진 작가의 작품집을 재밌게 읽었던 터라 기대하고 읽었는데 이전에 이미 했던 이야기를 새로울 것 없이 변주하는 느낌이라 식상했다.

 

 

 

절대적인 권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권력을 의식해야 하는 이는 권력의 피지배자들이다. 권력이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력이 행사되는 곳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힘이다.

가부장이라는 권력이 절대적인 사회에서 앎은 온전히 젠더화되어 있다. ‘나’가 생전 처음 치르는 시댁 제사 자리에 가서 식사 한 끼만 해도 삼대손 집안의 알력 관계를 능히 꿰뚫어볼 수 있을 때, 평생을 나고 자란 집에서 일어나는 가내 정치에 대해 까맣게 모를 수 있는 남편의 그 산뜻하고 안온한 무지가 바로 권력이다.(44p)

 

 

“절대 모를 수 없는 이야기”를 모르는, 자신을 향한 미움의 에너지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온 집안을 표표히 떠도는 그 모든 사랑과 증오의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그 구김살 없이 해사한 면상이 바로 권력의 얼굴이다.(49p)

 

 

“·····임신중지를 겪은 모든 여성이 동일하게 경험하리라 가정되는 비감은 그들에게 생명을 폐기시켰다는 자기 인식을 갖게 해 스스로를 비윤리적인 존재로 획일화화도록 만든다.” 전해지지 않더라도 전할 수밖에 없는 진심이란 게 있지 않을까. “·····임신중지가 언제나 예외 없이 한 여성의 절실한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라는 고정관념은 그것이 항상 절박한 상황에서 절박하게 취해져야만 하는 조치처럼 여겨지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써내려갔습니다. “·····이러한 논리 끝에 임신중지가 고통을 수반하는 행위로만 가정된다면 우리의 주체성은 지워질 것이며, 타인의 선의에 의해 구조받는 나약한 존재로만 재현될지도 모른다.”(195-196p)

 

 

 

ㅡ 강화길 외,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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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1

 

 

 

「현대 시작법」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시는 공적 언술이다. 시는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감수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특정한 형식을 익혀야 하는 기술이다. 장르이기도 하다. 시적이라는 단어는 광범위하게 쓰이지만 시는 미술이나 음악 같은 다른 여타의 예술처럼 기본적인 교육과 기술 습득을 필요로 한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현대 시를 보는 눈이 자연스럽게 열린다. 이 과정을 거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대부분의 시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모든 장르가 그렇듯 장르에 빠지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유독 시는 감정의 깊이, 진실성 따위로 한번에 깨닫거나 다가갈 수 있는 본질적인 무언가라는 휘장에 둘러싸여 있다. 문제는 그러한 휘장을 적극 이용하는 시인들이 있다는 사실이다.(51p)

 

 

새로운 시네필리아는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에 관한 가치판단의 내재적 불안정을 인식한다. 작품의 가치는 형식적 기준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기준에 따라 시간이 지나 상승하거나 하강할 것이다.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자각, 새로운 요청들에 비추어서, 우리는 경배했던 대상들을 재평가할 가능성이나 단념해야 할 가능성에 항상 열려 있어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 시네마라는 총체는 ‘미투me too’ 세계 속 새로운 시네필의 눈에 전혀 다르게 보인다.(133-134p)

 

 

무언가에 대한 경외심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지만 호기심은 아직 남아 있다. 모든 것이 지루하다고 생각했지만ㅡ특히 세계문학전집 유에서 나오는 수많은 작품들, 문학상 수상작품들, 거장들의 신작들, 주목받는 신예들ㅡ모르는 것과 궁금한 것은 어디서든 나타난다. 모른다는 것은 몇 안 남은 축복이다. 알아가는 것은 몇 안 남은 기쁨이다. 대상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대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대상을 둘러싼 이미지를 통해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145p)

 

 

 

ㅡ 정지돈, <영화와 시> 中, 시간의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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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1

 

이 양반도 참 일관성 있다. 묘하게 홍상수의 삶이나 작품을 만드는 방식이 떠오르기도 했다. 몰아서 읽지는 말고 가끔 생각날 때 한 편씩 읽어봐야지. 문장이 깔끔하고 묘사도 훌륭하다. 예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현대적으로 읽히는데 당대에는 더 그랬을 듯.

 

 

 

인간이란 한번 끔찍한 꼴을 겪고 나면 그것이 강박관념으로 언제까지고 머리에 남는지, 여전히 나오미가 도망쳤던 시절의 그 끔찍했던 경험을 잊지 못합니다.(300p)

 

 

 

 

ㅡ 다니자키 준이치로, <치인의 사랑>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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