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24

 

G. K. 체스터턴은 말했다. 근엄해지기는 너무도 쉽다. 실없어지기는 너무도 어렵다.(작가의 말)

 

 

그와 친해진 건 둘 다 별 볼일 없는 존재인 데 반해 내면에서는 스스로를 별 볼일 있다고 여기는 특성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둘 다 인기도 없고 성적도 그만그만, 외모도 평범했지만 책은 꽤나 읽었다.(179p)

 

 

인스타그램 프로필: 김희정, 작가. “전지적 자기계발 시점” 희정은 각종 레퍼런스를 이용해 자기계발 메시지를 전파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자기계발, 백 년 동안의 자기계발, 자기계발을 공부하는 자기계발, 자기계발의 온도, 두근두근 자기계발, 알려지지 않은 자기계발과 자이툰 파스타·····.(181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ㅡ 정지돈,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中,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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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25

 

일련의 일들 때문에 후반부 200p 정도는 몇 달이 지나서 읽었다.

 

 

 

이 알베르라는 친구는 너무도 선의로 가득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에두아르는 그를 책망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약간의 앙금이 있었다. 결국 그를 구하려다가 지금 이 꼴이 돼버린 것 아닌가. 전적으로 자의로 한 일이 맞긴 하지만, 글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을, 이 억울한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모두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상황을 책임져야 했다.(120p)

 

 

제대병들은 항상 이렇다니까! 끊임없이 전쟁 이야기를 하면서 뻐겨 대고,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훈계하려 들지. 이제는 그놈의 영웅들이 슬슬 지겨워진다니까! 진짜 영웅들은 전사했어! 미안하지만 그 사람들이야말로 영웅들, 진짜 영웅들이라고! 그리고 말이야, 어떤 친구가 참호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 너무 떠들어 대면 의심해 보는 게 좋아. 그중 대부분은 전쟁 내내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냈을 거니까.(201p)

 

 

그는 항상 누군가의 우아함을 그가 얼마나 멋진 구두를 신었나를 보고 판단해 왔기 때문이다. 낡은 정장이나 외투는 용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멋은 그의 구두로 평가되는 법,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해야 했다. 그가 산 구두는 밝은 갈색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이 구두를 신는 것만이 이 소동 가운데서 느낀 유일한 기쁨이었다.(300p)

 

 

처음에는 계획의 성공으로 인한 엄청난 기쁨이었던 것이 곧ㅡ두 남자에게 서로 다른 이유로ㅡ어떤 기이한 차분함으로 변했다. 이루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보니 기대했던 것만큼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게 느껴지는 어떤 중요한 과업을 끝냈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그런 차분함 말이다.(512p)

 

 

궁핍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어디에나 따라다니면서 삶을 직조하고, 삶을 완전히 결정해 버린다. 그것은 매순간 당신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당신이 무엇을 하든 더러운 액체처럼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다. 궁핍은 오히려 극빈보다도 나쁜 것인데, 왜냐면 폐허 속에서도 위대함을 간직할 수 있는 반면, 부족함은 당신을 쩨쩨함과 치사함과 비열함과 인색함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을 비천하게 만드는 바, 왜냐면 그것 앞에서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게, 자긍심과 존엄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536p)

 

 

 

ㅡ 피에르 르메트르, <오르부아르>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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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1

 

 

그러니까 테레즈의 행동은, 남편에게 말한 “눈에서 불안과 호기심의 빛을 보고 싶었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든 비유처럼, 떡을 배터지게 먹었을 때같이 무기력해져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남편이 항상 1 더하기 1은 2이고, 3 더하기 3은 6인 남자였던 탓에 마음이 공허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고기를 씹을 때 남편의 관자놀이가 움직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탓만도 아닙니다. 각각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다 뒤섞여 얽히고설킨 것이 더해졌겠지요. 도저히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소설로서는 단지 외적인 행위밖에 쓸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의 재미는, 가장 중요한 인물인 테레즈 데스케루도 자신이 한 행위의 이유를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76-77p)

 

 

예컨대 저에게 슬픈 일이 있어서 오랫동안 마음이 괴로웠는데 누군가가 “정말 괴로웠겠군요”라든가 “저도 알아요”라고 한다면 내심 ‘알 리 없어’라고 생각해도 일단 상대에게 미소를 짓지 않을까요.

자신의 내면이랄까, 자신의 슬픔이나 괴로움을 상대가 이해해주지 않고 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눈앞의 상대에 대한 최후의 커뮤니케이션은 미소밖에 없지 않을까요.(80p)

 

 

테레즈는 여러 가지가 보이는 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에도 심취할 수 없습니다. 베르나르에게도 심취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꿰뚫어 봤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까 말한 장면에서 평소와는 다른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그녀에게도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테레즈는 어느 정도 인간을 보는 눈을 갖고 있지만, 정말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독해졌다고 생각합니다.(91-92p)

 

 

연애의 괴로움 중 하나는 우리가 상대에게 하나의 마스크, 즉 이미지를 주고 그것을 받은 쪽은 어느새 그 이미지에 맞춘 마스크를 쓰고 만다는 것입니다.(150p)

 

 

예컨대 아이가 죽어가고 있다고 합시다. 부모는 필사적으로 신에게 기도합니다. 어떻게든 살려달라고 기도하지요. 하지만 아이는 죽고 맙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고 부처님이고 있을 리 있나”하며 신의 존재도 부정해버립니다. 이것은 종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고입니다.

오히려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이고 부처님이고 있을 리 있나”라며 바로 신의 존재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합니다.(165p)

 

 

이건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환자의 손을 어루만지는 행위에는 위로하는 마음이나 다정함과 동시에 자기현시나 자기만족, 허영심 같은 것도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수녀분 자신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결코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인 이상 좋은 일을 자기만족 없이, 완벽하게 사심 없이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는 사심 없이 하고 있어. 자기현시욕 같은 건 전혀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말쟁이일 겁니다.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할 때 에고이즘은 반드시 섞이겠지요. 이는 인간의 업 같은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건 틀림없는 일이고, 그래서 저는 존경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수녀분이 자신의 에고이즘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207p)

 

 

 

ㅡ 엔도 슈사쿠,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中, 포이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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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11

 

배수아의 다른 역본도 있으니 차후에 비교해서 찾아보기 쉽도록 텍스트 번호로 남겨둔다.

 

 

 

모든 바다를 항해한 자는 자신 안의 지루함을 항해했을 뿐이다.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많은 바다를 건넜다. 땅 위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산들을 보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도시들을 둘러봤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거대한 간들이 나의 눈길 아래로 장엄하게 흘러갔다. 내가 만일 여행을 떠난다면, 떠나지 않고도 보았던 것들의 조악한 복사본을 볼 뿐이리라.

(...)

모든 풍경과 모든 집이 나의 상상력을 재료로 신 안에서 창조된 나였으므로,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138)

 

 

불행히도 지성의 병은 감정의 병보다 덜 아프고, 불행히도 감정의 병은 육체의 병보다 덜 아프다. ‘불행히도’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이 그 반대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풀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혀 느끼는 지적인 고뇌는 사랑, 질투, 그리움 등의 감정만큼 우리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강렬한 육체적 공포처럼 우리를 압도하지도 않고, 분노나 야심처럼 우리를 변화시키지도 않는다. 그런가 하면 영혼을 파괴하는 어떤 아픔도 치통이나 복통, 출산의 진통(상상하건대)만큼 생생할 수는 없는 법이다.(140)

 

 

나는 이루어질 리 만무하고 특별한 일을 꿈꾸는 사람들보다 접근 가능하고 합리적이고 이루어질 법한 일을 꿈꾸는 이들이 더 딱하다. 원대한 꿈을 꾸는 사람들은 좀 미쳐 있기 때문에 자기가 꿈꾸는 것을 믿으며 행복해한다. 아니면 그들은 단순한 몽상가라 영혼의 음악 같은 공상이 별 의미 없이 그들을 달래준다. 하지만 가능한 것을 꿈꾸는 이들은 진짜 환멸을 느낄 가능성이 다분하다. 로마 황제가 될 수 없는 건 크게 실망할 일이 아니지만, 매일 아침 아홉시경 거리에서 마주치는 재봉사 아가씨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못하는 일은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불가능한 꿈은 처음부터 우리의 접근을 막지만, 가능한 꿈은 우리 삶에 개입하고 그 꿈을 이루려는 방향으로 삶을 진행시킨다. 불가능한 꿈은 단독적이고 독립적인 반면, 가능한 꿈은 삶에서 일어나는 우연적인 일들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나는 불가능한 풍경과 결코 가보지 못할 넓은 평원을 사랑한다. 특히 과거의 역사 시대에 열광하는데, 거기에서 애초에 내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꿈꾸며 잠든다.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꿈은 나를 잠에서 깨운다.(143)

 

 

자신을 알려는 일 자체가 오류다.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은 헤라클레스의 임무보다 어려운 과제이며,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보다 더 난해하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모르는 것만이 길이다. 그리고 성심성의껏 자신을 모르는 것이 역설의 실질적인 과제다. 우리가 스스로를 모르는 방식에 대해 참을성을 갖고 설득력 있게 분석하기, 우리의 의식에 대한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기록하기, 자율적인 그림자에 대한 형이상학, 환멸의 황혼을 노래한 시.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의 위대하고 가치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무언가는 항상 놓치기 마련이고 어떤 분석은 항상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며 진실은, 심지어 그것이 가짜일 때도, 언제나 다음 모퉁이 너머에 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를 지치게 하는 인생보다 더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늘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지식과 명상보다 더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149p)

 

 

영혼의 비극 중 하나는, 완성한 작품이 조금도 훌륭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그 작품이 영혼이 이룰 수 있는 최선이었음을 깨달을 때 비극은 더욱 극대화된다. 하지만 영혼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문이자 모욕은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자기 글이 불완전하고 부족할거라는 사실을 미리 아는 것, 그리고 쓰는 동안에 글이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은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쓸 글 역시 결코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철학적으로 알고, 몸으로 알고, 글라디올러스 꽃 사이로 희미하게 엿보여서 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늘 포기한다고 선언하면서도 실은 온전히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와 산문에 끌리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러니 벌칙을 수행하듯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큰 벌은 내가 쓰는 글이 완전히 쓸모없고, 결함이 많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시를 썼다. 엉터리 시를 많이 썼는데 그때는 완벽한 줄 알았다. 그때 느꼈던, 완벽한 작품을 썼다는 몽상에 불과한 기쁨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쓰는 글은 그때보다 훨씬 낫다. 심지어 다른 훌륭한 작가들이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낫다. 하지만 왠지 모르지만, 내가 쓸 수 있을 듯한 글이나 또는 써야 할 것 같은 글 보다는 한없이 뒤떨어진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에 썼던 형편없는 시가 마치 죽은 아이, 죽은 자식, 사라져버린 마지막 희망인 양 그 위로 눈물을 떨어뜨린다.(231)

 

 

우리에 대한 타인의 이해는 참으로 복잡한 오해들로 구성된다.

이해받기를 원하는 자는 결국 타인에게 이해받는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주기 바라는 자들은 항상 복잡하고 난해해서 결국 그들은 이해받는 행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이들이 쉽게 이해하는 단순한 사람들에게는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없다.(328)

 

 

타인이여, 우리 모두는 서로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적 있는가? 우리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 있는가? 우리는 마주보고 있어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 서로의 말을 듣고 있지만 각자 자기 안에 있는 말을 들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말은 우리 청력의 실수이고, 우리 이해력의 난파일 뿐이다. 타인의 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생생한 관능을 표현한 말에서 우리는 죽음을 듣는다. 다른 이들이 심오한 뜻은 조금도 담지 않고 입술에서 떨어지게 놔둔 말에서 관능과 삶을 읽는다.(329)

 

 

가끔 나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내가 어떤 부류의 사람으로 비칠지 궁금해하는 무의미한 상상에 빠진다. 내 목소리는 어떻게 들리는지, 그들의 무의식적이 기억 속에 나는 어떤 인상으로 남았는지, 내 몸짓과 말, 눈에 보이는 나의 인생은 다른 이들의 해석의 망막에 어떻게 새겨지는지 궁금하다. 나는 나를 밖에서 본 적이 없다. 우리로부터 우리 자신을 밖으로 데려갈 수 있는 거울은 없기에, 우리는 밖에서 보이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없다. 외부에서 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영혼, 다르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스크린에 나오는 영화배우가 되거나 내 높은 목소리를 녹음한다고 해도 여전히 밖에서 보이는 내 모습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나를 밖에서 기록하더라도,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는 나에 대한 나의 의식이라는 나만의 공간,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 항상 머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지는 잘 모르겠다. 인생의 과학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자신으로부터 멀리 분리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분리하고, 그래서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상태로 삶에 참여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자신 속에 깊이 빠져서 오로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미개함에 완전히 항복하고 사는 걸까. 그런 상태로 사람들은 꿀벌이나 개미처럼, 꿀벌들이 어떤 인간 사회보다 잘 조직된 사회를 형성하는 기적이나, 복잡하기만 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의사소통을 훨씬 능가하며 개미들이 그 작은 안테나로 소통하는 기적 따위에 의지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338)

 

 

뭔가를 상상하면, 나는 그것을 본다. 내가 여행을 정말 떠난다면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느끼기 위해서 장소를 옮겨야 한다면 그것은 상상력이 극도로 빈곤한 탓이다.

“여기 소박한 엔테풀의 길을 포함해 모든 길은 당신을 세상의 끝으로 데려갈 것.” 하지만 세상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도착하는 끝은 결국 처음 출발했던 엔테풀이다. 사실 세상의 끝이란 세상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우리의 개념일 뿐이다. 풍경이 풍경이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다. 그러므로 내가 풍경을 상상하면, 풍경을 만들어낸다. 만들어내면, 존재한다. 존재하면, 그것을 다른 풍경을 보듯이 볼 수 있다. 그러니 왜 여행을 가겠는가? 마드리드, 베를린, 페르시아, 중국, 그리고 남극과 북극, 어디서든 나는 나 자신 속에, 나만의 고유한 유형의 감정 안에 있을 뿐이 아닌가?

삶이란 우리가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행이란 결국 여행자 자신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다.(451)

 

 

시골에 있고 싶어하는 이유는 도시에 있는 것을 좋아하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더라도 도시에 있는 걸 좋아하지만, 시골에 있을 때는 도시가 두 배로 더 좋아진다.(459)

 

 

추상적인 생각이든 추상적인 감정이든 추상적인 세상에 계속 머물러 있다보면, 우리의 감정과 의지와는 반대로, 현실 세계의 일들이 유령처럼 느껴지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우리 자신의 성격에 따라 마땅히 더 민감하게 느껴야 하는 일마저도 그렇게 된다.

아무리 친한 친구, 정말 친한 친구라고 하더라도 그가 아프거나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느낌은 애매하고 불분명하고 흐릿할 뿐이라서 부끄러울 정도다. 그런 일은 직접 목격해야만 어떤 감정이 살아날 것이다. 너무 상상에 의지해 살다보니, 결국 상상하는 능력을 잃었고, 특히 현실에 대한 상상력을 잃고 말았다.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는 것들로 정신적인 삶을 영위한 결과,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성찰하는 능력을 잃었다.

오늘 나는 오래된 친구 하나가 수술하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난 지 오래됐지만 그리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정으로 늘 기억하는 친구다. 그런데 그 소식이 내게 불러일으킨 확실하고 선명하고 유일한 감정은, 그를 위문하러 병원에 가야 할 터이니 성가시다는 심정과, 가기 싫지만 가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난처함이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림자를 오래 상대하다보니 생각하고 느끼고 나로 존재하는 가운데 나 자신이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내가 한 번도 되어보지 못한 보통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실체가 됐다. 정말 그것만을 느꼈다. 곧 수술을 받을 친구의 소식을 들었는데도 적절한 안타까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술을 받을 예정인 모든 사람들과 이 세상의 고통받고 동정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느껴 마땅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다만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468)

 

 

ㅡ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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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019/1

 

 

태도에 관해 말하는 책을 쓴 저자가 근자에 보이는 '태도'가 몹시 우습다.

 

 

 

하지만 ‘누가 뭐라든 난 이걸로 됐어’라며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돌이켜보면 왜 과거의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을까 안타깝다. 만일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며 또 하나의 인생을 자신에게 주어진 옵션이라고 착각하고 제멋대로 상상하던 나는 뭐랄까, 내가 현재 살고 있지 않은 대안의 삶에 멋대로 싸움을 붙인 후 알아서 지고 있었다. 대안의 인생, 그런 건 어디에도 없는 데 말이다. 행여 있더라도 분명히 내가 선택하지 않은 ‘저쪽 인생의 나’도 똑같이 ‘이쪽 인생의 나’를 시기하고 있었을 것이다.(24-25p)

 

 

사람을 사랑하는데 비법이라니. 기술, 그런 게 무슨 필요가 있을까. 굳이 있다면 당신 스스로 매력적이고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말고는 없다.(40p)

 

 

“과거에 이런 일이 있어서·····.”

“우리 가족이 이래서····· 지금의 내가 이렇게 자존감도 없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이 서른 넘어서까지 그럴 수는 없다. 어느 시점이 되면 어떻게든 꾹 삼키고 알아서 처리해버려야 한다. 애초의 원인 제공자가 누구든, 누구나가 인생의 한 시기에는 저마다의 지옥을 품고 가는 것이고, 훌쩍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라는 과거에 휘둘리면서 고여 있기를 자처하면 슬슬 그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기량이나 자립도를 묻게 된다. 더구나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부모 문제와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문제들의 이유로까지 확대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가장 이상화된 부모 자식 관계에 내가 겪은 환경을 비추어보고 ‘난 남들이 당연히 가진 걸 가지지 못했다’고 부모에게 복수심과 울분을 품는데, 그렇게 치면 우리 중에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또한 장차 우리가 부모가 되었을 때,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또 몇이나 될까.(64-65p)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게 고마운 만큼 상대가 그 부탁을 흔쾌히 ‘거절’할 수 있게도 해줘야 한다. 못해서든, 하기 싫어서든, 거절하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거절 이유다.

부탁해서 거절당한 사람은 거절한 이유를 알거나 물어볼 권리가 없다. 더더군다나 토라지거나 화를 내거나 칼을 갈거나 ‘다시는 저 인간한테 부탁하나 봐라’같은 마음을 품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 누구도 미움받기를 원치 않기에 거절하고 싶어도 잘 거절하지 못한다. 상대 입장에서는 무척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거절한 것이고, 나는 부탁을 함으로써 상대에게 감정 노동을 시킨 것이다.(224-225p)

 

 

 

 

임경선, <태도에 대하여>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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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

 

 

언니, 사람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흔히 누군가 뛰어내리면 ‘쿵’하는 소리가 들리겠거니 상상하지만 실제론 아니야. 10대 중반을 막 넘어선 학생 한 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일이 있었어. 당시 근처에 있던 아파트 경비원은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고 진술했어. 한 사람이 죽기로 결심하고 뛰어내리면 폭발하는 소리가나. 마치 생의 마지막까지 산산이 부숴버리려는 것처럼.(106-107p)

 

 

이렇다보니 나도 현장에 가면 참 답답해. 피해자를 위해 해주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은데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해자를 향해 “선생님, 진정하세요.”가 끝이야. 어느 순간엔 나도 비겁함이란 가면을 쓴 채 피해자를 외면해버리고 돌아가서 대충 서류만 작성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피해자의 외침이, 눈물이 내 발목을 잡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애써 포장해. 나는 정의로움보다 비겁함을 먼저 배운 대한민국 경찰관이니까.

경찰관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눈은 너무도 많으며, 일이 터졌을 떄 경찰 조직조차 현장 경찰관을 보호해주지 않아. 오히려 그 일을 반면교사 삼아 각종 매뉴얼만 만들어 하달하기 바쁘지. 그렇게 경찰관들은 비겁함을 배워. 무력감이 온몸을 잡아먹는 현장을 보며, 정신적 스트레스에 일상이 침몰되어도 심리 치료조차 받지 못해 혼자 끙끙 앓는 동료를 보며, 차곡차곡 배워 온 비겁함은 현장에서 ‘나만 아니면 돼’식의 일처리로 나타나. 그러한 현장에 환멸을 느낀 수많은 경찰관은 승진으로, 학연·혈연·지연·흡연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현장을 벗어나고 있어. 현장에 적합한 유능함을 갖춘 사람일수록 현장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곤란한 상황에 처할 일이 없는’안전한 부서에 자리를 잡고 나오지 않아. 그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야. 현실의 답답함을 이야기하고 싶은 거야.(163-164p)

 

 

한 명의 인생을 망치는 건 한 사람으로 족하지만, 그 망가진 인생을 구원하는 건 수많은 사람의 힘이 필요한 일이야.(178p)

 

 

ㅡ 원도, <경찰관속으로> 中, 이후진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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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

 

한 권 남았다.

 

 

 

타라타노 교수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껴안고 키스하려 했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이리저리 빼냈지만 그에게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타라타노 교수는 좀처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교수의 배가 내 몸에 닿는 느낌과 와인 향기 섞인 그의 숨결이 지워지지 않는다. 당시만 해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나이 든 남자가 그런 부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내 예비 시어머니의 친한 친구가 아닌가. 복도로 나서자 그는 황급히 내게 용서를 구했다. 와인을 많이 마신 탓이라고 하고는 서둘러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79-80p)

 

동서를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나 같이 변명이 똑같은지?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교육을 많이 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 무지했다. 나 자신을 통제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이들의 사상과 사건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느라 열정 없는 인생을 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결혼과 안정적인 삶이 너무 빨리 시작될 예정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곳에서 이미 몰락해버린 기존의 질서 체계 속에 너무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85p)

 

 

“사내란 사랑에 빠져 정신이 나가 있을 때와 네 몸에 들어와 있을 때를 빼고는 항상 겉에서 맴돌기만 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일단 사랑이 식으면 그를 원했다는 기억만으로도 불쾌해지지. 물론 한때 그는 나를 좋아했고 나도 그를 좋아했지만 그것뿐이야. 나는 하루에도 좋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생기는걸. 너는 그렇지 않아? 하지만 그 감정도 잠시일 뿐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지. 남는 것은 아이뿐이야. 내 몸의 일부거든. 애 아빠는 타인이었으니 타인으로 되돌아간 거고. 그의 이름조차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아.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니노라는 이름을 생각하고 생각했어. 마법의 주문처럼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그 이름을 부르면 기분이 우울해져.”(108p)

 

 

“정말 그런 곳에서 일하고 있었던 거야?”

릴라는 파스콸레의 몸이 닿자 짜증이 나서 팔을 빼내고는 발끈했다.

“그러는 너는 어떻게 일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일하고 있는데?”

파스콸레도 엔초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둘 다 힘겹게 일하고 있을 터였다. 적어도 엔초만큼은 릴라처럼 집안일을 감당하면서 직장에서 모멸감과 피로에 시달리는 여공들을 보아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둘은 공장에서 릴라가 처한 상황 때문에 심란해하고 있었다. 릴라가 그런 환경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사내들에게는 뭐든 다 숨겨야 해.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거야.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여인이 일하는 곳에서는 자기가 일하는 직장 사장의 횡포가 기적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은 거야.’(162-163p)

 

 

“사내라면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여자라면 알고는 있지만 말하기 두려워하는 그런 내용 말이야.(238p)

 

 

“임신이란 말이야, 타인의 생명이 네 배에 달라붙는 거야. 고통 끝에 겨우 뱃속에서 떼어냈다 싶을 테지만 그것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너를 더 구속할 거야. 태어나자마자 널 밧줄처럼 옭아맬 거야. 아이를 낳으면 너는 더 이상 네 인생의 주인이 아닌 거야.”

(...)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만들어낸 느낌이야.”(323p)

 

 

나는 내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나타내는 모든 남자에게 끌렸다.

상대가 키가 크든 작든, 말랐든 뚱뚱하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나이 든 사람이든, 독신이든 유부남이든 상관없었다. 내 의견을 칭찬하거나 내 책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하거나 내 지성에 감탄하기라도 하면 나는 호감을 담뿍 담은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353p)

 

 

나는 먼저 내 자신을 이해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여성성을 탐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너무 과하게 애를 썼다. 남성의 능력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뭐든 다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실 정치나 투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남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남자들보다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수준의 기준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비이성적인 남성의 이성? 유행하는 표현을 외우려고 나는 얼마나 노력했던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 사고 방식과 언어는 지금까지 내가 받은 교육에 의해 형성되었다. 남보다 뛰어나게 되려고 나는 나 자신과 어떤 비밀스런 협상을 맺었던가. 배우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배운 것 가운데 무엇을 잊으려 애써야 하나. 게다가 나는 릴라와 닮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살아왔다.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을 릴라와 일치시키려 했다. 릴라에게서 분리되려고 할 때마다 불구가 되는 것 같았다. 릴라가 없으면 생각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릴라 없이는 내 생각에 확신이 생기지 않았고 어떠한 그림도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릴라와 분리된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다. 해답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97-398p)

 

 

“너 그거 알아? 너는 언제나 ‘사실’ ‘진심’이라는 말을 참 자주하지. 말할 때도 그렇고 글을 쓸 때도 그래. 아니면 ‘갑자기’라는 말도 참 자주해. 그런데 요즘 세상에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또 얼마나 돼? 세상일은 다 사기야.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법이야. 이런 것은 네가 나보다 잘 알잖아. 나는 이제 어떤 일도 ‘진심’으로 하지 않아. 그리고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갑작스러운’일은 멍청이들에게나 일어나는 거라고.”(450-451p)

 

 

“내 생각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때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나를 변화시키려는 프랑코의 욕망이 사실은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어.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이기를 원했던 거야.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단순히 여자를 원한 게 아니었어. 자기가 만약 여자라면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을 원했던 거야. 프랑코에게 나는 자신을 여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어. 여성성을 취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고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야. 자신이 남성으로서뿐 아니라 여성으로서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던 거야. 지금은 내가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야.”(504p)

 

 

지금은 외모를 가꾸는 데 재미를 붙였지만 가끔은 몸단장(그렇다. 나는 그런 표현을 썼다)하는 행위 자체가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남성을 위해 치장해야 할 때면 그런 느낌이 더 강했다.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시간에 변장에 가까운 치장을 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고를 들여야 한다니. 내게 어울리는 색상과 어울리지 않는 색상을 찾고 날씬해 보이는 옷과 뚱뚱해 보이는 옷을 구분하고 예뻐 보이는 머리 모양과 그렇지 않은 머리 모양을 찾는 과정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값비싼 준비 과정도 필요했다.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하기 위해 잘 차려진 식탁이나 군침 도는 요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준비를 하고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까봐 불안했다. 감정과 체취와 결함을 가진 육신의 천박함을 능숙하게 숨기지 못했을까봐 두려웠다.(525p)

 

 

 

ㅡ 엘레나 페란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中,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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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191p)

 

이 구절은 반복적으로 등장함.

 

 

어떤 모델이 거식증으로 사망했다. 그러자 당국은 지나치게 마른 모델들이 런웨이에 오르는 것을 금지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테러리스트에 관한 기사도 있었다. 테러가 또다시 실패했다는 내용이었다. TNT 폭탄과 기폭 장치가 어느 아파트에서 발견되었다. 방향감각을 잃은 고래들이 해변으로 몰려와서 떼죽음을 당했다는 기사도 읽었다. 경찰이 인터넷을 통해 소아 성애자들의 연결 고리를 추적하고 있다는 기사. 내일은 더 추워질 거라는 일기예보. 그리고 이동성은 현실이 된다는 광고.

이 신문은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조작되거나 거짓투성이일 터였다. 그녀가 읽은 모든 문장이 하나같이 견딜 수 없고, 가슴이 아리게 하다니.(377p)

 

 

“인생이란 우리가 오래전에 이미 통제 능력을 상실한 혐오스러운 습관 같은 거야. 담배 끊어 본 적 있어?”라는 문장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 그녀는 담배를 끊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녹록지 않은 경험이었다.(421p)

 

 

“지속적인 고통과 점진적인 마비 증세가 갈수록 심해지는 그런 상태를 한번 상상해 봐. 그래도 뭐, 어떻게든 고통을 참을 수는 있었을 거야.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날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지금 겪는 이 고통 말고 다른 방법은 없으며 앞으로도 이 고통에 대해 아무런 보상도 없으리라는 생각, 매 시각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며 그렇게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생각, 열 개의 통증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환각으로 지어진 지옥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지옥의 여정 속에서 인도해 주는 안내자가 한 사람도 없고 손잡아 줄 이 또한 아무도 없다는 생각, 아무도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 건 실은 별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어떤 형벌도 포상도 없으리라는 그런 생각 말이야”(437-438p)

 

이 책에 가장 좋았던 구절. 인생이 이런 것이겠지.

 

 

한 남자가 대륙을 오가는 대형 비행기 안에서 불편하게 잠을 자다 깨어난다. 그리고 얼굴을 창문에 갖다 댄다. 밑으로 광활한 검은 대륙이 보인다. 그 컴컴한 심연 속에서 군데군데 희미한 빛줄기가 뻗어 나온다. 거기에 대도시들이 있다. 화면에서 펼쳐지고 있는 지도 덕분에 그는 여기가 러시아 대륙의 시베리아 중부 어디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내는 담요를 끌어 올려 덮고는 다시 잠이 든다.

아래쪽, 흑점 가운데 하나에서 또 한 명의 사내가 나무로 지은 집에서 걸어 나온다. 그리고 내일 날씨를 확인화기 위해 두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만약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일직선의 광선을 하늘을 향해 끌어당긴다고 가정해 보면, 몇 초 동안 비행기 안에 있는 사내와 지상에 서 있는 사내, 이 두 사람은 그 반경의 일직선상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찰나의 시간 동안 그들의 눈빛 또한 동일선상에 놓일 것이며, 그들의 동공도 직선으로 서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두 사내는 서로 수직적으로 이웃이다. 1만 1000미터란 결국 무엇인가. 그것은 10킬로미터보다 조금 더 먼 거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사내의 마을에서 인근 마을까지의 거리보다 훨씬 가까운 수치다. 또한 그것은 대도시에서 서로 떨어져 있는 거주 단지들 사이의 거리보다도 훨씬 가까운 수치이기도 하다.(495-496p)

 

거리감각에 대한 신선한 접근이었다.

 

 

“어쩌면 과거를 보는 게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뒤로 돌리는 거죠. 마치 파논티콘처럼. 아니면 친애하는 여러분, 과거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겁니다. 단지 다른 차원으로 이주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저 우리의 시각과 관점을 바꾸기만 하면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걸 곁눈질로 보는 거죠. 미래나 과거가 무한하고 끝없는 것이라면 실제로 ‘언젠가’라는 시점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시간의 다양한 순간이 마치 홑이불처럼 공간 속에 매달려 있거니, 아니면 여러 개의 화면 속에 특정한 순간이 동시에 투영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움직일 수 없는 순간, 거대한 메타-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저 깡충깡충 뛰어다닐 뿐입니다.”

(...)

“실제로는 그 어떤 움직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논의 역설에 등장하는 거북이처럼, 우리는 어느 곳으로도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는 것입니다. 그저 순간의 내부를 간신히 맴돌고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애초에 목적지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공간에도 똑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무한대에서 똑같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어딘가’라는 표현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장소도, 어떤 날도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576-577p)

 

이건 다시 읽어봐도 아리송하다. 무슨 말이죠?

 

 

교수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피의 강물이 흘러넘쳐 붉은 대양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바닷물은 점차 다른 지역으로 범람했다. 먼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유럽의 한 평원을 집어삼켰다. 도시와 다리, 그리고 그의 조상들이 대대손손 어렵게 지은 댐이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갈대숲에 감춰져 있던 그들의 집 문턱까지 침범했고, 과감하게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돌바닥에 깔린 붉은 양탄자와 토요일마다 문질러 닦던 부엌의 나무 바닥을 휩쓸더니, 마지막으로 벽난로의 불을 꺼뜨리고 찬장과 테이블까지 덮쳤다. 그다음으로는 기차역과 공항, 언젠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교수가 고향을 떠난 바로 그곳을 집어삼켜 버렸다. 또한 그가 여행을 다녔던 도시들과 거리들이 전부 물에 잠겼다. 그가 임대해서 지내던 방, 싸구려 호텔, 끼니를 해결하던 음식점도 모조리 사라졌다. 붉게 빛나는 그 수면은 그가 너무도 사랑하던 도서관의 첫 번째 서가를 공격했다. 책장들이 물에 젖어 퉁퉁 불었다. 표지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검붉은 혓바닥이 문자들을 핥았고 검게 인쇄된 활자를 지워 없앴다. 자녀들이 졸업장을 받은 학교의 계단과 마룻바닥도, 교수 임명을 받기 위해 자랑스럽게 달려가던 도로도 전부 붉은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다. 그와 카렌이 함께 누워 늙고 노쇠한 육신을 처음으로 결합했던 침대 시트도 붉게 물들었다. 붉은빛의 그 끈끈한 점성 액체는 그가 자신의 신용 카드와 비행기 표, 손자들의 사진을 넣어 둔 지갑의 칸막이도 영원히 봉인해 버렸다. 물살은 기차역과 철로, 공항과 활주로를 모조리 덮쳤고, 이제는 그 어떤 비행기도, 그 어떤 기차도 거기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해수면은 끈질기게 상승했고, 말과 개념과 추억을 모두 집어 삼켰다. 가로등 불빛이 모조리 꺼지고 전구들이 터져 버렸다. 전선은 끊어지고 네트워크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죽은 거미줄이 되어 버렸으며 전화기는 먹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느리고 무한한 대양이 마침내 병원 근처까지 왔다.(587-588P)

 

 

ㅡ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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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

 

 

하숙인들 중 누구도, 이곳 사람들 중 하나가 떠들어 대는 불행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일부러 애써 확인해 보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서로에 대해 무관심과 경계심이 뒤섞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때 경계심은 각자의 상황에서 오는 것이었다. 자신이 타인의 고통을 달래 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알고 있었고, 모두가 괴롭게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동정하는 것도 이제는 할 만큼 했던 것이다. 노부부들처럼, 그들은 더 이상 서로 할 이야기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 사이에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기계적인 삶의 관계, 기름 안 친 톱니바퀴 같은 움직임뿐이었다. 그들 모두 길 가다 장님을 만난다 해도 그냥 지나칠 것이 틀림없으며, 남의 불행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고, 주검을 보아도 비참한 인생고 문제가 해결되었구나 싶으니, 제아무리 끔찍한 임종의 고통 앞에서도 냉정할 수 있었다.(27p)

 

 

실제로 보케 부인은 고양이보다도 더 의심이 많은 사람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녀도, 가까운 사람은 경계하면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겐 속까지 훤히 다 내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희한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많이 볼 수 있는 이런 정신 상태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 영혼의 텅텅 빈 모습을 보여 주고 나서 더 이상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가 측근의 엄격한 판단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렇게 되어 마땅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평소 못 받아 본 아첨이나 칭찬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거나, 아니면 실제로는 지니지 못한 좋은 품성을 지닌 듯 보이고 싶은 마음을 견디지 못해, 그들은 낯선 사람들의 평가나 공감을 급작스레 얻어 내고자 한다. 설령 언젠가 그들 또한 실망할 우려가 있다 해도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친구나 친지들에게 좋은 일을 결코 하지 않으면서, 천성적으로 자기 이익만 챙기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런 선행은 억지로 부과된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런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잘해 줌으로써 자존심을 충족시킨다. 애정의 원이 자신에게 가까울수록 그들은 덜 사랑하고, 그 원이 자신에게서 먼 반경을 그릴수록 더욱 친절하게 군다.(33p)

 

 

“자, 실비, 와서 나 외출복 입는 것 좀 도와줘. 전신 코르셋을 입어야겠어.”

“아, 아주머니, 전신 코르셋 말이에요? 방금 저녁 드셨는데····· 안돼요. 코르셋을 꽉 조여 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누구 딴 사람을 찾아보세요. 하필 왜 아주머니를 돌아가시게 하는 사람이 저여야 하나요. 목숨이 달린 일인데 신중하지 못하시네요”(217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방심하고 있다가 뜬금없이 터졌네.

 

 

ㅡ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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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

 

 

변함없이 눈부신 그 여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지극히 아름답지요. 그리고 늙으면 그 사실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생각하고 기억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게 돼요.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지요. 모든 것에.”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세상사가 못마땅해지는 내게 나치 수용소까지 다녀온 이 할머니가 덧붙인다. “나는 악에 대해 잘 알지만 오직 선한 것만 봅니다.” 이런 할머니들이 있어 나는 또다시 장래를 희망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나의 장래희망은, 다시 할머니, 웃는 눈으로 선한 것만 보는 할머니가 됐다.(31p)

 

 

ㅡ 김연수, <시절일기> 中, 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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