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

 

 

2019년의 마지막과 2020년의 시작을 함께 한 책. 덕분에 한가로운 여행지에서 즐거웠다. 다음은 3권.

 

 

 

 

불평등에는 고약한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작용하며 금전적인 문제를 초월하는 것이다. 식료품점과 구두공장과 구둣가게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우리의 출생 배경을 숨기지는 못한다. 릴라가 계산대 서랍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꺼낸다 해도, 그 액수가 3백만 리라가 되었든 5백만 리라가 되었든 돈으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

학교 앞으로 니노를 마중 나온 소녀를 보았을 때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 소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보다 우월했다. 그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170p)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 해.”

“나를 좀 도와줘.”

“어떻게?”

“내 곁에 있어줘.”

“그렇게 하고 있잖아.”

“아니야. 나는 네게 비밀이 하나도 없어. 가장 추악한 생각까지도 감추지 않아. 그런데 너는 네 얘기를 거의 하지 않잖아.”

“그렇지 않아. 내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사람은 너뿐이야.”

릴라는 강하게 고개를 저어보이면서 말했다.

“네가 나보다 뛰어나고 나보다 아는 것이 많아도 나를 떠나지는 말아줘.”(197p)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다. 위험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이들은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평생을 구석에 처박혀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불현듯 왜 내가 아닌 릴라가 니노를 차지하게 됐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감정에 몸을 내맡길 줄 모른다. 감정에 이끌려 틀을 깨뜨릴 줄 모른다. 내겐 니노와 단 하루를 즐기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릴라와 같은 강인함이 없었다. 나는 항상 한 발짝 뒤에서 기다리기만 했다.

릴라는 그런 나와는 달리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갈망할 줄 알았다. 원하는 것은 망설임 없이 취할 줄 알았다. 열정을 다할 줄 알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모멸감도 비웃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얼굴에 침을 뱉어도, 흠씬 두들겨 맞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릴라에게 사랑은 상대방이 자기를 원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릴라는 니노를 가질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404p)

 

 

시어머니는 릴라가 구둣가게를 맡는 바람에 신시가지에 있는 식료품점에서 다시 힘겹게 일해야만 했다. 특히 피누차와 질리올라는 각자 리라에게 할 수 있는 공격을 모두 쏟아 부었다. 사실 그것은 예상했던 바였다. 예상치 못했던 것은 지금까지 릴라에게 받은 도움과 은혜 때문이라도 항상 릴라를 우러러보던 카르멘이 릴라가 식료품점을 떠나자마자 그녀에 대한 모든 애정을 싹 거둬들였다는 사실이다. 마치 짐승의 송곳니에 손을 스치자 손을 뒤로 잡아 빼는 것 같았다.(482p)

 

 

하지만 알폰소, 엔초, 니노 같은 사내들은 달랐다. 이들 역시 여성 취향이 서로 다르기는 했지만 여성을 대할 때 항상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벽이 있는데 그 벽을 뛰어넘는 일은 여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511p)

 

 

불현듯 ‘거의’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해낸 건가. 거의 그렇다. 나폴리에 있는 고향 동네에서 이제는 완전히 벗어난 건가. 거의 그렇다. 나는 교육 수준이 높은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갈리아니 선생님이나 그녀의 아이들보다 더 수준 높은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시험에 시험을 거치면서 권위 있는 교수님들에게 인정받는 학생이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거의’라는 단어 뒤에 실상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웠다. 피사로 온 첫날부터 나는 두려웠다. 나는 ‘거의’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두려웠다.(561p)

 

 

나는 평생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말을 잘못 할까봐, 너무 과장된 어조로 말할까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을까봐, 옹졸한 마음을 들킬까봐, 흥미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할까봐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것이다.(563p)

 

 

머리가 아팠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일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릴라를 미켈레에게 데려다주지 않은 일이 올바른 일이었을까. 엔초에게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한 일이 잘한 일이었을까. 릴라가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면 아다의 상황이 달라졌을까.

안토니오는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딱히 선한 일도 악한 일도 없었다.(581p)

 

 

순간 나는 내가 거기까지 릴라를 찾아간 것이 교만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좋은 마음에 애정을 가지고 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 긴 여행이 결국 릴라가 잃어버린 것을 나는 얻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라는 내가 자기 앞에 나타난 순간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동료와의 마찰과 벌칙금을 낼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 나에게 내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살아가면서 승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자신의 인생은 나만큼이나 다양하고 무모한 모험으로 가득하며 시간은 그저 별 의미 없이 흘러가기 마련이니 가끔 이렇게 만나 한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터무니없는 생각과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정신 나간 생각을 나누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652p)

 

 

 

ㅡ 엘레나 페란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中, 한길사

,

2019/12/24

 

 

 

성애화는 소녀들이 자기 스스로를 성적 대상화하여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의 욕망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다루게 만든다. 이러한 자기 대상화는 자신의 외모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검열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여러 측면에서 문제를 낳는다.

한 실험 연구에서 남녀 대학생에게 수영복과 스웨터를 입어 보고 평가해 보라고 한 뒤, 대기하는 10분 동안 수학 문제를 풀게 했다. 그랬더니 수영복을 입은 여학생에서만 점수가 유독 낮아졌다. 수학 이외에 다른 종류의 인지 능력을 평가한 실험들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외모에 대한 끊임없는 의식이 한정된 인지 자원을 고갈시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

또한 성애화와 대상화는 자신의 몸에 대한 확신과 안정감을 침식하고, 사회적 미의 표준을 충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수치심과 불만을 갖게 한다. 자신의 외양을 끊임없이 모니터링하면서 모든 것이 제대로 제자리에 있는지 불안감에 빠져든다. 화장이 지워지지는 않았을까 계속 거울을 봐야 하고, 짧은 치마가 올라가지는 않았을까 계속 끌어내려야 하며, 고개를 숙을 때도 가슴이 드러나지 않도록 옷깃을 여며야 한다. 수치심과 불만, 지속적 불안은 자존감의 하락, 섭식장애,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건강한 섹슈얼리티를 발달시키는 데에도 방해가 된다. 연구에 의하면, 자신을 성적 대상화하는 관점을 가진 소녀들일수록 성관계시 콘돔 사용률이 낮고 주도성을 갖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의 욕구나 안전, 쾌락에 집중하기보다는 파트너 남성의 판단에 의존한다는 것이다.(67-68p)

 

 

 

ㅡ 김명희, <당신이 숭배하든 혐오하든> 中, 낮은산

,

2019/12/24

 

흥미진진.

 

 

 

내겐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 우리의 유년기는 폭력으로 가득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매일매일 별의별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인생이 특별하게 기구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고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힘들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고 타인들도 우리 인생을 힘겹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40p)

 

 

선생님께 책을 돌려주면서 릴라는 이제 「작은 아씨들」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과 그 책을 아직 읽지 못한 나와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아쉬워했다.(84p)

 

 

아다와 카르멜라와 나는 솔라라 형제와의 일이 일어난 후부터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우리에게 던지는 저속한 말을 못들은 척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

릴라는 달랐다. 그녀와 함께하는 일요일 산책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면 시선을 맞받았다. 누군가 자신에게 뭐라고 하면 정말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건지 의심스럽다는 듯이 멈춰 서서 가끔 호기심 어린 태도로 대꾸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남자들은 우리에게 던지는 저속한 농담을 오히려 릴라에게는 하지 않았다.(188p)

 

 

우리뿐만이 아니다. 릴라의 아버지도 마치 예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행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도, 나의 아버지도, 리노마저도 별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스테파노의 식료품점은 이전에 파스콸레의 아버지인 알프레도 아저씨의 목공소였다. 돈 아킬레의 재산과 솔라라 집안의 재산은 모두 과거에 축적된 것이다. 릴라는 자기 부모님과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시도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런 이야기도 하려 하지 않았다. 파시즘에 대해서도 왕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권력남용이나 폭정, 착취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들은 분명 돈 아킬레를 증오하고 솔라라 집안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모른 척하고 돈 아킬레 자식의 가게나 솔라라네 가게에서 자신들이 번 돈을 쓰고 때로는 우리를 그곳으로 심부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고는 솔라라네 가족이 원하는 것처럼 파시스트나 왕정복고주의자들에게 투표를 한다. 그들은 이전에 일어난 일들은 모두 과거일 뿐이니 조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그냥 덮어두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직도 과거의 일에 영향을 받고 있었고 우리까지 그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밀을 되풀이하고 있었다.(210-211p)

 

 

그는 그해 여름 바라노의 넬라 아주머니네 집에서 나를 다시 만나지 못해 괴로웠다고 했다. 오직 내 생각만 했고 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했다. 우리의 사랑에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많은 시를 썼고 내게 그 시를 읽어주고 싶다고 했다. 나를 다시 만나서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며 거부하면 죽어버리겠다고 했다.(379p)

 

이런 새끼들이 아가리만 털고 절대로 자살하지 않지. 제발 좀 죽어라.

 

 

하지만 이제 그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신경이 곤두섰다. 그도 결국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아버지만큼이나 공허한 사람인가. 다른 이들이 자신을 원하고 사랑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건가. 자신의 재능 말고 다른 이의 재능은 견디지 못할 정도로 오만한 사람이란 말인가.(403p)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넌 공부를 계속하도록 해.”

“2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해. 그러면 끝이지.”

“아니, 절대로 멈추지 마. 필요한 돈은 내가 줄게. 넌 항상 공부해야 해.”

나는 조그맣게 웃어 보인 후 릴라에게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언젠가는 학교 공부를 마칠 수밖에 없어.”

“넌 아니야.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부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남녀를 통틀어서 말이야.”(416p)

 

 

그들과의 이질감 때문에 생긴 불행한 소외감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느낀 것은 오라치오 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가던 바로 그 길에서였다. 나는 이 아이들과 함께 자랐고, 이들의 행동은 내게도 자연스러웠다. 그들의 거친 언어는 내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6년 동안 매일같이 이들이 전혀 모르는 길을 걸어왔다. 학생들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모든 과정을 훌륭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땐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조금도 사용할 수 없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자제해야 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학교에서의 내 모습을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 기껏해야 나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해서 내 주장을 관철시킬 필요가 있을 때만 그런 모습을 잠깐 내비칠 뿐이었다.(426p)

 

 

ㅡ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中, 한길사

,

2019/12/24

 

웬만하면 다 읽고자 했는데 계속 읽어봤자 읽으나 마나란 생각이 들어 그만 책을 놓는다. 어딘가의 독자를 상정하고 쓴 책일 텐데 이런 책은 누구에게 효용이 있는지?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소리를 하기 보다는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얘기를 좀 더 전문적으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매일매일 노심초사 고민하며 자신의 일을 대신 결정해 줄 사람을 찾고 있나요? 의존적인 마음을 정 버릴 수 없다면, 차라리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조언자를 찾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 조언자가 누굴까요? 배우자? 친구? 아닙니다. 그 대상은 바로 자신의 지난 경험입니다. 의사 결정을 내리는 몇 가지 경험적 원칙을 세우고, 그러한 결정을 내린 과거의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60p)

 

 

전적으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양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서 있습니다.(97p)

 

 

 

ㅡ 박한선,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中, 아르테

,

2019/12/5

 

나는 당신이 ‘충분히 암시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은 요청들’을 쌓지 않기를 바란다.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하면 좋겠다. 우리는 통하니까, 저 사람은 똑똑하니까, 내가 선의로 대하면 나를 선의로 대해주리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막무가내로 베풀고 실망하지 말자.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가도, 말과 글을 분명히 하다 보면 어슴푸레 마음속에 있던 것이 또렷해진다.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다. 여성인 나 자신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내 말을 들리게 만들자. 의심은 집어치우고.(17-18p)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며, 역시 너무 ‘또렷하게’쓰고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쿠션어를 썼을 때 그 속뜻을 짚어 이해하는 일을 나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날이 춥다”고 말하면 알아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라고 응답하지 않는다. 대신 “아, 날이 춥군요”라고 응수한다. 따뜻한 음료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말씀해주세요. 나이 어린 여자에게 차 심부름을 시키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의 손으로 차를 마실 의지는 없다고요? 그러면 갈증을 참아보면 어떨까요?

직접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것을 우아하다고들 한다. 경험해본 바, 그것은 가진 사람들의 화법이다. 상대가 내 뜻을 한 번 더 생각하고 속뜻을 헤아려준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다리가 아파 잠시 앉았으면 좋겠는데, 여기 의자가 있습니까?”라고 하는 대신에, “여러분은 참 젊어서 좋겠어요, 거뜬하게 서 있으니 보기 좋네요”라고 말하는 편이 더 배운 사람 같다고.

(...) 여성들의 생리작용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화법을 권장하는 게 싫다.

생리한다는 말 대신에 마법에 걸렸다고 하는 게 대표적이다.(21-22p)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이 혼자 에둘러 말한다고 알아서 헤아려주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상대는 나중에 말한다. “그렇게 필요하면 분명히 말하지 그랬어?”(24p)

 

 

ㅡ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 中, 한겨레출판

,

2019/11/30

 

그는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였다. 뿐더러 그는 참회의 증표와 주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사후의 신장과 두 눈알을 다른 사람에게 바칠 약속까지 해놓고 있었다 하였다. 그는 그만큼 평화로운 마음으로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였다.(71p)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요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75p)

 

 

ㅡ 이청준, <벌레 이야기> 中, 문학과지성사

,

2019/12/4

 

즐거운 연말 리스트의 시간이다. 올해가 10년대의 마지막 해이다보니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best 말고도 2010년대의 best도 같이 뽑아놓은 경우가 많았다. 그 중 반복되는 책이 몇 권 있었는데 그 중 하나라 집어 들었다. 책 제목이 끌리기도 했고.

각 챕터마다의 화자가 다르다. 한 이야기에서 지나가듯 등장하거나 큰 비중이 없던 사람이 다른 챕터에서는 중심 화자로 나오는 식으로 이야기가 확장되며 이어진다. 마치 이야기로 이어달리기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끝까지 보면 모든 등장인물이 유기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과정을 되게 매끄럽게 잘 썼다. 이 책과 같이 전형적인 소설의 형식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책을 처음 보는 게 아니라서 대단히 신기하거나 엄청 새롭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파워포인트 같은 경우는 재밌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형식도 형식인데 내용 자체가 흡입력이 있다 보니 독자의 입장에서 화자가 수시로 바뀌고, 등장인물이 많은 경우에 흔히 느낄 수 있는 산만함이나 복잡함을 주지 않고 이야기의 긴장을 잘 유지하며 끌고 가는 점이 훌륭했다.

 

다음 책은 아마도 아직도, 여전히 안 읽은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

 

 

 

 

그가 말한다, 이 세상엔 병신새끼들이 널리고 널렸어. 리아. 그 사람들 말은 듣지 마라ㅡ내 말 들어.

그리고 나는 루야말로 그 숱한 병신새끼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그의 말을 새겨듣는다.(94p)

 

 

질문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때 내가 루에게서 벗어나 쓰레기를 던지는 사람들에게 맞섰다면, 스코티가 앨리스를 받아들였듯이 베니도 나를 받아들였을까? 단 한 번의 계기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었을까?(95p)

 

 

그러나 이런 결과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 대부분은 다시 만나도 삼십오 년 전에 사파리 여행을 같이 갔다고 해서 피차 통하는 게 많지는 않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고, 헤어져 제 갈 길을 가면서 정확히 자신이 뭘 바랐던 것인지 알 수 없어질 것이다.(114p)

 

 

구조적 불만 : 훨씬 짜릿하고 호화로운 삶을 경험하고 돌아와, 한때는 즐거웠던 일상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음을 발견하는 것.(128p)

 

 

“나 인터뷰도 하고, 티브이 출연도 하고 싶어. 뭐든 말만 해,” 보스코가 말을 이었다. “그딴 걸로 내 인생을 꽉꽉 채워줘. 지지리 궁상떠는 짓거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는 거야. 이런 게 현실 아니겠어? 이십 년 지나면 반반했던 얼굴도 맛이 가. 뱃살의 반을 잘라낸 사람은 더하지. 시간은 깡패잖아? 그게 제대로 표현한 거 아냐?”(194p)

 

 

바닥에 앉아 오후시간이 흘러가는 걸 느끼던 테드는 어느새 수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짝 다른 수전이 아니라 수년 전 어느 날의 그녀ㅡ그의 아내ㅡ를. 테드가 그의 욕망을 접고 접어 조그맣게 만들기 전이었다. 뉴욕에 놀러 갔을 때 둘 다 한 번도 타본 적도 없고 해서 재미 삼아 스테이튼 아일랜드 유람선을 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수전이 불쑥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늘 오늘처럼만 살자.” 그 시절만 해도 두 사람이 한마음이었던지라 테드는 왜 아내가 그런 말을 하는지 더없이 잘 알았다. 그날 아침 섹스를 해서도, 점심식사 때 푸이 퓌세를 마셔서도 아니었다. 아내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337p)

 

 

“쉼표가 나오면 노래가 끝날 거라고 생각하게 돼. 그랬다가 사실은 노래가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알면 마음이 놓이지. 그렇다 한들 노래는 곧 진짜로 끝나버려. 모든 노래엔 절대적인 끝이 있어. 바로 그거야.

시간.끝.이.라.는.게.정.말.존.재.한.다.는.것.”(388p)

 

 

ㅡ 제니퍼 이건, <깡패단의 방문> 中, 문학동네

,

2019/11/24

 

 

 

나는 언니의 프로필 사진을 볼 때마다 대체 왜 저렇게 하지, 하고 생각했다. 정말 왜 저렇게 할까.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하루에도 몇 번씩 회사 사람들과 메신저로 업무를 주고받는데. 거기에 남자친구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진이 떠 있으면 얼마나 프로답지 못해 보일지, 한번쯤 생각을 해볼 텐데. 나라면 내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수 있는 사적인 인간이라는 거, 최대한 떠올리지 못하게 할 텐데. 매일 오분씩 지각하지 않을 텐데. 어차피 오분 동안 일을 더 하거나 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라면 그냥 오분 일찍 일어날 텐데. 나라면 머리를 좀 짧게 자를 텐데.(25p)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가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28p)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63p)

 

 

“우리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96p)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이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 안에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테고 패브릭 소파와 소파스툴, 원목 거실장과 몬스테라 화분은 둘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거실을 통해 부엌으로 가려면 한가운데로 가로지르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고 피아노의 뒷면과 벽 사이로 겨우 지나가거나, 기어서 피아노 밑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단 한번도 충분하다거나 여유롭다는 기분으로 살아본 적 없는 삶이었다. 삼십대 중반, 이제야 비로소 누리게 된 것들을 남은 인생에서도 계속 안정적으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 이십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142-143p)

 

앞서 세 번의 회사를 절대 허투루 다닌 게 아니었다. 처음 한달이 중요했다. 이때 일찍 출근해두면 그 이후부터는 아무리 늦게 와도 ‘원래 일찍 출근하는 앤데 오늘은 좀 늦네’가 되고, 초반 한달을 늦게 출근해버리면 그다음에는 아무리 일찍 와도 ‘원래 늦는 앤데 어쩐 일로 일찍 왔대?’ 소리를 듣는다.(161-162p)

 

 

 

ㅡ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中, 창비

 

,

2019/11/22

 

조금만 위트 있어 보이면 다 빌 브라이슨이래. 마약을 다룬 전작도 그랬지만 이번 책도 다른 저작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특정 파트는 거의 해당 책을 요약해서 실은 수준이라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도역오가 혐오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세상에는 오직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성만 존재했고, 제3의 성을 가진 이는 동경이든 혐오든 늘 외부자 취급을 받았다.(173p)

 

 

트랜스젠더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호르몬 치료 자체를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부수적인 약물 정도로 생각하지만, 수술보다 더 핵심적인 것이 이 호르몬 치료다. 트랜스젠더의 70%가량이 호르몬 투약을 받지만, 이 중 절반 정도만이 수술을 받는다. 또, 수술은 단기간에 끝나지만 호르몬 투약은 평생 이어진다.(179p)

 

 

사람의 말이 아니라 드러난 행동을 믿는 것, 그것이 빅데이터의 교훈이다.(290p)

 

 

인간의 방식을 습득한 기계는 인간의 편견까지 그대로 물려받는다. 이전에 존재하던 소수자 배척은 빅데이터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는 그런 배척이 과학이란 이름으로 공정함으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물론 소수자가 얼마나 피해를 받는지도 빅데이터로 수치화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과연 그런 연구를 할 수 있을까. 빅데이터가 과정이 아니라 효율성만을 찾아간다면 그 길은 필연적으로 차별로 흐르게 된다.(318p)

 

 

문제는 사람들이 빅데이터를 통해 내려진 결정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교사 평가는 어찌 보면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을 사전 검열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적어도 그 경우에는 조사를 거쳐 누명을 벗을 기회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결국 무고한 체포자가 많아지자 애국법은 폐지됐다. 하지만 임팩트에서 낮은 점수를 받고 해고가 되어 버리면, 그는 그냥 무능력한 교사가 된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사람들은 빅데이터가 내놓은 결과를 비판 없이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와이사키는 다행히 그녀를 좋게 봤던 교장의 추천으로 근처 사립학교에 취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함께 해고된 교사 204명은 그녀처럼 운이 좋진 않았다. 그들이 어떤 말을 하든, 사람들은 실력 없는 교사의 변명으로 치부할 것이다.(325p)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설득하거나 감화시키지 않는다. 그보다는 반대자들이 다 죽고 나서 새로운 진리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나타날 때 비로소 승리한다.(416p)

 

 

ㅡ 오후,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 中, 웨일북

,

2019/11/20

 

경찰이 필요악이기 때문이야. 누구든 불현 듯 경찰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알지. 직업 범죄자들조차 그래. 제아무리 도둑이라도 자기집 지하실에서 뭔가 달각대는 소리가 들려서 밤중에 잠을 깨면 어떻게 할 것 같나? 당연히 경찰을 부르지. 하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이 자기 일을 방해하거나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면 어떤 방식으로든 두려움이나 경멸을 표현하기 마련이야.

(...)

물론 문제의 핵심은 따로 있어. 경찰 직업 자체는 최고로 지적이며 정신적, 육체적,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수행해야 하는 일이건만, 이 직종에는 그런 자질을 보유한 사람을 끌어들일 매력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이야.(199p)

 

 

ㅡ 마이 셰발, 페르 발뢰, <웃는 경관> 中, 엘릭시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