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6/12

 

심상하게 읽어가기 시작했고 대략 예상이 되는 결말이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울컥했다. 20년간 도서 구매자와 서점 직원이 주고 받은 도서 주문서와 청구서가 이 책의 전부이다.듣기만 해도 재미없어 보이는 이런 글에서조차 묻어나는 두 인물의 매력이란.

 

 

 

 

책장을 정리하다가 사방에 책으로 둘러싸여 앉아 순풍에 돛단 여행을 기원하며 몇 자 끼적입니다. 브라이언과 런던에서 멋진 시간을 보내길 빌어요. 브라이언이 전화로 ‘여비만 있다면 우리랑 같이 가시겠어요?’ 그러는데, 하마터면 울음이 터질 뻔했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대로가 나을지도, 너무나 긴 세월 꿈꿔온 여행이죠, 단지 그곳 거리를 보고 싶어서 영국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러 영국에 간다고. 제가, 나는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거기 있어요.”

어쩌면 그럴 테고, 또 어쩌면 아닐 테죠. 주위를 둘러보니 한 가지만큼은 분명해요. 여기에 있다는 것.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145p)

 

 

 

ㅡ 헬렌 한프, <채링크로스 84번지> 中,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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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10

 

 

soso

 

 

 

ㅡ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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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21

 

 

 

다 읽긴 했으나 크게 재미를 못 느꼈다. 중간쯤 등장하는 노인과의 이야기라도 없었으면 중도 포기했을지도. 폴 오스터를 많이 읽은 누군가의 말로는 그의 작품 중 이게 제일 재미없다고 하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에 크게 궁금증이 일지 않아서 아마도 읽지 않을 것 같다.

 

 

빅터 삼촌은 술 취하지 않고 잔소리를 하는 도라는 견뎌 낼 수 있었지만, 그녀가 술에 취해 있을 때면 내가 느끼기엔 본래의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왜곡된, 잔인하고 참을성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랬기에 좋은 면과 나쁜 면이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벌였다. 도라가 좋을 때는 빅터 삼촌이 안 좋았고, 빅터 삼촌이 좋을 때는 도라가 안 좋았다. 좋은 도라 때문에 안 좋은 외삼촌이 생겨났고, 좋은 외삼촌은 오직 도라가 안 좋을 때에만 되돌아왔다.(18p)

 

 

어떤 의미에서는 그 느낌이 내가 경험했던 것의 실체를 바꾸었다. 나는 절벽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떨어져 죽기 직전에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떨어져 내리는 두려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더라도 그 두려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로운 조망을 얻은 것이었다. 나는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마지막 순간에 뭔가가 팔을 뻗쳐 허공에 걸린 나를 붙잡아 주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사랑이야말로 추락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 만큼 강력한 단 한 가지 것이다.(76-77p)

 

 

뉴욕 사람들이 길거리를 걸을 때면 그들의 눈에는 특별한 번득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연스럽고 어쩌면 필연적인 무관심이 떠오른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어떻게 보이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터무니없는 의상, 기괴한 머리 모양, 음란한 문구가 박힌 티셔츠ㅡ그런 것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겉모습 밑에서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을 지극히 중요해서 이상한 몸짓은 무엇이건 당장 위협으로 간주된다. 소리를 내어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몸의 어느 부분을 긁거나 낯선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거나 하는 규칙 위반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적대적이고 때로는 난폭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85p)

 

 

대화는 누군가와 함께 공 던지기 놀이를 하는 것이나 같다. 쓸 만한 상대방은 공이 글러브 안으로 곧장 들어오도록 던짐으로써 여간해서는 놓치지 않게 하고 그가 받은 쪽일 때에는 자기에게로 던져진 모든 공을, 아무리 서툴게 잘못 던져진 것일지라도, 능숙하게 다 잡아 낸다. 키티가 바로 그랬다. 그녀는 계속해서 공이 내 글러브 안으로 곧장 들어오도록 던졌고, 내가 그녀에게 공을 던질 때는 포구 범위를 한참 벗어나는 경우라 하더라도 모든 공을 다 잡아 냈다.

(...)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는 기술이 너무도 뛰어나서 내가 공을 잘못 던질 때마다 일부러 그랬던 것인 양, 순전히 게임을 좀더 재미있게 만들려는 의도로 그랬던 것인 양 느끼게 해주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나 자신을 실제의 나보다 더 낫게 보았고 그 때문에 자신감이 생겨서 다음에는 그녀에게 좀 더 받기 쉬운 공을 던져 줄 수 있었다. 달리 말해서 나는 그녀에게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그 즐거움은 내가 오랫동안 경험해 보았던 어떤 즐거움보다도 더 컸다.(136-137p)

 

 

나는 태평한 무관심으로부터 강렬한 놀라움의 단계를 거쳤고, 내 설명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가능한 뉘앙스를 모두 잡아내려고 열심히 애쓰면서, 아무것도 빼먹지 않기 위해 세세한 사항들을 미친 듯이 그러모아 뒤죽박죽을 만들면서, 지나치게 정확해졌다.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기관총을 쏘아 대듯 딱딱 끊기며 연달아 터져 나왔다. 에핑은 끊임없이 내게 말을 좀더 천천히 하라며 내 말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투덜거렸다. 문제는 내 말투보다 전반적인 접근 방식에 있었다. 나는 너무도 많은 말들을 그러모으고 있어서 눈앞에 보이는 것을 나타내기보다는 사실상 그것을 흐리는, 미묘한 의미와 기하학적인 추상의 사태 밑에 묻어 버리는 셈이었다. 명심해 두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에핑의 눈이 멀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은 긴 설명으로 그를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결국 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이 할 일은 그가 사물들을 가능한 한 빨리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말이 입 밖에 나오는 순간 사라지게 해야 되었다. 내가 말하는 문장들을 단순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부수적인 것을 분리할 줄 알기 위해서는 몇 주일 동안의 힘든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어떤 사물 주위로 더 많은 여유를 남겨 두면 남겨 둘수록 그 결과가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에핑이 자기 스스로 결정적인 일, 즉 몇 가지 암시를 기초로 해서 이미지를 구성하고 내가 그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사물을 향해 자신의 마음이 여행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했었기 때문이다.(179-180p)

 

 

우리는 누군가의 말소리를 듣자마자 마음속으로 말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불과 몇 초 내에 온갖 종류의 조용한 정보들이 흡수된다. 성별, 대략적인 나이, 사회 계층, 출생지, 심지어는 그 사람의 피부색까지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눈을 뜨고 마음속으로 그린 이미지가 실제의 인물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그 두 가지는 비교적 근접할 때가 아닐 때보다 더 많지만, 때로는 전혀 틀리는 경우도 있다. 트럭 운전사처럼 얘기하는 대학 교수, 늙은 여자로 밝혀지는 젊은 여자, 백인으로 밝혀지는 흑인,(199p)

 

 

결과,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야. 좋건 싫건 간에 언제나 결과가 있기 마련이지.(222p)

 

 

바버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충분한 시간은 결코 없었다. 그는 우리의 문제를 풀기 위해 미래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 미래는 결코 오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잘못이었다고는 하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그는 대가를 치렀고 나 또한 그와 함께 대가를 치렀다. 결과가 어찌 되었건, 나는 그가 달리 어떻게 행동할 수 있었을지 알지 못한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를 알 수 없었고, 누구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어둡고 끔찍한 일들을 상상할 수 없었다.(342p)

 

 

빅터 삼촌이 바버를 피하는 대신 그의 두 번째 편지에 답장을 했더라면 나는 1959년에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받아들이기가 조금이라도 더 쉬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놓쳐 버린 관계, 잘못된 시기, 어둠 속에서 생겨난 실수였다.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시간에 옳은 곳에, 옳은 시간에 잘못된 곳에 있었다. 언제나 서로를 놓쳤고,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 전체적인 일을 알지 못했다. 우리의 관계는 결국 그렇게, 잃어버린 기회의 연속이 되고 말았다. 그 이야기의 조각들은 처음부터 모두 거기에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어떻게 이어 붙여야 할지 몰랐다.(359p)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왔지만 사정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지나간 일은 잊어버릴 수 있다고 자신을 설득했음에도, 예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을 때는 그 삶이 더 이상 거기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403-404p)

 

 

나는 에핑이 살던 동굴을 찾아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맨 마지막까지 그것이 미리 정해진 결론이었다) 그 동굴을 찾아보는 행위, 다른 모든 행동을 말살시키는 행위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가방에는 1만 3천 달러가 넘는 돈이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얼마든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이 다 사라질 때까지 계속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436p)

 

 

 

ㅡ 폴 오스터, <달의 궁전>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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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16

 

 

최근 소설을 많이 읽고 있는데 고르는 족족 다 재미있네.

 

 

 

어째서 영국의 시골 마을은 종종 살인 사건의 무대가 될까? 내가 전부터 이걸 궁금해하다 해답을 깨달은 것은 치체스터 인근 어느 마을의 조그만 시골집을 임대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였다. 찰스는 반대했지만 나는 주말에 가끔 거기로 피신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판단이 옳았다. 런던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내가 친구를 한 명 사귈 때마다 적이 세 명 생겼고 주차, 교회 종소리, 반려견의 배설물, 화분을 매다는 것과 같은 문제들이 숨 막힐 정도로 일상을 지배했다. 진짜다. 혼란스러운 도시에서는 금세 잊힐 감정들이 시골에서는 광장을 중심으로 곪아터지고 사람들을 정신병과 폭력의 세계로 몰고 간다. 추리 소설 작가에게는 선물이다. 그리고 연결성이라는 장점도 있다. 도시는 익명의 공간이지만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용의자와, 그들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훨씬 쉽게 창조할 수 있다.(70-71p)

 

 

1주일 전까지만 해도 내 주변에서는 비정상적이고 끔찍한 죽음을 맞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 부모님과 앨런 말고는 죽은 사람 자체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책과 텔레비전에서는 수많은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게 없으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문제가 있는 지역에서 살지 않는 한 그런 사건을 접할 일이 거의 없다. 살인 추리 소설의 수요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디에서 매력을 느낄까? 범행일까 아니면 해법일까?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안전하고 안락하기 때문에 유혈 참사에 원초적인 욕구를 느끼는 걸까? 나는 온두라스의 산 페드로 술라(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살인의 도시다)에서 앨런의 매출액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아야겠다고 기억에 담았다. 어쩌면 그곳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전혀 읽지 않을 수도 있었다.(88p)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책이 팔리길 바란다면 진실을 1백 퍼센트 공개하면 안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크라우치 엔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고 출판계가 그립다. 안드레아스와 나 사이에서 돈 걱정이 끊이지 않는 것도 스트레스다. 인생이 예술을 모방할지 몰라도ㅡ대개는 거기에 못 미친다.(284p)

 

 

 

ㅡ 앤서니 호로비츠, <맥파이 살인 사건>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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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13

 

저자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질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각 작품이 다루는 시대가 모두 과거가 아니었음에도 재미있는 옛날 옛적 얘기를 읽는 느낌이었다. 동아시아권의 독자와 그 외 지역의 독자들이 책을 읽고 느끼는 바에 차이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틸리는 단순히 알고 싶은 것만 가르쳐 주지 않아요. 뭘 생각해야 할지까지 가르쳐 준단 말이에요.(44p)

 

 

아뇨, 센틸리언은 고삐 풀린 알고리즘이에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 점점 더 많이 제공할 뿐이죠. 그리고 우리는,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들은, 바로 그 점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해요. 센틸리언은 우리를 조그만 거품 속에 가뒀어요. 그 속에서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은 전부 우리 자신의 메아리예요. 그래서 점점 더 기존의 믿음에 집착하고, 자신의 성향을 점점 더 강화해 가는 거죠. 우린 질문하기를 멈추고 뭐든 틸리가 판단하는 대로 따르고 있어요.(56p)

 

 

중립은 지키면서 정보만 제공하는 사업 같은 건 없습니다. 사용자가 틸리한테 선거 후보자의 이름을 물어본다고 칩시다. 그럼 틸리는 그 사람을 후보자의 공식 웹사이트로 안내해야 할까요, 아니면 후보자를 비판하는 웹사이트로 안내해야 할까요? 만약 사용자가 틸리에게 ‘톈안먼’에 관해 물어보면 수백 년에 걸친 톈안먼 광장의 역사를 들려줘야 할까요, 아니면 1989년 6월 4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만 가르쳐 주면 될까요? 검색창의 ‘너만 믿을게’ 버튼은 우리가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능입니다.

센틸리언이 하는 일은 정보를 조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취사선택과 유도, 고유한 주관이 필요하지요.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고 당신에게 진실인 것은, 남들에게는 중요하지도 않고 진실도 아닙니다. 그건 판단과 순위 매기기에 달렸습니다.

(...)

이렇게 전자적으로 확장된 자아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된 이상, 당신들이 센틸리언을 무너뜨려 봤자 금세 다른 대체재가 등장해서 우리 자리를 차지할 겁니다. 이미 늦었다, 이겁니다. 거인은 이미 오래 전에 램프에서 탈출했어요. 처칠이 이런 말을 했다지요. ‘건물을 만드는 것은 우리이지만, 나중에는 그 건물이 우리를 만든다.’우리는 생각하기를 돕는 기계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 기계가 우리를 대신해서 생각을 한다, 이겁니다.

(...)

피치 못할 운명과 마주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적응하는 것뿐입니다.(69-73p)

 

 

멍한 기분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내리는 동안,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평생 사냥한 요괴들이 서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다 이미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은 낡은 요술의 힘으로 연명하는 존재였고, 그 요술 없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했으니까.(93-94p)

 

 

나는 염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좋아 보이네라는 말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염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피곤해 보였고, 수척해 보였고, 차가워 보였다. 게다가 아찔한 향수 냄새 때문에 코가 다 찡했다.

하지만 염에게 모진 낙인을 찍고 싶지는 않았다. 낙인찍는 것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는 이들의 특권이므로.(97p)

 

 

음악을 사랑하는 알레시아인은 가늘고 단단한 주둥이로 자국이 남기 쉬운 표면, 이를테면 밀랍이나 진흙이 얇게 덮인 금속판을 긁어서 글을 쓴다(부유한 알레시아인은 코 끝에 귀슴속으로 만든 촉을 달기도 한다.). 글쓴이는 글을 쓰는 동안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해서 주둥이가 위아래로 떨리게 하는데, 이로써 기록재의 표면에 홈이 파인다.

이렇게 쓴 책을 읽기 위해 알레시아인은 자기 주둥이를 그 홈에 대고 죽 훑어 나간다. 예민한 주둥이는 물결 모양 홈을 따라 진동을 일으키고, 알레시아인의 두개골 속에 있는 빈 공간이 그 소리를 증폭시킨다. 이렇게 하여 글쓴이의 목소리가 재현된다.

(...)

그러나 알레시아의 책이 지닌 미덕에는 대가가 따른다. 독서라는 행위를 하려면 부드럽고 연략한 기록재의 표면과 물리적으로 접촉해야 하는 탓에 읽을 때마다 본문이 손상되고, 원본의 일부 요소는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고 만다. 내구성이 더 강한 소재로 만든 사본은 당연히 글쓴이의 목소리가 지닌 섬세함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기피된다.

자신들의 문자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알레시아인은 가장 소중한 원고들을 금단의 도서관에 엄중히 보관하는데, 이곳의 출입 허가를 받은 이는 거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레시아인 작가가 쓴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은 거의 읽히지 않는다. 다만 특별한 의식에서 낭독된 원본을 필경사들이 듣고 해석해서 재구성한 새 책을 통해 알려질 뿐이다.(196-197p)

 

 

루스에게는 부탁할 곳도 의지할 곳도 기댈 곳도 없다. 오로지 자신뿐, 성난, 겁에 질린, 부들부들 떠는 자신뿐이다. 루스는 발가벗겨진 채 혼자이다. 루스 자신은 항상 알고 있었듯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regular) 세상의 모습이다. 명쾌함도, 구원도 없다. 모든 합리성의 끝에는 그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과 품고 살아가야 할, 그러면서 견뎌야 할 믿음뿐이다.(305p)

 

 

우리가 현재에 존재하는 과거의 목소리에 어떤 역할을 부여할지는,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렸습니다.(487p)

 

 

한 명의 중국인으로서 저는 개인화된 역사관을 철저히 신봉했던 에번에게 찬성하지 않습니다. 에번이 하려 했던 것처럼 모든 희생자의 개별 사연을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식으로는 결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거대한 고통 앞에서 우리의 공감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저는 에번의 접근법이 결국에는 감상주의와 선별적 기억에 그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침략 때문에 중국에서는 16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희생당했습니다. 그 중 절대다수는 신문 일면을 차지하고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핑팡 같은 살육 공장이나 난징 같은 학살 현장에서 희생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수없이 많은 조용한 마을과 도시와 외딴 벽지에서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중국인들을 학살당하고 강간당하고 또 학살당했습니다. 그들의 비명은 차가운 바람 속에 흩어져 사라졌고, 결국에는 이름조차 지워져 잊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기억될 자격은 있습니다.

모든 잔학 행위의 희생자들이 안네 프랑크처럼 유창한 대변인을 얻기란 불가능하거니와, 저는 역사 전체를 그러한 서사의 집합으로 축소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에번은 풀 수 없는 방대한 문제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느니 풀 수 있는 문제에 먼저 매달리는 것이 미국인이라고 제게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527-528p)

 

 

어떠한 국가도 어떠한 역사학자도, 진실의 모든 측면을 완전히 아우르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실에서 동떨어졌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지구는 완전한 구체도 아니고 평평한 원반도 아니지만, 진실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은 구체 모형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우며, 우리는 언제나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완전하고 완벽한 지식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악을 심판하고 악에 맞서야 할 우리의 도덕적 의무를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538p)

 

 

역사라는 급류 속에서 태어나는 이상 우리가 할 일은 헤엄치는 것 아니면 가라앉는 것뿐, 운이 없다고 불평하는 건 우리 몫이 아니니까요.(555p)

 

 

 

ㅡ 켄 리우, <종이 동물원> 中,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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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7

 

 

행복의 HOW를 다루는 책을 무시하나 WHY를 안다고 더 행복해지는 건 아닐 것이다. 행복을 진화론에 따라 설명했다는 게 그나마 이 책의 유일한 미덕이다. 잘 썼다는 말은 아니고.

드는 사례나 비유가 진짜 별로였다. 잘못된 비유나 예는 오히려 주장을 모호하게 만들고 헷갈리게 한다. 비유나 예시는 함부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왜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행복해지기 어려운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행복은 사람 안에서 만들어지는 복잡한 경험이고, 생각은 그의 특성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뜻대로 쉽게 바뀌지도 않지만, 변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전체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16p)

 

 

시간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생각보다 빨리 지운다.

감정의 또 다른 특성은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

극단적인 경험을 한 번 겪으면, 감정이 반응하는 기준선이 변해 그 후 어지간한 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110p)

 

 

지금까지의 연구 자료들을 보며 행복한 사람들은 이런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

행복은 복권 같은 큰 사건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초콜릿 같은 소소한 즐거움의 가랑비에 젖는 것이다. 살면서 인생을 뒤집을 만한 드라마틱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혹시 생겨도 초기의 기쁨은 복잡한 장기적 후유증들에 의해 상쇄되어 사라진다.(111-113p)

 

 

(...)

이 현상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적응’이라는 녀석이 지목되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이 남아 있다. 적응이라는 범인은 잡았는데, 그의 정확한 범행 동기(?)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은 왜 그토록 빨리 소멸될까?

(...)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은, 이런 생존 행위는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늘 아무리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어도, 살기 위해서는 내일 또 사냥을 해야 한다.

사냥에 대한 의욕이 다시 생기기 위한 필요조건이 있다. 오늘 고기를 씹으며 느낀 쾌감이 곧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쾌감 수준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이런 ‘초기화reset’과정이 있어야만 그 쾌감을 유발시킨 그 무엇(고기)을 다시 찾는다.(121-122p)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긍정성 또한 행복한 사람들이 이미 갖고 있는 증상인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어느 정도 ‘이미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상당 부분 타고난 기질이다.(137p)

 

 

한 조건에서는 참가자들이 언급한 일(여행)을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즐거운 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다른 조건에서는 남들도 마찬가지로 여행은 아주 즐거운 경험이라 생각한다고 말해주었다. 시간이 흐른 뒤, 참가자들에게 그 여행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다시 한 번 평가하도록 했다.

예상했던 문화 차가 나타났다. 미국 참가자들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 하든 여행에 대한 원래의 자기 느낌을 고수했다. “내가 즐거웠다는데, 무슨 상관.”

반면 한국 참가자들은 흔들렸다. 자기 경험이 남들이 볼 때는 별게 아니라는 피드백을 받은 참가자들은 여행이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즐겁지 않다고 느꼈다. “나만 좋다고?” 왠지 뭔가 착각한 것 같아 뻘쭘해진다. 과도한 타인 의식에서 나오는 혼란이다.(170-171p)

 

 

ㅡ 서은국, <행복의 기원> 中,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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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

 

 

이곳이 처음이시죠? 글쎄, 그러니까 전혀 이상할 게 없어요. 여기 지붕 구조물에 햇볕이 내리쬐면 뜨거워진 나무가 실내 공기를 아주 후텁지근하고 답답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여기는 사물실로 쓰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아요. 물론 그것 말고는 몇 가지 장점도 있어요. 하지만 공기에 관해 말하자면, 소송 당사자들의 왕래가 많은 날은 거의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인데, 거의 매일이 그런 날이지요. 게다가 또 이곳에는 여러 세탁물을 말리려고 널어놓는데, 세입자들에게 그걸 전혀 못 하게 할 수도 없는 일이거든요. 속이 좀 메스꺼워도 이젠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게 되니까요.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이런 공기에 익숙해져요. 두세번쯤 오시게 되면 더 이상 이곳에서 짓누르는 느낌은 받지 않을 거예요. 이제 좀 나아지셨어요?(93p)

 

 

(...) 그래서 첫 청원서를 작성할 때 무엇을 겨냥하고 써야 할지 보통 모르거나 정확히 알 수가 없으며, 따라서 첫 청원서가 소송에 뭔가 의미 있는 내용을 담는 경우는 사실 우연에 불과하다. 정말 실효성이 있는 논거를 갖춘 청원서는, 피고인에 대한 심문 과정에서 개개의 공소 사실과 그 근거 제시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거나 추측이 가능할 때 비로소 작성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변호는 당연히 매우 불리하고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이것도 다 의도된 것이다. 변호는 사실 법률에 의해 허용되지 않으며, 묵인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당 법조문이 적어도 묵인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법원의 인정을 받는 공인 변호사라는 것은 없으며, 법정에서 변호사라고 등장하는 자들은 사실 모두 무면허 변호사에 불과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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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오직 정직한 개인적 관계, 특히 고위 관리들과의 연줄인데, 물론 여기서는 하급 법원의 고위 관리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만 소송의 진행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 영향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갈수록 더 뚜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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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서열과 직급 체계는 끝이 없어서 그 세계에 정통한 사람들조차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법정에서의 재판 과정은 일반적으로 하급 관리들에게도 비밀이며,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사건의 향후 추이를 완전히 파악할 수가 없고, 따라서 재판 사건은 대부분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른 채 그들의 시야에 나타났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런즉 개별적인 소송 단계들, 최종적인 결정, 그리고 그런 결정의 근거들을 연구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 같은 것이 하급 관리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142-147p)

 

 

이 거대한 법원 조직은 말하자면 영원한 부유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자신의 위치에서 독자적으로 무언가를 바꿔버리면, 그것은 자기 발아래에 있는 지반을 없애는 행위와 같아서 자신만 추락하게 될 뿐이고, 그 거대한 조직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소한 장애는 다른 곳에서 손쉽게 보완하여 이전과 다름없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조직은 전보다 더 단호하고, 더 주의 깊고, 더 엄격하고, 더 악의적이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

여러 가지 면에서 관리들은 어린아이 같다고 한다. 관리들은 종종 악의 없는 일에도 마음 상하기 일쑤인데, 유감스럽게도 K의 태도는 물론 그 범주에도 속하지 않지만, 아무튼 쉽게 마음이 상해서 가까운 친구들하고도 말을 안하고 그 친구들을 우연히 만나도 외면하며 가능한 한 모든 일에서 친구들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의외로, 또 별다른 이유도 없이, 워낙 절망적인 상황에서 상대방이 아무렇게나 던져보는 대수롭지도 않은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마음을 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쉬운 일이기도 한데, 거기에 무슨 원칙 같은 건 없다. 가끔은, 여기서 성공적으로 일을 해나가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고 했다. 물론 누구나 그렇듯이 우울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성취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결말이 좋은 소송은 하나같이 처음부터 특별히 손을 쓰지 않았어도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예정돼 있던 것들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다. 반면에 다른 모든 소송들은 백방으로 쫓아다니고 온갖 애를 다 써서 작가는 해도 겉보기에는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 것 같아 기뻐했지만 결국 패소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확실해 보이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게 된다.(148-150p)

 

 

소송에 대해 이전에 품었던 경멸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 혼자 사는 것이라면 소송 같은 건 가볍게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라면 소송 같은 건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숙부가 벌써 그를 변호사에게 끌고 왔으며, 집안과 가족들도 고려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의 직위 또한 소송 진행 상황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었다. 조심성 없게도 그 스스로가 몇 명의 지인들 앞에서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만족감을 느끼며 소송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고,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소송에 대해 알게 되었다. 뷔르스트너 양과의 관계도 소송에 따라 흔들리는 것 같았다. 요컨대 그에게는 소송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소송의 한복판에 서서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그가 지쳐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154-155p)

 

 

“그런데 이 두번째 무죄 판결도 최종적인 건 아니겠군요.” K가 냉담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물론 아닙니다.” 화가가 말했다. “두번째 죄 판결에 이어 세번째 체포가 따르고, 세번째 무죄 판결 다음에는 네번째 체포가 이어지며 계속 그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이라는 개념에는 바로 그런 것들이 포함됩니다.” K는 잠시 침묵했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이 당신한테는 별로 유리해 보이지 않는군요.” 화가가 말했다. “아마도 당신에게는 판결 지연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판결 지연이란 소송이 가장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도록 잡아두는 걸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피고인과 조력자, 이중에서도 특히 조력자가 법원과 끊임없이 사적인 접촉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경우에는 외견상의 무죄 판결을 얻어낼 때만큼 노력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주의력이 훨씬 더 필요합니다. 소송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그리고 특별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담당 판사를 찾아가 어떤 식으로든 호감을 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담당 판사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할 때는 잘 아는 판사를 통해 영향을 주어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 직접 상담에 나서는 것도 아예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점들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소송이 그 첫 단계를 넘어서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자신 있게 가정할 수 있습니다. 소송이 끝나는 건 아니지만, 피고인은 유죄 판결을 받을 염려가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신분이 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에 비해 판결 지연은 피고인의 미래가 덜 불안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피고인은 갑작스러운 체포로 놀라게 되는 일도 없고, 또한 가령 여타 상황이 아주 좋지 않을 때 하필 소송 관련 일이 겹쳐 외견상의 무죄 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겪어야 할 긴장이나 흥분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판결 지연도 피고인의 입장에서 보면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단점들이 있습니다. 피고인이 결코 자유로운 몸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의 경우에도 피고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몸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다른 종류의 단점입니다. 소송은 적어도 그럴듯한 이유가 없는 한 가만히 멈춰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볼 때 소송에서 무슨 일이든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이런저런 지시들이 내려져야 하고, 피고인은 심문을 받아야 하며, 심리가 행해지고, 그 밖의 또 다른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소송은 인위적으로 제한해놓은 작은 범위 내에서 계속 맴돌아야 합니다.(197-198p)

 

 

 

ㅡ 프란츠 카프카, <소송>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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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7

 

실린 작품 중 표제작과 스펙트럼이 가장 좋았다. 요즘 책도 많이 읽지 않고 있고 그나마 읽는 책도 비교적 호흡이 긴 작품이라서 독서가 지지부진했는데 앉은 자리에서 한달음에 읽었다. 분량은 300p가 넘지만 자간과 여백이 넓어서 그런 것이고 열린책들 느낌으로 편집했으면 200p초반 정도였을 듯. 그리고 읽기 싫었겠지. 

독서 모임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에게 가장 도움이 건 강제성이다. 특히 읽으려고 찜해뒀지만 계속 미루고 읽지 않은 책을 모임원이 골라주면 그렇게나 고맙고 반가울 수가 없다. 자발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이 책 역시 그랬다. 작년에 화제가 되었을 때부터 읽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최근에는 심지어 빌려놓기까지 했지만 역시나 방치하고 있다가 좋은 기회ㅡ강제성ㅡ를 통해 읽을 수 있었다. 모임원에 고마움을 전한다. 

 

 

‘스펙트럼’은 흔한 주제일 수도 있지만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무엇을 내 능력 밖이라고 쉬이 놓아버리거나 포기하는 대신 어떻게든 이해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조금은 감동적이기도 했다.

'나의 우주적 영웅에 관하여‘의 한 대목은 소수자가 처한 현실을 잘 짚었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본 ’우먼 인 할리우드‘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나오는데 남자들은 실패를 해도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만 여성은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래서 여자는 안 되는거야.”라는 말로 과대대표되어 필요 이상으로 비난 받고 도태된다는 말이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상황 설정이 참 재밌었다. 기술의 개발로 가족을 먼 곳에 보낼 수 있었지만 같은 이유로 가족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다는 것.

 

다음 책은 정지돈이 유튜브에서 언급했던 살라미나의 병사들.

 

 

 

 

 

“정하야, 우리 관계는 결혼의 예행연습이 아니야.”(199p)

 

 

그때 나는 문득 얼마 전 오만상을 찌푸리며 보았던 신파 영화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내 옆자리에서 세상이 무너진 듯 엉엉 울며 손수건으로 코를 닦던 한 중년 여성을 떠올렸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영화에 대한 메모를 하고 있었고, 그녀는 내 옆에서 한참이나 훌쩍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이런 억지 신파 영화에 그렇게 감동을 했을까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녀가 가방에서 영화 포스터를 꺼낸 다음 신경질적으로 구겨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 여자에게 영화의 내용은 중요했을까? 그 순간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215p)

 

 

재경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사람들은 재경을 닮은 다른 약한 사람들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래서 결함이 있는 존재를 중요한 자리에 올리면 안 된다고, 표준인간의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비난들은 분명히 재경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가 속한 집단 전부의 실패가 되는데,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렇지 않다.(308p)

 

 

우주 정거장에서 우주선을 기다리는 안나의 이야기는 ‘가짜 버스 정류장’에 대한 기사를 보고 떠올렸다. 독일에 있는 이 정류장은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데, 요양원 노인들이 시설을 나와 길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한다. 해가 저물고 노인들을 데려가는 것은 버스가 아닌 시설 직원이다.(338p)

 

 

ㅡ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中, 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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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5

 

 

루이즈의 얘기를 기다립니다 ㅎㅎ

 

 

 

대화는 언제나 똑같은 식이었다. 처음에는 정치, 그다음에는 경제와 사업 얘기를 하다가, 항상 여자 얘기로 끝났다. 그리고 모든 주제의 공통 인수는 물론 돈이었다. 정치 얘기는 결국 돈 좀 버는 게 가능하냐는 거였고, 경제 얘기는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느냐, 사업 얘기는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느냐, 그리고 여자 얘기는 그걸 어떻게 쓰느냐 하는 거였다. 이들의 모임은 참전 용사들의 술자리와 공작새들의 경연장과도 비슷했으니, 다들 한껏 과시하고 떠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133p)

 

 

 

ㅡ 피에르 르메트르, <화재의 색>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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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23

 

나오자마자 읽었는데 따로 적어둔 페이지는 없네. 이미 계약한 조지 오웰에 대한 책이나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좀 길게.

 

 

ㅡ 금정연, <담배와 영화> 中, 시간의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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