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3

 

1. 저자의 상담 기록을 보고 느낀 바는 극단적인 사고를 경계해야겠다는 것이다. 조금 부연하자면 화가 났을 때 사람에게 화를 내지 말고 그 행동 자체에 화를 내야 한다. 내가 지금 화가 난 이유는 사람자체가 싫어서라기보다는 이 사람이 한 행동이 싫은 것이고, 그는 이런 모습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를 화나게 한 행동 하나만으로 그를 싫어하는 것은 극단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니까. 다만 그와 내가 시간을 쌓아가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일 거라는 가정 하에, 그가 보여주는 수많은 모습과 행동 중 단면만 보고 확대해석 하지 말자는 정도로 이해했다. 이런 성숙한 행동을 보인다면 원만한 인간관계와 더불어 관계에서 싸움의 횟수를 대폭 줄일 수 있지 않을까.

 

2. second guess를 상황에 맞게 적당히 사용한다면 눈치가 빠른,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의심이 많고, 그렇다고 하나하나 곱씹어보는 것도 적잖이 피곤해하는 나에게 이 ‘적당히 사용하기’란 언제나 어렵다. 그 중간 어딘가를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족으로 미드 In Treatment에도 나오지만 상담의도 전문 상담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인간을 평생에 걸쳐 주기적으로 만나는 일이란 어떤 일일까? 돈 버는 일이 참 힘들다.

 

 

 

그런데 저는 생각만 열심히 해요.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으면서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죠.(67p)

 

 

과연 어떤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싫어해서’, ‘나를 좋아해서’를 대표할까요? 친구의 행동도 친구가 싫다기보다 그 친구의 행동이 싫었던 거잖아요. 지금은 상대의 어떤 행동 하나하나를 ‘거절’로 해석해서 받아들이고 있어요.

(...)

누굴 만나든 절대적인 선은 없거든요. 불만도 있을 수 있고요. 늘 부분과 전체를 구분했으면 좋겠어요. 하나가 마음에 든다고 이 사람 전체가 다 마음에 들고, 하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전체가 싫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좀 다르게 생각하는 시도를 하면 좋겠어요.(83-84p)

 

 

-저는 아주 깊이 인식하고 있어요. 그런 일에 너무 골몰하니까 작은 말도 천둥처럼 들려요. 예를 들어 제가 글쓰기 모임 때 렌즈를 빼고 안경을 썼어요. 그런데 반응이 좋은 거예요. 한 명이 “야 안경 쓰니까 귀여운데? 너 아예 안경 쓰고 다녀라”라고 말했어요. 그럼 안경 벗으면 구리다는 거잖아요.

-그래요? 이야기가 그렇게 가나요?

-극단적이죠? 아무튼, 그게 기분 나빴어요. 그리고 사진을 다 같이 찍었는데 여자 친구는 저한테 사진발이 너무 안 받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애들한테 “진짜 얘 사진발 안 받지 않아?”이랬는데 걔네가 “아니 똑같은데”이러는 거예요. 한 명은 오히려 사진발 잘 받는다고 하고요. 그래서 기분 나빴어요.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나요?

-네 저는 그 사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아, 나는 그냥 못생겼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가면 또 못생긴 게 되나요?

-저는 못생긴 게 돼요. 극단적이니까요. 죽고 싶다.(120p)

 

 

그렇게 기억을 되짚다 보니 문득 ‘그 사람 변했어’가 무용한 말이 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한결같은 사람이 된다거나, 혹은 그래주기를 바라는 게 어떤 이에게는 아주 혹독한 짐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삶이 그저 살아남는 일이 되어버릴 때, 생존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그 외의 모든 요소는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 그 상태로 시간은 무섭게 지나가고 결국 많은 것들이 메마르고 썩어버릴 때, 그런 상황에서도 한결같기를 바란다는 건 이기적인 바람이자 모순 아닐까.

이모의 삶은 이렇게 신경 써서 떠올리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이모를 덮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랬으리라고 나는 상상해본다. 자기 자신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면 주위 많은 것들에 대한 의지도 함께 사라진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관여하고 싶지 않고, 결정적으로 함께하고 싶지 않아진다. 관계에 대한 욕구를 상실하고 철저히 혼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

리베카 솔닛은 「멀고도 가까운」에서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내안에 없는 씨앗은 절대 자라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타인과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안에 없는 걸 만들어낼 방법은 상상과 공부다. 감정이입 역시 공부하고 상상해야 할 때가 있다.

(...)

내가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이입할 수 없는 감정을 배우고 상상하는 것. 그게 타인을 향한 애정이며 내 씨앗과 상대의 씨앗을 말려 죽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다.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끈을 놓지 않는 마음.(190-192p)

 

 

ㅡ 백세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中,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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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

 

 

불교에 ‘연기’라는 말이 있다. 세상일은 다 그럴 만해서 일어난다. 책임이나 업보, 누구 탓과는 조금 다른 뜻으로 이해한다. 우연과 필연의 완벽한 합치가 이루어질 때 어떤 일은 일어난다. 울고 싶기도 하고 뺨 때려주는 사람도 있고, 그저 그럴 만한 조건들이 정확한 시기에 충분히 갖추어져 나는 대사관을 그만두게 되었다.(121p)

 

 

사회 초년생들에게라고 하자면 자격이 부실하고 말이 거창하다. 내 딸들에게는,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자기를 지나치게 괴롭히지 말라고, 그건 노력이나 성실과는 좀 다르다고, 누구든 붙들고 많이 물어보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모두 이해한다고 말해주고 싶다.(122p)

 

 

아버지의 작품을 어렵다고 하면, 누구에게나 그런 말은 그렇게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니까, “내용이 어려운 내용이니 그런걸. 쉬운 걸 일부러 어렵게 쓰는 게 아닌데. 어렵고 복잡해서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읽어야 하는 글도 있는 거지 이렇게 모두 다 쉽게만 쓰라고 하나 말이다.”할 때도 있고, “그러니까, 어려운 내용도 아주 쉽게 전달할 수 있어야 그게 잘하는 건데”할 때도 있었다.(137p)

 

 

아버지는 실망했다. 실망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옳았다. 그렇지 않나. ‘화두’라는 제목. 얼마나 옳았는가. 그 옳음을 알아봐주는 ‘지기’가 가족 안에 없다는 것. 사람을 따로 즐겨 밖에서 만나지 않는 아버지로서는 외로웠을 것이다.

 

가족 중의 하나는 이제야 이 글을 쓰며 그 외로움을 늦게 짐작한다. 이십 몇 년 전에 너무나도 외로웠을 아버지가 난데없이 가여워서, 오전 아홉 시 삼십사 분에 카페 한구석에서 글을 쓰다가 주책맞게 울음이 너무 솟아서, 줄줄 흘러서,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모듬 과제를 하는 학생들이 자꾸 쳐다보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아주 그렇게 ‘항상 이상한, 미친 사람’은 아니고 그냥 지금 개인적으로 많이 슬픈 일이 있어서 그럴 뿐이라는 것을 증명할 표정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결국 그런 건 증명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는, 울음을 참기도 하면서 닦기도 하면서 그러고 있다. 미안해하고 있다.(147p)

 

 

집안일은 한 것에 대한 증인은 대체로 없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물증만 남는다.(175p)

 

 

ㅡ 최윤경, <회색인의 자장가> 中,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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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처음 30p 정도 까지가 고비. 지금까지 여자들이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며 여자들에게 돈과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저자가 방문하는 장소와 관련시켜 조금은 장황하게 늘어놓는데, 그러다보니 초반에는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번에 문장이 묘사하는 풍경과 생각의 흐름이 머릿속에 그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금만 참고 저자의 생각을 따라 흘러가는 그 문체에 점점 익숙해지고, 묵독만으로 읽는 게 아니라 입으로 문장을 되뇌며 읽다보니 크게 난해한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의미로 문체가 독창적인 이유는 아마도 저자가 살았던 당대 남성들이 사용하는 문체가 아니라 여성, 특히 자신만의 문체를 고안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물일 거라고 본다.

 

 

 

어느 성에게나 삶은 힘들고 어려운 영속적인 투쟁입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용기와 힘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같이 환상을 지닌 피조물에겐 그것은 아마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필요로 할 겁니다. 자신감이 없다면 우리는 요람에 누운 아기와 마찬가지이지요. 이 측정할 수 없이 가벼운, 그러나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질을 어떻게 해야 가장 신속하게 획득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함으로써 가능하겠지요. 자기 자신에게 다른 사람보다 천성적으로 우월한 점이 있다고 느낌으로써 가능할 겁니다. 그러므로 통치해야 하고 정복해야 할 가장에게 있어서 다수의 사람들, 사실 인류의 절반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막대한 중요성을 가질 겁니다. 그것이 실상 그의 권력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겠지요.

(...)

여성은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왔습니다. 그 마력이 없었다면 지구는 아마 지금도 늪과 정글뿐일지도 모르지요.

(...)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여성의 열등함을 아주 힘주어 강조합니다. 만일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면 거울은 남성을 확대시키기를 그만둘 테니까요.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무척 빈번히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일면 도움이 됩니다. 남성이 여성의 비판을 받고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설명해 주지요. 여성이 남성들에게 이 책은 좋지 않다거나 이 그림은 형편없다거나 그 밖의 어떤 비평을 할 때마다, 똑같이 비평하는 남성들에 의해 야기되는 것보다 더 큰 분노를 일으키고 더 큰 고통을 준다는 사실도 설명해 줍니다. 만일 여성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거울 속의 형체는 오그라들 것이고 삶에 대한 적응력도 감소될 것입니다.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에서 최소한 실제 크기의 두 배인 자기 모습을 볼 수 없다면 그가 어떻게 계속해서 판결을 내리고 원주민을 교화하며 법률을 제정하고 책을 집필하며 정장을 차려입고 연회에서 장광설을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55-57p)

 

 

여성이 남성들이 쓴 픽션에서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녀를 최고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매우 다양하며, 영웅적이거나 비열하고, 빛나거나 천박하며, 무한히 아름답거나 극단적으로 가증스럽고, 남성만큼 위대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 생각엔 남성보다 더욱 위대한 인물이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픽션에 나타난 여성입니다. 실제로는 트리벨리언 교수가 지적하듯이 방에 갇혀 구타당하고 내동댕이쳐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주 기묘하고 복합적인 존재가 생겨납니다. 상상에 있어서 여성은 더없이 중요한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하찮은 존재입니다. 시에서는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성의 존재가 고루 퍼져 있지만, 역사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픽션에서 그녀는 왕과 정복자들의 삶을 지배하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손가락에 강제로 반지를 끼워준 어느 부모의 아들에 딸린 노예였습니다. 문학에서는 영감이 풍부한 말들, 심오한 생각들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녀는 거의 읽을 줄 모르고 철자법도 모르며 남편의 재산에 불과했습니다.(67-68p)

 

 

우선 조용한 방이나 방음장치가 된 방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갖는다는 것은 그녀의 부모가 보기 드문 부자이거나 대단한 귀족이 아니라면 19세기 초까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아버지의 아량에 달려 있던 용돈은 옷을 사 입는 데나 족할 정도였으므로 그녀는 키츠나 테니슨, 칼라일처럼 가난한 남성들에게도 허용되었던 도보 여행이나 짧은 프랑스 여행, 누추한 곳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가족의 압제와 권리 주장으로부터 보호해 줄 독립된 숙소 등 그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그런 물질적 곤경도 만만치 않았지만 비물질적 시련은 더욱 가혹했습니다. 키츠와 플로베르와 그 밖의 천재적인 남성들이 몹시 견디기 힘들어했던 세상의 무관심이 그녀에게는 무관심 정도가 아니라 적대감이었습니다. 세상은 남자들에게 말하듯이 “네가 원한다면 써라. 내게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글을 쓴다고? 네가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라고 말하지요.(81-82p)

 

 

그러나 거의 예외 없이 여성은 남성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만 제시됩니다. 제인 오스틴의 시대까지 픽션의 모든 위대한 여성들이 다른 성의 눈으로 보였을 뿐 아니라 다른 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보였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남성과의 관계는 여성의 삶에서 아주 자그마한 부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데 말이지요.

(...)

아마도 이런 이유로 픽션의 여성들은 특이한 성격으로 나타나겠지요. 놀랄 만큼 극단적으로아름답거나 극단적으로 혐오스러운 존재이고, 천사 같은 선함과 악마 같은 사악함 사이에서 동요합니다. 한 남성이 자신의 사랑이 상승하는가 침체하는가에 따라서, 또는 순조로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여성을 보기 때문이지요.(126-127p)

 

 

예를 들어 남성이 문학에서 오로지 여성의 애인으로만 묘사되고, 다른 남성의 친구 또는 군인, 사상가, 공상가로 제시되는 일이 전혀 없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역할이 얼마나 적고, 문학은 얼마나 극심한 손상을 입었을까요! 아마 오셀로 같은 인물이 대부분이고 안토니 같은 인물도 상당수 있었겠지만 시저나 브루투스, 햄릿, 리어, 자크는 없었을 것이며, 문학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해졌을 겁니다. 여성에게 닫힌 문 때문에 실제로 문학이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해진 것처럼 말이지요.(128p)

 

 

남성은 응접실이나 아이 방의 문을 열고 여성이 아이들 가운데 있거나 무릎 위에 수놓을 천을 올려놓고 앉아 있는 것을ㅡ어느 경우이건, 삶의 다른 질서와 다른 체계의 중심으로서 그녀를ㅡ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계와 법정이나 하원 같은 그 자신의 세계의 대조로 인해서 이내 그의 심신은 상쾌해지고 활력을 찾게 될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대화에서도 자연스러운 견해의 차이가 드러날 것이며 따라서 그의 고갈된 생각들은 다시 풍부해지겠지요. 그녀가 그와는 다른 매개체를 통하여 창조하는 광경을 봄으로써 그의 창조력은 되살아나고, 그의 메마른 마음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무엇인가를 다시 도모하게 될 것이며, 그녀를 방문하려고 모자를 썼을 때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던 어구나 정경을 발견할 것입니다. 존슨 같은 이에게는 트레일 같은 여성이 있었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입니다.(132-133p)

 

 

나는 그 책을 펼쳤습니다. 남성의 글을 다시 읽는 것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여성의 길을 읽은 후에 그것을 읽자 아주 직선적이고 대단히 솔직하게 느껴졌지요. 그 글은 마음의 자유와 일신의 자유분방함, 스스로에 대한 커다란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

그러나 한두 장을 읽고 나자 어떤 그림자가 책장을 가로질러 드리워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곧고 검은 막대기로 'I'자 모양의 그림자였지요.

(...)이 'I'가 더할 나위 없이 존경할 만한 'I'이고, 정직하고 논리적이며, 견과처럼 단단하고, 몇 세기 동안의 훌륭한 교육과 질 좋은 영양 공급으로 다듬어졌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 'I'를 존경하고 경탄합니다. 그러나 가장 곤혹스러운 점은 그 'I'라는 글자의 그림자 속에서 모든 것의 형체가 안개처럼 사라졌다는 것입니다.(150-151p)

 

 

“지난 백 년 동안의 위대한 시인들은 누구인가? 콜리지, 워즈워스, 바이런, 셸리, 랜더, 키츠, 테니슨, 브라우닝, 아널드, 모리스, 로제티, 스윈번ㅡ여기서 멈춰도 될 것이다. 이들 중에서 키츠와 브라우닝, 로제티를 제외하곤 모두 대학 출신이며, 이들 세 명 중 한창 젊은 나이에 목숨을 빼앗긴 키츠만이 유복하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야만적이며 서글픈 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로서, 시적 재능이 내키는 대로 바람처럼 불어 가서 빈자에게나 부자에게 똑같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거의 진실성이 없다. 엄연한 사실로서, 이 열두 명 중에서 아홉 명이 대학 출신이었고, 이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건 영국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엄연한 사실로서, 나머지 세 명 중에서 브라우닝은 알다시피 유복했다. 만약 그가 유복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사울」이나 「반지와 책」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러스킨도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지 못했더라면 「현대 화가들」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로제티는 적지만 개인 수입이 있었으며, 게다가 그는 그림을 그렸다. 그중에 키츠만 남게 되는데 운명의 여신은 그가 젊을 때 그를 살해했다. 정신병원에서 죽은 존 클레어나 낙심한 마음을 잠재우려고 상용한 아편으로 살해된 제임스 톰슨처럼 말이다. 이런 것들이 끔찍한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을 직시하기로 하자. 영국의 어떤 결함으로 인해서 요즈음뿐 아니라 과거 이백 년 동안에도 가난한 시인들은 아주 작은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는 것ㅡ한 국민으로서 우리에게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일이긴 하지만ㅡ은 명백한 사실이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입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지만, 실제로 영국의 가난한 집 아이들은 위대한 작품을 산출하는 지적 자유로 해방될 희망이 아테네 노예의 아들만큼이나 없는 것이다.”(162p)

 

 

ㅡ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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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그 사람하고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아.”

“뭐?”

“그게, 그러니까 엄마 말은, 그 사람하고 결혼해도 되지만 안 해도 상관없다는 거지.” 엄마는 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저녁으로 샌드위치든 수프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툭 던졌다.

“엄마 지금 그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야?” 내가 물었다.

“아니, 그 사람은 좋아. 괜찮아.” 엄마가 말했다. “다만 곰곰 생각하다보니까, 결혼식을 취소하는 것도 강행하는 것만큼이나 별 거 아니라는 걸 너한테 얘기해주고 싶었어.”(33-34p)

 

 

“어허이.” 그가 말했다. “몇 달 동안 나한테 꼬리쳤잖아. 아니라고 하지 마.”

“소가 웃을 소리!”

“여자가 나한테 꼬리칠 때를 난 놓치지 않아. 난 그쪽으론 보통 틀리는 법이 없어.”(49p)

 

 

누가 ‘짐작한 그런 일이 아니다’라고 할 때는 거의 틀림없이 짐작한 바로 그 일이다.(64-65p)

 

 

“아니지, 엄마는 머리가 잘 돌아가니까 절대 ‘뚱뚱’하다는 말은 안 해ㅡ내 체중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뿐이지. 바른 먹거리를 먹었는지, 물은 마셨는지 확인하고. 원피스 몇 벌이 좀 조이는 것 같다고 지나가듯 말하고.”

(...)

“엄마가 맨날 자기 몸매에 신경쓴다고 해서, 어마가 디저트는 절대 세 입 이상 안 먹는다고 해서, 엄마가 미친 사람처럼 운동한다고 해서, 내가 엄마랑 똑같이 생각하거나 행동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67-68p)

 

 

“딴건 다 못해도 자식 하나만은 똑소리나게 키운 줄 알았는데.”(81p)

 

 

“너는 아비바를 너무 친구처럼 대했어. 부모 노릇은 못하고.”(95p)

 

 

그 남자는 집단 괴롭힘에 반대한답시고 미사여구(포괄성, 안전 환경, 불관용)를 늘어놓지만, 내 단언하는데 실제로 그는 모든 게 다 루비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끔 루비가 좀 조심만 하면 모두가 편할 텐데요.(136p)

 

 

“그거 알아요? 남자의 구십 퍼센트가ㅡ사람의 구십 퍼센트인가? 기억이 안 난다ㅡ마주 걸어올 때 길을 비키지 않는대요.”(142p)

 

 

사람들은 종종 결혼식까지 가는 몇 달의 여정 동안 최악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가끔 그 최악의 모습이 본모습인 경우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바로 그런 경우라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이르기 전까진 알기 어렵다.

(...)

“물어볼 수도 있고, 말해줄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건 남의 사정이야. 네가 알 권리가 있는 과거는 오로지 너 자신의 과거뿐이야.”(148-149p)

 

 

“하지만 내가 웨스에 관해 틀렸다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겠죠.” 프래니가 말했다.

“안 그래요.” 내가 말했다. “만약 당신이 실수한 거라고 해도 돌에 맞아죽지 않아요. 당신 가슴에 주홍글씨로 ‘이혼녀’라고 새길 리도 없고요. 당신은 21세기에 살고 있어요. 변호사를 불러서 당신이 왔던 그대로 싸들고ㅡ아니면 뱉어내고ㅡ나오면 되고, 원래 쓰던 성으로 되돌리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로 시작해도 돼요.”(158p)

 

 

“과거는 과거일 뿐이지.”

과거는 절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바보들만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162p)

 

“오늘 파티에 올 수 있어?” 엠베스가 물었다.

“네, 당연히 가야죠, 레빈 부인. 빠질 순 없죠! 제가 직접 드레스를 만들었어요. 상의는 빨간 코르셋이고 하의는 검정 후프 스커트예요, 그리고 앙증맞은 검정 레이스 반장갑을 낄 거고요, 머리는 하나로 묶어 틀어올리고 조그만 베일을 쓸 거예요. 굉장히 드라마틱하겠죠.”

“그런 것 같네. 내 장례식 때도 그렇게 입고 오면 되겠다.”(234p)

 

 

운전사는 백미러로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 “그래서 아는 얼굴 같다고 한 건 아니고. 이혼한 아내의 언니하고 닮았네. 성질은 개같았지만 침대에선 끝내줬지.(280p)

 

 

당신은 절대 그와 싸우지 않는데, 왜냐면 당신도 알다시피ㅡ당신의 마음 한구석은 알고 있다ㅡ만약 당신이 뭐라도 하나 큰소리를 내면 그는 당신과의 관계를 끝낼 것이다. 당신은 힘이 없고, 모든 힘과 권한은 그에게 있다. 그래서 때때로 당신은 절망한다. 하지만 당신이 그에게 키스했다. 그건 당신의 권한이었다, 안 그런가?(327p)

 

 

다들 매트리스에 매달린 여자를 그렇게 사랑하면서(미워하면서), 아무도 폭풍우에는 관심이 없어 보여 참 희한하다고, 당신은 생각한다.(350p)

 

 

어릴 때 좋아하던 <끝없는 게임> 시리즈를 읽는다. 당신은 더 이상 그 책의 타깃 연령층이 아니지만, 그해 여름 당신은 그 게임북에 완전히 빠져든다. 게임북을 보면 당신은 각 장면의 말미에서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고, 그 선택에 해당하는 페이지로 넘어간다. 이 얼마나 인생과 흡사한가.

다만 <끝없는 게임>에서는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다른 결말을 알고 싶다면 뒤로 다시 돌아가서 다른 것을 선택하면 된다. 당신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불가능하다. 삶은 가차없이 앞으로만 흘러간다. 다음 쪽으로 넘어가든가 그만 읽든가 둘 중 하나다. 읽기를 그만두면, 이야기는 끝난다.(359p)

 

 

 

ㅡ 개브리얼 제빈, <비바, 제인> 中, 루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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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3

 

 

모네는 빛이 있어야 자연을 볼 수 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마치 이런 것이죠.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에 비친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사물이 지닌 고유의 색은 없다. 사물의 색은 ‘빛’에 의해 변하는 것이다. 사물이 지닌 고유의 형은 없다. 사물의 형은 ‘빛’에 의해 변하는 것이다.’(209p)

 

 

ㅡ 조원재, <방구석 미술관> 中, 블랙피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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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6

 

 

아이들의 즐길 거리가 크게 많지 않았던 19세기 후반에는 아이들을 매혹시킨 이야기였겠지만, 흥미 거리가 넘쳐나는 21세기에 다른 걸 제쳐두고 우선 순위에 넣을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릴 때 읽은 책이 아니라서 어린이가 읽은 감상은 또 어떨지 궁금하지만, 보물섬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 등을 알고자 문학을 공부하는 성인 독자가 아니라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매일이 비슷하게 지겹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지라 모험과 보물이라는 낭만적인 말을 들으니 설레는 감정이 들기는 해서 어렸을 적 즐겼던 각종 모험을 다룬 만화와 영화 등이 떠오르긴 했다. 우연에 많이 기대는 책.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요. 럼주 한 잔 마신다고 죽지는 않소. 하지만 당신은 한 잔을 마시면, 또 한 잔 그리고 또 한 잔을 마시게 되오.(38p)

 

 

“그 모두가 바로 이런 조급함, 조금함, 조급함 때문이야. 내 말 알아들어? 그래도 내가 바다에서 한두 가지는 본 사람이야. 내가 말이야. 너희들이 지금 정해진 방향대로 전진하기만 하면, 그리고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한 포인트 돌리기만 하면, 너희들은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어. 너희들이 말이야. 하지만 너희들은 안 돼! 나는 너희들을 알아. 너희들은 내일이면 입안 가득 럼주를 들이부을 거고, 그래서 결국은 목이 매달릴 거야.”(147p)

 

 

 

ㅡ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보물섬> 中,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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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6

 

영화제 중간 대기 시간에 읽음. 무언가를 표현해야 할 때, ‘좋았다’와 ‘감동적이었다’와 같이 뭉뚱그리지 말고 내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 또 크게 생각해보지 않고 사용하던 말이나 언어습관도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

 

 

내가 아는 대부분의 무시는 거절에서 왔다. 누군가 내게 no라고 말했을 때, 닫힌 문 앞에서 순순히 물러나지 못하고 ‘내가 어디서 어때서?’라고 자존심을 황급히 꺼내 들이밀게 되던 때가 바로 무시의 순간이었다. ‘쟤가 지금 나 무시하나?’라는 생각이, 감정이, 그 둘이 뒤섞인 무언가가 머릿속을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는, 반드시 내 안의 목소리만은 아닌, 밖에서 나를 평가하는 눈을 두려워하는 마음.

누군가의 언행이나 표정, 몸짓, 혹은 태도가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고 느끼거나, 거절당한 기분이 들게 하거나, 무안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던 일들이 있었다. 그럴 때 “너의 이런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았어.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혹은 속으로라도 ‘아니야, 네가 알 필요는 없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꼭 지금 처리해야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네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으면 좋겠어. 혹 일부러 그랬다고 해도 네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게 내 문제는 아니야. 그건 나에 대한 네 태도의 문제고, 나는 이게 나를 괴롭히도록 두지 않을 거야’라고 정리할 수 있었더라면, 평온해 보이는 세상에서 나 혼자 괴로웠던 일이 많이 줄었을 것이다.(67-68p)

 

 

우리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기대하는 것은 ‘효용으로 환산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이고 이것을 감동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놓은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어떤 형태로든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아무리 비극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도, 더 생각해볼 만한 미진한 감정을 남긴다 해도 그걸 전부 “참 감동적이었다”라는 한마디로 깃털처럼 상쾌하게 정리하는 인식의 습관은 어쩌다 만들어진 것일까?

 

같은 사건을 목격해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각각 다를 수 있다. 하물며 어떻게 느끼는가는 당연히 모두 다를 것이다. 감동은 여러 감정을 아우르고 한데 묶어주면서 ‘여기에 뭔가 네가 좋아할 만한 것이 있다’는 강력한 표지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유용한 언어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감동했다고, 어떤 사건이 감동적이었다고, 그래서 참 ‘좋았다’고 느낄 때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면 사실 그 감정은 그냥 감동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했어야 할 감사와 사랑의 말을 대강 암호화한 것일 수도 있고 스크린 앞에서 다들 울기에 따라 울었을 뿐 내가 뭘 느꼈는지 확신하지 못한 와중에 한 ‘아무 말’일 수도 있다.(77-78p)

 

 

현상에 이름이 붙고 진단이 따르고, 그 언어를 통해 바깥과 연결되는 경험은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을 때, 나조차 나를 돕는 데 관심이 없을 때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하는 일은 아주 작은 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외부의 말로 붙은 이름을 배우는 것, 그 이름을 통해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아는 것.(106p)

 

 

억울이 얼마나 침습적인 감정이냐 하면, 우리는 이제 남이 억울한 것에도 민감해졌다. 특히 나보다 지위가 낮은 누군가가 나의 행동에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으면 “뭐가 억울해?”라며 방어적으로 반격한다. 아동이 부정적인 감정을 호소하거나 항의하는 데 대한 일종의 벌이자 수동 공격으로서 이 ‘억울’은 효과적으로 굴절한다. 상대의 입을 막아버린다.(112p)

 

 

나는 어릴 때 “한은 한국인 고유의 정서이며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무엇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것으로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부정적인 감정의 거대한 덩어리를 귀신처럼 모시고 자랑스러워하면서 개개인이 건강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113p)

 

 

우리에게 이제 “뭘 잘했다고 울어”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 내가 외부 세계와 주고받는 신호는 좀 더 분명해진다. 나에게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를 신호가 들어왔을 때 그 발화가 어떻게 번역될 수 있을지, 번역할 수 있다면 해당 상황에 재조립했을 때도 여전히 한국어처럼 잘 버티고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이다.(137p)

 

 

그 많은 한국어의 색상 이름은 대개는 정말 색상표에 올릴 수 있을 만한, 명료하게 구분되는 색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응당 이런 색이어야 하는 것이 무언가 다른 톤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언급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사용할 뿐이지 레몬색과 황금색처럼 서로 동등하게 다른 것이 아니었다.

(...)

대상에 대한 감정을 담지 않고도 누리끼리한 가을 논밭, 누리끼리한 강아지 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현대 한국어에서 누리끼리가 지칭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노란색’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산뜻하게 노란 톤의 봄옷을 차려 입고 나갔는데 누가 “노란색 옷을 입었구나!”라고 하지 않고 “누리끼리한 옷을 입었네”라고 하면 기분이 상한다. 언어 안에 감정과 판단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무언가를 보고 노랗거나 까맣거나 희다고 하지 않고 누리끼리하다거나 거무죽죽하다거나 허여멀겋다고 하면, 그것은 단지 색상을 다르게 지칭한 것이 아니라 평가한 것이 된다. 우리 언어는 색상 이름 안에도 주관적인 판단을 숨겨놓았다.(140-141p)

 

 

척추에 힘을 주고 꼿꼿이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도 체육 선생님은 가끔 “똑바로 해라, 똑바로”라며 으름장을 놓고 어슬렁거리며 사라졌다. ‘똑바로’라는 것은 내가 아무리 온몸을 긴장시키고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몸을 바로 세웠다고 확신해도 보는 사람이 마음이 들지 않으면 똑바르지 않은 것이었다. 똑바로 선 건지 확인하려는 시선이 나에게 와서 멎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댔다. 발을 모으고, 척추를 곧게 세우고, 팔은 가지런히 옆구리에 붙여 떨어뜨리고 가슴을 내밀고 고개는 치켜들고 시선은 정면을 향하는 것이 똑바로 서기의 정의였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았다. 똑바로 선 자세의 정의는 지시하는 사람에 따라, 혹은 지시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달라졌다.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리고 서라거나 손은 주먹을 쥐지 않아도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매번 설명해주면 좋을 텐데 나에게 똑바로 서라는 주문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자세를 고칠 때마다 더욱 고조되는 긴장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

그들은 정말 내가 바로 서기를 원하기는 했을까? 아니었던 것 같다. 똑바로 서라는 지시는 나에게 혼란과 좌절을 가져다주는, 일종의 정신적 구금을 알리는 구호에 불과했다. 내 몸의 통제권이 나에게 없음을 확인시키는 한마디였다. 지금 이 얘기를 그때 그 어른들이 들으면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항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역시 지시를 내리는 사람조차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반증일 뿐이다. 6개월 전쯤 가르친 ‘차렷’을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 혹은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말과 동작의 일대일 대응은 진작에 물 건너간 얘기. 희미한 적대감과 번개같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위계의 확인만이 남았다.(176-178p)

 

 

시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없는 우리가 가끔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를 엿보는 일이 귀신과 외계인을 목격하는 거라면, 다른 세계관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초월적인 영역일 것이다.(182p)

 

 

ㅡ 허새로미,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中,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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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

 

 

주의, 기억, 확률 등을 통해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리해야 하는지, 기억의 효용을 위한 외부 소싱의 필요성, 확률 이해를 바탕으로 정확한 의사결정이 필요함을 알려준다. 맞다. 어디서 다 한번쯤 들어본 얘기고 실제로 우리가 이론적인 배경이 없이도 많이 사용하는 전략들이다. 굉장히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다 늘어놓아서 적당히 스킵하며 읽었다. 뭐 너무나 유명한 사례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주의 필터의 가장 중요한 원칙 두 가지는 바로 ‘변화’와 ‘중요도’다. 뇌는 정교한 변화탐지기다.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도로가 울퉁불퉁한 것이 느껴지면 뇌는 이 변화를 즉각적으로 알아채고서 주의 시스템에 이 변화에 집중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

뇌의 변화 감지기는 당신이 알게 모르게 항상 작동하고 있다. 가까운 친구나 친척과 전화를 하는데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다르게 느껴지면 당신은 감기라도 걸린 게 아니냐고 물어보게 된다. 뇌가 변화를 감지하면 이 정보를 의식으로 보내지만, 변화가 없을 때는 명쾌한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 친구가 전화를 했는데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없으면 당신은 ‘아, 평소와 목소리가 똑같군’라는 생각을 바로 떠올리진 않는다. 이것 역시 주의 필터가 제 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필터가 하는 일은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지 불변성을 감지하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 원칙인 ‘중요도’도 정보를 통과시켜 의식에 올려 보낸다. 여기서 중요하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기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중요한 것을 의미한다.

(...)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주의력은 그 용량에 한계가 있는 자원이다. 우리가 동시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대상은 그 개수가 분명하게 제한되어 있다.(38-40p)

 

 

“기억은 믿을 게 못 돼. 훈련받지 않은 두뇌는 파일 시스템이 아주 거지 같거든. 이 시스템은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시커멓고 커다란 벽장에 닥치는 대로 쑤셔 넣어두지. 뭐 좀 찾을 게 있어서 그 안을 뒤져보면 굵직굵직한 뻔한 것들만 눈에 들어오지. 어머니의 기일이나, ‘코파카바나’같이 네가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들 말이야. 그러나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을 못 찾았다 해도 겁먹을 필요는 없어. 여전히 거기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 말이야.(92p)

 

 

일단 우리가 이 뉴런 하나하나를 처음 사건이 일어났을 때와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활성화시킬 수만 있다면 기억이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고 현실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은 불완전하다. 어떤 뉴런들을 끌어들여서 정확히 어떻게 흥분시켜야 한다는 지시 내용이 약화되고 질도 저하되기 때문에 결국 그 표상이 흐릿해져서 실제 경험을 부정확하게 복제해내는 경우도 많다. 기억은 허구다. 사실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기억은 왜곡에 대단히 취약하다. 기억은 그냥 ‘재생’이 아니라 ‘고쳐쓰기’인 셈이다.

여기에 어려움을 더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의 경험 중 상당수가 비슷한 점을 공유하고 있어서 그 경험을 기억 속에서 재생할 때 여러 항목이 서로 경쟁하는 바람에 뇌가 속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은 대부분 질이 떨어진다. 이는 뇌의 정보 저장 용량이 제한되어 있어서라기보다는 기억 검색의 속성 때문이다. 검색은 다른 비슷한 항목들 때문에 쉽게 산만해지고 혼란에 빠진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기억이 변경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검색될 때 기억들은 불안정하고 취약한 상태이기 때문에 적절하게 다시 응고될 필요가 있다. 한 친구와 공유하는 기억이 있는데, 그 친구가 “아니지, 그 차는 파란색이 아니라 초록색이었어”라고 말하면 이 정보가 기억에 이식된다. 이렇듯 불안정한 상태의 기억은 재응고 과정에서 수면부족, 정신 산만, 외상, 뇌의 신경화학적 변화 등으로 인해 방해를 받으면 증발해버릴 수도 있다.

인간의 기억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자기가 언제 부정확한 기억을 떠올리는지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부정확하고 왜곡된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그 기억이 분명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런 그릇된 자신감은 상당히 흔하게 나타나며 근절하기도 어렵다. 정리 시스템의 장점은 바깥세상의 물리적 기록 장치를 통해 기억을 외부화해 자신감만 넘치지 정확도는 떨어지는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하는 경향을 줄여준다는 것이다.(93-94p)

 

 

“해야 할 일은 머릿속에만 저장하고 있으면 나의 일부는 그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멈추지 못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비생산적인 상황이 만들어지고 만다.”

글로 기록하면 무언가 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하고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데 들어가는 정신적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117p)

 

 

책장이나 음반 서랍장에서 지금 막 꺼낸 것을 어디에 다시 꽂아두어야 하는지 기억하고 싶다면 방금 꺼낸 것 바로 왼쪽에 있는 것을 2cm 정도만 앞으로 빼어두자. 물건을 다시 되돌려놓도록 해주는 간단하고 훌륭한 행동유도장치가 될 수 있다.(138p)

 

 

MIT의 신경과학자이자 분할주의의 세계적 권위자인 얼 밀러는 우리 뇌가 멀티태스킹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게 만들어져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멀티태스킹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한 과제에서 다른 과제로 아주 신속하게 전환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저글링 전문가처럼 여러 개의 공을 동시에 공중에 띄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력이 형편없는 아마추어 접시돌리기 선수와 비슷해서 지금 당장 자기 앞에 없는 접시는 무시하고 정신없이 이 접시에서 저 접시로 옮겨다니면서도 그 접시가 언제 떨어져 박살날지 모른다는 걱정에 휩싸여 있는 꼴이다. 역설적이게도 멀티태스킹은 우리를 명백히 비효율적으로 만든다.(154p)

 

 

직관과 싸워 이기자! 세 번 동전을 던진다면 연속으로 세 번 다 앞면이 나올 확률은 겨우 8분의 1이 맞다. 하지만 이것은 짧은 순서만을 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혼동이다. 세 번 연속 앞면이 나오게 하는 데 드는 동전 던지기 횟수는 평균 14회다. 그리고 100번 던졌을 경우에는 세 번 연속 앞면이 나오는 경우가 적어도 한 번 생길 확률이 99.9%가 넘는다.(335-336p)

 

 

내 스승 중 한명인 폴 슬로빅은 이것을 ‘분모 무시’라고 명명했다. 슬로빅은 우리가 분자만 떠올릴 뿐, 분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동차 사고에 대한 뉴스에서 봤던 비극적 이야기만 떠올릴 뿐 안전하게 끝난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자동차 여행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모 무시는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한 연구에서 사람들에게 질병의 사망률이 1만 명 중 1,286명이라고 얘기했다. 이 사람들은 집단의 24.14%를 사망하게 하는 질병에 대해 얘기를 들은 사람들보다 이 질병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10,000분의 1,286은 13%도 안 되는 수치다. 따라서 실제로는 위험도가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첫 번째의 경우 우리는 질병으로 고통받을 1,286명의 개인을 의미하는 분자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24.14%는 인간이라는 존재와는 상관없는 추상적인 통계 수치로 받아들여졌다.(374-375p)

 

 

많은 양의 정보를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이 그로 인해 생기는 단점보다 클까? 이것은 그 정보의 정확성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가에 달려있다. 일부 정의에 따르면, 무언가가 ‘정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먼저 정확성을 확보해야 한다. 정보 소양과 정보 정리 능력에서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아는 것이다. 다른 관점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결국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방식이긴 하지만, 모든 관점이 반드시 똑같이 정당하지는 않음을 인정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어떤 내용은 진정한 학문과 전문성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는 러시아가 남미 한가운데 있다고 진심으로 믿을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믿는다고 해서 진실은 아니다.(483p)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을 때는 늘 중립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보 제공자가 어떤 조직의 후원을 받는지, 또 누구와 제휴하고 있는지, 그리고 웹사이트의 내용이 공무원, 전문가, 당파주의자, 아마추어, 혹은 본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칭하는 사람에 의해 승인되거나 제공된 것은 아닌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491p)

 

 

과학 정보와 의학 정보를 평가할 때, 그 보고서에는 상호 심사된 학술문헌에 대한 각주나 인용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담긴 사실들은 공신력 있는 출처에서 인용된 것이어야 한다. 10년 전만 해도 어느 학술지가 공신력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기가 쉬웠지만, 무료 학술지가 범람하면서 이런 구분이 흐릿해졌다. 무료 학술지는 가까 학문 영역에 속하는 내용이라도 수수료만 내면 무엇이든 실어준다. 스탠퍼드 의과대학 학과장인 스티븐 굿맨은 이렇게 지적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학술지 세계를 알지 못한다. 이들이 학술지의 이름만 보고 그것이 진짜 학술지인지 아닌지 알아낼 순 없다.” 자기가 공신력 있는 학술지를 읽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PubMed(미국 보건부 산하 국립의학도서관에서 관리) 같은 곳의 색인에 등장하는 논문들은 질적으로 검증된 것들이다. 구글 스콜라에 등장하는 것들은 그렇지 않다.(492p)

 

 

 

ㅡ 대니얼 J. 레비틴, <정리하는 뇌> 中,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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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27

 

 

그게 다였다. 그 너머에서 그녀가 어떤 새로운 경지에 접근되는 것은 마치 신의 영역을 탐하는 것인 양 허락이 되질 않았다. 어떤 새로운 경지가 나타나야 할 즈음에 그녀는 번번이 권태와 싸워야 했다. 그녀의 권태와도 싸워야 했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권태의 지배를 받고 행하는 모든 무심하고 아둔한 결례와도 싸워야 했다. 그 싸움은 격렬한 것이 아니라, 안으로 파고들어 살 안쪽을 곪게 하는 일처럼 묵묵하게 두 사람을 곪게 했다. 고름이 뚝뚝 떨어지는 한 영혼과 한 영혼이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산책을 했다. 마주 앉아 있었고 손을 잡고 걸었지만, 대화는 활기를 잃었다. 먹지를 댄 낙서처럼, 대화는 언제나 그게 그거였다. 대화에 활기와 긴장이 찾아드는 순간은 누구 한쪽에서, 혹은 두 사람에게, 위기가 찾아온 때뿐이었다. 위기 따위에 흔들리는 관계가 더 이상 아니었기 때문에, 그 새롭고도 심각한 대화를 통하여 더욱 단단해진 믿음과 더욱 깊어지는 이해를 맛보는 건, 예외로 따라온 행복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게 다였다. 좀 더 다른 행복감을 알게 된 것은 축복이었지만, 축복은 거기까지였다.(19-20p)

 

 

그녀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한참 생각했다. 좋아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남들에게 빈축을 살 만한 것일 때에 좋아하는 마음을 쉽게 철회할 수 있는 애호의 세계. 준거집단의 시준에 편입돼야 마음이 편하고 유행을 따라야 뒤처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 애호의 세계. 애호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확인하는 기회를 잃는 대신, 같은 걸 좋아함으로ㅆ 소속감을 형성하는 기회를 얻는다. 판에 박힌 것을 싫어하면서도 스스로 판 속으로 들어간다.(48p)

 

 

그녀는 쉬운 입을 어렵게 다루고, 어려운 귀를 좀더 예민하게 다루기로 했다. 귀가 대화 너머를 제대로 번역해내지 않는다면, 그 귀와 연결된 입은 더 큰 과오를 저지르기 십상이니까. 편안한 우정의 한가운데에서라면, 더욱더 해이해지기 쉬우니까.(89p)

 

 

한 사람이 O라고 말한다. 한 사람은 X라고 대답한다. 한 사람이 다시 O라고 말한다. 한 사람은 다시 X라고 대답한다. 한 사람은 다시 표현을 조금 바꾸어 O라고 말한다. 한 사람도 표현을 조금 바꾸어 X라고 말한다. O라고 말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O만을 말하고, X라고 말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X만을 말한다. 표현을 바꿔가며, 예시를 바꿔가며, 관점을 바꿔가며 서로 끝없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93p)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심리치유자이며 작가인 스캇 펙은 이 용서라는 개념을 용인이라는 개념과 대비하여 설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흐릿한 이해를 앞세운 후 잘못을 저지른 자를 외면하고 체념하는 것을 용인이라고 한다면, 당신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라며 잘못을 분명히 해두는 것을 앞세운 후에 그자를 다시 포용하는 것은 용서라고.

(...)

스캇 펙이 마치 그녀 같은 사람이 읽으라고 적어둔 듯한 문장을 그녀는 골똘하게 들여다보며 후회를 하다,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졌다. 용서라는 것이 상처를 입힌 자에게 명백하게 잘못을 못 박아두는 일을 전제한다면, 그자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되 고쳐볼 의지가 없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 때에도 용서라는 것이 작동 될 수 있는가. 무엇보다 한 사람의 잘못을 못 박을 자격이 과연 개인에게 있기나 한 것인가. 용서를 하고 다시 포용하는 일이 인간의 미덕 중 최종의 미덕인 이유는 무엇인가. 용서도 용인도 없이, 번뇌에 내던져진 채로 아슬아슬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일은 용서하는 것보다 어리석기만 한 것인가. 이해를 하고 용서를 하고 포용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치자. 자신이 용서할 수 없었던 그 잘못을, 그 악행을 저도 모르게 학습해버리고 자신도 물들어버리는 해이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어떻게 익힐 수 있는가.(100-103p)

 

 

도대체 어디까지 용서해야 옳을지를 고민할 때에 그녀는 멈칫한다. 용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거둔다.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윤리마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르르 빠져나가버리는 사태가 두려워서다. 무엇보다 용서하는 주체의 ‘용서-하다’라는 말의 자격을 그녀는 갖고 있지 않다고 여긴다. 용서라는 말이 용서를 하고 싶어 한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용서를 받고 싶어 한 누군가에 의해서 발명된 말 같아서다.(104p)

 

 

외롭다는 인식 뒤에 곧이어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뒤따르는 일을 그녀는 경계한다. 잠깐의 어색함과 헛헛함을 통과한 이후에 찾아올 더없는 평화와 더없는 씩씩함을 만나볼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어딘가에서 감염된 각본 같아서다. 슬프다는 인식 뒤에 곧이어 슬픔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뒤따르는 일 또한 그녀는 경계한다. 역시 어딘가에서 감염된 각본 같기만 하다. 외로움에 깃든 낮은 온도와 슬픔에 깃든 약간의 습기는 그저, 생물로서의 한 사람이 살아가는 최소 조건이라는 걸 그녀는 잊지 않고 싶다.(121-122p)

 

 

그 어느 시대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 커다래진 시대. 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 시대. 쉽게 변질되는 사랑과 쉽게 인성을 망가뜨리는 이별을 겪는 일을 이 시대의 청춘들은 굳이 하려 하지 않는다. 연민도 시혜도 자기 자신에게 우선권을 주고, 물질적·정서적 풍요도 자기 자신에게 가장 우선권을 준다. 배려도 스스로에게 하고, 돌봄과 아낌과 희생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행한다. 식당에서 물만 셀프로 따라 먹는 게 아니라, 주요소에서 주유만 셀프로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생에서 스스로에게 그렇게 한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두 개체가 서로 연맹을 하듯 사랑하기도 한다.(138p)

 

 

남자들은 여자들의 무지에 대해 각별해하는 것 같다. 무지한 여자라면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도 그렇지만, 무지한 여자를 계몽하는 기분을 특히나 즐기지. 남자들은 여자들의 무지에 집중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개입을 하는데, 그 욕망은 하도 집요해서 차마 다른 경우들을 예측할 겨를도 없는 것 같아. 무지한 여자가 무지해 보일 뿐 실은 무섭도록 지혜롭다는 걸, 단지 생존 조건 때문에 무지를 연기하고 있을 뿐이란 걸 눈치챌 겨를이 없지.

(...)

남자들은 생각해본 적 있는 걸 질문해줄 때에 늘 이렇게 말하지. “음, 좋은 질문이야.” 그리고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고 신중하게 답을 하지.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되는 경험담을 영웅담처럼 늘어놓지. 그렇지 않은 경우도 가끔 있기는 해. 그럴 때 남자들은 이렇게 말을 꺼내지. “음, 그건 너무 어려운 질문이야.” 그러곤 일축하지.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라고 일갈하거나 위험한 생각이라며 입을 다물게 만들지. 어떤 쪽이든 간에 남자들은 질문을 받고서 새로운 생각이란 걸 하지 않아. 생각했던 것을 생각할 뿐이야. 그래서 남자가 남자에게 질문을 할 때에는 언제고 상대를 시험에 들게 하거나 상대의 시험으로부터 합격하기 위한 목적이 따로 있지. 답을 예상하고 적절한 질문을 고를 뿐이야.(140-141p)

 

 

그녀는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불안이 언젠가는 가라앉게 되고 안정적인 일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믿지 않는다. 물질이든 경력이든 사람이든, 얻었다고 믿었던 안정들은 얇디얇은 유리보다 더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겨우 얻은 것들이 언제 부서질지 몰라 불안했고, 더 얻어야 할 것들을 얻기 위한 더 큰 노력이 첩첩산중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는 막막했다. 한 번도 무엇을 얻어본 적이 없이 그 이미지만을 끊임없이 대여해온 것 같았다.

 

소위 성공의 레퍼토리를 몸소 실현한다고 해서, 그래서 개인의 형편이 좀더 나아진다고 해서, 가중된 불안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는 권리가 그녀에게 생기진 않는 것 같다. 아마도 다른 이름의 불안으로 옮겨가는 일이 생길 것이다. 평생 불안해하다 죽어버리는 수밖엔 없을 것이다.(152-153p)

 

 

 

ㅡ 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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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26

 

 

저는 남들과는 다릅니다!!!를 여러 가지 구차한 방법으로 어필한 이후에 얻은 것은 매일 똑같은 삶이었다!(75p)

 

 

 

ㅡ 정재윤, <재윤의 삶> 中, 미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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