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29

 

 

먼저 현실과 실재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 자체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오래된 이야기다. 플라톤이 본질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나누어 놓은 이후로는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현실은 실재가 아니라는 생각에 별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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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욕망의 주체인 한에 있어서, 현실과 실재의 경계는 별로 의미가 없어진다. 현실의 ‘나’는 욕망의 실현을 위한 가상일 수 있으며, 나는 현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실재’라는 가상을 필요로 한다. 현실은 실재가 되고 실재는 현실이 된다. 그러나 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순간 욕망은 유지될 수 없으며, 삶은 끝난다.

인간은 욕망을 갖는 한에서만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출발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욕망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 무엇인지 항상 착각하며 살고 있다. 지젝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이 목표로 하는 것은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는 상태가 아니라, 욕망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상태이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욕망의 실현에서가 아니라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자신의 삶을 확인하고 쾌락을 얻는다. 그러나 욕망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환상을 통해 그런 욕망의 목표를 만들어내며 그것을 통해 욕망하는 법을 배운다.

욕망하기 위해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현실에서 이미 욕망이 실현되어 있다는 것을 은폐하는 것이다. 실재가 욕망이 실현된 세계이고 현실이 그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해야 하는 세계라면, 실재는 환상이고, 현실 속에서는 이미 욕망이 실현되어 있으므로 현실은 이미 실재가 된다. 왜냐하면 욕망의 실현이란 사실은 욕망의 재생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실현된 욕망이란 끊임없이 멀어지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삐딱하게 본다’는 것은 똑바로 보면 존재하지 않는 욕망의 대상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우리가 세상을 똑바로 볼 때 욕망의 대상, 곧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이것은 곧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거기에는 공허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욕망은 중단되며 쾌락은 막을 내린다. 이것은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우리가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삐딱하게 보지 않을 수 없다. 삐딱하게 봄으로써 실재는 현실과 구분되고 삐딱하게 볼 때에만 존재하는 그 왜상적 대상을 욕망하면서 우리는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실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실과 구별되는 실재를 인지하며 현실과 실재의 경계를 유지하는 것이 욕망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욕망은 환상을 필요로 한다. 공허 그 자체로서의 실재가 우리의 현실에 침투해 들어오게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19-21p)

 

 

그러나 새옹지마의 교훈은 그저 훈훈한 것만은 아니다. 변방에 살았던 노인의 아들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전쟁에 나가지 않았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만, 현실은 대개 그렇게 담담하지가 않다. 당시의 의료수준을 생각해 보건대 그 노인의 아들은 아마도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야 낫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삶의 고통은 계속되는 것이다. 비극은 그렇게 삶이 지속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새옹지마’라는 고사가 우리에게 말해 주듯이 그러한 삶의 일상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지리멸렬해서 견디기 힘들다는 데 있다.(49p)

 

 

하이데거가 말하는 일상인의 삶이 지속될 수 있는 힘은 아마도 그들이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잡담이나 소문의 소재로 만들어 버리는 데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고, 그 누군가의 삶이기 때문에 그럭저럭 참을 만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그 누군가의 삶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그때그때 적당히 흥분하고 적당히 기대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속으로 ‘하면 된다’를 되뇌며,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 당장의 고통만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행복한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고 희망해야 한다. 눈앞에 닥친 고비 너머에 나의 진정한 삶이 있다고, 조금만 더 견디어 내면 나는 왜 사는지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내 삶의 의미는 곧 분명해 질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물론 일상은 반복적으로 우리의 이런 기대를 배반한다. 수험생이 시험을 마쳤다고 해서, 군인이 제대를 했다고 해서, 취업준비생이 취직을 했다고 해서, 처녀 총각이 결혼에 성공했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한 일상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이 중단되지 않는 한, 일상은 지속될 것이며, 그것은 여전히 참기 힘들 정도로 지리멸렬할 것이다. 이것은 삶의 의미가 왜 말해질 수 없는가 하는 이유이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의 삶은 그 의미의 최종적인 봉합을 계속해서 연장한다.(51-52p)

 

 

102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간 노철학자가 깨달은 건강 유지의 비법은 결국 자신만의 삶의 리듬을 잃지 않으면서 내적인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가다머의 가르침에 따라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결코 무리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성향에 맞지 않게 삶의 태도를 바꾸려 해서는 안 되며, 심지어 지나치게 노력하는 삶을 살아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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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내적인 척도에 맞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어떤 대단한 것을 성취하는 데 두고 있지 않고 그저 건강하게 살다가 가는 데에서 찾고 있다면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인가? 그런 삶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하는 사회는 내적인 척도에 맞게 평온한 삶을 살고자 하는 불가피한 생존 욕구마저 부정하고 있는 너무 야박한 사회가 아닐까?(64-65p)

 

 

다윈의 진화론에서 특징적인 요소는 그러한 변이의 선택과정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지적했다는 점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다윈의 관점은 살아남았다는 것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양한 변이 가운데 어느 것이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것은 미리 정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극히 우연적인 과정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언어와 문화를 만들고 교양 있는 행동을 하며 나아가 성스럽게 여겨지는 삶을 살게 된 것도 인간의 본질과는 무관한 일로서 우연적인 역사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해서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84-85p)

 

 

그렇지 않아도 세상 살기 바쁘고 경쟁에 지쳐있는데 머리나 식혀볼까 하고 손에 든 소설마저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해서 ‘부자 아빠’가 되라고 외쳐댄다면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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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마 상류층의 사상은 한 가지 결정적인 측면에서 취약점을 보인다. 아파테이아와 평점심은 이미 가진 재산이 없어서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충고이다. 그들은 가난과 질병, 죽음에 노출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통치자들과 소유주들의 의지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고 자신들에게 어떠한 덕과 어떤 행복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몇몇 사람들에게는 신비적인 종교가 그 대답을 제공했다. 하지만 훨씬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대답은 기독교의 도래를 기다려야 했다.

 

아마도 철학사를 읽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진부하게 여겨지는 대목일 것이다. 나를 괴롭힌 것은 “재산이 없어서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구절이다. 나의 주장을 어처구니없게 생각한 사람들은 속으로 “돈도 없으면서 헛소리하고 있네”라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진정한 쾌락주의자란 모든 종류의 욕망을 던져버리고 경쟁에 휩쓸리지 않고, 덧없는 것들에서 의미를 찾으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매킨타이어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지나가는 어투로 재산이 없는 사람은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평생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대책을 세워놓지 않은 사람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진정한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진부한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106-108p)

 

 

여러 가지 논거가 동원이 되겠지만, 가장 고전적인 논거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것이다. 암울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세상을 저주하던 내게 이 말씀은 참으로 세상을 부정할 힘을 주었던 생명의 말씀이었다. 나는 나의 정신적인 방황과 고통이 세상의 거짓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자유롭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니 진리가 너무 많아서 그 중에 어떤 것이 진짜 진리인지 가릴 수가 없게 되었다.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할 것 같은데 그 놈의 진리가 도대체 어떤 놈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짧은 인생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바로는 이런 와중에 내 말이 진짜 진리요 하고 나서는 놈들은 대개는 목소리만 큰 사기꾼이거나 주먹 센 깡패라는 것이다.(117-118p)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 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129p)

 

 

무억보다도 코스모폴리탄적인 프로젝트가 실패할 수밖에 이유는 그들이 정치의 헤게모니적 차원을 무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무페는 사회의 모든 질서가 필연적으로 헤게모니 질서이며, 그것을 통해서 권력관계가 구성 된다고 보기 때문에 ‘헤게모니를 넘어선’ 정치를 상상하는 것은 헛된 망상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무페가 코스모폴리탄적인 ‘망상’에 대해 제시하는 대안은 다극화된 세계의 건설이다. 그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성적인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이성적인 대화와 타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사람들의 욕망과 환상을 이용해야 하며 민주주의적 실천에 공헌하는 정체성을 만들어내야 한다. 지배적인 헤게모니에 대한 투쟁은 모든 층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민주주의적 실천은 따라서 결코 종결될 수 없는 프로젝트이다.(189p)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개별적인 몸들이 사실은 아무런 관련이 없이 세상의 존재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 양자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단절이 있다는 것을 바라봄으로써 얻어진다.(240p)

 

 

인간의 비극적인 삶이 종식되지 않는 한 기도는 지속될 것이다. 이 땅의 고난과 굴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아이들을 사지로 내몬 잘못을 용서해주기를 우리는 계속해서 참회하며 빌게 될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일수록 완전한 신을 갖는다”는 포이어바흐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현실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신음과 같은 기도를 뱉어내게 할 것이다.(269p)

 

 

 

ㅡ 이유선,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中, 라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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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25

 

 

 

하지만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여행이 일상을 벗어난 아주 특별한 상태가 아니라 일상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른바 ‘편도행 티켓’을 끊어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있지만, 그건 나의 것은 아니다. 아마 그런 여행은 나의 죽음, 그것으로 한 번일 것이다.(7p)

 

 

나는 여행을 떠나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을 싫어한다.

우리는 여행에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나 자신을 가지고 간다. 속옷 한 장 없이 떠날 수 있지만 나 자신이 없이는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한다.

진정한 자아는 어디 있는가? 성지에? 템플스테이에? 인도에? 내 자아는 내 집, 내 방에 있지 않을까? 전혀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비일상의 경험을 하며 자아를 찾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런 생활을 지속해야 할 일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왕복 여정을 떠난다면, 내 자아가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의 상황을 주시할 일이다.(13p)

 

 

내가 여행과 관련해서 유일하게 되뇌는 점이 있다면, “예정대로 되지 않는 일을 받아들일 것.” 오로지 그것을 더 여유 있게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매일의 삶에서 예정대로 되지 않는 일은 내 힘으로 돌파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라면 더 부드럽고 가볍게, 가려고 한 식당이 문을 닫거나, 박물관 입장 줄이 너무 길어서 관람을 포기하거나, 화산재가 날아와서 비행기 운항이 취소되는 일을 통해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변수를 받아들인다. 아마도 나는, 평상시에 대충 ‘해치울’수 없는 것들을 해버리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것 같다. 여행지에서의 선택은 대체로 자유롭다. 여행지에서 실패해도, ‘이곳’(사실 이승이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에서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아, 카드대금이 있군.(14p)

 

 

외할머니는 제주도보다 더 먼 곳으로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일본에 가기보다 일본에서 책을 잔뜩 사오는 편을 택했다. 그때는 겨우 취직한 직후였으니까, 돈을 더 벌면 ‘나중에’라고 생각했다. 변명에 불과했다는 걸 시간이 지나고 깨닫는다. 무엇이든, 지금이 그 나중이다.(24p)

 

 

여행이야말로 우아하게 가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집에서 가난한 것보다는, 여행지에서 가난하면 인생의 깨달음을 얻고 있다는 자위라도 할 수 있으니까. 돈이 없어서 고생을 하고 나면 정말로 뭔가 알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게 뭔지는 결국 알 수 없었다. 정신 승리가 따로 없다.(33p)

 

 

뉴질랜드 북섬 로토루아에는 와이토모 동굴이라는 곳이 있다. 반딧불 동굴이라고도 불리는데, 동굴의 바닥까지 내려가, 마지막에는 캄캄한 가운데 밧줄을 붙잡고 동굴 바닥을 흐르는 물길 위에 뜬 쪽배에 올라탄다. 모두 안전하게 탄 게 확인되면 안전요원이 설명한다. 이제부터 불을 끌 것이다. 전혀 위험하지 않다. 당신들은 옆에 만져지는 밧줄을 당겨라. 그러면 배는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불을 끄면 위를 쳐다보아라. 그리고 정말 완전한 소등. 암흑. 암흑? 머리 위를 보는 순간 마치 가장 공기가 맑고 빛이 없는 지역 밤하늘처럼 반딧불 수천 마리가 빛나는 장관이 펼쳐진다. 하늘은 멀지만, 동굴 천장은 멀지 않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안전요원의 설명대로 보트를 맨 줄을 당겨가며 앞으로 이동하면서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냥 여기에 더 머물고 싶다고. 밖으로 나와 숲을 산책하면서, 반딧불은 곤충 아닌가? 그 위에 수천 마리가 그러면 어쩌고 있는거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막 떨어지고 그런 것도 있을 텐데, 어두워서 못 본 건가? 으윽. 원효의 해골물 같은 경험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렇게 관광객이 드나드는 일이 반딧불이에게는 괜찮은 것일까도 근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와 그 경험을 떠올려보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것, 그것뿐이다.(49-50p)

 

 

‘다름’을 접하는 방식 역시 어른의 여행에서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다른 것들을 구경하기에 머물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같음에 눈이 뜨이는 법이다.(60p)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는, 현지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이해 못할 현지어가 내 외모에 대한 품평이나 인종차별적인 욕이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설령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라고 해도, 굳이 나쁜 말을 할 이유는 없다. 상대는 알아듣지 못해도 그 말을 하는 나는 내가 한 말을 듣는다. 이런 일은 정말이지 하나도 재미있지 않다.(66p)

 

 

얹혀 있는 데는 사실 기술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다. 가능한 하지 않는 게 좋다. 친한 친구가 온다고 하면 반겨 맞겠지만, 그게 아닌 대부분의 경우는 오겠다고 하니 그냥 두는 것뿐이다.

당신을 반겨 맞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얹혀 있게 된다면 몇 가지는 당부하고 싶다. 아래 사항에서 한 가지를 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전부 할 생각을 해야 한다.

 

1.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 가능한 가져다준다.(외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소주나 담배, 식재료가 특히 유용할 수 있으며,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국어로 된 책이 필요한지 묻고 사다 주면 좋다.)

2. 제대로 된 식사를 현지의 친구나 친구 가족에게 최소한 한 번 이상 외식으로 대접한다.

3. 청소에 신경 쓴다. 매일 침구 정리, 욕실 정리,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 설거지를 해야 한다. 혹시 그곳의 친구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면 아예 현금을 주고 숙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가 얹혀 있기를 그만두게 된 이유는 신세지는 일은 성인이 해도 좋은 일이 전혀 아니구나 싶어져서였다. 돈이 없어서 숙소를 얻을 여력이 없다면, 차라리 여행을 가지 않는 쪽이 낫다고 마음먹기도 했고.(69-70p)

 

 

문제는, 제약조건이 없는데도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가라는 것은 어쩐지 ‘없어 보인다’는 강박을 낳는 것이다. 바쁘게, 좋은 데서 보내는 시간이야말로 나 자신을 괜찮게 보이게 한다는 생각.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도 없는 걸 휴가라고 불러도 되는가. 남들이 물어보는 말이 귀찮아서라도 어딘가 다녀와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에 시달린다.(110p)

 

 

예전 대학 선배 중에 <어린 왕자> 책을 언어별로 모으는 사람이 있었다. 언어가 다른 다양한 나라들을 여행하고 기록하는 재미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132p)

 

 

여행지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은 그곳 스타일의 옷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는 법(여행지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뿐이니까)과 타인의 스타일에 간섭하지 않는 태도(아래위로 훑어보면 실례다)일지도 모른다.(135p)

 

 

뭘 하지 않을 자유를 말하는 책의 저자는 대체로 그것을 많이 해본 사람이더라는 생각에서다. 옷장의 미니멀리즘을 설파하는 지비키 이쿠코의 <옷을 사려면 우선 버려라> 역시 읽다 보면 옷을 버리라는 저자가 누구보다 좋은 물건을 아주아주 많이 사고 써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니멀리즘을 주장하는 책들은 많이 쌓는 삶을 살아본 뒤에 쌓지 말자고 한다. 소식을 주장하는 책을 우리가 너무 많이 먹는 게 문제라는 데서 시작한다. 과잉이야말로 금욕의 가장 소중한 식재료다. 해본 사람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이 메시지부터 받아들이는 것에 있지 않을까.

똥을 굳이 먹어봐야 아나. 타인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줄 아는 것이 문명화된 인간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경험이라는 것은 ‘간접’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0’에 무한히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직접 경험이 깨달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간접 경험은 그냥 경험을 안 해봤다는 말이다. 사랑을 글로 배울 수 없고, 여행도 글로 배울 수 없다. 한 것과 한 것 같은 것은 다르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 봐야 안다.

일본에서의 미니멀리즘이 3.11 동일본대지진으로부터 촉발된 움직임이라면, 한국에서의 미니멀리즘은 저소득을 긍정하고 받아들이게 만드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사고 싶은 만큼 사보니 안 사도 되겠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과, 원하는 만큼 사본 적 없지만 그래 봐야 부질없다고 배운 뒤 일단 아끼고 보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여행하지 않을 자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가보니 생각의 깊이란 내 집 침실에서도 얻을 수 있더라 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과, 애초에 여행 가도 별것 없으니 안 가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은 다르다. 사랑할 자유를 누린 뒤에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일하고 싶은 자유를 충족시킨 뒤에야 일하지 않을 자유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할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하지 않을 자유’를 가르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해보니 별것 없더라”와 “해도 별것 없대”는 다르다. 여건이 된다면, 결론을 내기 위해 직접 경험할 수 있다면, 하기를 권한다. 여행을 다녀오지 않고도 여행을 다녀온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내 안으로 여행하기’를 잘 하려면,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뭔지부터 알아야 할 것 아닌가. 하다못해 여행을 싫어한다는 사실도, 여행을 해봐야 알 수 있다. 인내와 금기는 엉뚱한 판타지만 키우더라.(155-156p)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다짜고짜 좋아하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진짜’ 맛있는 음식이라면 먹는 순간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신의 음성이 귓가에 울릴 것 같지만, 그건 음식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일뿐더러, 맛을 음미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지적인 쾌락이다. 미각은 다른 많은 감각처럼 훈련할수록 더 성취도가 높아진다. 미술이나 음악, 소설 같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법을 다양한 작품을 통해 배우듯 말이다.(206p)

 

 

 

ㅡ 이다혜,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中,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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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2

 

 

몇몇 주제들이 책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공동체를 위한 노력, 감정이나 정념에 빠져들지 말고 이성에 따르는 행동의 필요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종국에는 소멸하기 마련이니 삶에 큰 미련을 가지지 말고 현재에 충실할 필요성, 관조적 태도 등을 들 수 있겠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비슷한 주제들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적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고 반성하며 다짐하는, 일종의 비망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완벽하게 떨쳐낼 수 없는 생각들이기에 이렇게 반복적인 글로 자신을 다잡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책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특정 주제의 반복적인 서술을 보며 느낀 점이 있다. 한 인간의 관심사나 인생의 화두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내가 지금까지 글이라고 적어둔 것을 읽어보니 대동소이한 주제들을 단어나 표현만 달리하여 적고 있었다. 책을 읽을 때도 느낀다. 이미 읽었던 책을 시간이 꽤 흘러 재독하면 새로운 면이나 생각할 거리가 많이 보이길 기대하지만 결국 읽고 나서 줄쳐놓는 부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인 경우가 많다. 뭐 그렇더라고.

 

 

 

 

아름다운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다. 찬미는 그것을 이루는 성분이 아니다. 찬미를 받는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도, 더 나빠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불리는 것들, 이를테면 자연의 산물이나 예술작품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에게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것은 법이나 진리나 선의나 겸손만큼이나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중 어느 것이 칭찬 받는다고 아름다워지고, 비난 받는다고 망가지겠는가? 에메랄드가 칭찬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지겠는가?(58-59p)

 

 

일어나는 모든 일은 봄철의 장미나 여름철의 과일처럼 친숙하고 잘 알려진 것들이다. 병과 죽음, 중상모략과 음모, 바보들을 기쁘게 하거나 슬프게 하는 모든 것이 그와 같다.(66p)

 

 

매번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매사를 올바른 원칙에 따라 행하는데 싫증내거나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마라. 실패하면 다시 그 원칙들로 돌아가고, 네 행동이 대부분 인간의 본성에 맞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네가 무엇을 지향하든 그것을 사랑하라.(76p)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소멸이 됐든 이주가 됐든 담담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올 때까지 어떻게 하면 만족스럽겠는가? 신들을 공경하고 찬양하는 것, 사람들에게는 선행을 베푸는 것, 사람들을 ‘참고 견디거나’ ‘멀리하는 것’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87p)

 

 

맛 좋은 요리나 그와 비슷한 다른 음식들을 보고는 이것은 물고기의 시체고, 이것은 새나 돼지의 시체라고 생각하고, 팔레르누스 산 포도주를 보고는 이것은 포도송이의 액즙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자포를 보고는 이것은 조개의 피에 담갔던 양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성교란 것도 장기의 마찰과 진액의 발작적인 분비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발상인가. 그런 생각들은 사물들의 본질과 핵심을 건드려 그 사물들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볼 수 있게 해준다. 너도 평생 동안 그렇게 하여, 사물들이 너무 믿음직해 보이거든 옷을 벗겨 그것들의 무가치함을 꿰뚫어보고 그것들이 뻐기는 후광을 걷어내야 한다. 가식은 무서운 사기꾼이다. 그리고 네가 진지한 것들을 상대하고 있다고 굳게 믿을 때 가장 현혹되기 쉽다.(91-92p)

 

 

이 얼마나 이상한 행동인가. 인간들은 자신들과 더불어 사는 동시대의 사람들을 칭찬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자신들이 본적도 없고 보지도 못할 후세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은 조상들이 너에 관하여 칭찬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네가 슬퍼하는 것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

경기장에서 누가 우리를 손톱으로 할퀴고 머리로 받았다고 하자. 우리는 이를 나무라거나 못마땅히 여기거나 중에 그가 음모를 꾸밀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경계의 눈으로 살피되, 그를 적으로 여기거나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호의적으로 피할 뿐이다. 인생의 다른 상황에서도 그런 처신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의 경기 상대자들의 많은 부분을 너그럽게 보아주도록 하자. 앞서 말했듯이, 의심하거나 미워하지 않고도 그냥 피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94-95p)

 

 

원형극장이나 그와 같은 장소에서의 공연들이 똑같은 광경을 매번 되풀이하는 탓에 싫증이 나고 단조로움 때문에 구경가는 것이 싫어지듯이,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도 마찬가지다. 위로나 아래로나 모든 것이 언제나 똑같고, 똑같은 것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그럴 것인가?

(...)

이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은, 평생을 진리와 정의와 더불어 살아가며 거짓말쟁이들과 불의한 자들을 호의로써 대하는 것이다.(104-105p)

 

 

악이란 무엇인가? 네가 자주 보아온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네가 자주 보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라. 너는 시선을 위로 향하든 아래로 향하든 어디서나 똑같은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고대사도 중세사도 현대사도 그것들로 가득 차 있고, 오늘날에는 도시들과 가정들이 그것들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이 익숙한 것들이고, 모든 것이 무상한 것들이다.(108p)

 

 

네가 갖고 있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마치 이미 갖고 있는 양 연연해하지 마라. 오히려 네가 가진 것들 중에 가장 값진 것들을 골라, 만약 네가 그것들을 갖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그것들을 갈망했을지 생각해보라.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그것들을 과대평가하는 버릇이 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언젠가 그것들이 없어지면 너는 안절부절못하게 될 테니까.(115p)

 

 

자신의 악에서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데도 자신의 악에서는 벗어나려 하지 않고, 남의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테도 남의 악에서 벗어나려 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

네가 선행을 베풀고 남이 그것을 받았으면 그만이지 어째서 바보같이 제3의 것을 바라느냐? 선행을 베푸는 것을 남이 보아주거나 또는 선행의 보답을 받는 것 말이다.(126p)

 

 

이웃의 의지는 그의 호흡이 그러하듯 내 의지와 무관하다. 우리는 각별히 서로를 위하여 태어났지만 우리의 지배적 이성은 각기 제 주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웃의 사악함이 내게도 불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것을 신은 원치 않았으니, 내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145p)

 

 

너는 누군가의 몰염치에 기분이 상할 때마다 “세상에 몰염치한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고 즉시 자문해보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마라. 이 사람도 반드시 세상에 존재해야 할 몰염치한자들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이다. 악당이나 신의 없는 자나 잘못을 저지르는 다른 모든 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떠올려라. 너는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기하자마자 이들 한 명 한 명에 대하여 더 관대해질 것이다. “자연이 이런 잘못에 대하여 어떤 미덕을 주었을까?” 하고 즉시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무지한 사람에 대하여 일종의 해독제로서 온유함을 주었고,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또 다른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163p)

 

 

건강한 눈은 보이는 것은 모두 보아야 하며 “나는 초록색만 원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눈병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청각과 후각은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냄새 맡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건강한 위는, 마치 방아가 찧도록 되어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찧듯이, 음식물이면 무엇이든 소화해야 한다. 그와 같이 건전한 정신은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내 자식들은 안전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만인이 칭찬하게 해주소서!”라고 정신이 말한다면, 그 정신은 초록색만 반기는 눈이나 부드러운 것만 찾는 이빨과 같다.(180p)

 

 

누군가 나를 경멸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알아서 할 일은 경멸 받을 말과 행동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가 나를 미워하게 된다면? 그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할 일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대하고, 특히 그에게는 그의 잘못을 기꺼이 지적해주되 나무라거나 내가 참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지 말고, 저 유명한 포키온처럼ㅡ그가 진심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ㅡ점잖고 신사답게 지적해주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은 그런 것이어야 하며, 어떤 일에도 화내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신들에게 보여야 한다.

(...)

“나는 너에게 솔직하게 대하기로 결심했어.” 라고 말하는 자는 얼마나 썩고 불순한가. 인간이여, 너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그런 말은 미리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은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이마에 적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마치 애인이 애인의 눈에서 당장 모든 것을 알아내듯이, 그런 것은 목소리의 울림을 들어도 당장 알 수 있고, 눈을 보아도 당장 알 수 있다. 소박하고 선한 자는 악취를 풍기는 자와 비슷하게 그에게 다가서는 사람은 다가가는 순간 원하든 원하든 않든 그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나 위장된 솔직함은 비수와 같다. 늑대의 우정보다 더 수치스런 것은 없다. 무엇보다도 그런 우정을 피하라. 선하고 소박하고 호의적인 그 모든 특징들을 눈에 드러내며, 그런 특징들은 숨어 있지 않는다.(188-190p)

 

 

4) 넷째, 너도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고, 너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네가 어떤 잘못들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설사 비겁하기 때문에 명예욕 때문에 또는 그와 비슷한 다른 동기에서 그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에게도 그런 잘못을 저지를 기질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5) 다섯째, 그들이 실제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너는 확신하지도 못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라. 많은 일들이 상황의 요구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남의 행동에 대하여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많은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7) 일곱째,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지배적 이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견을 근절하고 그들의 행동이 끔찍하다는 판단을 버릴 각오를 하라. 그러면 분노는 가라앉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의견을 근절할 것인가? 어떤 모욕도 너에게 치욕을 안겨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다면 너는 남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수많은 잘못을 저질러 강도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8) 여덟째, 우리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 그들의 행동보다는 그러한 행동에 대한 우리의 분노와 슬픔이 얼마나 더 괴로운 것인지 생각해보라.

 

 

 

ㅡ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中,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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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2

 

 

81-85p는 평생 머리에 새기며 되뇌어야 할 내용.

 

 

 


확실한 것은, 말을 하지 않아 이득이 된 경우는 많아도, 말을 하여 이득이 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은 것은 언젠가 말할 수 있어도, 일단 말한 것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엎질러진 물이다. (29p)

 

 

비밀을 지키지 않았다고 대체 무슨 권리로 남을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라면 남에게 이야기하지 말았어야 할 것이다. 그대가 비밀을 그대에게서 꺼내어 다른 사람 속에 감추려 한다면, 그대 자신보다 남을 더 신뢰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자가 그대보다 더 나을 게 없다면 그대는 끝장날 것이며, 그것은 그대 책임이다. 그자가 그대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그대는 운 좋게 구원받을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냈으니까. ‘그는 역시 내 친구이니까.’ 하지만 내가 그를 신뢰하듯 그에게도 신뢰할 친구가 있을 것이며, 그 친구에게도 또 다른 친구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비밀은 수다를 통해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며 불어나고 증식한다.(32-33p)

 

 

특정 화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특히 조심하고, 되도록 그런 화제는 피해야 한다. 그런 화제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언제나 거기에 살을 붙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경험이나 재능에서 남들을 능가한다고 생각되는 화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그런 사람은 허영심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이 가장 능숙하다고 믿는 일들에 바칠 것이다.

독서광은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문학자는 문법에 관해 토론하기를 좋아하고, 널리 떠돌아다닌 여행가는 낯선 나라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러한 기호도 조심해야 한다. 수다는 언제나 짐승처럼 낯익은 풀밭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때문이다. 소년 퀴로스의 처신이 높이 평가받는 까닭은, 그가 자신이 더 잘하는 종목이 아니라 덜 숙달된 종목에서 경쟁하자고 동년배들에게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동년배들을 능가함으로써 고통을 주기보다는 그들에게서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54-55p)

 

 

좋네, 술라. 무소니우스는 좋은 말을 많이 했는데, 내가 기억하기에 그중 하나가 “건강하게 살고 싶으면 평생을 치료가 필요한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네. 이성이 치료제 역할을 할 경우 크리스마스로즈처럼 즉석에서 한 번 쓰고는 질병과 함께 몸에서 배출되어서는 안 되고, 혼 안에 남아 우리의 판단을 통제하고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이성의 효력은 약과 같은 것이 아니라 건강식과 같아서, 거기에 익숙해진 사람이라야 건강과 활력을 얻기 때문이네. 한편 충고나 질책은 최고조로 부풀어 오른 정념들에는 별반 효력이 없으며, 간질병 환자들을 깨우기는 하되 병을 낫게 하지는 못하는 냄새 자극제보다 더 나을 게 없다네.(63-64p)

 

 

내가 분노할 때 거울로 비추더라도 못마땅해하지 않을걸세. 자신의 일그러진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본다는 것은 분노라는 격정의 명예를 실추시키는데 적잖이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네.(71p)

 

 

훈련을 통해 우리 혼의 비합리적이고 완고한 요소를 길들이려면 모든 감정의 습관화가 필요하지만, 하인들에 대한 분노만큼 많은 노력이 필요한 감정도 없네. 하인들에게 우리는 두려움도 없고, 명예욕도 느끼지 못한다네. 우리는 하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에 자주 화를 내다 보면 실수를 많이 저지르게 되고, 또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다 보니 화를 내다가 미끄러운 바닥에서처럼 넘어지곤 한다네. 감정이 개입하게 되면 책임지지 않는 권력은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법일세.

유일한 해결책은 온유함으로 권력을 제한하고, 우리를 무르고 무심하다고 나무라는 아내와 친구들의 잦은 불평에 귀를 막는 것이라네. 또 내가 하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하곤 했던 것은 하인들이 벌 받지 않으면 못쓰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일세. 나중에야 나는 첫째, 남들을 바루려다 가혹함과 분노로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보다는 느긋하게 잘못을 용서해줌으로써 남들을 더 나쁘게 만드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네. 둘째, 나는 그들이 오히려 벌 받지 않음으로써 나빠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징벌보다는 용서가 개선의 시발점이 되는 것을 자주 보았네.

그리고 맹세코, 그들은 매질을 하고 낙인을 찍는 자들에게보다는 머리를 끄덕이며 조용히 명령하는 자들에게 더 기꺼이 복종하는 것을 보았네. 그리하여 나는 분노보다는 이성이 더 훌륭한 길라잡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네. 시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일세.

 

두려움이 있는 곳에 존경심도 있다.

 

천만의 말씀! 존경심이 깃들인 마음속에서만 자기 개선을 수반하는 두려움도 자라나는 법이라네. 반면에 지속적이고 무자비한 매질은 지난 잘못을 후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잘못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을 일깨워준다네. 셋째, 나는 우리에게 궁술을 가르치는 사람은 우리에게 활쏘기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과녁을 빗맞히는 것을 금하며, 마찬가지로 제때에 지나치지 않게 유익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벌주라는 가르침도 벌주는 것 자체를 금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늘 명심한다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벌 받을 자들에게서 자신을 변호할 권리를 박탈하지 않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줌으로ㅆ 분노를 억제하려 한다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감정이 누그러져서 판단력이 처벌의 적절한 방법과 적정 수위를 발견하게 되니까. 게다가 벌 받을 자가 분노 때문이 아니라 납득한 뒤에 벌 받게 되면 처벌에 반항할 구실이 없어지네. 끝으로, 주인보다 하인이 더 옳은 것처럼 보이는 가장 수치스러운 경우를 피하게 된다네.

알렉산드로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포키온은 아테나이인들이 그런 소식을 너무 빨리 믿고 너무 일찍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말리며 이렇게 말했네. “아테나이인들이여, 그가 오늘 죽어 있다면 내일도 모레도 죽어 있을 것이오.” 마찬가지로 화가 나서 서둘러 응징하려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네. “그자가 오늘 잘못이 있다면 내일도 모레도 잘못이 있겠지. 그가 좀 늦게 벌을 받았다고 해서 해로울 것은 없겠지만, 일찍 벌을 받으면, 옛날에도 그런 일이 흔히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부당하게 벌 받은 것으로 보이겠지.”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누가 닷새 또는 열흘 전에 고기를 태웠거나 식탁을 엎었거나 너무 느리게 명령을 이행했다고 해서 노예를 매질하거나 벌줄 만큼 잔인하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런 일들이 방금 일어났거나 일어난 지 얼마 안 될 때 우리는 흥분하여 잔인하고 거칠게 대한다네. 안개 속에서는 물체가 더 커 보이듯, 화가 났을 때는 실수도 더 커 보이는 법이지.

따라서 우리는 먼저 그런 생각들을 당장 머리에 떠올려야 하네. 그리고 우리가 감정에서 자유로운 것이 확실하고, 차분하고 침착하게 숙고해보아도 그 행위가 벌 받아 마땅하다 싶으면 단호하게 응징해야 하고, 식욕이 엎어지면 음식을 먹지 않듯이 벌주기를 게을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네. 분노가 가라앉았다고 해서 사건을 묵살하고 벌주지 않으면 우리는 나중에 더욱더 화를 내며 벌주게 된다네. 그럴 경우 우리는 바다가 잔잔할 때는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있다가, 폭풍이 일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하는 게으른 뱃사공들과도 같다네. 그리하여 우리는 벌주는 데 무르고 나약하다고 이성을 나무라며 분노의 바람에 휩쓸려 무턱대고 앞으로 돌진한다네. 음식은 허기진 사람이 섭취하는 것이 순리이지만, 처벌은 처벌에 허기나 갈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행하는 것이 순리일세. 밥에 반찬이 필요하듯 처벌에 분노가 필요해서는 안 되네. 오히려 벌주고 싶은 욕망을 억제한 다음 마지못해 처벌해야 하네.(81-85p)

 

 

 

ㅡ 플루타르코스, <수다에 관하여> 中,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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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30

 

책이 읽기 싫으니 얇은 책에 손이 간다. 게다가 도서관에 있는 큰글자 판으로 읽었는데 큼지막하니 좋았다. 





서구에서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개와 인간과의 친밀감이다. 실제로 그러한 친밀감이 개를 애완동물 이상으로 즉, ‘인간의 친구’로 여기게 만든다. 결국 친구인 개를 잡아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서구의 동물보호협회에서 아시아의 개고기 식용 관습을 비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먹이를 주면서 돌보고 같이 생활하면서 정이 들었다 하더라도 애완동물을 먹는 경우는 꽤 있다. 마빈 해리스가 들고 있는 예를 살펴보자.

뉴기니 사람들은 돼지를 애완동물처럼 다룬다고 한다. 뉴기니의 여자와 아이들은 돼지와 함께 오두막에서 자고 남자들은 남자들만 자는 공동숙소에서 따로 잔다. 돼지새끼가 젖을 떼면 여자들은 자기 아이들과 함께 품에 안고 기른다. 돼지가 병이 나면 자기 자식처럼 걱정하고 돌보며, 상당히 자란 뒤에는 여자가 자는 방 옆에서 우리를 지어 집안에서 키운다. 그러나 뉴기니인들은 암퇘지 고기를 너무나 좋아해 반드시 조상과 동맹자들과 나눠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렇게 총애를 받던 돼지라도 마을의 돼지축제 때 잡아먹히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팔려 가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동아프리카의 딩카족과 같은 유목민들은 소를 뉴기니의 돼지처럼 다룬다. 여기에서는 소를 남자들이 키우는데, 소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뿔이 멋진 곡선으로 자라도록 조금씩 자르고 꼬아 주며 목걸이와 종으로 장식한다. 남편은 소 외양간에서 자고 아내와 아이들은 근처에 있는 집에서 따로 잔다. 하지만 그들은 쇠고기에 대한 미각이 아주 발달했으며 장례식이나 결혼식 그리고 명절의 잔치 때 쇠고기를 즐긴다.

아프리카 북동부의 마사이족 또한 소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이 남다르다. 이들은 소에게 기도를 올리는가 하면, 그 뿔을 윤이 나도록 닦아 주기까지 한다. 심지어는 아이들의 이름을 소의 이름을 따서 지어 주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해 마지않는 소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그리고 오로지 소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 쓰는 형용사를 10개 이상 가지고 있을 정도로 다른 동물들에게는 거의 무관심하다. 하지만 마사이족도 그토록 사랑하는 소를 잡아먹는다. 죽이기를 꺼려 술에 취해 소의 멱을 따지만, 먹을 때는 아주 맛있게 먹는다.

이런 예들을 볼 때 애완동물이라는 것이 어떤 정해진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또한 어떤 동물이 애완동물로 여겨지는가는 각 문화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인간과의 친밀함이 이 애완동물의 식용을 막지 못한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

마빈 해리스에 따르면 ‘유럽인들은 개가 가장 사랑하는 애완동물이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개가 식용하기에는 비효율적인 고기 공급원이기 때문에 먹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미 그들에게는 소, 양, 돼지와 같은 다른 동물성 식품이 충분하게 공급돼 굳이 개를 도살해서 섭취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는 그 고기보다는 더 가치 있는 다른 서비스를 살아서 제공하기 때문이다.

반면 개고기를 먹는 경우는 육류가 항상 부족한 상태이고, 낙농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한 날을 제외하면 돼지고기나 닭고기도 쉽게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개가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개가 살아서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보다 죽어서 제공하는 서비스가 더 가치 있는 곳에서 개고기를 먹는 문화가 발달했다.

개가 사냥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는 곳에서는 개를 먹을 이유가 별로 없었다. 개고기를 먹는 문화의 대부분은 개가 사냥에 꼭 필요하지 않거나 사냥할 수 있는 동물이 상대적으로 적은 경우였다. 개고기를 더 잘 먹는 사람들은 사냥을 해서 그 고기를 주로 먹기보다는 곡물을 재배해서 주식으로 하는 집단에 속했다.(35-37p)

 

 

 

ㅡ 정한진, <왜 그 음식은 먹지 않을까> 中,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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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16

 

 


 

“가끔 그 사람한테 먹을 걸 줘봐. 초코 바나 캔 커피같이 작은 거. 사람들은 먹을 걸 주면 좋아해.”

그 말을 듣고 뭐 이런 유치한 조언이 다 있나 싶었다. 다 큰 어른한테 먹을 걸 갖다 주라니. 초코 바나 캔 커피 따위로 사람 마음이 흔들리겠냐.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 대하기에 지쳐 한번 실행해봤다. 그랬더니 그분은 내가 건넨 초코 바에 피식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 단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고.” 그 뒤로는 인사를 받아주고, 내 농담에 어색하게나마 웃어주고, 때로는 먼저 말을 걸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 사건(?) 이후로 어른이 되면 사람과 친해지는 자기만의 비법 한두 개는 갖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언니의 간식 기법처럼 언제든 가뿐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유용하겠지.(30p)

 

 

사람 사귀는 데 기술이 어디 있겠냐고 해도 분명 있는 것 같다. ‘진심은 통하게 돼 있다’는 상식도 때로는 배신당하기 일쑤고, 아부인 걸 뻔히 알면서도 칭찬하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과 친해지고, 어딜 가나 사랑받는 사람을 볼 때마다 때로는 부럽고 배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는 관계를 시작하는 일에 대해 고민할 뿐,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관계에 있어 진짜 중요한 것은 시작이 아니라 유지인 것을.

기술로 시작한 관계는 일단 시작은 되더라도 기술이 녹슬거나 열정이 사라지거나 내 뜻과는 다른 상대의 모습을 발견하면 서서히 변한다. 반면, 유지하는 일에 더 집중하는 사람들의 관계는 시작은 밋밋하거나 덜컹거리더라도 길고 가늘게 이어진다. 한번 내 것이 된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순간순간의 잔재미보다 마음 나누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누군가가 품은 진심을 결국에는 알아차리는 사람들. 그들은 관계를 향해 전력 질주하기보다는 천천히 걸어가는 걸 즐긴다. 섬광 같은 매력보다 같이 있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을 선호한다. 마치 보노보노와 친구들처럼.(31p)

 

 

우리는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는 그만큼의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는 데에도 그만큼의 확실한 이유가 있다는 것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41p)

 

 

누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미워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는 단지 피곤하거나 생각할 다른 것들이 있거나, 과중한 업무로 스트레스가 가득 쌓인 상태일 수도 있다. 머리로는 다 안다. 실제 그 경험을 할 때는 싹 까먹는 게 문제일 뿐.(59p)

 

 

포로리: 왜 아무 일도 없는 게 제일 좋아? 그냥 걷기만 하는 건 지루해 보이는데.

야옹이 형: 응. 지루해. 난 그저 아무 일도 없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걷는 셈이야. 걷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거든. ‘아! 오늘도 아무 일도 없었구나!’ 싶어서.

 

야옹이 형은 이상한 말만 한다고 생각하며 포로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부모님의 모습에 처음으로 신기한 생각이 든다.

 

아. 아무 일도 없다는 건 좋은 거구나.(97-98p)

 

 

꽃길을 걸을 때는 인생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 행복을 충분히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라다. 아니, 만끽한다는 실감조차 할 겨를이 없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불행하다고 느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인생에 대해, 불행에 대해, 또는 도무지 잡히지 않는 행복에 대해 여러 번 곱씹고 떠올리게 된다. 무언가를 자주 생각하고 떠올릴 때는 그것과 한참 멀리 있을 때다. 내가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지 자꾸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도무지 답을 구하지 못했던 것처럼.(156p)

 

 

 

ㅡ 김신회,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中,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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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16

 

 

 

내가 이 책에서 필요로 했던 부분은 유럽사의 흐름이었기 때문에 각장의 마지막 부분과 조금은 음모론적이라고 저자도 인정한 부록은 적당히 생략하고 읽었다. 수요일전까지 유럽사 관련으로 뭐하나 더 읽으면 좋을 거 같은데.

 

 

 

도시국가 로마의 시작은 기원전 75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로마의 종말을 서로마제국의 멸망 시점인 476년으로 잡으면 그 역사는 1,000년을 넘어선다. 제국의 법통을 이어받은 비잔티움 제국이 15세기 중엽까지 존속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면 전체 역사는 2,000년을 넘어선다. 중국과 인도를 제외하면, 어떤 나라도 1,000년 이상 정체성을 유지하며 존속한 경우는 없었다.

(...)

유럽 문명의 두 뿌리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고 일컫는데, 저자는 그리스 문명, 후자는 유대 전통과 기독교를 뜻한다. 그리고 이 두 사상적 기둥을 내부에서 통합·부흥시키고 유럽 대부분 지역에 퍼트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로마제국이다.(21p)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모세다. <구약성서>의 처음 다섯 장,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모세가 직접 썼다 하고, 이를 ‘모세5경’ 혹은 ‘토라’라고 부른다. 우주의 창조와 에덴동산,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과 이삭, 십계명 등 <성서>의 고전적인 이야기가 모두 들어 있는,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이집트 왕가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혈통이 모호한 인물인 모세는 기원전 1,300년경 노예로 살고 있던 동족을 모아 이집트를 탈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을 찾아 떠나는데 이때가 일신교로서의 유대교가 성립되는 시점이다. 유대교 신앙은 그 오래전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이를 구체적이고도 강력한 형태로 정리하고 고착시킨 것이 모세이기 때문이다.(40p)

 

 

그래도 유대인의 피를 타고난 예수인데 그를 신으로 믿는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동족을 그토록 혐오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텐데,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민족 개념과는 다른 유대인의 정의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대개 민족은 특정 지역·언어·문화에 근거해 분류된다. 한민족은 한반도와 그 주변에 거주하면서 한국어와 전통문화를 공유한 사람, 혹은 그들의 직계 후손이라 말할 수 있다. 허나 유대인의 경우는 이런 관점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미 2,000년 전에 근거지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로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처음 중동과 유럽 지역으로 옮겨간 유대인들은 이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등 신세계에도 대거 진출했고 그 과정에서 현지인과 혈연으로 엮이면서 인종적으로 동화된 경우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게르만, 앵글로색슨, 슬라브계 백인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의 유대인은 혈연이나 지연의 개념이 아니라 유대교를 믿고 그 전통과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을 총체적으로 의미한다. 정식 유대교도로 인정되면 누구나 유대인의 법적 지위를 갖고 이스라엘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혈연적으로 유대인과 무관한 이디오피아의 흑인 유대교들도 이스라엘로 이주했던 바 있다.(51p)

 

 

아랍은 아라비아어를 공유하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일대의 사람들을 뜻하고 종교의 의미는 없다. 그들은 떠돌아다니는 상인들로 부족을 이루고 있었고 국가체제를 거의 갖추지 못했다. 물론 현재까지도 무슬림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아랍인이지만, 이란의 경우 고대 페르시아에서 이러진 다른 문화적인 배경과 언어를 가진 민족이고 실제로 가장 많은 무슬림 인구를 가진 나라는 인도네시아다.(99-100p)

 

 

이런 점들은 한 가지 면에서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사람이라도 다른 면에서는 여전히 광신적인 열정과 잔인한 광기에 휩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의 도그마에서 빠져나오면서 실은 다른 도그마로 이행하는 상태는 역사의 여러 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1950년대 미국의 공산주의자 검거 광풍, ‘매카시즘’은 수호의 가치가 기독교에서 자본주의로 바뀌었을 뿐 기본 양태는 중세의 마녀사냥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마녀사냥이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미국에서 20세기 중반에 들어 현대판 마녀사냥이 재현되었던 것이다. (138p)

 

 

예를 들어 교육으로 얻은 반인종주의적인 관점과 현실에서 실제 상황을 겪을 때의 반응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이익이 걸린 중요한 문제에서 좋지 않은 경험을 한 후에도 계속 공정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개인의 특별한 경험을 특정 인종 전체에 확대함으로써 스스로의 문제를 합리화하려는 유혹을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동족이 모여 자기 경험을 열거하며 특정 인종을 비난하는 분위기 속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라크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던 미국의 스물한 살 여성 린다 잉글랜드 이병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젊은 여성이 처음부터 고문을 할 마음을 먹고 이라크에 갔을 리 없고, 언론에서 전하듯이 고향에서는 순진하고 착실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절대적인 무력과 권위를 가진 미군의 일원으로 생활하면서, 현실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는 이라크인을 대하면서 급성 인종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일종의 자기 최면에 걸려 분별력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이제 이라크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일종의 고깃덩어리로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심리 상태만이 성기를 손가락질하고 목줄을 잡아끌면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설명할 수 있다. 사진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고향의 지인들은 인간의 이런 심리가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제는 잉글랜드 이병뿐 아니라 성찰과 통제력이 부족한 사람은 특정한 환경에서라면 누구라도 이런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고, 이것이 인종주의 같은 배타적인 집단의식을 극복하기 어렵게 만드는 부분이다. 삶의 개별적인 조건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인종주의와 집단주의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끊임없는 자각과 노력, 원칙의 수립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과거 히틀러와 나치의 오류를 또다시 범하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149-150p)

 

 

그러나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의 상황은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세 이탈리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국가 개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로마 멸망 후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는 통일 국가로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1,500년에 가까운 기간 내내 이탈리아라는 이름은 단지 지명에 가까운 상태였다. 현대 독일의 모태라고 할 신성로마제국의 영향하에서 이탈리아 지역은 제후들이 분할해 다스리는 형태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오스트리아·에스파냐·프랑스 등이 차례로 이탈리아 반도를 점령·지배했으며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 섬은 한때 이슬람의 지배하에 놓이기도 했다.

이는 혼란과 분열을 조장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강력한 전제 군주의 부재를 통해 새로운 기운이 움트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이 기독교 도그마에 사로잡힌 경직된 유럽의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할 수 있었던 배경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160-161p)

 

 

이 문건(마그나 카르타)의 원래 목적은 민주주의나 일반 백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왕과 귀족 간의 권력 관계를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유럽에서 왕의 역할은 귀족·제후 사이에서 대표의 역할에 가까웠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왕이 권력을 지나치게 탐할 경우 귀족들의 견제가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이런 견제는 이해 당사자들 간의 무력 투쟁이나 담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백성을 등에 업고 보다 큰 규모로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

그리고 400여 년이 지나 1689년에는 권리장전이 제정되었다. 권리장전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의미인 명예혁명을 통해 제정된 문서로 의회와 왕권에 우선하는 권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거론되곤 한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의회의 승인 없이 왕이 법을 정지시키거나 세금을 징수하거나 군대를 모을 수 없다는 것과 언론의 자유 등이었다.

당시의 관점에서 그 의미는 아주 크지만 명예혁명 자체는 구신교의 갈등에 원인을 둔 것으로 의회주의의 실현은 그 부산물이었다. 왕이 임의로 나라를 다시 구교 국가로 되돌리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로 의회의 권력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권리장전을 통해 권한이 보장된 당시의 의회도 보통 선거로 의원을 뽑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대변한다기보다는 소수 권력 기관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현대의 의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히 상원은 귀족 간의 세습을 통해 구성되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평민에 의한 하원 역시 비록 귀족은 아니더라도 각 지역에서 부와 권력을 쌓아온 소수 실력자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게다가 귀족 세습의 상원에 대한 하원의 정치적 우위가 확정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이런 점을 고려해본다면 명예혁명이나 권리장전이 가지는 의미가 있음에도 근대 초기 영국의 모습은 우리가 익숙한 의회제도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명예혁명이라는 단어가 가진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피를 흘리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한편 명예혁명의 모든 과정이 왕·귀족·부르주아 실력자 등 당대 힘 있는 사람들끼리의 담합과 권력 재분배의 과정이었다는 점은 명예라는 단어의 그림자 속에서 놓치기 쉬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평민은 명분을 과시하기 위해 도용되거나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통해 물리적인 압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을 때 동원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217-220p)

 

무엇보다도 프랑스 혁명은 근대의 사상적 기반인 계몽주의자들의 철학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가진 자의 담합이었던 명예혁명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물론 프랑스 혁명은 명예혁명 후 100년이 지나 벌어졌기에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 수 없었고, 삼부회 소집 등 프랑스 혁명의 초기 상황이 영국과 비슷하게 진행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생각은, 명예혁명은 종교분쟁의 틈바구니에서 너무 일찍, 진정한 근대와 민주주의의 사상 기반이 제대로 무르익을 틈도 없이 벌어졌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점이다. 서둘러 모든 것이 규정되는 바람에 진정한 사회변화와 미래를 창조해낼 기회와 동력을 상실해버렸던 것은 아닐까.

(...)

영국이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것은 1928년에 이르러서였고 프랑스는 그보다 늦은 1944년이었다.(222-223p)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화파는 의회를 점거하고 루이 16세를 폐위시키는 혁명 속의 혁명을 단행했다. 그 후 한 달여간의 혼란기를 거쳐 탄생한 것은 1792년 9월 20일 설립된 국민공회였고 목적은 왕정의 완전한 폐지를 통한 공화제의 수립이었다. 이때부터 유명한 자코뱅 당과 지롱드 당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좌익과 우익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 두 정치세력을 지칭하기 위해 생겨난 말이다. 의장석의 관점에서 급진파인 자코뱅 당은 왼쪽에, 온건주의자인 지롱드 당 의원들은 오른쪽에 앉았기 때문인데, 이렇게 쓰던 표현이 전 세계로 퍼져 지금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성향의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굳어졌다.

자코뱅과 지롱드는 둘 다 공화제를 지지하는 세력이었지만 전자가 소시민·농민·무산계급을 기반으로 삼은 것에 비해 지롱드는 부르주아와 자유경제체제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지금의 좌파·우파와 근본적인 면에서 공통점이 많았다.(260-261p)

 

 

그의 외골수에 가까운 이상주의와 청렴함은 달리 보자면 지나친 독선과 아집에 가까운 것이고 이런 사람은 자기와 다른 성향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여 설득과 통합을 꾀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이런 로베스피에르의 결벽증은 절제와 수양의 결과였지만 문제는 도가 지나치다는 데 있었다. 이런 사람이 자기 기준에 맞는 세상을 만들려 하는 경우 그 엄격함의 수준은 보통 사람이 견뎌낼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다. 약간의 호의호식도 인격파탄이나 부패로 보이고 자신의 생각과 생활방식만이 선이며 악마의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살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지나친 단호함과 이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과격함이다.(268p)

 

 

 

ㅡ 원종우,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유럽편> 中, 역사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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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13

 


so-so.

 


 

기분은 좋지만 슬프다는, 슬프지만 우유는 맛있다는, 이 복잡한 감정을 알게 된 걸 성장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48p)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59-60p)

 

 

점이나 혈액형에 관한 이야기는 싫어한다. 별자리와 전생, 사후세계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런 사고방식은 당장 눈앞에 있는 어찌하기 힘든 현실, 인간관계, 그리고 나 자신을 외면하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79p)

 

 

딸기라면, 유치원 때 가장 사이가 좋았던 이발소의 앗짱네 놀러가, 처음으로 연유를 넣은 우유에 담가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 이렇게 하는구나’하고 배우면서 숟가락으로 그 딸기를 짓이겨 모두 먹어치우고서, 남은 분홍빛 우유를 마셨다. 충격적인 맛이었다.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재빨리 엄마에게 보고했지만, 앗짱의 엄마와 사이가 나빴던 우리 엄마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딸기는 딸기의 단맛만으로 그 상태 그대로 먹는 게 가장 맛있는 거야”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곧 고레에다 집안의 찬장에도 바닥이 평평한 숟가락이 준비되었다. 어째서인지 연유가 아닌 설탕을 우유에 섞어 먹는 방법으로 정착됐지만, 나에게는 어떤 케이크보다도 그 딸기우유가 줄곧 최고의 간식이었다.(112-114p)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결함은 문제 삼지 않고, 상대를 이해력 없는 바보라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결여된 이러한 품위 없는 태도가 부시의 본질이라면, 설사 부시를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쪽은 결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진정한 의미의 ‘반 부시’가 아닐까.(160p)

 

 

사실 내가 봤을 때 <화씨 9/11>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뜻에 힘입었대도, 찍기 전부터 결론이 먼저 존재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지는 않으련다. 찍는 것 자체가 발견이다. 프로파간다와 결별한 취재자의 그런 태도야말로 다큐멘터리라는 방법과 장르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공격하는 것 같은 작품을 만들어, 잠깐 동안 보는 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고작 제작자의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오히려 진짜 적은, 이러한 존재를 허용하고 지지한 이 나라의 6할에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고이즈미적인 것’이고, 그 병소를 공격하지 않고 안전지대에서 고름(고이즈미)만을 찔러 짜낸대도 병세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161p)

 

 

 

ㅡ 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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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10

 

 

 

음악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있다고 믿는 작곡가는 하나도 없습니다. 듣는 이를 위해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작품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그것이 거기에 있는 이유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오롯이 듣는 이의 몫으로 남습니다.(52p)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음악을 듣는 방식은 세 가지 개별적인 층위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용어가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이 세 층위를 각각 (1)감각적 층위, (2)표현적 층위, (3)순수 음악적 층위로 부르기로 합시다.

음악을 듣는 가장 단순한 방식은 음향 그 자체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을 좇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음악 감상의 감각적 층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어떤 방식의 사고도 배제한 채로 음악을 듣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음악이 존재하는 두 번째 층위는 표현적 층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 저는 모든 음악은 표현적인 힘을 가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음악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음악은 음표 이면에 특정한 의미를 함유하고 있고 또한 그러한 의미가 모여서 결국에는 그 작품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작품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음악에 의미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물음입니다. 거기에 대한 제 답변은 “예”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낱낱이 언명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거기에 대한 내 답변은 “아니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갈림길에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

음악이 기거하는 세 번째 층위는 순수 음악적 층위입니다. 듣기 좋은 음향, 음악이 표현하는 느낌을 옆으로 치워놓고 봅시다. 음악은 음표 그 자체와 그들의 다양한 집합체로서 존재합니다.(53-60p)

 

 

머리를 이용해 음악을 듣는 사람은 음악적 재료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선율, 리듬, 화성, 음색을 의식적으로 들어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음악의 형식입니다. 곡을 쓴 사람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려면 형식 원칙에 대한 이해가 필수입니다. 이 모든 요소를 들을 수 있어야 비로소 순수하게 음악적인 층위의 감상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61-62p)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들어 내려 노력해야 합니다.(64p)

 

 

공개강좌 때의 일인데, 영감이 오길 기다리는 편이냐고 어느 수강생이 제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매일 기다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스러운 계시가 찾아올 때까지 마냥 멍하니 앉아만 있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취미로 곡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될지 모르겠지만 직업 작곡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직업 작곡가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책상머리에 앉아 어떤 종류가 되었든 음악을 써내는 사람을 의미하니까요. 당연히 오선지가 술술 채워지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곡을 쓰는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영감은 그저 곁가지인 경우가 많습니다.(66-67p)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주제가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니면 지닐수록 그것을 다양하게 뒤바꿀 가능성은 오히려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이는 대부분의 작곡가가 체험을 통해 아는 사실입니다. 만약 주제의 원형이 길고 완전하다면, 달리 말해 이미 그 자체로 확정적인 형태를 지닌 주제라면 그것을 달리 볼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습니다. 주제만 놓고 보면 시시해 보이지만 정작 그 주제를 사용한 작품 전체는 위대한 걸작으로 인정받는 곡이 많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주제가 시시하고 불완전할수록 새로운 의미를 품을 여지가 커진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70p)

 

 

어떤 곡을 평가할 때든 마찬가지지만, 아름다운 멜로디 역시도 만족감을 주는 균형 감각이 생명입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완결감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방법 말고 달리 쓸 수는 없었겠구나 하는 필연성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97p)

 

 

 

 

ㅡ 에런 코플런드,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 낼 것인가> 中, 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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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6

 

칼 세이건의 강연을 책으로 옮긴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 생각났다.

 

 

한 분야의 아이디어나 생각이 다른 분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분명 바보가 되기 십상이다. 요즘처럼 전문화되어 있는 시대엔 양쪽 분야 모두에서 바보 취급을 받지 않을 만큼 두 분야의 지식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무척 드물기 때문이다.(10-11p)

 

 

어떤 규칙이든 예외는 그 자체로 무척 흥미롭다. 우리가 믿고 있던 예전 규칙이 옳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기존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예외까지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옳은 규칙을 찾아야 하는데, 이 과정이 아주 재미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외적 상황이나 그것과 유사한 효과를 제공하는 다른 상황들을 연구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과학자들은 더 많은 예외적인 경우들을 발견하게 되고 예외적인 상황들이 갖는 공통된 특징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이 과정이 전개될수록 연구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설령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규칙이 틀렸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주저해선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을 발견하는 데 적극적이어야만 과학이 발전하고 더 재미있어진다. 결국 과학자들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최대한 빨리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인 것이다.(28p)

 

 

우리가 과학을 통해 얻어 낸 모든 결론들은 그저 반증되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남아있는 잠정적인 결론이며, 불확실함은 피할 수 없는 요소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추측을 할 뿐이며, 완벽한 실험을 하진 못했기에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

지금 옳다고 믿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지금 알고 있는 해답을 법칙이라 굳게 믿고 있으면, 영영 문제를 못 풀 수도 있다.

(...)

만약 새로운 길을 탐색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면, 또 만약 우리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거나 무지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진실이라 확신하고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힘들여 검사해 볼 생각을 안 할 테니까. 지금 우리가 과학적 지식이라 부르는 것들은 확실한 정도가 제각기 다른 여러 진술들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다. 그중 어떤 것들은 매우 불확실하며 또 거의 확실한 것들도 있긴 하겠지만,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완전히 확실하지는 않다. 과학자들은 이 점에 매우 익숙해 있다. 모르는 채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혹자는 어떻게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갈 수가 있죠?”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도무지 이런 질문이 이해가 안 된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가? 내 경우 대부분을 정확히 모르는 채로 살아왔다. 쉬운 일이다. 내가 진정 알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점점 알아가게 되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42-44p)

 

 

세상에 모든 비과학적이며 이상한 것들이 만들어 내는 문제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중 많은 것들이 미처 생각하기 어려운 문제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저 부족한 정보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점성술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분명 이곳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점성술사들은 치과에 가는 일에도 다른 날보다 더 좋은 날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몇 월, 며칠, 몇 시에 태어났다면, 당신이 비행기를 타기에 더 좋은 날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별들의 위치에 따라 아주 세심하게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세상은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126p)

 

 

리처드 파인만, <과학이란 무엇인가> , 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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