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23

 

 

시간은 늘 우리를 쪽팔리게 한다. 우리는 자라지만, 기록은 남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기록은 정지하기 때문이다. 자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쪽팔림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쪽팔림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17p)

 

 

나는 소설 덕분에 바뀌었다. 달라졌고 (내가 보기에)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됐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됐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 더 열심히 듣게 됐다.

(...)

소설 속의 선택과 현실 속의 선택은 분명 다르지만 선택하기 위해 결정하는 방식은 언제나 똑같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버린 것은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취한 것은 아껴 써야 한다.(40p)

 

 

누군가는 나이가 들면 남성 호르몬이 적어지기 때문에 눈물이 많아진다는 얘기를 한다. 그 말도 맞을 수 있겠다. 내 생각에 눈물이 많아지는 건 경험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이를 먹으면서 수많은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경험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과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다 보니 공감하게 되고, 내 얘기 같고, 내 얘기 같으니 눈물이 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해하지 못하면 눈물은 나지 않는다. 울면 울수록 누군가를 이해하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66-67p)

 

 

소리에 점점 예민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청력이 약해지는 게 정상일 텐데, 내 귀는 날이 갈수록 6백만 불의 사나이가 되어간다. 듣고 싶지 않아도 다 들린다. 카페에 앉아 있거나 버스에 앉아 있으면 모든 소리가 나를 향해 날아든다.

(...)

피곤해진 귀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면 아랫집에서는 피아노를 쳐대고 있고, 윗집 아이들은 쿵쾅거린다. 아랫집 아이는 실력이 늘지 않아서 같은 곡을 계속 반복하고 윗집 아이들은 지나치게 명랑하다. 집에 있기 힘들어 영화라도 한 편 볼까 극장에 가면, 앞자리 아저씨는 대놓고 통화를 하시고, 뒷자리 연인은 영화배우에 관한 토론을 하시고, 애들은 울고, 팝콘은 겁나게 씹어대고, 음료는 빨대로 쭉쭉 빨아먹고, 다 먹었는데 왜 자꾸만 빨아서 바람 소리만 내고, 힘들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갑자기 직원이 튀어나와서는 “통로는 앞쪽입니다”하고 소리를 지르는 통에 영화의 여운이 싹 날아가고, 피곤해진 귀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들어오면, 아, 도대체 피아노는 몇 시까지 칠 예정이며, 아이들은 언제 재울 생각들인가.(105-106p)

 

 

「완벽한 죽음의 나쁜 예」에 수록된 죽음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한 통계는 나이에 따른 자살 성공률이다. 25세 미만 여성이 자살에 성공할 확률은 160분의 1에 불과하지만 65세 이상의 성공률은 3분의 1이다. 남성 노인의 성공률은 2분의 1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인의 자살 행위가 더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충동적으로 자살을 선택하지만 노인들은 심사숙고하여 자살을 선택한다. 혹시 자살에 실패할 경우 얼마나 더 비참해질지 노인들은 아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마음, 꼭 죽고 말겠다는 그 마음, 오랫동안 살았지만 더 이상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단호한 결론이 만들어낸 그 마음이 너무 비장해 보여 마음이 아프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회피하기가 힘들어서 자살을 선택하는 거겠지.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사람들이겠지. 그 골목에서 자살을 선택한 모든 사람들의 명복을 빈다.(218p)

 

 

가장 섬뜩한 공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방 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깜깜한 방 안에서 성냥을 켜는 순간, 아주 적은 빛만 보일 때 공포가 생겨나는 것이다.(221p)

 

 

 

ㅡ 김중혁, <뭐라도 되겠지> 中, 마음산책

,

2017/6/18

 

 

도무지 측정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것을 수치화, 계량화하여 비용편익의 관점에서 최대의 효율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공리주의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모든 사안에 대해 완벽하고도 엄격하게 공리주의를 적용할 수는 없더라도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비단 기부라는 행위에 한정지을 것도 없이 실생활에서도 공리주의적 접근은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선택과 행동을 살펴보면 얼마나 나이브하게 결정을 내리는지 알 수 있다. 한 달이 아닌 하루만이라도 자신의 행동을 녹화하여 살펴본다면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근거에 기반을 두지 않고 막연히 그냥이루어 지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기부는 대개 장기적으로 이루어진다. 기부를 한 달하고 그만둘 게 아니라면 좀 더 주의를 기울여 내 돈이 정말 제대로 된 곳에 쓰이는지 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책에서도 지적하는 것처럼 기부를 한다는 행위만으로 자신의 도덕적 라이센스를 얻고 도덕적 우월감에 취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이 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을 돕는다는 따뜻하고도 고상한 행위를 냉정하고도 불경스럽게 따져 묻는다고 기부라는 행위의 가치가 떨어질 일은 없다. 그럴 리가.

 

도입도 좋지만 기존의 통설과 고정관념을 무수히 깨뜨리는 8장이 가장 통쾌하고 흥미로웠다. 친환경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실제로 환경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공정무역거래를 통과한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노동착취공장의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지와 같은 사안을 공리주의적 접근으로 살펴보며, 다시 한 번 일이라는 게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일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특히 9부는 일견 원론적인 얘기로 들리기도 하고 2017년의 한국사회에 완벽히 적용하기 힘들겠지만 어떤 직업 관련 책들보다 간결하고도 핵심적인 조언을 한다고 생각한다.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과 에코백을 들고 다니는 사람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 부록은 이 책의 주장을 4페이지로 요약하고 있으니 바쁘다면 요약이라도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더불어 저자의 관점과 주장에 관심이 생겼다면 피터 싱어의 효율적 이타주의자를 함께 읽어보는 것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무분별한 선행은 오히려 무익할 때가 많다. 플레이펌프가 대표적 예다. 트레버 필드와 그의 지원자들은 사실관계를 따져 보지 않고 감정에 치우쳤다. 아이들이 행복한 얼굴로 즐겁게 놓고 있을 뿐인데도 마을에는 깨끗한 물이 공급된다는 발상에만 도취된 것이다. 케이스 재단도, 로라 부시도, 빌 클린턴도 플레이펌프가 실생활에 유용하다고 납득할 만한 분명한 증거가 있어서라기보다 혁신적인 기술에 매료돼 지원한 거였다. 플레이펌프 캠페인의 비판자들이 필드와 그 지원군에게 악의가 있었다고 비난한 건 아니었다. 그들이 아프리카 시골 주민들을 진심으로 돕고 싶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선의에만 의존하면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

우리는 남을 도우려 할 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행동으로 옮기곤 한다. 숫자와 이성을 들이대면 선행의 본질이 흐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세상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회도 놓치고 만다.

가령 당신이 번화가를 걷고 있다고 치자.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 부담스러울 만큼 열성적인 태도로 길을 막아서며 대뜸 말을 건다. 당신이 걸음을 멈추자 그녀는 눈부신 화장품에서 투자자를 찾고 있다고 말하며 화장품 시장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 자사 제품이 얼마나 뛰어난지 줄줄 늘어놓는다. 게다가 눈부신 화장품은 자금의 90퍼센트를 제품생산에 투입하고 임금, 유통, 마케팅에는 10퍼센트도 쓰지 않는데도 매우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므로 높은 투자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신이라면 이 화장품 회사에 투자하겠는가?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구미가 당긴다면 전문가와 상담을 하거나 동종업체를 조사해 눈부신 화장품의 실적을 따져 볼 것이다. 투자한 돈으로 최고의 이익을 거둘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의 말만 믿고 선뜻 돈을 내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거라는 말이다. 화장품 회사가 길거리에서 투자자를 모집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해마다 수십만 명이 잘 알지도 못하는 모금 담당자의 말만 믿고 들어 본 적도 없는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그럴진대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 알 턱이 없다.(23-25p)

 

 

효율적 이타주의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효율이타주의가 결합된 표현이다. 각각의 의미부터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이타주의타인의 삶을 개선시킨다는 단순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타주의가 희생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 생각은 다르다. 남을 도우면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도 이타주의다. ‘효율은 주어진 자원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둔다는 의미다. 중요한 건 효율적 이타주의가 그만저만한선행을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힘닿는 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어떤 선행이 효율적인지 판단하려면 착한 일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남을 돕는 특정방식이 소용없다고 주장하거나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어떤 방식이 가장좋은지 따져 보고 그것부터 먼저 실천하자는 말이다.(26-27p)

 

 

우리는 이 세상의 갖가지 문제에 기가 질려 더러 이렇게 중얼거린다. “내가 나서서 도와 봤자 양동이에 물 한 방울 더 보태는 격이지 뭐가 달라지겠어.” 하지만 앞서 본 그래프들이 말해 주듯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물 한 방울의 크기지 양동이의 크기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매우 커다란 물 한 방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같은 비용으로 우리가 누리는 편익보다 100배나 더 많은 편익을 남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걸 똑똑히 확인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수천 명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43p)

 

 

부상자가 이미 넘치는 상황인데도 환자가 계속 몰려들었다. 우리는 환자 이마에 1, 2, 3이라고 표기한 테이프를 붙였다. 1즉시 치료’, 2‘24시간 내 치료’, 3치료 불가능이라는 뜻이었다. 이마에 3이 붙은 사람들은 응급실 맞은편 길가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옮겨 최대한 편안한 상태에서 숨을 거둘 수 있도록 했다. 담요를 덮어 몸을 따뜻하게 해 주고, 냉수를 먹이고, 갖고 있는 모르핀을 전부 투여했다. 1에 해당하는 환자들은 들것에 실어 응급실이나 그 근처 병원 입구로 옮겼다. 2가 붙은 사람들은 환자 ‘1’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게 했다.

(...)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우리도 오르빈스키처럼 선택을 해야 한다.

가령 당신이 자선단체에 얼마간의 돈을 기부하려 한다고 치자. 아이티 지진 구호활동을 펼치는 단체에 기부하면 재난 희생자들을 도울 수 있다. 이는 우간다의 에이즈 퇴치나 당신이 사는 동네의 노숙자 돕기에 기부할 돈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당신의 선택에 따라 생활이 개선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한 군데를 선택하기보다 차라리 모든 단체에 빠짐없이 기부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기부할 돈을 더 마련하거나 기부금을 쪼개 몇 군데로 나눠 보내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가진 돈과 시간은 제한돼 있고 당신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따라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당신은 누구를 도울 것인가?(50-52p)

 

 

<스탠퍼드 사회개혁 리뷰> 블로그에 효율적 이타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게시했다. 한 가지 명분을 다른 명분과 비교하는 것을 두고 자선 제국주의나 마찬가지다. ‘내 명분은 옳고 남의 명분은 귀중한 자원의 낭비라고 본다고 비난했다. “한 사람이 얻는 이득을 다른 사람이 얻는 이득과 저울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명분이 가장 효율적인지 따져 보는 게 비윤리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틀린 말이다. 그 말이 옳다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디저트를 내주는 것보다 편익이 더 크다는 말이 성립할 수 없다. 100만 명의 목숨을 구하는 행위와 10명의 목숨을 구하는 행위가 다르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의사가 감기 환자보다 심장 발작을 일으킨 환자를 먼저 치료할 수 있도록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해 두는 간호사들도 아무 근거 없이 결정을 내리는 셈이다. 그렇지 않다. 타인의 이해관계와 내 이해관계를 비교하는 건 감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62p)

 

 

어떤 명분에 힘을 보태야 할지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령 삼촌이 암으로 사망했다면 암 연구기금 조성에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사별의 아픔을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으로 승화시키는 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암을 다른 치명적 질병보다 우선시해 기부하는 건 자의적인 판단의 결과일 뿐이다. 삼촌이 암이 아닌 다른 질병으로 사망했다 해도 슬픔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때 애도하는 건 그가 고통에 시달리며 예기치 않게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지 특정한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은 아니다.(64p)

 

 

잠비아 출신 경제학자 담비사 모요는 2009죽은 원조에서 국제원조는 해롭다며 중단을 촉구했다. “지난 60년간 아프리카에 1조 달러 이상의 원조가 제공됐지만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모요의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고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조 회의론자들이 내놓은 진단은 오해를 부를 가능성이 매우 놓은 데다 남을 도우려는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주기 십상이다.

우선, 회의론자들은 투입자금의 규모를 강조하는 오류를 범한다. 모요가 책에서 강조한 1조 달러의 원조 지출액이 그렇다. 1조 달러는 막대한 금액처럼 들린다. 일반인은 실감하기 어려운 큰돈이니 여타 지출액과 비교해 그 규모를 가늠해 보자. 연간 세계경제 총생산은 87조 달러다. 미국의 연간 사회보장 지출액은 8000억 달러다. 지난 10년간 세계 화장품 매출은 17000억 달러다. 2001년도에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용처를 알 수 없다고 밝힌 국방 예산만도 23000억 달러다.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1조 달러가 그리 큰돈은 아니라는 말이다. 앞뒤 맥락을 고려하면 이 사실이 더 부각된다.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1조 달러를 원조했으니 연간 원조금은 170억 달러에 못 미친다는 얘긴데, 이를 41200만 명(같은 기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평균 인구 수)으로 나누면 연간 원조금은 1인당 40달러에 불과하다. 원조금 1조 달러가 수십 년에 걸쳐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분배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인당 원조 금액은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둘째, ‘원조가 그만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지난 수십 년간 경제 성장이 가장 더뎠던 나라에 사는 이른바 밑바닥 10억 명조차 삶의 질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1950년에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의 기대수명이 고작 36.7세였지만 지금은 50퍼센트 이상 높아진 56세다. 현실은 담비사 모요가 내린 진단과 정반대다. 원조 자금은 보잘것없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놀랄 만큼 개선된 것이다.(70-71p)

 

 

당신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고 가정해 보자. 불타는 건물로 뛰어들어 문을 부수고 들어가 연기와 불꽃을 헤치고 무사히 한 사람을 구했다면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여러 명의 목숨을 구한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이번 주에는 화재 현장으로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고 다음 주에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또 그다음 주에는 총알을 막아 사람을 구한다면? 뉴스에 등장해 영웅대접을 받을 테고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보다 훨씬 더큰 선행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가장 엄밀한 추정치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약 3400달러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면서도 매년 기부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다. 평생을 통틀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기부는 화염에 휩싸인 건물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처럼 눈부신 액션은 없어도 생명을 구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가장 효율적인 단체에 기부하는 것만으로도 수십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니, 그만큼 대단한 일이 어디 있을까?(80-81p)

 

 

사실 우리는 늘 추가되는 단위를 기준으로 생각한다. 가령 당신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새 스웨터를 받았다고 치자. 스웨터를 받아서 마냥 좋을까? 당신이 스웨터를 몇 장이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

갖고 있는 스웨터가 많을수록 새 스웨터의 가치는 줄어든다. , 스웨터가 너무 많으면 가치는 마이너스가 된다. 이 책도 당신에게 한 권만 있다면 흥미롭게 읽을지 몰라도 한 권 더 생기면 냄비받침으로나 쓸 것이다. 이를 경제학자들은 수확체감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

특정 분야가 이미 많은 관심과 자금을 모은 상태라면 굳이 그 분야에 추가 자원을 보태 봐야 큰 효과를 내기 어렵다. 반면 상대적으로 방치된 분야라면 효율적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88-89p)

 

 

국제사회가 자연재해에 합리적으로 대응했다면 규모가 더 큰 재해와 빈국에서 발생한 재해에 더 많은 구호금이 전달됐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원금은 재해의 규모와 심각성이 아니라 정서적 호소력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지에 따라 분배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사례를 든 이유는 헤드라인 뉴스로 보도되는 재해가 아니라 대대적으로 보도되지 못한 재해에 기부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2008년에 발생한 중국 쓰촨성 지진이 그렇다. 쓰촨성에 지진이 일어났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만 해도 이 책을 쓰기 전까지는 몰랐다. 중국 중심부에 위치한 청두에서 북서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지역에서 발생한 이 지진으로 87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일본 지진의 5, 아이티 지진의 절반에 맞먹는 수다. 그런데도 국제지원금은 5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는 일본이나 아이티에 쏟아진 지원금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수준이다. 무슨 까닭인지 다른 지진 소식처럼 대서특필되지 못했고 그래서 지원금도 적었다. 따라서 기부금의 효과는 쓰촨성 지진 쪽이 더 컸을 것이다.(89-91p)

 

 

수확체감의 법칙은 어떤 사건이 강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켜 돕고 싶은 충동이 생길 때 이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당신처럼 감정에 휘둘려 기부하는 사람들이 분명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난 사고를 접했을 때는 일단 울컥 솟는 감정을 억누르고 유사한 재난이 항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관심이 온통 쏠려 있는 곳이 아니라 당신의 돈이 가장 큰 보탬이 될 곳에 기부해야 한다.

또한 수확체감의 법칙은 남을 돕고 싶다면 부유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도 보여 준다.(92p)

 

 

따라서 어떤 행위의 잠재력을 평가할 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리가 없다는 이유로 묵살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상식이 된 대다수의 윤리적 관념들도 과거에는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성, 흑인, 비이성애자도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여겨졌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1790년 미 의회에 노예제 종식을 청원하면서 철벽 같은 반대에 부딪쳤다. 의회는 이틀간 논쟁을 벌였고 노예제 옹호론자들은 노예 소유주에게는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인종이 뒤섞이면 미국의 가치와 특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며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에도 결국 노예제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 같은 반대론은 용납하기 어렵다. 여성, 흑인, LGBT의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해 힘쓴 운동가들은 승리가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 아니라 목표를 이뤘을 때의 보상이 매우 컸기 때문에 활동을 전개해 나간 것이다.(136-137p)

 

 

내가 배고픈 경찰들에게 도넛을 나눠 주는 자선 단체를 설립했다고 하자. 사명감에 불탄 나머지 사업 경비 중 0.1퍼센트만 간접비로 쓰고 나머지 비용은 나눠 줄 도넛을 사는 데 쓴다. 게다가 단체의 CEO인 나는 보수를 전혀 받지 않는다. 나는 훌륭한 단체를 설립한 걸까? 앞서 봤듯 가장 중요한 건 해당 자선단체가 가져올 영향이다. 당신의 기부금 100달러로 무엇을 하는지, 그 결과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살펴봐야 한다.(154p)

 

 

선진국보다 더 쉽게, 더 적은 비용으로 인명을 구할 수 있으므로 빈국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은 앞서 설명했다. 그렇다면 교육, 식수 공급, 경제력 강화 등 여타 문제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역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영역들이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유독 보건 분야가 돋보인다. 첫째, 검증된 성과다. 천연두 근절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소아마비, 홍역, 설사병, 기니충병(메디나충증) 등 기타 보건 영역에서도 개발원조가 큰 기여를 했다. 반면 원조와 경제 성장의 상관성은 그만큼 뚜렷하진 않다. 둘째, 보건 개입 특성상 증거가 더 확실하다. 가령 미국에서 알벤다졸이라는 약이 회충 구제에 효과를 보였다면 케냐나 인도에서도 동일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은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도에서 성과를 거둔 교육 사업이 케냐에서도 통할 거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문화와 교육 인프라의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169-170p)

 

 

이처럼 열악한 오동환경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이곳에서 생산된 제품의 불매운동을 전개하는 단체들이 제법 있다. (...) 반대 운동은 고매한 의도에서 출발했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경악을 금치 못해 반대 운동에 나서는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노동착취 공장 제품을 사지 않는 건 잘못이다. 5장에서 살펴봤듯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착취 공장이 경제적 압력에 굴복해 문을 닫으면 기존 노동자들이 더 나은 일자리를 얻을 것이라 짐작하기 쉽다. 과연 그럴까?

현실은 반대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노동착취 공장이 좋은 일자리다. 대안이라고 해 봐야 저임금 중노동에 시달리는 농장 일꾼, 넝마주이 등 더 형편없는 일자리뿐이고 심지어 실직자가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재활용 플라스틱을 찾아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캄보디아 여성 핌 스레이 라스는 공장에서 일하면 정말 좋겠어요. 거긴 그래도 그늘에서 일할 수 있잖아요. 여긴 너무 더워요라고 말했다.

기꺼이 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노동착취 공장이 상대적으로 좋은 일자리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들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노동착취 공장을 택한 노동자들이며, 갖은 애를 쓴 끝에 겨우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도 있다. 21세기 초반에 라오스캄보디아버마에서는 400만 명이 노동착취 공장 일자리를 얻기 위해 태국으로 이주했다. 볼리비아에서도 많은 이들이 노동착취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 추방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브라질로 불법 입국했다. 브라질 노동착취 공장 노동자들의 연평균 임금은 2000달러다. 많다고 할 순 없지만 농업과 광업이 주된 산업인 볼리비아의 평균 임금에 비하면 600달러 더 많다. 한편 방글라데시 노동착취 공장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은 2달러, 캄보디아는 5.5달러, 아이티는 7달러, 인도는 8달러다. 터무니없는 저임이지만 현지 하청공장 일당이 1.25달러임을 감안하면 노동착취 공장으로 몰리는 것도 당연하다. 선진국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추방을 무릅쓰면서까지 열악한 노동착취 공장에서 일하려는 걸까? 1장에서 설명했듯 부유한 나라 사람들은 절대빈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경제학자들은 노동착취 공장이 가난한 나라에 득이 된다는 데 의문을 달지 않는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좌파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고용 증대 방식이 전 세계 극빈층에게는 반가운 희소식이라는 게 압도적인 주류 견해라고 말했다.

(...)

이들 노동자들이 처한 가혹한 노동환경은 가히 공분을 살 만하다. 그렇다고 노동착취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 대신 국내 생산 제품을 구입하는 건 해결책이 아니다. 애초에 착취공장을 선망의 직장으로 만든 절대빈곤을 해결하려 더 노력하는 게 올바른 대응이다.

(...)

그런데 알반 커피보다 몇 달러 더 주고 공정무역 커피를 사면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객관적 증거에 따르면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첫째,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한다고 해서 무조건 가난한 나라의 빈곤층에 수익이 돌아가는 건 아니다. 공정무역 인증 기준은 상당히 까다롭다. 가난한 나라의 농부들은 이 기준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공정무역 커피 산지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멕시코, 코스타리카 등이다. 에티오피아 같은 최빈국과 비교하면 10배나 부유한 나라들이다. 설령 공정무역 제품 구입이 농부들에게 더 많은 몫을 되돌려 주는 방법이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의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최빈국의 비공정무역 상품을 사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소득 수준에 따라 돈의 가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전 세계 경제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살펴본 1장을 떠올려 보자. 코스타리카는 에티오피아에 비해 10배 부유하기 때문에 평균적인 코스타리카인이 체감하는 몇 달러의 가치보다 평균적인 에티오피아인이 체감하는 1달러의 가치가 더 크다.

둘째, 공정무역 제품이라는 이유로 소비자가 추가로 지불한 돈 중 실제로 농부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건 극히 일부다. 나머지는 중개인이 갖는다. 공정무역재단은 소비자가 추가로 지불한 금액 중 얼마가 커피 생산자에게 돌아가는지 알려 주는 자료를 제공하지 않으므로 외부에서 독립적으로 진행한 연구를 참고해야 한다. 세계은행 경제 자문관인 피터 그리피스가 영국 카페 체인점의 의뢰로 수행한 용역연구에 따르면 추가 금액 중 가난한 나라의 커피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1퍼센트 미만이다.

셋째,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그 적은 몫마저 더 많은 임금으로 바뀐다는 보장이 없다. 공정무역 인증은 인증받은 단체가 생산한 제품에 더 높은 가격을 쳐주는 절차이지 해당 단체에 소속된 생산자들에게 더 높은 임금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 런던대 동양아프리카연구소의 크리스토퍼 크래머 교수가 이끈 연구팀이 4년에 걸쳐 에티오피아와 우간다의 공정무역 노동자 임금을 조사한 결과, 공정무역 노동자들은 비공정무역 노동자들에 비해 임금이 더 낮고 노동조건도 열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공정무역이 큰 성과로 내세우는 지역공동체 사업에서도 정작 극빈층이 소외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쯤 되면 공정무역 제품을 살 이유가 없다. 기껏해야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의 노동자에게 아주 미미한 금액을 보태 줄 따름이다. 차라리 더 저렴한 상품을 사고 그렇게 절약한 돈을 비용효율성이 높은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게 낫다.

(...)

안타깝게도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널리 보급된 방법 중 대다수는 그다지 효과가 없다. 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방법이 전자제품을 쓰지 않을 때 전원을 꺼 두라는 지침인데 실제 효과는 미미하다. 휴대폰 충전기를 1년 내내 꽂아 두는 것보다 뜨거운 물로 목욕 한 번 더 하는 게 탄소 발자국을 더 늘린다. 대기전력 소비의 주범인 TV 플러그를 1년 내내 꽂아 두는 것보다 자동차로 2시간 달리는 편이 온실가스를 더 많이 배출한다. 방에서 나갈 때 전등을 끄라는 조언도 효과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전등이 가정용 에너지 사용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겨우 3퍼센트다. 집에 아예 불을 켜지 않고 살아도 탄소 배출량을 감축시키는 효과는 미미하다. 비닐봉지 사용은 어떨까? 비닐봉지를 전혀 쓰지 않아도 연간 감축되는 온실가스 배출량은 100킬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도 부풀려 잡은 수치이지만 이마저도 당신의 연간 탄소배출량 중 0.4퍼센트에 불과하다. 현지 생산 제품을 구매하면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는 것도 과장된 얘기다. 식품 생산으로 생겨나는 탄소발자국 중 10퍼센트만 운송 과정에서 발생하고 80퍼센트는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실 국내산인지 수입산인지를 따지는 것보다 구매하는 식품 종류가 더 중요하다. 수입 식품을 전혀 사지 않는 것보다 일주일 중 하루는 붉은색 육류 및 유제품을 먹지 않는 것이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데 더 효과적이다. 수입 식품보다 국내산 식품 탄소발자국이 더 큰 경우도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북유럽인들이 자국에서 생산한 토마토를 먹으면 스페인에서 수입한 토마토를 먹을 때보다 탄소발자국이 5배 커진다. 온실재배에 필요한 난방 및 조명 시설 가동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량이 수송에 따른 배출량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개인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고기 섭취 줄이기, 장거리 이동 줄이기, 가정에서 전기 및 가스 사용 줄이기 등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바로 탄소상쇄다. 다른 곳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거나 온실가스 배출을 막는 사업에 기금을 내는 탄소상쇄는 개인 차원에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보다 효과가 더 크다.(182-191p)

 

 

탄소상쇄에 반대하는 여타 논리들도 있지만 대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조지 몬비오는 앞서 인용한 글에서 탄소상쇄를 중세시대의 관행에 빗대 면죄부 판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를 인터넷 풍자 사이트의 불륜상쇄 서비스와 비교해 보자. 이 웹사이트는 당신이 파트너 몰래 바람을 피우면 대기 중에 상심, 고통, 질투를 배출하는 셈입니다. 불륜상쇄는 파트너를 속이지 않고 가정에 충실한 분에게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당신의 불륜을 상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고통과 불행이 상쇄되므로 당신은 떳떳하게 살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한다.

두 경우 모두 비유에 결함이 있다. 면죄부를 사더라도 타인에게 끼친 피해나 당신이 저지른 죄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효율적인 탄소상쇄는 다르다. 당신의 탄소배출로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입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평생 탄소를 배출하면서도 동시에 효과적으로 상쇄한다면 평생에 걸친 총량으로 따져 볼 때 당신은 기후변화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 셈이다. 불륜의 경우 정신적 충격의 여파가 피해를 입은 상대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상쇄를 통해 불륜 행위의 총량을 그대로 유지한다 해도 그렇다. 반면 탄소상쇄는 당신의 배출량으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 일 자체를 막는다. 애초에 불륜을 저지르지 않은 상태와 동격인 것이다.(195-196p)

 

 

요약하자면 이렇다. 기부를 하면 당신의 돈을 가장 효율적인 사업에만 집중시킬 수 있다. ‘최선의 활동과 그럭저럭 좋은활동의 결과가 다르다는 점만 봐도 효율적인 기부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윤리적 상품을 더 많이 구입하는 데 더 많은 돈을 쓰는 건 목표를 정확히 공략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런데 윤리적 소비와 기부의 차이는 이게 다가 아니다. 윤리적 소비 물결이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다고 생각할 만한 까닭이 있다. 바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허가moral licensing’효과 때문이다. 이는 착한 일을 한 번 하고 나면 이후에 선행을 덜 실천하는 것으로 보상받으려 하는 경향을 말한다.

(...)

도덕적 허가 효과는 사람들이 실제로 착한 일을 하는 것보다 착해 보이는 것, 착한 행동을 했다고 인식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보여 준다. 에너지절약 전구를 구입하는 행위로 내 몫을 했다고 생각하면 조금 뒤에 잔돈 몇 푼을 훔쳐도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이 흔들리지 않는다.

도덕적 허가 효과는 결심을 비틀 수 있다. 다른 사람이 효율적인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향후 남을 돕는 횟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이타적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면 의미가 없다.(199-201p)

 

 

열정을 따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어이없는조언이기 때문이다. ‘적성에 꼭 맞는직업을 찾아야 된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지만 이미 가슴속에 품고 있던 열정을 발견하고 그에 맞는직업을 찾으라는 건 전적으로 틀린 말이다. 한번 자문해 보자. 열정을 따르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까? 최대관심사를 찾고 그 관심사에 부합하는 직업을 골라 그저 밀어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걸까? 객관적인 증거를 두고 본다면 답은 그 반대다.

우선 대다수 사람들이 열정을 보이는 분야는 직업 세계에 들어맞지 않는다. 캐나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열정을 쏟는 분야가 있다고 답한 84퍼센트의 학생 중 90퍼센트가 스포츠, 음악, 예술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통계 자료를 보면 스포츠, 음악, 예술 산업과 관련된 일자리는 3퍼센트에 불과하다. 이 학생들 중 절반만 열정을 따른다 해도 대다수가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이 경우 열정을 가진 분야에서 일하라는 조언은 오히려 해가 된다.

(...) 유달리 뛰어난 재능을 지닌(또는 운이 좋은)소수만 안정적으로 생계를 꾸려 갈 수 있는 스포츠 및 음악 분야가 그렇다. 미국 고등학교 운동선수 중 프로로 진출하는 사람은 1000명 중 1명꼴도 안 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직업에 대한 열정이 없다. ‘열정을 따르라는 조언은 그런 사람들을 어설픈 자기성찰로 내몰아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할 수도 있다.(208-209p)

 

 

세계 소득분포의 85퍼센트는 다름 아닌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 극빈층은 생산적인 활동에 제약이 많은 환경에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254p)

 

 

 

윌리엄 맥어스킬, <냉정한 이타주의자> , 부키

,

2017/6/17

 

 

큰 줄기에서 보면 중복되는 내용들이 많고 인용하는 연구들이 의심스러운 부분들도 있지만 마케팅과 광고 세상에 대해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들과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가볍게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틀리지 않는 법을 읽다가 힘들면 쉬어가는 느낌으로 정신의학의 탄생과 이 책을 함께 읽음. 심심하면 영화 존시스도 찾아봐야지.

 

 

 

음식, 음료수, , 신발, 화장품, 샴푸 등 다양한 제품들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이나 기호들이 상당 부분 어린 시절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만큼 두뇌 깊숙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심각한 뇌졸중을 겪은 이후에도 어릴 적 좋아했던 딸기 향이 그대로 살아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실제로 많은 연구 결과들이 특정 브랜드 및 제품에 대한 취향, 또는 그 가치가 이미 7세 무렵에 개인의 마음속에 뿌리내린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하지만 이 책 전반에서 소개하고 있는 치밀한 마케터, 간교한 광고업체, 오로지 이윤만을 좇는 기업들에 대한 연구 결과를 통해, 나는 특정 브랜드에 대한 기호가 그보다 훨씬 전인 4~5세 무렵에 이미 뚜렷한 형태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20-21p)

 

 

어릴 때 사용했던 브랜드를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은 향수nostalgia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특정 제품과 관련된 향수는 섬세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마케터들이 우리의 두뇌 속에 심어놓은 것이다. 마케터들은 소비자들이 그들의 브랜드를 집, 그리고 가족과 관련된 따스한 추억과 연결시키도록 조작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정 브랜드를 사용하면서 과거로 돌아가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연결되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내 친구 하나는 오로지 크레스트 치약만을 고집한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치약을 쓰면 부모님을 배신한다는 생각이 들어.”(42p)

 

 

많은 연구 결과들은 항균 세정제를 사용한다고 해서 신종 인플루엔자와 사스를 막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바이러스들은 공기 중 수분 입자를 타고 전파된다. 즉 감염된 사람들의 재채기나 기침에 의해, 또는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오염된 물체를 접촉한 손으로 눈이나 코를 문지를 때 전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우리 모두를 항균 마니아로 몰아갔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세계 최대 세정제 생산 기업인 퓨렐의 매출은 50%나 성장했다. 또 클로록스 세척제는 2009년 이후 23%의 성장을 일구어냈다.(48p)

 

 

예를 들어 켈로그는 신종 인플루엔자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강한 면역 체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라이스 크리스피와 코코아 크리스피를 새로 출시했다. 그리고 이를 면역 체계를 도와주는 항산화제와 영양분을 담고 있다고 광고하기 시작했다. 물론 거기에는 몸에 나쁜 설탕이 40%나 들어 있다.(51p)

 

 

상어의 습격으로 사람이 죽을 확률이 야자나무에서 떨어진 코코넛을 맞고 죽는 확률보다 더 낮다고 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상어가 등장하는 공포 영화나 드라마를 어릴 적부터 보고 자라난 우리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53p)

 

 

사실 마멀레이드는 신선 식품이 아니다. 만들자마자 팔아야 하는 그런 식품이 아닌 것이다. 여러분이 집어 든 마멀레이드는 이미 8개월 전부터 그 매대 위에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케터들은 소비자들에게 그 불편한 진실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마멀레이드 마케터들은 병뚜껑에 흰색 스티커 띠를 부착함으로써 신선함이라고 하는 환상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 띠가 온전하게 붙어 있다는 말은 아무도 뚜껑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 띠는 소비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신선한 제품을 고르신 겁니다!’

호텔 역시 이와 비슷한 전략을 쓰고 있다. 호텔 직원들은 욕실 변기 뚜껑 위에 종이 띠를 감아두거나, 미니바 위의 물 컵에 종이 뚜껑을 덮어놓는다. 보잘것없는 종이 한 장으로 청소 후에 아무도 변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설거지를 하고 나서 아무도 그 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환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참으로 놀랍다. 그리고 분명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한 호텔 직원의 고백에 따르면, 그들은 설거지를 하지 않고 계속해서 수건으로만 닦아놓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 뚜껑은 손님들에게 청결함의 환상을 선사하고 있다.(72-73p)

 

 

홀푸드 매장 어디에서나 얼음 매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진열해놓은 후머스나 오이 요거트 딥같은 식품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식품들도 이렇게 냉동 보관할 필요가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얼음은 홀푸드의 또 다른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 즉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식품들이 신선함으로 가득하다는 인상을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세균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무의식은 토르티야, 핫도그, 피클 같은 음식들마저도 얼음 침대 위에 있을 때 더 신선하고 더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소다 음료나 주스는 적당히 땀을 흘리고 있어야 한다. 전문용어로 스웨팅sweating'이라고 하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매장들은 주스와 우유가 들어 있는 냉장고의 온도를 적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와 비슷하게 대형 슈퍼마켓들은 채소에 물을 뿌려 이슬방울이 달리게 한다. 이는 덴마크에서 처음 시작된 유행이다. 얼음침대와 마찬가지로 스프링클러 시스템 역시 신선함과 순수함의 상징을 맡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방울이 달려 있을 때 채소는 더 빨리 시든다고 한다. 인식과 현실 사이에 큰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75p)

 

 

내 친구 한 명은 예전에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테네리페에서 고기잡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잡은 고기를 주로 그 지역의 유명 레스토랑인 로스 아브리고스에 납품하였다. 그런데 그 레스토랑 사장은 그에게 특별한 요청을 했다. 그것은 그가 잡은 해산물들을 그 레스토랑이 아니라, 인근의 작은 항구에 있는 조그맣고 오래된 배로 실어달라는 것이었다. 그 배는 내 친구는 물론 당시 어떤 어부들도 사용하지 않는 구식이었다. 오전 10시에서 오후 3시 사이에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들은 요리를 기다리는 동안 늙은 스페인 어부가 모는 조그마한 배가 천천히 항구로 들어와서, 마치 자신이 갓 잡아 올린 양 그 생선들을 레스토랑 직원들에게 건네주는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된다. 그야말로 완벽한 연출이다. 하지만 손님들은 모두 거기에 속아 넘어간다. 덕분에 레스토랑은 언제나 손님들로 넘쳐나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다 지쳐 그냥 돌아간다.(80-81p)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석류가 자외선으로 인한 피부 손상을 완화시키고, ‘혈중지질농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그게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 라더라도).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대체 누가 이러한 연구의 자금줄을 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중 하나로 희한하게 생긴 석류 주스를 생산하고 있는 ‘POM 원더풀이 있다. 어떠한 분야든 충분한 연구비를 지원한다면, 그 어떤 제품에 대해서도 단점을 보완하는 증거를 발견해낼 수 있다. 현재 POM55건의 연구에 자금을 대고 있으며, 전 세계 과학자 및 대학들을 대상으로 3400만 달러 이상의 연구지원비를 지원하고 있다. 물론 석류는 우리 몸에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다른 과일들, 채소, 생선, 오트밀, 올리브 오일, 건강한 라이프스타일, 운동, 체중 조절 역시 비슷한 정도로 우리 몸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석류 주스에 값비싼 항산화제가 들어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다. 항산화제의 기능에 대해서 할인매장이나 건강식품의 매장에서 외치는 내용들을 제외하고는 잘 모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책하지는 말자. 여러분만 모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말해서 항산화제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불안정한 물질인 활성산소를 중화시키거나 분해하는 물질을 말한다. 오염된 환경, 지나친 직사광선, 건강하지 못한 라이프스타일 등으로 인해 우리 몸은 자연스럽게 활성산소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렇게 생성된 활성산소를 없애기 위해 이상하게 생긴 보라색 주스 1온스(28g)에 굳이 2달러나 지불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네팔이나 열대우림으로 여행을 갈 필요도 없다. 우리 곁에 있는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로부터 항산화제를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런던 대학교의 데이비드 젬스 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음식에 들어 있는 항산화 물질이 아니라 과식이다.····· 충분한 운동을 하자. 강아지와 산책을 나가보자.”(286-287p)

 

 

기업들은 소비자들에게 자연적인이라는 표현이 건강한과 동일한 의미라고 강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완전한 거짓말이다. ‘자연적인이라는 표현이 FDA 규제 범위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 어떤 기업이라도 모든 제품에 자연적인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실제 감자 조각이 아니라, 감자를 가공하여 만든 감자 칩은 기술적 차원에서 자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지방과 나트륨 함유량이 높고 영양분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가공식품에 불과하다.(289p)

 

 

과일로 만든 스낵이나 음료수, 시리얼, 쿠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또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부모들을 위한 다양한 제품들이 포장 박스에서 주장하고 있는 생과일로 만든또는 생과일즙을 담은이라는 표현은 어떤가? 이러한 표현을 쓰기 위해 식품이나 음료수에 생과일을 얼마나 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딸기향 롤빵 한 덩어리에 과즙 반 방울이랑 설탕 8g이 들어 있다고 해도 절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는 식품업체들이 아이들과 지갑을 들고 다니는 부모를 동시에 공략할 수 있는 대표적인 마케팅 전략이라고 하겠다. 다시 주스 제품으로 시선을 돌려, 칼슘 첨가 오렌지 주스같이 영양분을 강화했다는 주장은 어떠한가? 워싱턴포스트의 한 기사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스턴트식품에 영양분을 강화했다고 하더라도 원래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상쇄할 만큼은 아니다. 가령 프루트 룹스는 이제 섬유소를 드세요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3/4컵에 해당하는 시리얼에 들어 있는 9g의 설탕은 미약하게 첨가된 섬유소의 장점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우리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식품 마케터들은 종종 낮은 트랜스지방이라는 표현을 내세우기도 한다. 식품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기름에 수소를 첨가할 때 생성되는 지방인 트랜스지방이, 미국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가장 주요한 원인인 심장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몇 년 전 FDA의 발표를 떠올려보자. 당연하게도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식품 기업들은 그 발표 이후 즉각 제품 포장에서 트랜스지방 제로를 외쳐대고 있다. 이러한 표기에 대한 가이드라인 덕분에 이 제품들의 트랜스지방 수치는 실제로 1인분당 0.5g 이하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트랜스지방은 낮은 대신 포화지방이 높다는 사실이다. 포화지방은 트랜스지방만큼 우리 심장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수류탄이나 칼을 숨기고 다니면서 총은 없습니다!”라고 외치는 형국이다.(292p)

 

 

젊은 외모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비타민이 들어 있는 음료나 알약에 돈을 쓰기보다 적정량의 건강 음식을 섭취하고 운동에 집중하는 편이 더 낫다”(294p)

ㅋㅋㅋㅋ 내가 썼다면 여기에 선크림을 추가했을 듯.

 

 

그렇다면 이처럼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기업들의 제품을 돈을 더 많이 주고 소비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아니면 아사이베리 주스를 마시면서 우리 몸이 더 건강해지고 있다고 믿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느끼고만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 많은 징후들이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연구 결과는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제품들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다소 책임감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유기농 햄버거를 먹고 친환경 프리우스를 몰면서 동시에 악어가죽 부츠를 싣고 콜라 캔을 함부로 버림으로기존의 선행을 상쇄시킨다. 한 연구는 하이브리드 차 운전자들이 실제로 주행 거리가 더 길고, 교통 위반을 더 많이 저지르고, 사고를 더 많이 내고, 심지어 보행자들에게 상해를 더 많이 입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더욱 아이러니한 사실은, 하이브리드 차처럼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제품을 소비하는 행동이 오늘날 일종의 과시적 소비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감탄을 받기 위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

실제로 많은 소비자 단체들이 도요타를 세계적인 친환경 브랜드로 꼽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요타는 자동차기업이 아니던가?

프리우스의 마케팅 전략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경쟁적 이타주의에 대한 완벽한 사례라 하겠다. 하이브리드 차를 몰고, 친환경 제품을 사는 것처럼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싶다기보다, 자비심을 뽐내고 사회적 명성을 높이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경쟁적 이타주의의 개념을 지지하는 한 연구에 따르면 (표면적으로) 환경 의식이 투철한 소비자들은 아무도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지 않을 때,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는 일을 회피하는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을 통해 전구를 살 때, 이들은 환경과는 무관하고 도덕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은 기업들의 (그리고 더 싼) 제품들을 구매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볼 수 있는 곳에서는 재활용 포장지에 들어 있는 LED 전구를 선택한다.(299-301p)

 

 

희망이란 언젠가 이룰 수 있을 완벽한 가정, 또는 꿈꾸고 있는 사회를 위해 우리가 떠안아야 할 부채와 같은 존재다. 그리고 소음 가득한 도시 한복판에 살면서 자연을 더 가까이 느끼기 위해 사야 할 다양한 캠핑 장비이기도 하다. 또 한 번도 타보지 못할지 모르는 카약을 차에 매달기 위한 카약랙이자, 절대 도전해보지 못할 험준한 산을 위한 등산화, 그리고 한 번도 펼쳐 보지 못할 수도 있는 텐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는 몸매를 만들기 위해 찾아가는 헬스클럽이자, 후손들에게 더 좋은 지구를 물려주기 위해 선택하는 목초 먹인 소의 고기이며, 언젠가, 어디선가 입게 될 것이라 상상하면서 사놓은 값비싼 옷이자, 우리의 인생을 더 멋있게 만들어주겠다고 주장하는 모든 제품들이다.(307p)

 

 

제조기업 및 유통업체들은 가격에 대한 소비자들의 민감성이 하루, 일주일, , 년 단위로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때로 우리는 세일 품목을 건지기 위해 매장을 찾지만, 절박한 상황이나 심각하게 배가 고플 때에는 가격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과 관련하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첨단 데이터 마이닝 기술 덕분에 오늘날 일부국가의 할인매장과 대형 유통업체들은 사람들이 언제 기꺼이 돈을 더 지불하려고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이에 따라 가격을 수정한다.

이를 위해 디지털 가격표가 등장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일부 대형마트들은 거의 하루 단위로 가격표를 수정하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 심지어 시간 단위로 조정을 하는 마트도 있다.(339p)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마케팅과 광고 세상에서 우연이란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케터와 광고업체들이 소비자를 압박하고, 부추기고, 유혹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많은 속임수와 음모, 그리고 거짓과 조작을 확인했다. 공포와 성, 유명인, 뉴에이지 비전, 불안, 향수, 데이터 마이닝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는지도 알아보았다. 물건을 팔아먹기 위해 우리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두려움과 꿈, 욕망을 먹이로 삼는 전략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너무나 어린 나이부터, 심지어 엄마 배 속에서부터 공략하고, 때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들을 동원하여 우리를 평생 고객으로 만드는 전략에 대해서도 들여다봤다. 그리고 구매 습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동료압박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확인했다.(360-361p)

 

 

어쩌면 당연하게도 챗스래즈 연구 팀은 이웃들이 그들 부부의 미묘한 제안을 접하고 나서 갖고 싶고 사고 싶어했던 것들 중에는 유명한 대형 브랜드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기존의 광고 전략이 구전 마케팅에 의해 확대되었을 때 최고의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나의 이론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실험을 통해 구전 마케팅의 엄청난 힘에 깜짝 놀랐다. 사실 그동안 나는 동료압박의 위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러나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이웃들은 모겐슨 가족이 추천했던 것들 중 평균 세 가지 브랜드 제품들을 구매했다는 결과는 이러한 걱정을 말끔히 날려주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번 실험이 모겐슨 가족의 실제 소비 패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모두 끝났을 때 에릭과 지나, 그리고 세 아이들은 한 달 동안 떠들고 다녔던 열 가지 브랜드들 중 6개를 계속해서 구매하고 사용하고 있었다.’(372p)

 

 

fMRI 연구팀은 6주 동안 6주 동안 수백만 건에 달하는 분석 작업을 마치고 마침내 내게 결과를 보내왔다. 그리고 그 결과를 통해 나는 비로소 모겐슨 가족이 이웃 주민들을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케팅 위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정확한 이유를 확인하게 되었다.

기존의 TV나 잡지 광고와는 달리 다른 사람이 어떤 자동차나 책, 뮤지션, 화장품, 와인을 추천할 때 우리 두뇌 속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이성적, 실무적인 영역은 그 활성화 정도가 크게 떨어지는 반면, 욕망, 역겨움, 자신감, 수치, 죄책감, 동정, 그리고 사랑과 같은 사회적 감성을 담당하는 두뇌 영역인 뇌도insula는 크게 활성화된다. 또한 스캔을 통해 나온 자료들은 동료의 추천이 두뇌의 감각 영역을 자극하고, 앞서 중독에 관해 논의하면서 설명했던 생물학적 욕망과 유사한 감각도 자극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구전 효과는 우리 두뇌 속 다양한 트랙 위에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쇼핑학에서 한 실험을 통해 밝힌 것처럼, 특정 브랜드나 제품이 두뇌의 더 많은 트랙에 영향을 미칠수록 우리는 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끼며, 자연스럽게 그 추천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이러한 두뇌의 메커니즘은 오늘 아침에 보았던 TV 광고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반면, 구전으로 인한 정보는 몇 주일 동안 기억 속에 보존될 수 있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설명해주고 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두뇌의 메커니즘은 구전 정보를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려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문을 퍼뜨리려는 심리의 진화적 근거를 파헤치는 최근의 한 연구는(소문을 퍼뜨리는 것 역시 구전 마케팅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 자신에게 뭔가 좋은 것을 추천할 때(가령 이 와인 정말 맛있어라든가 이 화장품을 쓰면 5년은 젊어 보일 거야”). 그리고 우리가 그 말을 반복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두뇌는 기분을 좋게 만드는’, 그리고 중독은 물론 감각추구와 관련이 있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보상으로 준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자신이 좋아하고 신뢰하는 사람들한테서 특정 브랜드에 대한 추천을 들을 때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마다 우리의 두뇌는 감성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물론, 실질적인 화학적 보상을 선사하는 것이다. 즉 그와 같은 표현이 흘러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다.(375-376p)

 

 

2011년 하버드 대학의 바랏 아난드와 전 객원 연구원인 알렉산더 로진스키는 신뢰하고 인정하는 인물이 추천할 때 사람들은 그 제품을 더 쉽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들이 유명 인쇄매체와 온라인 뉴스사이트에 동일한 광고를 각각 게재했을 때 사람들은 유명 인쇄매체를 더 강하게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이 조작한 것이 아니라, 진정성이 있고 자연발생적이라고 인식될 때 구전효과는 가장 강력한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시 모겐슨 가족의 실험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모겐슨 가족은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했고, 성공적이고, 부유하고, 매력적이고, 화목한 가정이었다. 우리 모두가 선망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가족이다. 간단하게 말해 사람들이 존경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상형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웃들이 그들을 쉽게 신뢰했던 것이다.

우리 각자의 사회적 인맥 내부에는 모겐슨 가족과 같은 존재들이 있다. 우리가 바라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들이 사고 행동하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 함으로써 그들이 누리고 있는 성공과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느낀다. 인기가 높은 유명인들과 마찬가지로 모겐슨 가족에 대한, 또는 모겐슨에 해당하는 우리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인정과 존경은 우리 자신을 그들이 추천하는 모든 브랜드로 넘어가게 만든다.(381p)

 

 

마틴 린드스트롬,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6/14

 

 

사모스 출신의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07년경에 아테네에 학원을 세웠다. 그의 철학의 핵심 단어는 ‘쾌락’이었다. 사실 쾌락을 추구한다는 그의 철학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달랐지만 큰 의혹과 적개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그의 추종자들은 여자와 노예를 포함하는 친밀한 공동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더 오해를 받은 것 같다. 그의 은둔과 쾌락의 실제 내용은 이런 것이다.

 

쾌락이 목표라고 할 때 그 뜻하는 바는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 아니라 (·····) 육체의 고통, 정신의 교란으로부터 해방이다. 유쾌한 삶을 가져오는 것은 음주나 끊임없는 향연도, 성적 쾌락도, 또 값비싼 식탁 위의 생선과 그 밖의 진수성찬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취사선택 행위의 원인을 찾아내고, 정신에 최대의 혼란을 일으키는 억측을 추방하는 냉정한 이성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쾌락은 마음껏 먹고 마시고 신나게 놀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멀리한 안정된 마음의 상태, 곧 아타락시아(마음의 평정)를 의미한다. “죽은 뒤 신체를 구성하는 원자들이 해체되면 다른 삶이란 없다는 것,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신들은 이 세상에 아무런 관심이 없음을 깨달음으로써 아타락시아를 얻을 수 있다.” (89-90p)

 

 

그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때에는 퍽 근사하게 들리지만, 질문을 해 보면 그는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는 장광설에서는 대가였고 지성에서는 한심하였으며 이성에서는 빈껍데기였다. 그라는 나무는 멀리서 보면 잎이 무성하여 눈길을 끌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열매라고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진상을 알게 된 나는 더 이상 그의 학교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150p)

 

 

이 시대 주류의 사고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뒤집고 “믿기 위해 이해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 것’은 먼저 믿음부터 가져야 하고 그 근거 위에서 다른 것들을 이해한다. 그러나 아벨라르의 ‘믿기 위해 이해한다.’는 태도는, 먼저 사물을 따져 보아야 하고 그것이 확실하게 이해가 되면 그 다음에 그것을 믿는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을 수는 없는 일이며, 자신도 듣는 사람도 지성으로써 파악할 수 없는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그에게 신앙은 계명을 맹목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이다.(154p)

 

 

인간의 지성은 갈수록 발달하고 사회는 더욱 문명화되는 것일까? 만일 그랬다면 지금쯤 우리는 지상낙원에서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을 것이며, 비참한 탄압과 야만적인 전쟁 같은 것은 아예 사라졌을 것이다. 마녀사냥과 같은 현상을 보노라면 우리 마음속에 집단 광기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마녀사냥은 그 모습 그대로는 근대 초 유럽의 특이한 현상이지만 유사한 현상은 언제나 있었다. 사회 전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불순한 세력! 그것은 히틀러에게는 유대인이고, 파시스트들에게는 공산주의자들이며, 남한 정권에게는 북한이 사주하는 불순 세력이고 북한 정권에게는 ‘남한과 미제의 스파이들’이다. 때로 권력은 일부러 그런 위험세력을 조작해 내서 사람들을 선동하려 한다. 그런 조작이 너무나도 쉽게 먹혀 들어간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내면에 ‘마녀사냥’식의 충동이 잠재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194-195p)

 

 

역사 서술에서 후추만큼 독특한 지위를 누리는 식물도 없다. 세계사 교과서를 비롯한 여러 책에서 이런 류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을 것이다.

“중세 유럽인들은 후추에 열광하였다. 냉장고가 없던 그 시절에는 고기가 쉽게 변질되어 그 맛을 감추기 위해서 후추를 쳐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후추 맛에 매료되었고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아시아에서 생산된 후추가 대상들의 중개로 아랍 지역을 거쳐서 유럽에 도착하면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졌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바닷길을 통해서 직접 아시아로 가려고 했다.”

후추의 용도에 관한 위 글은 사실 틀린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고 전문 역사가들마저 틀린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후추는 변질된 고기 맛을 감추느라고 사용되지는 않았다. 상한 고기의 맛을 좋게 하는 정도로 쓰기에는 후추 값이 너무 비쌌다. 그러면 후추는 어디에 쓰였는가? 답은 후추 맛 그 자체를 즐기느라고 쓰였다는 것이다.

(...)

이런 식으로 후추는 뜻하지 않게 상층 계급과 하층 계급을 구분하는 상품이 되었다. 귀족을 좇아가려는 부르주아들, 또는 상층 부르주아를 좇아가려는 중하층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보다 높은 사람들을 따라하려 했고, 그래서 그들도 기회가 되면 음식에 후추를 팍팍 쳐서 먹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물건이 고급이라는 것은 그 물건을 구하기 힘들 때의 일이다.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직항로가 열린 후 후추가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값이 급격히 떨어지자 이제 후추는 과거처럼 ‘품격 있는 사람들의 대명사’가 되지 못했다. 그 후 후추는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조미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247-248p)

 

 

1816년에 미국 워싱턴의 퀘이커교도들과 흑인 노예 소유주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식민협회가 결성되었다. 퀘이커교도들은 노예제에 반대했고, 노예 소유주들은 흑인들의 해방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들은 흑인들을 아프리카에 되돌려보내는 데 합의할 수 있었다. 퀘이커교도들은 흑인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진정한 자유를 찾고, 아프리카의 기독교 선교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희망했다. 반면 노예 소유주들은 그런 이상에서가 아니라 하이티에서와 같은 노예 봉기를 피하자는 생각이었다.

이 협회의 후원으로 1822년에 최초로 흑인 86명이 아프리카의 ‘곡물 해안’이라는 곳에 도착했고, 그 뒤 더 많은 흑인들이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해안 지역의 땅을 구입하기도 하고 현지민들한테서 강제로 빼앗기도 하면서 거주지를 확대했다. 1824년에 이 땅은 당시 미국 대통령(제임스 먼로)의 이름을 따와 먼로비아라고 했으며, ‘라이베리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이 나라의 가장 큰 역설은,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 세운 자유 공화국을 자부하면서 실제로는 미국 출신의 지배자들(이들을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이라 한다)이 현지민들을 노예화했다는 점이다. 이주민들은 이곳에 미국 사회를 재창출하려고 했다. 남부 플랜테이션과 비슷한 집과 교회를 짓고 영어를 사용했다. 미국 국기와 거의 똑같은 모양을 한 라이베리아 국기를 보면 이점을 잘 알 수 있다. 그리하여 5퍼센트에 불과한 이주민들이 현지민들의 땅을 빼앗고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334p)

 

 

유럽의 대표적인 음료는 포도주와 맥주이다. 우리가 포도주와 맥주에 대해 ‘음료’라는 말을 쓸 때에는 알코올 도수가 약하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실제로 유럽에서 포도주와 맥주는 취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수분 보충을 위해서 마신다는 의미가 강하다. 유럽의 음식에는 우리 음식과 달리 국이 없으므로 음료수를 따로 준비해야 하는데, 대체로 유럽 지역들은 물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이처럼 알코올 도수가 약한 술들이 바로 음료수로 사용되는 것이다. 마치 중국의 차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335p)

 

 

 

ㅡ 주경철, <문화로 읽는 세계사> 中, 사계절

,

2017/6/13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그럴 능력이나 재능이 따라주지도 않을뿐더러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지만 세상의 모든 지식을 움켜쥐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지적허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욕심.

 

 

 

아마도 가장 오해받는 게 취향과 관련한 신화인 것 같아요. 운명의 상대가 있어서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볼 수 있고 그런 사람을 기다리면 된다는 식의 낭만주의적인 애정론이 있는 것처럼, 취향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원래 좋아하게 되어 있는, 우주적 기운이 맞는 책이나 음악이나 영화가 있어서 그걸 만나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죠. 하지만 많은 경우에 취향이라는 것은 돈 들이고 시간 들인 만큼 개발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오랫동안 즐겨오지 않았다면 아무리 좋은 것을 보여주어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취향을 키운다는 것 자체가 한평생에 걸쳐서 노력을 하고, 또 그만큼 가치가 생기는 건 아닐까 싶거든요.(136-137p)

 

 


ㅡ 이동진,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 中, 예담

,

2017/6/12

 

 

아프리카로 돌아온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지금의 라이베리아를 건설하는 데 성공합니다.

라이베리아, 라틴어로 ‘자유의 땅’이라는 뜻의 나라 이름처럼 이름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스스로를 다스리는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자유의 땅 라이베리아는 금세 다시 속박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미국에서 기독교와 서구 문화에 익숙해졌던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삶과 문화를 미개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속박했던 노예제를 부활시켜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차별하며 노예로 부리게 됩니다. 스스로 속박의 역사를 다시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모순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라이베리아는 여전히 끊임없는 내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299-300p)

 

 

ㅡ 김유석, <국기에 그려진 세계사> 中, 틈새책방

,

2017/6/7

 

 

나치는 유대인만 학살한 것이 아니었다. 파시즘의 인종주의가 낳은 극단적인 광기였던 나치는 공산주의자, 집시, 장애인까지 학살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의 희생에 따른 동정 여론은 모조리 유대인의 몫이 되었다. 전쟁 후, 독일은 유대인에게 사죄하고 보상함으로써 학살에 대한 값싼 면죄부를 얻었다. 스위스와 독일에 받은 막대한 배상금은 상처받은 생존자가 아니라, 시오니스트 단체와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자금으로 소비되었다. 인류의 비극이었던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참사로 평가절하되었다. 이미 홀로코스트는 ‘신성불가침’영역이 되어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정당화하는 토대가 되었다.(117p)

 

 

 

ㅡ 원혜진, <아! 팔레스타인> 中, 여우고개

,

2017/6/6

 

 

2/3지점 까지는 나름대로 저자의 의견에 납득하는 척이라도 하며 읽어나갔지만 초개아니 궁극의 의식상태와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딱히 하고 싶지도 않고.




경계에 있어서 기묘한 점은, 그 경계가 아무리 복잡하고 세련된 것일지라도, 실제로는 안쪽과 바깥쪽이라는 구분이외에는 별다른 요소가 없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가장 단순한 경계선 중 하나인 원을 그려보면, 그 경계가 오직 안과 밖만을 나타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 대 밖이란 대극은 우리가 동그란 경계를 그릴 때까지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던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 한 쌍의 대극을 만들어낸 것은 경계선 그 자체이다. 한마디로, 경계를 긋는 순간 대극이 만들어진다.(50p)

 

 

진보와 불행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인 것처럼 보인다. ‘진보를 향한 충동 자체가 현재 상태에 대한 불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진보를 추구하면 할수록 실은 더 많은 불만을 느끼게 된다. 진보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가운데 우리 문명은 사실상 욕구불만을 제도화시켜놓았다. 긍정적인 것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려는 과정에서, 긍정이란 부정에 기초해서만 규정된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해버린 것이다.

물론 서로 대립하는 것들은 밤과 낮만큼이나 사뭇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점은 밤이 없이는 낮도 알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부정적인 것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동시에 긍정적인 것을 즐길 가능성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진보라는 모험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의 실패는 더욱 두드러진 것이 되고, 그렇게 해서 총체적인 욕구불만은 훨씬 극심해진다.

(...)

결코 분리할 수 없는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살 때는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무언가를 판다. , 사는 행위와 파는 행위는 단지 한 사건의 양극’, 즉 단일한 거래행위의 양끝에 지나지 않는다. 거래의 양쪽 끝이 다르긴하지만, 그 둘은 단일한 사건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다.(54-55p)

 

 

세계를 분리된 대극으로 볼 때 삶이 왜 그토록 불만스러운 것이 되는지, 왜 진보가 성장이 아니라 암적인 것이 되는지를 이젠 아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립하는 양극을 떼놓으려고 애쓰면서 소위 고통 없는 쾌락, 죽음 없는 생명, 악 없는 선 따위의 긍정적이라고 판단한 것들에만 집착할 때, 우리는 실체가 없는 유령을 쫓는 꼴이 되고 만다. 이것은 골 없는 마루, 파는 자 없는 사는 자, 오른쪽 없는 왼쪽, 출구 없는 입구만의 세계를 얻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가 너무나 고상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환상이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문제는 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성립되지 않는 난센스라고 지적했던 것이다.(59p)

 

 

소위 나누는선들은 동시에 육지와 물이 만나는지점을 나타낸다. , 그 선들은 나누고 구분하는것만큼이나 똑같이 결합하고 통일시킨다.’ 그렇다면, 그런 선은 경계라 부를 수 없다.(60p)

 

 

우리는 대극이 그저 하나의 과정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서로 투쟁하는 두 개의 다른 과정이 존재한다고 상상하게 된다. 화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자신의 편견을 떨쳐버릴 수 없는 미성숙한 마음은··· ‘주체/객체, 시간/공간, 정신/물질, 자유/필연, 자유의지/법칙이라는 이원성의 올가미 속에서 발버둥쳐야 하는 저주에 사로잡힌다. 하나뿐이어야만 하는 진실이 모순에 시달린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생각할 수 없게 된다. ‘하나의 세계로부터 두 개의 세계를 만들어냈기때문이다.”

문제는 아무런 경계도 없는 자연의 실제 영토를 놓고 경계가 완비된 관습적인 지도를 만들어낸 다음, 그 둘을 철저하게 혼동하고 있다는 데 있다. 코르지브스키와 일반 의미론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단어, 상징, 기호, 사고, 관념 등은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실재의 지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기때문이다. ‘이라는 단어가 갈증을 풀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지도와 언어가 진정한 세계인 것처럼 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63p)

 

 

대극을 분리시켜놓고 긍정적인 쪽으로의 진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초월하면서 감싸 안는 하나의 토대를 발견해냄으로써 대극을, 긍정과 부정 모두를 통합시키고 조화되게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64p)

 

 

나는 현실세계가 단지 우리의 상상의 산물주관적 유심론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경계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이 근대인의 모든 세계관의 밑바탕에는 소위 자연법칙들이 자연현상을 설명하고 있다고 하는 환상이 가로놓여 있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들 법칙은 실재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실재에 대해 우리가 그어놓은 경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인과법칙과 같은 법칙들은 (경계들의) 네트워크를 묘사하는 것일 뿐, 네트워크가 묘사하는 그것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80p)

 

 

신비가에 따르면, 시간 속의 삶은 고통 속의 삶이다. 왜냐하면 신비가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시간에서 비롯된또는 시간 속의문제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겠지만, 잠시 숙고해보면 그 말이 너무나 명백한 진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의 걱정은 언제나 과거 또는 미래에 걸쳐 있다.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수많은 행동을 후회하며, 그로 인한 미래의 결과를 두려워한다. 죄책감은 과거와 단단히 결합되어 우울증, 쓰라림, 후회하는 고뇌를 가져온다. 이 말에 납득되지 않거든, 과거의 상처가 전혀 없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지 한 번 상상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불안은 미래에 대한 생각과 한데 묶여서 두려움과 파멸적 기대라는 먹구름을 가져온다. 과거와 미래! 이 둘이 우리를 고뇌라는 족쇄로 채우고 있음은 분명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 자체에는 어떤 근본적인 문제도 없다. 그곳에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제를 끼고 사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다시 면밀히 살펴보라. 그러면 그것이 실제로는 어떤식으로든 과거의 죄책감이나 미래의 불안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죄책감이란 과거 속에서 헤매는 상태이고, 불안이란 미래 속에서 헤매는 상태이기 때문이다.(118-119p)

 

 

몸과 마음 사이에 새로운 경계가 생기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그 사람이 여전히 죽음으로부터 도주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죽음을 떠올릴만한, 죽음을 체현할 만한 또는 죽음을 암시할 만한 모든 것을 회피한다. 그런데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면서 자신의 현실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자신의 몸이다.

육체는 죽음의 궁극적인 거처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몸이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의 육체가 쇠약해질 것이고 썩어 없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육체가 영속적이지 않다는 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사람은 내일, 소위 불사의 내일을 약속해줄 어떤 것만을 찾게 된다. 이때 몸은 당연히 고려 대상에서 무시된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이 영속적이고, 정적이고, 불멸하고, 동요됨이 없고, 지속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비밀스러운 욕망을 키우게 된다. 그러나 그런 속성들은 상징, 개념, 관념에만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실재하는 모든 나무가 변화하고, 성장하고, 형태를 바꾸고, 죽을지라도 나무라는 단어 자체는 변함없이 그대로 지속된다.

이런 정적인 불명성을 추구하면서, 그는 하나의 관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자아라고 불리는 지적인 추상물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신체와 함께 살지 않으려고 한다. 신체는 부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자신에 대한 하나의 그림, 죽음에 대한 어떤 참된 관계도 무시된 하나의 그림인 자아로서만 살게 된다.(143-144p)

 

 

삶의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은 동시에 보다 심층적이고 진정한 실재로서 깨어나기시작한다. 고통은 현실에 대한 소위 표준적인 자기만족에 대한 위안을 산산조각내며,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회피해왔던 방식과는 다르게 자신과 세계를 세심하게 보고 깊이 느끼고 접하게 함으로써, 특별한 의미에서 살아 있게끔 강요하기 때문이다. 고통이야말로 최초의 은총이라는 말이 전해오는데, 나는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특수한 의미에서, 고통은 거의 환희의 순간이기도 하다. 고통은 창조적인 통찰력이 탄생하는 기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특수한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애가 엄마에게 매달리듯 고통에 매달리며, 그것을 내려놓을 엄두도 못 내는 짐처럼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들은 깨어 있는 의식으로써 고통을 직면하는 대신 남몰래 십자가에 매달려 경련하면서 고통을 붙들고 있다. 고통을 부정하거나 회피하거나 경멸해서도 안 되지만, 미화하거나 집착하거나 과장해서도 안 된다. 고통의 출현은 단순히 하나의 좋은 신호이다. 합일의식을 벗어난 삶이란 궁극적으로 고통스럽고, 비참하며 슬픔으로 가득 찬 것임을 알아채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경계로 이루어진 삶은 투쟁의 연속이며 공포, 불안, 고통 그리고 마지막엔 죽음으로 점철된다. 우리는 감각을 상실케 하는 보상이나 주의분산, 마술 등의 온갖 방식을 통해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고뇌라는 바퀴의 근본원인인 환상 속의 경계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기로 동의한다. 그러나 완전히 무감각해지지 않는 한, 조만간 방어적 성격의 보상물은 달래고 감춰주는성능을 잃기 시작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이런저런 식으로 고통받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각이 마침내 갈등으로 점철된 거짓 경계의 본질을, 그리고 그런 거짓 경계들로 인해 조각난 삶을 향해 눈을 돌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은 거짓 경계를 알아차리는 최초의 움직임이다. 그렇기에, 올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고통은 해방을 준다. 고통은 모든 경계를 넘어선 곳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통의 원인은 병들어서가 아니라 지성적 통찰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찰의 탄생이 유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고통에 대해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이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겪어내고 마침내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고통을 올바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150p)

 

 

이와 같이 투사 자체의 기본 메커니즘은 아주 단순하다. 자신의 내부에서 생겨난 (동인, 분노, 욕구와 같은) 충동은 당연히 외부환경을 목표로 한다’. 그렇지만 그 충동이 투사될 경우, 그것은 외부환경 속에서 발생해서 자신을 표적으로 하는충동처럼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부메랑 효과이며, 자신의 에너지로써 자신에게 사정없이 고통을 가하는 결과를 빚는다. 자신이 행위를 강력히 밀고 나가는 게 아니라, 행동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 충동을 /나 아닌 것경계의 바깥쪽에다 갖다놓았기 때문에, 자연히 그것은 환경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경으로부터 나를 공격해온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림자 투사에는 두 가지의 주요 결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이 자신의 충동, 특질, 성향 등을 결코 외부로 투사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둘째로, 그것은 저 밖의환경 속에, 흔히 다른 사람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는 더 작아지고 나 아닌 것은 더 커진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불쾌한 일이기에 투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틀린 관점을 필사적으로 방어할 것이다. 만일 아무 죄도 없는 아내에게 소리 지르는 잭에게 다가가서, 압박당하고 괴롭힘당한다는 그의 느낌이 실제론 그 자신의 충동일 뿐임을 지적해준다면, 아마도 당신은 주먹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잭에게는 그의 투사가 실제로 밖으로부터 그를 위협하고 있음을 입증하는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160-161p)

 

 

우리는 투사의 중요한 지표하나를 알게 되었다. 환경(사람 또는 사물들)속의 무언가가 우리에게 단지 정보만 주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대개 우리 자신으로부터 투사된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성가시고, 당황스럽고 혐오스러운 물건들, 또는 역으로 매료되고, 항거할 수 없고, 마음을 사로잡는 물건들, 이런 것들이 흔한 그림자의 반영이다.

(...)

의무감역시 투사된 욕망이다. , 끊임없이 의무감을 느끼는 것은 지금 스스로 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하나의 신호이다. 의무감, 나는 너를위해 ~를 해야 한다는 느낌은 가족관계에서 가장 흔히 발생한다.

(...)

이런저런 일을 하는 데 엄청난 의무감을 느끼는 사람은 단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싶다는 그의 진정한 욕망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정반대로 말할 것이다. 자신이 의무감을 느끼는 것은 정말로 그 일을 하고 싶지 않기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진실이 아니다. 남을 돕고자 하는 욕망이 정말로 없다면 그는 의무감을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신경 쓰겠는가! 그는 돕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돕고 싶어하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지만, 그 욕망을 투사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그가 도와주길 원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무감이란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서 오는 부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친절함그러나 인식되지는 않는이 지운 짐이다.

(...)

아마도 모든 사람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격심한 자의식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강연을 해야 하거나, 무대에서 연기를 해야 하거나, 상을 받아야 할 경우에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경직되기 십상이다. 모든 사람이 나에게만 관심을 쏟는 듯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관심이 그들에게 투사되었기 때문이다. ,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진 관심이 투사되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갖는 관심으로 바뀌는 것이다. 시선을 관중에게 향한 순간, 나에 대한 그들의 자연스러운 관심이 엄청나게 증폭되면서 마치 나를 억누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경직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엄청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는 투사를 용감하게 거둬들일 때까지, 우리는 그 경직을 풀어낼 수 없다.

(...)

모든 사람이 자신을 거부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자신의 성향을 철저하게 모르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성향은 그 사람의 전반적인 인격에서 볼 때 사소한 측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만일 그런 성향을 계속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 자신이 아는 '모든사람에게 그런 성향을 투사하게 된다. 그로써 원래의 충동은 증폭되고, 실제로는 세상이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이 자신에게 지나치게 비판적이라고 보기 시작한다.

이것은 모든 투사에 다 해당하지만, 문제는 정말로 어떤 사람이 당신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 비판에다 스스로 투사한비판을 덧붙이지 않는 한, 그 비판은 당신을 압도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강력한 열등감과 거부감을 느낄 때마다 먼저 자신의 투사를 찾아보고, 자신이 세상에 대해 생각보다 비판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164-168p)

 

 

괴로움을 판단하지 않고, 회피하거나, 각색하거나, 손대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단순히 그것을 순수하게 자각할 뿐이다. 어떤 느낌이나 경향성이 나타나더라도, 단지 그것을 주시한다. 그 느낌에 대한 증오가 나타나더라도 단지 그것을 주시한다. 그 증오에 대한 증오심이 나타나더라도 또 다시 단지 그것을 주시한다.(218-219p)

 

 

 

 

켄 윌버, <무경계> , 정신세계사

,

2017/6/5

 

 

네 가지 요리는 모두 야채로 만든 거였는데,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지만 밑에는 모두 비슷한 크기의 돼지고기가 들어 있었어.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먹었지. 그러다 마지막 요리를 먹을 때 보니 밑에 또 돼지고기가 있는 게 아니겠나. 난 잠시 멍해졌다가 곧 허허 웃고 말았지. 자전의 뜻을 알아차렸거든. 그녀는 나를 깨우치려 했던 거야. 여자들이 겉모습은 다 달라 보여도 아래는 모두 같다는 뜻이었지. 자전의 속내를 눈치 채고 나는 이렇게 말해줬다네.

이런 이치는 나도 알아.”

정말로 이치는 나도 알았어. 하지만 위쪽이 다르게 생겼으면 그 각각에 대한 내 마음도 다 달라지니 난들 어쩌겠나.(31p)

 

 

 

위화, <인생> , 푸른숲

,

2017/6/2

 

 

물론 나라고 늘 투덜대기만 하는 건 아니다. 불평을 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체력이 필요하고 언젠가부터 나는 쉬이 지치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운동 따위 하지 않고 술과 담배를 즐기며 밥을 밥 먹듯 거르고 날밤을 예사로 새우면 이렇게 된다. 혹시라도 불평을 너무 많아 걱정이라면 나와 같은 생활 습관을 가져보시길. 얼마 안 가 순한 양처럼 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요즘 내가 그렇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58-59p)

 

 

연필 촉을 완벽하게 가다듬는 것조차 불가능한 게 평범한 우리들의 삶이다. 어디 그뿐인가. 깎으면 깎을수록 짧아지는 연필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수록 우리의 남은 시간은 점점 짧아질 뿐이다. 그것이 바로 향나무와 흑연의 쌉싸래한 연필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연필을 깎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야만 한다.(81p)

 

 

오늘날에도 넓은 길들이 나 있는 대도시의 뒷골목을 보면 비좁기 그지없다. 얼마나 비좁은지 이쪽 창문에서 건너편 창문으로 손을 내밀 수 있을 정도이다. 만약 돈 많고 감정도 풍부한 낯선 사람이 우연히 비좁은 뒷골목을 찾는다면, 아마 이렇게 외칠 것이다.

“와, 그림 같다!”

멋진 숙녀는 ‘아!’하고 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얼마나 평화롭고 낭만적인지 몰라요!”

하지만 평화롭고 낭만적이란 표현은 엄청난 잘못이며 거짓이다. 왜냐하면 뒷골목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부유한 대도시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비참하고 시기심이 많고 툭하면 싸움을 벌이기 일쑤이다. 그건 그 사람들 탓만이 아니라, 좁은 길 때문이기도 하다.(86-87p)

 

 

바르트는 첫 번째 강의 단테의 인용으로 시작한다. “단테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삶의 노정 중간에서.’ 이 구절을 썼을 때 단테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지금의 나는 그보다 나이가 많고, 따라서 산술적으로 계산해보아 삶의 노정에서 중간보다 멀리 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중간은 산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종의 분기점이다. 분기점에 선 그는 생각한다. “뭐라고요? 죽을 때까지, 내가 죽을 때까지 단지 바뀔 뿐인(아주 조금!) 주제들에 대해 늘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하고, 강연을 하게ㅡ기껏해야 책을 쓰게ㅡ될 거라고요?”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그는 새로운 삶을 선택한다.

바르트는 글을 썼던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의 장(場) 역시 글쓰기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새로운 글쓰기를 실천함으로써 과거의 지적 실천과 결별하는 것. 그래서 그는 소설을 쓰기로 한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소설-쓰기는 새로운 삶을 향한 돌파구였고, 새로운 삶 그 자체였다. <새로운 삶Vita Nova>은 또한 그의 소설 제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다. 1980년 2월 25일, “소설의 준비”라고 이름 붙인 강의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나가는 그를 세탁소 트럭이 덮쳤고, 한 달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비통한 아이러니.(101-102p)

 

 

매일의 압박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 이따금, 그저 조간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 것만으로 좌절하게 되는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자기 자신에게, 가족에게, 동료에게, 가게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물론 우리나라 정부에도 화가 미친다. 이 모든 분노를 뒤로하고 매일의 일과를 계속해나가려면 상당히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106p)

 

 

‘그자’, 혹은 ‘이십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은 누구인가? 물론 포르투갈 출신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다. 몰랐다고? 상관없다. 어느 무심한 웨이터가 말했듯, “모르셨다면 이제 아시면 됩니다.”(122p)

 

 

마침내 ‘나’는 유령을 만난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만남. 타부키가 그의 시인에게 말한다. “저는 당신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왔어요, 이제는 피곤합니다. 그만둬야 할 때가 왔어요. 그게 다예요.” 시인이 묻는다. “나와 함께한 것이 편하지 않았나요?” “아니요, 대단히 중요했어요, 말하자면 언제나 날 가만두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시인이 말한다. “나와 관계된 건 다 그렇더군요, 하지만 말예요, 문학이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불안하게 하는 것 말입니다, 의식을 평온하게 하는 문학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들은 이야기를 나눈다. 문학에 대해서, 정직함에 대해서,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음식들에 대해서, 음악에 대해서, 달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과 아직 오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것들에 대해서, 그럼에도, 이미 이곳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서.(123-124p)

 

 

파일럿의 가장 큰 불안은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다. 알코올을 많이 하는 사람의 가장 큰 불안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파일럿은 실제로 비행기를 추락시킴으로써, 알코올을 많이 하는 사람은 실제로 알코올 중독자가 됨으로써 그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126p)

 

 

특별한 존재와 평범한 존재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존재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관계다. 남에게는 평범한 존재가 내게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존재가 나와 맺고 있는 관계 때문이다. 평범한 존재는 나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특별해진다.(140-141p)

 

 

당신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글을 쓸 때’ 당신에게 고함을 지르는 내면의 편집자일지도 모른다. 그 목소리를 꺼두라. 스스로에게 심술궂게 행동할 자유를 주라. 일단 쓰고, 나중에 다듬어라. 이것이 창작의 황금률이다.(144p)

 

 

불행하게도 굶주림은 예술을 돕지 않았다. 그저 방해할 뿐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찌 됐든 인간은 동전 한 푼짜리 막대사탕보다는 고급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0.5리터들이 위스키를 마신 다음에야 훨씬 더 글을 잘 쓸 수 있다. 궁핍한 예술가라는 신화는 새빨간 거짓말이다.(148p)

 

 

당신이 내게 신세진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나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의 나이가 아주 어렸었다는 이유 바로 그것밖에 없습니다.(167p)

 

 

헌책방 일을 시작한 지 벌써 7년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 직원으로 일한 것까지 합치면 거의 10년을 헌책방에서 책과 씨름하며 보낸 것이다. 헌책방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인터넷으로 가격을 비교하며 책을 산다. 그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서점에 가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껴본 다음 산다. 그보다 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헌책방에 모인다. 헌책방은 오래된 책을 사는 곳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그곳은 책과 사람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장소다.(186p)

 

 

결혼을 코앞에 둔 이웃 청년에게 쓴 편지는 그보다는 나았습니다. 여덟 개의 충고 중에서 두어 개는 꽤 유용했으니까요. 이를테면 “2. 커피가 형편없어도 절대 말하지 말 것. 그냥 바닥에 쏟아버릴 것”이라거나 “5. 다툼이 있을 때는, 잘못은 항상 당신에게 있음을 명심할 것” 같은 것들이 그랬죠. 덕분에 저는 커피를 쏟아버린 후 “미안해, 내 사랑, 다 내 잘못이야. 커피를 쏟은 것도, 커피에서 젖은 신문지 맛이 나는 것도”라고 말할 수 있는 남편이 되었습니다(거짓말입니다.).(199p)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그가 논리를 쌓고 다시 그것을 비트는 방식이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의 배열이다. 솜사탕은 설탕이 아니다.

(...)

“어떤 것이 오로지 우아함을 위해 존재한다면, 우아하게 그것을 하든지 아니면 하지 마라. 어떤 것이 엄숙한 척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엄숙하게 그것을 하든지, 아니면 하지 마라. 어정쩡하게 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거기엔 어떤 자유도 없다. 남자가 숙녀에게 모자를 들어보이는 것은 관례적인 상징이 담긴 행동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아,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 사실, 그는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또한 나는 옛 퀘이커 교도처럼 이 상징적 행위를 미신적 관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숙녀에게 모자를 들어 보이기를 거부하는 남자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존경을 표하는 방식이 아닌, 제멋대로인 존경 방식을 행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숙녀에게 모자를 벗어 보이지 않을 광신도도 존중한다. 그런데 피곤하다는 이유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숙녀에게 대신 자기 모자를 벗겨 달라고 요청하는 남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204-205p)

 

 

주로 예술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변명이고, 그건 예술이거나 다른 것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시일 수도 있고, 치즈 조각일 수도 있는거죠.(213p)

 

 

리베카 솔닛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책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책을 읽어도 좋고 안 읽어도 그만인 사람이 있는 한편 책의 마법에 걸려 다른 세상에, 책들이 사는 세상에 사는 사람이 있다.(224p)

 

 

결국 모든 것은 ‘어쩌다’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떤 불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어쩌다, 도대체 어쩌다···· 후회해도 이미 늦다. 물은 엎질러지고, 책장은 넘어간다. 페이지를 되돌릴 순 있어도 이미 읽은 것을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진정한 폐해다. 오늘 나는 그렇게 말해야겠다.(227p)

 

 

재취업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게으름을 이기지 못했다. 어지간한 충격이 아니면 게으름은 물러서지 않는 법이다.(232p)

 

 

 

ㅡ 금정연,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中, 어크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