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1
사실상 카라바조는 너무나 진지하고 위대한 예술가였으므로 떠들썩한 화젯거리나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비평가들이 이러쿵저러쿵하고 지껄여대는 동안 그는 분주하게 작업을 했다.
나는 이 말을 무척 좋아한다.(230p)
ㅡ 김하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 中, 김영사
2017/6/1
사실상 카라바조는 너무나 진지하고 위대한 예술가였으므로 떠들썩한 화젯거리나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비평가들이 이러쿵저러쿵하고 지껄여대는 동안 그는 분주하게 작업을 했다.
나는 이 말을 무척 좋아한다.(230p)
ㅡ 김하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 中, 김영사
2017/5/31
살구가 오기 두 해 전 여름, 어머니가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길을 잃고, 본인의 집 안에 갇히고, 여러 차례 응급 상황에 빠져 내게 구해 달라거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전화하는 일들이 생겼다. 어머니는 10여 년 전부터 내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형제 셋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모두 지역번호가 다른 곳에 살거나 그사이에 전화번호가 바뀌었고, 어머니는 아들들에게는 당신의 문제를 늘 숨겨 왔다. 그들은 어머니의 가장 좋은 모습만 상영하는 극장의 관객이었고, 어머니도 그걸 바라셨다. 나는 늘 무대 뒤에, 상황이 훨씬 더 지저분한 곳에 머물렀다. (...) 형제들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어머니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들이 각자 부담을 나누어 가졌지만, 응급상황이 닥쳤을 때 어머니가 전화를 거는 대상은 언제나 나였다. 한번은 왜 다른 형제들에게는 전화를 하지 않고 늘 나만 찾느냐고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음, 너는 딸이잖아.”그러고는 덧붙였다. “너는 온종일 집 안에만 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잖아.” 작가의 삶은 그렇게 묘사될 수도 있었다.(16-17p)
노인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낭만적 사랑이나 아이를 낳는 일 같은 다른 종류의 헌신에 비해, 조언이나 독려가 될 만한 분량의 글이 없다. 그 일은 마치 예정에 없던 어떤 일처럼 슬그머니, 마치 한 번도 경고를 받지 못했고 지도에도 없던 암반으로 가득한 해변처럼, 갑자기 당신 앞에 닥친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야기에서 삶의 말년은 그 모든 세월이 지혜가 되는 황금빛 시기이지, 엉망진창인 어린 시절로 혹은 그 너머로 퇴행하고, 정신병처럼 보이는 질병으로 썩어 가는 시기가 아니다.(20p)
하지만 어머니 본인도 모험이 가득한 삶을 살았다. 젊었을 때는 동생을 설득해서 함께 버스로 전국 일주를 했고, 당신 세대의 미혼 여성이 일반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 집에 머무르지 않고, 혼자 플로리다로 떠났다. 결혼을 하자마자 군인이었던 유대인 남편을 따라 독일에 갔고, 그다음에는 서부와 남미에서 살기도 했다. 한편 어머니는 많은 모험을 거부하며 오랫동안 안전이나 절약만을 위한 선택을 했던 적도 있었다. 안정감과 상상 속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또 희생하고 나서는, ‘될 수도 있었을 것들’을 아쉬워했다. 두려움 때문에, 의무감 때문에 너무 자주 “안 돼”라고 말했고, 나에게도 그래야 한다고 가르쳤다.(57-58p)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는 물건은 진짜 책이 아니라, 그 책이 지닌 가능성, 음악의 악보나 씨앗 같은 것이다. 책은 읽힐 때에만 온전히 존재하며, 책이 진짜 있어야 할 곳은 독자들의 머릿속, 관현악이 울리고 씨앗이 발아하는 그곳이다.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99p)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들은 아주 희미하고, 예측할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탄생한다. 우리가 사랑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지지 않고, 숲에서 길을 찾는 것은 어렵고, 하루하루의 대혼란에서 살아남는 것도 힘들다. 근원으로 올라가면 두 사람이, 본인들이 바랐든 바라지 않았든 우연히 함께 있었다. 둘은 서로의 유사함에 혹은 차이에 끌린다. 각자의 두려움과 한계를 오랜 기간 극복하고, 두 세포가 하나로 합쳐지는 바로 그때 우리는 생겨난다.(106p)
모든 이야기는 실제로는 하나의 이야기, 바로 변신 이야기의 조각들이다. 자신을 안으려는 아폴로를 피해 월계수로 변해 버린 다프네처럼 그 운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이도 있고, 자신의 남은 생을 극저온 상태로 보존하려고 애쓰는 부자들처럼 격렬하게 저항하는 이도 있지만, 수용이냐 저항이냐를 선택할 수 있을 뿐, 변신 자체는 피할 수 없다. 위험으로부터 누군가를 구해 낼 수는 있지만, 변화나 죽음으로부터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그 후엔 다른 사람, 다른 무언가, 다른 장소가 된다. 전쟁은 잠잠해지고, 기억은 희미해지고, 국가도 사라지고, 가장 근본적인 구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썩어 간다. 한때 서로 전쟁을 벌이던, 육체들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이제는 흙이 되고, 나무가 되고, 연인이 되고, 새가 된다. 모든 훈장은 낯선 이의 장난감이 된다. 대포를 녹여 만든 교회의 종이, 다시 녹아 대포가 되어 다른 전쟁에서 사용된다.(122p)
나병 환자들의 손과 발을 상하게 하는 건 정작 병 자체가 아님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나병은 신경을 짓눌러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게 만들 뿐이고, 그렇게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면 환자들은 그 부위를 돌보지 않게 된다. 피부를 상하게 하는 것은 병이 아니라 환자 본인이다. 스스로가 제 손가락과 발가락, 발, 손을 베이고, 화상을 입고, 멍들게 하고, 벗겨지게 하다가, 결국 그 부위를 잃게 되는 것이다.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 당시 나의 상황에 놀랄 만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말이었다.(151p)
신경이 없는 신체 부위도 살아 있기는 하지만, 자아를 규정하는 것은 고통과 감각이다. 당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선뜻 돌봐 줄 수가 없다. 당신의 손발이 당신에게서 잊힌다. 반면에 고통은 지켜 준다. 눈에 무언가가 들어가면 즉시 그에 대해 대처하기 마련이다. 매우 섬세하고 매우 조심스럽게. 그렇지 않으면 아플 테니까. 움찔하고, 눈을 깜빡이고, 눈물이 흐른다. 나병에 걸리면, 깜빡임을 멈출 것이다. 그렇게 눈물이 마르고, 어쩌면 너무 심하게 긁어서 각막에 상처를 줄지도 모르고, 어딘가 다쳤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병에 걸리면 보통 그런 무감각 상태가 된다.(153p)
“고통은, 그 사촌 격인 촉각과 함께 온몸에 퍼져 있어, ‘자아’의 경계 역할을 한다. 수술 후에도 환자들은 완치된 자신의 손발을 그저 도구나 의수 혹은 의족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고통과 함께 형성되는 기본적인 자기보호 본능을 그들은 지니고 있지 않다. 그 중 한 아이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제 손발이 제 일부로 느껴지지가 않아요. 내가 쓸 수 있는 도구이긴 하지만, 진짜 나는 아닌 것 같아요. 눈으로 직접 보고 있지만, 제 생각엔 죽은 부분인 것 같거든요.’ 다른 환자들도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이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 몸을 하나의 전체로 인식하는 데 있어 고통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5-156p)
“가까이 있는 거야.”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감정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뜻을 전한다. 뉴욕에서 몇 년을 지낸 후 뉴멕시코의 시골로 이사한 조지아 오키프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이런 인사말을 덧붙였다.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그건 물리적인 거리와 정신적인 거리를 함께 가늠하는 방법이었다. 감정은 그 자체의 거리를 가진다. 애정은 근처에 가까이 있는 것, 자아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침대 옆에 함께 누운 사람과 수천 마일 떨어져 있을 수도 있고, 세상 반대편에 있는 낯선 이들의 삶에 깊이 마음을 둘 수도 있다.(160p)
두 젊은이는 성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음식과 잠자리를 얻기 위해 약간씩 거짓말도 하고, 나병 전문의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과장하기도 했으며,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여정에서 만난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지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기도 했다. 기회가 있을 때면 술값을 내지 않고 도망을 나오기도 했다. 사고로 개를 한 마리 쏴 죽이는 일도 있었고, 젊은 남자들이 종종 그렇듯이, 일을 엉망으로 망쳐서 다른 사람들이 수습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만난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그들은 나환자촌에서 가장 길게 머무르는 의사들이었고, 장갑 같은 보호 장비 없이 직접 환자들과 접촉하고, 나중에는 함께 축구까지 하면서 전례를 깨뜨렸다.(162-163p)
어머니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절했다. 나병의 진짜 모습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던 사람, 그래서 나에게 감정이입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사람이, 내가 가장 힘들어하던 시기에 나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 바로 어머니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참 고약한 아이러니였다.(169-170p)
질병이나 재난의 의아한 점 중 하나는, 그런 상태에 빠진 사람이 무언가를 희망하고 무언가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는 점이다.(186-187p)
질병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가 홀로, 자족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깨뜨림으로써 외로움을 달래 주기도 한다. 당신은 타인의 골수나 혈액이 필요하다. 전문가와 사랑하는 이들의 보살핌도 필요하다. 당신이 병에 걸린 이유는 모기에 물렸다거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거나, 돌연변이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혹은 이런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생물학적인 존재라는 사실, 유한하며, 타자와 상호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191p)
크게 아프거나 다치고 나면 어떤 단절이 생기고, 덕분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고, 다시 시작하고 다시 살피는 계기가 된다. 그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적이며 그것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과거와 단절함으로써 새롭게 시작할 가능성을 열어 주기도 한다.(204p)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늙음과 병, 죽음을 완전히 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일부러 혹은 다른 이유로 어느 정도는 그것을 잊고 지낸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어떤 결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그 사실을 생생하게 실감하거나 상상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실감하고 나면 그게 우리든 당신이든, 모든 것이 달라진다. 나이 든 어머니가 아프고, 곧이어 나까지 병원 신세를 지고, 친구 앤이 죽어가고, 넬리의 딸이 위험한 상태로 태어났던 그해 살구 수확기에, 나는 그 점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222p)
유한함, 덧없음, 불확실성, 고통,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이 찾아와 삶을 그 전과 후로 나누어 버리는 때가 있다. 수없이 들은 사실과 생각이, 생생하고 급박하고 실감 나는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전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지만 그 순간부터는 정말로 중요해진다. 이 순간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 손님은 때로는 안내인처럼 친절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과거의 시간을 모조리 부숴 버리고 우리를 문밖으로 난폭하게 밀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순간에 반응하고, 반응이 바로 그 순간 이후에 살아가게 될 삶이다. 가끔은 나쁜 소식이 우리를 진실한 삶의 길로 이끌어 주기도 한다. 난폭하게만 보였던 손님에게 나중에 감사하게 되는 경우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대부분 꼭 변해야 할 때가 아니면 변하지 않게 마련이고, 위기가 변화를 강요하기도 한다. 국가적인 위기든 단 한 사람의 개인적인 위기든,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목표를 정해야만 극복할 수 있는 위기가 있는 것이다.(223-224p)
지진은 오랜 시간 쌓여 온 긴장이 낳은 결과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커지던 그 긴장이 쌓이는 과정은 볼 수 없다. 긴장은 오직 그것이 터져 나올 때만 볼 수 있다. 아픈 사람과 노인, 죽어가는 사람을 본다. 그런 광경이 우리 안에 쌓이고, 어느 시점에선가 우리의 삶이 바뀐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갑자기 바뀌고 그 모습이 영원히 유지된다. 편리하고 극적이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 삶에서 우리는 무언가와 거리를 두고, 되돌아가고, 결심하고, 다시 시도하고,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고, 그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변화는 대부분 천천히 이루어진다. 내 인생에는 변화를 일으킨 여러 사건이 있었고,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나 위기도 있었다. 루비콘 강을 한두 번 건너기도 했지만, 대체로 무언가를 쌓아가고 있다.(259-260p)
인간은 존재하고 사라지고, 변신하고 사그라지지만, 한밤의 빛깔을 닮은 파란색 양모 옷감은 사실상 50년 전과 똑같은 모습이다. 겨울에 결혼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부케 대신 흰색 방한 토시를 들고 있다. 꽃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동물 가죽이 대신 들어선 것이다. 그 옷을 입었던 키 크고 날씬하고 머리색이 짙은 아가씨는 이제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되었고, 머리는 추모객을 표현한 조각상보다 더 하얗게 세어 버렸다. (...) 어머니가 꼈던 결혼반지, 작고 동그란 터키옥이 케이크나 쿠키의 과자 장식처럼 박혀 있던 그 금반지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지만, 방한 토시는 뜯어지거나 버려졌을망정, 반지의 금은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생명이 없는 것은 죽지도 않는다. 나무로 만든 종이나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처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 것도 몇 세기는 유지된다. 하지만 우리는 닳아 없어진다. 어머니의 양모 정장은 그것을 알고 있거나, 그것을 아꼈던 모든 사람들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양모나 실크일 뿐인데도 그렇다. 돌이나 금속, 나무는 훨씬 오래 유지된다.(324-325p)
친절했던 담당 의사는 어머니를 돌봐 주는 이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어머니가 넘어졌다고 말했지만, 어머니가 넘어지지 않게 하려면 또한 어머니의 자유를 제한해야만 했을 것이다.(334p)
어머니는 보상과 공정함을 원했다. 각 항목의 값이 맞아떨어지기를, 받기로 되어 있는 것을 받을 수 있기를 원했다. 죄와 미덕, 참회, 벌 그리고 보상이라는 가톨릭의 체계가 교회를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어머니를 이끌었고, 기독교 신앙에서는 용서 또한 강력한 힘이었다. 마침내 그 모든 계산과 셈도 희미해졌다. 궁핍하다는 느낌과 자신은 받을 것이 있다는 확신, 전쟁 같았던 체스 게임도 희미해졌다. 복수와 용서는 셈을 정리하는 일이었지만, 셈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얽어매던 그 관계를 묘사하기에 너무 추하다. 나는 결국 끝에 가서는 모든 게 드러난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 끝은 지평선 너머, 우리가 알아보거나 판단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비극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라고, 그들은 잘못을 범하기 전에 벌부터 받아 버린 거라고, 어쩌면 벌을 받았기 때문에 잘못을 범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받아들인다는 건 그런 것인지 모른다.(343-344p)
아이가 우물에 빠진 이유는 엄마가 전화를 받으러 집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고, 누군가 우물의 뚜껑을 덮어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늘 우리 주변에, 모든 방식으로 존재한다. 줄리아 프린시프 잭슨 덕워스는 첫 남편과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1870년의 어느 날, 남편이 그녀를 위해 무화과를 따 주려다가 몸에 있던 종기가 터졌고, 상처가 감염되면서 이내 죽고 말았다. 줄리아는 재혼을 했고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버지니아 스티븐스를 비롯한 아이 넷을 낳았다. 전화 한 통. 무화과 하나. 생기지 않았을 일이 생겼고, 그 이후로 삶은 더 좋은 방향으로 혹은 더 나쁜 방향으로 변했다.(356-357p)
가끔 멋진 일이 생기고 난 직후에 삶을 되돌아보면,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일들이 산맥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일이 생긴 후에 되돌아보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현재가 과거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삶 하나는 이야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완성된 이야기를 전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 삶은 온갖 사연으로 가득한 은하수 같은 것이고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그때그때 몇 개의 성운을 고를 수 있을 뿐이다.(359p)
ㅡ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中, 반비
2017/5/30
「룩 앳 미」는 권력의 파괴적 효과를 말하기 위해 비리와 이권, 이전투구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심지어 아부와 차별을 그릴 필요도 못 느낀다. 현명하게도 「룩 앳 미」는 권력의 효과를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인내와 관용의 정도에서 찾는다. 이를테면 권력은 나쁜 취향의 농담에 무골충처럼 웃게 하는 힘이다. 토끼고기를 싫어하는 피에르를 에티엔이 지정한 메뉴에 동의하게 만드는 힘이며, 오랜 친구가 에티엔이 두고 온 와인을 가져오겠다고 두 시간의 운전을 기꺼이 떠맡게 만드는 힘이다. 이 모든 것은 굴종이 아니라 ‘친절’과 ‘예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기에 교묘하다. 반면 더 이상 얻을 게 없는 친구의 약점에 대하나 관용은 자꾸만 얇아진다. 허술한 기억력도 엄살떠는 습관도 참을 수 없는 단점이 된다.(127p)
영화 속의 삼십대 남녀에게는 연애 말고도 잡다한 골칫거리가 있다. 그들은 때로 자기가 어떻게 해볼 도리 없는 문제는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며 하나의 사랑이 지나가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다음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푸념을 늘어놓고 홀로 잠든다. 그러나 이 덜 섹시한 삼십대 남녀들의 연애담은 이상하게도 번번이 전세계 로맨틱코미디 팬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 이유는 아마 러브스토리에 대한 갈증으로 멜로드라마의 티켓을 사고 스릴에 대한 갈증으로 스릴러를 찾으면서도, 좋은 로맨스영화는 사랑 이외의 다른 것을, 좋은 호러는 공포 이외의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발견하는 우리의 경험과 통해 있을 것이다.(201-202p)
결혼에 대한 나의 이상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 트랩가다. 아내와 서로 피해 다니기 충분할 만큼 널찍한 성에 살면서 아이들은 유모가 말끔히 거두고 저녁이면 세일러복을 입혀 (기왕이면 계단에서) 사열한 뒤 잠자리로 보내면 되는. 하지만 내가 현실의 좁은 집에서 아이를 들쳐업고 어질러진 장난감에 둘러싸여 있는 건 싫다. 그나저나 장난감들의 원색은 정말 눈에 거슬린다. 이기적이라고? 나도 안다.(341p)
초기작 「사이렌」의 존 듀이건 감독은 “휴 그랜트가 지닌 최고의 상업성은 스스로를 비웃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휴 그랜트는 귀공자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겪은 우스꽝스러운 망신이나 진짜 명예와 무관한 사소한 모욕의 경험(국제영화제에서 바지 지퍼를 연 채 기립박수에 화답했다든가 하는)을 화제로 삼는다. 삶에서 정말 정색하고 엄숙히 취급해야 할 문제는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고 말하듯이.(342p)
“일정한 나이에 다다르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인물이 될 수 있는지 한계를 자연히 알게 된다.” 그렇게 직업적 야심이 소박해서 좋은 배우가 되겠냐고 혀를 차면 그랜트는 이렇게 응수한다. “수많은 인간이 타고난 소명이 아닌 일로 먹고살지만, 여전히 최선을 다하며 때로는 제법 능숙해지기도 한다. 우리 아버지도 특별히 카펫을 사랑하진 않으셨지만 팔아치우는 데에는 훌륭한 솜씨를 발휘하셨다.(343p)
“어머니는 나와 형에게 애정을 퍼부었다. 넉넉히 사랑받으면 사랑을 공기처럼 당연시하게 된다. 문을 열고 나가 사랑을 찾아 헤매고 싶은 욕구를 전혀 배양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휴 그랜트는 사랑에 눈물짓고 피 흘리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웃기 위해 사랑하는 로맨틱코미디의 연인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이 절절한 무엇이기를 바라지만, 홍해가 갈라지고 아마존 밀림이 쓰러지는 위대한 연애만 평생 하다가는 모두 심장이 졸아 붙어 죽게 될 것이다.(344p)
ㅡ 김혜리, <영화야 미안해> 中, 강
2017/5/29
나는 혹한을 무릅쓰고, 이천여 리나 떨어진 먼 곳에서, 이십여 년 동안 떠나 있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 아! 이것이 내가 이십년 동안 늘 그리워하던 고향이란 말인가?
내 기억 속의 고향은 전혀 이렇지 않았다. 내 고향은 훨씬 더 좋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기억해내고 그 좋은 점을 말로 표현하려 하자 그 모습은 사라져버리고 그것을 표현할 말도 사라져버렸다. 원래부터 이랬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변명했다. 고향은 본래부터 이런 곳이었다고ㅡ진보도 없지만, 내가 느낀 바와 같은 슬픔도 마찬가지로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단지 나 자신의 마음의 변화일 뿐이다.(47-48p)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61p)
아Q는 형식상으로는 패배했다. 놈들은 노란 변발을 휘어잡고 벽에 그의 머리를 너덧 번 쿵쿵 짓찧었다. 건달들은 그제야 만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아Q는 잠시 선 채로, “나는 자식에게 맞은 셈 치자,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는 그도 만족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아Q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을 나중에 하나하나 다 입 밖으로 말했기 때문에 아Q를 놀리던 사람들은 그에게 일종의 정신상의 승리법이 있다는 것을 거의 다 알게 되었고, 그 뒤로는 그의 노란 변발을 잡아챌 때마다 사람들이 먼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Q, 이건 자식이 애비를 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다. 네 입으로 말해봐, 사람이 짐승을 때린다고!”
아Q는 두 손으로 자신의 변발 밑동을 움켜잡고 머리를 비틀면서 말했다.
“벌레를 때린다, 됐지? 나는 벌레 같은 놈이다····· 이제 놔줘!”
벌레가 되었어도 건달들은 놓아주지 않았다. 전과 똑같이 가까운 아무데나 그의 머리를 대여섯 번 소리나게 짓찧었고, 그런 뒤에야 만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그들은 이번에는 아Q도 꼼짝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십초도 지나지 않아 아Q도 역시 만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그는 자기가 자기경멸을 잘하는 제일인자라고 생각했다. ‘자기경멸’이라는 말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제일인자’이다. 장원도 ‘제일인자’이지 않은가? “네까짓 것들이 뭐가 잘났냐!?”
아Q는 이처럼 여러 가지 묘법을 써서 적을 극복한 뒤에는 유쾌하게 술집으로 달려가 술을 몇잔 마시고, 또다른 사람들과 한바탕 시시덕거리고, 한바탕 입씨름을 하여 또 승리를 얻고, 유쾌하게 사당으로 돌아와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잠이 들었다.
(...)
그는 넋을 잃고 사당으로 돌아왔는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기의 은전 뭉치가 없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제삿날 벌어지는 노름판은 대부분 이 마을 사람들이 아니니 어디 가서 재산을 찾는단 말인가?
하얗게 반짝이는 은전 더미! 더구나 자기 것이었는데ㅡ지금은 없어져버린 것이다! 자식이 가져간 셈 치자고 해도 여전히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자기를 벌레라고 해보아도 역시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도 이번에는 실패의 고통을 조금 느꼈다.
그러나 그는 금세 패배를 승리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자기 뺨을 힘껏 연달아 두 번 때렸다. 얼얼하게 아팠다. 때리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히자 때린 것이 자기라면 맞은 것은 또 하나의 자기인 것 같았고, 잠시 후에는 자기가 남을 때린 것 같았으므로ㅡ비록 아직도 얼얼하기는 했지만ㅡ만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드러누웠다.
그는 잠이 들었다.(71-74p)
“내가 어렸을 때 말야, 벌이나 파리가 한곳에 앉아 있다가 무엇에 놀라면 즉시 날아가지만 조그맣게 한바퀴 돌고 나서는 아까 그 자리로 되돌아와 내려앉는 것을 보고 참 우습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었지. 그런데 뜻밖에 지금 나 자신도 기껏 조그맣게 한바퀴 돌았을 뿐 제자리로 날아 돌아온 것이야. 게다가 뜻밖에 자네도 돌아왔군. 자네는 좀더 멀리 날아갈 수 없었나?”
“글세, 아마 나 역시 조그맣게 한바퀴 돈 것에 불과할걸.”(158p)
ㅡ 루쉰, <아Q정전> 中, 창작과비평사
2017/5/26
남자가 했을 때 기분 좋은 말은?
‘내가 좋아하는 건 네 얼굴뿐이야.’(18p)
ㅡ 마스다 미리, <내 누나> 中, 이봄
이런 하루가 계속 쌓이면서 나의 인생은 끝나간다.(40p)
평상시에는 대충 건너는 횡단보도지만, 아이가 있어서 신호를 지켰다.(43p)
뒤늦게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사람이 있었지만, 모르는 척 닫힘 버튼을 눌러버렸다.(57p)
나는, 젊은 나로 돌아가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좋다.(69p)
봄에 결혼하는 마이코는 일은 계속할 듯하다. 하지만 이사를 가기 때문에 더 이상 이웃사촌이 아니게 된다. 멀어진다고 해도 마이코는 앞으로도 계속 나의 절친, 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이코는 절친이 아닌 친구. 절친이라는 말로 친구를 얽매어서는 안 된다. 그냥 흐르는 대로 만나는 게 좋다. 그걸로 좋다고 생각한다.(123-124p)
ㅡ 마스다 미리, <지금 이대로 괜찮은걸까> 中, 이봄
2017/5/11
“뛰어나 봐야 아무 쓸데없다는 거지, 그래, 알겠다.”
“쓸데없기만 한 게 아니야. 해롭다니까. 뛰어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려고 할 때면 그 여자는 경쟁 관계에 들어갔다고 느끼게 돼. 자기도 뛰어나야만 할 것 같거든. 버티지 않고 바로 자기를 내주면 안 될 것 같은 거지. 그런데 그냥 보잘것없다는 건 여자를 자유롭게 해 줘. 조심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는 거야. 재치 있어야 할 필요도 전혀 없어. 여자가 마음을 탁 놓게 만들고, 그러니 접근이 더 쉬워지지. 아, 이쯤 하자. 다르델로를 만나면 보잘것없는 인물이 아니라 나르키소스를 상대하게 될 거야. 이 말의 정확한 의미에 주의해야 해. 나르키소스라는 건 거만한 사람이라는 게 아니야. 거만한 사람은 다른 이들을 무시하지. 낮게 평가해. 나르키소스는 과대평가하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관찰하고 더 멋있게 만들고 싶어 하거든. 그러니까 그는 자기의 모든 거울들에 친절하게 신경을 쓰는 거지.”(25-26p)
“나 자신한테 화가 나서 그래. 나는 왜 틈만 나면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괜찮아.”
“죄책감을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모든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삶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지. 다들 알아. 하지만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 투쟁은 어떻게 펼쳐지지? 보자마자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 수는 없잖아. 그 대신 다른 사람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거야.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는 승리하리라. 자기 잘못이라 고백하는 자는 패하리라. 네가 생각에 푹 빠져서 길을 걷고 있어. 어떤 여자가 맞은편에서 오는데 마치 세상에 저 혼자인 것처럼 왼쪽도 오른쪽도 안 보고 그대로 전진하는 거야. 둘이 서로 부딪쳐. 자, 이제 진실의 순간이야. 상대방한테 욕을 퍼부을 사람이 누구고, 미안하다고 할 사람이 누굴까? 전형적인 상황이야. 사실 둘 다 서로에게 부딪힌 사람이면서 동시에 서로 부딪친 사람이지. 그런데 즉각, 자발적으로, 자기가 부딪쳤다고, 그러니까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가 하면 또 즉각, 자발적으로 자기가 상대에게 부딪힌 거라고, 그러니까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면서 대뜸 상대방을 비난하고 응징하려드는 사람들도 있지. 이런 경우 너라면 사과할 것 같아 아니면 비난할 것 같아?”
“나라면 분명 사과하겠지.”
“아이고, 이 친구야, 너도 사과쟁이 부대에 속한다는 거네. 사과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래, 그렇지.”
“그런데 착각이야. 사과를 하는 건 자기 잘못이라고 밝히는 거라고. 그리고 자기 잘못이라고 밝힌다는 건 상대방이 너한테 계속 욕을 퍼붓고 네가 죽을 때까지 만천하에 너를 고발하라고 부추기는 거야. 이게 바로 먼저 사과하는 것의 치명적인 결과야.”
“맞아. 사과하지 말아야 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서로를 뒤덮어 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57-58p)
그는 성공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시샘을 불러일으킬까 걱정했고,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즐겼지만 추종자들을 피했다. 사사로운 생활에서 몇 차례 상처를 입은 뒤, 특히 퇴직자들의 음울한 무리에 합류해야 했던 해부터 이런 조심성은 고독을 즐기는 취향으로 변했다. 그의 반순응적인 발언들이 예전에는 그를 더 젊어 보이게 했지만 이제는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데도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옛날 사람, 그러니까 늙은이가 되게 했다.(77-78p)
“샤를하고 너는, 사교계 칵테일파티에서 불쌍하게 속물들 시중이나 드는 동안 좀 재미있게 해 보려고 웃기는 파키스탄 말을 만들어 냈어. 뭔가 신비하게 만드는 즐거움이 너희에게 보호막이 돼 주었을 거야. 하긴 그게 우리 모두의 작전이기도 했지.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을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하지만 내 눈에는 우리 장난이 힘을 잃었다는 게 보인다. 너는 기를 쓰고 파키스탄어를 해서 흥을 돋우려 하고 있어. 그래 봐야 안 돼. 너는 피곤하고 지겹기만 할 뿐이야.”(96-97p)
“너, 왔다가 그냥 간 게 몇 번이야?”
“벌써 세 번. 그래서 사실 여기에 샤갈을 보러 오는 게 아니라 한 주 한 주 지나며 줄이 거 길어지는 걸, 그러니까 지구에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걸 확인하러 오는 거지. 저 사람들 봐! 저 사람들이 느닷없이 샤갈을 사랑하게 됐다고 생각해? 저 사람들은 오로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디든 달려가고 뭐든 다 할 준비가 돼 있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누가 하라는 대로 다 해. 기막히게 조종하기 쉽다고.”(136p)
ㅡ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中, 민음사
2017/5/9
“이봐, 짐. 고양이가 우리 인간들처럼 똑같이 말해?”
“못하지. 고양이는 그렇게 못해”
“그럼, 소는?”
“소도 못해”“고양이는 소처럼 말해, 또 소는 고양이처럼 말하구?”
“아니”
“고양이와 소가 서로 다르게 말하는 건 당연하고도 옳은 일이겠지?”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이제”
“그렇다면, 고양이나 소가 우리 사람들과 다르게 말하는 것도 당연하고도 옳은 일이 아니냔 말야”
“그야 물론 그렇지”
“그렇다면, 프랑스 사람이 우리 미국 사람들과 다르게 말을 하는 것이 어째서 당연하지 않고 옳지 않느냐 말야. 자, 어서 대답 좀 해봐”
“헉, 고양이가 뭐 사람이당가?”
“그야 아니지”
“그렇다면, 고양이가 사람처럼 말할 까닭이 없잖능가. 소는 사람이랑가?ㅡ아니면 소는 고양이랑가?”
“어느 쪽도 아니지”
“그렇다면, 고양이는 사람이나 소처럼 말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 말이제. 프랑스 사람은 사람이당가?”
“물론 사람이지”
“그럼 됐네그려! 빌어먹을, 도대체 왜 프랑스 사람들은 사람처럼 말하지 않는 거란 말이랑가? 이걸 대답해 보란 말이랑께!”
더 이상 얘기를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습니다ㅡ검둥이에게 토론을 가르친다는 것은 소 귀에다 경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그만 입을 다물기로 했습니다.(172-173p)
그 사나이들은 가버렸고, 나는 뗏목에 올라탔습니다. 내가 한 일이 나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참한 마음이었지요. 난 암만 좋은 일을 하려고 별러도 나에겐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좋은 일을 하는 걸 배우지 못한 인간한테는 전혀 기회가 없었던 겁니다ㅡ위급한 상황에 부딪히면 뒤를 밀어서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니 결국 손을 들고 말지요. 나는 잠시 생각해 본 다음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가만 있자 내가 옳은 일을 해서 짐을 남의 손에 넘겨주었다고 하면, 내 마음이 지금보다 더 편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 기분이 좋지 못했을 거야ㅡ아마 지금과 마찬가지 기분이었을 거야. 나는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옳은 일을 하는 데 힘이 들고, 나쁜 짓을 하는 데는 힘이 들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결과가 똑같다면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해 본댔자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여기서 그만 딱 막히고 말았지요. 이 문제에 대해 답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젠 이 일로 마음을 쓰는 일을 아예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그때 그때에 제일 편리한 방법을 택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221-222p)
“아, 슬프군요!”
“도대체 무엇이 슬프다는 말이오?”하고 대머리 영감이 따져 물었습니다.
“내가 어쩌다 이런 생활을 하게 되고 이런 작자들과 한패가 될 만큼 신세가 영락하고 말았나를 생각하니 말이지요”그리고 그는 헝겊으로 눈 가장자리를 훔치기 시작했지요.
“에이, 이 천벌 받을 놈 같으니라구. 우리들이 뭐 너하고 한패가 되지 못할 게 어디 있단 말이냐?”하고 대머리 영감이 꽤나 거만하게 거드름을 피우며 내뱉었습니다.
“그야, 내겐 과분할 정도이지요. 훌륭한 한패고말고요. 하지만 나를 그토록 높은 지위에서 이렇게 낮은 신분으로 떨어뜨린 작자는 누구지요? 바로 나라는 말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니올시다ㅡ천만에요. 나는 누구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다 자업자득이지요. 냉엄한 이 세상더러 하고 싶은 대로 최악을 다하라지요. 한 가지만은 나는 알고 있지요ㅡ나를 위한 무덤이 어디엔가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전과 다를 것 없이 돌아가고, 나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겠지요ㅡ사랑하는 사람들, 재산, 그 밖에 모든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그 무덤만은 빼앗아갈 수가 없어요. 언젠가 나는 그 무덤에 누워 모든 걸 잊어버리고 내 불쌍한 가슴이 안식을 찾게 될 겁니다”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계속 울어댔지요.(277-278p)
이 거짓말쟁이들이 왕도 공작도 아니고 그저 천하의 협잡꾼이요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마디 입도 뻥끗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지요. 혼자만 알고 내색을 않는 것, 그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싸움도 일어나지 않고, 귀찮은 일도 생기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놈들이 자기들을 왕이니 공작이니 하고 불러주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가족의 평화를 유지하는 한 나는 반대하지 않았지요. 짐에게 얘기해 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빠한테서 무엇인가 배운 바가 있다면, 이런 종류의 인간들과 함께 살아나가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내버려두는 거라는 겁니다.(283-284p)
내가 너희들을 알고 있느냐고? 손바닥처럼 잘 알고 있고말고. 나는 남부에서 태어나 자랐고, 북부에서 산 일도 있다. 그래서 모든 웬만한 인간쯤은 두루 알고 있단 말이다. 보통 사람들이란 겁쟁이지. 북부에선 짓밟으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누구나 다 자기를 짓밟게 하고, 그후 집으로 돌아가서는 그것을 참아낼 만큼의 겸허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올린단 말이다. 남부에서 한 사나이가 자기 혼자서 대낮에 사람들이 가득 탄 역마차를 세워놓고는, 승객들로부터 돈을 빼앗는단 말이다. 너희들 신문들이 너희들을 용감한 사람이라고 불러대니까 정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용감하다고 착각하고 있지ㅡ실은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정도의 용기가 있을 뿐 용기가 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 너희들 배심원은 왜 살인자들을 교살 하지 않은 거지? 그것은 그자의 친구놈들이 어둠을 타 등뒤에서 자기를 쏘아 죽이지나 않을까 하고 무서워하기 때문이다ㅡ그 친구놈들은 틀림없이 그짓을 해내고야 말 테니까.
그래서 그들은 늘 놓아주지. 그러면 복면을 쓴 겁쟁이들 백명을 거느리고 사나이다운 사나이가 밤에 가서 그 악당을 사형한단 말이다. 너희들의 잘못은, 너희들이 사나이다운 사나이를 데리고 오지 않은 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잘못이요, 또 다른 잘못은 어둠을 타고 오지 않고 게다가 복면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너희들이 데리고 온 것은 절반짜리 사나이란 말이다ㅡ저기 있는 저 벅 하크니스가 바로 그런 놈이거든ㅡ그리고 만약 벅이 앞장을 서지 않았다면, 너희들은 그저 소동만 일으켰을 뿐이란 말이야.
너희들은 여기에 오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평범한 인간은 귀찮은 일과 위험한 일은 싫어하는 법이거든. 너희들도 그런 것을 싫어하지만 저기 있는 저 벅 하크니스 같은 절반짜리 인간이 <놈을 사형에 처하라! 놈을 사형에 처하라!>하고 외치면 너희들은 물러서기가 두려워지거든ㅡ너희들의 본색이 탄로날까봐서 말이다ㅡ겁쟁이라는 본색 말이다ㅡ그것이 두려워 큰 소리를 지르고 그 절반짜리 사나이 윗저고리 꼬리에 잔뜩 매달려서 대단히 장한 일을 해낸다고 큰 소리를 치고는 대단한 기세로 여기로 몰려왔단 말이지. 이 세상에서도 제일 불쌍한 건 오합지중이야. 군대가 바로 그렇지ㅡ오합지중 말이다. 오합지중은 타고난 배짱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그들의 집단에서, 그들의 상관한테서 빌려온 배짱으로 싸운단 말이다. 하지만 그 선두에 사나이다운 사나이가 없는 오합지중은 불쌍하기 이를 데 없단 말이다. 자, 이제 너희들이 할 일은 꽁무니를 낮추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 쥐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다.(323-324p)
“여러분, 잠깐 기다리시오! 한 마디 말할 게 있소” 그 말에 사람들은 주춤 걸음을 멈추고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들은 정말로 속아넘어갔소. 하지만 우리들은 이 마을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죽을 때까지 늘 이 얘기를 듣고 싶지는 않단 말이외다. 그것은 아니될 일이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빠져 나가서 연극을 칭찬하여 다른 마을 사람들도 우리처럼 속아넘어가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 피차 똑같은 처지에 놓이는 게 아니겠소. 어디 내 말이 틀렸소?” (“그 말이 옳아!ㅡ판사님 말이 옳다니까!”하고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그럼 좋소ㅡ우리가 속았다는 건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맙시다. 자, 어서들 집으로 돌아가서 누구나 다 이 비극을 보러오라고 권합시다”(334p)
“친구를 방문한다고 하는 것은 좋지만 그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한다는 말은 싫어”
“그래요, 그럼 그것은 그만두기로 하지요”그녀에게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ㅡ아무런 해도 끼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것은 사소한 일로 성가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상에서 사람이 가는 길을 가장 평탄하게 해주는 것은 이와 같이 사소한 일인 겁니다. 그렇게 한마디 해두면 메리 제인은 안심할 것이며, 게다가 돈 한 푼 드는 일도 아니었지요.(407-408p)
이 말에 왕은 살금살금 뗏목의 오두막 속으로 기어들어가 울분을 달래기 위해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공작도 자기 술병을 들고 나섰지요. 그리하여 반 시간 후에는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도둑처럼 다시 다정한 사이가 되었고,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점점 더 사이가 좋아졌습니다. 나중에는 상대방의 팔을 베개로 삼아 코를 골며 잠이 들어버렸지요. 두 사람은 자못 마음이 풀어졌지만, 제아무리 마음이 풀어졌다 하더라도 왕은 돈 주머니를 감춘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잊어버릴 만큼 풀어지지는 않았지요.(441p)
ㅡ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中, 민음사
2017/4/27
남녀 관계는 논리로 따질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톨스토이 같은 지적인 남자가 일자무식 아낙과 몇 년씩 뒤엉켜 살면서 일생일대의 사랑 어쩌고 했다는 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톨스토이에게 남녀의 사랑이란 어느 수준에서는 전적으로 육체의 사랑이었다는 이야기다. 복잡할 게 하나도 없다. 그냥 같이 자는 것, 이게 사랑이란다.
둘째, 그런데 인간의 정신은 그게 사랑의 전부는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자꾸 속살거린다. 이때부터 만사가 복잡해진다. 육체의 결합 이상의 것을 사랑에서 찾아내야만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육체의 쾌락에 덧붙여 영혼의 교감, 의사소통, 이런 것들을 결혼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나 나중에 더욱 소상히 밝히겠지만 결혼이라는 것 역시 결국은 육체관계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훗날 톨스토이는 이를 갈며 뇌까린다. “결혼은 합법적인 매춘이다.”
셋째, 거기에 덧붙여 도덕이라는 것이 개입하게 되면 이제 삶은 고통 그 자체가 된다. 톨스토이는 농부 아낙과의 질펀한 관계를 비롯해 모든 육체관계를 지독하게 혐오하면서 도덕의 칼을 갈았다. 톨스토이가 육체를 혐오하다 보니 도덕가가 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 도덕가이기 때문에 육체를 혐오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좌우간 육체 및 육체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그의 혐오감은 정상치를 훌쩍 뛰어넘는다.(48-49p)
‘이제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너는 내 모든 것이야!’ ‘너는 내 운명이야!’ 사랑에 빠진 남녀가 흔히 주고받는 말이다. 노래에도 나오고 소설에도 나오고 영화에도 나온다. 절절하게 들린다. 상대방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면 조금 뿌듯한 기분까지 들 것 같다. 그러나 『안나 카레리나』는 이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안나의 전폭적인 사랑 선언은 곧바로 상대방을 질리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의 파멸을 가져온다.
안나의 입장에서 볼 때 ‘너는 내 모든 것’ 시나리오는 우선 남편과 자식을 버리기로 한 자기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사랑에 목숨을 걸었다는 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도덕이고 뭐고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다. 즉 안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함으로써 심리적인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만일 안나가 그냥 사랑에 목숨 거는 데 만족했다면 별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어디 그렇게 단순한가. 무언가에 목숨을 걸었으면 응당 대가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상대방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그 생각 자체가 무서운 것이다(무언가를 위해, 혹은 누군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좌우간 문제가 있다!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버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느 시점에서는 상대방에게서도 꼭 그만큼의 목숨 건 사랑을 기대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대방은 나처럼 그렇게 헌신적인 사랑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나한테는 네가 전부인데 너한테는 내가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이런 식의 생각은 곧 근거 없는 의심과 질투로 발전해 나간다. 안나는 이런 고전적인 심리적 동요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는다.(58-59p)
그는 최근 와서 점점 더 빈번히 그녀에게 일어나는 질투의 발작에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질투의 원인이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에 대해 식어가는 자기감정을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이나 그녀의 사랑은 행복이라고 자신이게 말했는지 모른다. 실제로 안나는 인생의 모든 행복보다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는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숨 막히게 하고 그로 하여금 역겨운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압도적인 사랑이다. 그녀는 외모까지도 어딘지 모르게 추하게 변해가는 듯하다.
그는 꽃의 아름다움에 끌려 그만 그것을 따서 쓸모없게 만들어 놓고는 시든 꽃에서 이전의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사람과 같은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애정이 가장 뜨거웠던 무렵에는 만일 강렬하게 원한다면 가슴 속에서 그 사랑을 뽑아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그녀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있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지금, 도리어 그녀와의 관계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61-62p)
그럼 여기서 대충 정리해 보자. 톨스토이 부부의 갈등은 처음부터 톨스토이 자신에게서 촉발됐다. 그는 매우 복잡한 사람이었다. 마음속에 육체와의 전쟁이라는 숭고한 사명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가정을 이루어 육체의 행복을 누리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욕심도 많은 사람이어서 항상 완벽한 아내, 완벽한 결혼에 대한 이상(혹은 망상)을 품고 있었다. 그가 원했던 이상적인 부인은 정숙하고 머리도 좋고 순결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남편에게 순종적이면서도 남편을 귀찮게 하지 않을 정도로 독립적이고, 남편에 대한 사랑과 이해심으로 충만해 있고,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여자였다. 때에 따라서는 남편과 더불어 인생철학을 논할 수 있을 만큼 지적이면서 또 어떤 때는 농사꾼 아낙네처럼 순박함 그 자체인 여자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여자였다.(98p)
ㅡ 석영중,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中, 예담
2017/4/27
우리는 「엄청멍충한」뿐 아니라 자비 출판이나 독립 출판을 통해 나오는 소설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위와 비슷한 이야기였다. 결국 사람들이 집착하는 건 재밌는 이야기, 기발한 아이디어, 또는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어떻게 ‘잘’전달하느냐는 것. 독립 출판을 하는 이들은 실험적이거나 도전적인 작업을 하(려고 하)는 이들인데 소설은 오히려 퇴행적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소설에 대해 사실은 굉장히 관심이 없다는 것, 이를테면 미술은 현대미술이나 추상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문학에 대해서는 미술로 치면 인상파 이전의 인식, 현실이나 관념을 모사해내는 것(뛰어나게든 기발하게든)이라고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한 아이러니에 대해 말했다.(33p)
어떤 작가들은 지난날 자기 독자들의 마음에 들었던 걸 또 쓰는 경향이 있다. 그랬단 끝장이다. 대다수 작가들은 창작 수명이 짧다. 그들은 찬사를 들으면 그걸 믿어버린다. 글쓰기의 최종 심판관은 딱 한 명, 작가 자신밖에 없다. 작가는 평론가, 편집자, 출판업자, 독자에게 휘둘리는 날엔 끝장이다. 그리고 작가가 명성과 행운에 휘둘리는 날엔 강물에 처넣어 똥덩어리와 함께 떠내려 보내도 물론 괜찮다.(49-50p)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그의 책 「관료제 유토피아」에서 ‘규제 철폐’와 ‘세계화’같은 단어들이 실제 그 의미와 얼마나 반대되는 것인지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규제 철폐의 실제 의미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규제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금융업을 예로 들면 규제 철폐는 극소수의 거대 금융회사들이 시장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바꾼다는 의미다. 세계화는 국경의 소멸이나 자유로운 상거래와는 상관없고 중무장된 국경선 뒤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을 곤경에 빠뜨린다는, 그러니까 국제적인 기업들이 전 세계의 노동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부려먹겠다는 의미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그런 움직임에 대항해 세계정의운동에 참여했고 진짜 국경 없는 세계를 제안하기 위해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회의를 분쇄할 목적으로 포위 및 봉쇄 작전을 실행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와 그의 세력은 이날 이후 새롭게 제안된 거의 모든 국제무역협정을 침몰시켰다고 한다. 특히 남미에서 그 성과가 컸다는데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2000년 초부터 대중문화에서도 공공연하게 IMF나 WTO, 세계은행에 대한 공공연한 조롱과 비판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공 때문인지도 모른다.(147p)
“주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한다.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한다.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살게 된다.(201p)
고다르는 「사이트 앤드 사운드」에 실린 1962년의 인터뷰에서 <비브르 사 비>의 오프닝 신의 의미를 묻는 톰 밀른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람들은 스크린에서 조금 이상한 것을 보는 즉시 그것을 이해하려고 지나친 노력을 하는 것 같다. 사실은 아주 잘 이해하고 있음에도, 훨씬 더 많이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이 <여자는 여자다>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그 영화의 의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화는 의도가 없었다. 테이블 위에 꽃다발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무슨 의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 어떤 것도 입증하고 있지 않다. 그 영화가 즐거움을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 영화가 모순적이 되기를, 꼭 함께 있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 나란히 놓여지기를, 즐거운 동시에 슬픈 영화가 되기를 의도했다. 물론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고 이것 혹은 저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법이지만 나는 그 두 가지 모두를 하고 싶었다.(211p)
아감벤은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동시대인을 참으로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자란 자신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자, 하지만 그 간극과 시대착오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정지돈이 말했다. 아감벤에 따르면 특정 시대에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사람, 모든 면에서 완벽히 시대에 묶여 있는 사람은 동시대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시대를 쳐다보지도, 확고히 응시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인은 시대의 빛이 아니라 어둠을 인식하기 위해 그곳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다른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214-215p)
ㅡ 금정연, 정지돈, <문학의 기쁨> 中, 루페
2017/4/25
자크: 제가 생각하는 대로 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저기 높은 곳에, 생각은 잘하는데 말이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적혀 있으니.(30p)
자크: 제 대위님이 살아 있는 내내 절 괴롭혀서 그의 죽음 덕분에 제가 드디어 그 엄격한 예의범절에서 해방됐다는 식으로 말씀하실 때는 정말 화를 낼 뻔했습니다.
주인: 좋네, 자크. 난 내가 원하는 걸 이룬 모양이군. 그대를 위로하기 위해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어디 말 해 보게나? 그대는 울고 있는데 내가 만약 그대 고통의 대상에 대해 말했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는가? 아마도 그대는 더 심하게 울었을 테고, 난 그대를 더 비통하게 만들었겠지. 그래서 난 그대를 속였다네. 우스꽝스러운 추도사와 그 뒤를 이은 우리의 작은 논쟁으로. 이제 대위에 대한 생각은 그를 마지막 처소로 데리고 가는 장례 마차만큼이나 그대에게서 멀어졌다는 걸 인정하겠지. 따라서 난 그대가 사랑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네.(77p)
자크: 전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가 말했던 선행이나 악행에 대해 때로 얼굴이 붉어지기 때문이죠. 선행을 했던 사람도 나쁜 짓을 할 수 있고, 악행을 했던 사람도 속죄할 수 있으니까요.
주인: 진부한 아첨꾼도 준엄한 심판관도 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거라.
자크: 쉬운 일이 아니에요. 우리에겐 각자 자기만의 개성이나 관심, 취향, 열정이 있어서 그에 따라 말을 과장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하죠. 있는 그대로 말하라니요! 그런 일은 도시 전체를 뒤져도 아마 하루에 한 번 찾아보기도 힘들걸요. 게다가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보다 사정이 더 나은가요? 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시키는 일도 도시 전체를 뒤져 하루에 한 번 찾아보기도 힘들걸요.
주인: 제기랄! 혀와 귀의 사용을 금지하는 격언이구나.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아무것도 듣지 말고,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그렇지만 자크야, 네가 생긴 대로 말하거라. 나도 내가 생긴 대로 들을 테니. 또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그 말을 믿을 테니.(81-82p)
여기 내 아내와 구스의 대화가 있다.
“구스 선생님이시군요?”
“네, 부인, 저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세요?”
“제가 갔던 곳에서요.”
“거기서 뭘 하셨는데요?”
“고장 난 방아를 고쳤죠.”
“누구 건데요?”
“모르겠는걸요. 방앗간 주인을 고치러 간 건 아니니까요.”
“오늘은 평소와는 달리 옷을 잘 입으셨네요? 그런데 왜 깨끗한 양복 속에 더러운 셔츠를 입으셨죠?”
“셔츠가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왜 하나밖에 없죠?”
“한 번에 몸뚱어리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제 남편은 없지만 식사하고 가세요.”
“아닙니다. 전 댁 남편에게 제 위도 식욕도 맡기지 않았습니다.”
“댁 부인의 건강은 어떠세요?”
“그녀가 원하는 대로죠. 그녀 일이니까요.”
“아이들은요?”“최고죠!”
“특히 눈이 아름답고 피부가 좋고 아주 건강해 보이는 아이는요?”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나은 셈입니다. 죽었으니까요.”
“아이들에게 뭘 좀 가르치시나요?”
“안 가르칩니다, 부인.”
“뭐라고요? 읽는 것도 쓰는 것도 교리 문답도 안 가르친단 말이에요?”
“읽기도 쓰기도 교리 문답도 안 가르칩니다.”
“왜죠?”
“사람들이 제게 아무것도 안 가르쳤어도 제가 무식하진 않으니까요. 아이들이 똑똑하다면 저처럼 될 테고, 바보라면 아무리 가르쳐 봐야 바보밖에 더 되겠습니까?”(96-97p)
말더듬이만큼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절름발이만큼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 법이죠(117p)
자크: 나리,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을 슬퍼해야 할지 무엇을 기뻐해야 할지도 모르는 법입니다. 좋은 것은 나쁜 것을, 또 나쁜 것은 좋은 것을 가져오는 법이니까요. 우리는 저기 높은 곳에 쓰인 것 아래서 우리 소망과 기쁨, 슬픔 속에 제정신이 아닌 채 어둠 속을 걸어가는지도 모릅니다. 전 눈물을 흘릴 때 제가 자주 바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 그렇다면 웃을 때는?
자크: 웃을 때도 여전히 바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전 울거나 웃을 수밖에 없죠. 바로 그 점이 저를 화나게 합니다. 백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밤새도록 눈을 붙일 수가 없었어요.
주인: 아니, 네가 시도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말해 보거라.
자크: 모든 일에 아랑곳하지 않는 거죠. 아! 제가 성공할 수만 있다면.
주인: 그게 무슨 도움이 되지?
자크: 근심으로부터 해방되거나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데에, 또는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여 길모퉁이 말뚝에 부딪혀도 베개 위에 드러누울 때만큼이나 편안하게 느끼는 데에 도움이 되죠. 때로 제가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아주 중요한 순간에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확고해도 아주 작은 반대나 하찮은 일에는 자주 당황하니 말입니다. 스스로 따귀를 때리고 싶을 정도랍니다. 그래서 전 체념했어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죠.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러나저러나 거의 마찬가지더군요. 단지 덧붙일 게 있다면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든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거죠. 그건 다른 종류의 체념으로, 더 쉽고 더 편해요.(121-123p)
자크: 전 원칙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모릅니다. 다만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내리는 규칙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건 다르니까요. 모든 서약은 왕이 내리는 칙령의 전문과도 흡사하죠. 모든 설교자들은 우리가 더 나아질 거라고 하면서 그들의 교훈을 실천해 주기를 바라지만 그들 자신은 틀림없이····· 미덕이란·····.
주인: 미덕은 좋은 것이다. 악인이나 선인이나 다 좋다고 말하니. 마실 것을 다오.(130p)
자크: 칼과 칼집의 우화죠. 어느 날 칼과 칼집이 싸움을 했답니다. 칼이 칼집에게 말하기를 “이 방탕한 여자야! 넌 매일 새 칼을 받아들이는구나·····.” 그러자 칼집이 칼에게 대답했죠. “당신은 바람둥이야. 날마다 칼집을 바꾸니·····.” “칼집, 당신이 약속한 건 이게 아니잖아·····.” “칼, 당신이 먼저 날 배신했어요·····.” 싸움이 식탁에까지 번지자 칼과 칼집 사이에 앉아 있던 자가 말했어요. “칼 그리고 칼집, 그대들은 변하는 게 좋겠소. 변하는 게 그대들 마음에 드니까. 하지만 변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건 잘못이오. 칼, 자넨 여러 칼집으로 들어가도록 하느님이 만들었다는 걸 모르오? 그리고 칼집, 자넨 하나 이상의 칼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졌다는 걸 모르오? 그대들은 칼집 없이 지낼 수 있다고 맹세하는 다른 칼들이나, 어떤 칼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다른 칼들이나, 어떤 칼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다른 칼집들을 미쳤다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칼집, 그대는 단 하나의 칼에, 그리고 칼, 그대는 단 하나의 칼집에 만족할 거라고 맹세했을 때에 그대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미쳤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166-167p)
자크: 명예를 걸고 약속했을 때에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우리의 재판관에게 이 문제에 대해 다시 거론하지 않겠다고 명예를 걸고 약속했으니 다시는 말하면 안 되죠.
주인: 네 말이 옳다.
자크: 하지만 그 일을 다시 거론하지 않고도 앞으로 있을 배 번이나 더 되는 논쟁을 방지하기 위해 합리적인 조치를 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주인: 동의하네.
자크: 약정 1. 제가 나리께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저기 높은 곳에 씌어 있는 한, 또 나리께서 저 없이 지낼 수 없다는 걸 제가 알고 느끼는 한, 필요할 때는 언제나 이 이점을 남용할 것임.
주인: 하지만 자크, 일찍이 이 같은 약정은 한 번도 만들어진 적 없었잖은가.
자크: 약정이 만들어졌든 안 만들어졌든 그런 일은 항상 행해져 왔으며 또 세상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행해질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나리와 마찬가지로 이 법칙에서 벗어나려고 시도를 안 해 본 줄 아십니까? 나리께서는 자신이 그들보다 더 능란하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그런 생각은 집어치우시고, 나리께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필요의 법칙에 따르도록 하십시오. 약정 2. 자크가 주인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과 힘을 모르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주인은 자신의 나약함이나 관대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기 때문에 자크는 무례할 수밖에 없으며, 주인은 평화를 위해 이를 모른 체해야 할 것임.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조정되었고, 자연이 자크와 주인을 만든 순간 저기 높은 곳에서 조인되었음. 따라서 주인은 칭호를 얻고 자크는 실권을 가질 것이라고 결정하는 바임. 만약 나리께서 이런 자연의 의도에 반대하신다면 성공하지 못할겁니다.
주인: 하지만 그런 조건이라면 네 몫이 내 것보다 더 낫지 않느냐?
자크: 누가 그걸 반박했나요?
주인: 그런 조건이라면 내가 네 자리를 차지하고 대신 널 내 자리에 앉혀야겠구나.
자크: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십니까? 나리께서는 칭호도 잃고 실권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대로 하도록 하죠. 우리 둘 다 잘 지내니, 그리고 남은 생애 동안 속담이나 만들며 지내죠.
주인: 어떤 속담인데?
자크: ‘자크가 주인을 끌고 간다.’라는 속담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우리가 처음이지만 장차 나리나 저보다 더 가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반복적으로 듣게 될 것입니다.
주인: 그건 가혹한, 아주 가혹한 것 같구나.
자크: 주인님, 존경하는 주인님. 나리께서 아무리 바늘에 찔리지 않으려고 한들 바늘은 더욱 아프게 찌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끼리 합의한 걸로 하죠.
주인: 필요의 법칙에 합의를 하면 무슨 이득이 있지?
자크: 아주 많습니다. 어디서 멈춰야 할지에 대해 마지막으로 명확히, 분명히 안다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싸움은 나리께서 제 주인이라고 불리지만 실은 제가 나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말하지 않은 데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합의된 이상 거기에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주인: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도대체 어디서 다 배웠지?
자크: 그 위대한 책에서요. 아, 나리, 아무리 생각하고 명상하고 세상 모든 책을 연구한들 그 위대한 책을 읽지 않는다면 한 평범한 서기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251-253p)
독창적인 사람은 첫 번째로 교육이, 다음으로 지나친 사회 경험이 소진시키지만 않았다면 더 많았을 것이다. 마치 은화에 새겨진 것이 유통되다 보면 닳아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282p)
자크: 어느 날 한 아이가 속옷 파는 가게 판매대 아래 앉아 온 힘을 다해 소리 질렀죠. 그 소리에 짜증이 난 여주인이 말했어요.
“얘야, 왜 소리를 지르는 거냐?”
“그들이 제게 A라고 말하도록 시키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왜 A라고 말하지 않니?”
“제가 A라고 말하면 그 즉시 제게 B라고 말하라고 하기 때문이죠.”
제가 나리께 키 작은 남자 이름을 대기만 하면, 전 나머지 이야기도 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319p)
자크: 나리, 두 가지를 지적해야겠군요. 하나는 제가 이야기를 할 때면 악마나 다른 사람이 꼭 제 이야기를 중단한다는 점이고, 나리 이야기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된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한 사람은 가시덤불을 달려도 찔리는 법이 없고, 다른 한 사람은 어디다 발을 놓아야 할지 아무리 쳐다보고 걸어도 가장 평탄한 길에서도 가시덤불에 찔려 온통 살갗이 벗겨진 채 집에 도착하니 말입니다.(359p)
자크: 나리가 제게 보여 준 나쁜 본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바람 피우기를 원하면서도 딸은 얌전하기를 바라고, 아버지는 낭비하기를 원하면서도 아들은 절약하기를 바라고, 주인은·····.
주인: 하인 말을 중단하기를 바라면서도, 그것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 자주 중단하기를 바라면서도, 자기 말은 중단되기를 원치 않고·····.(360p)
자크: 그 아이는 골칫덩어리가 될 겁니다. 외아들이라는 사실이 망나니가 될 수밖에 없는 좋은 이유라면, 자신이 부자가 될 거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망나니가 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좋은 이유죠.(379-380p)
ㅡ 드니 디드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 中,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