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19

 

 

그의 마음이 고집스럽게 반박했듯이, 그것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것도 정확히 그런 식으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파국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진짜 시발점은 그의 명성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의 오페라. 아니면 절대 무오류의 존재이므로 모든 것에 다 책임이 있는 사람, 스탈린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오케스트라의 배치처럼 단순한 것에서 촉발되었을 수도 있다. 정말이지 결국 이게 그 일을 가장 정확히 바라본 것일 수도 있다. 오케스트라의 배치 하나 때문에 처음에는 비난과 모욕을 받고, 나중에는 체포되어 총살된 작곡가.(32-33p)

 

 

그러나 문제는 그가 그 일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장벽도 없이, 내일은 생각지도 않고서. 왜 그가 직업 창녀와 거의 결혼까지 갈 뻔했을까? 그는 상황 탓이라고, 감응성 정신병의 요소가 얼마간 있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의 안에 자리한 모순되는 정신 때문이었다. “어머니, 제 처 로잘리야예요. 놀랍지는 않으시죠? ‘창녀와의 결혼’에 대해 제가 쓴 일기 읽어보셨겠지요?” 이혼도 할 수 있는데 안 될 게 뭐겠는가? 그는 그녀에게 그런 사랑을 느꼈고, 며칠 뒤 거의 결혼까지 할 뻔했고, 그로부터 며칠 뒤에는 빗속에서 그녀로부터 도망쳤다. 그럴 동안 노인 가우크는 런던 호텔의 레스토랑에 앉아 커틀릿을 하나 먹을지 두 개 먹을지 고심 중이었다. 무엇이 최선일지 누가 알겠는가? 나중에야 알게 되지만 이미 늦었다.(57p)

 

 

소설이라면 그의 삶에 대한 모든 불안, 강점과 약점의 혼합, 히스테리를 일으킬 잠재성ㅡ그 모든 것이 사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휘몰아치며 결혼의 행복한 평온으로 향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삶에서 겪는 수많은 실망 가운데 하나는, 저자가 모파상이건 누구건 삶은 소설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점이었다. 고골의 짧고 풍자적인 이야기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59-60p)

 

 

그러나 그 이상 나아가보면 사실들은 더는 사실이 아니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진술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그는 케렌스키와 트로츠키의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처음에는 자랑스러워할 일이었고, 그다음에는 관심 가질 정도의 문제가 되었다가, 이제는 침묵해야 할 수치가 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1905년 혁명에서 시베리아로 추방된 늙은 볼셰비키인 그의 숙부 막심 라브렌티예비치 코스트리킨이 처음으로 조카가 혁명에 공감하도록 북돋아준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때는 자랑이자 축복이었던 늙은 볼셰비키들이 이제는 저주가 되는 경우가 더 흔했다. (...) 그러나 그는 유토피아를, 인류가 완벽해질 가능성을, 인간 영혼의 개조를 믿지 않았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이 있고 5년 후, 그는 <2천억 년 뒤에 지상천국이 온다네>라는 곡을 친구에게 써주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마저도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80-81p)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젊은이는 아이러니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그 나이 대에는 아이러니가 성장을 막고 상상력을 저해한다. 남을 믿고,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며, 모든 것에 대해 모든 이에게 솔직히 대하는, 활기차고 개방적인 마음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다 세상사와 사람들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아이러니의 감각을 발전시킬 때가 온다. 인간 삶의 자연스러운 진행 방향은 낙관주의에서 비관주의로 가는 것이다. 아이러니의 감각은 비관주의를 누그러뜨려 균형과 조화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여기는 이상적인 세계가 아니어서, 아이러니는 갑작스럽게 이상한 방식으로 쑥 자라났다. 버섯처럼 하룻밤 새, 암처럼 무시무시하게.(126p)

 

 

셰익스피어는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이 핏속에 무릎까지 빠진 독재자들을 탁월하게 묘사해냈지만, 그래도 조금은 순진한 데가 있었다. 그의 괴물들에게는 의심, 나쁜 꿈, 양심의 가책, 죄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죽인 자들의 유령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실제 공포 아래서는, 죄책감을 느끼는 양심이 뭐란 말인가? 나쁜 꿈 따위가 뭣인가? 다 감상주의, 헛된 낙관주의, 세상이 예전 모습 그대로이기보다는 우리가 바랐던 대로 될 것이라는 희망에 불과했다. 나무를 쪼개어 파편이 튀게 만든 자들, 빅 하우스의 책상에 앉아 벨로모리를 태우는 자들, 명령서에 서명을 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서류철을 닫으며 한 생명을 끝내버리는 자들. 그들 중 악몽을 꾸거나 죽은 자의 유령이 일어나 자신을 책망하는 모습을 본 자가 과연 몇이나 되었겠는가.(130-131p)

 

 

어쩌면 용기는 아름다움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여인도 나이를 먹는다. 그녀에게는 사라져버린 것만 보인다. 다른 이들 눈에는 남은 것만 보인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 잘 버텨냈다고, 굴복하지 않았다고, 신경질적인 겉모습 아래 굳은 심지가 있었다고 축하했다. 그에게는 사라진 것만 보였다.(171p)

 

 

다른 모든 것이 다 실패했을 때, 세상에 허튼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일 때에도 그는 이것만큼은 고수했다. 좋은 음악은 언제나 좋은 음악이고, 위대한 음악은 아무도 망가뜨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흐 서곡과 푸가를 어떤 박자, 어떤 세기로 연주하더라도 여전히 위대한 음악이었고 그것은 건반악기에 전혀 재능이 없는 비열한 인간에게조차 맞설 수 있는 증거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런 음악을 냉소적으로 연주할 수는 없다.(179-180p)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어 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해야 하며, 죽음에 대한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무심결에 슬그머니 떠오르도록 그저 놔두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죽음에 친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말로써든, 그의 경우에는 음악으로든. 우리 삶에서 죽음에 대해 더 일찍 생각할수록 실수도 더 적게 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가 많은 실수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가끔은 죽음에 대해 그렇게 자주 생각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수는 똑같이 저질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끔은 정말로 죽음이야말로 그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208p)

 


그러나 겁쟁이가 되기도 쉽지 않았다. 겁쟁이가 되기보다는 영웅이 되기가 훨씬 더 쉬웠다. 영웅이 되려면 잠시 용감해지기만 하면 되었다ㅡ총을 꺼내고, 폭탄을 던지고, 기폭 장치를 누르고, 독재자를 없애고, 더불어 자기 자신도 없애는 그 순간 동안만. 그러나 겁쟁이가 된다는 것은 평생토록 이어지게 될 길에 발을 들이는 것이었다. 한순간도 쉴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고, 머뭇거리고, 움츠러들고, 고무장화의 맛, 자신의 타락한, 비천한 상태를 새삼 깨닫게 될 다음 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겁쟁이가 되려면 불굴의 의지와 인내, 변화에 대한 거부가 필요했다ㅡ이런 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용기이기도 했다. 그는 혼자 미소를 지으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이러니의 즐거움은 아직 그를 버리지 않았다.(227p)

 

 

그를 아는 이들은 그를 알았다. 귀가 있는 이들은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하는 식대로만 이해하려 하는 젊은이들에게 그가 어떻게 비쳤을까? 그런 이들이 어떻게 그를 비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제 겁에 질린 얼굴이 공식 차량을 타고 지나쳐갈 때, 길가에 서 있는 젊은 시절의 그에게는 그가 어떻게 보일까? 이런 것이 우리를 위해 삶이 구상하는 비극들 중 하나일지 모른다. 늙어서 젊은 시절에는 가장 경멸했을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233p)

 

 


ㅡ 줄리언 반스, <시대의 소음> 中,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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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19

 

 

착각할 수 있는 나이에는 착각을 하면 됩니다. 그 착각에 너무 깊이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헤어나올 때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면 됩니다. 그러다가 인생이 늦어진다면? 늦어지면 됩니다. 10대나 20대에는 인생이 남들보다 3~4년 늦어지면 큰일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지나고 보면 몇 년 빠르고 늦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시기마다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딸만은 그런 과정을 생략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상한 욕심입니다. 청소년기에 그런 미망의 시기를 보내지 않고는 성숙이 있을 수 없으니까요.(24-25p)

 

 

거기다가 근본적으로 특정종교의 윤리가 과연 일반사회의 법이나 제도의 직접적 근거가 될 수 있느냐도 문제입니다. 일부 극단적인 이슬람교 신자들이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코란 구정을 들이대면서 여성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논거는 특정종교 안에서 자기들끼리 규범의 유효성을 놓고 토론할 때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지, 사회적 공론의 장에 등장할 이야기는 아닙니다.(74p)

 

 

바스가 “당신은 남편도 필요하지 않다는 말인가요?”라고 다시 묻자, 안토니아는 “어디 써먹게요?”라고 짧게 답합니다. 그러고는 “당신네가 가끔 놀러 오는 건 괜찮아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도 있으니 당신들이 좀 도와준다면 고맙기는 하겠어요”라고 덧붙이지요. 잠깐 눈이 반짝한 바스는 욕망을 숨기지 못하고 “그 댓가로 내가 얻는 게 뭐요?”라고 묻는데, 안토니아는 “커피, 계란, 야채 정도”라고 대답합니다.(119p)

 

 

모든 사회문제는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쪽 이야기만 듣고 그쪽 논리를 따라가면 오히려 속이 편하지만, 양쪽 이야기를 듣고 나면 머리가 아픕니다. 그런 헷갈리는 상황에서 기억할 만한 원칙이 바로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형사소송범에서 자주 논의되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를 변용한 표현인데, 누구 입장에 서야 할지가 불투명할 때 방향을 정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인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주로 노동조합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은 대체로 이런 해석원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183p)

 

 

제노싸이드는 소설이든 영화든 논픽션이든, 어느 누구도, 어떤 매체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르완다 제노싸이드에 대해 흔히 90만 명이 사망한 하나의 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오해합니다. 하지만 제노싸이드는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르완다 제노싸이드는 사람 한명이 죽은 살인사건이 90만개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피해자와 가해자가 자신만의 독특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고, 죽음을 맞이한 상황도 모두 다르며, 지역에 따라 학살의 모습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살인사건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최소한 책 한권 분량의 소송기록이 필요하다고 할 때, 르완다 제노싸이드를 설명하려면 적어도 90만권의 책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루에 한권씩 그 사연을 읽어도 2,465년 이상이 걸립니다.

(...)

르완다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엄청난 범죄는 결코 개인이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차대전 와중에 벌어진 아르메니아 제노싸이드는 오토만제국(터키) 정부와 군대에 의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적군인 러시아에 동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강제수용소로 추방한 뒤 학살하는 방법을 취했고, 사망자는 30만~15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던 약 250명의 아르메니아 출신 지식인들은 따로 체포되어 한꺼번에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영구 외교부의 정보장교로 일하던 아놀드 토인비는 사망자수를 대략 60만 명으로 추산했습니다. 오토만 제국은 아르메니아뿐만 아니라 아시리아와 그리스에서도 비슷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러시아혁명 이후 소련이 식량배급과 처형을 통해 학살한 우크라이나인만 해도 약 5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2차대전중의 홀로코스트는 나찌 독일에 의해 치밀하게 실행되었습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학살은 크메르 루주 정부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동티모르에서 이루어진 학살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주도했고, 최소한 1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한국전쟁 와중에 좌우 양측에 의해 수많은 양민학살이 자행되었고,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주도한 광주학살을 경험했습니다. 개인이 할 수 없는 막대한 규모의 살인도 국가가 나서면 쉽게 해낼 수 있습니다.(347-349p)

 

 

 

ㅡ 김두식, <불편해도 괜찮아>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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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18

 

1. 민간에 퍼진 장애우라는 용어가 깊게 뿌리 박혀 10년이 지난 여태껏 쓰이고 있고, 한술 더 떠 장애인을 지칭하는 긍정적인 용어라는 인식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차에 내게 장애우라는 용어가 왜 잘못되었는지 알려주었던 책을 다시 읽었다. 1쇄 찍었을 때 사서 읽었으니 근 10년 만에 다시 읽었다. 감상은 페미니즘의 도전을 다시 읽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첨단 기술 개발을 논하며 기술의 혁신은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속도로 진행된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적어도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정신은 끄떡없는 것 같다. 급속도로 변하는 물질문화와 비물질문화 간의 격차를 일컫는 문화지체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사람의 정신과 사고과정이라는 게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나만 해도 10년 전의 나와 2017년의 내가 드라마틱하게 다를까하는 의문이 든다. 비슷하게 이 책이 쓰였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장애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뀐 것 같지 않으며, 여전히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자 무서워하고 기피하는 대상으로 여겨진다.

 

 

2. 누군가를 차별하고 괴롭히고 따돌릴 때, 악의에 기반을 두고 행해지는 것과 선의에 바탕을 두고 행해지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쁠까. 악의로 가득 찬 차별행위는 말할 나위도 없이 나쁘지만 왜 선의에 충만한 차별행위는 이야기하지 않나. 그로 인해 몰라서, 알려고 하지 않아서, 무식해서 행하는 차별행위가 더 번성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그런 문제에 대해 지금껏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았고, 할 필요도 없었으며, 그만큼 차별받지 않았던 주류의 삶을 살아왔음을 반증하는 것 아닐까.

 

 

 

 

 

이러한 매체들에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장애인에 관한 이야기는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묶어 볼 수 있다.

 

첫째, 장애 때문에 어려움과 비참함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시혜와 동정을 불러일으켜 시청자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들.

둘째, 그러한 장애인을 위해 봉사하는 이웃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삭막하지만 아직은 인간미가 살아 있는 살만한 곳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야기들.

셋째, 그러한 봉사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의 초인적인 노력을 통해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장애인의 영웅담.(27p)

 

 

악의에 찬 편견과 왜곡뿐만이 아니라, 선의에 충만한 그릇된 인식 역시 이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28p)

 

 

어떤 개인이 장애에 대해 갖는 인식은 결코 그 자신의 선의와 악의에 의해, 명석함과 어리석음에 의해, 즉 그 자신의 임의적 선택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매우 많은 것을 스스로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회적인 기준과 가치에 따라 사회적으로 판단한다. 우리가 머리로 생각할 여지도 없는, 감성적이며 본능적인 판단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미의 기준까지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이러한 주장을 조금 더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30p)

 

 

사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이라고 규정한 범주 내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차이들을 지니고 있다. 또한 많은 경우에 장애인 내부의 차이는 비장애인과 장애인간의 차이보다도 크다. (...) 농인, , 시각장애인이라는 3명의 집단 내에서 두 명의 장애인간의 차이는 나와 다른 두 명의 장애인간의 차이보다 더 크다. 몸 자체의 차이도 그렇고, 구체적인 생활 장면 속에서 겪게 되는 차이도 그렇다. 이는 목발이용 장애인, , 전동휠체어이용 장애인이라는 3명의 집단 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을 하나의 집단(장애인)으로 분류하는 것은, 바로 나(비장애인)의 몸이 표준이라는 전제 아래,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인간을 분류했기 때문이다. , 장애인은 비장애인 중심주의 따른 임의적인 범주인 것이다.

 

 

그런데 한 장애인 단체가 단체 명칭과 단체에서 발간하는 잡지를 통해 장애우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 용어 역시 시민 사회단체들은 물론 방송계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장애를 지닌 사람에 대한 가장 올바른 표현은 무엇인가라는 한 설문 조사에서, 장애우라는 응답이 50%를 넘었다고 하니 그 영향력도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이 용어가 정치적으로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정확히 지적되고 또 비판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장애우라는 표현, 당신은 우리의 친구입니다라는 의미 구조 안에서 당신은 누구이고 우리는 누구인가? 당신은 장애인이고 우리는 비장애인이다. 즉 장애우라는 표현은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장애인을 규정하고 있는 용어인 것이다. 친구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도 사람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거나 2, 3인칭의 표현으로는 쓰일 수 있지만, 장애인이 자기 자신을 주체적으로 나타내는 1인칭의 표현일 수는 없다. “나는 장애우입니다라는 표현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한국 사회에 만연해있는 나이주의와 권위주의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연령과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 모든 장애인이 나와 친구일 수는 없다. 역설적으로 나이주의가 매우 공고한 한국 사회에서 장애우라는 표현이 무분별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은, 비장애인과의 관계에서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확한 정치적 비판의 지점이 수반되지 않은 막연한 완곡어법을 사용하는 것은, 장애라는 문제를 사회 구조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이를 해결해야한다는 문제의 핵심과 무관하거나 이를 비켜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애우라는 표현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장애인 단체에서 Differently abled people(다르게 할 수 있는 사람)라는 영어식 완곡어법 역시 앞서 도입하여 단체의 영문 표기 등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결코 무관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Differently abled people이라는 표현은 보다 완곡하게 같은 일을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 있으며, 일부 장애인 단체들도 영문 표기에서 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으로 과연 장애인을 제대로 지칭할 수 있는가? 인간 모두가 다들 저마다의 차이를 지니고 얼마간은 다른 방식으로 일을 수행하지 않는가? 따라서 이 역시 장애인을 배타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면, 암묵적으로 하나의 표준을 전제로 하는 표현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르다라고 했을 때, 이는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준거를 필요로 하며, 이 때 기준은 비장애인의 몸과 행동, 그리고 비장애인의 방식과 속도일 수밖에 없다. 즉 이러한 표현은 장애라는 말 자체를 피하면서 무언가 긍정적인 방식으로 장애인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사회적 정상성이라는 문제제기를 회피하거나 이를 강화하고 있는 용어법인 것이다.(57p)

 

 

 

 

김도현,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 메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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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17

 

 

읽음. 이제 웃는 경관을 읽으면 되겠지? ㅋㅋ

 

119-120p

121-122p

 

 

 

ㅡ 마이 셰발, 페르 발뢰,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中,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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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11

 

 

침묵의 미래가 가장 좋았다. 소설집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된 작품으로 도입부터 심상치 않아 함께 실려 있는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치가 마구 올라갔지만 모든 작품이 고르게 좋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와 같은 문장으로 나이듦의 과정을 즉물적으로 드러내며, 너무나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을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묻는 ‘노찬성과 에반’, 독자를 울리기 위해 작심하고 쓴 신파조의 작품이 아님에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의 한 지점을 건드리는 ‘풍경의 쓸모’와 같은 작품을 읽는 동안은 즐거운 시간이었다.

 



도화가 침착한 얼굴로 이수를 바라봤다. 오래전, 이수가 현관을 나설 때면 '저 사람 저대로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길 가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어떡하지'가슴이 저렸던 기억이 났다.

ㅡ이수야.

ㅡ응.

ㅡ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ㅡ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115p)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132p)

 

 

어느 때는 너무 흐릿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누군가를 향해, 그 누군가가 원한 미래를 향해 해상도 낮은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진 속에 붙박인 무지, 영원한 무지는 내 가슴 어디께를 찌르르 건드리고는 한다. 우리가 뭘 모른다 할 때 대체로 그건 뭘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뜻과 같으니까. 무언가 주자마자 앗아가는 건 사진이 해온 일 중 하나이니까. 그러니 오래전, 어머니가 손에 묵직한 사진기를 든 채 나를 부른 소리, 삶에 대한 기대와 긍지를 담아 외친 “정우야”라는 말은, 그 이상하고 찌르르한 느낌, 언젠가 만나게 될, 당장은 뭐라 일러야 할지 모르는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 세우는 소리였는지 몰랐다.(151p)

 

 

옆자리의 학생들이 몇십 분째 누군가를 맹렬히 헐뜯는지라 나는 그만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걔가? 그 교수랑? 어머, 어떻게 그래? 타인이 아닌 자신의 도덕성에 상처 입은 얼굴로 놀란 듯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도 잘 아는 즐거움이었다.(153p)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173p)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가을 풍경 속에 안긴 두 사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들 같아서였다.(182p)

 

 

일터에서건 집에서건 밥 짓는 건 말 그대로 노동이고 어느 땐 중노동이었다. 아주 단순한 요리라도 그 안에는 장보기와 저장하기, 씻기, 다듬기, 조리하기, 치우기, 버리기 등 모든 과정이 들어가야 했다. 수백 명의 밥을 차리고 집에 와선 녹초가 돼 정작 나 자신은 컵라면이나 빵으로 끼닐 때울 때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영양사는 매일 ‘만인의 반찬 투정’을 듣는 직업이었다. 급식 메뉴에 핫도그나 돈가스를 넣어 아이들 입맛에 맞추면 선생들이 꺼리고, 아욱국이나 취나물 등 교사들 식성에 맞추면 아이들이 싫어했다. 예산 문제로 반찬을 검소하게 꾸리면 누군가 내 도덕성을 의심하는 투로 불평해 마음을 다친 적도 있다.(198p)

 

 

가끔 엄마가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활달함이랄까 생명력이 실은 무례와 상스러움의 다른 얼굴이었나 싶어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내 사촌언니 두 명이 한 달 새 나란히 사고로 아이를 잃자, 엄마는 ‘어쩌다 이런 일이 동시에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며 ‘우리 집안 죄받았다 할까봐 부끄러워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낸다’고 했다. 그것도 상복 입은 사촌언니 앞에서. 엄마가 늙었나? 그새 분별력과 자제심을 잃었나? 얼굴이 달아올랐다.(202p)

 

 

드문드문 솟은 풍력발전기를 보자 ‘평화로운 해양성기후’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이 섬나라 하늘이 언젠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본 하늘, 전쟁에 지친 병사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며 회상한 풍경과 닮아서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앞의 ‘청명’이 남의 집에서 떼다 붙인 커튼처럼 느껴졌다. 눈앞에서 아름답게 펄럭이는 ‘현재’가 좋았던 과거 같고,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한데, 뭐가 됐든 내 것 같진 않았다.(227p)

 

 

ㅡ 김애란, <바깥은 여름>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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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10

 


책을 읽는 중에 크게 감탄한 순간은 없었다. 물 흐르듯이 읽었다. 내 집중력으로 소음 가득한 서점에서 다 읽었으니 크게 집중력을 요하는 소설집은 아니었다. 이 말은 문장이 유려하다는 말일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큰 특색이 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번역서가 아닌 모국어로 된 글을 읽을 때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만 꼽아보자면 밤낮으로 말과 언어를 조탁하여 작품을 내놓는 직업 작가들의 문장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 즐거움은 친숙하다고 생각했던 어휘를 낯선 상황에서 생경하게 사용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으로,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어휘를 찾아내어 적확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느낄 수 있다. 아쉽게도 이 소설집에서는 그런 즐거움을 느낀 순간이 (거의) 없었다. 문장의 밀도도 아쉬웠다. 밀도 있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좋은 소설이고, 여백이 많은 소설은 나쁜 소설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좀 아쉽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아쉬운지 얘기를 해야 될 텐데 그러면 글이 길어지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그만 적기로 한다.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뻔했다.





아빠와 다니던 식당들에 비하면 남자와 가게 되는 곳은 늘 수준 미달이었어요. 물론 그럴 수밖에요. 중산층 집안의 대학생 남자가 용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어떤 곳이겠어요? 들큰한 조미료맛 말고는 아무 맛도 없는 음식들. 가짜 모차렐라 치즈를 얹은 피자 같은 것을 먹는 거죠. 한번은 테마파크에 놀러갔는데 유치하기만 할 뿐, 아무 감흥이 없었어요. 너구리 복장을 한 알바생들이 재롱을 떠는 유럽풍 거리에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핥아먹는 것은 열 살 이전에 해야 할 일 같았어요. 아빠 때문에 내가 너무 겉늙어버린 걸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재미가 없는 건 어쩔 수가 없었어요.(23p)

 

 

어쩌면 그 말은 저에게라기보다 엄마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을 거예요. 그래요.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어떤 말을 남에게 하고 살지요.(38p)

 

 

다들 충고들을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예요.(39p)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에 짓눌린 인간의 냄새를 용케도 잘 맡았다. 아이를 잃은 어미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사람들은 밝고 명랑하고 활기찬 사람과 함께일 때 미구에 다가올 위험에도 더 잘 대비할 수 있을 것처럼 느꼈고, 계약서에도 더 흔쾌히 사인했다.(54p)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힘든 순간을 겪을 때마다 서진은 돌아가고 싶었다. 인생의 원점, 자신이 떠나온 곳, 사람들이 흔히 고향이라 말하는 어떤 장소로. 그가 누구인지 모두가 아는 곳으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지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떠돌이의 인생을 살았다. 어려서는 부모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고, 커서도 한곳에 오해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사람에게도 비슷해 묵은 관계라고는 없었다. 오래전에 본 어떤 영화에서 인생이 망가진 주인공이 “나 돌아갈래!”라고 외칠 때, 서진은 그에게 동정심이 생기기는커녕 가벼운 질투가 일었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그것은 그가 영원히 갖지 못할 값진 성취처럼 보였다. 그런 성취가 누군가에겐 기본으로 주어지고, 자신 같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니 참으로 불공평하지 않은가.(87p)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큰 차이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이 그래. 지금은 날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말야. 물론 그 마음이 진심이란 것 알아. 하지만 진심이라고 해서 그게 꼭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법은 없어.(92p)

 

 

제가 잘못했다고 말해야 되는 상황입니까?(93p)

 

 

“잠깐 그런데 그 여자, 뭐하는 사람이라고 했지?”

“너한테 얘기해준 적 없는 것 같은데.”

유도신문은 나의 장기이지만 단련된 사람에게는 잘 안 먹힌다.(125p)

 

 

“내가 이렇게 병상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느끼는 게 뭔지 알아?”

“무슨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것 같은 개소리 할 거면 집어치워. 죽을 때 죽더라도 약은 팔지 말자.”

“살아오는 동안 내 영혼을 노렸던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는 거야.”(199p)

 

 

“사장님께 정말 부탁드리고 싶었던 게 그거예요. 제가 존경하는 사장님이 제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세요.”

“나는 불굔데?”(209p)

 

 

“근데 너무 찌질하지 않아? 바로잡긴 뭘 바로잡아. 어떤 과거는 그냥 흘려보내야 되는 거야.”

“사람들은 죽을 날이 다가오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뭐 그럴 줄 아나본데, 천만의 말씀. 새록새록 떠오르는 일들은 전부 이런 일들이야. 괜히 남한테 좋은 사람 노릇하기 시작한 기원이 언제인가 따져보니 바로 그때부터야. 병도 옮고 나쁜 남자까지 돼주었잖아?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딨어?”(216p)

 

 

그냥 감당해. 오욕이든 추문이든. 일단 그 덫에 걸리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인생이라는 법정에선 모두가 유죄야.(230p)

 

 

“태준씨네 냥이들이 속죄 같은 걸 하겠어? 한다 해도 어느 주인이 그런 걸 원하겠어. 우리를 가둔 신, 혹시 그런 존재가 있더라도 속죄 따위 원하지 않을거야.”

“왜요?”

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전적으로 물었다.

“우리를 사랑하고 예뻐한다면 죄 같은 거 알고 싶지 않을 거야. 그게 아니라 그냥 고통받는 걸 보고 즐길 심산이라면 회개하고 반성해봐야 뭔 소용? 끝없이 시련이나 내리고 어떻게 하나 구경하겠지.”

“언니, 속죄는 우릴 가둔 놈들 보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하늘에 계신 진짜 신, 나의 주님께 하는 거라고요.”

“나도 그 얘기거든. 자기가 창조한 인간에게 벌이나 내리는 신, 난 필요 없어.”

수진도 지지 않았다.

“인간은 결코 신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신인 거죠. 인간의 지혜로 신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 자체가 죄란 말이에요.”

강재가 끼어들었다.

“정은씨는 좀 무임승차 아니에요? 그래도 수진씨는 뭐라도 하잖아요? 여길 나가기 위해서요.”

할말이 많았지만 정은은 입을 다물었다. 아, 수진은 속죄를 믿고, 강재는 자기 덩치를 믿고, 태준은 인과관계라도 믿는데, 나만 아무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무임승차자가 된 것이로구나. 나도 믿는 것이 있어, 지리산 도령 강재씨. 나는 우울을 믿어. 인간은 천둥이 치고 비가 퍼붓는 궂은 날씨에는 울적하도록 진화했어. 가만히 동굴에 틀어박혀서 날씨가 좋아지길 기다리는 게 유리하거든. 에너지를 아끼면서 말이야. 인류가 이렇게 진보한 건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끝없이 자신의 과오에 집착해온, 사실 나 같은 우울증 환자들 덕분이야. 그들은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아. 스스로를 과신하지도 않고. 그래서 살아남은 거야. 알잖아.

(...)

인류의 역사는 신의 뜻을 알고 있다고 확신한 이들이 저지른 악행으로 가득차 있다. 구약의 여호수아가 그랬고, 중세의 십자군이 그랬고, 가깝게는 알카에다와 ISIS가 그랬다.(246-248p)

 

 

“정은씨, 난 언제나 현재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여기만 지나가자. 그럼 나아질 거야. 그런데 늘 더 나빠졌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나이가 어릴수록 더 행복했어요. 그럼 지금 이 순간도 최악이 아닐 수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이 그래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에서는 가장 젊고, 제일 괜찮은 순간일 수 있다는 건데······ 우리 모두 여기서 늙어가다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처음 들어왔던 때가 그래도 좋았어. 그땐 젊었고, 희망도 있었다.”

정은은 눈을 떴다.

“고등학교 때 담임이 만날, 우리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원했던 내일이다, 같은 헛소리를 칠판에 적어놓곤 했어요. 그 시절 노트에 보니까 내가 이렇게 적어놨더라구요. 그토록 원했던 내일도 막상 오면 헛되이 보낸 어제보다 나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너무 비관적인가요?”(257p)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이를 잃어버림으로써 지옥에서 살게 됩니다. 아이를 되찾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지옥은 그 아이를 되찾는 순간부터라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269p)

 

 

 

ㅡ 김영하, <오직 두 사람>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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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3

 


무릇 현실이란 범상한 자들의 상상력을 아득히 웃도는 법이다.

 

이렇게 신의 은총과 구원 등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들먹이는 걸 보고 있자니 신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억울해서 잠이나 잘 수 있을까. 장클로드 로망을 보며 영화 밀양의 납치범이 생각났다. 아이의 엄마는 신앙생활을 통해 겨우 분노와 절망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마침내 납치범을 용서하려고 그를 찾아간다. 그런데 납치범은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용서해주셨다.’는 주장을 한다. 대관절 누가 누구를 용서를 했단 말인가. 아이의 엄마가 고통 받는 마음을 가까스로 추슬러 납치범을 용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까지의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납치범은 ‘나는 신에게 용서 받았습니다. 앞으로는 살아가는 죄를 받기로 했습니다.’ 등등의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마음을 평안을 얻었다면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까. 이 책의 살인자도 딱 그 짝이다. 

 

<마리프랑스, 저는 살아가는 죄를 받기로 했어요. 플로랑스의 가족과 내 친구들을 위해 이 고통을 떠맡기로 작정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졌어요·····.(195p)

 

한편으로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이런 식의 왜곡되고도 모순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이해하기 힘든 대단히 특이한 생각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전형성을 띤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이런 자들의 주변에는 거의 항상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얼마나 전형적인지.

 

 

 

 

한편으론, 절대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그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었다. 로망 가문은 약속을 잘 지키며 황금처럼 정직해야 하니까.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론,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설령 그것이 진실일지라도 절대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했다. 괴로움을 일으켜서도, 성공이나 장점을 떠벌려서도 안 되었다.(48p)

 

 

이렇게 말하고 나니, 비극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모두들 장클로드를 그런 아내의 완벽한 남편으로 생각했다는 점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재판 과정에서 재판장은 장클로드가 사들인 포르노 비디오에 대해 놀라워하며 그걸로 뭘 했냐고 순진하게 물었다. 피고는 비디오를 봤다고, 때로는 아내와 함께 봤다고 대답했고, 재판장은 그런 말은 고인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다그쳤다. 포르노 비디오를 보고 있는 플로랑스를 상상이나 할 수 있냐고 재판장은 소리쳤고,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예, 무슨 말인지 잘 압니다. 하지만 제가 그랬을 거라고도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습니다.」(58-59p)

 

 

아이들은 언제나 모든 걸 알고 있고,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감춰서는 안 된다고들 말한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 말을 믿고 있다. 나는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본다. 이젠 그런 말들에 자신이 없다.(86p)

 

 

예심이 진행되는 동안 판사는 악의나 의심을 품지 않았더라도 왜 누구 한 사람 그런 전화를 좀 더 일찍 해보지 않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놀라워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단단히 벽을 치고 산다 해도> 아내나 친구들이 회사로 전화 한 번 걸어 오는 일 없이 10년 동안이나 직장 생활을 해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건 어떤 미스터리와 숨겨진 설명이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정작 미스터리는 거기에 아무런 설명도 없다는 것이고, 정말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일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89-90p)

 

 

장클로드도 그 영화를 플로랑스와 함께 텔레비전으로 봤다고 했다. 플로랑스는 별다른 마음의 동요 없이 그저 영화가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야기는 좋게 끝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한 번도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지도, 그러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아내에게도, 친한 친구에게도, 벤치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도, 창녀에게도, 신부나 심리 치료사처럼 남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 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착한 영혼들에게도, 자살 방지를 도와주는 긴급 상담소의 익명의 귀에게도·····. 15년간 이중생활을 하면서 어떤 만남도 갖지 않았고,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으며, 도박이나 마약 혹은 밤의 세계 같은, 그가 조금은 덜 외롭게 느꼈을 그 어떤 동류 집단에도 섞여 들지 않았다. 또한 결코 한 번도 바깥에 나가 의사인 척하면서 누굴 속이려 들지도 않았다. 집안에 들어설 때면, 모두들 그가 다른 무대에서 다른 역할을 하다 돌아온 거라고 생각했다. 세계를 돌아다니고 장관들을 만나고 공식 만찬에 참석하는 그 중요한 일들은 그가 밖으로 나서면 다시 맡아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에게 다른 무대란 없었고, 다른 역할을 보여 줘야 할 다른 관중도 없었다. 밖으로 나서면 그는 완전히 헐벗은 상태였다. 부재 상태로, 빈 곳으로, 공백 상태로 되돌아가던 그의 상황은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매일같이 겪는 유일한 삶의 현장이었다. 그는 분기점 이전에도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96-97p)

 

그녀가 레미와 결별하고 두 딸을 데리고 파리에 정착했을 때, 모임의 친구들은 버려진 남편 편을 들었다. 로망의 아내인 플로랑스만은 레미 역시 그의 아내 못지않게 실컷 바람을 피웠을 거라는 것, 만일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건 그들 부부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플로랑스 자신은 그로 인해 개인적인 괴로움을 겪은 일이 전혀 없으므로 부부 중 어느 누구도 단죄하고 싶지 않으며 두 사람 모두에게 우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110p)

 

 

이런 가족생활은 포근하고 따스했을 것이다. 그들 모두 포근하고 따스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안으로부터 썩었으며, 한순간도, 단 하나의 제스처도, 설핏 든 잠조차 부패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패는 그의 안에서 자라났고 안에서부터 차츰차츰 모든 걸 삼켜 버려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그리고 이제는 오로지 그 부패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와 모든 게 백일하에 드러나는 일만이 남았다.(148p)

 

 

그날부터 그는 자신의 고통을 가족들의 기억에 바치기 위해 <살아가는 죄를 받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의사들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굉장히 알고 싶어 했고 성찬을 준비하는 긴 단식이 곁들여진 기도와 명상의 기간에 들어섰다고 한다. 25킬로그램이나 살이 빠진 그는 자신이 거짓 외양들의 미로를 빠져나왔으며, 고통스럽지만 <진실한> 세계에 살게 되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그리스도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했다. 그는 <난 한 번도 이렇게 자유로운 적이 없었고, 삶이 이렇게 아름다운 적이 없었다. 나는 살인자고, 사회 안에 존재하는 가장 비천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의 거짓된 삶보다는 이게 더 견디기 쉽다>고 말했다. 한동안 더듬거린 후에 그는 프로그램 변경에 성공한 듯이 보였다. 존경받던 연구자라는 인물이, 그보다 덜 만족스러울 것도 없는, 신비한 구원의 길에 서 있는 중범죄자라는 인물로 대체되었다.(179-180p)

 

 

<마리프랑스, 저는 살아가는 죄를 받기로 했어요. 플로랑스의 가족과 내 친구들을 위해 이 고통을 떠맡기로 작정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졌어요·····.(195p)

 

 

다섯 시간의 심의 끝에, 장클로드 로망은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고 22년 동안은 가석방의 기회가 없다는 단서가 붙었다. 모든 게 순조롭다면 그는 2015년에 예순한 살의 나이로 감옥을 나올 것이다.(200p)

 

 

그들처럼 무조건적으로 장클로드에게 동의하고 있노라고 믿게 하여 그들의 신뢰를 남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게 그는 장클로드가 아니었다. 내가 보낸 편지들에서 처음에는 그를 <로망 씨>라고 했고, 그다음에는 <친애하는 로망 씨>, 그리고 그 후에 <친애하는 장클로드 로망>이라고 했다. 하지만 <친애하는 장클로드>까지는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마리프랑스와 베르나르가 로망의 겨울 의복에 대해 활기를 띠며 이야기하는 걸 들으며 나는 그토록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애정이 감탄스러우면서 동시에 거의 기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을뿐더러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시험 전날 자살한 연인의 이야기 같은 뻔한 허구를 군말 없이 삼켜 버리거나, 베르나르처럼 이 불행한 운명의 밑바닥에 신의 계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길을 밟아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주변에 베풀고 있는 그토록 많은 선행을 위해서 그 온갖 거짓과 우연과 끔찍한 드라마가 필요했다는 생각을 하면·····. 그거야말로 제가 언제나 믿어 왔던 것이고, 그게 지금 장클로드의 인생에서 이루어지고 있잖아요. 모든 일은 잘 돌아가고 있고 그 의미란 게 결국은 신을 사랑하는 자를 위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리지외의 성녀가 되기 전의 어린 테레즈 마르탱이 황홀경에 젖어 들려주던 위대한 범죄자 프란지니 이야기, 두 여자와 어린 소녀를 죽인 그 살인범을 용서하고 신에게 기도하자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1887년의 사람들 역시 할 말을 잃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내 눈에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베르나르의 입장이란 게 단지 헌신적인 기독교 신자의 입장이라는 걸 충분히 이해했다. 나는 마리프랑스와 그가 내 작업을 기웃거리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아흔아홉 명의 정의로운 사람들보다 스스로를 뉘우치는 한 사람의 죄인을 위해 신의 가호를 기도하며 즐거워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다른 한편, 카트린 에렐은 로망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로망은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주님이 자신의 영혼에 행하는 경이를 읊조리는 천사 같은 말들에 흔들려 다닐 것이고, 그러다 보면 현실과 직면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잃어버릴 거라는 거였다. 로망과 같은 경우에는 차라리 그러는 편이 낫다고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트린은, 예외 없이 모든 경우에서, 고통스러운 명징성이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환상보다 낫다는 생각이었다.(211-212p)

 

 

 

ㅡ 엠마뉘엘 카레르, <적>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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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6/29

 

총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마르틴 베크’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두 번째 작품도 읽을 의향이 있다. 대화가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다. 문장이 간결하고도 단정하다.

 

셜록 홈즈로 대표되는 천재적인 탐정 개인의 기지와 재치로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 아니다. 평범하나(솔직히 얘기하면 평범하다고 볼 수는 없다. 자신의 직업군내에서 일급의 능력을 발휘하는 충분히 유능한 사람들이며, 그런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지.) 직업윤리가 있는 경찰이 힘을 합해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때 영화나 드라마처럼 금방 해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도 2017년이 아닌 1960년대라면 말해야 뭘 할까. 시스템을 신뢰하는 자에게, 현실적이되 매력적인 인물들이 모여 번뜩이지만 근거가 부실한 직관을 통해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이 아닌 물적 증거를 하나씩 쌓아가며 수사망을 좁히고 범인을 추적하는 지난한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충분한 즐거움이리라.

 

 

 

딸이 태어나고 일 년이 지나자 그가 사랑에 빠졌던 밝고 발랄한 아가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결혼 생활은 지루하다고 해야 할 일상으로 안착했다.(38p)

 

 

아침 일찍 일어났지만, 보람이 없었다. 지금은 작은 책상에 앉아서 수첩을 뒤적이는 중이었다. 정말로 집에 전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몇 번인가 전화기로 손을 뻗었지만, 매번 생각에 그쳤다.

다른 많은 일이 그렇듯이.(52p)

 

 

함마르는 함께 일하기에 좋은 사람이었다. 늘 침착하고 아주 조금 굼떴다. 두 사람은 사이가 괜찮았다.(79p)

 

 

‘경찰관에게 필요한 세 가지 중요한 덕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는 속다짐을 했다. ‘나는 끈질기고, 논리적이고, 완벽하게 냉정하다. 평정을 잃지 않으며, 어떤 사건에서든 전문가답게 행동한다. 역겹다, 끔찍하다, 야만적이다, 이런 단어들은 신문기사에나 쓰일 뿐 내 머릿속에는 없다. 살인범도 인간이다. 남들보다 좀더 불운하고 좀더 부적응적인 인간일 뿐이다.’(88p)

 

 

오랫동안 개처럼 일하고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니 대수롭지 않은 실마리 하나라도 과대평가하게 되는 것 같군요.(98p)

 

 

대체 뭘 했겠습니까? 땅콩이라도 까면서 놀았겠습니까? 그래요, 미안하지만 이건·····.(150-151p)

 

 

그렇게 많은 정보 제공자가 그렇게 널리 퍼져 있으니 반드시 살인범이 덫에 걸려야 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논리적인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마르틴 베크는 강간 살인 사건에 얽힌 아픈 기억이 하나 있었다. 범행은 스톡홀름 교외의 어느 지하실에서 벌어졌다. 피해자는 즉시 발견되었고 경찰은 한 시간도 안 되어 현장에 도착했다. 살인자를 목격한 사람들이 여러 명이었고 그들이 범인의 인상착의 상세하게 묘사했다. 범인은 발자국, 담배꽁초, 성냥,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물건을 남겼다. 게다가 그가 피해자를 유린한 수법은 몹시 변태적이면서도 특징적이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했다. 애초의 낙관은 스스로의 무능에 서서히 좌절로 변했다. 단서가 그렇게나 많았지만 별무소용이었다. 그로부터 칠 년 뒤, 문제의 남자는 또 강간을 시도하다 체포되었다. 취조중 남자는 갑자기 무너져내려 과거의 살인까지 자백했다. 칠 년 만에 해결된 그 범죄가 마르틴 베크에게는 하나의 작은 일화일 뿐이었지만, 사건을 담당했던 선배 경찰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선배 경찰이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서 오백 번쯤, 아니, 천 번쯤 거듭 자료를 훑어보고 증언을 확인했던 것을, 그 일을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일 년이고 이 년이고 계속했던 것을 마르틴 베크는 똑똑히 기억했다. 종종 뜻밖의 장소나 의외의 상황에서 선배와 마주친 적도 있었는데, 그때 선배는 비번이거나 휴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인생 최고의 비극이 된 사건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찾는 중이었다. 선배는 세월과 함께 쇠약해져서 일찌감치 연금을 받는 몸이 되었지만 여전히 수색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사건이 해결된 것이었다. 전과도 없고 용의자 선상에 오른 적도 없었던 웬 인물이 할란드의 어느 경찰관 앞에서 느닷없이 눈물을 터뜨리며 칠 년 넘게 묵은 교살 범행을 털어놓았다. 너무나 늦게 찾아온 결말이 과연 늙은 형사에게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안겼을까? 마르틴 베크는 가끔 그게 궁금했다.(229-231p)

 

 

ㅡ 마이 셰발, 페르 발뢰, <로재나> 中,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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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6/28


발췌독. 잘 쓴 책이다. 제목이 비슷해서 같이 빌렸던 하지현의 '정신 의학의 탄생'과 대단히 비교됨.

 

 

18세기 말 이전까지 정신과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의사들이 정신병자를 돌봐 왔고 관리법을 적은 지침서 등이 전해 오기는 했지만,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의사들이 집단으로 내세울 전문분야로서의 정신의학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외과를 제외하고는 어떤 전문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의료가 세분화되어 전문분야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야 나타난 현상이다.

정신병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정신병은 부분적으로는 생물학적이고 또 유전적이기도 하다. 모든 정신질환이 다 신경계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병은 분명 뇌의 화학적 이상에 의해 생긴다. 그리고 어느 사회에서든 정신질환에 대응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13-14p)

 

 

생물정신의학이 의사의 용어였다면, 신경성nerves이라는 용어는 환자를 위한 것이었다. 19세기 초, 수용소로 환자를 데려오는 가족들은 환자가 미쳤기 때문이 아니고, 신경성 질환 때문이라고 말했다. 20세기 초부터 개인 의원에서 정신과 환자를 볼 수 있게 해주었던 발판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신경성 질환이라는 개념이었다. 신경이라는 단어는 정신의학역사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역설적이게도 신경과neurology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정신의학의 사회적 역사를 시작해야겠다. 신경성 질환이라는 말은 신체 중 “신경”에 속하는 부분의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이어서, 광기라는 말보다 환자들에게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다. 1940년대 정신분석이 대세를 잡기 전까지는, 의사들 또한 정신병이든 신경증이든 모두 다 본질상 “신경에 의한 것”이라는 이 허구에 기꺼이 동참했다. 왜 정신과 의사들이 수치심 가리개 역할을 하는 이 허구적 개념에 적극 동참하려 했는지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고, 정신의학 발달을 이끌어온 근본 동력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정신과 의사 입장에서 본다면, 이 치부 가리개를 발판으로 하여 수용소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자기 개인 의원에서 중류층 환자를 상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환자 입장에서 보면, 광기 환자라는 불명예와 유전병과 퇴행자라는 치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핑계가 되었다. 정신질환과 달리, 신경질환은 대부분 유전과 상관없는 것으로 알려져 오명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경성 질환이라는 단어는 의사와 환자가 완벽하게 공모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정신병 환자를 보던 의사들(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정신과 의사라고 불리게 된 유형의 의사들)은 도시의 신경-전문의사, 전기치료사, 신경정신과 의사 등등으로 불리게 되면서 이들의 사회적 지위와 수입은 껑충 뛰어오르게 된다. 그리고 환자들은 그들의 질병이 “진짜 기질성”인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병이 유전이나 퇴행의 과정을 밟는 것, 혹은 “전부 다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크게 안도하게 되었던 것이다.(193-194p)

 

 

정신의학 역사에 관한 여태까지의 책들은 정신분석이 나타나기 이전의 모든 사건이 정신분석이라는 한 꼭짓점을 향해 수렴되어 왔다고 보고, 정신분석을 이야기의 끝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1939년 프로이트가 사망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돌아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이는데, 그것은 정신분석이 정신의학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라 실은 흐름이 멈춰져 있던 시간이며, 연속성의 단절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중산층 사람들은 자신의 심리적 문제가 오래전의 사건과 연관된 무의식적 갈등, 특히 성적 갈등에서 생긴다는 이론에 열광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수세기 동안 정신과 의사들은 이 질병이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를 정신의학의 소유라고 생각했는데, 그러했던 특별한 이유는, 정신분석이 정신의학의 존재 공간을 수용소에서 개인 진료소로 이동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 이론이 생존했던 시간은 아주 짧은 시기에 불과하다. 긴 카우치에 환자가 누워 있고 그 뒤에 침묵하는 분석가가 앉아 있던 장면이 정신의학의 무대 중앙을 차지했던 시간은 긴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아주 잠시였을 뿐이다. 이 장면을 비추던 스포트라이트는 1970년대 정신의학계의 과학이 발달하면서 꺼져 버리고 정신분석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되돌아보면, 프로이트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을 절정에 이르게 했던 것이 아니라, 생물정신의학의 진화 과정을 잠시 늦추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잠시의 멈춤이 정신의학에 일으킨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가장 큰 의의는 정신과 의사를 수용소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프로이트 관점에 근거한 성찰심리학은 정신과 의사로 하여금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진료소에서 환자를 보는 전문의사로서의 위상을 확립케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신경과 의사가 가져갔던 정신치료를 되찾아 오게 했던 것이다. 더욱이 정신과 의사들은 이 새 치료법에 독점권을 행사하겠다는 대망을 품게 되었다. 대중은 정신치료와 정신분석이 대동소이한 것으로 간주했다. 최신식 유행하는 성찰치료를 받고 싶은 환자들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다. 왜냐하면 미국 정신분석 협회가 주장하기를, 오직 의사만이 분석 훈련을 받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도록 실력행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런 주장은 매우 기이한 것이었는데,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해서 의사로서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점성술가가 되려면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프로이트 기법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려 했던 이유는 심리학자, 정신과 사회사업가 그리고 새로운 부의 샘을 발견하고 덤벼드는 경쟁자들을 배제시키기 위한 이기적 발상이었다.

결국 정신분석을 지향하던 정신과 의사들은 더 이상 독점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영문학 교수가 정신과 의사보다 정신분석을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1960년대 이후에는 의사 아닌 온갖 분야의 사람들이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겠다고 했다. 더욱 궁지로 몰리게 된 이유는, 정신분석의 과학적 근거라고 내세웠던 이론들이 붕괴했다는 데에 있다. 정신적 문제가 비정상적인 모유수유에 의해 생긴다는 주장과 뇌의 세로토닌 결핍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은 동시에 진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신질환에 관한 생물학적 근거가 축적되어 감에 따라, 정신의학은 사람들이 정신분석에 열광하는 동안 잃어버렸던 과학으로서의 기반을 되찾기 시작했다. 뇌야말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부분이었다. 1990년대에 이르자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분석이 과학적으로는 파산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관한 이론모델과 소위 무의식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정교하게 고안된 분석기법은 시간의 제련을 견뎌 내지 못했다. 정신분석과 관련된 모든 사건은 특정 시대의 인공적 산물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학 이외의 분야에서는 정신분석이 계속 번창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신의학 분야에서 정신분석은 거의 사라지고, 마음과 뇌의 문제를 해결하는 의학적 방법으로서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고 있다. 정신분석이 생존하지 못했던 이유는, 과학에 패배했다는 것과 또한 초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열광케 했던 그 욕구가 우리 시대에는 사그라져 가고 있다는 데 있다.(245-247p)

 

 

1990년 브라운 대학 정신과 교수 피터 크레이머는 “미용 정신약물학”이라는 달콤한 신조어를 만들어 내고는 그 단어를 엘리 릴리 사가 개발한 프로작(플루옥세틴)이라는 새로운 항우울제에 적용했다. 크레이머는 환자로 하여금 “안녕한 상태보다 훨씬 더 좋게better than well 느끼도록 해주는 약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은 약물중독을 부추긴 것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러나 프로작과 그 외 유사한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우울감이나 불안감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NCS 조사에 의하면, 지난 12개월 동안 모든 미국인의 10.3%가 적어도 한 번은 주요우울증을 앓았고, 일생주기로 보았을 때 전 미국인의 19%(5명에 1명꼴)가 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의 기분장애를 경험했다고 했다. 또한 전 미국인의 20%가 폐쇄공포증, 광장공포증 등의 공포증을 지난 12개월 동안 경험했다고 하며, 20명 중 1명꼴로 전반적인 불안을 느낀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런 증상들이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생활을 꾸려갈 수 없는 상태는 이제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마땅히 도움을 받아야 할 상태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인간 정신의 복잡성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옛날 스타일의 정신과 의사들보다는 정신치료 전문 정신과 의사들에게 환자들이 더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진료실에서는 공감 어린 관계를 조성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것이 더욱 궁극적인 치료 목적일 것이다. 뇌에 원인이 있는 문제는 뇌의 화학 수용체에 작용하는 약에서 그 치료법을 찾을 수 있었다. 이는 정신의학에는 좋은 소식이었다. 항정신증 약물은 정신분열증에, 삼환계 항우울제는 우울증에, 그리고 항조증 약물은 조증에 각각 특이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과 대조적으로, 새로 나온 멋진 약들은 불안과 우울 등의 온갖 다양한 증상들을 한 가지 약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새로운 약이 야기한 문제점은, 이러한 약물이 20세기 말에 이르러 너무나 유행하게 되자, 환자들이 보기에 의사는 의사-환자 관계를 치료적으로 사용하여 상담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신기한 약을 전달해 주는 사람으로만 간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미용 정신약물이 소개되면서 의료계는 커다란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가게 된다. 과거에 의사는 종기 따는 사람이나 관장 목적으로 강력한 설사제 처방전을 써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았고 환자들은 때로 성급하게 화를 내기도 했을 것이다. 근대 후기에 와서도 환자들은 의사의 진찰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에 화를 냈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의사와의 상담은 오직 환자 자신이 이미 선택 해 놓은 약을 처방받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오직 약 뿐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원과 같은 1차 의료기관에 있는 의사들은 이미 이러한 약물 요구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512-513p)

 

 

정신과 약의 판매에서 큰 이윤이 나온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된다. 바리움의 인기가 치솟아 오를 때 제약회사들은 미래의 시장이 바로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눈을 뜬 것이다. 제약회사마다 경쟁적으로 향정신성 약물 개발에 뛰어들게 되자 이들은 정신과 의사의 진단 감각을 왜곡시키기에 이르렀다. 파고들 만한 틈새시장을 만들어 내기 위해 제약 회사들은 질병 범주를 부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상태를 질병이라고 명명했다 하더라도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질병이, 제약회사가 치료약을 개발해 내놓게 되면 가히 유행성 전염병처럼 곧바로 대중성을 획득하게 된다. 정신약물학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힐리는 “의학 분야에서는 여태까지 흔히 보아 왔듯이, 치료방법이 개발되면 그 질병의 존재를 알아채기 쉬워진다”고 말했다.

공황장애의 예를 들어 보자. 전통적으로 정신의학에서는 공황증상을 불안의 일부 증상으로 보았다. (...) 1980년대 회사는 코넬 대학의 제럴드 클러먼의 지휘하에 이루어진 광범위한 임상시험을 통해 공황장애가 진정 독립적인 질병이며 자낙스가 그 병에 특별히 경이로운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 결과는 전적으로 확신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초 자낙스는 정신의학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약이 되었으며, 정신과 의사들은 자낙스 처방은 과학에 근거한 것이고, 당시 전국을 휩쓸고 있는 공황장애 유행에 시달리는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정신의학 진단이 점차로 제약회사들에 의해 조작되어 온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1990년대에는 일상용어에도 약이 등장하게 된다. 프로작이 바로 그것이다. 바리움이 등장했을 때, 불안을 치료할 효과적인 약이 존재하게 되자 환자와 의사 모두는 온갖 문제를 불안이라는 용어로 정의하는 데에 기꺼이 동참했다. 우울증을 치료할 프로작이 등장하자 이제는 우울증이 주인공이 되었고 우울증은 모든 종류의 스트레스에 대한 검증표가 되었다. 맨해튼에 있는 베스 이스라엘 의료센터의 한 의사가 말하길, “전화벨이 울리면 매번 누군가가 프로작에 관해 얘기합니다.” “사람들은 그 약을 먹어 보고 싶어 하지요. 의사가 그건 우울증이 아니라고 말하면 그들은 ‘나는 분명히 우울합니다!’ 라고 대꾸한답니다.”(520-522p)

 

 

플루옥세틴은 다른 항우울제보다 월등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부작용이 적고 편안하다는 것에 더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 유쾌하게까지 만들어 주며, 삼환계 항우울제처럼 변비와 무거움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마치 “100미터 달리기 경주에 막 뛰어나갈 준비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약은 삼환계 항우울제처럼 복용한 지 여러 주가 지나야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복용 초기부터 작용하고 치료적 영역도 더 안전했다. 말하자면 치료 용량과 치사 용량 사이의 용량 차이가 커서 안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혈액검사로 약물농도를 측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1987년 미국 식약청은 프로작의 사용을 승인했다.

1990년 프로작 출시 3년 후 맥린 병원에 있던 2명의 연구자가 프로작은 우울증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공황장애에서부터 탈력발작에 이르게 다양한 효과가 있음을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렇게 여러 상태를 개선하는 데 프로작이 효과가 있으므로 이 상태들이 어떤 공통점을 가질 것이라고 추정하고, 그것은 정서와 관련된 일련의 장애(정서 스펙트럼 장애, ASD)에 속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이는 분명 우울증의 범위를 확대하려는 과학적 변명이었고, 우울증은 이제, 그 저자가 말했듯이, “인류에게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질병”중의 하나가 되었다. 저자 중 한 사람인 해리슨 포프가 말한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ASD라는 어귀는 흔히 인용되곤 한다. 프로작의 전망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진행되었다. 1993년 미국 정신과 의사를 찾는 사람의 절반가량이 정서장애였다. 바리움이 불안에 사로잡힌 국가를 달래주었듯이, 새로운 우울증 약은 그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온갖 질병을 생산해 낸 것이다.

언론의 묘기가 뒤를 이었다. 프로작은 심지어 아무런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인생의 고민거리를 견디는 데 만병통치약으로 세상에 소개되었던 것이다. 1993년 <타임>은 프로작이 “일시적 유행이 아닐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것은 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일 중독에 빠진 “수전”은 월경주기 때마다 짜증스러워지고 한번은 남편에게 결혼반지를 내동댕이치기도 했는데, 이런 사람의 고통을 완화 시켜 준다고 했다. 이제 그녀의 모난 성격은 조금 부드러워졌다. 진짜 정신질환이란 극심한 고통과 장애를 일으키므로 괴로워하는 그들을 위로할 방편도 없다고 보았던 역사적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수전과 같은 사람들이 과연 실제 정신질환을 가진 것인지 아닌지 논쟁하는 것은 이제는 쓸모없는 일이 된 것 같다.(526-527p)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말 “정신착란”이 덜 끔직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면, 그 변화에 기여한 것은 많은 부분 정신약물학의 영향이다. 사람들이 정신질환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용인하게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약물 혁명이 정신질환의 증상을 완화시키거나 혹은 완치시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정신질환자는 팔이 부러지거나 머리에 혹이 생긴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약물학 혁명을 이끌었던 피에르 데니커는 이렇게 말했다. “37년이 지난 후에야 광기의 얼굴은 완전히 달라졌는데, 이는 정신약물학은 물론 정신치료, 사회치료 등의 치료 방식과 지역사회에서의 환자 재활 등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데니커가 보기에 “광인 혹은 정신착란”은 “일상적인 환자”로 변화되었다. 약물치료가 “미용” 정신약물학이라고 보든 아니든 간에 이는 결코 작은 성과가 아니다.(530p)

 

 

정신의학이 주장하는 과학적 패러다임은 양날의 칼과 같다. 생물학적 패러다임을 고수한다면, 지금과 같이 엄청난 수의 사람이 원하는 기능개선 정신약물학을 포기하고 중증 정신질환자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반대로, 유행병이라 불릴 정도의 환자 몫을 유지하려 한다면, 정신의학은 대중의 욕구와 가치관에 영합함으로서 더욱 일용품화되고 결국은 탈의료화의 방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의학이 의학의 전문분야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인가?(545p)

 

 

 

ㅡ 에드워드 쇼터, <정신의학의 역사> 中,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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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6/27

 

완독. 뿌듯하다ㅋㅋ. 부분적으로 발췌해서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학부 때 배웠던 통계 관련 파트가 생각나기도 하고 오랜만에 자극이 되는 책이었다. 그렇다고 책 내용을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발드는 말했다. 갑옷을 총알구멍이 난 곳에 두르면 안 됩니다. 총알구멍이 없는 곳, 즉 엔진에 둘러야 합니다.

발드의 통찰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을 던진 데서 나왔다. 사라진 총알구멍들은 어디에 있을까? 만일 피해가 비행기 전체에 골고루 분포 된다면 분명히 엔진 덮개에도 총알구멍이 났을 텐데, 그것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발드는 답을 알 것 같았다. 사라진 총알구멍들은 사라진 비행기들에 있었다. 엔진에 덜 맞은 비행기들이 많이 돌아온 것은 엔진에 많이 맞은 비행기들이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체에 스위스 치즈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비행기들이 기지로 복귀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동체에 입은 타격은 견딜 만하다는(따라서 견뎌야 한다는) 꽤 강력한 증거였다. 병원 회복실을 가보면, 가슴에 총알구멍이 난 사람보다 다리에 구멍이 난 사람이 더 많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가슴에 총을 안 맞기 때문이 아니다. 가슴에 맞은 사람들은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어떤 나라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상대 나라보다 좀 더 용감해서, 좀 더 자유로워서, 혹은 신의 총애를 약간 더 받아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보통은 비행기가 5% 덜 격추되는 쪽, 연료를 5% 덜 쓰는 쪽, 혹은 보병들에게 95%의 비용으로 5% 더 많은 영양을 지급하는 쪽이 이긴다. 이런 이야기는 전쟁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실제 전쟁은 이런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한 단계 한 단계가 다름 아닌 수학이다.

발드는 공중전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그보다 훨씬 뛰어난 장성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볼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발드에게 수학으로 단련된 사고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학자는 늘 <어떤 가정을 품고 있는가? 그 가정은 정당한가?>라고 묻는다. 이런 질문은 성가실 수 있다. 하지만 무척 생산적일 수 있다. 이 사례에서 장성들은 기지로 복귀한 비행기들이 전체 비행기에서 무작위로 추출된 표본이라는 가정을 자신도 모르게 품고 있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남은 비행기의 총알구멍 분포만 조사해도 모든 비행기들의 총알구멍 분포에 대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그런 가설을 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금세 그것이 말짱 틀린 가설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16-19p)

 

 

물론 원은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발을 디딘 지표면에서 아주 좁은 구역만을 볼 때는 그것이 완벽하게 평평한 평면과 아주 비슷하듯이, 원주를 아주 작게 자른 조각은 완벽하게 곧은 직선과 아주 비슷하다.

국소적으로는 직선, 대역적으로는 곡선. 이것이 우리가 기억할 슬로건이다.(55p)

 

 

수학의 굉장한 즐거움 중 하나는 무언가를 옳은 방식으로, 바닥까지 철저히 이해했다고 느끼는 단호한 감정이다. 나는 수학을 제외하고는 정신 활동의 다른 어떤 영역에서도 그런 감정을 느껴 본적이 없다. 그리고 일단 당신이 무언가를 옳은 방식으로 할 줄 알게 되면, 이후에는 그것을 잘못된 방식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좀 더 완고한 사람이라면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70p)

 

 

나는 구구단 외우기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일부개혁주의자들에게 동조할 수 없다. 우리가 진지한 수학적 사고를 수행할 때는 가끔 6 곱하기 8을 계산해야 할 텐데, 그때마다 계산기를 찾아야 한다면 사고에 요구되는 정신의 속도를 낼 수 없다. 단어의 철자를 일일이 찾아 가면서 소네트를 쓸 순 없는 법이다.(79p)

 

 

수학에서는 꼭 지켜야 할 위생 법칙이 하나 있다. 어떤 수학 기법을 현장에 적용하여 시험할 때는 같은 계산을 다른 방식으로 여러 차례 반복하라는 것이다. 만일 그때마다 다른 답이 나온다면, 기법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89p)

 

 

작은 학교들이 상위 25등을 휩쓴 것은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시험 점수에서 더 큰 변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작은 학교에서는 천재가 몇 명 나타나거나 3학년 중 농땡이 치는 학생이 몇 명만 나타나도 학교 평균이 크게 흔들리는 데 비해, 큰 학교에서는 소수의 극단적인 점수들이 미치는 영향이 큰 평균에 녹아들기 때문에 전체 점수를 거의 움직이지 못한다.(97p)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당신은 볼티모어의 웬 주식 중개인으로부터 청하지도 않은 뉴스레터를 한 통 받는다. 그 안에는 어떤 주식이 대폭 상승할 거라는 팁이 적혀 있다. 일주일 뒤, 볼티모어 주식 중개인이 예측했던 대로 그 주식이 정말로 오른다. 당신은 다음 주에도 또 뉴스레터를 받는데, 이번에는 어떤 주식이 하락할 것 같다는 예상이 적혀 있다. 그 주식은 실제로 폭락한다. 이후 10주 동안 이처럼 매주 새로운 예측을 담은 정체불명의 뉴스레터가 당신에게 배달되고, 그 예측은 매번 현실로 드러난다.

마침내 11번째 주, 볼티모어 주식 중개인은 자신에게 투자하라고 당신에게 권유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는 지난 10주 연속 족집게 예측을 통해서 충분히 증명해 보인 자신의 예리한 시장 감각의 대가로 두둑한 수수료를 요구한다.

괜찮은 거래 같지 않은가? 볼티모어 주식 중개인은 뭔가 아는 게 틀림없다. 시장에 대한 전문 지식이 전혀 없는 멍텅구리가 연속 열 번이나 주가 변동을 정확히 예측한다는 건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 한마디로, 멍텅구리가 그렇게 잘 맞힐 확률은 거의 0이다. 하지만 우리가 볼티모어 주식 중개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다시 쓰면, 상황이 달라진다. 당신이 앞에서는 미처 못 봤던 사실이 있다. 첫 주에 주식 중개인의 뉴스레터를 받은 사람은 당신 혼자가 아니었다. 주식중개인은 10,240통의 뉴스레터를 보냈다. 하지만 내용이 다 같진 않았다. 뉴스레터의 절반은 당신이 받은 것처럼 어떤 주식이 오르리라고 예측한 내용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 반대로 예측한 내용이었다. 주식 중개인으로부터 무효한 예측을 받았던 수신자 5,120명은 두 번 다시 그로부터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당신, 그리고 당신과 같은 내용의 뉴스레터를 받았던 5,119명은 다음 주에도 팁을 받았다. 그 뉴스레터 5,120통 중 절반은 당신과 같은 내용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반대되는 내용이었다. 그 주가 지나도, 연속 두 번 정확한 예측을 받은 수신자의 수는 2,560명이나 된다.

이런 식으로 죽 이어진다.

그렇게 10주가 지나면, 그동안 주식 시장이 어떤 판세였든지 볼티모어 주식 중개인으로부터 열 번 연속 족집게 예측을 받은 행운의(?) 수신자가 열 명 남았을 것이다. 중개인은 예리한 눈으로 시장을 주시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닭 내장을 벽에 던져서 그 흔적을 보고 주식을 고르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그를 천재로 여기는 수신자가 반드시 열 명은 있다. 그가 두둑한 수수료를 거둘 수 있는 수신자가 열 명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열 명에게 과거의 성과는 결코 미래의 결과에 대한 보장이 되지 못할 것이다.(128-130p)

 

 

금융 회사는 뮤추얼 펀드를 출시할 때 대중에게 공개하기에 앞서 한동안 사내에서 운영해 보는데, 그 관행을 인큐베이션이라고 부른다. 인큐베이션을 겪는 펀드들의 삶은 이름과는 달리 아늑하고 안전한 것이 못 된다. 회사는 보통 한 번에 수많은 펀드들을 함께 인큐베이션하여 다양한 투자 전략과 포트폴리오 배분을 실험한다. 펀드들은 자궁 속에서 밀치락달치락 경쟁한다. 그중 괜찮은 수익률을 보이는 펀드는 이제까지 그 펀드의 실적이 얼마나 좋았는가 하는 상세한 기록과 함께 얼른 대중에게 공개되지만, 한배에서 가장 볼품없는 펀드들은 안락사 당한다. 보통은 그런 펀드가 존재했다는 기록을 공개적으로 남기지도 않을 채. (...) 눈이 뛰어나올 만한 수익률을 자랑하는 인큐베이션 펀드에 저금을 몽땅 투자한다면, 평생의 저축을 볼티모어 주식 중개인에게 투자하는 뉴스레터 수신자와 다를 바 없다. 당신은 인상적인 결과에 휘둘리는 것이지만, 중개인이 그 결과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시험했는지는 까맣게 모르고 있다.

이것은 내 여덟 살짜리 아들과 스크래블 단어 게임을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아들은 알파벳 무더기에서 뽑은 알파벳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도로 무더기에 집어넣고 다시 뽑는다. 하지만 충분히 많은 기회를 갖는다면 언젠가는 바라던 Z가 나오는 법이고, 그것은 당신이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속였기 때문이다.

볼티모어 주식 중개인의 사기가 통하는 것은, 훌륭한 마술 트릭이 무릇 그렇듯이, 당신을 대놓고 속이려 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수법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려고 들진 않는다. 참을 말하되, 당신이 그로부터 부정확한 결론을 끌어내도록 유도한다. 주식을 열 개 연속 제대로 고르거나, 마술사가 경주마 여섯 마리를 찍어서 매번 승자를 정확하게 맞히거나, 뮤추얼 펀드가 시장에서 10% 수익률을 낸다거나 하는 것은 실제로 확률이 낮은 사건이다. 다만 확률이 낮은 사건을 접했을 때 놀란 것이 당신의 실수다. 우주는 방대하기 때문에, 발생 확률이 낮은 사건에 놀랄 태세를 갖춘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그런 사건을 만나게 된다. 확률이 낮은 사건은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 구호를 다시 읊자면, 그저 확률이 낮은 사건은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131-133p)

 

 

<백만 분의 일 확률>의 사건은 그 빈도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고 조금도 더하지 않는 빈도로 반드시 벌어진다. 물론 그 사건이 우리에게 벌어진다면 우리가 엄청 놀라기야 하겠지만 말이다.(134p)

 

 

<새로운 증거에 따르면, 특정 종류의 경구 피임약들은 다른 종류들에 비해 혈전증 발생 가능성을 약 두 배 높인다.> 혈전증은 장난이 아니다. 혈전증은 피가 엉긴 혈전이 정맥혈의 흐름을 방해하는 현상이다. 혈전이 혈관에서 떨어져 나와 피를 타고 돌다가 폐로 들어가면 폐색전이 되는데, 그러면 죽을 수도 있다. (...) 사람들은 당연히 혼비백산했다. 한 가정의는 경구 피임약을 먹던 자신의 환자들 중 12%가 정부 발표를 듣자마자 피임약 복용을 중단했다고 말했다. (...) CSM의 경고 덕분에 혈전증으로 인한 사망을 모면한 여성들을 생각해 보라!

그런데 그런 여성이 정확히 몇 명이나 되었을까? 확실히 알 순 없다. 하지만 CSM의 경고 결정을 지지했던 한 과학자에 따르면, 혈전증 사망이 예방된 여성의 수는 총 <약 한 명>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삼세대 피임약이 부과한 위험은 피셔의 통계학적 의미에서는 유의성이 있었지만 공중 보건적 의미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야기를 전달한 방식도 혼란을 가중했다. CSM은 삼세대 피임약이 혈전증 발생률을 두 배로 높인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말하니까 상당히 심각해 보이지만, 애초에 혈전증은 아주아주 드물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일세대와 이세대 경구 피임약을 복용하는 가임기 여성들 중 혈전증 위험이 있는 사람은 7,000명 중 1명 꼴이다. 물론 삼세대 피임약은 그 위험을 두 배로, 7,000명 중 2명 꼴로 높이지만, 그래 봤자 아주 미미한 위험이다. 아주 작은 수는 두 배로 불려도 아주 작은 수라는 명백한 수학적 사실 때문이다. 무언가를 두 배로 불리는 것이 얼마나 좋고 나쁜가는 애초에 그 무엇이 얼마나 큰가에 달려 있다.(160-161p)

 

 

규모가 어느 정도 예상되는 현상을 감지해 내지 못하는 통계 연구를 가리켜 우리는 검정력이 낮다고 말한다. 이것은 쌍안경으로 행성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 위성이 있든 없든 같은 결과가 나올 테니, 구태여 해볼 필요도 없다. 망원경이 할 일을 쌍안경에게 시켜선 안 되는 것이다. 낮은 검정력의 문제는 영국의 피임약 소동과 동전의 이면 같은 관계이다. 피임약 시험처럼 검정력이 높은 연구는 자칫 실제로는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효과에 대해 걱정하게끔 만들 수 있는 데 비해, 검정력이 낮은 연구는 그저 기법이 너무 취약해서 보지 못하는 것뿐인 미세한 효과를 기각하게끔 만든다.(168-169p)

 

 

우리는 <발생 확률이 대단히 낮다>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는 뜻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다가 <사실상>이라는 단어마저 머릿속에서 점점 더 작게 말함으로써, 결국 거기에 신경 쓰지 않게 된다. 그러나 무언가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확률이 대단히 낮다는 것은 전혀 같지 않다. 비슷하지도 않다. 불가능한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지만, 확률이 낮은 일은 많이 벌어진다.(184p)

 

 

과학의 목표가 진실 발견에 있지 않다는 생각은 언뜻 황당하게 들리지만, 네이만-피어슨 철학은 사실 우리가 다른 영역들에서 사용하는 추론 기법과 그다지 멀지 않다. 가령, 형사 재판의 목적은 무엇일까? 피고가 고발당한 죄를 실제로 저질렀는지 알아내는 것이라고 답한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이 대답은 뻔히 틀렸다. 법정에는 증거 요건이란 게 있어서, 설령 배심원들이 피고의 결백이나 유죄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정보라도 부적절한 방식으로 얻은 증언이라면 배심원들에게 들려줄 수 없다. 법정의 목적은 진실이 아니라 정의다. 우리에게는 규칙이 있고, 규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우리가 피고는 <유죄>라고 말할 때, 그 정확한 말뜻은 그가 틀림없이 고발된 죄를 저질렀다는 게 아니라 그가 규칙에 따라 공명정대하게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규칙을 택하든 범죄자 중 일부는 풀어 주게 될 것이고 무고한 사람 중 일부는 감옥에 가두게 될 것이다. 만일 전자를 더 적게 저지르려고 애쓰면, 후자를 더 많이 저지르게 된다. 그러므로 이 기본적인 교환 관계를 어떻게 다루는 게 최선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반영하여 규칙을 설계하려고 애쓸 따름이다.(213p)

 

 

베이즈 추론의 사고방식에서, 당신이 증거를 본 뒤에 무언가를 얼마나 믿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증거가 제공하는 정보에만 달린 게 아니라 당신이 애초에 그 무언가를 얼마나 믿었느냐에도 달려 있다.

이것은 심란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과학은 객관적인 것 아니었던가? 당신은 자신의 믿음이 증거에만 의존한다고 말하고 싶지, 애초에 품었던 선입견에 의존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정하자. 누구도 실제로는 그런 식으로 신념을 형성하지 않는다. 만일 기존 약물을 살짝 변형시킨 신약이 특정 암의 성장을 늦춘다는 가설에 대해 실험에서 통계적 유의성이 있는 결과가 나온다면, 당신은 신약의 효능을 꽤 굳게 믿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환자들을 플라스틱 스톤헨지 모조품 속에 집어넣은 실험에서 같은 결과가, 당신은 고대 구조물이 지구의 진동 에너지를 인체에 집중시켜 종양을 기절시켰다는 이론을 툴툴대면서도 마지못해 받아들이겠는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신 나간 소리니까. 당신은 스톤헨지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두 이론에 대해 서로 다른 사전 확률을 품고 있었고, 그 결과가 수치적으로는 동일한 상황인데도 증거를 다르게 해석한다.

(...)

귀무가설 유의성 검정에만 의존하여 무언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대단히 비()베이즈주의적인 일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 경우 우리는 암 신약과 플라스틱 스톤헨지를 정확히 동등하게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피셔의 통계학적 관점에 한 방 먹이는 결과일까? 오히려 그 반대다. 피셔가 <시기와 상황을 불문하고 늘 고정된 유의성 수준으로 가설을 기각하는 과학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자는 자신의 증거와 개념에 비추어 개별 사례마다 마음을 정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바로 과학적 추론이 순전히 기계적으로만 수행될 수 없다고, 혹은 이론적으로나마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이었다. 우리가 사전에 품은 개념들과 믿음들에게도 늘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고 말이다.(239-240p)

 

 

친구는 사업가 기질이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많진 않았다. 사실은 게을렀다. 일단 80장을 팔아 초기 투자금을 회수하자, 친구는 종일 캠퍼스에서 티셔츠를 팔고 돌아다니는 일에 흥미를 잃었다. 티셔츠 상자는 친구의 침대 밑에 처박혔다.

일주일 뒤, 빨래하는 날이 왔다. 친구는 아까도 말했듯이 게을렀다. 빨래가 귀찮았다. 그런데 그때, 침대 밑에 깨끗하고 완전 새것이고 모자를 쓴 채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는 고양이가 그려진 티셔츠가 상자째 들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빨래하는 날 입을 옷은 해결되었다.

그뿐 아니었다. 그 상자는 빨래하는 날 다음 날 입을 옷도 해결해 주었다.

그다음 날도.

덕분에 상황이 얄궂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친구를 학교에서 제일 더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같은 티셔츠를 입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친구는 학교에서 제일 깨끗한 사람이었다. 매일 가게에서 막 나온,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티셔츠를 입었으니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추론에 관해 안기는 교훈은, 고려 대상이 되는 이론들의 범위를 전체적으로 세심하게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차방정식에 해가 하나 이상인 것처럼, 똑같은 관찰을 낳는 이론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지 모른다. 그것들을 모두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추론은 심하게 빗나갈 수 있다.(246-247p)

 

 

불가능한 것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아무리 가능성이 낮아 보여도 진실일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오랜 금언이지. , 그 진실이 애초에 자네가 떠올리지도 못했던 가설이 아닌 한에서.(251p)

 

 

우리는 무언가에 대한 불확실한 기분을 숫자로 표현하는 버릇이 있다. 가끔은 그게 합리적이다. 저녁 뉴스에 기상학자가 나와서 <내일 비가 올 확률은 20%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현재의 조건과 비슷한 조건을 지녔던 과거의 수많은 날들 중에서 20%는 다음 날 비가 왔다는 뜻이다. 하지만 <신이 우주를 창조했을 확률은 20%이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우주 다섯 개 중 하나는 신이 창조했고 나머지 네 개는 알아서 생겨났다는 뜻일까? 그럴 리는 없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얽힌 불확실성에 숫자를 부여하는 여러 기법들 중에서 내가 보기에 만족스러운 것은 사실 하나도 없다. 나는 숫자를 몹시 사랑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나는 신을 믿지 않아> 혹은 <나는 신을 믿어> 혹은 그도 아니면 <나는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데 그쳐야 한다고 본다. 나는 베이즈 추론도 몹시 사랑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비정량적인 방식으로 신앙에, 혹은 신앙의 기각에 도달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이 문제에서 수학은 침묵한다.(255p)

 

 

스티글러의 논증은 온갖 종류의 최적화 문제에서 요긴한 도구로 쓸 수 있다. 정부의 낭비를 예로 들어 보자. 우리는 어느 주 공무원이 시스템을 악용해서 막대한 연금을 타냈다거나, 어느 방위 산업 계약자가 말도 안 되게 부풀린 가격을 매기고도 빠져나갔다거나, 어느 시 기관이 기능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관성과 유력 후원자들 덕분에 혈세를 낭비하며 존속하고 있다거나, 이런 류의 기사를 한 달에 한 번은 꼭 읽는다. 2013624일에 월스트리트 저널<워싱턴 와이어>블로그에 실렸던 다음 기사가 전형적인 사례다.

 

사회 보장국 감사관이 월요일에 발표한 바에 따르면, 사회 보장국은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는 미국인 1,546명에게 3100만 달러의 복지 수당을 부적절하게 지급해 왔다.

설상가상인 점은 그들에 대한 사망 증명 정보를 사회 보장국이 정부 데이터베이스에 제출했으므로, 그들이 이미 죽어서 지급을 중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회보장국도 알고 있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지속되게 내버려 둘까? 답은 간단하다. 공항에 일찍 나가는 데 비용이 들듯이, 낭비를 없애는 데도 비용이 든다. 규칙을 준수하고 늘 경계하는 것은 가치 있는 목표이지만, 모든 낭비를 없애려는 것은 비행기를 놓칠 가능성을 깡그리 없애려고 하는 것처럼 편익을 상회하는 비용이 따르는 일이다. 블로거(이자 수학 경시대회 출신의) 니컬러스 보드로가 지적했듯이, 문제의 3100만 달러는 사회 보장국이 연간 지급하는 총 복지 수당의 0.004%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사회 보장국은 이미 누가 살았고 누가 죽었는지를 굉장히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마지막으로 남은 약간의 실수까지 없애기 위해서 좀 더 노력하는 것은 값비싼 대가가 따르는 일일지 모른다. 우리가 유틸을 헤아릴 경우, 물어야 할 질문은 <왜 우리는 납세자들의 돈을 낭비하는가?>가 아니라 <납세자들의 돈을 얼마나 낭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이다. 스티글러의 말을 빌리자면, 정부가 낭비를 전혀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부의 낭비를 막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이다.(311-312p)

 

 

골턴은 1889년에 쓴 자연의 유전에서 이렇게 썼다. <첫눈에는 역설처럼 보이겠지만, 이것은 이론적으로 꼭 필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자식의 키가 전반적으로 그 부모의 키보다 좀 더 평범하다는 것은 관찰로 분명히 확인된 사실이다.>

따라서 정신적 성취도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골턴의 추론이었다. 그리고 이 추론은 우리의 보편적 경험에 부합한다. 위대한 작곡가나 과학자나 정치 지도자의 자식이 같은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일은 흔히 있어도 명망 높은 그 부모만큼 뛰어난 경우는 거의 없다. 골턴은 훗날 시크리스트가 기업체의 운영에서 밝혀낼 현상을 관찰했던 것이다. 탁월함은 지속되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 평범함이 자리를 굳히기 마련이라는 것을.(392-393p)

 

 

첫 소설로 대박을 터뜨렸던 신예 작가의 두 번째 소설이나, 데뷔 음반이 엄청나게 유행했던 밴드의 두 번째 앨범은 왜 첫 번째만큼 좋은 경우가 드물까? 흔히들 대부분의 예술가는 할 말이 하나뿐이라서 그렇다고들 하지만, 그건 틀렸다. 적어도 꼭 그것만은 아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예술적 성공은 재능과 운의 결합이고 따라서 평균으로의 회귀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다년 계약에 서명하는 러닝백들은 이후 시즌에서 평균 러닝 거리가 이전보다 짧아질 때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그들에게 최후의 1야드까지 안간힘을 쓸 금전적 동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심리적 요인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애초에 그들이 엄청나게 훌륭한 한 해를 보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대형 계약을 따냈다는 점이다. 그들이 이후 시즌에 좀 더 정상적인 수준의 성과로 회귀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기이한 일일 것이다.(395-396p)

 

 

왜냐하면 상관관계는 추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니아신은 높은 HDL 농도와 상관관계가 있고, 높은 HDL 농도는 낮은 심장 마비 발생률과 상관관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니아신이 심장마비를 예방한다는 뜻은 아니다. (...) 상관관계가 추이적이라면, 의학 연구는 지금보다 훨씬 쉬워질 것이다. 우리는 수십 년의 관찰과 데이터 수집을 통해서 수많은 상관관계를 알아냈다. 만일 추이성이 존재한다면, 의사들은 그 상관관계를 줄줄이 잇기만 해도 확실한 효과를 내는 개입 방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성의 에스트로겐 수치와 낮은 심장 질환 발생률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호르몬 대체 요법이 에스트로겐 수치를 높인다는 것도 아니까, 호르몬 대체 요법에 심장 질환 예방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쉽다. 실제로 지금까지는 이것이 임상적 사실로 통했다. 그러나 아마 여러분도 벌써 들었겠지만, 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 현실에서는 우리가 어떤 약이 HDL이나 에스트로겐 수치 같은 생체지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속속들이 알더라도, 그 약이 특정 질병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인체는 어마어마하게 복잡하며, 우리가 인체에 관해서 측정할 수 있는 속성은 한 줌밖에 안 된다. 하물며 조작할 수 있는 속성은 더 적다. 연구자들은 관찰된 상관관계를 근거로 건강에 바람직한 효과를 낼 가능성이 있는 약을 이것저것 떠올린다. 그리고 실험으로 확인해 보지만, 실망스럽게도 대부분은 실패한다.(443-444p)

 

 

여느 과학 도구와 마찬가지로, 수학적 도구는 특정 종류의 현상은 감지하지만 다른 종류는 감지하지 못한다. 일반 카메라가 감마선을 감지할 수는 없는 것처럼, 상관관계 계산은 이 산포도의 하트 모양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니 앞으로 어떤 두 자연적 혹은 사회적 현상이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길 바란다. 그것은 둘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상관 계수가 감지할 수 있는 종류의 관계가 없다는 뜻일 뿐이다.(447p)

 

 

1976년과 2009, 미국 정부는 신종 플루에 대한 대대적이고 값비싼 백신 접종 캠페인을 벌였다. 두 번 다 역학 연구자들이 당시 유행하던 균주가 파국적 전염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 번 다 신종 플루가 심하기는 했지만 재앙에는 한참 못 미쳤다.

이런 시나리오에서 과학을 앞질러 의사 결정을 내린 정책 입안자들을 비난하기야 쉽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틀리는 것이 늘 틀리는 것은 아니다.

어째서 그럴까? 3부에서처럼 간단히 기대값을 계산해 보면, 언뜻 역설적인 이 슬로건을 해독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건강 관련 권고를 발표할까 고민한다고 하자. 예를 들면 가지가 갑작스런 심장 마비 위험을 조금 높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가지를 먹지 말라고 권고한다고 가정하자. 이 결론은 가지를 먹는 사람들이 먹지 않는 사람들보다 돌연사할 가능성이 약간 더 높다는 여러 연구 결과로부터 도출되었다. 그러나 일부 피험자들에게는 가지를 억지로 먹이고 나머지에게는 먹이지 않는 대규모 무작위 통제군 실험을 수행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주어진 정보만으로 때워야 하며, 그 정보는 상관관계만 보여 준다. 우리가 아는 것은 가지 애호와 심장 발작이 공통의 유전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뿐, 그보다 더 확실히 알 도리는 없다.

우리 결론이 옳다는 것, 그리고 가지를 먹지 말자는 캠페인이 연간 1천 명의 미국인을 살릴 수 있다는 가설에 대해서 우리가 75% 확신한다고 하자. 우리 결론이 틀릴 확률도 25% 있는 셈이다. 그리고 실제로 틀렸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제일 좋아하는 야채를 포기하도록 만들고 그럼으로써 전반적으로 덜 건강한 식생활을 하도록 만든다. 그 때문에 가령 연간 200명의 추가 사망이 일어난다고 하자.

늘 그렇듯이, 기대값은 각 가능성에 그에 상응하는 발생 확률을 곱한 뒤 다 더하면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권고는 매년 700명을 살릴 기대값을 가진다. 그래서 자금이 빵빵한 가지 협회가 소리 높여 불평함에도 불구하고, 또한 아주 현실적인 불확실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권고를 대중에게 공개한다.

기억할 점은, 기대값은 말 그대로 당장 벌어질 결과를 뜻하는 게 아니라 똑같은 결정을 거듭 내렸을 때 평균적으로 벌어질 결과를 뜻한다는 것이다. 공공 보건 정책은 동전 던지기와 다르다. 딱 한 번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평가해야 할 환경적 위험이 가지뿐만은 아니다. 어쩌면 다음에는 콜리플라워가 관절염과 관련된다는 사실이, 혹은 진동 칫솔이 자폐증과 관련된다는 사실이 우리의 주의를 끌지도 모른다. 그 경우 매번 정책적 개입으로 연간 700명을 살리는 기대값을 예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매번 개입해야 한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매 결정 당 700명을 살리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어떤 한 경우에서는 득보다 실을 더 많이 끼칠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많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월 회차에 복권을 사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어떤 한 사례에서 잃을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따리라고 거의 확신한다.

만일 스스로가 절대적으로 옳은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좀 더 엄격한 증거 기준을 적용하여 결국 아무 권고도 내리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구할 수 있었을 목숨들을 잃게 될 것이다.(459-461p)

 

 

생명을 위협하는 건강상의 난제들에 대해서 정말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확률을 부여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당연히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확률은 여러 가설에 대한 우리의 신뢰도를 반영하는 혼란스럽고 애매한 수치들뿐이다. R. A.피셔가 아예 확률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던 확률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가지나 진동 칫솔이나 심지어 담배에 대한 캠페인의 기댓값이 정확히 얼마인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러나 가끔은 그 기댓값이 양수라는 것만큼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때도 어떤 한 캠페인이 좋은 효과를 내리라고 확신한다는 뜻은 아니고, 그런 캠페인들의 효과를 다 더한 것이 장기적으로 실보다 득이 많으리라고 확신한다는 뜻이다.(461-462p)

 

 

어쩌면 여러분은 자신이 데이트할 가능성이 있는 남자들 중에서 잘생긴 남자들은 대체로 못됐고 착한 남자들은 대체로 못생겼다는 현상을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얼굴이 대칭적이면 성격이 고약해지는 것일까? 혹은 성격이 착하면 못생겨지는 것일까? 글쎄,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래에 내가 <남자들의 거대한 정사각형>을 그려 보았다.

(그림 생략)

그리고 남자들이 이 정사각형 속에 고르게 분포한다는 가설을 세워보자. 특히 착하고 잘생긴 남자, 착하고 못생긴 남자, 못됐고 잘생긴 남자, 못됐고 못생긴 남자의 수가 대충 다 같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착함과 잘생김은 공통의 결과를 가져온다. 전체 남자들 중에서 그 남자들에게만 당신이 관심을 쏟는다는 결과다. 솔직해지자. 못됐고 못생긴 남자는 애초에 고려조차 안 하는 게 사실 아닌가. 따라서 거대한 정사각형 안에는 <봐줄 만한 남자들의 작은 삼각형>이 존재한다.

(그림 생략)

이제 이 현상의 근원이 분명해졌다. 삼각형 속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들은 착한 사람부터 못된 사람까지 성격의 전 범위를 아우른다. 평균적으로 그들은 전체 인구의 평균만큼 착할 것이다. 그 평균 자체가 그렇게 착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든, 같은 맥락에서 가장 착한 남자들도 평균적으로는 평균 수준으로 잘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못생긴 남자들 중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남자들은, 이들은 삼각형에서 아주 작은 한구석만을 차지하는데, 다들 엄청나게 착하다. 그래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애초에 당신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테니까. 데이트 후보자들의 외모와 성격이 음의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은 엄연히 실재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만일 남자 친구의 외모를 개선할 요량으로 그에게 못된 행동을 하라고 가르친다면, 당신은 벅슨의 오류에 빠지는 셈이다.

문학적 속물근성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여러분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소설들이 다들 얼마나 끔찍한지 아는가? 그러나 그것은 대중이 질을 몰라봐서 그런 게 아니다. 여기에도 <소설의 거대한 정사각형>이 존재하고, 당신이 이름이라도 들어 본 소설은 그중에서도 인기가 많거나 훌륭하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하여 <봐줄 만한 삼각형> 속에 드는 소설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기 없는 소설을 무작위로 골라서 읽어본다면(나는 문학상 심사 위원을 맡은 적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해봤다)그 소설들도 인기 많은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형편없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466-468p)

 

 

영감의 순간은 이전 몇 주 동안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수행해 온 작업의 산물이고, 그 작업 덕분에 우리는 머릿속으로 드디어 여러 발상들을 연결지을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영감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실패의 지름길이다. 당신이 아무리 신동이라도.(534p)

 

 

수학을 오래 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은(그리고 나는 이 교훈이 훨씬 폭넓게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보다 앞선 사람은 늘 있다는 사실이다. 당장 같은 교실에 있든 아니든 말이다.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은 좋은 정리를 증명한 사람을 바라보고, 좋은 정리를 증명한 사람은 좋은 정리를 많이 증명한 사람을 바라보고, 좋은 정리를 많이 증명한 사람은 필즈상을 받은 사람을 바라보고, 필즈상을 받은 사람은 수상자들 중에서도 <핵심>에 속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그런 사람은 또 언제나 죽은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 거울을 보면서 <인정하자, 나는 가우스보다 똑똑해>라고 중얼거리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다. 그런데도 가우스에 비하면 전부 바보인 사람들이 지난 백 년 동안 힘을 합쳐 노력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풍성한 수학 지식을 일구어 냈다.

수학은 대체로 공동 사업이다.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는 거대한 지적 네트워크가 만들어 낸 산물을 각자가 조금씩 더 발전시킨다.(535p)

 

 

수학은 우리에게 원칙적인 방식에 따라 확신하지 않을 방법을 알려 준다. <거참>하고 포기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나는 확신하지 않고, 확신하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며, 확신하지 않는 정도는 대충 이 수준입니다>라고 굳게 단정하도록 해준다. 혹은 더 나아갈 수도 있다. <나는 확신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확신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549p)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참임을 믿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품은 믿음들 각각이 모두 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또한 그는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들 중 일부는, 정확히 무엇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거짓으로 밝혀지리라고 예상해야 한다는 사실도 안다. 요컨대,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각각은 모두 참이라고 믿지만 그중 일부는 거짓이라고 믿는다.(554p)

 

 

낮에는 증명하고 밤에는 반증하는 습관은 수학에만 좋은 것이 아니다. 이 습관은 우리가 품은 사회적, 정치적, 과학적, 철학적 신념에 압박을 가해 보는 수단으로도 유용하다. 낮에는 우리가 믿는 것을 믿자. 그러나 밤에는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명제를 반박하려고 노력해 보자. 대충 해서는 안 된다! 가능한 최대한, 사실은 믿지 않는 명제를 믿는 것처럼 생각해 보자. 우리가 그 시도를 통해서 스스로에게 기존 신념에서 벗어나도록 설득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믿는 것을 왜 믿는지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증명에 한 발 더 다가갈 것이다.(561p)

 

 

수학의 교훈은 단순하다. 이 교훈에는 숫자도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 우리는 그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으므로 감각이 안겨 주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우리의 직관은 형식이라는 외골격을 입었을 때가 입지 않았을 때보다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또한 수학적 확실성과 우리가 일상에서 적용하는 그보다 더 부드러운 확신은 서로 다른 일이라는 것, 가능하다면 우리는 늘 그 차이를 인식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좋은 것이 더 많다고 해서 항상 더 좋아지지는 않음을 이해할 때, 혹은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도 기회가 충분히 많이 주어진다면 자주 일어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볼티모어 주식 중개인의 유혹을 물리칠 때, 혹은 가장 확률이 높은 시나리오만을 고려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들을 다 떠올린 뒤 어느 것이 좀 더 확률이 높고 어느 것은 좀 더 낮은지 고려하면서 결정할 때, 혹은 집단의 신념은 개개인의 신념과 동일한 규칙을 따른다는 생각을 버릴 때, 혹은 여러분의 직관이 형식적 추론이 깔아 둔 도로들을 따라서만 내달리도록 풀어 줄 때, 여러분은 방정식 하나 안 쓰고 그래프 하나 안 그리면서도 수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수단을 동원한 상식의 연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걸 언제 써먹겠느냐고? 여러분은 태어난 순간부터 수학을 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부디 잘 사용하기를.(565p)

 

 

 

조던 엘렌버그, <틀리지 않는 법> , 열린책들

 

 

1. 느낀 점

2. 인상 적인 구절

3-1 틀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지? 느낀다면 그 이유는?

3-2 실패vs성공, 실패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4. 자신이 어려워하거나 싫어하는 영역(과목)? 그 이유는?

5. 자신이 느끼기에 충분히 비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함에도 고치지 않고 여전히 계속 하는 행동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지난주와 중복되니 쇼핑과 관련된 충동구매는 제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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