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8/19

 

 

제임스 설터의 소설 중 처음 읽은 책. 단편집으로 중산층의 색다를 것 없는 삶의 드라이한 모습과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파리 리뷰에서 제임스 설터 본인에게 어떤 책을 쓴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두 권 고르라고 했는데 “스포츠와 여가”와 “가벼운 나날”을 골랐다. 둘 다 장편인데 어떨지 궁금하다.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녁을 함께 먹고 카드를 몇 번 쳤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나 놀라게 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19p)

 

그가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안정적인 것 같은 사람이라도 심각한 위기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악재가 몇 번 연속으로 일어나면 그뿐이었다. 그런 일들은 경고도 없이 일어났다. 때론 손을 쓸 수 있었지만 때론 어쩔 도리가 없었다.(69p)

 

취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건 학습되고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얘기를 가끔 했다.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또 바꿀 수 없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 말하자면 어떤 경험이나 책이나 어떤 인물이 그들을 완전히 바꾸어놨다고들 하지만, 그들이 그전에 어땠는지 알고 있다면 사실 별로 바뀐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상대방이 매력적이긴 해도 완벽하지는 않을 때, 사람들은 결혼한 다음에 전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론 잘해야 한 가지 정도를 바꿀 수 있을 뿐이고, 그것마저도 결국은 예전처럼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99p)

 

그 집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삶을 꼭 닮은 장황한 소설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어느 날 아침 돌연 끝나버리는. 핏자국을 남기고.(186p)

 

 

ㅡ 제임스 설터, <어젯밤> 中,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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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8

 

 

“만”을 읽고 다음으로 고른 책. 형식의 측면에서도 참신했고 소위 ‘악마주의 작가’라고 불릴 정도로 이 작품 말고도 전반적인 작품에서 성과 여자의 미에 대해 논하는 게 신기하다. 게다가 노골적인 묘사와 충격적인 상황설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걸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드러낸다. 특히 6월11일 마지막 일기로 소설의 전 내용을 아우르며 마무리 짓는 장면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덧. 번역계의 상황을 몰라서 하는 소리인지도 모르지만 다른 건 몰라도 작가의 이름은 번역할 때 통일이 되었으면 한다. 타니자끼 준이찌로오는 뭐 어쩌라는 말인지? 부코우스키, 부코스키, 부카우스키 역시 점입가경이다.

 

나는 나의 1월 4일 일기에서 “나는(남편의 일기장을) 절대로 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스스로 정해둔 한계를 넘어서 남편의 마음속까지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내 마음속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듯이 다른 사람의 깊은 마음속을 속속들이 아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내 마음속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깊은 마음속을 속속들이 아는 것”을 좋아한다.(166p)

 

ㅡ 타니자끼 준이찌로오, <열쇠>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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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7

 

 

향기에 반하는 것은 향기를 피워올린 그 순간뿐이고, 술맛에 감동하는 것은 술을 마시기 시작한 찰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충동에도 그와 같은 순간이 존재한다고 믿네. 별다른 감정 없이 그 단계를 지나 상대에게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친밀함은 느껴지지만 이성을 향한 촉각은 점점 마비되는 것 아니겠나.(190~191p)

 

자네, 아직도 기억하는가? 내가 언젠가 자네에게 이 세상엔 나쁜 사람이라고 정해진 인간은 없다고 한 말을. 대부분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한순간에 나쁜 사람이 돼버리니 방심하면 안 된다고 한 말을 말이네. 그땐 자넨 내가 흥분하고 있다고 지적했지. 그리고 어떤 경우에 선량한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변하냐고도 물었지. 내가 한마디로 ‘돈’이라고 대답하자 자넨 영 석연찮다는 표정을 지었잖나. 나는 그때의 자네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네. 지금에서야 털어놓네만, 그 말을 하면서 난 작은아버지와의 일을 떠올렸던 거야. 내 대답은 ...사상 문제를 깊숙이 탐구해 나가려는 자네가 듣기엔 시시했을지도 모르지. 너무 진부한 대답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냉철한 두뇌로 새로운 발견을 입에 담기보다 뜨거운 혀로 평범한 원리를 이야기하는 편이 살아 있는 것이라고 믿네. 피가 돌아야 몸이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야. 진실을 담은 말은 의미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보다 강한 힘을 갖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지.(196~197p)

 

술은 끊었지만 일을 할 생각은 없었지. 일이 없으니 다시 책을 펴드는 수밖에 없었네. 하지만 끝까지 독파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책을 덮기 일쑤였지. 아내는 가끔씩 내게 그렇게 공부를 해서 뭘 할 거냐고 물었네. 나는 슬쩍 웃어 보이기만 했어. 하지만 속으로는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믿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날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생각하니 씁쓸했지. 이해시킬 방법은 있지만, 이해시킬 용기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 더욱 슬퍼졌네.(331p)

 

ㅡ 나쓰메 소세키, <마음> 中, 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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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6

 

 

이 책을 읽음으로써 산시로, 그 후, 문으로 이어지는 소세키의 전기 3부작을 다 읽게 되었다. 완벽하게 이어지는 소설들이 아니고 각 작품들이 독립적으로 훌륭하지만 다 읽고 난 후의 감상은 어차피 다 읽을거라면 저 순서대로 읽는 게 훨씬 몰입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이스케가 스스로 놋쇠가 되는 것을 감수하게 된 것은 갑작스레 엄청난 파란에 휘말려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심기일전하게 되었다는 등의 멜로드라마와 같은 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다이스케 특유의 사색과 관찰의 힘으로 스스로 조금씩 도금을 벗겨온 것에 불과했다. 다이스케는 그 도금의 대부분은 아버지가 덮어씌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금으로 보였다. 많은 선배들이 금으로 보였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은 모두 금으로 보였다. 그래서 자신의 도금이 고통스럽게 여겨졌다. 한시바삐 금이 되고 싶어서 안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금으로 가려져 있던 다른 사람들의 바탕쇠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들여다보고 나니 갑자기 이제까지 매달려 왔던 것이 부질없는 짓으로 생각되었다.(99p)

 

“그럼 극히 고상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지. 진부한 이야기지만, 어떤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어. 오다 노부...나가가 어느 유명한 요리사를 고용했는데, 그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처음으로 먹어보고 너무 맛이 없어서 심한 잔소리를 했다는군. 요리사로서는 최상급의 요리를 만들었는데 야단을 맞자 그 다음부터는 적당히 이류 내지는 삼류의 요리를 주인에게 만들어주었더니 내내 칭찬을 받았다고 하네. 그 요리상의 경우를 보게. 생활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점에서는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자신의 기술인 요리 그 자체를 위해서 일한다는 점으로 봐서는 매우 불성실한, 즉 타락한 요리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108p)

 

영웅의 명성이란 그만큼 변화무쌍한 것이다. 그건 결국 대부분의 경우 영웅이란 그 시대에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는 의미인 고로, 이름만으로는 대단한 것 같지만 본래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중요한 시기를 넘기면 세상은 그 자격을 점점 빼앗으려 든다. 러시아와 한창 전쟁 중일 때야 폐색대란 중요한 것이었지만, 평화를 되찾은 새벽이 되면 백 명의 히로세 중령도 완전히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세상은 이웃 사람에 대해 아주 타산적이지만 영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251p)

 

그는 원래 태도가 불분명한 편이었다. 누구의 명령도 그대로 따른 적이 없는 대신에, 그 누구의 의견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저항해 본 적이 없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약삭빠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처럼 보이기도 하는 태도였다. 그 자신조차도 그 두 가지 비난 중 어느 쪽을 들어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주된 원인은 약삭빨라서도 우유부단해서도 아니고 오히려 그가 융통성 있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서 두 가지를 동시에 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그 능력 때문에 이제까지 외곬으로 돌진하려는 용기를 상실하곤 했다. 그래서 다가가지도 물러나지도 않은 채 그대로 현상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현상을 유지하려는 그의 태도가 생각이 부족해서가아니라 오히려 명백한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가 평소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과감한 태도로 신념을 밀고 나갈 때 비로소 자각할 수 있었다. 미치요와의 경우가 바로 그 적절한 예였다.(304p)

 

 

ㅡ 나쓰메 소세키, <그 후>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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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1

사놓고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읽었다. 아쉬운 점은 영화를 통해 전체적인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로 봐서 몰입도가 조금은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책은 다른 매체이고 다 읽은 뒤의 감상으로는 책과 영화 모두 흥미로웠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언 매큐언 소설들(토요일, 체실 비치에서, 속죄)의 특징은 주제를 점층적으로 쌓아올리는 방식이다. 그래서 읽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의미가 없다. 끝까지 읽어야 한다(다른 책이야 안 그렇겠냐마는). 게다가 묘사가 끝도 없이 길어지는 경우도 있고, 속죄 같은 경우에는 분량도 만만찮아서 초반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난 내용과 반전(?)을 제외하고도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책이다.


그녀가 이렇게 흥분하는 것은 선과 악, 영웅과 악당이라는 피곤한 투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세 사람 중에는 악한 사람도 특별히 선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굳이 교훈이 있어야 할 까닭도 없었다. 단지 타인의 마음도 똑같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애써 기억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살아 숨쉬는 각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66~67p)

언젠가 손님들을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무슨 분야인진 몰라도 과학을 가르친다는 어느 교수가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큰 장식촛대들 위를 날아다니는 벌레 몇 마리를 가리키며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이 벌레들을 빛 속으로 유혹하는 것은 빛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어둠이라고 했다. 벌레들은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빛의 가장자리에 있는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가려는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곤충들 눈에 보이는 빛 속의 어둠은 착시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그의 이런 설명은 궤변처럼, 단지 설명을 위한 설명처럼 들렸다. 어느 누가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것에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그것들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세상사를 그르치는 일이며 쓸데없는 짓일 뿐 아니라 화를 부를 수도 있다. 어떤 일들은 정말로 그렇다.(215p)

ㅡ 이언 매큐언, <속죄>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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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4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31p)

“난 진심으로 제인이 성공하기를 바라거든. 그리고 제인이 내일 그분과 결혼해서 행복해질 확률이나 열두 달 동안 그분 성격을 연구한 뒤에 결혼해서 행복해질 확률이나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결혼에서 행복이란 순전히 운에 달려 있어. 서로의 취향을 아주 잘 알거나, 혹은 서로 아주 비슷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둘의 행복이 더 커지는 건 결코 아니야. 취향이란 건 계속 변하게 마련이라 나중엔 누구든 짜증이 날 만큼 달라지게 마련이야.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의 결점은 될수록 적게 아는 것이 더 나아.”(35p)

그가 한 말이 겨우 그날 저녁 ...비가 오고 있고 장마철이 시작될지도 모르겠다는 것뿐이었음에도, 앉자마자 너무나 붙임성 있게 대화를 시작한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아무리 평범하고 닳고 닳은 주제도 말하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흥미로운 게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109~110p)

“좋다. 이제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네 어머니께서는 네가 그 청혼을 수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신다. 그렇지 않소. 여보?”
“그럼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신 저애를 보지 않겠어요.”
“아주 불행한 선택이 네 앞에 놓여 있다, 엘리자베스. 오늘 이후로 너는 부모 중 한 사람과 남남이 되어야 한다. 네가 콜린스 씨하고 결혼을 하지 않으면 어머니가 너를 다시는 안 볼 것이고, 만일 네가 그 사람하고 결혼을 한다면 내가 다시는 너를 보지 않겠다.”(161p)

전에도 가끔씩 느낀 바지만, 조바심치며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더라도 예상한 만큼의 만족을 오롯이 얻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진짜 행복의 출발점으로 다른 시기를 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의 소망과 희망이 이루어질 그 시점을 정하고, 다시 그것을 기대하는 즐거움을 누림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위로하고, 또 다른 실망에 대비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330p)

한 가지 즐거움만은 확실했으니, 마음 맞는 여행 동반자와 함께한다는 점이었다. 마음이 맞는다는 것은 불편함을 견딜 수 있는 건강한 체질, 즐거움을 더해 주는 명랑한 성격, 밖에서 실망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서로 간에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애정과 슬기를 포함하는 것이었다.(333p)

ㅡ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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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3

매일 대하는 그 많은 책들이 담고 있는 언어가, 단지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들이 내 나날 속으로 전혀, 한치도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 스스로 돌연한 영감이라 여겼던 것이 실은 헛된 언어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나날이 낡아가는 상상력처럼 그 깨달음도 서서히 왔습니다. 작가라는 사람들의 책을 읽을 때면 어찌 이리도 용감한가, 싶을 때가 점점 잦아졌습니다. 그 부류에 내 이름을 보태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훌륭한 소설도 없지 않았지만 저와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자각 정도는 제게 있었습니다. 물론 허망 했습니다. 요트 여행, 그 오랜 꿈이 좌절된다면 남편도 허무해지겠지요. 그렇지만 곧 잊고 살아갈 것입니다. 꿈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요.(29p)

ㅡ 서하진, <요트>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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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2

 

나오키상 수상작 



이십 년 전 옛날 일을 바로 어제 일처럼 되새기는 건 죽은 시어머니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거품 속에 몸을 묻고 있으려니 메구미는 돈이 없어도 행복하다는 착각이 가능했던 그 시절의 자신이 지독히 슬프게 느껴졌다.(109p)

그러고 보니 요즘은 한참이나 부부 싸움도 하지 않았다. 싸우지도 않는 관계에서는 무엇을 밑천으로 화해를 시도해야 할지 알 수 없다.(202p)

행복하게 해주겠다니, 그런 무책임한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웠나? 그런 말은 제대로 먹고살게 해준 다음에 해야지. 행복이란 과거형으로 말해야 빛이 나는 거 아닌가. 앞일은 섣불리 입 밖에 내지 말고 묵묵히 행동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어.(208p)

ㅡ 사쿠라기 시노, <호텔로열>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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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

“표를 사려고 기다리시는 중인가요?”
나는 “아니요, 그냥 줄을 더 길게 만들려고 여기 서 있답니다”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물론 “그런데요”라고만 대답했다.(94p)

지난 한 주 동안 나는 멍청하게 집안을 돌아다니며 농구공이나 큰아이가 달리기 대회에서 탄 트로피, 오래 전의 명절 때 찍은 사진 등을 쳐다보는, 그리고 그 물건들을 통해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을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가장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아들이 여기 없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예전의 그 아이도 영영 가고 없다는 갑작스런 깨달음이었다. 아들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삶은 계속되며, 아이들을 자라서 집을 떠나기 마련이다. 아직 이것을 모르시는 분이 있다면 내 말을 믿으시기 바란다. 아이들이 집을 떠날 날은 여러분이 상상했던 것보다 빨리 온다.(151p)

ㅡ 빌 브라이슨,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 中,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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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7/31

세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가 수용하고 보듬을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논리로도 감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모순투성이라는 것.(234p)

ㅡ 서하진, <비밀> 中,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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