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27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은 문장은 없었다.

지금까지 나온 장류진의 장편 1권과 이번 작품을 포함한 단편집 2권 총 3권을 읽은 감상은 2010-20년대인 현재를 살고 있는 여성들이 겪었거나 공감할만한 일을 소재로 삼아 최대한 핍진하게 묘사하는 걸 목표로 하는 듯하다. 이번 작품 역시 여전히 그런 디테일을 살렸으나 매번 이런 식이니 슬슬 질리기도 한다. 새로운 모습을 보진 못했다.

 

 

 

ㅡ 장류진, <연수>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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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22

 

 

모든 에세이가 그렇겠으나 김초엽 작가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글쎄...

 

 

 

나는 과학에 관해, 과학자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을 존경하지 말자. 개인에게 기대를 걸지도 말자. 한 사람은 언제나 틀릴 수 있고 무수한 오류와 실수를 저지른다. 어쩌다 충분히 신뢰할 만한 누군가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그가 스스로의 오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자가 검증을 멈추는 순간 다시 문제가 시작된다. 합리성은 뛰어난 개인에게 깃드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검증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열린 시스템에서 생겨난다. 과학이 우리가 지닌 많은 질문에 꽤 괜찮은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내놓은 잠정적 결론이 다시 시험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과학의 결론은 언제나 잠정적이다. 그런 생각은 내 안에서 정립하게 됐다.

하지만 좀 더 근본으로 들어가서, 나는 과학이 갖는 합리성에 대해서도 재검토해야 했다.

(...)

이제 사람들은 과학으로부터 유래한 풍요와 안전만큼 위협과 불평등이 존재함을, 과학이 얼마든지 자본 및 권력과 영합할 수 있는 또 다른 ‘사회적’영역임을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과학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일에도 기여했지만 더 나쁘게 만드는 일에도 기여해왔다. 때로 과학은 무언가를 연구함으로써가 아니라 연구하지 않음으로써, 즉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대상을 배제한다.

(...)

한편 기술이 당대의 차별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디지털 알고리즘이 어떻게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반영하는지는 사피야 우모자 노블의 「구글은 어떻게 여성을 차별하는가」가 잘 다루고 있는데, 이와 같은 기술 분야의 데이터 편향은 이전부터 많은 과학기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온 문제다.

(...)

그렇게 내가 합리성의 원천이라고 믿어온 과학의 지위에 균열을 내온 연구들을 접하면서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하는 근본적 틀이라고 여겨왔던 과학이 결국 단점과 오류투성이의, 특별할 것 없는 학문 체계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조금씩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학자 개인뿐만 아니라 과학이라는 시스템도 큰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과학도 인간이 실천하는 활동인 만큼 수많은 오류를 품고 삐거덕거리며 때로는 퇴보하고 이따금 힘겹게 나아간다는 것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과학, 그 자체로 완벽하게 합리적인 과학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과학이 불완전하다는 결론을 내린 이후에도, 아직 나는 과학이 꽤 많은 영역에서 ‘우리가 가진 더 나은 도구’일 수 있다는 견해에 마음이 기울어 있다.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에서 과학기술학자 해리 콜린스와 로버트 에번스는 불완전한 과학의 가치를 옹호하려고 시도한다. 저자들은 과학적 지식이나 그 결과물보다 그것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과학자 공동체가 지지하고 열망하는 가치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정직성, 성실성, 명확성, 개방성과 같은 과학적 가치들이 과학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다.(274-278p)

 

 

 

ㅡ 김초엽, <책과 우연들> 中,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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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17

 

 

희박한 마음, 재, 전갱이의 맛 이렇게 세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돌아오면서 디엔이 예전에 어느 공원에 갔다가 데런이 새로 산 단화가 맞지 않아 발을 절다가 갑자기 폭발했던 일을 환기시켜줬다. 데런도 당연히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먼저 어디론가 나가자고 해놓고 나가서는 늘 그런 꼴이 되곤 했지, 하고 데런이 사과하자 디엔은 늘 이유가 있었잖아, 늘, 하고 말하며 또 그 야릇한 고갯짓을 했다.

가끔 예고 없이 출현하는 그것은 데런의 고질병이었다. 데런은 늘 그것을 어떻게든 저지하려 했지만 그 의지가 생겨났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튀어나온 후였다. 언젠가 디엔은 데런이 화가 나서 이성을 잃기 직전의 표정에 대해 얼음이 타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폭발하기 직전의 데런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약간은 허탈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실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만히 바라본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매우 평온해 보이는데, 그때 아마도 데런 너는 곧 진행될 폭발에 대해 섬광처럼 짧게 숙고하는 것 같다고, 폭발 이후의 미래를 일별하고 그 혹독한 대가를 예감하면서도 그 무서운 미래가 실현되고 말리라는 것을 아는 얼굴이라고,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려는 분신자가 마치 먼 행성의 폭발을 기다리는 천문학자처럼 냉철한 눈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내부의 심연이 균열되는 걸 최후로 관조하는 눈이라고 디엔은 말했다.(102-103p)

 

 

남학생이 끄라고 했다. 데런과 디엔 둘 중 누군가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던 것 같고 둘 중 누군가가 묵묵히 담배를 빨았던 것 같다. 남학생이 다시 끄라고 했다. 못 끄겠다는 디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학생은 끄라고! 끄라고! 끄라고! 소리치며 팔을 드러올려 디엔의 뺨을 내려쳤다.

(...)

데런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오싹하면서도 불구덩이에 들어앉은 듯 후끈한 기운을 느꼈다. 끄라고! 데런은 그때였다고 생각한다. 디엔의 꿈속에서 오래전에 죽은 걸로 등장한 자신이 오래전에 죽은 순간은 바로 그때였을 거라고. 끄라고! 디엔이 얻어맞은 직후에 자신의 기억이 모조리 사라진 건 그때 자신이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는 걸, 완전무결하게 무력했다는 걸 의미한다고. 끄라고! 그 주문은 담뱃불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 그들의 사랑을 향한 것이었다고. 끄라고!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던 자신의 내부에서 고요히 작열하던 무력감이 정신의 어떤 연결 퓨즈를 태워버렸을 거라고. 끄라고! 그 분노와 절망과 공포가 그들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응결시켰으리라고. 끄라고! 못 끄겠다고 말한 건 디엔이었지만 아직도 꺼지지 않는 잉걸이 자신의 내부에 남아 있다고. 끄라고! 끄라고! 끄라고! 꺼지지 않는 그것이 어둠 속에서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고 팔을 휘두르는 거라고!(108-109p)

 

 

저는 잘 모르지만····· 처형이 보시기에 그때까지 민지한테 무슨 문제는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그전까지는 정말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처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과연 단호하게 없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시점까지는 단호히 아무 문제도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해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레고르처럼 민지가 변신이라도 한 걸까. 아니면 자해인 줄 알았는데 피해 학생이었던 혁준이라는 아니처럼, 민지의 문제 또한 완벽하게 위장되거나 은폐되어 있다 터져버린 걸까.(205-206p)

 

 

간단히 정리하자면 힘든 건 크게 두 종류였어, 라고 그는 말했다.

“말을 하지 못해서 겪는 불편함과 말을 하지 말아야 해서 겪는 불편함.”

“그게 달라?”

“달라. 못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차이니까.”

말을 하지 못해서 겪는 불편함은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는 불편함이었다.

(...)

내 복잡한 심사와 상관없이 그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해서 겪는 불편함은, 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말 비슷한 걸 해서 성대를 울리게 될까봐 주의해야 하는 불편함이었어.”

(...)

“그런데, 사람은 또 적응을 하게 되더라고. 말을 못해서든 하지 말아야 해서든, 모든 게 익숙해지니까 견딜 만했어. 별로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어. 정작 힘든 건·····”

(...)

“그러니까 사람은, 사람이란 존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그렇게 감각하는 자체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더라고. 내가 지금 이걸 느낀다, 하는 걸 나에게 알려주지 못하면 못 견디는 거지, 어떤 식으로든 내 느낌과 생각을 내게 전달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감각이나 사고 자체도 그 자리에서 질식해버리고 마는 것 같았어.”

나는 잠깐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말이란 게, 하고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 위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와 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그동안 난 쉴새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해왔는데, 그 말을 사실 나도 듣고 있었던 거지. 그런 의미에서 말은 순수히 타인만 향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던 거야. 그런데 말을 못하게 되면서 타인을 향한 말은 그럭저럭 포기가 되는데 나를 향한 말은, 그건 절대 포기가 안 되더라고.”(237-241p)

 

 

 

ㅡ 권여선, <아직 멀었다는 말>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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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19

 

 

20세기 초 여론조사가 유행하기 시작한 이래 미국에서 목격된 중대한 변화의 약 절반이 동성 결혼에 대한 여론 변화처럼 단기간에 일어났다. 낙태, 베트남전쟁, 인종차별 및 여성차별, 투표권, 흡연, 마리화나 등 주요 이슈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꽤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이들 사안에 대한 논쟁은 작은 집단에서 큰 집단으로, 가정에서 의회로 퍼져나갔고, 그러다 갑자기 여론의 정체 상태가 깨졌다. 여론이 너무나 빠르게 반전돼서, 만일 사람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몇 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흥분하면서 과거의 자기 자신과 논쟁을 벌일 것이다.

나는 끊임없는 논쟁과 뒤이어 일어나는 변화를 단속평형설 관점에서 보았다. 생물학 이론인 단속평형설은 생물이 변화할 능력을 지니고 있으나 그럴 만한 자극이 없을 때는 오랜 기간 거의 변화가 없다가 환경에 적응할 필요성이 커지면 진화 속도가 빨라진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긴 시간을 놓고 보면 오랫동안 진화하지 않는 평형 상태가 유지되다가 간간이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패턴이 나타난다. 나는 사회적 변화와 혁명, 혁신의 역사에도 동일한 패턴이 나타난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현상 뒤에 깔린 인간 심리를 더 깊이 알아보고 싶었다.(17-18p)

 

 

그러나 타인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때 당신의 의도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양쪽 모두 ‘내가 옳고 당신이 틀렸다’는 태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나는 왜 그들의 마음을 바꾸고 싶은가?’ 책을 읽는 동안 이 질문을 계속 상기하길 바란다.(22p)

 

 

“뛰어난 논거나 확실한 정보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바꾸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들 ‘스스로’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되돌아보고, 전에는 전혀 고려해보지 않던 측면을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스티브는 이젤 옆에 섰다. 거기에는 로라가 3단 케이크를 그려놓은 종이가 걸려 있었다. 원뿔처럼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케이크였다. 그는 케이크 상단에 초가 꽂힌 가장 작은 부분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라포르rapport’라고 적혀 있었다. 그보다 좀 더 큰 아래층에는 ‘나의 이야기’, 가장 큰 맨 아래층에는 ‘상대방의 이야기’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대화할 때 이 그림을 늘 기억하라고 당부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최대한 적게 해야 한다고, 즉 친근함을 심어주고 뭔가를 강요할 의도는 전혀 없다고 전달할 만큼만 해야 한다고 했다. 상대방 이야기에 진심 어린 관심을 보여야 그들이 방어적 태도를 내려놓는다. 그는 케이크 2층을 가리키면서 ‘가끔 여러분 자신의 경험담이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했지만, 상대의 이야기가 주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자신의 생각에 대해 생각해보게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66-67p)

 

 

브룩먼과 칼라에게 딥 캔버싱의 심리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실마리를 알려달라고 청하자, 그들은 정교화라는 심리적 전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교화란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 지식과의 연결점을 찾음으로써 새로운 정보를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적극적 학습 상태를 말한다.

(...)

보통 습관적 사고 및 행동을 수행하거나 일상적 작업을 할 때 깊은 사고 없이 직관적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 그리고 대부분 이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뇌는 정확성을 포기하고 정보를 빠르게 처리하는 것을 선호하는 특성 탓에 종종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만일 반사적으로 드는 생각과 직관적 판단에 스스로 중지 버튼을 누르고 자기 자신의 견해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뇌는 정교화 작업에 유리한 상태가 된다.

(...)

요컨대 딥 캔버싱은 사람들에게 잠시 멈춰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므로 뇌의 정교화 프로세스를 촉진할 가능성이 크다.

플라이셔는 대부분이 이처럼 깊은 사고를 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일상의 책무와 문제가 인지적 자원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녀에게 점심값을 챙겨줘야 하고, 일터에서 성과 평가를 받아야 하고, 자동차를 누가 정비소에 맡길지도 정해야 한다. 내적 성찰과 숙고의 기회가 없으면, 관심 있는 이슈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자신감을 계속 유지하게 된다. 그런 과도한 자신감은 확신으로 바뀌고, 그 확신을 토대로 극단적 견해를 지지하게 된다.(93-94p)

 

 

우리가 보는 내용을 확신하지 못하거나 낯설고 모호한 대상을 만나면 ‘사전 확률’을 이용해 모호한 요소를 제거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사전 확률은 원래 통계학 용어지만, 과거 경험에 비춰볼 때 현재 외부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뇌가 가정하는 내용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런데 뇌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파스칼과 카를로비치가 말하는 ‘상당한 불확실성’에 해당하는 상황을 만나면 뇌는 자신의 경험을 이용해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해야 마땅한’ 것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 새로운 상황을 만나면 뇌는 대개 자신이 보게 되라라고 예상하는 것을 본다.

파스칼은 이런 현상이 색각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스웨터가 어두운 옷장 안에 있는데도 초록색이라고 말하고, 구름 낀 밤하늘 아래 있는 자동차를 파란색이라고 말한다. 이는 달라진 조명 조건이 익숙한 사물의 외양을 변화시키면 뇌가 스스로 사물의 색을 보정하기 때문이다.

(...)

그릇에 빨간 딸기들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사진에는 빨간색 픽셀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사진을 보는 당신의 눈에는 빨간색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뇌는 이 사진이 파란색 빛에 과다 노출되었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뇌 스스로 파란색을 덜어내고 약간의 색깔을 추가한다. 다시 말해, 당신은 딸기를 보고 빨간색으로 느끼겠지만 그 빨간색은 사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당신이 어릴 때부터 딸기를 먹어봤고 지금껏 살면서 본 딸기가 빨간색이었다면, 딸기라는 익숙한 형태를 본 순간 당신의 뇌는 그것이 ‘당연히’ 빨갛다고 가정한다. 이 사진에서 당신이 본 빨간색은 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험으로 형성된 가정이며, 시각체계가 사실이어야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무언가를 당신에게 제공하기 위해 한 거짓말이다.(120-121p)

 

 

우리는 모호해 보이는 새로운 정보를 마주치면 자신도 모르게 과거 경험을 토대로 모호함을 해소한다. 하지만 인생 경험이 다른 개인은 서로 매우 다른 방식으로 모호함을 해소할 수 있고 따라서 매우 다른 주관적 현실이 생겨난다. 그리고 상당한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런 프로세스가 진행되면, 우리는 현실 자체를 놓고 격렬하게 논쟁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양쪽 모두 그런 논쟁에 이르게 된 뇌의 프로세스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과 관점이 다른 상대편이 틀렸다고 믿는다.(124p)

 

 

파스칼과 카를로비치가 추측한 내용은 이랬다. 분홍색 크록스와 흰색 양말을 조합한 뒤 녹색 불빛을 비추면 크록스는 식물 재배실에서처럼 회색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흰색 양말은 녹색 빛을 반사하므로 녹색으로 보인다. 만일 양말이 녹색으로 염색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조명에 별다른 특이점이나 문제가 없다고 추측하고 아무런 뇌 내 보정 없이 이미지를 보이는 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양말이 흰색일 것이라 예상하고 흰색으로 보는 경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뇌가 과다 노출된 녹색 빛을 덜어내고 분홍색을 추가하는 식으로 이미지를 보정할 것이다. 만일 그들의 추측이 옳다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어떤 가정을 하느냐에 따라 같은 사진을 다르게 볼 것이었다.(128-129p)

 

 

‘사람들은 모든 면을 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지만 틀렸다는 말은 듣기 싫어한다. 아마도 그것은 본래 사람이 모든 것을 볼 수는 없고, 우리의 감각이 인지하는 것은 항상 진실하기에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에서는 본래 틀릴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타인의 머리에서 나온 이유보다 자신이 찾아낸 이유에 더 잘 설득당한다.’

(...)

뇌는 불확실한 세계를 경험하고 처리하기 위해 수많은 가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파스칼은 설명했다. 보통 이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사실 수백만 년 동안 그래왔다. 문제는 우리가 그 가정들을 과도하게 적용할 때 발생한다. 파스칼은 이를 타이핑할 때 자동 수정 기능의 제시어를 무조건 다 받아들이는 데 비유했다.

“우리는 그걸 넘어서야 합니다. ‘나도 당신도 SURFPAD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메타적 수준으로 올라섭니다.(138-139p)

 

 

파스칼과 카를로비치의 연구는 상대에게 반박 증거를 제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사람들이 각자의 결론에 어떻게 도달했는지 묻고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타인이 나와 다른 사전 경험과 가정, 프로세스를 이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와 타인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공동체에서 다른 문제와 목표, 동기, 관심사를 갖고 산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서로 다른 경험을 지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내가 타인과 같은 경험을 한다면 그 사람과 같은 의견을 가질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특정 이슈가 논쟁적 이슈가 되는 것은 우리가 선택이 아닌 무의식 차원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모호함을 해소하는 탓이다. 이 사실을 알면 ‘인지적 공감’이 가능해진다. 즉 타인이 보는 진실이 무의식적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파스칼과 카를로비치에 따르면, 그보다 현명한 방법은 양측 모두 상대방이 결혼에 이른 과정, 즉 상대방이 ‘어떤’ 견해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런 견해를 갖게 되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다.(140p)

 

 

뇌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에 인과적 해설을 구축할 때 현실에 구멍이 생기면 임시 설명으로 그 구멍을 메운다. 문제는 그런 구멍을 메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뇌가 동일한 보완물을, 즉 당장은 유효해 보이는 설명을 똑같이 사용할 경우,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공유하는 임시 설명이 합의된 현실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참과 거짓에 대한 상식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향 탓에 수백 년간 모두가 공유하는 이상한 믿음이 생겨나곤 했다. 그것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합의된 현실이었다.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기러기가 나무에서 자란다고 믿은 것이 그 예다.(158p)

 

 

쿤과 피아제는 다른 용어와 메타포를 사용했지만 둘이 내린 결론은 유사하다. 두 사람 모두 사람들이 마음을 바꾸는 과정과 과학에서 새로운 이론이 기존 이론을 대체하는 과정이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예상과 일치하지 않는 실험 결과, 즉 기존 지배적 모델에 들어맞지 않는 결과가 나오면 과학자들은 그 변칙 현상을 임시 바구니에 담아 둔다. 그리고 기존 모델의 도구를 사용해 계속 문제를 연구한다. 나중에 변칙 현상이 쌓여 넘치면 그 ‘미결 바구니’로 돌아가 살펴보기로 한다. 기존 모델과 새로운 현상의 부조화가 관찰되는 초반에는, 모델에는 문제가 없지만 측정 방법이나 연구 도구에 오류가 있거나 과학자가 실수를 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미결 바구니에 변칙 현상이 쌓이기 시작해 어느 시점에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양이 된다. 경험 법칙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는 것은 곧 규칙이 있다는 증거라는 말이 유효성을 상실한다. 변형 사례들이 변형 사례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정관념을 드러낸다.(181p)

 

 

용어야 어떻든 사회과학 분야의 최신 증거는 인간이 옳은 행동을 하는 것보다 집단의 훌륭한 구성원이 된느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분명히 알려준다. 그래서 좋은 구성원이 되고 싶은 욕구를 집단이 충족시키는 한, 우리는 잘못된 행동을 기꺼이 택하곤 한다. 다른 구성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말이다.

(...)

그래서 우리는 자기 정체성의 일부가 된 견해가 새로운 견해에게 도전을 받으면 강한 위협감을 느낀다. 우리를 집단의 구성원으로 만들어주는 견해를 가질 때, 우리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부족의 일원으로서 사고한다. 우리는 집단 내에서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여겨지길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여겨지기 위한 평판 관리가 종종 많은 다른 관심사보다 중요해진다. 심지어 목숨보다 말이다.(244-245p)

 

 

그는 먼저 상대에게 틱택 한 통에 담긴 캔디의 개수가 홀수 아니면 짝수여야 한다는 데 동의하느냐고 묻는다. 사람들은 대개 그렇다고 답한다. 가끔은 둘 다 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어느쪽이든 그는 어떤 방법을 이용해 캔디 개수에 대해 결론을 내릴 것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답변을 들은 뒤 이렇게 묻는다. ”만일 당신이 캔디 개수를 세어보고 홀수라는 결론에 내렸는데, 다른 누군가가 짝수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만일 그 사람이 그것이 ‘그 자신이’믿는 진실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325p)

 

 

이들의 목표는 타인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더 엄밀하고 정확하게 사고하는 법을, 확신이나 의심에 도달하는 더 나은 방법을 사람들이 발견하게 돕는 것이 목표다. 대화의 초점은 사람들이 ‘무엇을’믿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왜’믿는지에 맞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사람들 각자의 인식론을 바꾸게 유도하는 과정이 실제로는 그들이 마음을 바꾸는 것 같았다. 이 기법은 그들 뇌 안의 무언가를, 믿음과 태도, 가치관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바꾸고 있었다.(329p)

 

 

ㅡ 데이비드 맥레이니,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방법> 中, 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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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16

 

 

읽기 시작 한 초반부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시점인지 헷갈려서 더듬더듬 읽어나갔는데 점차 익숙해졌다. 소설 내내 적당한 의외성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아귀가 맞게 진행되어 솔직히 조금 감탄했다. 재미만 놓고 본다면 근자에 읽은 책 중 가장 만족스러웠다.

 

 

 

“들키고 나니 알겠더군요.” 보일 씨가 자조했다. “제 취미는 여장이 아니라 사생활이었다는 걸요.”

보일 씨가 원했던 건 여자 옷을 입는 게 아니었다. 아내와 자식들이 모르는 어떤 것,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어떤 것을 원했다. 사생활을 원했다. 여섯이 살기에 집은 좁았다. 인구밀도가 너무 높았다. 보일 씨는 은협과, 아니면 대연과, 아니면 중연과, 아니면 소연과, 아니면 민희와 끊임없이 마주쳐야만 했다. 회사에서 지쳐 돌아와도 쉴 수가 없었다. 일하고 돌아오면 또 일이 기다렸다.(156p)

 

 

 

ㅡ 장진영, <취미는 사생활> 中,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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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8

 

 

책 제목만 봐서는 읽기는커녕 집어들 생각조차 안했을테지만 추천사에 낚여 읽어봤다. 제목에 저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지만 아마도 이 책은 저자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어땠냐고? 책 제목에 걸맞은 감성 넘치는 일기장 같은 글이었다.

 

 

 

매일 여행 다큐멘터리를 보며 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해놓고 이렇게 말하려니 민망하지만 사실 진짜 여행에는 별 흥미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어떻게든 비행기 티켓을 끊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데, 나는 거실 소파에 누워 <세계테마기행> ‘오! 멋진 데이’를 보며 “오! 멋진데~” 감탄하는 것까지가 딱 즐겁다.(30-31p)

 

 

그러니까 그건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나를 아프게, 슬프게,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지나도 서로의 곁에 남아야 하는 사람들. 좋든 싫든 아직은 남이 될 수 없는 사람들. 주고 받은 실망을 투명하게 드러내선 안 되는 사람들.

그들의 가장 별로인 부분까지도 너그럽게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뻔뻔해지지도 용감해지지도 못하고 당황한다. 나 역시 그들에게 숱한 실망감과 참담함을 안겨주었을 텐데. 그 서글픈 순간을 그들은 어떻게 견뎌왔을까? 하지만 정말로 물어볼 용기는 없다. 우리는 아직 아주 많은 날을 우리로 살아야 하니까. 그 사실이 가끔은 막막하다. 그런 날이면 모르는 사람들이 간절히 그리워진다.(50-51p)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치매라는 건 젊은 시절 어떤 공포를 가지고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병인 것 같았다. 싸구려 인조가죽이 벗겨져 군데군데 노란 스펀지가 드러난 보호자용 간이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용감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최고로 용감해서 무서운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혹시 내가 언젠가 치매를 앓게 됐을 때 치과나 벌레, 가난, 출퇴근 시간의 만원 지하철 같은 것들에 대해 끝없이 떠들까 봐 두려웠다. 만날 때마다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사람에게 매번 성실하게 반응해주는 것은 웬만한 애정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다. 노인이 되었을 때 그렇게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확실히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랑은 독과점을 전제로 하는 사이에서나 가능한 법인데 나는 그런 류의 관계맺음에 무능하고 게으르니까.(127-128p)

 

 

 

ㅡ 하현,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 中, 비에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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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15

 

 

아무리 차근차근 생각해보려 해도 추모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내 정신은 급격히 혼탁해지고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36p)

 

 

엄마, 나는 미래완료라는 말이 그렇게 슬퍼. 언제부턴가 난 알았던 것 같아. 엄마가 집을 나갈 거라는 걸. 엄마가 나간 다음에 나 혼자 엄마 없이 살 거라는 걸. 나 고2 때 엄마가 진짜 이혼하고 나갔잖아? 내가 상상한 그대로 미래완료가 된 거야. 나 혼자 집에 있고 엄마는 집에 없고. 그렇게 될 줄 다 알면서 모른 척 살아온 거 같았어. 그러고 얼마 안 있다가 더 나쁜 미래완료가 생겨난 거야. 아직 안 일어났지만 일어난 것 같은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미치겠어. 어느 날 엄마가 죽고 없는데 나 혼자 낯선 길 위에 서 있는 거야. 어떤 때는 캄캄한 방에 누워 있는데 엄마는 죽고 없는거야. 그러면 가슴이 아파서 도저히 숨을 못 쉬겠어.

(...)

알아. 엄마 보면 날 사랑하는 거 맞아. 날 사랑해서 힘든 게 보여. 나도 엄마 사랑해. 그래서 힘들어. 근데 엄마, 내가 머리가 나빠서 잘 모르는 거야? 사랑하는 게 왜 좋고 기쁘지가 않아
?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는데, 미워하면 되는데, 왜 우린 사랑을 하고 있어? 왜 이따위 사랑을 하고 있냐고.(77-78p)

 

 

무엇보다 마리아가 말하는 동안 뿜어져 나오는 숨결 냄새가 지독해 베르타는 토할 것 같았다. 시큼하고 구린 구취에 베르타는 엉겹결에 마리아를 밀쳤고 마리아는 뒤로 밀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

거기까지였다고 베르타는 생각했다. 그날 저녁까지만이었다고. 남편이 죽고 나서 자신이 제법 철이 들고 너그러워졌다고 확신할 수 있었던 때는, 불안과 초조와 결벽에서 벗어날 수 있고 기쁨에 젖어 기도를 올릴 수 있으리라는 섣부른 믿음을 품었던 때는 봄 바자회에서 마리아를 만나 함께 태극기를 팔러 갔던 그날 저녁까지만이었다고. 불과 한 달 정도밖에 안 되는 그 잠깐 동안뿐이었다고. 눈을 찌른 여자의 양산이 싸구려가 아니었다면, 마리아의 구취가 진통제의 부작용으로 인한 오심과 구토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베르타는 비웃듯이 입가를 비틀었다. 조금 전 성당 안뜰에서 그들은 당장 내일이라도 빅토르의 병원에 달려가 봉사할 듯이, 앞다투어 소피아의 입양을 주선할 듯이 떠들어댔지만 내일이 되면 그들 중 누구도 마리아의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조금도 믿지 않으면서 무엇을 위해 그런 허튼소리들을 내뱉은 것일까.

베르타는 가을 저녁의 찬 기운에 오싹함을 느꼈다.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었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 베르타는 카디건 앞섶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113-114p)

 

 

지도교수인 박선생은 오익이 논문에서 간과한 부분을 오익 스스로 알아채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를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자신이 알아챘다면 간과했겠는가. 마찬가지로 오익은 오숙이 얼마만 한 분노가 있었기에 자신을 ‘너’라고 부르며 의절을 통보하는 문자를 보냈는지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는가.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차라리 자신이 딸이었다면, 모든 걸 희생하고 차별받고 살아온 그런 존재였다면 오숙처럼 무섭게 돌변할 기회라도 있었으련만, 그는 한없이 억울했고 뭔지 모를 어떤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199-200p)

 

 

자다 가끔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날 때가 있다. 누구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그 처참한 비열함이라든가 차디찬 무심함을 어느 정도 가공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그렇게 했다. 경서와 내가 멀어지게 된 데 특별한 이유나 계기는 없었다고 생각했으니까.

(...)

하지만 어느 순간 번쩍 몇 가지 일들이 떠오르면서, 그것들이 뜻밖의 별자리를 만들면서 내 정신은 깊은 어둠과 무지에서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났다.(230p)

 

 

 

ㅡ 권여선, <각각의 계절>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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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14

 

 

발췌하며 읽고 있는데 읽고 싶은 책이 많아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리네. 우선 여기까지 기록해야겠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지위 상징을 사기 위해 멍청하고 비논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까? 아마도 최고로 부유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소득 계층의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이와 비슷한 선택을 하리라고 짐작된다. 우리는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한다. 그저 심리적으로 보상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적절한 시점에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취업이냐 실업이냐, 나쁜 일자리냐 좋은 일자리냐, 혹은 집이냐 노숙자 쉼터냐 등의 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도 K마트에서 살 수 있는 저렴한 옷만으로도 단정한 복장은 갖출 수 있다는 글을 트위터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정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단정해 보이는 것은 사회적 예의의 최소 조건이다. 냄새를 풍기지 않는 깨끗한 몸에 더럽거나 해지지 않은 셔츠와 신방 등을 착용하면 단정하게는 보인다. 단정한 용모만으로도 인간으로서 위엄을 잃지 않고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거나 성공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다. 나이 들어가는 히피 출신 백인은 한때 반항심에 길렀던 머리를 자르고 기업의 고위 임원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나이 들어가는 블랙팬서 대원은 그들이 혁명으로 뒤엎고 싶어 했던 대상들이 찍은 낙인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단정한 용모는 상대적인 개념이고, 삶이 그렇듯 공정하지도 않다.(186-187p)

 

 

가난한 사람들이 잘못된 결정을 내려서 애가 터진다는 투의 발언의 저변에는 우리처럼 열심히 일하고 가난하지 않은 현명한 사람들은 절대 그들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우리는 더 나은 판단을 할 것이다. 우리는 돈을 아끼고, (...) 우리가 잊고 있는 (그러나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은) 진실은 사회적 위상과 부의 창출과 희생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우리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가난하지 않다는 사회적 위상을 바꿔보면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이 변화한다. 그 누구도 실제로 가난해지기 전까지는 가난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가 없다. 가끔 돈이 없거나, 예전에는 가난하지 않았다가 가난해졌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가난하게 태어나서 이후로도 계속 가난하게 살 것이 확실한 사람들, 관료와 문지기와 좋은 의도에서 누가 품위 있고 점잖은 사람인지 판단하는 사람들로부터 타고나기를 가난한 사람이라고 취급받는 그런 가난 말이다. 그런 처지에 처해지기 전에는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그것을 사지 않을 수 있는 여유가 없다.(190-192p)

 

 

 

ㅡ 트레시 맥밀런 코텀, <시크THICK> 中,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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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8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그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된다. 2020년 여름의 비 피해가 그랬다.

(...)

이재민대피소 수용 인원 중 80퍼센트 이상이 이주노동자였다.(24-25p)

 

 

이 권고에는 사업주가 노동자에게 직접적으로 기숙사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노동자는 사업주의 통제 아래 놓일 수밖에 없는 데다 고립된 지역에 살게 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사는 집은 사업장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시설들과도 가깝고, 주거, 상업, 산업 시설과 서로 연결된 마을이나 도시가 적합하다고 나와 있다. 많은 이주인권단체 활동가들도 이주노동자가 마을에서 선주민(내국인)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지만 현재 마을에 위치한 ‘상시 주거 시설’의 월세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너무 비싸다. 사람이 살 만한 곳에서 내국인들이 내는 만큼 월세를 내는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42-43p)

 

 

오랜 기간 임금 체불을 당했다고 하면 일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될 때까지 버텼냐고 되물으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은 피해자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의 잘못을 탓하는 부적절한 반응이다. 문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재구성해야 한다. 어떻게 고용주는 이주노동자에게 3년 넘게 월급을 주지 않고 붙잡아놓을 수 있었을까? 왜 그동안 이주노동자는 도움을 받을 수 없었을까? 외국인 인력 수급을 관할하는 고용노동부는 임금 체불 문제에 어떤 대책이 있는가?(51p)

 

 

고용노동부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은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엄격히 제한되어 있는데, 쓰레이응 씨처럼 임금 체불을 당한 경우, 고용주가 근로계약 해지에 동의하지 않아도 사업장을 변경해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이를 모르는 노동자가 많다. 정보 접근성이 너무 떨어져 제대로 된 제도가 있어도 제도에서 배제되는 것이다.(54p)

 

 

 

ㅡ 우춘희, <깻잎 투쟁기> 中,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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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2

 

 

 

또또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시선이 없으면 한 순간도 견디지 못했다.(111p)

 

 

그러나 대충 줄거리는 그랬고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 죽었지만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빨리 더 많이 죽는다고, 그건 우연이고 팔자이지만, 형편 때문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어머니는 했다. 형편이 안 좋으면 다 안 좋다. 어머니가 말했다. 우야겠노. 어머니의 형편은 경제 사정이나 계급이 아니었고 성격이나 가족 관계도 아니었으며, 운명, 사주도 아닌 그것들이 어찌 어찌 돌아가는 형세 같은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걸 좋게 만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형편이 어느 정도여야 좋은 건지, 어머니는 이 정도면 당신의 형편이 좋은 거라고 종종 생각하기도 했다. 형편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형편은 비교라는 걸,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사람에겐 형편이랄 게 없고, 사회가 형성되고 그것들이 어떤 관계를 이룰 때 존재한다는 걸.(184-185p)

 

 

ㅡ 정지돈, <인생 연구>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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